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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훗!」
「그렇게 좋으신가요? 그 청년을 만난 후로 굉장히 유쾌하신 듯 해요.」
「하핫! 그렇게 보입니까?」
미식가들이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진미를 실컷 먹은 후의 만족감과 흥분이랄까.
연신 피식, 후훗, 낄낄하고 번갈아대며 웃어대는 그를 여인은 조용히 따르며 곁
눈질했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어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 대답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까?」
「질문 자체가 정답이 없어요. 엘시크는 썩어있는 물, 그리고 백성이나 귀족 모
이미 썩어있는 물에 적응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죠. 어느 쪽을 바꾸던지 나머지
는 반항하거나, 또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그대는 정답이 없는 질
문을 한 겁니다.」
예지로 눈을 빛내며 여인이 대답하자, 남자는 바쁘게 걸어가는 도중에도 껄껄댔
다.
「아닙니다. 정답은 있습니다. 서민들을 바꾸는 것입니다. 귀족을 바꾸지 않는
한 엘시크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대답은 맞죠. 하지만 그
대가 말한 것 같은 어려움이 따를 겁니다. 또 서민들을 구제하는 정책 또한 귀
족들의 부담이 커질텐데 그들이 가만히 있을리도 없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정책이라는 테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가능성이 없는 겁니다. 서민의 삶
을 직접 구제한다는 것은 기술의 실생활 도입만으로도 가능하지요. 물론 추상
적인 학문의 발전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그 성장은 느리겠지만 충분히 실생
활 기술은 그 자체만으로 발전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시즈 라는 청년은 완전히 반대로 말한 것이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틀린 답이라고 해도 실행에 옮길 수 있다면 정답을 대신
할 수 있어요. 그는 신념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같습니다. 혼란이 올 겁니다.
아주 재미있는 운명의 장난처럼….」
사내는 눈을 찡긋해보이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저, 정말 아까 그 남자가 한 말이 사실인가?」
토루반이 시즈를 미행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기로 하고 얼음과자 가게로 뇌물
을 준비하러 간 사이 왕자와 시즈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의 벤치에 앉아 조용히 흐르는 물을 보고 있었다.
「어떤 말을 가리키시는 것인지?」
「그대가 원탁으로 추대되었다는 것 말이야.」
〈마땅찮은 영광〉이라는 불손한(?) 이름과는 달리 시즈는 데미노머가 신분을
밝히자 매우 공손했다. 대답할 때조차 약간씩 머리를 앞으로 숙이는 것이 원탁
으로 추대된 이가 가질만한 프라이드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겸손한 것 같다고
왕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공손하고 깨끗한 행동과는 다르게 말투는 매우 직선
적이어서 잘못 생각하면 비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살 정도였다.
「사실이긴 거절했습니다.」
「에? 정말루? 아스틴네글로드는 대륙적으로 알아주는 학문 연구기관이고, 원
탁의 7인이라고 하면 국제적인 현자로서 성공한거나 다름없어. 뭐…. 물론 일
많고 월급은 조금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하자만… …」
그 후에 말은 시즈의 머리 속에 접수되지 않았다. 돈은 많이 주고 일 적게 시
키는 곳이 청년의 희망직장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후에 아스틴네글로드에서 초
청하는 일이 있거든 철저히 거절하리라는 다짐을 꽉진 주먹으로 다부졌다.
「여기 얼음과자 사왔다. 이런 것을 먹다니 완전히 어린애로군.」
얼굴을 찡그리며 작은 산처럼 쌓여있는 맛나는 얼음과자를 내미는 조그마한 드
워프가 할 말이 아니었지만 본인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시즈 자네, 시크에 돌아가면….」
「그것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토루반. 난 정치에 끼어들 생각이 없으니
까요.」
「하지만 그대는 분명….」
「전하, 꼭 나라를 구하는 도구는 정치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제게 지식을 사
회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를 물었지, 어떤 정치를 할 것이냐고 묻지는 않았
습니다.」
왕자의 푸른 눈동자에는 검무튀튀한 비늘색의 능구렁이 한 마리가 혀를 내밀고
하늘을 약올리는 모습이 비췄다. 아직 젊은 놈인데도 불구하고 몇 천년은 묵은
녀석처럼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이 위엄스러웠다.
「멋진 말이로군. 그런데, 시즈? 아릴에게 가는 건가?」
「예, 과자 좀 가져다주려고….」
과자봉지를 잡은 상태로 품 속에 넣었던 손을 꺼낸 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데
미노머도 야릇한 모습으로 뭉그러져있는 봉지 안에 과자는 부스러기가 되어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냥 맨몸으로 얼굴이라도 보러갑니다. 걱정이 되니까 문병이라도.」
멀쩡히 말했지만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고여 그의 상심을 대변해주었다. 비틀거리
면서도 용케 중심을 잡으며 걸어가는 시즈의 등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교환한 드워프 현자와 왕자는 뒤를 쫓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청년이 꼭 정치에 껴들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겠어요? 학문만 연구하
고 책이나 출판하면서 귀족들의 의식을 돌리는 식으로….」
「피브드닌처럼 말이지요?」
남자의 은근한 말에 여인은 화끈 달아올라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가벼운 장난에
반응이 너무나 열렬하자 도리어 무안해진 사내는 갑자기 더워진 햇볕을 원망하며
땀을 연신 닦아대고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그런 생각으로 대답을 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굉장히 영리한 청년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난 별을 보면서 모든 이의 운명은 대략
적으로는 점칠 수 있어요. 곧 별빛이 서로 얽혀 혼탁하 시기가 오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밝게 빛나는 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더욱 불태워야 할 겁니다. 그 청년
은 빛날 겁니다. 자신을 태움으로써…. 후훗, 이러니까 재밌지 않겠습니까?」
양쪽 미행자 일행이 약간은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을 무렵,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한 장년의 사내는 골목길에 놓인 그릇에 작은 동전을 던졌다.
그리고 비굴하게도 보이는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 저기 골목 밖으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