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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하하핫! 뭐야? 골목길에서?」
골목길에서 헤매던 피브드닌을 주워온 것은 네메이나였다. 배를 움켜잡고 바닥
을 온통 뒹구르는 토루반은 방문이 열려있다는 것도 모른 채 계속 굴러갔다. 피
브드닌이 문을 닫자 가구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굵직한 신음소리가 아련히 메아
리쳤다.
계단까지 굴러간 모양이다.
「고생 많으셨군요, 피브드닌.」
끼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방향치인 사내의 어깨를 토닥거리
며 잠시 시즈는 〈미행자 때문에 골목길로 들어가긴 했지만, 토루반들이 오지
않았다면 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을까?〉하는 끔찍한 상상을 떠올려 보았다.
격동이 지나쳤는지 너무 세게 두들기고 만 시즈는 아파하는 동류를 거들떠도 보
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쓸쓸히 서있는 아릴에게 다가간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가루 밖에 남아있지 않은 봉지를 내밀었다.
「이건…. 무슨 가루인가요?」
가슴을 찌르는 한 마디. 충격에 잠시 난간에 기대여 몸을 가누던 시즈가 붉어
진 얼굴로 대답하려는 순간,
「이게 뭐야?」하고 봉지를 채가는 네메이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보를레스가
슬그머니 껴들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미용가루 아니야? 물에 타서 몸에 바르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것 말야.」
「정말!? 시즈, 아릴에게만 주다니 너무하는 것 아니야?」
시즈는 〈너는 아까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잖아 - !〉라고 말하려 했지만 네메
이나의 속사포같은 입술은 찰나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릴, 넌 더 이상 예뻐지면 죄악이야. 이건 내가 잘 쓸게. 후훗!」
혹시라도 뺏을라 자기방으로 도망쳐버린 그녀 뒷모습의 여운을 - 네메이나가 달
려가느라 쿵광거리는 진동의 여운 - 느끼던 아릴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쩌억 벌린 채 굳어버린 시즈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저 가루는 피부를 좋아지게 하는 게 아닌가요?」
「좋아지겠지요. 어쨌든 과일로 만든 것이니까.」
〈단, 부작용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라고 그는 주의사항을 마음 속
으로 덧붙였다.
한동안 말이 없는 두 사람, 서늘한 바람이 불어 아릴의 가지런한 머리결을 흩
어 놓았고, 시즈는 아름답게 느껴지는 혼돈을 즐겼다. 사실 그들은 제대로 된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 시즈는 앞을 볼 수 없었고,
다시 만났을 때는 아릴의 피투성이로 더러워진 모습을 보아야했다.
감상을 말하자면, 베란다에 서있는 여인은 바람에 날아갈 듯 위태위태하면서도
건드릴 수 없는 미(美)를 풍기고 있었다. 천족이라고 말할만한 가치가 있군.
(세일피어론아드에서 천족은 다름아닌 천사다.)
「몸은 많이 좋아진 모양이네요. 저와 같은 원인의 증세…. 맞죠? 하지만 회복
이 무척 빨라요. 난 2주일에 가까운 시간을 고생했는데….」
「마력 소모량이 차원을 달리 하니까요.」
입을 열면서 아릴은 애수에 찬 시선으로 멀리 서쪽 하늘 구름에 걸려있는 햇빛
의 끝자락을 잡았다.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날리는 머리카락의 간지럼을 즐기
던 청년이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아릴의 팔을 잡았다.
「밖에 나갈까요?」
「에?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유레민트가 철벽처럼 지키고 있는걸요.」
「막히면 돌아가라는 법칙이 있지요. 하지만 걸어내려갈 수 없다면 뛰어내리라
는 법칙은 지금 만드는 게 좋겠군요.」
성투사 헤모도 놀란 움직임, 세찬 바람이라기 보다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줄
기 부드러운 바람처럼 가볍게 아릴을 안아들었다.
「흐읍!」
여인은 서늘한 공기를 급하게 들어마시며 엉겹결에 시즈를 끌어안았고,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인 시즈는 망설임없이 3층 밖으로 몸을 날렸다.
「시, 시즈! 그녀는 환자란 말이에요!」
심상치 않은 동태에 예의주시하고 있던 유레민트였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뒤를 쫓아 뛰어내리려는 그녀를 누군가 붙잡았다. 보를레스였다.
「아릴도 산책이 필요할 겁니다. 시즈도 대륙제일이라는 학식자이네, 설마 그녀
의 몸상태를 살피지 못할까요? 하루종일 아릴을 돌보느라 힘드셨을 텐데 한잔 하
면서 피로를 풀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좋아요. 겨울에는 그저 보드카가 최고죠.」
「엘프들은 속이 튼튼한 모양이군요. 내장이 타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들이 식당 겸 주점으로 내려가니, 토루반은 이미 테이블 하나를 차지앉아 구
른 속을 술로 달래고 있었다나?
「아릴 양이 말하셨던 저와 같은 고통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그대 자신이 아니
었습니까?」
한편, 시즈는 아릴를 살짝 부축한 상태로 달아오른 몸을 어서 차가운 저녁기온이
식혀주길 바라고 있었다. 뛰어내릴 때는 멋졌으나, 착지가 불안정하여 발을 딛은
후 다시 엉덩방아를 찌었기 때문이다. 아릴은 충격을 받지 않았으나, 그의 멋진
이미지가 한순간 무너진 건 사실이다.
「쿡쿡…. 설마요. 머리에서부터 차이가 나잖아요? 아무리 자연의 음악을 만드는
자들이라고 해도, 당신처럼 무모한 마력을 쏟아붙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어요,
쿠훗!」
「자꾸 이상하게 웃지 좀 말아요!」
「미, 미안해요. 절대로 그 착지 때문에 웃는 게 아니에요. 그 때 시즈의 얼굴이
너무나 재밌어서….」
흰 붕대를 감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는 아릴,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불만스런 표정을 짓다가 금새 미소를 띄는 시즈.
「왜 어울리지 않으십니까?」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던 왕자와 신관 또한 하늘 귀퉁이에 걸려있는 달빛을 맞고
있었다. 데미노머는 풍성하던 나뭇잎을 모두 떨구고 간간히 추위에 몸을 떨는 나
무에 기대었다.
「무슨 소리, 나도 이렇게 자유로움을 느껴본 적은 없어. 이게 즐기는 것이 아니
면 뭐지?」
실제로 왕자는 왕궁 밖을 나서기가 매우 어려웠다. 아스틴 네글로드, 원탁에 앉
은 이들이 3명이나 데미노머와 함께 있다는 말이 잠시의 자유를 허락받았지만 곧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면 너무나 안전하고 편안한 구속에 몸을 맡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아름답군. 우리 누님만큼이나 아름다워. 아릴이라고 했나? 용사
샤르아릴의 이름과 비슷하군. 하지만 용사가 저런 가냘픈 여인일 리는 없겠지만
….」
「아스틴 왕국의 제 2 왕녀께서 빼어난 미모를 가지셨다고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 정말 아름다운 누님이시지. 단, 굉장한 괴짜성격을 가지고 계셔서 요즘
은 네글로드 귀빈관에서 취미로 요리를 하고 계신다더군요.」
「예? 귀빈관에서?」
「게다가 외모하고는 다르게 미각은 완전히 도마뱀 수준이라서, 누나가 만든 요리
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요리라고 할 수 없지. 그렇다고 왕녀가 만든 것을 맛없다
고 말했다가는 목이 날아가테니,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은 외국의 손님들에게 음식
을 내가는 모양이야. 누님은 쓸데없는 것에 철저한 사람이라서 다 먹은 접시에 남
은 요리를 검사하지. 거짓말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시종들은 그 남은 요
리를 다 먹어 치운다더군. 그 수고스러움에 보답하기 위해서 아버지, 폐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사례가 있으실 모양이야.」
왕자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그 날 음식의 맛이 아직도 혀끝에 남아있는 것 같아
헤모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해는 이미 사라지고 푸른 달빛만이 비추는지라 왕자
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이 말은 비밀이네. 누님이 알면 왕궁이 날아가는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곤란해.
그래서 귀족 중에서도 사실을 아는 이들은 몇몇 안돼.」
그 때 음식을 남길 마음으로 포크를 놓을 때마다 쏟아지던 처절한 살기, 이제서
헤모는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죽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내뿜는 생존의 용기였
던 것이다.
「저도 먹어보았습니다만….」
「사제께서도? 죽을 뻔 했겠군.」
그들은 아릴과 시즈와는 다른 형태의 동료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부둥켜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