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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시즈 일행은 평범한 관광객같이 조금은 편안한 여정을 지낼 수 있
었다. 실제로 아스틴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였던 〈또 다른 고향〉에 관한, 이
미 마무리된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여유가 생긴 그들은 삼삼오오 몇 명
씩 갈라져 관심사와 사정에 따라 원하는 일이나 취미로 시간을 보냈다.
헤모 사제는 전부터 궁금했던 타국에 대한 교단의 포교활동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벨루온과, 그 주변 도시의 신전을 방문했다. 비밀결사단체나 다름없는 성
투사의 타국에 세워진 신전 방문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신전에서는 대대적인
환영을 하고, 신전 전사들의 훈련지도를 부탁했다. 시즈에게 끌려다닌 이후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헤모가 얼마나 감격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눈물을 흘리며 신관장의 손을 잡았다는 소문만 들려올 뿐….
네메이나는 유레민트에게 아스틴의 글과 엘프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처음에
는 기초만 가르칠 생각이었던 유레민트는 그녀가 의외로 놀라운 암기력을 보이
며 솜이 물을 빨아들이 듯 지식을 흡수하자 가르치는 것에 재미를 느꼈는지 얼
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학문과 문학을 익히게 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아릴에게서 갈취한 미용가루를 아껴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노력에 하늘은 감동하였는지 날이 갈수록 소녀는 갓 구운 케익처럼 뽀송뽀
송한 피부의 주인이 되어갔다.
유레민트가 점차 스승의 탈을 뒤집어쓰고 닦달하고 네메이나는 불평어린 신음
과 한숨을 토해내며 지내는 동안, 시즈 또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
고 있었다.
금속 공예나 보석 공예를 즐는 대부분의 드워프들과는 달리 토루반은 목공예
에 탁월함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작품들을 감상한 시즈는 완전히 매료되어 그
날로 손에 나무토막과 날카로운 공예칼을 쥐고 살았다. 시즈는 토루반과 함께
데미노머 왕자의 수업에도 함께 참관했는데 또래의 이해해줄 학문친구가 없었
던 왕자는 스승의 수업을 들으면서 그 내용을 시즈와 토론하는 것을 매우 즐거
워했다.
드워프인 토루반은 수학의 응용에 대해서 특출하게 뛰어났는데 대부분 건축술
에 이용되기 때문이었다. 그를 지켜보면서 시즈는 드워프라는 종족에 대해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아름답지 않지만, 다른 존재에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창조하
는 종족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엘프를 동경하기보다 환경을 아름답
게 하므로 자신 또한 아름다울 수 있는 드워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루는 왕자가 귀빈관으로 시즈를 찾아 놀러왔는데 그 자리에서 요리에 전념
하고 있는 제 2 왕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데미노머의 누나라는 사실에
시즈는 놀라면서 왕녀의 취미생활에 대한 말을 주고 받았는데 이와 같았다.
「만약 드래곤의 왕국이 있었고 그들의 사절이 아스틴에 왔다면, 그 사절들조
차 전하의 요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흐뭇해진 왕녀는 팔목에 직접 차고 있던 팔찌를 끌러 시즈에게 내어주고는
〈맛은 충분하니까 이제 요리에 미(美)를 추구해야 하겠다〉는 말을 늘어놓으
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시종들이 매서운 눈초리를 보낸 것은 말할 것도 없었
다.
「정말 드래곤들이 미식가입니까?」하고 귀빈관 밖으로 나온 후 궁금해하던
보를레스가 물었고, 대답한 것은 데미노머 왕자였다.
「도마뱀 중에서는 대단한 미식가지요.」
보를레스는 또다시 시즈에게 미행이나 위험인물이 붙을 것을 대비하여 언제
나 함께 있었는데 유레민트를 동경할 정도로 학문에 어느 정도 길이 잡혔기
때문인지 토루반과 젊은 학자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 즐거워했다. 학자들
이라고 해서 매우 철학적인 내용의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역설과 배꼽잡을 비
유와 묘사를 이용한 언어유희가 재밌었기 때문이다.
아릴은 헤모의 소개를 통해 레이모하 신전의 성법술을 받았다. 이미 유레민
트의 엘프식로 부러진 뼈가 거의 붙어있던 양팔은 깨끗이 완쾌되었고 떠날 무
렵에는 눈도 보를레스와 검술대련을 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오늘로 마지막이군요.」
피브드닌의 저택에서 시즈 일행의 아스틴 마지막 연회가 열렸다. 사람이 많
지 않았기에 규모는 간소했지만 참여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국가 비밀 회의라
도 있는 것으로 중인들은 오해할지도 모른다. 벽마다 타오르는 불과 천정에
매달려 그 빛을 이리저리 화려하게 반사시키는 수많은 광석과 유리들, 그 아
래는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들이 늦는 걸?」
「원래 준비가 많은 종족이니까.」
퉁명스럽게 말을 하지만 눈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낼
2층 계단의 휘장을 쏘아보는 게 다들 기대하는 눈치였다. 단 한명만 제외하고
말이다.
「헤모 사제는 사제가 된 것이 후회스럽죠?」
싱글대는 시즈의 시선을 피하며 헤모는 음식을 우걱우걱 입에 처넣었다. 시
즈는 누가 애주가 아니라고 할세라 한 손에는 잔, 다른 한 손에는 와인병을
들고 키들거렸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피브드닌 저택의 시녀, 위나가 드레스를 입고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뒤이어 유레민트와 네메이나, 아릴과 제 2 왕녀 루이란이 따라 계단을 내려왔
다. 하늘거리는 색색의 드레스자락, 여인들의 수줍은 듯한 미소에 남성들은
은 말을 잇었다.
멀뚱히 서있는 그들은 제치고 나선 시즈는 가볍고 단정한 동작으로 아릴에게
손을 내밀었다. 살며시 아릴이 손을 얹자 부드럽고 유연한 걸음걸이로 그녀를
회장으로 인도하는 시즈. 그 때까지 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 모르는 남정네들에
게 유레민트는 찬바람이 섟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곳에 멀쩡하게 생긴 남자들은 많지만 숙녀를 에스코트할 줄 아는 신사는
레이서스 후작 공자 한분 밖에 없는 모양이군요.」
그제서야 정신이 버뜩 든 남자들은 앞으로 걸어가 여인들을 에스코드했고 연
회장은 천천히 화기애애해지기 시작했다.
「데미노머는 평범한 저녁식사보다 연회를 더 많이 겪었으면서도 그렇게 긴장
을 했나요?」
루이란이 고개를 갸웃하고 호기심어린 미소를 짓자, 그녀의 동생의 얼굴은 즉
각 화르륵 달아올랐다.
「시즈 군은 엘시크에 돌아가면 뭘 할 생각이오?」
잔을 붙이치며 사람들은 서로의 앞날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던졌다.
「고대문헌을 좀더 조사해볼 생각입니다. 필요하다면 유적으로 여행도 가볼까
생각 중이고요.」
「하아…. 혹시 볼케아스 쪽으로 가게되면 미리 연락을 해주게. 난 고대유적
에 남겨진 벽화분석, 토루반은 유적의 건축술에 대한 연구로 그 쪽에 가 있을
테니….」
그 말에 번뜩 고개를 쳐든 데미노머, 도끼같은 눈동자를 토루반을 향해 내리
꽂았다.
「뭐에요? 토루반, 또 여행이라고요? 앞으로 몇 년간은 출국할 만한 일이 없
다고 하셨잖습니까?」
「아.핫.핫.핫.핫. 그, 그게 말이야…. 피브드닌이 꼬셨어, 꼬셨다고!」
「무슨 발뼘이십니까? 토루반! 분명히 고대건축기술을 조사할 유적에 고대경
재생활에 대한 벽화가 남아있다면서 함께 가자고 한 것이 누군데!」
「피브드닌, 이 못된 녀석! 네 녀석이 어미 뱃속에서 열심히 자고 있을 때, 내
가 네 어미 배를 쓰다듬어준 것을 잊었단 말이냐!」
「기억도 못하는데 뭘 잊는단 말입니까?」
「흐흐흐…. 토루반 제사(帝師), 믿어드릴테니 그렇게 흥분하지 마십시오. 다
만 거짓으로 판명되는 행동, 즉 출국에 대한 보고가 제게 들어온다면 당장 왕
족 불경죄로 다스리겠습니다.」
아무리 즐거운 파티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자는 있는 법, 결국 구석에서 혼자
독하기로 유명한 루히마 주(酒)를 홀짝이며 가끔 피브드닌을 살기어린 눈동자
로 째려보는 늙은 드워프, 소외자가 하나 생성됐다
「아릴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혹시 괜찮으시다면….」
「아니에요. 저는 할 일이 있답니다.」
싱그럽게 찰랑이는 청은발에 보를레스는 아쉬운 듯 와인을 한모금 들이켰다.
해산물을 열심히 탐닉하던 시즈가 새우의 껍질을 벗겨 입에 넣으며 넌지시 입
을 열었다.
「맞아요. 아릴은 〈그〉를 찾아야 해요. 빨리 찾길 기원하겠습니다, 아릴」
「고마워요, 시즈」
한편, 해산물에 와인만을 고집하는 시즈와는 달리 모든 음식을 뒤집어가며
맛을 보는 네메이나에게 데미노머가 망설이며 다가갔다.
「저, 저기…. 네메이나 양도 내일 떠나실 건가요?」
「흐음…. 글쎄, 그건 왜 묻죠, 전하?」
흑단같은 머리칼이 휘르르 소녀의 몸을 휘감고 팽그르 돌았다. 입을 오물거
리며 뒤돌아선 네메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얼굴을 왕자의 눈 앞에 들이
댔다.
「그, 그, 그게….」
「미용가루가 효과를 발휘한 덕인가?」
드레스 탓인지 은은한 불빛 탓인지 오늘따라 매혹적인 소녀로 돌변한 네메이
나와 사과처럼 얼굴을 붉히며 쩔쩔매는 소년을 바라보며 시즈가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 속에는 〈빛의 시각적 효과〉라는 책에서 보았던 한 구절이 떠올랐
다.
〈붉은 빛은 고기를 신선하게 보이게 하며, 촛불처럼 은은한 불빛은 사람들의
얼굴선을 희미하게 만들어 보다 미남미녀로 보이게 한다.〉
「역시 빛 때문이야.」
시즈는 고급의 와인에서 풍기는 달콤하고도 씁쓸하니 남는 향을 음미하며 결
론을 내렸다. 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한 그는 온화한, 그리고 약간은 애수에 잠
간 미소를 지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아니면 취했거나….」
그럴지도 몰라, 즐거운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잊었던 가족을 떠올리고 말았으니
까…. 사람들도 취하고, 그들의 눈에 달도, 별도 취하는 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