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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알고 계시겠지요? 아스틴과 엘시크를 가로막은 산맥, 두러크 산맥입니
다. 저 곳만 넘으면 이제는 엘시크입니다.」
「그래요. 아스틴에 오면서 힘들게 넘었던 곳이니까…. 사론도 고달프겠네요. 사
실 저희를 고국까지 데려다줄 의무는 없지 않았나요?」
「뭐 저 말고도 대부분 시즈 님과 헤모 사제를 수행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사론은 어깨를 움추린 채 말 위에 오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고 기지개하듯 팔
을 쫘악 뻗어 굳어진 근육을 자극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춤추는 칼〉의 사람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농부인 사람이 많았지만 그래도 미래는 다양하잖습니까?」
시즈의 반문에 마차에 타고 있던 헤모 사제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대답했
다.
「분야는 다르지만 다들 그들의 분야에서 열심히 세상을 훔치고 있겠지.」
「아무래도 보를레스 님만 뒤떨어진 것 같습니다.」
「하…. 그런 거 같군. 네메이나도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는데….」
보를레스는 슬쩍 지나쳐온 길을 돌아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보호 받아야
할 어린 새처럼 느껴지던 소녀가 내보였던 강한 의지의 여운이 그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나, 남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유레민트에게서 언어학과 생물학을 배우고 싶어. 보를레스는 시즈를 따라가도
록 해. 난 유레민트와 한동안 함께 살겠어.」
꼿꼿히 들린 턱,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소녀는 그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순간, 보를레스는 새장을 벗어난 한 마리 새를 떠올렸다.
그래, 이제 너의 마음에 따라 날고 싶단 말이지!? 좋아, 높게 날아보거라. 머리
를 천천히 쓰다듬는 커다란 손에 소녀는 기분좋은 듯 뺨을 부볐다. 늘상 이리저
리 뻗혀있던 머리카락은 처음 본 사람이라면 예의바른 귀족집의 자녀로 보일만큼
깔끔하게 빗겨 윤기가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
「그럼…. 유레민트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름다운 엘프, 약속을 지키는 엘프, 보를레스는 그 말이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길 바라며 등을 돌렸다.
「그런데 아릴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시즈, 자네는 알지?」
모두를 놀라게 했던 미모의 여성은 벨루온을 떠나고 그 날밤, 홀연히 사라져 버
린 것이다. 헤모는 유일하게 걱정하지 않던 무신경한 청년에게 물었지만 그도 역
시 고개를 저었다.
「전 천리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그녀는 얼굴
을 후드로 가릴 수 있는 로브를 걸친 채 쉴 새없이 발걸음을 옮길 겁니다. 그리
고 원하는 것을 찾았을 때,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두 알 수 있을 겁
니다.」
그들은 제각각의 생각을 하며 말에게 몸을 맡겼다. 긴 여정에 지쳐가는 일행을
가끔 불어온 바람이 위로했지만 끝없는 무료함에 몸은 추욱 늘어져 갔다.
「하아아암!」
누군가의 하품에 사람들은 전염이 되어가는지 저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따분함
을 고요하게 외쳐댔다. 분명히 같은 길을 가고 있었지만 올 때는 많은 만남과
힘든 사건을 지나친 길, 그러나 되돌아가는 길은 이별을 끝낸 이들의 조그만 갈
등도 없는 안전한 길.
「마을이군요. 오늘은 저기서 쉬어가도록 할까요?」
아담한 집들은 번성한 도시의 빽빽함과는 달리 듬성듬성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시즈, 아직 한낮이오.」
얼굴을 찡그린 보를레스의 추궁에 시즈는 아무 말 없이 눈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그의 눈동자에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노년같은 청년들이 들어왔
다. 보를레스는 도저히 강행군을 주장할 수가 없었다. 끄덕이는 그의 고개에
수행원과 시즈는 환호성을 질렀다. 훈련과 수련으로 강한 체력을 가진 수행원
들은 단지 지루함에 힘들었지만 시즈는 이미 몇 일간의 여행으로 몸이 지쳐버
려 멀미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작은 마을에 집만큼 커다란 목책이라니….」
목책만큼이나 거대한 마을의 문을 지나며 시즈들은 의아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10여 명이나 되는 기사들과 마차가 들어오자 마을에는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창을 열고 고개를 빼꼼이 내민 아이들과 여인들, 일손을 멈추고 일
행을 응시하는 남자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다가와 마을사람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이런 누추한 마을에 기사분들께서 왠일이십니까?」
「이 분은 엘시크의 시즈 세이서스 후작 공자시오. 아스틴의 명성높은 아스틴
네글로드에서 초청을 받아….」
「사론. 어려운 소개는 그만둬요. 노인장께서 이 마을에 촌장이십니까?」
「아, 예. 그러하옵니다.」
수행기사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눈 앞의 청년이 높은 귀족이라는
것을 안 노인은 고개를 아플만큼 꾸벅이며 대답했다. 귀족들에게는 익숙한 대
접이요,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시즈는 아무래도 그런 것들이 익숙치 않았다.
말에서 내려 가볍게 목례를 한 그는 온화한 어조로 공손하게 말했다.
「하루 묵어가고 싶은데 여관이 있습니까?」
「여관이 있긴 합니다만, 왜소하여 공자께서 묵으시기에 꺼림직하지 않으실지
걱정이 됩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깔깔해 듣기에 조금은 거슬렸지만 귀족 앞에서 위축됨이 없
이 시원스러웠다.
「저희는 숲이나 들에서 노숙을 할 때도 있습니다. 괜찮으니까 안내를 해주시
겠습니까?」
보통 서민들의 마을에 귀족들이 방문하면 마을은 피해가 막심하기 마련이었
다. 고급스러운 귀족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 마을이 입는 상처는 적지 않았
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시즈들의 방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시즈의 정중한 어투와 촌장을 대하는 태도는 마을 사람들의 불안감을
없애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덜어낼 수는 있었다. 수행원들은 아
직 권위주의에 물들지 않은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시즈처럼 공손하지는 않았지
만 정중했고 곧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경계를 하나 둘씩 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