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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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 흰색 비단의 바닥을 뚫고 발이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게다가 두러크 산

 맥에서 뻗어온 산줄기는 매우 가파르기 짝이 없어 한동안 체력운동을 소홀히 한

 시즈는 수행원들을 쫓아가느라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렸다.

 「쯧! 레이모하여…. 산 하나도 오르지 못하고 벌써 당신의 품을 찾아갈는 이가

 있습니다. 시즈 자네, 숙녀인 에레나 양께 부끄럽지도 않나?」

 헤모가 신을 찾아가며 놀려댔지만 시즈는 눈밭이 자신의 침대인양 드러누워 움

 직일 줄 몰랐다. 에레나가 가져온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호흡을 안정시킨

 그는 풍성한 털이 절대로 추울 것 같지 않은 모피 안에서 얼굴만 드러낸 여인을

 보며 말했다.

 「위험할 텐데…. 에레나,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후후훗…! 공자 님의 동료분들은 저보다 공자 님이 더 걱정스러운 모양이신데

 요?」

 「정답이야. 시즈, 위험할텐데…. 그 몸으로 오기부리지 말고 돌아가지 그래?

 에레나 양이 이제와서 돌아가면 우리는 이 산에서 그 놈의 브로큰스도무를 찾느

 냐고 몇 일동안 밤새워 헤매야할 걸.」

 보를레스가 시즈의 말투를 흉내내며 빈정대자 수행원들도 입을 크게 벌리고 웃

 어댔다. 아무렇지 않은 듯 시즈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받아넘겼지만 내심 제플

 론에 도착하면 양아버지에게 보를레스 처분을 부탁드리리라고 마음 먹었다.

 에레나는 스스럼없이 히히덕거리며 떠드는 기사들과 풀이 죽은 것을 애써 추스

 리는 시즈의 대조적인 모습에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아니에요. 주위에 비해서 저기 정면에 보이는 숲이 굉장히 무성해보이죠? 바로

 저 안에 늪이 있어요.」

 「그럼 다 도착했었잖아!? 이제 에레나 양은 그만 돌아가세요.」

 「세이서스 공자 님은 돌아가지 않고요?」

 에레나가 시즈를 물고 늘어지자 뼉다귀도 아닌 장본인은 미간 사이를 종이짝처

 럼 구겼다. 결국 시즈는 체력을 키울 것을 다짐하면서 그녀의 동행을 허락한다.

 「어째서 이 곳만에 이렇게 풀이 무성한 겁니까?」

 한 눈에 보기에도 잡초조차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키가 큰 것을 가리키며 사론

 이 신기한 듯 묻자 에레나는

 「그, 그건 저도 잘….」

 「시즈 님은 아시겠습니까?」

 아스틴 네글로드에 대해 경의를 품고 있는 한 수행원이 묻자 고명한 청년학자

 주위 산세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멀리 구름보다도 높이 솟아있는 산등성

 이를 가리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산 속에 움푹 들어간 분지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

 다.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던 간에 공기는 저 높은 산들을 넘어서 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들 높은 곳에 올라가면 점점 추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죠, 에레나?」

 「네, 여름에 마을이 따뜻하다고 간편한 옷을 입고 산에 올라오면 몹시 추워요.」

 「예. 그와 마찬가지로 바람 또한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차가워지고, 반대

 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올라갈 때의 기온의

 변화량과 내려올 때의 기온변화량의 크기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거죠.」

 「그 차이와 이 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몇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가 되지 않고 있다

 는 것을 표현했고, 헤모 학생은 건방지게도 선생님에게 반말로 질문했다. 인자하

 게도 선생님은 〈내, 너희의 우둔함을 아노라.〉하는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산의

 모습을 가정해가며 설명을 계속했다.

 「들어보세요. 올라갈 때는 기온이 조금씩 감소되고 내려올 때는 많이 증가된다

 면 산을 넘어오기 전의 바람보다 넘은 후의 바람은 더 따뜻할 겁니다. 그렇다면

 바람이 저 높은 산등성을 넘어서 도착한 여기의 바람은 주위보다 따뜻하다는 말

 이죠. 그리고… 혹시 물의 나라인 실베니아에 가보신 분이 계십니까?」

 보를레스는 머리가 팽팽 도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잡은 채 다른 손을 들었다.

 「나무의 크기가 어떻던가요?」

 「컸어. 바로 이곳처럼.」

 「마찬가지입니다. 나무가 자라는데 필요한 것은 빛, 온도, 그리고 수분입니다.

 빛이야 하늘에서 내리쬐니, 그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상관하지 맙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온도는 방금 전 설명한 현상으로 다른 곳보다 따뜻하겠지

 요? 수분은 늪이 있으니 당연히 충분할 겁니다.」

 「그래서 여기가 따뜻했군요!?」

 한 편의 강의에 사람들은 젊은 학자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그들은 숲 속에 옹기

 종기 모여서 눈망울을 반짝이며 가르침을 받는 어린 엘프들을 연상시켰다. 존경

 과 경의가 살아숨쉬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시즈는 머쓱해진 미소를 지으며 헛기

 침을 연발했다.

 「흠흠, 자아… 어서 나무괴물이나 퇴치하러 갑시다.」

 #

 「학자들이란 대단하군요.」

 걸음을 옮기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에레나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시즈가

 설명한 것은 푄 현상으로 세일피어론아드의 학문으로는 밝힐 수 없는 미지의 현

 상이었다. 만약, 토루반이나 피브드닌 같은 자연과학 분야에 관심이 있는 학자

 가 한명이라도 끼어있었다면 그들은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로군. 놈은 어디에 있는 거지?」

 「늪 근처에 있을 거에요.」

 「그러고보니… 에레나, 왜 몇 년이 되도록 괴물을 내버려둔 겁니까? 용병을 불

 러서….」

 「불렀어요. 8번 정도?」

 「예?」

 잠시였지만 사론의 절륜한 얼굴이 음식놓친 원숭이처럼 멍청하니 일그러지는 것

 을 구경할 수 있었지만, 일행 또한 그리 보기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에레나는 그

 들의 얼굴에서 작은 경련이 일어나는 모습을 즐기듯이 바라보다가 싱긋하고 웃으

 며 말했다.

 「다들 자신있게 떠났지만 돌아온 용병은 없었죠.」

 갑자기 나뭇가지를 스치며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음산한 지옥의 웃음소리처럼 생

 각됐다. 침을 꿀꺽 삼키는 사론의 눈동자에 늪에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거품이 비

 췄다.

 「모두 늪에서 떨어져!」

 말과 동시에 늪의 피부가 거칠게 터져나가며 왠만한 사람의 허리만한 나무줄기가

 보를레스를 덮쳐왔다.

 「흐아아아압!」

 사론의 경고에 대비하고 있던 사내는 장신의 힘을 과시하듯이 번개처럼 덮쳐오는

 그것을 잘라버리고 뒤로 물러섰다. 서서히 퇴치해야할 괴물, 브로큰스도무의 거체

 가 늪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잠깐, 사론…. 보통 나무의 기둥 크기라는 게 저 놈의 줄기를 두고 한 말이었나

 ?」

 보를레스의 질문에 사론은 울 것 같은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아, 아무래도 제가 본 책의 저자가 줄기만 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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