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200)

                                              -53-

 엘시크와 아스틴을 가로지르는 두러크 산맥, 하늘에 닿을만큼 높이 솟은 땅의

 근육들은 그 무성한 생명력의 가지를 이리저리 뻗히고 있다. 수많은 산맥의 지

 류 중 하나에서 생산되는 많은 식물과 생물을 채취하며 살아가는 아담하고 소박

 한 마을, 도틀킨 마을은 현재 축제가 한창이다.

 「후우…. 정말 즐거워보이는 군.」

 「이제 마을의 살림과 형편이 점점 나아질 테니까요.」

 무엇이 우스운 걸까. 에레나는 키득키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이불로

 돌돌 몸을 말고 갓 태어난 돼지새끼들마냥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모습 때문이

 리라.

 「따뜻한 커피 좀 더 가져올게요.」

 주방으로 허무하게 사라지는 여인의 흰색 평상 드레스가 넘실거림이 눈에 남아

 그 때의 악몽을 여실히 회상시켰다.

 「시즈 님은 지금쯤 뭐하고 계실까?」

 「후작 공자께서는 촌장님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의 감사인사를 받고 계실 겁니

 다.」

 카운터에 앉아서 무료하게 손톱을 깍고 있던 여관 주인의 대답에 돼지새끼들은

 아쉬움과 억울함이 풍기는 한숨을 땅이 꺼질 듯 내리쉬었다. 그렇잖아도 벽난로

 의 벽돌을 녹여버릴 듯 강열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에 신경질적으로 장작을 내던

 지며 사론은 투덜거렸다.

 「왜 시즈 님만 대접을 받는 거지?」

 「이게 모두 너 때문이잖아! 네 녀석이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눈사태에 일어

 났다구!」

 「보를레스! 그건 오해라고요! 나보다 톰브가 더 크게 소리를 질렀어요.」

 「사론 군, 전능하신 레이모하께서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솔직히 말하세요. 눈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들었던 듣기싫게 울리는 날카로운 금속성마냥 귀를 파고

 드는 음성은 분명 그대였어요.」

 「사제 님, 전 억울합니다.」

 「넌 억울할 것 없어. 사제 님과 난 빌어먹을 정도로 조용히 있었는데 부르지도

 않은 눈들과 포옹한 눈뜬 생선꼴로 레이모하의 품에 안길 뻔했다고!」

 「하하핫! 레이모하께서도 징그럽게 눈뜨고 얼어죽은 생선을 끌어안지는 않으실

 겁니다.」

 여관의 문이 벌컥 열리며 차가운 겨울의 바람이 갑작스레 덮치자 돼지새끼들은

 공포와 넘치는 동작으로 이불을 들어 열심히 방어해댔다. 자신들과는 달리 따스

 한 혈색이 좔좔 흐르는 미소를 띄우고 에레나의 마중에 손에 입을 맞추어 답례

 한 세이서스 후작 공자에게 헤모가 일그러진 음성으로 소리질렀다.

 「레이모하께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게. 어째서 우리 중에서 자네만 멀쩡한 거

 지?」

 「아니!? 몸이 안 좋으신가보죠? 혈색은 붉으스름하니 아주 좋습니다만….」

 동상으로 붉어진 피부가 더욱 빨갛게 열을 냈다. 살이 익어가메 발광하는 돼

 지새끼들의 모습을 연상하며 시즈는 에레나가 익은 고기들을 위해 마련한 커피

 의 은은한 향을 맡았다. 본격적인 식사 전의 향을 음미하듯이….

 「제가 아침에 산에 눈이 싸인 모습을 보아하니 균형이 완전히 일그러진 채 약간

 의 진동만으로도 무너져내릴 듯 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에 묻히더라도

 냉기가 잘 침투하지 못하고 체온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두터운 겉옷보다는 얇은 옷을

 여러 겹으로 껴입었지요. 한 6겹 정도로 말입니다. 에레나도 아주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더군요. 아마도 이 곳의 사람들은 눈사태에 평소부터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그런! 어째서 우리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건가?」

 헤모와 함께 모닥불 앞에서 이빨을 다닥다닥 충돌시키는 기사들이 치를 떠는 모

 습을 은근히 질기며 시즈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시즈는 용사로서 촌장의 칭송을 받았고 그로인해 밖에 몰려든 마을사람은

 그의 웃음 하나하나에 환호했고 처녀들은 그림에서나 나올 듯한 용사의 은은한 미

 소에 넋을 잃었다.

 「그야 당연하잖습니까. 그대들이 5,6 겹으로 입으면 잘 싸우지를 못할 것이 아닙

 니까? 핫핫핫!」

 「치, 치, 치…」

 「아니! 치사하다고요? 아마 제가 재빨리 눈 속에서 꺼내드리지 않았다면 처음으

 로 레이모하가 내던지는 얼음 사제가 되셨을 겁니다. 후후훗!」

 아아 왜 사람들은 저 혐오스런 웃음소리에 환호하는 것인가. 헤모 사제는 레이모

 하가 자신을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식어버린 몸에 체온을 찾아줄 사람은 누구

 일까. 믿었던 에레나마저 시즈의 에스코트를 받아 축제에 참가하러 나가버리고 기

 사들과 사제는 갈 곳 없는 고아처럼 모닥불 앞에 다닥다닥 붙어서 서로를 위로했

 다.

 「괜찮겠어요?」

 새침한 눈매로 올려다보는 여인의 물음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은 축제에 참가할 수 있지 않아요. 그렇다고 그렇게 투닥거리다가

 말썽이 생기는 것도 좋지 않고…. 조금 심했나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공자 님은 작은 것도 혼자서 짊어지려고 하는 군요?」

 약간은 안쓰러운 표정에 시즈는 당치도 않다는 듯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작은 것이니까 짊어지려고 하는 거죠. 무거웠다면 아마도 내던지고 도망쳤을

 거에요.」

 눈을 찡긋하는 시즈의 옆얼굴 건너로 타오르는 축제의 불꽃이 토틀킨의 기쁨을

 표현하며 힘차게 타오르는 것을 에레나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미소짓던

 청년의 모습은 새하얀 눈에 그려진 황금색 배경과 함께 한 여인의 가슴 깊숙한

 곳에 각인되었다는 것을, 뭐든지 알것 같은 젊은 학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여인의 각인은 후일 더욱 커다란 상처로 그녀의 가슴 속을 파고 들어갈

 것이라는 것도….

 #

 레소디는 더 이상 깨끗해질 수 없는 집 안에 광을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왕궁

 에서 연락이 왔던 것이다. 헤트라임크의 이름으로 보내진 전서에는 곧 저택의

 주인이 도착할 테니 준비를 하라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시즈는 저택을 떠

 나며 그 동안 소년과 소년의 가족들이 살림을 꾸려갈 충분한 양의 돈을 주었지

 만 레소디는 조금도 쓰지 않았다. 매일같이 책으로 온 집안을 어질러대던 집주

 인이 사라진 뒤로 그는 무료하기 그지 없었다. 작은 동생들이 칭얼대고 장난을

 쳐댔지만 허전한 마음 속은 채워지지 않았고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시즈가 보던 책들을 들추어보기도 했지만 글자도 모르는 상태로서는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새신랑의 귀가에 마음 설레는 신부처럼 허둥

 지둥 집 안을 정리하다못해 꾸미기까지하며 레소디는 그가 돌아오면 글자를 가

 르쳐달라고 하리라 다짐했다.

 딸랑딸랑! 그가 왔다!

 「어서 오세요!」

 「시즈 선생님 계십니까? 존경스런 선생님을 뵈러 로빌기어스에서 달려왔습니

 다! 아! 시즈 선생님의 부인되십니까? 선생님은 어디 계십니까?」

 바라던 꿩은 어디가고 어디서 보지도 못한 메추라기란 말인가. 실망과 분노가

 엇갈린 얼굴로 문이 부서질 정도로 닫은 레소디는 저택이 흔들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시즈 님은 안계세요! 그리고 난 남자라고욧!」

 1시간 후…

 딸랑! 딸랑!

 「주인님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마땅찮은 시즈〉 선생님의 열렬한 추종자, 민소르 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고명한…」

 콰당!

 「안계세욧!」

 2시간… 3시간… 1분 1초가 왜이리 긴 것인지 원망이 되었지만 그러면서도 무

 심하게 시간을 흘러간다.

 딸랑! 딸랑!

 「시즈 선생님 계십니까?」

 정확히 12번째였다. 원하는 사람은 오지 않고 전혀 바라지도 않은 불청객들은

 순진한 소년의 머리에 불을 이르켰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은 레소디는 김을

 뿜어대지 않는 자신의 뇌에 내심 칭찬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안 계시다고 했잖아욧! 당장 꺼지지 못해욧!」

 「에? 정말!?」

 볼을 긁적이며 반문하는 청년을 올려다본 순간, 레소디의 머리 속에 가득찼던

 열기는 순식간에 볼로 몰렸다. 달아오른 쇠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소년의 볼을

 추운 바깥을 여행하고 돌아온 손으로 어루만지며 시즈는 싱긋 미소지었다.

 「들어갈까? 보를레스, 들어와요.」

 「맞아죽지 않을까?」

 「지금 서슬푸르게 저기서 눈을 빛내는 사람들과 친구하고 싶다면 들어오지 않

 아도 좋아요.」

 「흠…. 따뜻한 엽차라도 한잔 마시자고.」

 그들이 미소를 나누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고명한 학자, 시즈 세이서

 스를 만나기 위해 추위에 떨던 사람들은 의아한 어조로 의견을 교환했다.

 「저 둘, 실베니아에서 왔다고 했지?」

 「에? 무슨 소리야? 나는 아스틴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엘시크라고 들었어!」

 그 날밤, 숲 속에서 황당한 분노에 몸을 떠는 수 많은 인간들이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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