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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해가 다가오는 겨울의 막바지에 이르면 세일피어론아드는 눈,
비, 그리고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을 쉴 새없이 돌려 보여준다. 새
해를 맞이하는 하늘의 축제였지만 인간들에게는 약간이지만 곤혹스럽
다. 언제나 그렇 듯이 시즈 후작 공자님은 오늘도 우산을 들고 나가라
는 충고를 걷어찬 댓가로 비를 흠뻑 맞고 겁에 질린 생쥐같은 꼴로 돌
아왔다.
「흥! 말을 듣지 않으셔서 그런 거니까, 이번엔 감기걸려도 감호해드
리지 않겠어요!」라고 볼을 부풀린 채 투덜대보지만 안색은 백지장처
럼 창백해져 보랏빛으로 물들어버린 입술과 함께 찰나도 가만있지 못
하고 오돌오돌 떨어대는 모습에 심술을 부릴래야 부릴 수가 없었다.
담요로 돌돌 몸을 말고 벽난로 앞에 누워 마을 처녀들이 구워온 쿠키
를 어린애처럼 바삭거리며 베어무는 그를 누가 미워할 수 있겠는가.
후작가라는 고급스런 신분치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상당
한 서민적 낭만을 간직한 듯한 주인님은 어쩌면 비를 맞는 것을 즐기
는 것 같기도 했다. 뒷처리로 몇 일 밤낮을 침대에 누워 쓰디쓴 약과
건더기 하나 없는 스프만 먹는 고생을 감당할 정도로 말이다.
결국 힘든 것은 이 저택에 시종인 나 뿐이지. 나의 악마같은 동생들
은 도와줄 생각을 하기는 커녕, 주인님을 도와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
드는 것에 지대한 공헌을 세우고 있다. 으음… 그렇게 보면 주인님은
동생들의 정신수준과 비슷한지도 몰랐다.
어쨌든 엄청난 정신연령으로 근래에 들어 원리를 탐구분석하는 학자
들의 우상이 되어버린 시즈 님은 하루하루를 추격에 시달렸고 가끔씩
은 납치도 되는 것 같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살아돌아오고 있다.
「주인님, 물수건 갈아드릴까요?」
급기야는 이렇게 비와 물수건에 이마를 적시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레소니에요? 앞치마가 잘 어울려요. 헤모 사제께서 〈아내가 필요없
겠다〉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까 레
소니가 애를 둘만 낳아줄래?」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상황과는 관련도 없는 농담을 해대는
사람이 세상을 분석함에 있어서 따를 이가 없는 학자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그 둔하기 짝이 없는 헤모 사제마저도 눈치를 챘는데….〉
시즈 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한 태도로 내 마음을 혼란시킨다. 알
아채지 못하는 게 내 자신의 색기(?)부족 때문이라면 곤란하지만 단순
한 주인님의 관찰력의 결함 때문이라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물
론 나는 후자라고 확신한다.) 들킨다고 이제와서 저택에서 내쫒지는
않겠지만 요렇게 감기에 걸려 헐떡이는 남자는 여성에게 노소를 불문
하고 지나치게 정중했다. 뭐, 평상시 누구에게나 공손하게 대했지만
특히 여성에게는 다가서기가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양자 사이에
금을 굵게 쭉쭉 그어대는 듯한 느낌을 주는 태도가 내게 향한다고 생
각하면 소름이 끼치니까…. 다행히 그 것 하나만큼은 동생들도 철저하
게 신경쓰는 듯 하다. 그러니까 노골적인 프로포즈와도 다를 바 없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해대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이다.
「둘다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솔직히 숨기고 있어도 이런 말을 들었는데 두근거리지 않을 수는 없
다. 물에 적셔 추운 집 밖에 널어둔 물수건을 서슴치 않고 시즈 님의
입에 쑤셔넣은 나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발을 옮겼다.
뾰루퉁한 내 표정에 겁을 먹었는지 수습을 해보려고 주인님은 주춤
주춤 말을 이었다.
「저, 저기! 딸이어도 상관없는데….」
「보를레스 님! 보를레스 님!」
「뭐지?」
소년 앞의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는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사람
들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장신인 그를 올려다보는 것은 키가 작
은 소년으로서 엄청난 피로를 불러 일으키는 일이었지만 부탁할 용건
을 생각하면 감수해야할 과정 중 하나였다.
「〈마땅찮은 시즈〉님의 호위기사이시죠? 지금 시즈 님을 만나뵈러
가는 건가요?」
새벽 하늘에 영롱히 빛나는 샛별처럼 소년은 기대감으로 동그랗게 부
푼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의 이름은 에밀레오 도플트. 궁정 학사원의
견습 학사로 현재 엘시크 남부의 나스트 지방의 귀족학교를 졸업하고
제플론의 명문 귀족 교육기관인 〈라이느 헨들리즈〉에 재학 중인 학
생이었다.
궁정 기사단의 일곱번째 기사단을 맡고 있는 아버지는 에밀레오 또
한 훌륭한 기사로 키울 생각이었지만 워낙 적성에 맞지 않아 금세 포
기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하나 뿐인 아들에 대한 기대가 식은 것은
아니어서 나라를 바꿀 학사로 성장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형적인 귀족, 그리고 학사의 새하얀 피부와 소년의 가녀린 몸매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보를레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개를 끄
덕였다.
「그래. 호위기사는 아니지만 비슷한 신세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아버지께서 알려주셨어요.」
「누구신지 물어도 되겠니?」
「아버지께서 제 7 궁정 기사단의 단장이세요.」
〈이 훈련장이 제 7 기사단의 훈련장이었나!?〉
시즈를 따라 제플론에 도착한 이후, 보를레스는 그야말로 무료함에
연속이었다. 치안 상태는 또 왜이리 좋은지 눈꼽만큼의 사건도 일어
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헤트라임크에게 부탁하여 기사단의
훈련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랄까. 적어도 기사였던만
큼 나태해져 약해지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도플트 백작 님의 자제셨군. 네 아버님의 신세는 잊지 않고
있다.」
「헤헤, 정말요? 그럼 시즈 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실망할 텐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엘시크가 낳은 현 최고의 현자이신데….」
「하하….」
〈마땅찮은 시즈〉의 모습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았
다. 아스틴으로 가기 전에 왕을 배알하긴 했지만 귀족들은 시즈에게
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이나 마법원을 제외한
왕궁의 출입은 극히 자제하는 시즈였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가 나이
꽤나 먹은 노인이나, 절륜한 중년의 멋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착각하
고 있었다. 흰 수건이 구릿빛 피부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에밀레오는 들뜬 어조로 물었다.
「요즘 시즈 님은 뭘 하고 계세요?」
「죽어가고 있어. 감기로….」
곧 보를레스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어딘지도 모르는 시즈의 저택
으로 뛰어가려는 소년을 보며 농담을 자제할 필요성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