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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이는 진동 속의 침묵이 어색했던가. 보를레스는 마차 밖으로
지나쳐가는 황량한 겨울 벌판을 감상하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보기
로 했다.
「에밀레오는 시즈 님이 제플론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나?」
「네. 귀족들은 수도에서 벗어나는 일에 민감하니까요. 지방 귀족
과 중앙 귀족의 권력 차이는 상당하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데 뭐하
러 수도 밖에 저택을 짓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군.」
보를레스는 제플론의 복잡하고 권의적인 예식에 둘러쌓인 분위기
가 질색이라고 매일같이 투덜대면서도 잘만 살고 있는 괴팍스런 마
법사를 떠올렸다. 헤트라임크 세이서스, 시즈의 양아버지인 그는
냉정한 풍미를 느끼게 하는 외모와는 달리 꽤나 주책맞은 노인네로
마법 연구실의 복잡함과는 대조적으로 단조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
었다. 그러나 궁정 마법원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중앙에 몸을 담
지 않을 수 없다나? 물론 로티븐 아벨로티드 - 궁정마법원장 - 을
대면한 보를레스 역시 그 말에는 동감을 표하는 바였다. 탐욕에 찬
란히 타오르는 눈동자. 지식이나 권력이나 재물이나 할 것없이 밑
바닥없는 욕구를 가진 로티븐을 내버려둔다면 그렇잖아도 썩어가는
엘시크의 폐기처분 기간이 상당히 앞당겨질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시즈 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모든 학인들의 존경을 받으실
거에요.」
「것도 그렇군.」
요 한달 간 자신의 발에 걷어차여 저택 밖로 튕겨져 나간 유약하
기 짝이 없는 학자들의 절규는 회상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엘시
크 전국에서 모여든 원하지 않은 추종자들을 피해 피신, 잠적까지
실행에 옮겨야 했고, 현재는 〈시즈 선생님은 방랑벽이 심하여 어
디에 계신지 아무도 모른다.〉라는 소문을 퍼뜨려 추적의 기세는
많이 잠잠해진 상태였고, 세이탄의 마을 사람들과 합동으로 〈시즈
존재 지우기 작전〉을 펼친 결과, 숲 속에 자리한 저택의 존재는
학인들의 머리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다 왔군. 제플론에서 그렇게 멀지 않지? 여기서 부터는 걸어야야
해.」
「이 곳이 세이탄인가요? 태자 전하의 별궁이 있다고 듣긴 했습니
만 대단히 아름답군요.」
하지만 〈마땅찮은 시즈〉같은 대문학가가 살기에는 서민들의 마
을은 적당치 않다고 에밀레오는 판단했다.
「여어, 보를레스. 보호대상은 어디에 내버려두고 혼자 돌아다니는
거야?」
자칭 빵의 마법사, 로플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시급을 적게 주기로
소문난 제과점의 주인이었다. 기름때가 묻어 울긋불긋한 색채를 자
아내는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가게 앞 의자에 앉아 빵이 익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감기에 걸려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데 걱정할
필요도 없지요. 그것보다 로플레, 제 걱정할 것 없습니다. 로플레야
말로 오븐을 잘 감시하는 게 어떻겠어요?」
「무슨 소리야? 나의 빵 익히는 시간 맞추는 것을 따라올 사람은 아
무도 없다고!」
「그럴까요?」
씨익 웃으며 보를레스는 〈이게 무슨 냄새일까?〉하는 표정으로 코
를 킁킁거렸다.
「호, 혹시 모르니까…. 저 놈의 오븐은 빌어먹게 잘 익어!」
투덜대며 가게로 모습을 감추는 배불뚝이 대머리 아저씨에게 보를
레스는 키득이며 손을 흔들었다.
「이 타는 냄새의 주인공이 로플레의 사랑스런 빵들이 되지 않기를
바라죠.」
뭐지? 이 천박한 말투는!? 에밀레오는 보를레스와 로플레가 주고
받는 대화를 들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보를레스, 어서 가요.」
「하아…. 참을 성이 없군. 학자들은 정신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체력적인 면에서도 끈기를 가져야 해. 너도 마찬가지야, 에밀레오.
아니면 평생 시즈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걸.」
금세 소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역시 시즈를 끌어드리는 것
이 즉효약이군. 보를레스는 그동안 학자들을 상대하면서 나름대로
그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여러가지 분야로 연구해둔 상태였기 때문
에 어린 꼬마 학자 하나 구워삼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제과점의
달콤한 냄새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그의 걸음은 리드미컬
한 속도감으로 땅을 밀어냈고, 그렇잖아도 장신의 넓은 걸음걸이를
따라가기 힘들었던 에밀레오는 연신 달리기와 경보를 오가며 숨을
헐떡였다.
시즈의 저택은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숲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
는데, 호수가에 맞물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쉽게 감탄을 내
놓게 만들었다.
「이곳이야. 아담하지? 이래뵈도 안은 꽤 넓다고!」
「굉장히 아름답네요. 정물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풍경화를 그린 듯
하달까?」
다리를 주무르면서 에밀레오는 주위 경관과 함께 자라난 것 같은
저택의 풍모에 넋을 잃었다.
「역시 모두가 흠모해 마지않는 〈마땅찮은 시즈〉가 직접 디자인
한 저택답지?」
아니나다를까 즉시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를 돋보기를 저택에 들이
대는 에밀리오를 돌아본 보를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초인종을 울렸
다. 딸랑딸랑하고 호수에 일어나는 파문과 함께 집 안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점차 다가왔다.
「보를레스?」
별다른 마찰음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 뒤로 예쁘장한 얼굴이 빼
꼼 고개를 내밀었다. 음성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 보를
레스가 눈을 부릅떴다.
「레소니, 무슨 일이야? 안색이 창백하잖아!?」
「보를레스, 시즈 님이 사라지셨어요. 과자를 굽고 잠시 아이들과
놀아주는 사이에….」
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소녀. 보를레스는 소년이
라면 도저히 풍길 수 없는 애처로움을 뚝뚝 흘리는 레소니를 시즈
는 어떻게 남자로 굳게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순간 의심이 생겼지만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지워버렸다.
「어떻하죠? 또 납치되신 게 아닐까요?」
시즈는 얼마 전, 추종자들의 애원에 못이겨 엘시크 북부에 위치한
한 도시로 아무 말 없이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가 식은 땀을 흘리
며 열심히 레소니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훌쩍이던 소녀의 머리 속
에는 납치라는 이름의 범죄로 깊게 각인버렸다.
「걱정할 필요 없어. 너무 오래 누워있다보니, 산책이라도 하고 싶
어서 나간 것일수도 있잖아. 외출할 때는 깔끔하게 차려입는 녀석이
이 추운 날씨에 가벼운 로브 하나만 걸치고 나갈리가…….」
「흐윽! 시즈 니임 -.」
「형아 운다.」
「에!? 형아 울어? 흐으앙!」
「으아아앙!」
보를레스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 버린 자신의 주둥이에 손바닥
으로 찰싹찰싹하며 응징을 가했다. 하지만 이미 꼬마들까지 합세해
흘려대는 눈물은 저택의 거실 안에 또하나의 호수를 만들 지경이었
다.
「아앗! 레소니, 넬피앙도 없어졌는지 찾아봐줄래? 시즈가 산책 나
갔다면 아마도 함께 없어졌을 거야.」
끄덕인 레소니와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2층 층계를 오르는 행렬은
훌쩍이는 가운데서도 질서정연하게 줄을 정확히 맞췄다. 잠시 후
들려오는 레소니의 높은 톤 음성에 보를레스는 한숨을 내쉴 수 있었
다.
「넬피앙과 구워놓았던 과자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