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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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 님, 시즈 님! 노여움을 푸세요. 분명히 에밀레오가 무슨 오 

해를…….」 

에리나가 울상을 지으며 팔을 잡았지만 시즈는 거침없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를 휙 돌아보고 에밀레오와 같은 장소에 있는 것 

도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그는 자연스럽게 잡힌 손을 풀었다. 

「난 화가 나지 않았어요. 그러니 에리나도 그만 돌아가세요.」 

「그렇다면 어째서…!?」 

「평민을 생각할 줄도 모르는 귀족에게 노여움을 품을 만큼 난 멍 

청하지 않아요. 그런 족속들은 그냥 무시해버려야죠.」 

세일피어론아드에 발을 딛기 전부터 민주주의의 암묵적인 특권계 

층에 대해 극도의 혐오를 가지고 있던 시즈였다. 귀족의 양자이긴 

했지만 자신을 평민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고 있는 그는 에밀레오 

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귀족이면서 제법 그럴 듯한 말을 하는 군.」 

갑작스레 들려온 굵직한 사내의 말에 시즈는 소스라치며 돌아섰다. 

「꺄아아악!」 

길게 솟구쳐 올라가는 비명. 괴한의 사내는 에리나의 고성에 신경 

질적으로 뒷목덜미를 수도로 내리쳤다. 두건으로 눈과 입을 제외한 

얼굴을 신주단지 감싸듯이 감아놓은 괴한은 비명 소리을 들은 두 소 

년이 달려오자 기절한 인질을 옆구리에 끼고 나무 위로 가볍게 뛰어 

올랐다. 엄청난 도약력에 입이 벌어진 시즈와 두 소년을 흔들리는 

나뭇 가지에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처럼 편안한 자세로 앉은 그는 깔 

보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짙은 녹색의 복장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대가 〈마땅찮은 시즈〉인가?」 

「그렇습니다. 그 아이를 돌려주십시오.」 

만면에 당황한 기색을 띄고 시즈가 황급히 대답하자, 괴한은 눈썹 

을 일그러뜨리더니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핫! 요즘 현인이라고 치부하는 자들이 그대를 진정한 현자 

라고 하는 소문을 들었는데…….」 

「원하는 게 뭡니까?」 

괴한의 단홍빛 입술이 비스듬히 휘어졌다. 

「그래도 제법 눈치는 있군. 하지만 아무에게나 할 말이면 이렇게 화 

려한 등장을 연출할 필요는 없었겠지?」 

「알겠습니다. 피르트, 보를레스를 불러오세요.」 

「예? 하, 하지만…….」 

「어서 가세요. 당신이 있는다고 별 도움은 되지 못합니다.」 

피르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이 피가 나도록 꽉 쥐었지만 괴한은 〈 

맞는 말이지.〉라고 말하는 얼굴로 고개를 리듬있게 끄덕거렸다. 피 

르트가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저택으로 달려가자, 그는 에밀레오 

를 가리켰다. 

「저 소년은?」 

「어차피 다른 곳으로 옮길 것 아닙니까?」 

괴한은 갸우뚱거렸지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에밀레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시즈는 에밀레오에게 말도 걸기가 싫었던 것 

이다. 

「뭐 맞는 말이긴 하지. 한데 알고 있으면서도 아까 그 꼬마에게 동 

료를 불러오게 시키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더 기다리면 보를레스가 올 겁니다. 그는 상당한 실력의 기사인데 

이렇게 지체해도 괜찮습니까?」 

「좋아. 〈마땅찮은 시즈〉여, 그 뛰어나다는 학식만큼 용기 또한 가 

졌기를 바라오.」 

「그렇다면 안 갑니다.」 

「에!?」 

「그 말은 목숨이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한데, 난 내 목숨과 다른 이 

의 목숨을 바꿀 짓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털썩 주저앉는 시즈는 잠시 후에는 아예 드러누워버렸다. 보통의 인 

질극과는 다른 반응에 당황해버린 괴한은 칼을 꺼내여 에리나의 목에 

들이대며, 

「이 소녀가 죽어도 좋소!?」 

하고 위협했지만 시즈는,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목숨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내 목 

숨과 꼭 바꾸고 싶다면 그냥 죽여보시지요.」 

하고 뚱한 어조로 대꾸하면 풀밭을 딩굴거릴 뿐이었다. 괴한이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에밀레오에게 시선을 주자, 시즈는 키득키득하고 비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내 목숨을 천만명의 다른 이의 목숨과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어이가 없는지 허허하고 웃어보인 사내는 한숨을 내뱉았다. 

「시즈, 그대를 해칠 마음은 추호도 없소. 하지만 이 여자 아이라면 다 

르지. 제기랄! 그대는 다루기가 드래곤 꼬리로 방울뱀 꼬리의 소리내는 

것 만큼이나 힘들군.」 

「호오, 가능하다는 뜻인가요?」 

「물론이오. 드래곤의 꼬리뼈를 발라 물렁뼈와 연골을 잘라낸 후에… 

빌어먹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하핫, 그대는 참 친절한 사람같군요.」 

「휴우……. 부탁이니 그냥 좀 따라오시오.」 

투덜거리는 말투로 한탄어린 한숨을 내뱉으며 괴한은 나무 위로 몸 

을 날리며 어떠냐는 듯 표정을 지었다. 날다람쥐같은 움직임에 시즈 

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휘파람과 함께 박수를 치며 감탄하자, 다 

시 골치아픈 표정을 지어야 했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말에 소풍을 가는 듯이 두 사람,아니 세 사람 

이 사라져갔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이를 가는 소년을 남겨두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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