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사람을 움직이는 법 (1)
아마도 신의 투사인 성투사, 헤모가 온다고 해도 눈 앞의 이
엘프를 상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보를레스는 절
망을 느꼈다.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엘프는 그의 몸 속에 주먹
을 꽂아넣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걸 확인하려는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비치지 않을 것 같은 청년 엘프는 뒤이
어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하며 물러섰다.
「멈춰주십시오.」
「시즈!」
보를레스는 갑자기 앞을 가로막은 조그마한 청년이 시즈라는
걸 깨닫고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갈색 머리를 날리며 뛰어온 에
리나가 그를 부축했다.
「무사했군.」
「빨리 오셨군요. 뭐 그리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이 싱글거리며 다가온 베이란트가 박수를
쳤다.
「이런, 이런! 인질이 늘어버렸군. 이렇게 고마울 수가…….」
「거기 있는 꼬마도 나와라.」
「꼬마?」
하윌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에밀레오가 숨어있는 나무를 가리켰
고, 시즈는 그 곳에 빼꼼이 머리를 내미는 소년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보를레스, 저 소년은 왜 데려왔죠?」
「시즈, 정정해. 에밀레오가 날 데려온거라고.」
불굴의 장군인 듯 당당하게 외치는 보를레스. 가냘픈 여자아이
의 손에 부축되어 서있는 남자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
광에 눈이 아렸던가? 시즈는 한 손으로 눈을 감싸며 고개를 돌
렸다.
「베이란트, 냉수 한잔 주시겠습니까?」
「음……. 얼음도 띄워주지. 속이 많이 타겠구만…….」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시즈, 그대도 별 수 없겠군. 이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겠지?」
「그렇겠지요.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없는 말투로 한숨을 내쉬는 시즈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하고 때린 베이란트는 말했다.
「유레민트가 말하길 대륙에서 가장 특이하고, 가장 현명한 이
가 바로 그대라고 했네. 그런 자네, 〈시즈 세이서스〉가 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
는가. 하지만 이건 하지 못할 일이 아닐세. 어쨌든 든든한 협력
자가 생겨서 기쁘구만. 오늘은 즐겁게 보내고 가게나.」
「그래도 저보다는 베이란트 님이 더 절박하실 텐데… 오히려
여유롭군요. 아니면 제게 맡기셨으니까 그러시는 겁니까?」
「헛헛헛.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니 더욱 든든하네, 그려.」
결국 시즈는 하윌에게 냉수를 한잔 더 부탁했다. 그런데 그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우물가에 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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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주인님. 촌장 님께서 오셨는데요.」
「…….」
몇 번의 노트를 해봐도 방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침
묵이 대답을 대신하자, 머쓱해진 소년은 겸연쩍게 볼을 긁적이
며 울상을 했다. 사실 소년은 남장을 한 소녀였기에 그녀의 눈
물 그렁거리는 얼굴은 뭍 남정네의 동정을 불러 일으키는 색기
와 애처로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헛기침을 흠흠 해대던 노인은
오히려 미안한지 턱수염의 끝부분을 모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
었다.
「어허헛, 그렇게 울상짓지 말거라. 자꾸 그런 표정을 지으면 다
들 네가 숨길 걸 쉽게 알아챌 거야. 네 둔한 주인님 마저도 말
이다. 그러면 안되겠지? 오늘은 그냥 바둑이라도 한 일국 둘까
하고 왔을 뿐이야. 바쁘신 모양이니 다음에 오도록 함세. 이 노
인네가 왔다고만 전해주시게. 헛헛헛!」
노인은 껄걸 웃었지만 꽤나 실망했는지 그나마 처진 어깨를 탈
골로 착각될 정도로 축 늘어뜨리고 발길을 돌렸다.
「레소니 언니, 촌장 할아버지 어디 아파? 비틀거리네.」
「어휴… 그런 가봐. 앗! 피린,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쫓겨
나고 싶어?」
레소니의 동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추위에 몸을 떠는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위와 배고픔을 피하는 일이 하
루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기에 피린은 당장 사색이
되어 다른 동생들 뒤로 숨어버렸다. 문제는 그들이 이 저택의
숙식여탈권을 시즈가 아닌 레소니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
이었다. 아니었다면 어떻게 소년, 소녀들이 시즈를 가지고 놀 수
있겠는가.
「하여튼… 요즘 너무 투정이 늘었어. 이게 다 시즈 주인님 때
문이라니까…….」
겁에 질려 울먹이는 아이들을 달래놓은 레소니는 한숨을 내쉬
며 시즈의 서재 문을 열었다. 안의 모습은 그녀가 예상하던 모
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너질러진 책들과 그 안에 파묻혀 있
는 청년, 요 몇일동안 무슨 고민이 생겼는지 잠도 안자고 노심
초사하며 책을 살피더니 결국 오늘에야 쓰러진 모양이었다.
「결국 4 일만이네. 어디 보자. 〈중대 왕실에 대한 전설들〉이
라……. 지난 번에 보신 책 같은데 다시 읽으시는 건가?」
잠이 들고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의 손에는 아직도 책이 펼쳐
져 있었다. 살짝 들어 시즈가 보던 페이지에 손톱자국을 낸 후
레소니는 옆의 아직 보지 않은 듯한 책 위에 올려놓았다. 매우
게으른 그녀의 주인은 허락없이 책상위에 준비해둔 서적들을 치
우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여 정리도 주의를 기울려야 했다.
촤아악!
「후우… 이 먼지!」
겨울 기운이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
오자 잘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공중에서 춤추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지쳐잠든 청년을 감싸는 보석인
양 반짝거리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런 모습… 이런 망.가.진. 모습이 가장 어
울리시는 것 같아.」
갑자기 시즈는 코밑을 간지럽히는 머리칼이 거슬리는 듯 입가
를 씰룩였다. 망가진 모습이라고 레소니는 평했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즈는 분명 귀족적인 외모를 가
지고 있었다, 동방 용병들처럼 오목조목한 눈코입이었지만 어린
아이처럼 하얀피부는 그를 소년처럼 보였다. 그건 윤기조차 느
껴지지 않을 검은 머리칼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깊은 듯하면서
도 공허한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면 누가 그를 20살의 청년이라
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에 레소니는 그의 주인님 얼굴에 눈을
바짝 가져갔다.
「귀여워……. 후훗.」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당사자가 눈을 뜬다면 어떤 느낌일까?
레소니는 의문을 던지다가 갑자기 말똥거리며 그녀를 향한 광택
어린 두 개의 검은 동그라미에 의아해하며 자세히 들여다보았
다.
「레소니, 뭐해?」
「으아아아앗!」
그 때, 훌쩍임을 멈추고 주방에서 레소니가 숨겨놓은 사탕을
찾기에 여념이 없던 피린 외의 어린이들은 서재쪽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동지들! 일을 서두르자!」
「옙!」
한 편, 다시 서재.
시즈는 무너진 책더미 속에 깔려버린 레소니를 꺼낸 후 훌쩍이
는 그녀를 열심히 위로하고 있었다.
「레소니, 울지마아! 이 책 내가 모두 치우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