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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경박하기 짝이 없다하여 귀족이라면 불지 않는 휘파람
까지 어색하게 불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가 무엇을 봤는지 고
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로길드를 툭툭 쳤다.
「로길드, 로길드. 방금 전 그 질문 시인하겠어. 그런데 〈마땅
찮은 시즈〉가 아침 일찍 도서관을 찾는다는 게 확실한 거겠
지?」
「역시 그러셨군요.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가 사람들과 마
주치기를 싫어해 이른 아침에 도서관을 들렸다가 간다는…….」
로길드는 왕자의 시선을 쫓던 눈이 도마뱀처럼 쭈욱 찢어지고
토끼처럼 둥실하게 떠지는 걸 느꼈다. 왕자가 탄성을 질렀다.
「드래곤도 제 말하면 꼬리를 살랑댄다더니 과연 말이 무섭
군.」
그들은 멀리에서 직선과는 거리가 멀게 걸어오는 청년의 모습
에 혀를 찼다. 간단한 수(繡) 하나도 놓여있지 않은 칙칙한 빛깔
의- 처음에는 깨끗했을 테지만 -원색 복장에서부터 상상하고 있
던 세기의 현자에 짜자작하고 금이 가고 있었다. 침을 삼킨 왕
자가 중얼거렸다.
「소문을 들었지만 그래도 머리 속에 있던 현자에 어느 정도 배
합될 거라 생각했는데, 소문과 너무나 딱 들어맞는 군.」
「〈마땅찮은 시즈〉를 알아보는 방법은 예지에 빛나는 현안(賢
眼)이 아니라 허수아비에게나 입혀놓을 옷차림새라니……. 완전
히 베라쥬- 엘시크의 변두리 시골마을 중 하나 -에서 막 수도구
경을 하러 온 시골뜨기 학자같지 않은가.」
「전하, 허수아비라니 너무 하신 게 아닐까요? 그래도 구김은
핀 모양입니다.」
보통은 귀족을 보아오면서 그들은 허술한 옷차림에 긴장하기는
처음이었다. 로길드는 〈이렇게 상대를 긴장시키는 방법도 있었
군.〉하고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새로운 긴장기법에 경탄했다.
마치 잠자다 막 일어난 퓨마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청년은
한 손에는 뭔가 들었는지 묵직해보이는 바구니와 다른 손에는 연
금술용품 사전만큼이나 거대한 책을 펼쳐들고 있었는데 자신이 걷
는지 책을 읽는지 구별을 못하는 듯 잠깐씩 걸음을 멈췄다가 다
시 눈을 껌뻑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자신보다 먼저 와있는 사람
들을 보자 의외라 생각했는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
며 그는 계단에 앉았다.
「혹시 시즈 세이서스 후작 공자가 아니십니까?」
물은 소년은 남색 학의(衣)의 로길드였다. 양손을 앞으로 공손
하게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게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마땅찮은 시즈〉라는 이름이 얼마나 긴장을 불러일으
키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중함에 청년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잘못 짚었나하여 실망하려는 두 소
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절 알고 계신 두 분께서는 누구신지…….」
「이 문양을 보고도 모르겠소?」
왕자가 가슴을 펴자 포효하는 사자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시즈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황금 사자가 에도린 왕가의 상징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
만 이 왕국에는 왕가의 상징을 사용할 남자가 여섯이나 됩니다.
게다가 하나의 문장으로 둘의 신분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그는 왕자에 대해 물은 게 아니라 로길드의 신분도 함
께 물었다는 걸 상기한 왕자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는
달리 로길드는 소매로 자꾸만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입가를 가리
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시즈가 차림새와는 반대로 엄청나게 꼼
꼼하다고 느끼고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우스웠던 것이다.
하지만 당황한 자신의 모습 때문이라 생각한 왕자의 째려봄에
눈을 꼭 감으며 웃음을 삼킨 그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후후……. 여기 이 분은 제 4 왕자이신 리페른 전하이십니다.
전 그 시종인 로길드 페노스톨멘 입니다. 고명하신 현자, 〈마땅
찮은 시즈님〉을 뵈여 영광입니다.」
「예. 저도 고명하신 하인, 페노스톨멘 님과 리페른 전하를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고명한 하인 페노스톨멘, 그 말을 들으며 로길드는 시즈가 자
신의 가문에 알고 있다는 걸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과거 엘시
크 초기에 암흑 속에서 묵묵히 왕가를 돕는 페노스톨멘들의 활
약을 아스틴의 학자들은 비꼬아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고명
한 하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들의 능력을 언제
나 당하기만 한 아스틴 학자들의 불만과 시기가 함축되어 있었
다.
「이른 아침에 전하께서 도서관에 납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
까?」
시즈는 꽤나 궁금한 듯 여운만 남을 정도로 살짝 미소를 지었
다. 안개처럼 은은함이 풍겼다. 순간적으로 긴장을 놓을 뻔한 로
길드는 고개를 흔들며 옆구리를 꼬집었다.
〈두려운 이. 옛 전략가와 외교가들은 무표정한 자들을 주의하
라 했고, 어떤 상황에서든 웃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무엇인가? 같이 있는 사람들 모두를 웃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 만약 전하께서 저러한 미소를 띄우실 수만 있다면
이런 위험한 이와 만나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어린 소년이었지만 가문의 교육은 그를 20년 묵은 사기꾼보다
더 머리를 잘 돌릴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왕자는 아니
었다. 아무리 천재라는 명성이 붙었다지만 그것은 배우는데 한
해서 천재라는 것이다. 임기응변과 사태를 파악, 해결하는 힘은
경험이 없이는 힘든 게 당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리페른은 이미
긴장이 완전히 풀어졌는지 마냥 좋은 표정으로 싱글싱글거리며
친한 친구에게 대하듯 밝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