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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 그대는 신흥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
고 있는데 정계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요. 도서관도 이렇게
사람이 없을 때나 들리고… 몇몇 귀족들이 한번 만나 보고싶어
상사병까지 걸렸다 하더이다.」
「글쎄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그리 반갑지는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난 그대처럼 피할 정도까지는 아니오. 하지만 역시 궁중의례
나 조회를 귀찮아하지.」
「혹시 오늘 저녁에 있을 무도회에 참석하실 겁니까?」
「당연히 하겠지요. 밉살스럽기는 하나, 동생의 생일인데…….
혹시 그대도?」
「예. 아하하하……. 너무 숨기만 하면 원로귀족 분들의 미움을
산다는 아버님의 충고가 계셔서 말입니다.」
「역시 대마법사 세이서스 후작이군요. 그 분 말씀이 옳습니다.
그대가 몸을 사리면 〈유명해졌다고 비싼 몸 행세하려고 하는
구나.〉하고 못마땅해할 가능성이 다분하죠. 원로귀족들은 속이
자기 밥그릇보다도 작답니다. 그대가 이해하세요.」
상당히 귀가 간지러울 말이었다. 현재 귀를 후비고 있을 그들
이 들었다면 펄펄 뛰었겠지만 한산한 궁정 도서관 주위로는 아
침노래에 정신이 없는 새들만 있을 뿐이었다. 누가 듣는다고 해
도 장본인이 아닌데 어쩌겠는가. 오히려 왕족을 모함한 죄로 옥
에 갇힐 수도 있었다.
「아하하하. 괜찮습니다. 오늘 밤에 있을 무도회가 지루하시면
저와 정원에서 와인이나 함께 하시죠?」
「그러는 게 좋겠군요. 로길드, 어때?」
「나쁘지 않겠네요.」
「그럼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합시다, 시즈 세이서스 후작 공자.
오늘 이 곳에 온 건 그대를 만나 보고자해서 였는데 절대로 후
회는 없을 것 같소.」
리페른의 말이 끝나자 로길드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둘은 왕궁 깊은 곳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일어서서 배웅을 했
던 시즈는 계단에 다시 앉으며 책을 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
얼거렸다.
「귀족들의 그릇이 곧 나라의 그릇이란 걸 모르는 천재왕자
라……. 보를레스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할만하군. 하지만 페노스
톨멘가… 가 아직 죽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야. 어쨌든 다행이야.
무려 사흘이나 기다리고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이긴 하지만 무
도회에 맞출 수는 있게 됐어……. 만약 오늘이 아니라 내일 왔
다면 난 울어버렸을 거라고. 대신 뜻밖의 수확을 얻었으니까. 고
명한 하인의 맥이 끊이지 않았다는 걸 아스틴네글로드에서 알면
난리나겠군. 어리긴 해도 위험한 아이니까 조심할 필요가 있겠
는 걸.」
〈어쨌든 1 단계는 성공이군.〉이라는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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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떠오른 햇살은 시원스럽게 왕궁 외벽의 복도를 들이닥
쳤다. 굳건히 서있는 기둥에 어둡게 잘려나간 빛자락을 가로지
르며 화려한 사자문양 옷차림의 키가 큰 소년은 온통 푸른색일
색으로 치장한 작은 소년에게 말했다.
「로길드, 그를 직접 만나니 어때?」
「예상 이상입니다. 제 성을 밝힌 게 실수같아요. 저희 가문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그래? 놀라운 걸…….」
「위험한 사람이에요. 게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요. 제 2 별궁- 제
2 왕자의 거처 -에 퍼진 소문과 그의 명성으로 볼 때 아침이라
지만 그를 신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좀……. 전하! 조
심하세요. 〈마땅찮은 시즈〉라는 이름은 그저 뜻만으로 해석해
서는 안 되요.」
「그가 날 어떤 수단으로든 이용하려 한다는 뜻이야? 걱정할 거
없어. 네 말대로라면 날 노리고 접근했다는 뜻일진데 설마 아무
것도 내놓지 않고 원하는 것만 빼가지는 않겠지. 내가 그렇게
놔두지도 않을거고 말야. 난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로길드는 걱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표정을 푼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그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죠?」
「아주 편안한 인물로 느껴지던데 푹신한 침대같다고 할까? 그
래서 더 두렵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렇게 느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께서 전하가 그에게 완전히
녹아버린 게 아닌가하여…….」
넓은 리페른의 보폭을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쫓아가며 로길드
는 어지간히 걱정했는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길드의 말에
서 느껴지는 어감이 이상했는지 리페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녹다니 내가 무슨 사탕인 줄 알아? 하지만 흐물해진 것 같긴
해. 하마터면 본론을 꺼낼 뻔했다고. 잘 생각해보면 나눈 대화는
몇 마디에 지나지 않은데 몇 시간동안 즐겁게 담소를 나눈 듯한
느낌이 들어.」
그는 열심히 수련한 근육이 물러진 게 아닐까 몸을 꾹꾹 눌러
보았다. 어제 저녁에 과일주스를 많이 마시고 자서인지 배가 푹
푹 들어갔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에게 로길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민거리를 모두 털어
놔 버렸을 거에요. 주위에 감시하는 이들이 수도없이 깔려있던
말던 말이죠. 상으로 돌아가면 시종장님께 부탁하여 각종 과일
로 만든 주스를 드릴게요. 좋아하시죠?」
「아! 미안……. 그건 좀 사양하고 싶어. 돌아가면 윗몸 일으키
기라도 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