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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가 무르익어 사람들이 하나둘씩 술에 취해가고 있을 무렵
이었다. 레소니는 시즈가 와인을 조금씩 홀짝거리는 모습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구를 기다리시
는 거지? 그러고 보면 생전 가기싫어 하시던 궁전 연회에를 다
나가겠다는 말을 다 하지를 않나……. 혹시 마음에 드는 귀족
아가씨라도 생긴 거 아니야?
「여기 계셨군요, 시즈 님.」
휙 하고 돌아가는 레소니의 불타는 눈동자. 안타깝게도(?) 그
눈빛에 찔끔한 것은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귀족 여인이 아니
라 리페른, 엘시크의 두 번째 왕자였다. 그와 시즈와의 전후 사
정을 알리 없는 레소니는 〈아까 주인님을 무시했던 그 왕자잖
아.〉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사람을 어째서 주인님은,
「리페른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며 맞이하는 걸까? 레소니는 입술을 쏙 내밀고 시즈가 건네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시종이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걸 알
고 있는 그녀는 극구 사양했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다면서 시즈
가 억지로 권한 술잔이었다.
「이분은?」
「제 시종인 레소니 라고 합니다.」
리페른은 왕자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술잔만 홀짝거리는 예의없
는 시종이 서민 중에서도 아주 미천한 서민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색기가 흐르는 거지?〉
와인으로 붉으스럼하게 달아오른 레소니의 흰 얼굴은 왈츠가
끝나고 이어지는 은은한 음악 속에서 더욱 유혹적이었다. 하지
만 연회장에 시녀가 들어올 수 없는 게 아니었다. 뭐하러 굳이
여자를 남장을 시켜 들어오겠는가. 쓸데없는 잡념이라 판단한
그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시즈 님 가시죠. 약속대로 정원에서 와인을 함께 마시기로 했
잖습니까? 로길드가 지금쯤 자리를 마련해두었을 겁니다.」
「예? 하핫……. 저는 그저 정원을 와인 한 잔과 함께 산책이라
도 하자는 뜻이었는데 번거롭게 자리를 마련하셨다니. 이거 가
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술기운 때문일까? 시즈는 평소보다 더 은은하고 부드러운 미소
를 짓고 있었다. 요전 미젠 왕자의 웃음과 비슷했지만 그의 미
소는 즐겁게 하기보다는 편안히 가라앉히는 힘을 가지고 있었
다.
「레소니, 미안하지만 나는 전하와 함께 정원에 가 있을게요. 아
버님께 가 계세요.」
도리질을 치며 매달리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 보를레스와 마찬
가지로 시즈의 미소를 거역할 힘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헤
트라임크의 뒤에 가서 한숨을 내쉬는 소녀. 목덜미에 갑자기 뜨
뜻한 기체가 들이박힌 대마법사는 화들짝 놀랐다.
「읏? 아니, 레소니 아니냐. 시즈는 어디에 가고?」
레소니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왕자와 함께 정
원으로 향하는 시즈를 가리켰다.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
덕이는 헤트라임크.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듯 그는 레소니가 내
뿜는 한숨의 원인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호오……. 시즈가 널 내버려두고 간 모양이로구나.」
그러자 이번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소녀. 놀란 헤트라임크가 살
펴보니 이미 그녀의 입김에 술기운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지 아
니한가. 그녀는 와인 한잔에 쉽게 취하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시즈, 이녀석. 연회장에서 하인에게 술을 주다니!〉
평소였으면 벌써 꾸짖으며 집으로 돌려보냈을 테지만 레소니에
대해서는 시즈를 비롯한 그의 저택 하녀들의 이야기를 엿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울먹이고 있지 않은가. 다그쳐서 엉엉
울어버리면 그것만큼 망신도 없었다. 할 수 없이 헤트라임크 세
이서스, 이 시대 엘시크의 대마법사는 처녀에 가까운 아이 달래
기를 시작했다.
「후우……. 레소니, 여기 앉으렴. 이걸 먹으면서 기분 좀 풀려
무나. 요것도 맛있단다. 시즈가 좋아하는 여성상이라도 말해줄
까?」
그녀의 눈물이 단숨에 그쳤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