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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완전히 봄이군요. 밤바람도 시원하지, 차갑지가 않습니
다.」
기분을 약간 들뜨게 할 정도의 서늘한 바람이 소년과 청년의
머리를 흔들어 놓았다. 이제는 묶어놓을만큼 길어진 머리. 시즈
는 게으른 성격에 머리가 어떻게 자라던 내버려두었지만 봄의
바람에 눈을 찌르게 되자 저택에 돌아가면 짧게 잘라버릴 것을
다짐했다.
「예…….」
알게 모르게 힘이 없는 대답. 리페른은 연회장에서의 국사 문제
때문에 젊은 대현자의 기분에 거슬렸을까봐 자신이 없었다. 그래
서 따뜻한 시즈의 미소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우선 그곳으로 데려가자.〉
〈그곳〉은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정원
사가 미술작품처럼 가꿔놓은 관상수에 가려 발견하기가 쉽지 않
았다. 로길드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전하, 시즈님. 일찍 오셨군요. 좀더 연회를 즐기시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이쪽으로…….」
그가 안내한 장소에는 잔디 위로 검은 비단이 깔려있었고, 갖가
지의 고급 와인과 간단한 먹을거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은 리페른과 시즈가 잔을 부딪혔다.
「아까 제 발언으로 인해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과 와인을 홀짝임, 둘을 반복하는 왕자의 말은 곧
막혔다. 음미하며 마셔야할 와인을 시즈가 갑자기 한번에 와락
목 뒤로 넘겨버린 것이다.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미는 청년. 원
래는 로길드가 따라주어야 하지만 그는 왕자에게 잔을 내밀고
있었다. 무례함이 돋보이는 행동이었지만 로길드는 당연한 듯 보
고만 있었고 리페른 역시 공손하게 술을 따랐다.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시즈는 와인의 향만 맡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
다.
「짐작하고 있습니다. 신경쓰지 않습니다.」
로길드와 리페른은 그 말에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둘은 제대
로 늑대를 피한 것이다. 다른 왕자들이 방해를 했다면 어찌됐을
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리페른들이 호랑이를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보고만 있었던 게 아닌가. 더욱이 중요한 것은 시즈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은 넷째 왕자의 국사가 될 마음이 거
의 없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말과 현재까지 리페른에
게 접근하는 행동을 살펴볼 때, 이 현명한 학자는 자신들의 편에
서있는 게 틀림없었다.
「감사합니다. 시즈 님, 아까 보셨다시피 왕궁의 기류가 격돌하
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저를 도와 강국 엘시크를 재건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십니까?」
「죄송합니다만… 아침에 물으셨을 때와 저의 대답은 같습니
다.」
「그러시다면 저도 더 이상 청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앞의 대답과 같습니다.」
「아니요. 그게 아니니다. 로길드, 설명 좀 해주겠어?」
말을 바로바로 끊어버리는 시즈의 어조는 꽤나 귀찮아 하는 듯
해 리페른은 말을 이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분위기의 환기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행동만으로도
분위기의 환기는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리페른 전하께서는 다섯째 왕자전하
를 제외한 다른 모든 왕자분들과 왕위의 패권을 두고 서로를 견
제하는 상태입니다. 리페른 전하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시다고
해도 다른 왕자분들 또한 수재라는 말을 듣는 실력자들이십니다.
이대로 평수를 유지하다가는 일대 다수의 단점이 드러나게 될
겁니다.」
일대 다수의 단점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간단한 논리였다. 머리수
가 많은 게 이긴다는 것이다. 어느 역사에서나 옳은 선택을 한
이들이 언제나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틀린 선택을 굳건
히 믿은 다수에 의해 묵살 또는 매장 당하거나 제거 당했다. 그
리고 시대는 다수의 편을 들었다. 웬지 다수의 말이 맞게 들리는
게 인간의 심리다. 지금은 평수를 이루는 왕자들의 견제지만, 많
은 모함이 이어지고 이어질수록 리페른은 고립되고 무너질 게
뻔했다. 그러기 전에 그는 뭔가 다른 기반을 마련하여 앞서나가
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