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200)

                                              -77-

「시즈 님이시라면 아실 겁니다. 엘시크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계속된 폐단과 모순적인 제도가 너무 귀족들에게만 몰입되어

버렸습니다. 귀족국가라는 명칭은 이제 절대로 장점이나, 칭찬

이 아닙니다. 경멸과 비웃음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현

상태에서 엘시크를 일으킬 수 있는, 그리고 바꿀 수 있는 분은

리페른 전하 외에 없습니다.」

「그 말은 제가 전하의 곁에 서라는 말과 무엇이 틀립니까? 아

마 필요로 하시는 것은 제가 아니라 제 뒤의 거대한 학자들의

지지일겁니다. 하지만 저는 학자들과 별 관계를 쌓은 일도 없습

니다.」

사람들은 정곡을 찔리면 주춤하기 마련이다. 그러자 이제는 다

시 리페른이 나섰다.

「시즈 후작 공자가 내 편에 서지 않아도 좋습니다. 당신이라면

아실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묻겠습니다. 어찌하면 제가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리페른은 그리 절실하게 왕좌를 원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극성스럽게 부추키는 로길드와 함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낭

만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용을 보면 누가 용을 그냥 두겠는

가. 끊임없는 견제와 모함은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매일같이 달려

드는 자객들과의 착실한 검술 연습은 절대로 면역성이 생기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권력 다툼에

합류하지 않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가다가는 신경쇠약

으로 요절할 듯했다. 결국 그는 폭발하고 만다.

〈왕위 다툼에 참여하지 않고도 이런 견제와 감사에 시달릴 바

에야 차라리 왕위를 노리며 당당하게 당하겠다.〉

다른 이들의 과도한 주의가 오히려 막강한 적 하나를 불려버린

셈이었다. 원인이야 어떻든 왕위에 마음을 잡은 리페른은 뛰어난

능력을 발판 삼아 착실히 다른 경쟁자들을 괴롭혔다. 어찌 보면

보복일지도 몰랐지만 이 역시도 골치아픈 문제를 만들게 된다.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왕자들까지 견제를 시작했고, 심

지어는 아예 의기투합을 해버린 것이다. 아마 로길드가 없었다면

벌써 왕위 포기 선언을 해버렸을지 몰랐다. 하지만 역시 견제에

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고 리페른 그는 뭔가 다른 힘이 절실

했다.

시즈는 작위도 없는 일개 학자인 자신에게 맞지 않을 질문이

날아오자 꽤나 당황했다. 좀더 돌려서 물을 줄 알았는데……. 그

만큼 궁지에 몰렸단 뜻 일테지.

〈이런 이들을 이용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자신감이 없었다. 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전하께서는 〈리미뇌〉이라는 이름을 가진 홀에 대해서

아십니까?」

「아니, 난 모르겠소. 로길드, 알고 있나?」

「고대의 성물 중에 하나인데, 예로부터 대륙의 왕을 뜻하는 상

징물입니다.」

「대륙의 왕? 난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한 게 있었다면

진작에 유명해졌을 게 아닌가? 어째서 알려지지 않은 거지?」

왕자는 모르면 모르되 어느 것에서나 평균을 훨씬 웃도는 영재

교육의 표본이었다. 하물며 왕실에 대한 유물이나 역사에 대한

지식은 왕실 자제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방어구이자 무기였다. 그

런 리페른이 모른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유

물이라는 뜻이었다.

「로길드, 혹시 알고 있어?」

로길드는 입술을 만지작거렸따. 왜 시즈가 잊혀진 유물에 대해

거론하는지 그 저의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로길드!」

「예, 전하. 〈리미뇌 홀〉은 고대 지배자들의 후계자가 왕이 되

기 전에 반드시 가져야 했던 성물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봉인되었습니다.」

「봉인되었다? 로길드가 말하는 게 시즈 님께서 말씀하신 존재

와 같은 것인가요?」

「글쎄요.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다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리미뇌의 존재와 실제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시즈

또한 책으로 알아내기는 했지만 엘프들의 증언으로 확신을 얻었

다. 그런데 페노스톨멘가의 어린 소년은 마치 당연히 알고 있었

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모두 다 알지는 않겠지. 홀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비밀……. 엘프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것은 분명 비밀이었다. 시

즈가 보아온 어떠한 책에도 그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

다. 그렇기에 영악한 흉내를 내려하는 청년은 〈같다고도, 다르

다고도〉라는 모순적인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