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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엘시크 전역에 봄비가 부슬부슬 땅을 적시고 있을 때 세이탄 별궁의 관리자,
멜로운은 갑작스런 소식을 전해 받는다. 아침과 점심, 해가 중천에 다르기 이전에 리페
른 왕자가 별궁을 방문한다는 소식이었다. 보통 왕족들은 방문하기 2, 3일 전에 통보를
했고, 또한 당연하다고 여겼던 멜로운은 현재 시녀와 시종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닦달하
며 화풀이를 했다.
"여기 구석에 먼지가 남아있잖아! 이 곳 담당 누군데 일을 이따위로 해! 당장 걸레로 안
훔쳐!?"
한편 희미하게 윤곽이 잡힌 세이탄 별궁의 전경을 감탄이 서린 시선으로 리페른은 바라
보고 있었다. 도로가 잘 닦인 수도의 길을 벗어나 들어선 평평하지 않은 산길, 제플론커
녕 언제나 왕궁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였다. 느릿느릿하지만 깊고 높게 출렁이는 흔들거
림은 기분 좋게 자신을 대지의 심장부로 이끌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세이탄은 아름답군요."
"과연, '마땅찮은 시즈'가 살아가는 마을이라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세이탄은 아름다운 별궁이 있는 곳이라는 별명보다 '마땅찮은 시즈'가 은
거하는 곳으로 유명해지고 있었다. 그 누구는 시즈의 이름을 따서 '시즈 세이탄(마땅찮
은 세이탄)'으로 부르는 게 어떻겠냐는 짓궂은 농담을 내놓았을 정도였다.
로길드는 리페른의 물음에 대한 자신의 대답에 스스로 흠칫했다. 그 또한 시즈의 영향
력 안에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시즈는 이번 여행에 동참을 한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리페른을 시험하는 게 아닐까하는 로길드의 의심에 묶여있던 매듭을 풀어주었고 그의
주군에게 주의, 또 주의를 확실하게 당부하게 만들었다. '리미뇌 홀'은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윤곽이 잡히지 않는 존재였으나 시즈라는 당대의 명사는
눈앞에서 그들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지지는 고대의 어떤 유물에 뒤지지 않
을 만큼 거대하다. 감탄에 젖어있는 리페른을 바라보며 로길드는 그가 자신이 탄복했을
때의 총명함과 판단력을 보여주기를 기원했다.
이번 탐사에는 상황판단이 뛰어난 기사와 새파란 신참을 비롯하여 노련한 도굴범까지
끼어있었다. 훈련을 받은 후 처음 임무가 왕자를 호위하는 수행이라는데 긴장한 신참 기
사들은 가까워진 별궁의 아름다움에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는 노련한 기사와 도굴범과
는 다르게 뻣뻣하게 굳어진 기마 자세로 골렘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별궁에 다다르자 백색찬란한 성벽에 비친 아침햇살 뒤로 나팔소리가 꼬리를 늘
어뜨리며 울려 퍼졌다. 끼릭끼릭하고 쇠사슬 풀리는 소리이 시간과 함께 움직였고 계속
될 것 같은 거대한 성문의 내려짐은 땅과 굉음을 일으키며 마찰함으로 끝을 맺었다. 굉
음에 놀란 말을 기사들이 진정시켰고 성에서 넉살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의 중년 사내가
두 손을 감싸쥐고 걸어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리페른 제 2 왕자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깊이 허리와 고개를 숙이는 사내에게 리페른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죄송합니다. 통보도 하지 않아서 당황했겠군요?"
"별말씀을‥. 언제나 별궁을 관리하는 게 이 곳의 모든 이들이 가진 소임입니다. 저희들
도 살아가는 곳이니 만큼 애정이 없겠습니까? 언제라도 오셔도 괜찮습니다."
그야말로 천(千)의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성의 창 밖으로 몰래 보고 있던 한 시녀와 시
종는 과연 아래에서 사근사근한 미소와 동작을 보여주고 있는 중년 사내가 방금 전까지
복도 벽에 걸려있던 액자의 먼자에 광분하던 사람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성안에서 심적
으로 절규하고 있는 사람들에 아랑곳없이 중년사내 멜로운은 상냥한 미소로 왕자일행에
게 다가갔다.
"어서 드시지요. 음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제 봄이 되어 세이탄이 아주 아름다울
시기입니다. 전하께서 아주 시간을 잘 맞추어 별궁을 방문하신 거지요."
"아닙니다, 멜로운 별궁 시종장. 전하께서는 식사만 하시고 바로 출발하실 것입니다."
"예?"
고작 16세 가량의 소년이 한 말에 멜로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식사할
곳으로 왕자일행을 안내하며 듣고 박수를 치며 말했다.
"호오‥. 고대 마법물을 찾으러 탐사를 하신다고요?"
"예. 그런데 요즘 세이탄은 어떻습니까? 꽤나 시끄럽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시끄럽지요. 이 숲에는 예전부터 엘프들이 살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답니다. 자꾸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주민들에게 화가 난 모양이더군요."
"정말이었군."
나이에 맞지 않게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로길드와 리페른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멜
로운은 자신이 헛소문의 전도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가끔씩 마을
에 물건을 사러간 별궁의 시종, 시녀들이 해준 이야기를 믿고 - 약간 과장하여 - 말한
게 죄라면 죄랄까? 사실 별궁 사람들만 오면 체스를 두고 있다가도 일어서서 검술연습
을 해대는 세이탄과 엘프 청년들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엘프들을 만나는 게 쉽지 않겠군요."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리페른은 곧 멜로운이 거칠게 손을 휘저으며 하는 말에 적이 안
심했다.
"아닙니다, 전하. 얼마 전부터 '마땅찮은 시즈'님이 나서주신 덕에 웬만큼 분위기도 진정
되었습니다. 다만‥ 시즈 님이라고 해도 분쟁을 원천 봉쇄할 제도적인 힘을 가지고 계시
지 않기 때문에‥."
'그렇군. 그래서 내게 부탁을 한 게로군.'
"대단하군요. 시즈 님은‥. 훌륭하게 될 떡잎을 시험해봄과 동시에 끼어 들지 않고 분쟁
을 해결하려 전하를 끌어드리다니 말입니다. 저였다면 직접 권력을 움직였을 텐데 말입
니다."
현재 로길드가 느끼는 감정은 완전한 승복이었다. 이런 분쟁해결을 위해 정계에 발을 들
여놓는다면 주위의 반대귀족들도 방해할 기미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시즈,
그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증명한 셈이었다.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적인 자
에게 승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이 아니라면 감탄도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이 정치계
와 전쟁의 암투였다.
"그렇다면 식사를 하신 후 시즈 님을 만나시겠군요. 그러시다면 먼저 시즈 님의 저택에
통보를 해놓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한 편, 시즈는 다가온 계획의 마지막 실행을 위해 분주하기 이를 때 없었다. 방금 전 왔
다간 별궁 전령사의 말대로라면 곧 멋진 연극을 실행해야 했다.
"아니야, 아니야. 너무 움츠려 들었잖아. 그래가지고는 '이건 연극입니다. 알아 차려주세
요.'라고 말하는 격이라고!"
"그럼 어떻게 합니까? 당신의 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까?"
"아니, 그럼 하지 않겠다는 건가? 어차피 해야 할 게 아닌가."
하윌은 처음 만났을 때는 죽자살자 날뛰던 보를레스가 겁먹은 달팽이처럼 우물쭈물거리
자 어이가 없었다. 그가 어찌 알겠는가. 보를레스가 겁을 먹고 있는 이유는 살기가 아니
라 유레민트의 양친이기 때문임을‥. 현재도 보를레스의 마음 속에는 호승심이 가득가
득 넘쳐나고 있었지만 하윌의 단아한 얼굴 뒤로 자꾸만 유레민트의 향긋한(?) 미소가 아
른거렸다.
'젠장! 유레민트의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벌써 땅바닥을 기었을 거라구. 딸래미 잘 둔 것
에 감사해야 할거야.'
라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딸래미 잘 둔 것은 인정하겠지만 -주장을 머리 속으로 채워
놓으며 토라진 어조로 소리쳤다.
"해요. 한다구요!"
"남자 녀석이 토라지긴‥. 그래가지고 누가 딸을 줄지 내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
"흐아아아압!"
갑자기 보를레스의 검이 소드 마스터에 가까운 투기를 뿜기 시작했다. 옆에서 다른 이들
을 토닥이던 시즈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단순하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