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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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벌써 도착했군. 준비가 제대로 되었을까?'

불안한 심정은 시즈의 얼굴에 눈곱만큼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왕자의 옆에 부복해있는 

촌장을 힐끗거리니 주름진 눈가에 억지로 윙크를 보낸다. 내심 광소(狂笑)하며 시즈는 

다급하게 외쳤다.

"전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급합니다. 어서 가시지요."

이미 연극은 시작되어 있었다. 숲과 마을 곳곳에서 불길이 솟아 마치 전쟁을 방불케 했

고,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로 귀가 따가웠다.

"저의 힘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역시, 언변 하나로 불만을 언제까지나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쉬며 시즈는 불타오르는 가옥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리페른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기사들에게 돌격을 명할 생각인 듯 했다.

"기사들은 들으라."

"저, 전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무슨 일인가? 로길드. 지금은 급해. 마을이 불타고 있다. 사람들이 죽고 있어."

"그 날 해드린 말을 잊으셨습니까? 통치자는 언제나 중심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기사들은 로길드의 말에 불만인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이자 총명한 주

군인 리페른은 무언가를 회상했다. 현재까지 로길드의 말을 따라 틀린 결정을 한 일이 

몇이나 있었던가. 다시 한번 로길드가 소리쳤다.

"전하께서는 인간만을 통치하실 겁니까?"

"! ‥고맙다, 로길드. 너로 인하여 오늘도 하나의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어. 기사들

은 우선 저들의 싸움을 말리라. 서로 떨어뜨려 상처입지 않게 해."

그의 외침이 의외였을까? 기사들은 무엄하게도 소리치는 왕자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뭐하고 있는 건가?"

다시 한번 소리치고 나서야 기사들은 왠지 밝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대답하며 말을 움직

였다. 과연 말을 타고 몰아쳐 가는 기사들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들은 추호의 망설임 없

이 엘프와 마을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고 그 활약에 싸움은 순식간에 식어갔다. 하지

만 그 대단한 기사들의 검과 창으로도 하나의 결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너무나 격렬하

게 싸우고 있는 두 사내를 막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기사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어찌된 일인가? 막을 수가 없다니‥. 대륙 최강이라는 궁정 기사단의 실력은 그저 허명

(虛名)이었나?"

혀를 차며 기사들을 제치고 놀랍다는 실력자들의 싸움에 가까이 다가간 리페른은 금새 

눈이 휘둥그래졌다. 장신의 검사가 휘두르는 검은 기둥둘레가 한 아름은 될만한 나무를 

뒤흔드는 바람을 일으켰고, 검풍에 긴 머리를 휘날리며 공격하는 엘프가 내딛는 걸음에

서 들려오는 굉음은 멀리서 바라보는 이들의 고막을 아프게 했다. 검술에서도 약간의 견

식과 경험이 있던 리페른은 아예 입이 쩍 벌어져 닫힐 줄을 몰랐다.

"저, 저, 저, 저 사람들은 뭐, 뭐야?"

입을 다물 수 없는 건 시즈도 마찬가지였다. 골치가 아픈 듯 이마에 손을 올리며 그는 머

리 속으로 절규했다.

'시늉만 하라고 했지. 누가 정말로 싸우라고 했어!? 내가 미친다니까!'

아침부터 기미가 보이더니 이제는 아예 불이 붙어버린 모양이었다. 보를레스는 하윌에 

대한 걱정이 아예 증오로 바꿔버렸는지 살기어린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하윌은 죽지 않

은 만큼만 부러뜨릴 생각으로 급소를 치고 박았다.

"흥, 그 동안 실력이 조금 늘었군. 어디서 동방 검법을 배운 모양이지?"

"솔직히 말하시지. 내 검을 피하기 힘들다고 말이야!"

"인간들은 착각을 진실로 오해해서 탈이야. 이번에는 그 맷집에 구멍이 뚫리게 해주지."

"나야말로 그 자존심을 반으로 갈라주겠어."

그 때였다. 숲 속에서 사람몸통 만한 화염구가 날아온 것은‥. 족히 반경 3m 안의 생물

을 폭사시킬만한 화염구는 도저히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내를 기겁하게 만들

었고 개가 꼬리 감추듯 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파이어볼! 저 정도면 가히 2써클 이상이로군."

2써클의 파이어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말은 숲 속에 3 클래스 이상의 마법사가 있

다는 말이었다. 긴장에 물든 기사들과 왕자에게 시즈가 말했다.

"자아‥. 갑시다. 저와 함께라면 마법을 난사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숲 속은 조용했다. 그들이 다가가자 숲 속에서 한 무리의 젊은 엘프들과 그 

중심에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던 늙은 엘프들이 천천히 걸어왔다.

"협상은 결렬되었소. 시즈 세이서스. 그대의 별명처럼 나 역시 그대가 마땅치 않으니 그

만 돌아가시오. 그 동안의 노력을 생각해서 이번에는 보내주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

을 거요."

싸늘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과연 숲 속의 온화한 귀족이라 불리는 엘프에게서 나오는지 

의심스러웠다. 연극이라지만 시즈도 흠칫거릴 지경이었다.

'이 양반들이 왜 이렇게 연기를 잘해? 서커스단 출신이라도 되는 거야?'

"베이란트, 흥분하지 말아요. 당신들, 엘프의 바램을 들어줄 사람을 데려왔으니까‥. 엘

시크 제 2 왕자이신 리페른 전하입니다."

"내가 리페른이오."

엘프들이 화살을 겨누는 상황이었지만 소년은 가슴을 폈다. 자신은 한 국가의 왕자였기

에 절대로 움츠려서는 안됐다. 고작 17 세 정도의 소년이 왕자라며 앞으로 나서자 베이

란트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 자신 있는 소년의 모습에 이채를 띄었다.

"재밌군, 재밌어. 시즈, 자네의 말대로라면 이 작은 전하께서 우리의 바램을 들어준다는 

말인가?"

"그렇소. 내가 들어줄 수 있소. 엘프 노인장, 그대는 엘프들의 삶의 장소에 인간들이 들

어오지 않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소. 맞소?"

"그렇습니다. 인간의 왕자여‥."

"들어주겠소. 하지만 그 전에 조건이 있소."

"무엇이오? 할 수 있는 조건이길 바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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