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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 숲을 몇 자루의 횃불에 의지하고 있는 그들에게 너무나 불안한 존재였다. 하윌의 귀뜸을 받은 시즈가 리
페른에게 다가왔다.
"전하, 하윌 씨가 여기서 우선 노숙을 하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모두들 여기에 짐을 풀고 노숙 준비를 하도록!"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품위 있게 앉으려하는 기사들의 얼굴에 안도감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몇 걸음 지나서 검으로
자르고 발로 밟아야 할 정도로 수풀이 우거진 숲에서 말을 이용한 편한 여행은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왕자를 제외
한 모든 이들이 자신의 침낭과 식량을 지고 있기에 그 피로감은 더 했다.
"어때요?"
모두가 골아 떨어진 후 보초를 자청한 시즈는 마치 하늘과 대화라도 나누듯 허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작은 음성도 선천적으로 뛰어난 청각을 타고난 엘프에게는 생생히 들렸다. 뒤척거리며 하윌은 잠꼬대처럼 대답했다.
"영역을 중요시하는 건 모든 종족이 동일하지. 이 곳은 그들의 영역 한복판이야. 지금쯤 타 종족의 냄새를 맡고 흥
분했을 걸."
그 또한 매우 작게 말했지만 시즈는 바람으로 흩어지는 음성의 조각까지 모아서 들을 수 있었다. 점점 바람은 그에
게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친구로서 그를 선택한 듯 했다. 친구는 멀리서 움직이는 한 떼의 저돌적인 종족
들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들은 하윌의 말처럼 흥분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손에 든 무언가로 땅이나 나무를 후려
갈겨 찢어지는 소리를 만들었다.
"오크로군요. 처음부터 조금 거친 상대는 힘들텐데‥."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시즈는 기사들과 리페른들을 깨웠다. 보를레스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숙련
된 기사들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무리가 위협을 하고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마치 신호처럼 무언가를 후려치는
소리는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화답하듯 들려왔고 왕자 일행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온다. 왼쪽!"
하윌의 외침과 동시에 수풀을 뚫고 검은 물체들이 튀어 나왔다. 무게 있게 보이는 몸체에도 불구하고 날렵하게 달
려드는 그것들은 영원한 드워프의 숙적, 오크였다. 말도 없고 숨을 곳은 많은 숲 속은 준비된 그들의 함정이나 마찬
가지였다.
오랜 훈련으로 전투에 숙련된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부상과 사망이 잇달았을 것이다. 그 증거로 시즈는 벌써
등에 도끼가 꽂힐 뻔하며 보를레스의 도움에 무사하게 버텼다.
"휴우‥. 물러났나?"
아무런 소득도 없는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오크들은 서서히 공격을 거두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는 한 기
사의 안도에 모두들 긴장을 풀려 하자 더부룩한 수염장식을 한 장년 기사가 소리쳤다.
"모두들, 긴장을 풀지 마라. 오크는 소규모 전투에서 효과적인 전투방법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들은 규칙을
가지고 공격을 할 줄 아는 종족이야."
그는 이번 탐사의 부대장- 대장은 왕자 -로 리페른이 특별히 선별한 하스폰티안 남작이었다. 궁정 기사단이 아니라
왕성의 경비대장 중인 남작은 궁정 기사단의 노련한 단장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게다가 전투가 아닌 경비를 주로 했기 때문에 자객을 상대함에 있어서나 암투(暗鬪)같은 소규모 전투에 강
했고, 뭍 종족들에 대해서도 박식했다.
"다들 전하와 현자 님을 보호하라. 원을 만들어 주위를 경계하라."
"나도 싸울 수 있습니다."
두 마리의 오크에게 과다출혈로 인한 경련현상을 알려준 리페른은 자신감이 생겼다. 수행원과 호위들을 물리치고
앞으로 나서는 그에게, 아니 모두에게 암흑 속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팍! 팍! 퍽!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액체, 그리고 썩는 계란을 코에 들이댄 듯한 악취가 일행을 감쌌다.
"쿨럭! 쿨럭! 뭐지 이 악취는?"
"'트폴캬야'입니다. 큰일이군요."
돌이나 화살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일행이었으나 로길드는 차라리 거대한 바위였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
다. 어둠 속에서도 쉽게 알아챌 정도로 안색이 창백해진 소년의 말에 시즈가 탄식을 내뿜었다.
"이게 '트폴캬야'인가? 하윌, 이 주변에 씻을 수 있는 물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주변에는 없다."
"트폴캬야!? 로길드 무슨 뜻이야? 너와 시즈 님 모두 왜 그렇게 걱정하는 거지?"
"전하께서는 오크들이 왜 굳이 공격을 하지 않은 채 냄새만 묻여 놓고 돌아갔는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
그제서야 리페른과 기사들도 눈치를 챘다. 미간 사이에 정확한 스트레이트 한 방을 먹었는지 리페른이 한 손으로
머리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이 냄새를 씻어낼 때까지는 추격을 피할 수 없는 건가?"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을 잡아먹는 타 종족, 특히 고블린 들도 이 썩은 열매를 사용합니다. 한 마디로 이 냄새는
그들의 먹이라는 뜻이지요. 이 냄새의 의미에 대해서는 뭇 짐승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한 마디로 저희는 이 숲의
먹이가 된 겁니다."
'숲의 먹이가 되다.'
오크의 무서운 기습을 받고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 그들은 로길드의 마지막 한 마디가 가슴속에 섬뜩
하게 파고드는 걸 느꼈다.
"전하, 이번 탐사는 아무래도 제대로 준비를 하여 돌아오는 게‥."
"이대로 전진한다."
"예?"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실패를 의미한다. 그대들에게 미안하지만 이번 탐사에서 홀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한다면 모든 귀족이 비웃는다. 아직 희생자도 없지 않은가. 좀더 자신을 믿기로 하자. 나는 나를 믿는다. 내가 아니
라며 누가 하겠는가?"
왕자의 짧은 연설은 금방 분위기를 바꿔 놓았지만 하스폰티안은 어둠에 가리고 있던 얼굴을 찌푸렸다.
'전하께서는 첫 전투에서의 불안을 떨친 후 자신감에 취하셨다.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나 전략가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하기 마련이며, 그 실수의 대다수가 처음의 전투나 전쟁을 치른 후다. 이 결정이 후의 전하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노련한 기사장교의 생각대로 왕자는 자신감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평소에도 뛰어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그에
휘둘리지 않는 왕자였지만 처음으로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서 적을 물리쳤다는 의미는 소년을 들뜨게 만들었다.
"전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어서 이 곳을 떠나야 합니다. 물이 있는 곳에 얼마나 먼저 몸을 씻느냐에 생사가 걸려
있습니다. 숲의 귀족이신 분께서 수고를 해주셔야 합니다. 앞장 서 주십시오. 저희가 따라갈 수 있는 정도의 속도로
최대한 빨리 가주십시오."
"좋소."
기사들이 짐을 꾸리자 하윌은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나갔다. 수풀이나 나뭇가지들도 그 움직임을 막기는 힘들었다.
그 뒤를 기사들과 시즈들이 뒤따랐다. 기사들은 관절부근을 제외한 갑옷의 판넬을 대부분 떼어내 들고 있던 짐과
함께 지고 있었다. 로길드는 젊은 기사가 등에 업고 달렸고 왕자는 제법 쌓아둔 체력이 있는지 잘 따라왔다. 시즈는
여전히 누구나 감탄한 만한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하윌을 뒤를 보를레스와 함께 가장 먼저 뒤쫓았다. 근래의 보를레
스와의 훈련 때문인지 가벼운 동작이 대부분 돌아온 듯 했다. 하지만‥.
"으앗!"
쿵!
"함정이다!"
갑자기 꺼져버린 땅 속에서 보를레스와 시즈가 땅에 부딪힌 등을 붙잡고 괴로워했다. 기사로서 숙련된 이들이라지
만 숲의 어둠은 거의 사물의 윤곽에 대한 파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간단한 함정조차 삶과 죽음을
갈라놓을지 모르는 공포였다.
"고블린의 함정‥. 호랑이를 피하여 늑대 둥지에 들어왔군."
"괜찮아요? 보를레스."
시즈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대로 몸으로 뭉개버린 보를레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살을 더 찌워야 겠군. 남자가 그렇게 무게가 없어서야‥."
"하핫! 다치진 않은 모양이군요. 어서 갑시다. 이 함정을 고블린이 설치했다면 고블린들의 둥지가 가까이 있을 겁니
다."
"이미 늦었어. 바위나 나무에 몸을 숨겨!"
하윌이 소리치자마자 수풀에서 돌멩이가 무더기로 날아왔다.
"끽! 끼익!"
"캬아악"
"빌어먹을!"
보를레스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주물거리며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고블린들을 노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
만 거대한 검을 사용하는 그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부상이었다. 단번에 그의 연극을 눈치챈 하윌이 눈썹을 찌푸렸
다.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이군. 얌전히 뒤에 숨어있어."
"웃기지 마쇼! 이 정도는 멀쩡한 상태나 마찬가지요."
말과 동시에 보를레스는 고블린 하나를 발로 차올려 바스타드 소드로 후려쳐 버렸다. 기괴한 비명과 함께 날아가
바위에 참담하게 뭉개져버리는 동족의 시체에 고블린들이 광분했다.
"마치 원숭이와 싸우는 것 같군."
어둠을 방패로 달려드는 것은 오크보다 고블린이 훨씬 고단수였다. 투덜거리면서도 탐사단 일행은 점점 뒤로 몰리
며 한 곳으로 몰려갔다. 어느 새 서로 등이 닿자 하스폰티안이 외쳤다.
"흩어져라. 붙으면 투석의 목표에 된다. 흩어져!"
하지만 그보다 먼저 돌무더기가 날아왔고 빨리 뛰기 위해서 갑옷을 벗었던 기사들은 어둠 속에서 피하지 못하고 몸
여기저기에 얻어맞았다.
"크윽!"
보통 인간의 어린아이 정도의 크기인 고블린이었지만 그들이 던지는 장난 같은 돌팔매는 무시할만한 게 아니었다.
머리에 맞으면 그대로 골로 갈 가능성이 농후했고 바짝 붙어있는 기사들로서는 방어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기도 힘
들었다.
"절 내려주세요. 마법을 쓰겠습니다."
"로길드 서둘러!"
'마법사였나? 그래서 마법사를 따로 데려오지 않는 거였군.'
시즈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로길드는 재빠르게 주문의 영창을 끝낸 상태였다.
"바람의 장막은 대지를 감싸고 그 부드러움에 새들이 날던 것을 멈추리라."
입술의 움직임이 끝나자 로길드에게서 시작된 대기의 진동은 일행을 감싸기 시작했다. 천천히 안정되는 진동 속에
서 숲 속을 헤매던 밤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공기가 하나의 막을 경계로 단절된 것 같았다.
"바람의 장막이다."
"끼이이익!"
던진 돌멩이들이 목표에 맞기도 전에 튕겨져 나오자 고블린들은 당황한 모양이었다. 서로를 쳐다보며 무슨 작전을
짜는지 웅성거리는 동안 갑자기 고블린들의 뒤가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꾸웨에에엑!"
"오크들이 고블린을 공격했소. 어서 빠져나갑시다."
그렇지 않아도 마법으로 버티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에 오크의 습격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아마도 오크들은 탐사단
에게 뭍어있던 냄새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하윌을 선두로 리페른과 시즈들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더 빨리!"
토끼는 이미 빠져나갔는지 모르는 늑대들과 호랑이는 서로를 물어 뜯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후로도 고블린과 오크들의 집요한 추격은 계속 됐다. 처음에는 서로 다투던 몬스터들이었으나 먹이감이 충분하
다는 것에 서로 합작을 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인지 함께 탐사단을 압박해갔다.
하지만 그보다 하이에나를 이끌고 다니는 놀은 피하기 힘든 존재였다. 하이에나의 귀신같은 코가 짜릿한 냄새를 풀
풀 풍겨대는 리페른 일행을 찾아낸다는 것은 그 하이에나가 감기에 걸렸다는 뜻일 테니까‥. 게다가 오크나 고블린
처럼 작지도 않았다. 150cm는 될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피드는 어둠 속에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나마 무사히
피할 수 있었지만 만약 참담할 정도로 나쁜 놀의 시력이 보통 인간만큼만 되었다면 벌써 그들의 둥지에서 하이에나
의 간식거리가 되어있었을지 몰랐다.
아침이 밝아오고 해가 떠올랐다가 다시 산등성이 넘어로 숨을 무렵에서야 그들은 씻을 수 있는 호수를 발견했다.
"무, 물이다!"
'물에 씻으면 그 지겨운 놈들도 더 이상 쫓지 못하겠지?'
그런 생각에 모두 왕자, 기사 할 것 없이 체면도, 기사도도 잊은 채 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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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이 놈의 마누라가 모포는 왜 한 장만 챙겨넣은 거야."
남작의 직위에 있어서 감히 내뱉기 힘든 단어- 마누라 -를 자연스레 툭툭 던졌
지만 주위에서는 말뜻을 인식하지 못하는지 모포라는 단어에 대해서만 부러움을 벌어진 입에 한껏 달고 있었다. 사
실 두꺼운 철판으로 겨울에도 조금만 움직이면 온통 후끈해질 기사들은 대부분 모포를 비롯한 노숙장비를 챙겨오지
않았다. 그게 이리도 크나큰 실수로 가슴속에 아름질 줄이야.
현재 그들은 신나게 물에 담갔던 몸을 나긋나긋한 봄바람 속에 섞여있는 겨울의 여운에서 지키기 위해 땅바닥을 뒹
구르며 흙에 부비적거렸다. 온몸이 덜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거리는 충격음을 내고 있었지만 그들은 건포냄새가 조
금씩 풍기는 짐을 꼭 끌어안으며 추위를 달랬다.
"모닥불이라도‥."
"안돼요. 불을 켜게 되면 오크들이나 고블린은 더욱 쉽게 우리를 알아챌 겁니다. 놈들은 불을 두려워하는 짐승이 아
니에요."
고개는 끄덕였지만 내심 자신을 원망하며 입술을 삐죽거리고 돌아눕는 젊은 기사를 시즈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미안합니다.'라고 중얼거렸지만 과연 진실로 미안해하고 있을까라는 의심이 스스로에게 생겼다. 미안해한다지만 나
는 그래도 정한 길을 모두를 희생시키며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내심의 사과조차 사실은 그저 자신을 위로하
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르지.
'원래 난 이런 놈이야. 이런 냉정한 놈이었어.'하고 색다른 위로를 청해보는 시즈였다.
"리미뇌‥."
로길드에 눈에 비춰진 고대 문자는 며칠동안 꿈에서 바래왔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소년의 입에서 3글자의 단어
가 흘러나오자 기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 중에는 봄감기에 걸려 콧물을 훌쩍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겨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마치 패잔병이 된 기분으로 뛰었다. 기사들은 1년 간 훈련장에서 뛰어야할 양을
일주일 사이에 모두 뛰어버린 듯 했다. 리페른과 로길드의 깨끗하던 피부도 긁히고 찔려 상처투성이였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이 동굴 안에‥."
"예. 당신이 원하는 게 있습니다."
"이 지겹게 뛰는 일도 이제 막바지에 이른 겁니까?"
동굴은 전설 속의 마법물이 감춰놓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밋밋한 모습이었다. 횃불에 비친 그림자는 걷
는 게 지루한지 길게 고개를 내밀어 먼저 동굴 안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동굴은 점점 좁아져 기어
갈 정도로 작아졌다.
'이 좁은 동굴 안에 과연 '리미뢰 홀'이 존재할까?'
그런 의문처럼 작은 동굴은 아주 길게 이어져있었다. 이러다가 막혀버린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리페른의 머리 속을
가득히 채웠다. 막혀버린다면? 그렇다면 뒤로 기어서 나가야 한다. 아까 전 둘로 갈라진 길에서 반대편으로 가야했
던 게 아닐까? 동굴이 어깨를 조여왔다. 작은 자신에게 이 정도니 몸집이 큰 기사들은 아예 포복을 하고 기어오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고 한숨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뒤에서는 나를 계속 따라오고 있는 걸까?'
'이젠 믿을 수밖에 없군. 믿을 수밖에 없다면‥ 철저히 믿자. 불안한 건 나 뿐 만이 아닐 테니까.'
굴은 더욱 좁아졌고 끝은 보이지 않았다. 리페른을 고민시키는 의문처럼‥.
'사실 국가를 이끈다는 것은 일종의 믿음이 아니었을까? 국민은 국왕을 믿는다. 하지만 국왕은 누굴 믿는단 말인
가? 신? 스스로를? 아니야. 통치자가 믿는 것은 어쩌면 국민이겠지. 그래야 하겠지. 그래야 좁은 통로를 믿고 기어
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많은 이들을 믿는다? 그리고 믿게 한다? 나는 현재 20 명 남짓 사람들도 믿지 못하
고 있다. 나의 사람이라고 자처하고 오는 이들을 믿지 못하고 있지. 속임수, 암수는 사실 국민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는 불필요하지 않은가. 우선 내 주위의 사람들을 믿고 그들이 나를 믿게 하자.'
그 때, 서광은 그에게 비추고 있었다. 물소리도 들렸다.
"빛이다!"
좁은 동굴은 끝나있었다. 궁전의 홀만큼이나 넓고 곳곳에는 아래위로 석순이 삐죽삐죽 솟아나 있었다. 벽에는 돌이
흘러내린 듯한 무늬는 횃불에 붉게 변색되었다.
"다들 꽤나 불안했지요?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어서 갑시다."
울려서일까? 좀더 부드러워진, 그러면서도 왠지 끌려 들어가는 어감이 리페른의 음성에서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시
즈와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그런 느낌이었다. 먼저 앞장서서 나아가는 의아하게 바라보던 로길드에게 바로 곁에 서
있던 보를레스와 시즈의 속삭임이 들렸다.
"뭔가 달라졌군. 어때?"
"사람을 더 생각하게 하는 것은 빛보다 어둠이죠. 그리고 편함보다 불쾌함이고 즐거움보다 슬픔, 고독과 외로움입니
다. 좋은 환경에서도 생각은 발전할 수 있지만 나쁜 환경에서 깨달은 만큼 절실하게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네 생각은?"
"리페른 전하는 괜찮은 국왕이 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