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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복한 상태로 몇 백 미터를 기어온 기사들의 팔뚝과 무릎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물로 씻어낸 상처에 시즈가 간단
한 약초와 물약을 섞어 바르자 아픔이 상당한지 눈을 감고 부르르 떨었다. 가끔은 키가 작은 게 도움이 될 때도 있
다는 생각을 해보는 시즈였다.
"그나저나 저 앞의 낭떠러지는 어떻게 건너지요?"
어깨가 약간 부어오른 리페른은 앞을 가로지른 대지의 균열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
는 없지 않은가. 가장 먼저 치료를 끝낸 하스폰티안 남작이 걸어와 눈대중으로 낭떠러지의 폭을 재더니 말했다.
"이 곳은 제법 굵직한 석순이 많습니다. 여러 개를 잘라서 발을 딛을 다리를 만들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괜찮은 의견이라 판단한 리페른은 기사들을 시켜 굵직한 석순을 잘랐다.
"괜찮을까요?"
그 모습을 보며 로길드가 걱정스럽게 시즈에게 물었다. 그러나 시즈는 마땅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주위를 살펴보
기만 했다.
쿵! ‥팍!
실패였다. 석순은 사람들의 무게를 지탱해줄 수 있는 단단함을 지녔지만 건너편으로 쓰러질 때 스스로의 무게를 견
딜 탄력은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마다 눈썹을 찌푸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윌, 당신이라면 건너편으로 뛸 수 있습니까?"
균열은 적어도 10m는 되어 보였고, 사람이 뛰어넘을 폭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할 수 있다."
"정말입니까?"
"단,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일행이 서 있는 쪽이 건너편보다 높았다. 낮은 쪽에서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는 게 그 반대의 상황과 차이가 얼마나
심할지는 뻔했다. 리페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설마 탐사단이라는 명목으로 밧줄도 하나 가지오지 않았겠습니까."
기사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여러 개의 밧줄을 하나로 굵게 꼬았다. 어찌나 두꺼운지 어깨에 짊어진 하윌
이 그 무게로 뛸 수 있을 것조차 뛰지 못할 듯 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파앗!
새를 연상시키는 점프. 양팔을 벌리고 양다리를 가슴에 딱 붙이고 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그는 날고 있었다. 공기
를 가르는 빠르기가 정지되어 있는 걸로 착각될 정도로 안정된 동작.
착지는 마치 땅이 솜처럼 푹신한 듯 자연스러웠다. 그저 일어섰다가 앉는 것처럼‥. 그러나 이어지는 기사들을 향한
비웃는 듯한 비릿한 미소. 보를레스를 비롯한 검을 든 이들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뭔가 끊어졌
다.
"흐아아아아압!"
"으라차찻!"
우두두두두! 갑자기 눈을 뜬 채 달리기 시작하는 보를레스를 선두로 기사들이 죄다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버팔
로의 돌진을 연상시키며 말릴 틈도 없이 그들은 모두 낭떠러지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허억!"
"이런! 모두 멈춰!"
철푸덕! 퍼우억! 하윌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떠올린 채 자신의 주위에 폭탄- 불발탄 -처럼 떨어져 내리는 이들을 바
라보았다. 10m를 날아와서 패대기를 쳤으니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플 만도 하건만 보를레스를 위시한 모든 기사들
은 하윌을 향해 그가 지었던 것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국 시즈는 타박상에 필요한 약초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곁을 머물던 바람도 흥분해 소용돌이치고 있었
다.
퍼억!
"으억! 왜 때리십니까? 단장님."
"그래서 불만이냐? 이놈들아! 이게 무슨 추태냐? 시즈님과 리페른 전하께 부끄럽지도 않느냐?"
"하, 하지만!"
"이 놈들이 그래도!"
퍽!
"하스폰티안 각하 그만 용서해주십시오. 그래도 전하를 호위하는 자부심이 있어 호승심이 있다는 것은 기사로서 즐
거운 일이 아닙니까?"
"보를레스 님도 그렇게 말할 처지가 아니오! 시즈 님이 얼마나 심려하셨을지 아시오?"
그 말에 보를레스는 약간이지만 떫은감을 씹은 표정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뒤로 돌린 그는 손목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시즈에게 물었다. 손목이 더 악화되었던 것이다.
"걱정하셨습니까?"
그 물음에 시즈는 살짝 여자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하하핫! 설.마.요. 보를레스 님의 실력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데요. 그런 제가 어.찌. 걱.정. 따.위.를. 했겠습니까?
그.렇.죠?"
힘을 주어 끊어 말하는 부분마다 보를레스는 붕대에 손이 질식사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심각한 조임을 당해야
했다. 고통에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그는 바보처럼 웃었다.
"흐흐흐. 보셨죠?"
멀리서 둘의 모습을 보고 있던 리페른은 감탄한 어조로 로길드에게 말했다.
"대단하지 않아. 저 두 사람‥. 시즈 님도 대단하지만 보를레스라고 하는 사람도 대단하군. 사실 10m나 되는 길이를
뛰어넘을 생각을 하다니‥. 하윌 님이야 몸이 가벼운 엘프라서 그렇다고 쳐도 인간이 말이야. 덕분에 기사들까지 불
이 붙은 것 같아."
"예. 그렇습니다."
로길드는 맞장구치면서도 머리 속을 한 순간 스치고 치나간 의혹을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분명 도저히 불가능한 거리다. 아무리 호기가 동하여 능력 이상의 잠재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역시 미지의 존재
의 도움이 없었다면‥.'
분명히 뒤에서 불어온 바람. 마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한 순간 떨어지는 기사들의 몸을 받쳐줄 만큼 묵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누굴까? 시즈 세이서스? 하스폰티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