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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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이봐! 소문 들었나?"

"무슨?"

"리페른 전하께서 이번 훈련에 참여하신다고 하더군."

"우하하핫! 자네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인가? 리페른 전하께서는 지난 번 고대유물  탐사에서 돌아오신 후 몸이 낫는 

대로 훈련에 참여할 의사를 밝히셨어."

"아직은 보호받아야 할 왕자님이 아니신가. 무엇 때문에 힘든 훈련에!?"

"전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자신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좀더 강해야  한다고. 그 뿐만이 아니네. 재미

있는 소식이 또 있지."

"무엇인가?"

"마법은 완전히 그만 두겠다고 했다네."

"허허 마법은 또 왜?"

"철저히 보호받고 싶다는 거야. 마법과 검술을 함께 익히는 일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그 대신 

자신을 가르칠 마법서적과 마법선생으로 하여금 궁정마법원의 견습생들을 철저히 가르쳐 자신의 개인 마법사로 예

약한다 하더군."

"대단하시군. 어쨌든 난 왕족의 얼굴을 볼 수 있다니 만족하네."

4 시간 후‥ 한 주점‥

"자네, 자네 보았나? 리페른 전하께서 내게 웃어주셨어!"

"참나 그냥 한 번 웃어줬다고 그리 난리인가? 난 전하의 손을 잡아일으켜드렸다고."

"뭣이!? 그런 불경한 짓을 했단 말인가?"

"무슨 소리야. 전하께서 일으켜 달라고 하셨다고!"

"어쨌든‥ 귀족들의 오만한 웃음과 같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으음‥ 동감이야. 그 가식없는 웃음‥ 만약 주군을 택할 수 있다면 리페른 전하를 택하겠네."

"넌 안돼! 나 같이 실력자만 전하를 보필할 수 있다고!"

성내에서 일고 있는 작은 파문은 조금씩 그 원호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파문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허허허헛! 그래. 당했단 말이지? 네가 꼼짝없이 당하다니 과연 시즈라는 청년은 대단한 모양이구나."

"예."

당했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생각할 수 없는 어휘였지만 소년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현(現) 페

노스톨멘 가문의 가주이자, 소년의 할아버지인 크레오드 페노스톨멘은 메추리 알만큼이나 커다란 보석이 박힌 양손

의 반지를 서로 마찰시키며 물었다.

"그래. 네 주군은 뭐라고 하시냐?"

"분명히 '리미뇌 홀'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허허허헛!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지? 정말로 얻으셨군. 정말로 얻었어."

"할아버지는 이미 '리미뇌 홀'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계셨군요." 

로길드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려버리자 크레오드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장에서 두 권의 책을 꺼낸 

그는 삐진 듯 하면서도 흘깃흘깃 호기심을 품고 훔쳐보는 손자에게 건넸다. 마치 준비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의

아한 표정을 짓는 로길드에게 크레오드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어떠냐? 이 두 권을 본 적이 있느냐?"

"물론이죠.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적어도 이 방 안의 책은 모두 읽었습니다."

"허허허‥ 그렇다면 제대로 보지를 않았구나?"

"할아버지께서 절 무시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운이 나빴던가, 아니면 피곤했나 보구나. 327 페이지를 펴보거라."

불만스러웠지만 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책을 펴서 천천히 읽어 내려가고 있을 때, 다시 크레오드가 말했

다.

"고대에는 성인식을 치를 때 어떻게 한다고 나와있지?"

"개미집 위에 서있게 한다고 쓰여있습니다. 꼭 개미집이 아니더라도 징그러운 벌레 위를 걷는다던지‥!"

"이제 약간 뭔가 깨달았느냐? 이제 다음  책의 88 페이지를 펴보거라. 펜실바니카에  대한 설명이 있을 거다. 하지

만‥. 그 페이지는 볼 필요가 없다. 두 장 더 넘기거라. 뭐가 있지?"

"‥‥."

"리미뇌라는 벌레는 펜실바니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색깔을 제외하고는 확연히  생김새를 구별할 수 있단다. 게다

가 그 놈들은 잡식성이기는 하지만 자기보다 큰 동물은 절대로 건들지 않아. 어두워서 잘 구별이 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이 맞자면 아마 처음에 누가 '펜실바니카'라고 인식시켰을 거다."

"그러고보니 시즈 님이‥."

그러고 보니 시즈 님은 가장 뒤에 서있었는데 어떻게 정확하게 펜실바니카라고 확신할 수 있었지? 

로길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아마도 열었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울먹이는 손자의 푸른 머리칼을 부드럽

게 쓰다듬으며 크레오드는 다정하게 말했다.

"15살이나 먹은 녀석이 어찌하여 운단 말이냐?  억울하겠지만 그게 너와 그의 차이를 명백히  말해주는 게다. 그저 

잔꾀일지 모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큰 공백이 될 수 있는지 알았으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누군가

를 보필하는 책사에게 있어서 임기응변의 잔꾀는 체계적인 작전보다 더 중요하다. '페노스톨멘'이라는 이름이 현재

까지 엘시크 왕가의 수호신처럼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뜻하지 않은 위기를 재치있게 넘긴 선조들의  잔꾀

와 임기응변이야. 결국 그 청년은 가벼운 잔꾀로 왕자를 우롱하고 사람들을 속였지만 원하는 걸 모두 얻었다. 꾀로 

가장 거대한 힘, 왕가의 권력을 움직여 엘프들의 지역을 보호구역으로 만들었지. 기억해두렴‥ 미래를 이끌  페노스

톨멘의 작은 가주여‥. 네 앞에는 그 청년이 있다는 걸."

"예!"

흐르는 눈물과는 관련없이 힘찬 대답. 크레오드는  자만에 빠져있었을지도 모를 손자를 처참하게  뭉개준 시즈라는 

청년에 대해 일종의 감사를 보냈다.

'자네 덕분에 앞으로도 페노스톨멘이라는 이름은 건재하겠어.'

#

"‥‥."

보고서를 받아든 여인의 손은 간질 환자처럼 심각한 경련을 일으켰다. 새하얀 드레스와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그

녀는 중년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색시처럼 아름다웠지만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쓰윽 훑어보는 눈빛

은 수 백년 묵은 여우보다도 날카로웠다. 요염하도록 붉은 입술이 살며시 열리며 분노어린 미소가 그어졌다.

"풋! 자아‥ 어서들 말씀해보세요. 이 보고서에 쓰여진 게 무슨 뜻이죠?"

꿀꺽꿀꺽. 아무도 그녀의 눈과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물을 들이킬 뿐.

"'바람을 노래하는 이'는 모습을 중앙에 모습을 몇 번 들어내지도 않았고 정계에는 손톱 부스러기도 들여놓지 않았

는데 어째서 그에게 인사를 가는 귀족들이 이리도  많단 말입니까? 게다가 뇌물 추정액 좀 보세요.  이대로 며칠만 

가면 손가락을 꼽을 대부호가 될 지경이에요. 귀족도 아닌 이가 왜 이토록 궁정 조회에서 거론되어야 한단 말이죠? 

그는 실제 정계에 활동하는 게 아니니 견제할 필요가 없다고들 하지 않았어요? 어서들 말해봐욧!"

히스테릭한 비명처럼 여인이 다그쳤지만 대답하는 간 부은 인간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아까까지 입술에 

대고 있던 빈잔을 떼지 않고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러다간 감봉될지도 몰라.'

곧 정년을 앞둔 한 노인은 심히 걱정스러운 예측이었다. 어젯밤 점성술로 점친 '무지하게도 나쁜 운수'가 정확히 들

어맞은 것이다. 역시 춤추는 거지의 카드가 나왔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입맛을 다시며 일어서자 주위의 

시선이 모아지는 게 느껴졌다.

"워낙 한 권의 책으로 인한 여파가 크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있고 여파가 수그러들

면 귀족들의 경향도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지금 리페른 왕자까지 그를 추종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서 하는 말이오? 그와 리페른이 함께 리미뇌 홀을 얻었다

는 소문에 귀족들이 리페른을 지지하기 시작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리페른까지 그를 두둔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그를 정치권력으로 견제한단 말이죠? 생각은 하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무래도 나이가 드셔서 판단력이 떨어지신 

모양이네요. 오늘 이후로 집에서 편히 쉬세욧!"

점괘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혼이 빠져버린 듯 힘없이 앉는  노인에게서 관심을 잃어버린 여인이 소

리를 질렀다.

"모함, 자객 등등! 수단을 가리지 말고 그를 죽여요."

"저기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스니다만‥."

"뭐죠?"

"그는 출국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도망간 듯 싶습니다."

어이가 없는지 입을 쩌억 벌려 아름다운 외모를 망가뜨리는 여인이었다.

- 인형이길 원치 않는 인형의 노래.

실베니아 남서부 항구도시 낭아플, 남국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해안에는 거친 뱃사람만큼이나 건장한 체격에 

검붉은 피부를 가진 20대 후반의 청년이 고독을 씹으며 앉아있었다. 청아한 바다와  그 위를 쓰다듬는 새하얀 포말

과는 동떨어지는 듯한 풍경이었으나 청년의 귀족적이면서도 야성적인-  새하얀 셔츠를 반쯤 풀어헤쳐 입고 있었다 

-복장은 충분히 어울리지 않는 상황을 눈감아줄 만 했다. 굵직굵직한 근육과 깨끗한 차림새를 볼 때 기사가 아닐까 

하는 예사을 하게 만드는 그는 굵고 짙은 눈썹 아래로 예기를 발하는 눈동자를 수평선 끝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무

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

감청빛깔의 파도가 그가 앉은 바위를 몇 번이나 치는지 세워보던 청년은 멀리 아스틴에서 오는 커다란 범선을 발견

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이제야 왔군."

범선은 적어도 100여명은 태울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선착장에서 5m 이상의  선채를 올려다보면 절로 위압감이 

피부로 와닿았다. 하지만 실베니아의 선박들은 그보다 더  거대한 규모도 많았다. 그렇기에 해상왕국이라고 불리는 

것이겠지만.

선채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던 청년은 막 갑판으로 얼굴을 보인 소년에게 환호했다. 검은 모

자를 균형있게 머리에 쓰고 있는 소년은 웬만한 여인도 따라오기 힘들만큼 귀여운 용모의 주인공이었다. 곧 청년을 

발견한 소년도 밝게 웃으며 모자를 벗어들어 흔들었다.

"하하핫! 어서와, 레소니.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뭐가 잘못 되었는 줄 알았잖아."

"헤헤‥. 보를레스 오랜만이에요. 후작 각하께서 챙겨주시는 물건이 꽤나 많아서요."

"흐으‥. 척 보기에도 꽤나 무거워 보이는 걸."

"들어 주신다니 고마워요. 역시 주인님은 대단하세요. 예측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거든요. 말씀하신대로 80만 타로운

을 가져왔어요."

"너무 많이 가져온 거 아니야?"

"후후‥. 괜찮아요. 주인님을 추종하는 귀족들이 가져온 물품의 금액이 딱 그 정도거든요."

"하하하‥. 어이가 없군. 탐사 후에 정치 물결에 휩쓸리게 될지 모른다고 동굴에서 나온 후 바로  이리로 출국을 해

버리다니‥. 정말 누가 시즈를 예측할 수 있을까?"

그들은 세이서스가의 호위와 시종이었다. 이국의 항구  부두에서 보를레스와 감동의 재회를 나눈  레소니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부른 장본인을 찾았다.

"시즈는 여기 없어."

"또 책이겠지요?"

다 알아요라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레소니에게 보를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머뭇거린 그는 슬슬 궁금함을 가

지고 올려다보고 있는 레소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납치됐어."

순식간에 치켜 올라가는 소녀의 눈썹과 불이 켜지는 쌍심지. 그녀의 입에서 비명처럼  짧지만 긴 한 마디가 튀어나

왔다.

"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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