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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 시간 전, 시즈는 야자수의 그늘이 진 해변가에 앉아 시원하게 얼음을 띄운 레몬 즙을 마시며 엘시
크에서 가져온 모험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따뜻한 기후에 나른해진 눈은 감겨왔고 손에서는 힘이 빠졌다. 그
리고 행복하게 자고 일어나 보니‥.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이야.'
어떤 미화를 시켜도 칙칙한 색깔의 감옥과 잔잔한 물결 소리가 들려오던 해변과는 비슷할래야 비슷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의 따사로운 햇볕은 어디 갔는지 10평 남짓한 공간 한 구석에 놓여진 촛불이 태양을 대신하고 있었다.
시즈는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왜 끌려온 거지?'
어리둥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둘러싼 20명 남짓한 사람들에게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애잔한
슬픔을 훌쩍임으로 대변하고 있는 15세에서 18세까지의 소년, 소녀들은 천연의 색기를 솔솔 풍기는 미소녀, 미소년
들이 아닌가. 상황을 생각해볼 때 분명 이것은‥.
'인신매매겠지? 하지만‥.'
오늘은 그나마 깨끗한 옷을 사서 입었다지만‥.
'아무래도 날 납치해온 사람이 꽤나 혼 좀 나겠는 걸.'
그를 생각해서 라도 어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심하는 시즈였다.
"으음! 도리가 없군. 도리가 없어."
구석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카이젤은 훌쩍임 속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조그마한 절규에 고개를 들었다. 18살
정도의 청년이 무얼 그렇게 고민하는지 머리를 벅벅 긁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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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처럼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동방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불안과 두려움에 젖어있는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납치를 당했다는데 대한 당황이나 위화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 멍청하게 징징 짜고 있는
녀석들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심하다고나 할까? 오늘 갑자기 감옥의 문이 열린다 싶어 새로운 매
물동료가 들어오나 했는데 던져진 것은 잠에 골아 떨어진 사내였다.
'아무래도 저렇게 자연스러운 것은‥.'
납치에 익숙하거나 바보겠지. 하지만 납치에는 절.대.로. 익숙할 것 같지 않은 얼굴, 지금도 왜 잡혀왔는지 매매단
놈들의 취향을 의심해 볼만한 사항이 아닐 수 없었다. 고개를 젖던 나는 막 얼굴을 들던 바보와 정확하게 눈을 마
주쳤다.
배시시.
'윽!'
찰나였지만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공간 속에 빠진 듯 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청년이 띄운 미소는 납치를 당한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던 나의 가슴에 작지 않은 파도를 일으켰다. 잠시동안 넋을 잃었던 나는 개미가 자신보다
몇 배는 큰 먹이를 끌고 가는데 놀란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나빠져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잔잔한 미소를 짓다니 분명 엄청난 바보가 틀림없어."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훌쩍대는 멍청한 녀석들은 그 바보 주위로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신기하기 그지없
는 상황이었기에 주의하여 살핀 나는 기가 막힌 사실을 발견했다.
'공기가 다르다.'
틈이라고는 없는 감옥 안에서 그의 주위로 따사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눈물로 앞이 보일지 모르는 울보 녀석들
도 무의식중에 어디가 편안한지는 느끼는지 청년에게 조금씩 몰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답지 않게 붉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군."
청년은 주먹으로 남은 손바닥을 탁 치고서야 포위 당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라!?"
이 넓은 공간에서 자기 주위만 북적거리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내가 웃음을 참는 사이 청년이 당황하자 그의 주위
에 흐르던 바람이 사라져버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설마 나와 같은 정령사인가?'
가장 무난한 답이었지만 난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령의 냄새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
는 녀석이군. 하지만 그렇기에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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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곤란하군.'
정말이었다. 현자, '마땅찮은 이'라고 불린 이후로 이토록 곤란에 처해본 일이 드물었다. 미행도 당해보고, 인질극을
통한 협박까지 받아보았지만 현재의 황당함에 비할 수는 없었다. 깜짝 졸고 있는 사이에 납치를 당하다니‥. 레소니
가 알면 또 잔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급한 일은 좀 전부터 매우 지척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울음소리를 그치게 하는 일이었다. 돈이 되는 아이들인 만큼 우는 정도로 그 귀여움과 미모가 애처로움을 배가시키
고 있었지만 15 여명에 가까운 소녀들이 한꺼번에 울고 있으니 소음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포위된 채로
보고 있으려니 왠지 내가 울린 듯한 죄책감이 가슴에 아렸다.
"저, 저기‥. 애들아? 울지 말아요‥."
"으― 앙!"
크흑! 나도 울고 싶잖아. 소녀들은 내 목소리가 슬픔과 두려움을 복받치게 하는 매개체라도 되는지 감옥이 떠나갈
정도로 더욱 크게 울어댔다. 그나마 소년들은 무뚝뚝하게 감정을 억제하고 있어 다행이었지만 대부분 긴장을 감추
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한숨과 함께 억지로 웃고 있는 입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이제야 그
꼬마악마- 레소니의 동생들 -에게서 벗어났나 했더니 이런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천사처럼 아름다운 아이
들이라는 게 조금 다르긴 했지만 악마들에 비해서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난 눈물을 머
금고 꼬마악마들을 재울 때처럼 손톱으로 바닥을 톡톡치며 머리 속을 헤집었다. 어떤 노래가 좋을까?
(시점 변화)
후훗. 역시 곤란해 보이는 군. 그는 청년의 티를 내고 있지만 소년의 허물을 완전히 벗지 못한 듯 하니 자신보다 한
두 살 적은 소녀들을 달래는 게 익숙할 리가 없었다. 안절부절하면서도 어색하게 미소를 띄운 모습이 대단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지만 난 별로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에 얌전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 울음 바다 속에서 계속 있어야 한다니 끔찍해!'
다시 무릎에 머리를 파묻으려는데 그가 재미있는 행동을 시작했다.
톡톡! 톡톡톡!
물론 시끄러운 소음들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나 청년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들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
다. 주의를 끌려는 건가? 꽤 괜찮은 생각이지만 울음에 가려 들리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나는
마치 울음소리를 감상하기라도 하는 양 눈을 감고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울음소
리를 그치지 않고 있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 건지 입가에 천천히 미소까지 어리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거지?'
"‥‥."
뭐라고 한 걸까? 그가 오른쪽에 앉아있던 소녀의 귀에 대고 입을 오물거리자 소녀가 눈물에 젖은 눈으로 의아하게
청년을 바라보았다. 살짝 윙크를 한 청년은 다시 왼쪽의 소녀와 뒤에 앉아있던 소녀에게 똑같이 무슨 말을 속삭였
다. 그러면서도 바닥을 두들기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어느 새 울고 있던 소녀들의 어깨를 톡톡
하고 두들기고 있었고 점점 청년의 주위로 울음소리는 잦아들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소녀들이 훌쩍임을 멈추고
그의 속삭임같은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일 때쯤 되어서야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노래하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수정 구슬 닦아주기. 아침 일찍 일어나
하얀 우유 한 잔씩 마시기 레몬 사탕은 하루에 세 개
자기 전엔 꼭 이 닦기. 잊지 말아요.
떠나는 그대를 위해 새로운 바람이 부네요.
이제 그대 작은 빗자루를 들어
저 파란 하늘을 날아올라요. 두려워 말고
생각해봐.
그 어떤 마법보다도 신비롭던 우리의 맨 처음 그 밤
빛나던 약속!
난 믿고 기다릴게요. 그대 내게 돌아오는 그 날
그 땐 다시 시작해봐요.
멋진 세상 새로운 날들을‥.
〈코나 - 마녀, 여행을 떠나다〉
귀에 주의를 하지 않으면 잘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주아주 느릿느릿하
게 톡톡거리는 손가락 박자에 정신이 빼앗기도록‥. 하지만 약간 높은 톤의 목소리는 노래에 밝은 느낌을 부여하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잦아짐에 따라 부드러움 청년의 음성은 밀폐된 공간의 벽에 튕겨 은은하게 울렸다. 마치 꿈결에
서 들려오는 것처럼‥.
톡톡톡.
눈을 감고 안락한 평온감에 빠져있던 나는 갑자기 무릎을 건드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톡톡톡‥ 톡톡톡‥
미소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데 놀랐지만‥. 감옥 안의 소년, 소녀들은 서로의
몸을 손가락을 살짝살짝 다독거리며 자신들을 달래고 있다는 사실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표정은 납치를
당한 매물의 두려움이 아니라 봄날에 소풍을 나온 어린 아이들처럼 편안해 보였다. 또 다시 청년에게서는 정령의
냄새도 없었지만 바람이 흘러나왔다. 살짝 머금은 미소가 그 어떤 미인의 얼굴보다 아름답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