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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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안은 조용했다. 게다가 따뜻한 바람마저 불고 있으니 잠도  오겠지. 난 속 편하게 골아 떨어진 녀석들을 보며 

이죽거렸다.

"나약하기 짝이 없어."

척 보기에도 곱게 키워졌을 인상이었다. 특히 한 명을 제외한 소년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부호의 귀하신 아들들이겠

지. 그러나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유약하고 심약하기 짝이 없는 귀족과  부호들의 자제가 아니라 어디서 굴러먹었는

지 전직이 보모가 아닐까 의심스러운 청년이었다.

"앗!"

그 새 보모가 어디 간 거지?

"안녕?"

"우와아아앗!"

"쉿! 다들 깨겠어요. 당신은 이름이 뭐죠?"

"정말 태평한 녀석들이로군. 언제 팔려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쿨쿨 대다니‥."

난 놀라서 소리를 냈다는데 느낀 어색함을 감추고자 투덜거렸다. 어느 새 내 옆으로  달라붙은 거지? 난 너처럼 뜨

끈뜨끈한 바람이 나오진 않는다고.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에는 우선 자기를 소개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는 위험하다. 난 분명히 배워왔고 그렇기에 미지의 존재나 다름없는 그를 향한 어조는 거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한 번 듣기에도 경계심에 물든 말투에  놀라 순둥이 같이 눈을 크게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 속에 서있는 것처럼 안락함과 두려움을 동반시키는 눈동자였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난 시즈 세이서스 라고 합니다."

"시즈?"

짐짓 근래에 화재가 되었던 인물의 이름이 떠올랐다. '마땅찮은 시즈'.  아마 50년간은 대륙의 역사가와 문학가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을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진 게 없지. 심지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다. 시즈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남자가 아닐까 추측해보는 거지. 뭐 실제로는 그의 저택을 방문한 이들이 

꽤나 된다고는 하지만 직접 본 사람은 거의 만무하다고 봐도 된다고 했다. 

'설마‥.'

난 금세 가능성이 티끌만큼이나 희박한 생각은 몇 번 걷어찬 후 묵살시켰다.  아무리 맞춰보려고 해도 대륙 최고의 

문학가와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어대는 청년과는 도.저.히. 대치가 되지 않는다.

"카이젤, 카이젤 파엘라스. 질문이 있는데 곧 노예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싱글벙글하는 이유가 뭐지?"

"노예가 되지 않아도 될 방법을 찾았으니까요."

"그게 뭐지?"

"여기서 나가면 되죠. 방금 전까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가 막 찾았거든요."

"찾았다고? 이 곳에서 나갈 방법을?"

내심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그도 이런 내 모습이 의외라고 

생각했던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 역시 잡혀있는 게 그리 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예가 되는 걸 반기지도 않는다. 나름대로  탈출할 방법을 강

구해보았지만 벽은 감옥답게 두껍다. 설사 벽을 부순다고 해도 밖은 지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이‥."

"예. 감시원을 끌어들여 제압하고 탈출하는 것뿐이죠."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난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무슨, 소설인 줄 아는 거냐? 흥! 아픈 척하거나 천장에 매달려 없는 것처럼 보여 유인하려고 했겠지? 소용없어. 그

런 방법은 벌써 몇 세기 전부서 사용해서 이제는 지겹기까지 하다고. 오히려 경계심만 부추일 걸."

나의 논리정연한 반박에 시즈는 할 말을 잊었는지 멍한 표정을 잠시 짓고 있었다.

"핫핫핫!"

"뭐가 우스운 거야?"

"아뇨아뇨. 우습지 않습니다. 풋!"

빌어먹을 우스워하고 있잖아. 이빨을 갈아대는 나의 머리에 쓰다듬던 시즈는 설탕이 물에 녹는 듯한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냉정할 줄 알았는데 사실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었군요? 걱정말아요. 비슷하기는 하지만 다

른 방법이니까."

"누가 불안해한다는 거얏! 어서 그 방법이나 말해봐."

"그 전에 나도 카이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은 정령사인가요?"

"‥어떻게 알았지?"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 짙어졌지만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덕분에 내 의구심만 커져간다. 분명 정령의 기척

은 일말의 먼지만큼도 들어내지 않았는데‥.

"카이젤이라면 도와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계획을 설명해줄게요. 그 전에‥."

시즈는 잠을 퍼 자고 있던 멍청한 녀석들을 살살 흔들어  깨웠다. 나였다면 발로 밟아서 깨웠을 텐데. 그는 계획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마법사에요. 그리고 카이젤은 정령사. 그러니까 우리를 좀 믿고 따라줬으면 해요.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겠죠?"

그들은 미소년 특유의 크고 동글동글한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동경을 담은 채 시즈와  날 보며 연신 끄덕였다. 이거 

부담스럽네. 한 차례 그들의 찰랑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어준 시즈는 마치  강아지를 다루는 조련사같다는 느낌을 받

았다. 무서운 놈. 내가 노려보니 그는 약간은 섬짓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서 시작합시다. 기회가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그는 벽면을 따라서 넓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며 노래를 시작했다.

한 걸음! 방금 전의 과거가 쫓아오네요.

두 걸음! 멀어졌지만 잡을 수 있네요.

세 걸음! 이제는 손 뻗어도 잡지 못해요.

네 걸음! 점점 멀리 희미하네요.

가다보니 소리만 여운처럼 남긴 채 사라졌어요.

나는 그가 공기 속에 녹아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믿기 힘들어 눈을 비볐다. 다른 녀석들도 노래에  취해 그가 언제 

사라졌는지 파악하지 못해 멍한 표정이었다.

"그가 오고 있어요."

흠칫! 유령처럼 귀에다가 속삭이지 말라고! 나는 돋는 소름에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고 소녀들을 깨웠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

"유령의 오폐라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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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이봐. 졸지 말라고!"

"어?, 엉!? 뭐야‥ 클프잖아. 어차피 여기는 지하고 벽도 두꺼워. 게다가 문도 철문이라고. 걱정할 거 없어."

"시끄러워! 어서 일어나!"

"참나. 괜히 짜증이군."

그 때였다. 갑자기 감옥 속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은‥.

"꺄아아아악!"

지하였고 밀폐된 감옥에서 지른 비명이었기에 그 크기와 섬짓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클프가 달려가 철

문을 열려하자 감시하던 사내가 그를 잡았다.

"기다려. 수작일거야."

"수작?"

"그래. 우리를 끌어들여서 쓰러뜨린 후에 탈출하려는 거지."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상품에 손실이 생기면 두목한테 혼난다구."

"그러니까 신중해야지."

빈틈이 없군. 벽에 기대어 앉아있던 카이젤은 내심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걸 걸려들 수밖에 없을 걸.'

감시원의 말을 들은 클프는 눈에 의심을 가득 담고 창살 사이로 눈을 들이대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유, 유령이에요."

"이 세상에 유령이 있을 리가 없다. 몬스터라면 몰라도‥. 하지만 여기는 지하야. 유령이 있을 리가‥! 그 녀석 어디 

갔지?"

클프는 자신을 하루종일 두목의 샌드백으로 만들어버린 대상이 사라졌다는데 경악했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려 

하자 감시원이 말했다.

"천장이나 벽에 붙어있을지 몰라. 우선 문에 붙어있는 녀석들 물러나서 벽으로 붙어!"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감시원은 철문을 발로 차서 열어버렸다. 문과 벽이 부딪치는 굉음이 울리고 반응을 

살펴본 그는 클프와 함께 등을 맞대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과 벽을 샅샅이 둘러본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었다.

"어디 갔지? 정말 없잖아."

"으아아아악! 저리가저리가!"

털썩. 갑자기 한 소년이 팔 다리를 휘젓더니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이 정도 되니까 아무리 겁없는 

해적이라지만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저러는 거야!?"

그가 발작하듯이 소리치자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검은머리의 소년이 중얼거렸다. 

"이 마을에는 예전부터 바다의 유령에 대한  전설이 있지. 20세 정도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음유시인이었는데 

영주가 자신의 개인 악사로 삼으려 했지. 하지만 음유시인은 거절했고 폭군이었던 영주는 그대로 악사를 해변 바위

의 밑 깊숙이 넣고 닫아버렸지. 그 유령은  가끔 노래를 부르러 뭍으로 올라오지만 바위 속에  들어가면 그 정체를 

들어낸다고 하더군. '바위 속은 어둡고 축축해서 따뜻한 인간의 영혼을 뺏아간다고 하지.' 흐흐흐 이제 우리는 유령

의 먹이가 된 거야."

그러며 절망적이고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소년은 바로 카이젤이었다. 싸늘한 미적 용모를 자랑하는 그가 허탈

하게 웃어대자 사각형의 방에 울린 메아리 속에서 두 해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때였다. 클프의 귓가에 작고 나직

한 속삭임이 들려온 것은‥.

"따뜻해‥."

그리고 뭔가 자신을 끌어안는 듯한‥.

"흐아아아악! 저리가! 저리가! 저리가!"

"크, 클프!"

밖으로 뛰쳐나간 클프를 따라 나가려던 감시원은 무언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

"억! 우욱! 크윽!"

복부에 두 방, 숙여진 턱에 강렬한 어퍼컷.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감시원의 다리를 소년들이 붙잡았다. 관성은 

무시할 수 없는 법. 등과 바닥이 통렬한 강도 비교를 한 후 일어서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그를 소녀들이 덮쳤다. 아

무리 힘이 없는 사춘기의 소녀들이라지만 10 명 이상이 안간힘을 다해 누르자  건장한 그의 팔이 부러질 정도였다. 

그는 볼 수 있었다. 허탈하게 웃고 있던 소년이 상상할 수 없을 만치  잔인한 미소를 띄우고 활활 타오르는 화염구

를 들고 다가오는 모습을‥. 

그대로 그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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