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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비백산하여 클프는 그저 운명을 다리에 맡기고 절벽 뒤에 정박해있는 루이스타 호로 내달렸다. 하지만 루이스타
호도 그에게 있어 그리 안전한 은신처가 되어주진 못했다. 어느 틈에 배에서 행패를 부려대기 시작한 두 사내 덕에
배도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고 모리골드는 곤혹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납치해간 시즈를 내놓아라!"
"헛소리 마라. 단 두 놈이 뭘 하겠다는 거냐!? 얘들아, 쳐라!"
하지만 그들은 두 놈이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호쾌하게 날아가 바다에 빠지고 바닥을 구르는
부하들을 보며 모리골드는 우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돼지 꼬리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 놈들아! 30 명이나 되는 녀석들이 고작 둘을 못 이기다니! 이게 무슨 창피
란 말이냐!?"
말은 그리 하면서도 그는 감히 함께 어울리고 싶은 맘은 싸그리 사라진 상태였다.
'기사 출신의 사내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지만 저 괴물같은 사제는 또 무어란 말인가?'
그들을 괴롭히는 두 사내는 모두 강했지만 그 중에서도 흰 사제복을 입은 거인은 마치 투신이 강림한 듯 했다. 단
단하기로 유명한 해적의 방패가 푹푹 우그러지는 게 지난번의 무기와 방어구를 대량 주문한 대장간이 의심스러웠
다. 하지만 모리골드는 의문의 사제에 대한 의구심보다는 울분이 치솟았다. 앞으로 두세 건만 더 하고 손을 떼려고
했는데‥. 여기서 망칠 수는 없지.
"에잇! 뭣들 하는 거냐? 활을 쏴라. 활을!"
아무리 뛰어난 검사와 투사라지만 근거리에서 겨냥된 수많은 화살들을 모두 피할 수는 없는 법. 모리골드는 승리의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감히 해적 루이스타에게 덤벼들다니, 그것도 단 둘이서 말이야. 그래도 제법이었어. 나의 재치가 아니
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지도 몰라. 그냥 죽이기는 아깝군. 어때? 나의 재치와 너희들의 무력! 힘을 모은다면 이런
시시껄렁한 노예매매가 아니라 실베니아 동남부 해안을 지배할 수 있어."
"‥‥."
절벽에 숨어 내려다보던 레소니는 포위를 당한 두 사람의 상황에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했다. 혹시 도와줄 사
람이라도 없을까? 연신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한 때 시즈가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 작은 돌멩이라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굉장히 위력적이에요. ‥그런데‥ 레소니는 왜 무거운 장식품들을 저 높
은 책장 위에 자꾸만 올려두는 거얏? 아무리 집안의 미관을 위해서라지만 그만 두라고 했잖아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쓸데없는 것까지 떠올려버린 레소니는 빨래털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양손에 엄지 손가락만한 돌멩이를 잔뜩
쥐고 던져대기 시작했다.
"으악! 이건 또 뭐야?"
절벽의 높이는 무려 15미터는 되었기에 돌멩이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제대로 머리에 맞은 해적 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바로 의식불명에 이어 경련, 그리고 사망으로 이어졌다. 돌이 위험한 것은 헤모와 보를레스도 마찬가지였
다. 보를레스는 검으로 돌을 쳐내며 해적들을 공격했고 헤모는 육중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피하면
서 해적들을 때려 눕혔다. 하지만 해적들은 그게 쉽지가 않았다. 검이라면 몰라도 활로 쏟아지는 돌멩이를 막을 수
는 없었다. 그렇다고 검을 들어 막자니 보를레스와 헤모에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닻을 올려라! 조타수는 방향타를 잡아라. 뭍에서 떨어진다. 아니, 내가 잡겠다. 넌 가서 싸워!"
그 때였다.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거세게 울리며 절벽을 돌아 한 떼의 기사들이 나타나 배를 쫓았다. 그 중에서 20
후반의 플레이트 갑옷을 걸친 사내가 외쳤다.
"서장이 모두 자백했다. 쓸데없는 저항은 포기하고 항복해라!"
"빌어먹을!"
배가 서서히 뭍에서 떨어지고 있었지만 말이 달려오는 속도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배가 뭍에서 약간 벗어난 후 모
리골드가 뒤를 돌아보니 이미 기사들은 말을 버리고 배에 오른 상태였다. 아무리 해적이라지만 정식으로 검을 익히
고 검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기사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몇 명의 해적들이 순식간에 검에 찔려 배면을 피로
물들였다. 핏발이 돋은 모리골드의 뇌리에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스쳐갔다. 그는 방향타를 놓아버리고 검을 빼들어
싸움에 끼어들었다. 얼핏보면 생각없는 사생결단이라고 생각할 모습이었고 기사들도 해적의 두목이 이성을 상실했
다고 판단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회심의 미소는 해적들에게 돌아갔다. 실베니아는 섬들
의 왕국이라 불릴 만큼 자잘한 섬이 많았고 낭아플에 들이치는 바닷물도 섬들 사이를 돌고 돌아 들어오는 격류들이
많았다. 그런 곳에서 방향타가 제멋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배의 상태는 말을 하지 않아도 뻔했다.
"으하하하핫! 지금이다! 놈들은 다 합쳐봐야 고작 열 댓명이 고작이다 모두 물 속으로 처넣어버려!"
기사들이 검과 함께 산다면 해적들은 바다의 파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배가 격랑에 좌지우지되고 있다지
만 그들의 동작에는 그렇게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아무리 무거운 갑옷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
이라지만 뒤집힐 듯 흔들리며 빙글빙글 돌기까지 하는 배 위에서는 중심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파도는 철갑과
사람을 동시에 뒤흔들었지만 사람은 관성이 더해진 철갑에 무게 속에서 허우적댔다. 달려드는 해적들을 향해 검을
내리치는 것은 고사하고 서있지도 못했다.
풍덩! 풍덩!
두목의 말대로 둘, 셋씩 몰려든 해적들은 기사들을 바다에 던져버렸고 실베니아 특유의 거친 파도와 무거운 갑옷
때문에 땅의 영광인 기사들은 바다의 제물이 되어갔다. 풍덩거리는 소리가 많아졌고 제대로 해적을 쓰러뜨리는 사
람은 몇 사람 남지 않았다. 헤모가 싸우고 있던 상대의 목을 꺽으며 보를레스에게 소리쳤다.
"보를레스,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게."
"헤모 사제, 그럼 부탁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보를레스는 검과 걸치고 있던 하드웨어를 벗어 내던지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기사들의 갑옷을 벗
기기 위해서는 전직 기사였던 보를레스가 유리했다. 균형감각을 무시하는 배 안이었지만 가히 권술의 극의(極意)-
마스터-에 오른 보를레스에게 큰 방해일 수 없었다. 육중한 체중이 엄청난 속도와 함께 육박하는 위력은 공포스러
웠다. 모리골드의 전술이 기사들에게는 큰 효과를 발휘했지만 헤모에게는 그리 신통치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를 막
을 수 있는 방법은 활 뿐인데 아무리 흔들림에 익숙한 해적이라도 정확히 겨냥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헤모
는 보를레스가 벗어놓은 하드웨어를 방패 겸 무기로 활은 막고 해적은 후려치는 엄청난 전술을 선보였다.
"으아악!"
비명과 파도 소리가 난무하는 속에서 기사들을 이끌던 펠리언은 망연자실했다. 고작 3, 40명 정도의 소규모 해적 소
탕 정도는 잘 훈련된 10 명의 기사면 충분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니, 5명쯤만 나서고 나머지는 응원만 해도
가볍게 소탕을 끝내리라 생각했다. 물론 틀린 결정이 아니었다. 땅 위에서 싸웠다면 말이다.
"결정적인 판단미스였어. 도련님께서 힘들게 빠져나와 알려 주셨는데, 면목이 없군. 게다가 공주님에게도‥."
마지막 한 마디는 거의 울상에 가까웠기에 그를 몰아붙이던 해적들은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역겹다는 얼굴이
었다. 의외인 것은 먼저 와서 루이스타 호를 들쑤시고 있던 두 사내의 활약이었다. 특히 사내 복장의 거인은 그가
육지에서 상대하라고 해도 절대로 거부할, 일말의 승산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검을 버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구하러 물로 뛰어든 청년도 대단한 실력자였다.
'게다가 나보다 나이가 약간 많아 보였을 뿐이야. 내 또래 중에서는 상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군.'
적과 같은 편을 동시에 경악시키는 존재인 헤모 사제는 레소니가 연락했을 때 마침 헤트라임크와 다과(茶菓)를 나
누던 참이었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셔보려 했지만 아들 걱정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헤트라임크는 7 써클의 마나를
모두 사용하여 즉석에서 그를 실베니아로 보내버렸다. 레소니의 거울은 이미지 전송을 위하여 자연적으로 좌표를
나타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는 헤모는 당장 낭아플의 레이모하 신전으로 달려가 신관
들을 협박했다. 성투사 중에서도 수위를 달리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정보를 알아낸 일행은
당장 루이스타 호로 달려온 것이다. 만약 시즈에게 무슨 일이 생겨 헤트라임크가 분노한다면 정말 상상하기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인신매매라니‥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평소라면 여분의 힘을 남겨주었을 사제였지만 분노한 그는 전장을 누비던 잔혹함에 눈을 뜬 상태였다. 사정없이 박
히는 주먹과 발에 해적들은 쓰러져 일어나는 자가 드물었다. 주위에서 해적들이 사라져갈 무렵,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플레이트를 걸친 채로 저런 움직임이라니‥."
이 흔들림 속에서 청년은 불안하게 비틀거리고 수세에 몰리면서도 3 명의 적을 맞아서 상대하고 있었다. 저 정도라
면 안정된 뭍에서는 보를레스를 뛰어넘는 실력을 지녔으리라. 처음 보를레스의 실력을 보았을 때도 헤모는 내심 놀
랐다.
'그런데 그 이상이라니‥.'
하지만 청년은 현재 위기였다. 중얼거리며 탄복한 헤모는 곧 청년 기사를 둘러싸고 있는 3 명에게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뒤늦게 그들이 뒤를 돌아섰지만 이미 코앞까지 주먹이 도착한 상태였다.
"헉헉! 고맙습니다. 사제님. 대단하시군요."
"자네야말로 젊은 나이에 탁월한 실력을 가졌군. 여기는 대충 정리가 된 듯하니 어서 가서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
게."
"예?"
"납치된 사람을 구하러 온 게 아니었나?"
헤모는 청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자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펠리언의 말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납치된 소년들과 소녀들이라면 다른 곳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즈라는 마법사의 도움으로 모두 탈출하
였고, 저희는 마지막으로 해적들을 소탕하러 온 겁니다."
"시즈가!? 하하하. 그렇다면 굳이 불청객을 자처하면서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지. 그럼 저 아래 친구들을 구해야겠
는데‥."
다행히 보를레스의 수영실력은 격류의 파도 속에서도 빛을 발한 덕분에 대부분의 기사들이 물귀신같은 갑옷을 벗고
수면에 떠있었다. 다만 헤모는 전신 플레이트는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기에 조금은 아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갑옷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구, 사람을 생명을 구할 수 없다면 일푼의 가치
도 없었다.
펠리언은 자신의 부하들 중에 물고기 밥이 된 이들이 없다는데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모두 바다를 사랑하는 실베니아의 기사들입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곧 도련님께서 오실 겁니다. 아!"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멀리 떨어진 절벽에는 거대한 돛의 그림자가 비추기 시작했다. 아마도 대기를 하고 있었던
듯한 범선은 사람으로 치면 뚱뚱하여 군선이 아니라 상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그 규모는 웅장하리 만큼 컸다.
"이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희는 해적 소탕은 고사하고 바다 속에 수장되었을 겁니다. 능히 일당백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들입니다."
펠리언의 격찬에 카이젤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막 자신의 상선에 오른 두 명의 사내와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카
이젤은 비록 펠리언의 직접적인 주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적수가 없다고 풍문이 나도는 젊은 기사의 자존심 정도
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장신들 가운데서도 한 치의 위축도 없어 보이는 금발의 미소년이야말로 이들
일행의 진정한 리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마법사겠지?
"반갑습니다. 카이젤 파엘라스라고 합니다. 펠리언 님의 격찬이 대단하군요."
"저희도 반가워요. 여기 이 분은 헤모 사제님, 또 여기는 보를레스님이십니다."
카이젤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답변을 한 사람은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추측했던 레소니였다. 무표정한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해적이 보았다면 함께 감옥에 있었을지도 몰랐을 금발의 소년이 이들 일행의 대표자라
고 내심 규정내렸다.
"일행의 실력이 모두 뛰어나 든든하겠군요. 묶인 곳이 없다면 저희 상회로 모셔갈까 했더니만 안타깝게 되었습니
다."
카이젤의 농담 아닌 농담에 레소니는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하지만 곧 보를레스를 쏘아보며 말했
다.
"글쎄요. 단둘이 있었으면서 보호할 대상도 잃어 버리는지라 별로 마음이 놓이지는 않는답니다."
또르르‥. 때를 맞추어 보를레스의 뺨에서는 바닷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어느 쪽이든 보를레스
는 더할 나위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헤모가 그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이, 레소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납치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되돌려보내야 할 텐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 집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준 뒤 제가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갈 생
각이니까."
"낭아플에 기거하시는 게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제 아버님은 밀체 지방의 소규모 상회를 운영하시고 계시죠. 이 곳은 오랜 고객이 계시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저희가 한 명 정도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네요. 시즈라는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약간이기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카이젤의 얼굴은 기묘했다. 입술은 웃고 있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눈썹이 찌푸려진
표정. 냉랭한 미소년의 이미지가 한 순간에 사그러졌다. 겁을 먹은 레소니가 머쓱하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시즈님께서 폐라도 끼치신 건가요?"
"아, 아닙니다. 폐는 무슨‥.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만‥."
"다만?"
"의외라고 할까요."
확실히 의외였다. 잠깐이지만 화산폭발처럼 거센 헤모의 전투를 관전할 수 있었던 카이젤은 그 천진난만해 보이는
마법사가 이들과 어울릴 지 잠시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다.
'정말 예상외야. 어이가 없군.'
상회를 이끄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거래할 사람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자신도 아버지에 못지 않게 상화에 수
익을 가져다주는 거래를 해내고 있는 만큼 사람을 보는데 있어 좋은 눈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카이젤은 이맛살
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데린 공녀님과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예!? 공주님께서 오셨습니까? 옥체도 안 좋으신 분이 옥체를 보존하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렸건만! 공주 니이이임!"
시즈의 행방을 찾았다는데 기쁨을 표하려는 것도 잠시 레소니들은 갑자기 비명에 가깝게 부르짖으며 선실로 뛰어들
어가는 펠리언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방금 전까지의 기사로서의 무게있던 시선과 자세, 그리고 똑바른 말투는
어디로 갔는지. 그가 들어간 방향을 향해 입을 뻐끔거리는 레소니 일행에게 카이젤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
다.
"조, 좀 주인애착증상이 심한 사람이거든요."
한 차례 남국의 시원한 파도가 갑자기 북극의 얼음조각으로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한 사람의 등장으
로 레소니들의 충격은 씻은 듯이 사라질 수 있었다.
"여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흑발의 청년을 보자마자 레소니가 번개처럼 달려가 안기는 걸 보며 헤모
와 보를레스는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들의 미소에서는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만약
찾지 못했다면 레소니의 등쌀에 시달려 제 명에 죽지 못했을 것이다.
"히잉‥ 주인님."
누가 애처롭게 훌쩍이며 청년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를, 절정의 실력을 가진 투사와 검사에게 식은땀을 흘리게 할
위인으로 볼까. 자물쇠처럼 꼭 잡고 있는 레소니의 금발을 쓰다듬으며 시즈는 미안한 감정을 담아서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네. 미안해요‥."
부비부비부비. 레소니가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가로젓자 꽤나 간지러웠다. 밀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시즈는 할
수 없이 더 깊이 그녀를 안았다. 그런데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하고 계속 안겨있고 싶은 듯
한‥.
"레소니!?"
시즈가 이상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레소니는 항상 가슴을 압박하던 무언가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오느냐고 동여매는 걸 잊었던 것이다. 시즈는 확인이라도 하는 듯 몇 번이나 안았다가 놓았다가 하더니 눈썹을 살
짝 찌푸리고 말했다.
"그 사이에 살이 쪘군요? 감촉이 나쁘지는 않지만‥. 으윽!"
시즈는 발이 뭉개지는 느낌에 고통을 호소했지만 레소니는 뾰로퉁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발에 힘을 주었다.
"레, 레소니, 남자는 약간 살이 쪄도 보기 좋아‥ 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