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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도록 하지. 나는 그대들이 데린을 수행해주었으면 하네."
역시 카이젤의 말에 이끌려 데인 공녀의 초청에 응한 것에 후회를 시작하는
시즈 일행이었다. 필레언의 격찬에 감탄한 데인은 해적을 소탕하는데 있어
막대한 공적을 세웠다는 이유로 시즈들을 그녀의 성으로 초청했다. 자유로
운 여행을 원하는 시즈는 거절하려 했지만 카이젤의 근심 어린 귓속말은 시
즈가 데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감사를 표하도록 만들었다.
"공녀는 외동딸로 곱게만 커서 누가 자기의 말을 안들으면 난리를 칠 거야
. 얌전히 응하는 게 좋다고. 나도 집으로 가고 싶지만 아무 말 없이 가는
거라고."
그의 말대로 라면 식사 정도만 하고 시즈들은 자유로운 여행과 관광을 즐기
는 신세가 됐어야 하는데 하도너 킬유시 공작은 그들을 놓아주고 싶은 마음
이 조금도 없는 듯 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에서는 아에 폭탄 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시즈는 애초의 계획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몸서
리치며 곤란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용병이 아닙니다."
"용병이 아니더라도 수행해줄 수는 있지 않은가. 공작인 내가 이렇게 부탁
해도 안되겠는가."
"저희는 한가로운 관광을 목적으로 실베니아를 방문했지, 수행원이나 용병
노릇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냉정하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죄송합니다."
그들의 단호한 거절에 공작은 무척 실망했다. 그의 계획에 있어서 이들 이
외의 적임자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강제로 시킬 수는 없는 일이 아
닌가.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소. 편히 쉬었다가 가시오. 나는 일이 있어 먼저‥."
그러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어찌 바로 잡을 수는 없는 노릇. 공작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모습을 감추자 카이젤이 공작의 뒤를 따라 들어갔고 이가
빠진 듯 자리가 빈 테이블 주위로 차가운 냉기가 흘러 다녔다. 하지만 먹는
데 있어서 분위기를 가릴 보를레스와 헤모가 아니었다. 금새 그들의 게걸스
러움은 다시 차가운 바람을 날려버렸다. 미식가임을 자처하는 시즈는 많은
양 먹기보다는 여러 가지 음식을 음미했다. 입 주위를 냅킨으로 닦아낸 그
는 데린에게 물었다.
"실베니아는 밤에 열리는 시장이 마치 축제를 보는 듯 화려하다고 들었습
니다만‥. 낭아플에서도 볼 수 있나요?"
"마법사 님께서는 낭아플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군요. 낭아플은 실베니아
남서부에서는 가장 독특하고 화려한 야시장이 열리는 곳이랍니다. 밤 8시부
터 준비하여 9시면 슬슬 볼 수 있지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마침 겨울이
가고 새해가 오는 걸 맞아서 불꽃 무도회도 열린답니다."
"아니, 공주 님― 어찌 위험한 야밤에!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필레언, 지난 번에 의사한테 가보라고 했었지요?"
"흑흑! 공주 님께서 미천한 이 몸을 그리 생각해주시다니, 하오나 공주 님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휴우‥. 식사가 끝나면 시녀들과 시종들은 손님들의 준비를 도와 드리세
요. 아! 그리고 레소니는 제 방으로 좀 와주세요."
"예?"
레소니가 어리둥절하여 눈을 큭 뜨자 데린은 살풋 웃으며 말했다.
"단둘이 할 얘기가 있거든요."
"공주님! 아무리 소년이라지만 남자입니다. 한 방에서 밀담이라뇨‥!!"
증상이 심하다. 필레언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심정은 불쌍함과 안쓰러움이
었다.
#
"저어‥ 공녀님!?"
"어머, 왔군요. 레소니. 거기에 앉으세요."
데린은 시녀들이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에 정신이 없으면서도 방긋 웃으며
레소니를 반겼다. 그녀는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갈색의 곱슬머리였지만 윤
기가 돌아서 반짝이니 귀족의 딸이라기보다는 나무꾼처럼 야성미가 풍겼다.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다소곳이 앉아있는 레소니를 바라보던 데린은 키득
거리면서 물었다.
"남자들도 모두 준비하고 있을 텐데 레소니도 이제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
어요?"
"예? 아니 저, 전!"
"리에느. 아까 찾아두었던 드레스 좀 가져오세요. 난 이제 끝났으니까 모
두들 레소니를 좀 도와줘요."
레소니가 말릴 새도 없었다. 여인들을 옷을 벗기는데(?) 능숙했고 입히는
것도 또한 순식간이었다. '어머! 피부가 참 곱네요.' 등의 칭찬을 늘어놓
으며 온몸을 주물러대는 그녀들의 손길에 레소니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
다.
"저, 저기!"
"레소니‥ 오늘은 나한테 맡겨요. 남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만들어 놓을
테니까."
깔깔하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하는 레소니
의 되뇌임은 서서히 묻혀 사라졌다.
한 시간 후,
"레소니는 공녀 님과 함께 갈아입는 건가?"
헤모는 중얼거리며 시즈를 힐끗 바라보았다. 자신과 보를레스는 이미 레소
니의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시즈는 의심하지 않을까?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지. 현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청년이었다. 한숨을 내쉬는 사제의 옆
에서 푸른색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펠리언는 왠일인지 완전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혼자 있는 방에 남자를 부르시다니‥."
과대망상증까지 의심해봐야 할 상황이다. 헤모는 정작 신경쓰이는 시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현재 회색일색으로 깔끔하게 차려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 드디어."
과연 공녀는 아름다웠다. 모두 입을 벌리며 감탄을 늘어놓았지만 실제로 놀
란 사건은 그 뒤였다. 실처럼 가는 금발이 살짝 어깨를 수놓고 우유가 묻어
난 듯 새하얀 피부, 청초하면서도 유혹적인 소녀의 모습에 남자들은 신음했
다. 카이젤 같은 경우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고 보를레스도 눈에 핏발이
솟을 때까지 비벼댔다.
"설마 레소니?"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들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데린은 의미심장한 표정
을 레소니에게 보였다. 레소니도 싫지는 않은지 홍조를 띈 얼굴의 입가가
살풋 미소를 실었다. 하지만 둘의 예상을 빗나가게 한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시즈였다. 누구보다도 놀람을 기대했던 시즈는 그저 두 여인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던질 뿐이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그럼 기대하던 구경을 할 수 있겠군요."
낭아플의 야시장는 계절마다 색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단순한
시장으로써가 아니라 야제, 즉 '밤의 제사와 축제'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
"신사와 숙녀 분들께서는 불꽃의 무도회에 참가하시는 군요. 양쪽 다 아주
훤칠하십니다."
무슨 거래든지 칭찬은 말문을 트기에 가장 좋은 접근법. 시즈는 주머니를
털어서 척 보기에도 궁색한 여인에게 작지만 예쁜 무늬가 수놓아진 부채를
샀다.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돈을 가져왔어야 할 레소니가 아무 것도
주지 않았기에 현재 그에게는 전부인 액수였다.
'보통 때 같으면 내게 달라고 하셨을 텐데 쳐다보지도 않으시다니 ‥ 화가
나신 거야. 내가 여자라서 화가 나신 거야.'
레소니는 그렇게 생각하자 서글퍼져 몰래 눈물을 훔쳤다. 카이젤이 다가와
우울한 소녀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그의 뛰어난 용모와 언변
으로도 레소니는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데린의 뒤만 따라갈 뿐이었다.
"귀족들도 '야제'에 참가하는 군요?"
시즈는 부채를 팔던 여인이 귀족 일행에게 망설임없이 말을 걸던 걸 떠올리
며 말했다. 펠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축제니까요. 야제에서는 귀족과 서민을 가리지 않고 함께 춤
을 춥니다."
"그러고 보니 펠리언 님, 지난번 야제에서 함께 춤추던 여자는 어떻게 되
었나요? 아주 귀엽던데‥."
펠리언의 펴진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레소니와 펠리언 님을 같이 놔두면 아주 멋진 커플이 되겠군. 실의에 빠
진 커플.'
헤모는 두 사람이 정말로 어울리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레소니에
게 다가갔다.
"뭘 그렇게 우울해하는 거야?"
"모두에게 미안해요."
"뭐가?"
그녀는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 연하게 노란빛이 포함된 백
색의 드레스를 당장 벗어버리고 싶은 심정을 레소니는 조그맣게 토로했다.
"제가 여자라는 걸 숨겨서 다들 화가 난 거죠?"
"아하하하‥. 레소니, 네가 여자아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어. 어색해하
는 이유는 네가 너무나 아름다워서지."
만약 헤모가 사제가 아니었다면 이상한 오해를 했을지도 모를 대답이었다.
레소니는 다들 화가 나지 않았다는데 기뻐 고개를 들려다가 시즈를 보고 얼
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혹시 시즈 님께서도 알고 계셨어요?"
"글세‥. 저 영악한 녀석의 반응으로 볼 때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럼 저택에서 남자이기 위한 나의 노력들을 시즈 님께서는 보고 뭐라고 생
각하셨던 거지? 더욱 고개를 들기가 어려워진 레소니, 헤모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기만 했다.
"저게 바로 밤의 꽃이라고 불리는 '나메트라에'랍니다. 사실은 버섯의
일종인데 밤이 되면 푸른빛을 내뿜지요. 야제의 바다에서 여인에게 춤을 청
할 때는 꼭 저 나메트라에를 건네야 해요."
공녀는 기둥도 몇 아름은 되고 가지도 셀 수 없이 뻗어있는 나무의 위를 가
리키며 설명했다. 그녀의 말대로 나무는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점등으로 전
설 속의 보석 나무처럼 보였다. 시즈 일행이 황홀하여 고개를 내리지 못하
고 있으니 데린는 갑자기 장난기가 생겼다. 공녀는 레소니의 옷자락에 손가
락을 스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어떤 마법사는 나메트라에를 마법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말도 있어요. 그
래서인지 '나메트라에'에는 얽힌 전설이 있는데 사랑하는 두 남녀가 나메
트라에를 가운데에 두고 함께 입김을 불면 붉은 사랑이 결정이 되어 떨어진
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영원히 맺어준다죠?."
마지막 한 마디는 아주 작아서 스칠 정도로 가까웠던 레소니만 들을 수 있
었다.
"없으면 해변으로 갈 수 없다니‥. 그럼 저 나무에 올라가서 꺾어와야 한
다는 말입니까?"
보를레스는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이상한지 볼을 긁적였다. 데린이 소매로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면서 다른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자 그는 더욱 무안
해졌다. 그들의 시선이 향해있는 곳의 남자는 붙임성있게 외치고 있었다.
"자아‥. 야제의 필수품, 밤의 꽃 나메트라에 팝니다! 아니, 거기 멋진 귀
족 분들! 아무리 고위직이라도 나메트라에 없이는 불꽃의 무도회에서 춤을
출 수 없어요!"
"저기 얼마죠?"
"2 마일드 입니다."
이런 말 저런 말을 해도 모두 여인과 춤은 추고 싶었는지 버섯 달린 가지를
샀다. 돈이 없는 시즈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는 그
에게 펠리언이 말했다.
"그대는 춤을 추지 않을거요?"
"그래야 할 듯 합니다."
"모처럼 정장을 차려입었는데 춤을 추지 않는다니 말이 됩니까? 자자, 내
가 빌
려주겠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구경을 하는 걸로 충분해요."
그의 거절에 안달이 난 사람은 레소니였다. 입술을 깨물며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연신 고개를 젓고 있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차림을 했는데!'
그냥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구상과 현실에서의 실현은 다른 차원의 현상
이나 다름없었다.
"후훗. 헤모 사제 님께서도 춤을 추시게요?"
"공녀 님, 사제라고 인생을 즐기지 말란 법 없지요. 노래와 춤은 신을 찬
양하기 위한 한 형태의 제사이기도 하답니다."
제법 뻔뻔스레 말을 하면서도 헤모는 약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해변에 다다랐다. 이미 사람들이 몰려와서 북적댔다
.
"이거 잘못하면 사람 잃어 버리겠네. 공녀 님 제 손을 잡으시죠."
"고마워요."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레소니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역시 정신이 산만했는지 마주 오던 사람에게 부딪쳐 이리저리 비틀댔다.
"괜찮니?"
"예‥ 주인님. ‥!"
반사적으로 입술을 뚫고 나온 호칭에 그녀 자신이 놀라 뒤를 돌아보니 시즈
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안고 있었다. 레소니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그는 평
소보다는 어색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많아 이리저리 떨어졌는지 일행이
보이지 않자 시즈는 걱정보다는 안심한 표정으로 레소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
"그리고 이거‥ 갖으렴. 널 주려고 산 거니까."
"아까 그 부채‥. 그럼‥."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채는 분명 시즈가 주머니를 털어 산 물건이었다.
'왜 돈을 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으려는 레소니의 심사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 시즈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그냥 너에게 줄 물건인데 너에게 돈을 받아서 살수는 없잖아."
"쿡쿡! 그래봤자 어차피 주인님의 돈이잖아요."
어두운 밤길에서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시즈는 목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쑥스러워 머리칼을 내려 얼굴을 가려버리는 청년이 귀엽게 느껴져
레소니는 그의 팔을 꼭 껴안았다.
그 때, 다른 일행은‥
"시즈 님과 레소니만 없어졌군요."
"걱정마세요. 둘이 같이 있는 걸 보았답니다."
"공녀께서 보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런데 왜?"
"두 분 다 어린애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후훗."
의미심장한 그녀의 웃음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카이젤이 혼자 시무룩해지기는 했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헤모
는 무슨 상상을 했는지 이런 기도를 했다.
"레이모하여‥. 그에게 용기를. 선(?)을 넘을 용기를!"
힘이 있는 기도였다.
#
"달이 머리 위에 있다는 게 믿어져?"
"?"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레소니에게 시즈는 해변 수평선까
지 그어져 있는 달빛의 선을 가리켰다.
"그냥 보기만 해도 수평선에서 빛이 오고 있다고 느껴지잖아? 저 멀리에서
부터 달은 선을 긋고 있는 거지. 더 이상한 건 어디로 걷던 간에 나에게로
긋고 있어. 하지만 재미있지? 달은 누구에게나 비치고 어디에나 빛을 베푸
는데 왜 자신에게만 오는 걸로 보이지?"
레소니로서는 어렵기만 한 문제였다. 그가 이렇게 바닷가를 걷는 상황에서
도 그런 문제를 질문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그녀는 시즈를 자신 앞으
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흥! 자‥ 보세요. 제게는 달빛이 주인님께 그어지는 걸로 보이는 걸요."
"‥‥."
시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레소니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뜸한 바위 뒤로 왔을 때 그는 말했다.
"레소니‥. 사람의 물건이라면 다른 이에게 양보해도 되지만 땅과 바람과
물, 그리고 자연이 주는 걸 양보하면 안돼. 그것은 곧 생명을 양보하는 거
니까‥."
파도 소리가 맞장구를 쳐주었기 때문일까? 레소니는 청년의 목소리가 너무
나 슬프게 느껴지자 울컥했다.
"나, 난 주인님, 시즈 님이라면 내 생명을 줘도 좋아요."
"‥‥."
"‥?"
그 말을 할까봐 두려웠다.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 다시 떠오른다. 무력했던
나의 삶 속에서 사라진 이들‥. 그들은 팔이 뜯기고 다리가 먹히는 상황에
서 내게 도망가라 소리쳤다. 자신들의 목숨까지 살아달라고 했다.
"너도 그렇게 떠날 건가?"
레소니는 청년이 입술을 움직이는 걸 보았지만 소리가 작아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들어 바라보자 시즈는 억지
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아니다. 파도치는 소리에 잠시 취했어. 왠만하면 주인님이라고는 호칭은
쓰지 말았으면 한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끄덕.
"그럼 시즈 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 그러니까‥ 제가 여자라는 걸
언제부터‥?"
소녀는 부끄러운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에?"
실제로 시즈는 게을러서 문제지, 요리 솜씨나 청소에 있어서는 레소니보다
도 월등한 실력이었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절대로 굶어서 죽지
않을 그였다.
"그럼!?"
"쓸쓸해서 가족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제플론에 계시지만 수도는 조용하지
않고‥ 그렇다고 바쁘신 분이니 모셔올 수도 없고‥ 너희가 와서 난 즐거
웠어. 그걸로 됐지 않니?"
"하, 하지만‥ 다른 언니들한테는‥."
"그래. 여자라서 안 된다고 했지. 그냥 핑계였을 뿐이야. 그러고 보니 레
소니의 나이도 14살이구나. 처음 왔을 때하고는 많이 달라졌어."
"달라지다니요?"
"여자다워졌어."
화악‥. '그럼 내가 이제껏 해왔던 노력은 뭐지?'라고 절규하면서도 그녀
는 시즈의 한 마디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이런 곳에도 '나메트라에'가 있구나. 버섯 주제에 소금물을 맞으면서도
살아가다니‥. 어쩌면 나트륨 성분을 변화시켜서 이런 빛을 내는 걸까?"
막 크기 시작한 어린 나뭇가지가 레소니의 머리 위에서 푸른빛을 알알이 밝
혔다. 시즈는 가장 나메트라에가 많은 가지를 꺽어 레소니에게 주며 말했다
.
"아름답기는 하지만 나메트라에는 동물로서 생각할 때는 기생충이나 다름
없지. 다른 이의 잇속을 빼앗아 빛을 내는 귀족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가지
를 꺽어 화려함이 반감되기는 해도 나무가 크는데는 더 도움이 될 거야."
얘기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푸르스름한 빛깔이 혐오스러웠다. 입술을 삐죽
이 내밀며 눈썹을 찌푸리는 그녀에게 약간 고개를 숙이며 시즈가 속삭였다.
"여러 가지로 말을 돌리며 건네기는 했지만 그걸 버리면 안돼. 난 지금 네
게 춤을 신청한 거니까‥."
"네."
레소니가 금세 홍조를 띠며 기뻐했다.
"그럼 그만 갈까?"
"저, 저기 그 전에‥."
시즈는 갑자기 레소니가 나메트라에를 내밀자 의아해하다가 곧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꼭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미소였지만 달빛처럼 은은하여
레소니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입김을 불면 되는 거지?"
끄덕끄덕.
'동생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겠지?'
시즈는 그렇게 두근거리는 심정을 다잡아보려고 했지만 물결에 튕긴 은근한
달무리가 묻어난 레소니는 마치 바다의 요정 같았다. 눈을 감고 나메트라
메를 향해 입김을 불려는 순간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읍!"
놀라 밀치려고 했지만 찌를 듯한 긴 속눈썹은 수줍게 떨리며 시즈의 팔에서
힘을 떨구게 만들었다. 어깨에 두었던 손을 등뒤로 둘러 품에 안으니 소녀
가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촉촉하고 부드
럽운 입술의 감촉 뒤로 이어지는 혀의 얽힘에 아예 혼이 하얗게 새어버린
그가 입술을 떼려 했지만 레소니는 놓아주지 않았다.
"하아‥."
그리고 레소니가 입술을 떼며 달아오른 입김을 내뿜는 순간 둘은 볼 수 있
었다.
"아‥!"
붉은 설광(雪光 :눈빛)이 허공에서 흘러내린다. 어둠 속에서 그 빛깔은 황
홀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일까? 시즈는 품에 안겨있는 소녀에게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
"어때요? 붉은 포자가 떨어져 내리죠?"
"정말이군. 신기한 걸."
헤모를 비롯한 보를레스는 붉은 포자가 떨어지는 나메트라에가 재밌다는 듯
흔들어보였다. 펠리언은 그냥 입김을 불어보지만 푸른 포자만 떨어지자 이
상하다는 듯이 데린에게 물었다.
"공주 님, 어째서 숨을 오랫동안 멈추고 있다가 내뱉어야 붉은 포자가 떨
어지는 겁니까?"
"아무래도 온도와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한 연금술사가 연구를
하려고 나메트라에를 여름까지 키웠는데 날씨가 아주 따뜻해지자 붉은 포자
를 떨어졌다네요."
"그게 사랑과 무슨 관계입니까?"
"어머나‥ 보를레스 모르시는 군요. 사랑의 방식 중에는 숨을 멈춰야 하는
게 있답니다. 호호홋!"
"역시 공주 님! 박식하기 그지 없으시군요. 이 펠리언 감격했습니다."
그야말로 엽기발랄한 공주와 기사였다. 그렇게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이들
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시즈와 레소니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후훗. 레소니의 나메트라에도 빨간 게 아주 예쁘네요. 그렇죠? 시즈 님.
"
"네. 헤헤헤."
"‥‥."
발랄하게 대답하는 레소니와는 달리 시즈는 쭈뻣거리기만 했다. 레소니가
푸른 눈동자로 바라볼 때마다 뭐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돌리는 그를 보며 보
를레스는 혀를 찼다. 헤모가 다가와 쑥스러워하는 시즈의 까마귀털 같은 머
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을 한다는 걸 그리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을까? 자네가 아무리 고명한
학식을 가진 현자라지만 나이가 어린 만큼 인간의 감정을 알 수는 없는 노
릇이야."
"예‥예에‥."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아직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소녀에게 과연 잘한 짓
일까? 게다가 붉게 변한 나메트라에는 소녀에게 깨지지 않을 꿈을 주게 된
듯했다. 죄책감, 그리고 당했다는(?) 무안함이 시즈의 얼굴을 물들였다.
"혹시나 아름다운 빗깔의 버섯 때문에 그리 힘들어하는 건가? 그렇다면 걱
정하지 말도록 하게.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전설과 그에 얽힌 보물들이 있
다지만 어떤 것도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감정보다 진실되지는 못하니까‥
. 자네가 레소니를 좋아한다면 그걸로 된 거지."
"‥‥ 고맙습니다. 헤모 사제."
"뭘‥.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7살 연하는 범죄야‥."
천천히 무리를 지은 사람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모닥불 주위로 둘러서서 춤
을 추기 시작했다. 저 마다들의 허리에 걸린 밤의 꽃은 푸르고 붉은 빛깔을
파도가 치는 해변가에 흩날렸다.
#
"정말인가? 정말 수행에 도움을 주겠단 말이지?"
공작은 껄걸 웃으며 키 작은 시즈의 어깨를 잡고 어린아이가 인형에게 장난
치듯이 흔들었다. 이러다간 뼈들이 몽땅 탈골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낀
시즈가 서둘러 대답했다.
"예에에에‥. 도와드리이일 테니이이 이 소오온 조오옴‥."
"앗! 미안하군. 워낙에 기뻐서 말일세. 어째서 그렇게 마음을 바꾸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공녀께서 워낙 풍류에 밝으신지라 여행하는 기분으로 함께 하면 즐거울
듯 합니다."
진심일까? 공작은 시즈의 미소 끝에 달린 경련이 의심스러웠지만 아무렴 어
떤가?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자진하여 수행하여 주겠다는데‥. 웃음을 멈추
지 못하는 공작의 모습이 시즈의 회상 속에 누군가와 겹쳐져갔다.
"고맙네 그려. 흐흐흐흐흣."
- 후후후후훗. 정말 안 되나요?
- 공녀 전하,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
- 그렇군요. 할 수 없지요, '마땅찮은 이'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 !! 에?
- 실베니아를 얕보지 마세요. 얼마 전 엘시크의 세계적인 명사 '마땅찮은
시즈'가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 정도의 정보는 수집된 상태입니다. 그런 상
태에서 시기도 적절하게 동명인이 나타났으니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요?
- 설마 저 같이 어린 사람과 세계적인 명사를 비교하십니까?
- 비교 못할 것도 없지요. 제가 듣기로는 '그'는 의외로 젊은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어쨌든 그런 세계적인 명사가‥.
- 명사가?
- 7 살 연하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나면 어떨까요?
- 에엑!? 그, 그게‥. 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제게 필요한 것은 세계적인 명사인 시즈보다는 마
법사 시즈니까요. 어쨌든 소문이 남으로 해서 당신이 곤란한 건 마찬가지일
걸요. '시즈 사칭죄'에 걸릴지도? 저야 당신과 세계적인 명사의 이름 때
문에 헥갈렸다고 하면 되는 거고요.
- 여, 영악하시군요.
- 여자는 원래 영악한 법이랍니다. 그대도 척 보니까 잡혀살 것 같은데 미
리미리 레소니의 비위를 맞춰놓도록 하세요.
- 고, 고맙군요.
- 후후후후훗. 어쨌든 수행에 대한 건은 받아주시는 걸로 알겠어요.
그 때 시즈는 죽은지 3년 만에 되살아난 좀비처럼 상태가 나쁜 걸음걸이로
걸어나와 문을 닫다가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리치 상태가 되어버렸다.
- 호호호호홋. 진짜 명사 시즈 였나보네. 의외의 수확인 걸. 때때로 써먹어
야지.
그렇게 되어 그들은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
실베니아는 육지보다 바다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일한 해상국가였다.
그러니 교통도 육로보다는 해상로가 발달되어 있었다. 배는 바람을 돛에
실기만 하면 되니 순풍만 온다면 편하기 그지없었으나 바다는 신들이 태어
났다는 혼돈의 기운을 하늘에게서 받아들인 곳이었다.
"휴우‥. 바람도 바람이지만 격랑이 심하네."
"해안선이 복잡하니 더욱 그러하겠죠. 이런 바다는 언제 소용돌이가 생길
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정도니까 갑자기 격랑이 이는 정도는 양호하다고
봐야죠."
시즈와 보를레스는 선원들을 도와 갑판을 열심히 걸레질하다가 배가 흔들리
자 난간을 잡고 힘겹게 버텼다.
"그 해적들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예. 대단합니다."
익숙하다는 듯 폴짝폴짝 뛰어다니기까지 하는 선원들이 둘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새 냉수라도 맞고 속차리라는 듯 뱃전에 튕긴 바닷
물을 몽땅 뒤집어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토록 심한 요동 속에서 멀미라도 안 하는 게 어디겠습니까?"
"그렇지‥ 휴우‥."
이들이 이토록 겸양하게 만족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 이미 멀
미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시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누워
서 멀미와 씨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생각났는지 보를레스가 시즈에게 말했
다.
"그나저나 요동이 심해졌으니 레소니가 힘들어하겠군. 이런 심한 격랑은
일어날 기후가 아니라는데 왜 이러는지‥."
"예. 그래서 막 들어가 볼 참입니다."
"벌써부터 잡혀 사는 건가?"
"놀리지 마시죠."
보를레스는 즉각즉각 반응 상태로 변모한 채 선실로 들어가는 청년을 놀리
는 게 버릇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너무 재밌어."
"보를레스 님! 물이 쏟아져서 다시 닦아야 되요."
지나가던 선원의 말이었다.
#
"보, 보지 마요."
레소니는 방금 전에도 토액질을 하여 냄새가 심하게 나는 게 부끄러워서 시
즈를 자꾸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요동에 비틀대다가 밀쳐대려던 청
년의 품안으로 안겨버렸으니 그야말로 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니?"
"‥‥."
시즈는 물어놓고 후회했다. 멀미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린 걸 알면서 그
렇게 묻다니‥. 내보낼 걸 모두 내보내고 배속이 아픈지 자신을 꼭 붙잡고
있는 그녀의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주고는 말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요. 괜찮아지면 해달라는 걸 뭐든지 해줄 테니까."
"정말이죠? 시즈."
그녀의 청년에 대한 호칭은 어느 새 '님'이 사라지고 없었다. 시즈로서는
익숙하지 않는 호칭이 사라진데서 기뻐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걸로 놀려
대기에 바빴다. 레소니는 안쓰러움이 풍기는 시즈의 눈동자에 눈을 맞추고
말했다.
"그러면 마법을 알려주세요."
"마법‥."
"나도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안 될까요? 시즈."
"‥가르쳐 줄게. 내가 잘 가르칠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에 레소니가 너무 힘들어하니 뭍에 도착할 때까지는 잠을 자두는 게
좋겠어."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걸요."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줄게."
그러고 청년은 어린 연인의 귀가 간지럽도록 작고 부드러운 노래를 불러주
었다.
"무슨 일이죠?"
레소니에게 의연 중 마법을 걸어 잠을 재워놓은 시즈가 갑판으로 나오니 모
두들 당황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시즈가 이유를 묻자 헤모 사제가 황
급히 대답했다.
"바다뱀이다."
선원들은 모두 저마다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배에 타고 있던 어떤 기
사들보다도‥. 무려 30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뱀이 바위를 둘둘 말고 노
려보는 모습에 어찌 저토록 대항할 생각을 할까? 웜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다뱀을 처음 본 시즈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은 마법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니다. 그런데 왜?"
"바다에서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저희는 바다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반면에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대항할 용기도 누구보다 정확
합니다. 대항할 존재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대항하는 것은 만용이지만 알고
대항하려는 것은 용기입니다."
"알고 대항하는 게 용기다."
"보를레스‥."
뒤를 돌아보니 보를레스가 작살은 하나 던져주었다. 엉겹결에 받아든 시즈
에게 보를레스는 작살의 끝 부분이 날카로운지 손가락으로 가늠해보며 말했
다.
"드래곤 슬레이어 만이 용사가 아니지.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를 용사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 바다에서는 태풍과 수많은 물결 속의 생물들과 싸우는
뱃사람이 최고의 용사다. 오늘 하루는 용 잡는 용사가 아닐지라도 바다의
용사들을 돕는 갑판 청소원이닷!"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가는 보를레스 갑판 청소원. 충각을 딛고 다른 선원들
과 함께 작살을 힘차게 던졌다. 몇 개는 바다뱀의 몸에 꽂히고 더러는 바다
에 떨어졌다. 꽂힌 작살은 밧줄을 풀었고 꽂히지 않는 작살을 잡아당겨 다
시 던졌다. 하지만 바다뱀은 무려 30 미터에 가까운 끝을 알 수 없는 거신
이였다. 부르르 하고 몸을 털자 대부분의 작살이 빠져버렸고 오히려 화만
돋아 격랑의 물결을 타고 쏨살같이 배로 다가왔다.
"눈을 향해서 작살을 던져!"
"온다! 하나! 둘! 세에엣!?"
멋지게 구호를 맞췄으나 던질 수 없었다. 던지려는 순간 바닷뱀이 수면 아
래로 잠수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작살의 충격으로 도망간 건가?'하고 한
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시즈가 소리쳤다.
"다들 조심해요! 꼬리로 내려치려는 겁니다!"
만약 바다뱀이 사람이 연극하듯이 기술의 이름을 일일이 말해준다면 아마도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바다뱀류 시간차 공격!"
어쨌든 간에 안심하고 있던 조타수는 키를 돌려보았지만 높이 치켜들어진
꼬리가 떨어지는 속도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바다의
신이 철퇴를 내리치듯이 10 미터의 기다란 채찍이 바람을 가르며 쇄도했다.
"화염의 정령이여, 타오르는 불꽃을!"
퍼억, 퍼엉, 퍼억! 위기일발의 순간에 사람의 몸통만한 화구가 날아가 바다
뱀과 부딪혔다. 그 몸에 비하면 작은 부위였겠지만 피부와 살이 탄다는 것
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고통이었기에 바닷뱀은 공격을 잊고 바다 깊이
들어가 익은 꼬리를 식혔다.
사람들은 화구를 날린 카이젤에게 감동한 표정을 지었고 카이젤은 언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바다에서 살아왔다는 녀석들이!!! 그렇게 넋을 멍하니 놓다니! 조타수 어
서 빠져나가지 않고 뭐해! 다른 선원들은 돛을 관리하면서 주의를 경계해.
"
카이젤 파엘라스이 비록 나이가 어리기는 했지만 바다에 대해서는 어느 뱃
사람보다도 노련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파엘라스 가(家)는 바
다를 이용하는 상인이었고 그 후손인 카이젤 또한 그러했기에 가능한 사실
이었다. 혹시 모를 몬스터의 습격이나 자연적인 재해로 인하여 무역이 실패
하면 큰 금전적 손해와 신용을 잃게 되는 파엘라스는 조금 더 안전한 해상
로 개발과 바다의 변화를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정령사를 자산을 투자하여
교육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해상 무역만으로 세계 10대 상회 안에 들어가
는 쾌거를 이룩했던 것이다.
소년의 충고는 옳은 것이었고 사람들은 나이어린 사람의 명령이라고 바른
행동을 거부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선박의 가장 자리로 다가가 주의를
경계하는 선원 하나가 외쳤다.
"기포를 주시해. 기포가 많이 올라오는 곳이 놈이 숨은 장소요. 올라오는
순간 작살을 던져!"
돛을 당기고 방향타를 돌리고 작살을 던지는 그들에게는 신분이 높고 높음
따위는 이미 파도에게 삼켜진지 오래였다.
"여기다. 올라온다!"
바다뱀은 바다의 생물이라지만 물고기처럼 아가미로 숨을 쉬지는 못했다.
고개를 내민 녀석에게 선원들은 무더기로 작살을 선사했다. 놈이 아픔에 발
버둥쳤다.
"쿠와아아아아아."
그 거체에 부딪인 바위마다 박살이 나고 바다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뱀의
몸부림에 일어난 파도는 배와 씨름을 할 듯 덤벼들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쿵쿵하고 배가 울리기 시작하자 카이젤과 선원들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누가 선실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 놈이 배 밑바닥에 부딪치고 있
어!"
'안돼. 레소니!'
뛰어들어간 시즈는 마법으로 레소니를 재워두었다는데 후회했다. 이미 무릎
까지 물이 차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뱀과의 충돌로 배가 망가지지는 않
았지만 이음새가 약간씩 벌어지면서 해수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레소니가 누워있는 침대는 물에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바다에게 그녀를 줄
수 없다는 듯 꼭 안은 시즈는 마법을 풀었다.
"레소니, 일어나요."
"시, 시즈 님, 아니 시즈. 무슨 일이에요?"
"나가서 얘기할게요. 다른 사람들도 데리고 나가야 하니까‥."
하지만 선실에는 레소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병색이
라고 볼 수 있을 만큼 피폐하진 레소니를 데리고 나가자 갑판에서 카이젤과
선원들이 바다뱀과 싸우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저건‥."
"임리얼 이라고 하는 바다뱀이야. 나이를 많이 먹으면 길이가 무려 50미터
에 달하는 엄청난 괴물이지. 크기로만 봤을 때는 드래곤보다도 커."
"공녀 님이셨군요. 레소니를 부탁드립니다."
안타깝게도 카이젤의 정령을 부리는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임리
얼도 살을 태우는 아픔에 익숙해지자 거침없이 공격을 해댔다.
좌아아악!
원래 독사 중에는 독침을 뿜어내는 일종이 있었다. 그러나 바다뱀은 물을
빨아들여 엄청난 압력으로 쏘아보대는 그야말로 물대포였다. 만약 그대로
맞았다가는 배가 벌집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흐아아압!"
아무도 어찌할 바를 모르자 헤모가 보를레스의 검을 빌려 쥐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공중에서 충돌했다. 물줄기가 폭발하듯 헤모의 좌우로 갈라졌다.
그 충격이 대단했는지 헤모의 육중한 몸이 거세게 날아가 갑판에 충돌했다.
"기절하셨어요."
헤모의 상태를 살펴본 시즈가 알리자 배 위의 얼굴들이 참담하게 일그러졌
다. 하지만 물대포를 그대로 맞은 헤모가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
라는 걸 기사들은 알지 못했다. 마치 온몸을 망치로 두들기는 고통이었을
게 틀림없었다. 동물과 몬스터는 분위기에 민감한 법. 임리얼은 금새 먹이
들의 사기가 줄어들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멍청한 표정
을 짓고 있던 구리색 피부의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적당히 구워진 게 맛
도 좋을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악! 살려줘!"
순식간에 두 사람이 잡아먹혔다. 그러나 소리치는 남자도 무리한 요구라는
걸 알고 있는지 이미 그의 발버둥은 절망에 물들었다. 시즈가 이를 악물고
앞으로 손을 뻗으며 외쳤다.
"거대한 바람의 의지여‥. 한 줄기 흐름에 모여진 힘을 부여하여 검이 되
어라!"
카이젤은 정령의 기를 무시하고 시즈 앞에 모여드는 바람의 기세에 거친 숨
을 들이켰다. 적어도 마나를 사용하여 바람을 움직였다면 정령이 반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에 젖은 눈빛을 하고 있는 청년의 마법은 주위를 찢을
듯한 바람을 모으고 있는데도 자신의 정령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양
떨고만 있었다?
'저 녀석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때가 아니다
.'
시즈가 임리얼의 목을 향해 손가락을 그었다.
콰과과과과.
바다뱀의 거대한 꼬리가 내려치던 소리와 비교했을 때 더하면 더했지 뒤지
지 않을 파공성이었다. 데린과 레소니처럼 뒤에 숨어있던 여인들은 그 소리
만으로도 피부가 뜯겨나갈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임리얼도 위험을 느꼈는지 급히 물 속으로 숨으려고 했지만 무언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걸 느꼈다. 그 가는 눈에도 비쳤을 것이다. 두 손을 모아 인
(印)을 맺고 있는 소년이 가증스럽게도 웃고 있었다. 인(印)을 사용한 정령
술은 구언(口言) 계약보다 한층 정확한 거래의 계약이었기에 강력했다. 거
대한 뱀은 분노에 쌓여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어느 순간 우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허전했으니까‥. 길고 매끈했던 몸매‥ 가 그리워졌지
만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풍덩!
사람보다도 더 커다란 머리가 십수미터 위에서 떨어지자 바다에는 파문이
일어나며 생물들의 삶이 교차됨에서 희생된 죽음을 슬퍼했다. 그래서인지
파문의 원은 고요하게 퍼져나갔다.
"아무래도 그 바다뱀의 움직임 때문에 격랑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훨씬 잔잔해졌네요."
레소니로서는 저주하고 싶은 대화였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속을 흔들어놓는
요동이 계속 느껴지는데 훨씬 나아졌다니‥. 훌쩍이는 그녀를 보듬어 안은
시즈가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뭍에 도착할 거야."
확실히 배 밑바닥에서 물이 계속 새어 들어왔고 이미 1/4 가량이 물 속에
잠긴 상태였다. 그래서 현재 그들은 가까운 뭍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바람이 없어요. 이 곳에 격랑이 치는 게 섬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
람은
높은 섬에 걸리기 때문에 오히려 불지 않아요. 이래가지고 가라앉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카이젤 군의 마법으로도 힘들까요?"
펠리언이 기대에 찬 눈으로 카이젤을 바라보았으나 냉정한 미소년은 냉랭하
게 고개를 저었다.
"지속적으로는 힘들어. 약간 바람이라면 몰라도 상위 정령이 아닌 이상은
배를 움직일 정도의 강한 바람을 지속적으로 불게 하는 게 쉽지 않아. 아마
상위 정령이라고 해도 몇 십분 동안 불게 한다는 것은 무리일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한 이는 시즈였다. 레소니의 고통을 이어받았음인지
약간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그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전 마법사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법사라도 지속적인 바람은‥."
"시즈, 안돼. 그랬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다."
카이젤의 설명과 다시 깨어난 헤모의 만류가 있었지만 시즈는 눈을 뜨지 않
았다. 그의 결심이 굳은지 안 공녀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뭍에 닿지 못하면 수장되는 건 마찬가지에요."
"이미 시즈는 강한 마법으로 정신력을 소비한 상태입니다. 당신은 강대한
마법을 쓰고 난 후의 후유증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시즈를 말려야
합니다."
"헤모 사제, 지금은 공녀의 말을 따라야 해요. 시즈가 우리에게 중요한 존
재이지만‥."
"자네는 모르네. 지난번에는 시력을 잃어버리는 걸로 끝났지만 그게 시사
하는 바는 적은 게 아니야. 시력과 두발의 색은 생명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
적인 확인법이야. 시즈는 자신의 생명을 깍아내고 있는 거라고!"
"이미 마법이 시전됐어요."
카이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구름
을 향했다. 더 없이 빨리 이동하는 구름‥.
"이 주위의 대기 자체가 변하고 있어."
선원들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들도 변화무쌍하다는 바다에서 살아왔
지만 이토록 쉽게 기후가 변하는 걸 보지 못했던 것이다. 데린이 일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마법사 님께서 바람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우리는 안전하게 돌아갈
겁니다. 바다를 이기고 우리는 살아가는 실베니아의 국민입니다. 바다를 두
려워하되 물러서는 것은 바다의 국민이 아닙니다."
그녀의 연설은 세차게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과 함께 배의 사람들을 응원하
고 있었다. 돛을 당기고 지위하는 이들의 동작에 힘이 들어가고 용기가 피
어났다.
바다는 우리의 삶.
포기하지 않는 인생의 표현
우리의 끝없는 투쟁
누가 막을 수 있느냐.
저 파도가 막을지라도
돛자락에는 풍운의 꿈을!
뱃머리에는 미래를 향한 희망을!
사방이 갈림길이지만
조타수의 가슴에는 망설임이 없고
뱃사람의 팔에는 웅지가 가득하다!
돛을 당겨 바람을 타고 바다를 뛰어넘는다
누가 시작을 했을까? 어딘가에서 시작된 노래는 힘있는 그들의 움직임에 맞
추어 모두가 함께 부르고 있었고 그 소리는 뱃전에 부딪히는 물결 소리에
어울려 수평선까지 울려 퍼졌다.
#
"그래!? 벌써 누가 처리해버렸다고?"
"예."
"그래서 부검을 해보았나?"
"3 명 가량을 잡아먹은 후 바로 목이 잘렸습니다."
"목을 잘랐다? 드래곤과 같은 금강의 비늘은 아니지만 살이 질기기는 고래
힘
줄보다 더한 녀석인데 목을 잘랐다?"
"틀림없습니다. 작두로 벼를 자른 듯 단면이 깨끗했습니다."
"소드 마스터라도 있는 건가? 펠리언이라는 녀석은 강하기는 하지만 그에
비하면 아직은 멀었는데‥. 조사가 잘못된 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사단에 의하면 대기가 변했답니다."
"대기가?"
"예. 보통의 이상기후를 뛰어넘는 세찬 바람이 끊임없이‥. 알고 계시겠지
만 그 곳은 지형 때문에 바람이 강하게 불기 힘듭니다."
"‥내가 가봐야 겠다."
"하, 하지만 주군."
"아마도 귀인이 있는 모양이다."
"주군께 귀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하핫. 나의 귀인이라기 보다는 대륙의 귀인이지. 옛날부터 춤을 추고 싶
어하는 이가 있었고 악보를 그리는 이가 있었다. 그리고 노래를 들으며 박
자를 맞춰보는 이가 있었지. 그러나 불행히도 가장 중요한 한 존재가 없었
다."
"‥‥."
"아무래도 마지막 한 사람이 나타난 듯 하다. 그러니 어찌 귀인이 아닐 수
있겠나?"
"하면‥?"
"그래. 내가 가서 봐야지. 진정 그가‥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노래하는
이'인지‥."
"그럼 차비를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고작 공녀의 마중이라고 하여 걸림돌 치우는데 소홀히 했
는데 이거 실례였겠군. 그리고 그들을 빨리 쫓으라고 해라. 겨우 800살 먹
은 임리얼 한 마리에 대기를 바꿀 이유는 없어. 아마도 배에 문제가 일어났
을 게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만남을 기대하보도록 하지.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군."
"자네는 역시 빠르군. 그런데 이제 밖으로 나가니까 호칭을 바꾸도록 하게
. 시선이 따가워서 말이야."
"예. 드로안 남작 각하."
#
"그런데 공녀께서 찾아가신다는 젠티아 드로안 남작은 어떤 사람이길래 공
작가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겁니까?"
귀족이었던 보를레스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답을 찾기 위
한 가장 쉬운 방법, 답을 아는 이에게 물었다.
"그 전에 시즈 님의 상세는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시력이 약간 떨어지고 머리색깔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부작용
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더군요. 게다가 레소니가 옆에서 열심히 간호를
해주고 있으니‥."
"다행이네요. 저도 시즈 님께서 대마법사이실 줄은 짐작도 못했답니다."
솔직히 누가 막 나이 20을 넘은 청년이 그런 광범위한 마법을 쓸 수 있을라
고 생각했겠는가. 하지만 무리였던 것은 확실한지 얼마 전에 쓰러져 버렸다
. 안색이 백지장이 되어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도 마법을 중지않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주군으로 섬기기에는 아주 불안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해상을 순찰 중이던 경비대가 웬일인지 멀리까지 순찰을 나와 발견
해주었다는 것이다. 대단한 운이 아닐 수 없었다. 실베니아의 해상경비대는
모종의 사고와 해적들과의 충돌들을 대비해서 마력석을 부착하고 있었는데
앞옆으로 여러 개의 흡수석에서 물을 흡수하여 배 후미의 마력석에서 강하
게 배출시켜 출력을 얻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극소수의 해상경
비대만 부착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매.우. 운이 좋은 것이다. 덕분에 선원
들도 쉬면서 경비대의 배에 끌려서 항구로 가고 있었다.
"드로안 남작 님에 대해서 물으셨지요?"
"예. 저도 한 때는 귀족이었던 적이 있어서 남작이 영족과 맺어지기가 얼
마나 힘들지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공녀께서 아무리 약혼자라지만 남작을
보러 직접 행차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보통 남작이라면 그렇죠. 남작이라는 직위가 뜻하는 바를 아세요?"
"알고 있습니다. 직위로서의 남작은 지방 백작이라는 뜻이죠."
보를레스는 '누구를 무시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하듯 자신만만하게 어깨
를 으쓱했다. 그의 제스처가 재밌었는지 데린은 풋 하고 웃음을 작게 터뜨
리며 물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뜻은요?"
"실력자라는 뜻이죠. ‥핫! 그렇다면‥."
"그래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귀족이었다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예. 옛? 그럼 의심하셨다는 말씀입니까?"
데린은 품위에 어긋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려는지 주먹을 꼭 쥐고 쿡쿡
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보를레스 님의 어디에 귀족의 품위와 기품이 존재한다는 거죠?
"
"잘 보면 보일지도 모르죠."
"한 평생동안 봐도 보일지 의심스럽군."
"헤모 사제‥."
억울한 보를레스의 항의를 무시하며 헤모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데
린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드로안 남작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저도 좀 알고 싶군요."
"사제 님께서는 짐작되는 사람이라도 계신가보죠?"
헤모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그리 좋은 기억을 동반한 인물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모두의 뇌리를 스쳤다. 경비대가 빠르게 배를 끌고
있어 맞바람이 심하여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고 데린이 말을 이었다.
"저도 사실은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어요. 다만 그 분에 대한 소문이 무성
해서 많이 들었죠. 동경하고 있어요."
양손을 꼭 쥐고 눈을 반짝거리는 게 여인은 진심인 듯 했다.
"그 분은 30대 초반의 카리스마가 가득한 미남자라고 하셨어요. 물론 들리
는 소문이지만, 설마 뜸금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있었던 '세이하츠 전투'에서 유례없는 전공을 세우고 소녀를 비롯한 수많
은 여인의 가슴을 울리시며 실베니아 기사들의 귀감이 되신 그 분을 일컬어
‥."
" '값싼 남작.'"
그녀의 말을 이어받은 것은 섬뜩하게도(?) 펠리언이었다. 그는 공녀의 손을
맞잡은 채- 사실 굉장히 무엄한 행동이었다. - 눈물까지 글썽이며 소리를
높여
'값싼 남작'을 칭송했다.
"귀감이죠. 귀감이십니다. 이 시대, 실베니아 최고의 영웅이시며 전설이신
최고, 최강의 검사이시죠. 그 분의 검술은 그야말로 신기이며 예술입니다.
가시는 곳마다 영광이며 밟으시는(?) 적마다 무릎을 꿇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심지어는 드래곤을 잡아다가 구워먹었다는 소문도 있으며, 그 유
명한 레이모하 교단을 3대 수호 집단 중 하나인 신성 투사단의 정예 3명을
단독으로 막아내셨지요. 그 뿐입니까? 전술은 그야말로 신이 운명을 점지해
주시듯 맞아떨어지는 지라 그 분 휘하의 기사들은 처음에 남작께서 쪽집게
점성가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두 번 다시 태어날 수 없는 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께서는 실베니아의 시기많은 귀
족들의 모함에 정계에서 물러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그저 몸값 싼 기사일 뿐이니 나라에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만인의 귀감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폭풍우가 쓸고 가는 듯한 칭송. 거의 하나의 대서사시였다. 보를레스
는 대단하다는 듯 감탄한 표정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
"그거 외우고 있던 거냐? 아니면 즉석에서 읊은 거냐?"
그러나‥ 손을 맞잡은 공녀와 청년 기사는 마치 생생한 이미지를 보고 있는
지 반짝반짝한 눈동자로 먼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펠리언의 찬송가
를 듣던 헤모도 주먹을 꽉 쥐며 눈쌀을 찌푸린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피가 고여 함께 빨갛게 물들었던 하늘을‥.
"바로 저 배인가? 에취!"
"각하, 감기 걸리셨습니까?"
"무슨 소리, 여기는 실베니아라고 무슨 얼음의 왕국인 줄 아나? 이거 참
귀도 간지럽군."
"후벼드릴까요?"
"‥‥싹 나았네. 그대는 아무래도 말에 마법이 되는 힘을 가진 모양이야.
"
"감사합니다."
젠티아는 너무나 충성스러운 부하도 골치아프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아무래도 처음 나서자마자 바다뱀을 비롯하여 배가 파손되는 등의 희생을
치룬 게 액땜이 되었는지 항해는 순조로웠다. 시즈도 피로를 회복했고, 레
소니도 항구에서 제조된 특제 멀미약을 먹은 덕에 즐겁게 항해를 즐길 수
있었다. 재난 후에는 사람들이 뭉친다는 말대로 선원들과 일행은 가까워져
서인지 한층 시끄러웠다. 게다가 새로 배의 수리 등의 일로 머물렀던 발베
트 해상경비서에서는 공녀의 안전한 여행을 위하여 믿음직한 수행원을 붙여
주었는데 젠드라는 이름의 이 사람 또한 펠리언에 버금가는 수다쟁이였다.
"아하하하! 그래서 말이죠. 저 회색 갈매기 떼가 머리 위로 지나가면 선원
들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어요. 농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메뚜기 떼처럼
선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죠. 지금도 갈매기 떼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 보여요? 배설물이 갑판에 떨어지는 게 장난이 아니죠. 게다가 운
이 안 좋아서 몸의 한 부분을 회색 갈매기의 배설 물감을 시험할 도화지로
빌려주게 된다면 어디서 목욕을 하겠어요? 그렇죠, 그렇죠?"
"남자가 저렇게 수다를 떨어대다니‥. 저런 사람은 질색이야."
데린이 얼굴을 찌푸리자 레소니도 함께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녀는 데
린과는 다른 의미에서 였다.
"공녀 전하, 하지만 펠리언 님도 비슷하지 않나요?"
"호호호‥. 무슨 말이에요. 레소니 양, 지금 제가 질색이라고 한 것은 사
랑할 사람으로써의 자격으로 말한 거에요. 펠리언 님이야 저를 호위하는 기
사로서 보고 있지 남자로서 보고 있지는 않답니다. 어차피 저를 보호해주는
기사이신데 괜히 남자로서의 단점을 찾아낼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좋아할
사람은 틀린 거에요. 게다가 저 남자는 벌써 30대라고요! 물론 얼굴은 그
런데로 준수해 보이지만‥."
그렇구나. 레소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젠드의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열심
히 듣고 있었는데 지루한지 자기 취향대로 뱃여행을 즐기는 사람들과는 달
리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왜 난 시즈 님의 단점이 보이지 않지?'
볼 한 구석을 긁적이던 그녀는 자신이 갑자기 바보가 된 게 아닐까 라는 의
혹이 들었다. 이게 다 그 때 입맞춤을 한 다음부터야‥.
'앗! 상기해버렸다.'
"박식하시군요."
그의 웃음을 보며 젠드는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면 내가 수다쟁이라고 생각할 때도 되지 않았냐? 내가 지치겠다.
'
하지만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 생각했을 때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성격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스하게 감싸안는 미소가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청
년‥. 피식‥ 귀여운 녀석이로군.
"하하핫.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런데 자네 이름이 시즈라고 했지? 정말
성격이 마음에 드는 군. 아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몸은 좀 괜찮나?"
"예."
"그래! 바로 그거야. 남자라면 그래야지. 쓱 보니 연인도 있더구만‥."
쿡쿡! 시즈가 어쩔 줄을 모르는 이유는 절대로 그가 옆구리를 찌르는 게 간
지러워서가 아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20대의 외모를 한 채 40대의 말투
를 가진 사람한테서는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이성을 유혹하는 호르몬
이 아니라 동질성이 느껴졌다. 젠드가 시즈의 어깨에 팔을 둘러 다른 손으
로 바다 멀리를 가리켰다.
"저게 뭐 같나?"
"뭐가요?"
둘의 사이로 조그마한 소녀가 끼어 들었다. 레소니였다. 아무래도 시즈가
능글맞은 사기꾼에게 끌려가는 느낌이 들어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젠
드는 껄걸 웃으며 더욱 시즈를 놀렸다.
"꼬마 연인께서 벌써 미래의 낭군 관리를 시작하셨군."
그러나 레소니의 귀여운 얼굴이 눈을 칼날처럼 가늘어지자 곧 웃음을 멈추
고 말했다.
"흠흠‥. 저기 말이야. 저게 뭐냐고 물어보던 거야."
그 손가락을 따라서 고개를 돌린 레소니는 놀라다 못해 비명을 지르고 말았
다. 새까만 선이 끝도 보이지 않게 늘어져있었고 계속 배를 향해서 오고 있
었다. 레소니는 생애에서 두 번째로 바다를 본 것이었고 처음 배에 몸을 실
은 경험은 간단하게 국경선만 넘는 단거리였다. 현재 심한 배멀리의 경험과
바다뱀의 습격으로 인해 바다의 무서움에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시, 시즈‥. 또 바닷뱀! 어떻해에‥. 아까보다 훨씬 커."
아예 시즈의 품에 고개를 묻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녀가 과연 방금 전의
나 젠티아 드로안도 움찔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을 발하던 녀석이란 말인
가? 젠드가 박장대소를 하다못해 숨이 막혀 켁켁 대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빼꼼이 머리를 들어보는 레소니. 하지만 뱃전에 가까워져 있는 검은 띠에
다시 흠칫하고 시즈의 품에 들어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떨기만 했다.
"얼마 전에 임리얼의 습격을 받아서 그럴 겁니다."
"그렇군. 이거 미안한 걸. 그런데 시즈 자네는 무섭지 않은 건가?"
"글쎄요‥."
젠드는 한 쌍의 연인이 부두여 안고 바들대는 상상에 기대했지만 웃기만 하
는 시즈를 보고 금방 포기했다.
"쳇! 뱃사내도 아닌 주제에 잘도 알고 있군. 이봐요. 꼬마아가씨, 무서워
할 필요 없어. 저 광범위한 띠는 바다뱀이 아니라 정어리 떼니까 말이야."
"정어리 떼요?"
"그래, 크기가 작은 물고기지. 워낙 수가 많아서 그래."
"뭐에욧! 숙녀를 놀리다니!"
능글맞게 웃고 있던 젠드는 걷어차인 정갱이를 감싸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레소니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크으‥. 정말 아프네.'
바다의 밤은 숲처럼 달빛이 내리비추는 게 방해받지 않았지만 어두운 암흑
의 출렁임 때문인지 좀더 음산했다. 헤모는 뱃전에 기대서 초인적인 시력도
닿지 않는 수평선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는 옆에 누군가 갑자기 앉는
기척을 느끼고 흠칫했다. 가까이 올 때까지 기척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내 안정을 되찾고 굳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멋진 등장이었네, '값싼 남작' 젠티아 드로안. '젠드'라니 여전히 작
명센스가 끝내주는 군."
"사제께서는 어떻고요? 헤라즈 모히튼 사제님. 오랜만입니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랜 지인(知人)처럼 말하고 있었다. 젠드는 헤모가 기대있
는 뱃전 바로 옆에 앉았다.
"그래. 그 능글맞은 표정을 보니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는 필요없을 거라
고 생각했네. 후우‥ 그 전쟁으로부터 7년이 흘렀군."
"그렇군요. 담배 한 대 피시겠습니까?"
"아니, 두 대만 주게."
"이거 좋은 건데‥."
피식. 젠드는 품에서 꺼낸 담배는 왕족이나 필 수 있는 최고급 담배였지만
헤모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었다. 두 사람이 담배를 입에 물자 젠드는 손
가락을 튕겼다.
화륵! "후우우‥."
둘은 같지만 반대편의 하늘을 지긋이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1년하고도 8
개월에 달하는 시간을 두려워했던 숙적이 이제는 평화로운 항해의 바다를
함께 바라보고 있다.
"그래. 어떤가? 그 때 이후, 전설이 된 영웅이 되어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쟁‥ 그 참혹함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가 영웅
과 패잔병의 차이를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 우리는 모두 전쟁이라는 불화의 적을 막지 못한 패배자들이야‥.
이런! 이 담배 맛은 좋은데 너무 금방이군. 한 대 더 주게."
"‥비싼 거라니까요. 여기 있습니다. 이제 끝입니다."
젠드는 한 개비만 꺼내고 혹시라도 더 달랄까봐 담배상자를 품에 재빨리 집
어넣었다. 그 담배를 입에 물며 헤모가 중얼거렸다.
"남작, 남작. 그대가 정말 째째하구려. 그대는 실베니아 최고의 영웅이 아
니오?"
그러면서 사제는 지나간 하늘 저편에서 시선을 돌려 바로 머리 위에서 떨어
지는 별빛을 투박한 눈매에 담았다.
"괜히 '값싼 남작'이라고 불리는 줄 아십니까?"
그러면서 젠드 역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그렇게 살아왔던 그들은 지금 같은 배에 타고 같은 하
늘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