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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념 규정의 불규칙성
아무런 존재의 기척도 없이 그저 출렁이기만 하는 광활한 검은 액체. 누가 그 안으로는 무한한 존재들이 생명의 빛
을 뿜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시즈가 소환한 작은 빛덩이에 바다 안이 들여다보이자 레소니
는 눈을 함박같이 크게 뜨며 감탄사를 입에 물었다.
"와아아! 이게 다 뭐죠?"
"바다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보석이며 사람으로 치자면 붉은 피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 플랑크톤이지."
"너무 아름다워요."
별들이 하늘을 고요히 수놓고 있다면 바다에는 플랑크톤이 있었다. 투명하게 바다와 동화되어 있지만 어둠과 빛을
동시에 부여하면 플랑크톤은 빛을 낸다. 그 모습이 꿈결처럼 황홀하다는 것은 본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도 없
었다. 감격해버린 레소니는 발끝을 들어 시즈의 목을 팔을 감고 속삭였다.
"이 새벽에 부른 이유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군요?"
"아하하‥ 미안해. 꼭 플랑크톤의 행진 때문은 아니었어. 레소니, 기억나지 않나요? 얼마 전에 멀미에 시달릴 때 했
던 약속."
"음‥."
레소니는 솔직히 멀미에 시달릴 때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약속을 떠올리는데도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
"아! 마법! 마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죠?"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때는 좀 쑥스러워서 말이죠. 이른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니요, 아니요. 어서 가르쳐 줘요."
소매의 옷길을 꼭 쥐고 보채는 게 마치 어미새에게 먹이를 재촉하는 아기새 같았다. 시즈는 기대에 부푼 소녀의 머
리를 쓰다듬어 진정시킨 후 말했다.
"내 교육 방식은 확연히 다를 거에요."
"네, 선생님."
순풍을 타고 항해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가야할 길은 대륙의 최남단에서 실베니아의 최북단에 이르는 머나먼 거
리였다. 무려 대륙을 종단하는 길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리인 만큼 하루, 이틀이 소비될 여정이 아니었기에 레소니가
마법을 배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요. 물방울을 증발시킨 후에 한 곳에 모아서 구름을 만들어보세요."
"네."
레소니는 현재 보를레스가 갑판을 청소하다가 엎지른 물의 상태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주위에서는 마법이라는 신비
로운 광경을 구경하는 선원들로 붐볐다. 신경이 쓰일만도 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레소니는 당연하다는 듯 마법을
조절하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레소니, 넌 할 수 있어. 왓! 된다, 된다."
구경을 하는 이들 중에는 열렬하게 레소니를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사내가 방금 전에 물
을 엎지른 장본인이었다. 보를레스는 보기에도 민망하게 갑판에 광을 내던 걸레를 깃발처럼 흔들며 환호했다. 집중
력이 뛰어난 레소니라도 거슬리는 신경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소리를 질렀다.
"보를레스! 좀 조용히 못 해욧! 모두들! 자꾸 떠들면 입술을 뻐끔거리는데만 도
움되는 생선 주둥이로 바꿔버리겠어욧!"
바다의 괴수, 임리얼의 포효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바다의 사나이들은 금새 언제 떠들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파도 소리만 철썩철썩 들려오자 한숨을 크게 내쉬며 그들을 한 번 째려본 레소니는 다시 바닥의 물에 정신을 쏟았
다.
서서히 자취를 지워가기 시작하는 물방울들. 동시에 레소니의 가슴 높이 부근에는 안개처럼 뭉게뭉게한 기체들이
희미하게 모이고 있었다. 바닥의 물이 완전히 사라지자 시즈는 가볍게 박수를 치고 다음 과제를 주문했다.
"이제 그걸 바다 쪽으로 이동시키세요."
선원들은 레소니가 마법을 익히는 광경이 그저 신기하게 여길 뿐이었지만 정령사인 카이젤은 아니었다. 벌떡 일어
나서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교육을 실행하는 시즈에게 물었다.
"아무리 이해할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군. 레소니가 하고 있는 마법은 비록 범위는 턱없이 작기는 하지만 분
명 날씨 조절마법의 종류 중에 하나인 것 같은데‥. 틀렸나?"
"맞아요."
"알고 있으면서 왜!?"
아니라면 지나치려고 했지만 카이젤은 태연하게 대답하는 시즈에게 분노를 느꼈다. 날씨 조절마법은 무려 5 클래스
의 마법 중에서도 가장 시전이 어려운 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흥분하는 카이젤을 젠드는 어깨를 토닥거리며 진정
시켰다. 그리고 시즈에게 말했다.
"나도 예전에 마법을 공부해보려고 노력해본 경험이 있지. 그래서 카이젤이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 있네.
어떻게 초입자에게 5클래스 마법을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되기 전에 어서 중지하게."
그의 진지한 충고에도 시즈는 오히려 싱글거리며 되물었다.
"왜 잘못되는데요?"
젠드는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마음을 바로 잡고 설명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괜히 마법사들이 클래스라는 간격을 나누어 놓았겠나? 자네는 물 위에 모래 피라미드르 쌓고 있
는 것이나 다름 엇네."
시즈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마법에 대한 저의 생각은 다르답니다. 저는 마법을 수학과 같은 학문의 부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많은
분류의 학문 중에서도 마법은 매우 많은 학문의 총화에요. 학문도 그렇고 마법도 그렇고‥ 사람들은 구분할 수 없
는 걸 구분하고 있답니다. 덧셈과 뺄셈. 이 두 가지를 어느 게 높은 등급이고 어느 게 낮은 등급인지 구분할 수 있
을까요? 학문을 꿈으로 삼은 이들의 요람, 그 중에서도 명문이라고 불리는 케이치얀 학원에서는 외국어를 가르칠
때 우선 아스틴 어를 가르치고 그 다음 실베니아 어를 가르친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2학년에서 배우
는 아스틴 어에 비해 4학년에서 배우는 실베니아 어가 언어적인 난이도가 높은 걸까요?"
"그것은 아니겠지."
"인간은 학문 등을 이해하기 쉽게 개념을 나눠놓고 스스로 그 구분에 갇혀 버렸습니다. 인정해야만 해요. 어떤 이는
기하학을 좋아하는 이가 있는 거고 어떤 이는 함수를 좋아하는 이가 있는 겁니다. '넌 쉬운 함수를 못하는데 어떻
게 기하학을 할 수 있겠느냐?'라는 규정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요. 어떤 사람은 4학년 때 배우는 실
베니아 어가 아스틴 어에 비해서 익히기 쉬울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가장 기초적인 과정을 배제하고 다음 단계로
나갈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수많은 수학공식도 덧셈과 뺄셈에서 정리할 수 있다는 걸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
다. 거의 끝없는 식이 되기는 하겠지만‥."
"자네의 교육 방식을 알만하군. 한 마디로 마법에서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을 제외하고는 굳이 단계별로 익힐 필요
가 없다는 말이군."
"그렇죠."
잠시 생각해보던 젠드, '값싼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는 누구도 보지 못했던 존경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단해. 몇 천년동안 내려오는 마법의 철칙을 한 순간에 부숴버리는 군. 하지만 생각해보게. 자네 말대로라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 군. 어째서 2 클래스의 마법사는 3써클의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인가?"
"제가 방금 전에 말씀드린 것은 마법의 이해이지 사용이 아닙니다. 그래도 제 생각을 알려드리죠. 간단하게 말해서
능력 부족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수학의 공식은 끝까지 해석해가면 덧셈과 뺄셈만 남아버릴 겁니다. 하지만
그 길이가 엄청나게 길겠죠. 공식을 이해할 수 있는 부호로 정리하는 게 마법의 이해라면 정리되기는 했어도 엄청
나게 많은 계산을 해내는 게 바로 능력입니다. 그게 마법을 시전하는데 있어서의 써클이죠. 마법은 총체적인 학문입
니다. 학문은 개념이 기초가 됩니다. 그런 개념에 단계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개념을 응용- 마법의 시전 -
은 이해력과 계산력을 동시에 필요로 하기에 뛰어넘기 힘든 단계처럼 인식되는 겁니다. 세상을 가득히 채운 것은
마나mana이고 마나는 생명과 의지의 힘입니다. 모든 생물은 세상에 퍼진 마나를 이용하여 살아갑니다. 자기 근육에
힘을 주듯이 사용하고 있죠. 그리고 근육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굵어지고 강해지듯, 마나도 이용하려고 하면 할수
록 그 양이 많아집니다. 발전양상이 더없이 느릴 뿐이죠."
침묵. 허탈한 미소를 띄고 있는 젠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원들. '역시 대단해'라는 얼굴의 보를레스, 헤모, 데
린, 레소니 등의 지인들.
"대단하군. 그렇다면 지금 레소니는 굳이 날씨 조절마법을 연습하는 건가?"
"마법은 자연의 단편적인 한 부분을 만들어내는 것. 그렇다면 자연 전체를 만들어내고 움직일 수 있는 훈련이야말
로 마법을 시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당연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핫핫핫핫핫!"
젠드, 젠티아 드로안은 지혜에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청년 속에서 '그'와 같은 힘을 보았다. 놀랍다.
'그 녀석과 비슷한 녀석은 다시는 세상에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아릴은 아직도 녀석을 찾아다니겠군.'
"대단해. 할 말이 없네. 레소니의 진도가 기대되는 걸!"
카이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직도 의식 한 편에 시즈=바보라는 공식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정신
적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선실로 들어가 젠드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자 계단에 서있던 헤모가 물었다.
"실성했나보지? 그래‥ 궁금해하던 시즈에 대한 감상은?"
"만족했습니다. 과연‥.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뭐지?"
"저 시즈라는 친구는 가지고 있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잃게 할겁니다.
세상의 법칙은 공평하니까요. 그 때‥ 당신이 시즈를 보호해주십시오."
"‥‥걱정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교단과 싸우게 된다고 해도?"
움찔! 헤모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부들거리는 팔이 불안감에 휩싸였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입니다."
말이 없어진 헤모를 뒤로하고 젠드는 자기에게 배속된 방으로 걸어갔다.
#
7번의 밤이 지나고 4번째 아침이 왔다. 이미 정박해있는 배들을 비롯하여 희끗희끗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커다란
선박 정비소가 아헨 항구의 발전된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도착한 건가요?"
"그래. 바로 이 곳이 실베니아 최북단의 항구 아헨이지. 용병국과 국경과 영해를 맞대고 있기 때문에 군사항구로도
이름이 높은 곳이야. 여기서 건조되는 군함은 대륙에서 품질을 인정해주지."
보를레스는 전(煎) 기사출신답게 군사적인 내용을 줄줄이 읊어댔지만 레소니는 그런 말에 대해서는 신경쓸 일푼의
가치도 부여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처음에는 지옥같던 바다의 여행이 어느 정도 익숙해져 한가롭고 평화롭다고 느
낄만 할 때 항해가 끝나자 아쉬웠다. 4일에 달하는 기간동안 그녀는 많은 마법을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겨우 1써클의 마법을 익힌 것이다. 사실 1 써클의 마법은 조금만 생각하면 시전도 가능할 정도로 쉬웠다. 인지가 있
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자연상에 퍼져있는 마나를 1써클 가량은 기본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랬다면
갑자기 뚝 떨어졌다고 할 정도로 어느 것과도 연관을 찾기 힘든 마법을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단, 요정
이라고 불리는 엘프는 마법을 익히는데 있어서 대단히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자연을 이해하고 순응할 줄 안
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론으로만 따지자면 대마법사 헤트라임크도 혀를 내두를 강사, 시즈가 있는데 3일 안에 1 써클을 익히는
게 대수겠는가. 오히려 느린 감조차 있었다. 마법이 학문의 총체인 만큼 기초를 이해하는데 레소니는 엄청난 노력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 대가로 그녀는 바닷물로 만들어진 주먹만한 물방울이 허공에 둥실둥실 띄워 애완동물 대신
가지고 다니며 즐거워했다.
배가 선착장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에 쌓여 배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많은 물품과 짐들을 대기하고 있었다. 일행은 정
들었던 선원들과의 작별을 끝내고 육지를 밞았다.
"낭아플도 시장이 엄청나게 컸는데 여기도 뒤떨어지지 않는 군."
"낭아플이 남부의 대표적인 무역항이라면 아헨도 북부를 대표하는 항구니까요. 군사항이나 다름없지만 각 나라에서
많은 물품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죠."
"그런데 소란이 조금 일어난 것 같은데‥."
귀가 밝은 헤모가 손가락으로 마을 어귀를 짚었다.
"전쟁이라도 일어났나? 사람들이 도망치는데?"
"전쟁이라뇨. 다른 도시라면 모르지만 항구에서 실베니아와 격돌하는 전투라니 어느 나라의 바보라도 그런 가망없
는 짓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걸요."
말을 하는 사이에 소란은 그들이 서있는 곳까지 번져왔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상인과 마을 사람들이 소란의 원인
을 목청껏 소리쳤다. 그것은 비명이었다.
"몬스터들이다―!"
"타이밍도 좋군."
"어서 가서 사람들을 구하지 않고 뭐하는 거에욧!"
불구경하는 양 빈정되는(?)- 누굴? -젠드에게 데린은 몬스터들을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요. 알았어. 귀족의 영양께서 마치 시골 아낙처럼 소리를 지르다니 남편이 되실 젠티아 남작 님이 걱정스럽
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촐짝거리는 가장에게 누가 시집갈지 얼굴 한 번 보고 싶군요."
헤모는 자기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젠드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체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케워크로군요."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거대한 늑대들. 헤모도 처음 만남을 회상하는지 시즈와 눈이 마주쳤다. 시즈가 예도를 뽑자 펠
리언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장식품이 아니었습니까?"
"설마 요리사가 스푼를 들고 다니면 음식을 먹기 위해서냐고 물으실 건가요? 이 곳을 부탁합니다."
헤모와 시즈는 보조를 맞추며 뛰어나갔다. '당신은 왜 안 가요?'라고 묻는 듯한 레소니의 시선에 보를레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여기서 펠리언과 함께 숙녀 분들을 지켜야지. 게다가 저 둘의 옛 추억을 떠올리는데 굳이 끼여들고 싶지 않거
든."
"?"
어리둥절한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보를레스는 팔짱을 낀 채 정방을 주시할 뿐이었다.
"이거 엄청난 숫자인데?"
무려 20 마리에 가까운 숫자였다. 기존의 늑대들과는 달리 케워크는 대규모 군집 생활을 하기 않는다고 알려져 있
었으니 헤모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아마도 저기 솟은 산에서 내려온 것 같네요. 혹시 드래곤이라도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등을 맞댄 시즈가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산줄기를 힐끗대며 말했다. 그들은 시즈가 빠르게 케워크에게 부상
을 입혀 동작의 속도를 줄여놓으면 헤모가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시즈에게는 케워크의
두꺼운 근육과 뼈를 단번에 가를 힘이 없었고 헤모는 케워크가 가진 야수의 감각과 운동신경 때문에 힘들었기 때문
에 둘의 보조는 정확하면서도 그들에게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저 사람 대단한데요?"
헤모의 묵직한 일격을 마지막으로 주위의 케워크를 처리한 후 카이젤과 젠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 시즈는 주방에
서 주방장이 무 썰 듯이 케워크를 썰어대는 젠드를 보고 도와줄 생각은 버린 채 박수를 쳤다. 현란한 검광이 낮인
데도 찬란하게 이리저리 뻗여나가는데 사람들도 서커스를 보는 기분으로 2층 창문을 열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묘기같은 칼부림, 카이젤 쪽은 불꽃이 날아다니고 물이 솟는 등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그래.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니까."
"안면이 있었군요?"
"별로 놀라지 않는 군."
"그야 처음 헤모 사제가 젠드 씨를 봤을 때, 꺼리는 듯 하더군요. 젠드 씨는 외모도 준수한 편인데 모든 사람을 평
등하게 생각하는 사제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꺼릴 리가 없지요."
아예 주변 건물에 기대서 이야기를 시작한 그들이었지만 케워크는 오직 젠드만이 생명보존에 있어 가장 경시할 수
없는 적이라고 그에게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카이젤이 맡았던 놈들도 모두 젠드에게 달려들자 정령사 소년은 흘
러내린 땀을 훔치며 시즈들이 쉬는 곳으로 와서 함께 기댔다.
"너희들 뭐하는 거야! 헤모 사제, 그러고도 사제요?"
"으음‥ 아침이나 먹으러 갈까?"
마침 배고팠던 청년과 소년이었다. 헤모는 '아침 시간 내로 처리를 끝내고 오게나.'라는 말을 젠드에게 남기고 공녀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거.침.없.이 떼었다.
#
아헨의 영주가 만류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젠티아 드로안이 기거한다는 흑색거성, 글로디프리아를 향해서 떠
났다. 따돌림을 받았다고 투덜대던 젠드가 영주에게서 상당한 액수의 자금을 인수했다는 걸 알기에 미안해서 있을
수가 없었다.
데린은 뇌물횡령이라는 이유로 젠드를 '불량공무원'으로 몰아넣었는데 그 비교대상은 '값싼 남작'이었다.
"젠드! 이제 글로디프리아에 가면 말투를 비롯하여 행동을 조심히 해요. 드로안 남작께서 당신같이 무례한 사람을
수행원으로 함께 다니는 날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당연히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님으로 보시지 않겠습니까?"
"뭐에욧?"
"전하, 참으세요. 젠드 님도 그만 좀 하세요."
레소니가 얼른 말렸지만 공녀는 글로디프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머리가 썩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글로디프리아에 도착하면 남작님께 말씀드려서 저 불량공무원을 당장 퇴출시켜버리겠어.'
그렇게 다짐했다.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수행원의 신분이었기에 말을 타고 마차의 소란을 음악삼아 봄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는 초원을 바라보던 시즈는 으
깨를 으쓱거리며 중얼거렸다.
"뭐가 말이야?"
보를레스의 물음에 시즈는 덜렁대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공주와 말다툼에 여념이 없는 젠드를 턱으로 가르켰다.
말의 속도를 늦춰 보를레스가 그와 나란하게 말을 몰자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단한 검술가였어요. 권법으로 치자면 하윌 님의 수준? 그 이상?"
"마스터의 수준이라는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시즈를 보고 보를레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마스터라는 말은 서방검술과
는 관계를 두고 있지 않았다. 호신술에 있어서 동방의 유술, 무술, 검술 등처럼 체계적이며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발전을 멈출 수밖에 없는 부류라는 게 전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그 시작점이라는 동방에서도 어느 정도가
마스터다 라고 정확히 규정짓지 못했다. 사람 가운데 비교하여 타인을 훨씬 뛰어넘는, 그게 경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도달한 사람을 마스터라고 칭할 뿐이었다. 아마도 200년이 넘는 시간을 무술과 지내온 하윌은 분명 최고의
경지에 달한 마스터가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30대 정도의 젠드가 그 이상이라니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펠리언도 그렇고, 정말 대단한 사람들만 꼬이는 것 같군.'
분명 펠리언도 마스터라고 말하기에는 거리가 있지만 자신과 비교하여 떨어지는 실력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고작 경비대에 근무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군. 적어도 기사라면 대단한
대접을 받았을 텐데‥."
"그렇죠? 뭔가 숨기는 게 있어요."
"혹시 너무 촐랑대는 성격 때문에 기사단에서 받아주지 않은 게 아닐까?"
'맞는 말일지도 몰라.'
시즈는 어린애를 놀리듯 공녀를 향해 에베베 하고 혀를 내미는 불경한 짓거리에 정신이 팔린 젠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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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공격이 시작될 겁니다."
일행은 글로디프리아에서 2일 정도의 거리가 떨어진 초원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노숙을 준비했다. 여인들을 제외하
고는 포근하게 깔려있는 잔디로 만족할 모양인지 별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모닥불을 가운데에 두고 아헨에서 준비
해두었던 고기를 수프에 넣으며 펠리언이 꺼낸 말에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사전에 그저 여행에서 있을 몬스터이나 산적들의 습격에서 보호하는 거라고 여겼던 시즈 일행은 음식을 먹던 것을
멈추고 되물었다. 데린은 냉정하게 얼굴을 굳이고 착 가라앉은 어투로 말했다.
"그대들을 속여서 미안해요. 이 여행은 그냥 제가 약혼자를 보기 위한 싱거운 이유가 목적이 아니에요. 현재 실베니
아 중앙에서는 공작들 간의 권력이 충돌하고 있어요. 상대인 케스터 공작은 무엄하게도 저희 가문을 밀어내고 실베
니아를 좌지우지할 헛된 망상을 꾸고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궁정 기사단 이상의 군사력과 모든 영족과 비교
하여 그 이상의 명성을 가지신 '값싼 남작'님을 끌어드리기로 하신 거죠. 그래서 약혼녀인 제가 직접 가는 것이고
요."
"그렇다면 지금 공격이 시작될 거라는 소리는 케스터 공작 전하께서 공녀 전하가 글로디프리아로 가는 행로를 막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허탈하게 웃는 시즈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기껏 엘시크의 권력 다툼을 피해서 타국으로 왔건만 또다른 권력 분
쟁의 그물 속에 그는 발을 들여놓고 만 것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시즈의 팔을 레소니가 꼭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이 동행을 거절한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인지는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힘이 곡 필요했어요. 용서해
줘요. 흑‥."
그러고 공녀는 여자의 최대 무기라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족의 가식적인 웃음과 눈물에 대해서 지겹
도록 봐왔던 보를레스와 카이젤, 그리고 헤모는 내심 코웃음쳤다. 시즈도 동료들과 생각이 별반다르지 않은 모양이
다. 하늘을 올려다 보며 키득거리던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미안하다니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희는 그만 갈라지도록 하죠."
"안되욧! 제발 부탁이에요. 저를 도와주세요."
"가문에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십시오."
공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쉽게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은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였다. 게다가 눈물
을 흘린 행동은 귀족들의 가식을 끔찍해하던 그들의 기분만 망쳐놓았을 뿐이었다.
'쳇! 이들이라면 죽더라도 가문의 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끌고 왔더니만‥.'
자연스럽게 눈물을 훔친 그녀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강아지처럼 순한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바라보며 시즈
를 잡기 위한 최후의 카드를 내놓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저희는 시즈, 그대의 힘이 꼭 필요해요. 거절한다면‥."
레소니는 갑자기 차가워진 데린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대신하여 울까봐 걱정됐었는데 차가운
땀이 등을 쓰다듬으며 순진한 소녀를 만류했다.
'그 때의 협박을 또 써먹을 생각이군.'
코를 살짝 만들이며 코웃음을 감춘 시즈는 자신만만하게 협박을 해오는 여인이 불쌍해졌다. 고귀하다는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더러운 종기들이 아닐까?
"얼마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두렵지 않습니다."
"흐음‥. 그래요? 당신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레소니는 아닐 텐데요."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군요. 난 시즈입니다."
정확히는 '난 마땅찮은 시즈입니다.'였지만 청년은 귀찮은 부분을 생략했다. 눈앞의 영악한 여인이라면 이 말뜻을
이해하겠지. 그 예상대로 데린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비틀댔다. 설마하니 정말로 대륙의 명사겠느냐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든 수가 바닥나자 그녀는 거침없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필요함을 위해서는 신발조차도 핥을 수 있는
용기를‥. 집안의 가훈을 그녀는 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달라는 만큼 포상하겠습니다."
"달라는 만큼이라‥ 시즈 도와주지 그래? 공녀 전하께서 무릎까지 꿇고 빌고 계시잖아. 잊었어? 아직 젠.티아 드.로
안 남작이 남아있다고! 그에게서도 뭔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얼핏 들으면 돈에 눈이 멀은 젠드가 하기에 딱 알맞은 말이었다. 그러나 시즈는 진지하게 어조로 어떤 부분을 강조
하여 말하는 그의 말이 뭔가 의미심장한 여운이 담겨있는 것을 느꼈다. 사실 시즈는 누군가 부탁을 하면 거절을 하
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심성과 젠티아의 의미심장한 눈빛. 고개를 돌려 헤모의 의사를 묻자, 그는 놀랍게도 시
즈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젠드를 턱으로 가리킨 후 손으로 허락을 표시했다.
'헤모는 젠드와 안면이 있다고 했지. 헤모와 인연을 갖었다면 평범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설마 지금 찾아가는 사람이라고는 시즈도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엄청난 검술 실력과 왠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어투와 행동. 청년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번만입니다."
"고마워요. 시즈 님. 이번 일은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큰 포상을‥."
'나를 무릎 꿇게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주지.'
그녀는 입과 마음이 따로 노는 여인이었다. 그런 공녀를 보며 젠드는 물고있던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여자군."
담배연기는 아무도 모르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새의 모양으로 변하여 북서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아침의 햇볕은 간밤의 바람으로 새파랗게 질린 풀잎들을 녹여주었고 촉촉한 연녹의 빛깔은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보를레스는 곧 이런 아름다운 곳이 피로 더러워질 게 안타까웠다.
그의 눈에는 잠시 후 격전의 상대가 되어줄 병사들이 들어왔다. 젠드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
생한다. 평소의 시즈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귀족들의 모략에 숨겨진 그들의 참모습을 알고 흥분한 거겠지. 어쩌면‥.'
자신 또한 흥분하고 있었다. 싸우게 될 이들의 피가 하늘로 솟아오를 것을 예상하면서.
'난 시즈처럼 연약하지 않다.'
그는 닥쳐올 싸움과 피와, 비명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전원! 공격!"
까마득히 몰려든다. 족히 수백 명은 될 것 같았지만 시즈들은 아무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보를레스과
젠드는 이빨과 검을 드러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데린은 계획대로 되어간다는 생각에 웃음을 띄고 있었고 앞으
로 일어날 일에 불안해하는 사람은 오직 레소니 뿐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
기마병. 초원에서는 당연한 공격술이었다. 시즈가 손을 들어올렸다. 듣는 것만으로 냉기가 스며드는 무미건조한 음
성이 그으 입에서 흘러나왔다.
"태초로부터 존재했던 파괴하는 자여. 파괴하기에 창조하는 자여‥. 그대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위해 생명을 먹으리
니 가져간 대가에 대한 또다른 파괴를 부르리라‥."
그가 긴 주문을 영창하는 걸 본 일이 없던 헤모와 보를레스는 수백의 병사들보다도 시즈 위로 형성된 거대한 불꽃
의 고리에 긴장했다. 반경이 무려 5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고리가 공중에서 타오르며 소용돌이치는 광경에 겁을 먹
은 것은 돌진해 오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둘씩 걸음을 멈추는 말, 그리고 사람들.
"이 녀석들! 당장 돌진하지 않고 뭐하는 거냐!? 저 따위 마법에 겁을 먹다니!"
대장인 듯한 기사 하나가 손짓발짓을 하며 고함을 쳐댔지만 인간도 동물인 법. 모두들 본능적으로 불꽃의 고리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느끼고 있는 듯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겁을 먹고 있던 레소니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말발굽 소리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시즈를 돌아보는
순간, 흠칫했다.
시즈는 울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우리를 죽일 듯이 달려오던 이들이 죽음에 공포를 멈춰버렸다.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고 멈추었다. 자기
생명의 소중함은 지키려 하면서 타인의 생명은 장난감이란 말인가? 그러면서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슬펐다. 그들이‥ 그리고 그들과 다르지 않은 자신이‥.
불꽃이 더욱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이.
"그만해라. 시즈."
그는 어깨를 내리누르는 묵직한 손바닥에 고개를 돌렸다. 젠드가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그제껏 보아왔
던 능글맞고 교활한 게 아니었다. 부드러움이 강한 빛을 감싸안고 있는 갈색 눈동자. 미소를 지으며 젠드는 말을 이
었다.
"시즈, 넌 바람이지 불꽃이 아니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바람의 노래이지. 불꽃의 춤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
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이여. 분노를 가라앉히게. 인간은 고정된 잣대에 묶여있지 않아. 칭찬도, 질책도 할 수 없는
존재 자체가 인간이야. 아니 생명이라는 존재일지도 모르지. 어떤 것을 희생시키고 살아가는 것. 그게 인간이지. 물
도, 대지도, 불꽃에 휘말렸지만 그대만은 영원히 바람이기를 바라네. 그대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존재이지 않은
가. 언제까지 생명의 단편을 보고만 있을 건가?"
그렇게 말하고 젠드는 크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대지가 화답했다.
쿠르르르르르‥
그에게서 시작된 작은 진동은 바다 저편에서 시작된 작은 파도가 해일이 되어가듯 커졌고 시즈들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말에서 떨어지고 넘어지는 등의 광경을 연출했다. 그제서야 시즈는 깨달았다. 사내에게서 느꼈던 동질감.
그러나 아직도 마법 시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런 시즈를 보고 젠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소니, 잠깐만 이리 와볼래?"
"에?"
머뭇거리며 레소니가 다가오자 젠드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턱을 괴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 도련님께서 저 사람들을 싸그리 죽이고 싶은 모양이야. 그래서 말인데 네 도움이 필요하다."
"어떻게?"
레소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누군가를 향한 분노를 참지 못하는 시즈에게 두려우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녀에게 젠드
가 무슨 말을 속닥였다. 잠시 사과처럼 붉어진 그녀였으나 이내 결심에 찬 얼굴로 주먹을 꼭 쥐고 시즈에게 다가갔
다.
"시즈‥ 미안해요."
"읍!?"
폴짝 뛰어 시즈의 목에 매달려 눈을 꼭 감고 입을 맞추는 레소니. 당황한 시즈가 엉겁결에 그녀를 껴안자 주위에
서있던 이들은 볼을 긁적이는 등의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젠드는 키득거리다가 서서히 검을 뽑았다. 멀리 동쪽에서 떠오르는 눈부신 햇빛이 그의 검에 튕기며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마치 전설에나 나올 듯한 모습과 광경에 초원에 서있던 이들은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엄숙하고도 위압감이
넘치는 음성이 초록색 평원에 퍼졌다. 따스한 빛살과 함께‥.
"나 '대지의 고동을, 소리를 듣는 자' 젠티아 드로안이 검을 들어 명하니 '검은 요새' 글로디프리아의 수호자들은
명을 받으라!"
"예―엣!"
연약한 풀들이 흔들리고 땅이 울리는 굉음처럼 그들이 대답했다. 언덕 등성이로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 보라색
예복의 기사들은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부터 검을 들어올렸다. 찬란한 검광들, 그것들은 모두 가운데에서 고요하게
젠티아가 들어올린 검을 향했다.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검의 빛이 모이자 그의 검은 마치 신화 속의 용사에게만 내려
진다는 빛의 검처럼 타올랐다.
고요하게 명령을 기다리는 기사들에게 젠티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좀만 늦었으면 나 죽었다."
검들이 흔들렸다.
"손님들이 오셨는데 청소가 안되었구나. 쓰레기는 싹 치워라. 공격!"
"우와아아앗!"
"빌어먹을! 당황하지 마라. 숫자는 우리가 더 많다."
대장이 외쳤으나 보랏빛의 망토를 휘날리며 몰아치기 시작하는 기사들의 모습은 꽃잎이 봉오리로 돌아가는 장면처
럼 화려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그의 말대로 기사들은 100 여명 정도였으나 포위선을 한치의 흐트림도 없이 유지하
면서 달려오자 포위당한 군사들은 겁에 질려버렸다. 물론 보는 것만으로 전투를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눈앞에서 먹
이를 향한 듯한 눈빛으로 달려오는 이들은 실베니아 최고의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백장의 꽃잎."
기사치고는 순약하기 그지없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야말로 글로디프리아가 엘시크와 용병국, 카로안의 사이에서도
당당히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서는 칠순에 가까워 보이는 노익장도 보였다.
시즈 일행은 그저 멍하니 보라색 물결이 함성과 함께 자신들을 노리고 있던 병사들을 쓸어버리는 걸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시즈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레소니를 살며시 내려놓고 젠티아에게 다가갔다.
이제 이 푸른 대지가 피로 물들겠지?
"젠드 님‥. 아니, '값싼 남작' 각하."
"말씀하시죠. '마땅찮은 시즈'님."
"저들을 죽이지는 말아주십시오."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시즈에게 한 방 먹었다는 듯 미소를 지은 젠티아는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은 현실에 눌
리는 어린 청년의 어깨를 짚은 젠티아는 말했다.
"이제야 바람으로 돌아온 듯하군. 저길 보게.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아. 오죽하면 꽃잎
이라는 별명을 붙였겠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친구들이지‥."
"저희들에게 그런 이상한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남작 님이 아니십니까?"
보를레스와 펠리언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흠칫하고 놀라 물러섰다. 헤모만큼이나 거대한 장신의 사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들과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와있었다.
"하하핫. 소개하도록 하지. 토클레우스 마크렌서 자작이네."
"안녕하십니까. 남작 님의 수발을 들어드리고 있는 마크렌서 라고 합니다. 귀인이 오셨다고 하여 마중을 나왔습니
다."
데린은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말싸움으로 지내왔던 무례한 사내가 실베니아 최고의 영웅, '값싼
남작'이라니‥. 하지만 마크렌서 자작의 '귀인'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앞으로 나서 공손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데린 킬유시라고 합니다."
"아! 아버님이 혹시 하도너 킬유시 공작이십니까? 남작님의 약혼녀라고 하시던‥."
"예."
약간 수줍은 듯 눈을 내리 깔아보는 그녀였으나 이미 젠티아는 볼짱 다 본 상태였다.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는 젠
티아 때문에 펠리언을 제외한 이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얼굴을 돌려야 했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미소를 짓는 공녀
를 바라보던 토클레우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지나쳐 시즈 앞에 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귀인을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마땅찮은 이', 대륙의 현자시여‥."
"아!? 예, 예에. 저, 저도 영광입니다."
설마 공녀를 무시하고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시즈는 얼굴이 붉어져서 말을 더듬거렸다. 피식하고 웃음을
흘린 토클레우스는 일어서며 말했다.
"각하의 말씀대로 굉장히 귀여운 분이시군요."
당황한 시즈는 어찌할지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다가 아예 씨뻘겋게 달궈진 철처럼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