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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축제다!"
간단했다. 글로디프리아에서의 축제는. 젠티아에게서 나온 한 마디에 분주
하게 움직이는 성안의 사람들을 보며 일행은 어이없음이 무엇인지 각별하게
맛볼 수 있었다.
"각하, 제발 예복을 입어주십시오."
"난 미남이라서 평복으로도 남작의 티가 풀풀 풍기니 걱정말게."
울상을 지으며 시종장은 혼신의 힘을 다해 쫓아다녔지만 젠티아가 누구인가
. 대륙 최고의 기사, '값싼 남작'이 아니던가. 생쥐처럼 빠져나가 자취를
감춰버린 성주를 찾기 위해 시종장은 어제점심쯤에 성주와 함께 도착한 귀
빈들의 방을 두들겼다.
"죄송합니다. 성주 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요. 오지 않으셨습니다."
찰칵. 문을 걸어 잠근 후에야 옷장에서 얼굴을 내미는 '값싼 남작'. 그는
성주에게 제대로 옷을 제대로 입히고 싶어하는 시종장의 노력을 이렇게 평
가했다.
"후우‥ 고맙다, 시즈. 덕분에 시종장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그제서야 헛기침을 하면서 성주의 위엄을 차리는 젠티아였지만 전혀 어울리
지 않았다.
"그럼 이따가 보자."
"성주 님!"
"으아아아악!"
비명이 복도 저 편으로 사라져간다. 자신의 성에서 시종장에게 쫓겨다니며
비명을 지르는 성주. 막 세수를 하고 나온 헤모는 중얼거렸다.
"그 당시 성투사들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냉혈한처럼 피를 몰고 다니던 젠
티아 드로안이 이토록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수건을 건네주는 시즈에게 말했다.
"시즈, 잊지 말게. 사람은 단편적인 존재가 아니네. 그러나 사람의 시선은
단편적이야.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본다면 진실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네. 그
러니‥ 우리가 움직여서 바라보세."
"알겠습니다‥."
#
축제는 기사들뿐이 아니라 성의 주민들, 그리고 아침에 '백장의 꽃잎'들에
게 얻어터졌던 병사들까지 모두 즐거워했다. 검집으로 얻어맞기는 했지만
힘이 대단한 기사들이었기에 병사들은 몇 군데의 골절상은 가벼운 부상이었
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들을 치료하고 격려하자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
다. 사실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인가.
축제는 울음바다가 되어버렸지만 시즈는 그 모습이 시끄럽게 즐기는 축제보
다 더욱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과 푸짐한
음식들. 그 날 치고 박고 싸웠던 이들도 서로의 어깨에 팔을 얹은 채 춤을
추고 서로에게 술잔을 건넸다.
"성주 님의 연사가 있겠습니다."
잠시 나팔 소리와 함께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손을 흔드는
젠티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약간 쑥스러운
지 헛기침을 몇 번 해댄 그들의 성주는 크게 소리쳤다.
"즐겁습니까?"
"옛!"
"그럼 나도 껴주시오."
"하하하하핫!"
그게 다였다. 시종장과 토클레우스가 그게 무슨 연사냐고 머리를 감싸쥐고
절규했지만 젠티아는 웃음으로 때울 뿐이었다.
"자자! 다들 내려가서 즐기자고!"
인간은 어쩌면 더럽고 추악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어울리고
있지 않은가. 나도 인간이다. 이렇게 어울리며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고 있지
않은가. 시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이어서‥ 다행이야.'
#
"어찌하시겠습니까?"
펠리언은 걱정스런 어조로 데린 공녀에게 물었다. 축제가 끝나가지만 데린
은 약혼자 앞에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누가 그런 불량잡배같은 사람이 '값싼 남작'이라고 생각했겠어.
그나저나 그 앞에서 천방지축처럼 굴어댔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지?'
"모르겠어요."
계략이라는 것은 속임수에 필요한 비밀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아무리 영악
한 공주라도 젠티아는 그녀의 진면목을 확연히 알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머리를 굴리던 데린은 중얼거렸다.
"유혹하는 수밖에‥."
"천사조차 능가하는 공주님의 찬란한 미모라면 제아무리 냉혈한이라도‥."
데린은 위로인지 찬사인지 알 수 없는 펠리언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저었
다.
"오늘 계획이 실패하던, 성공하던 간에‥ 펠리언은 꼭 의사랑 상담 좀 해요
."
"예! 공주 전하의 말씀을 어찌 거역하겠나이까!"
의사라고 고칠 수 있을까?
왁자지껄한 성안은 검은 요새라는 별명이 주는 분위기하고는 조금도 동질감
이 들지 않았다. 데린은 젠티아를 찾아다니다가 그가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가 없어 끝내 지나가던 시녀에게 물었다.
"드로안 남작께서는 어디에 계시죠?"
"성주 님께서는 한 시간쯤 전에 시즈 님과 성벽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시즈 님과?"
다른 일행들은 연회장이나 거리에서 즐기고 있던데 그 둘만? 데린의 뇌리에
토클레우스의 한 마디가 내리쳤다.
'각하의 말씀대로 굉장히 귀여운 분이시군요.'
실제로 귀엽다고 해도 성인 남자끼리의 사용할 말이었을까?
"서, 설마‥."
그녀는 섵부른 추측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입술을 손으로 막은 채 다른 손으
로 치마자락을 잡고 성벽 꼭대기로 향하는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질주라고
할 수 있는 빠르기였다.
"정말‥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군요."
"그걸 이제 알았냐?"
젠티아는 잔은 흔들어 안의 푸른 액체를 찰랑거리게 만들었다. 겨냥하듯 한
눈을 감고 일렁이고 굴절되는 잔을 시즈에게 건네며 말했다.
"인간이 인간을 본다는 것은 이런 수많은 흔들림과 굴절 속에서니까‥. 누
가 자기 자신은 바위처럼 묵직하게 있다고 말할 수 있지?"
"그렇군요."
잔을 통해서 보이는 젠티아의 얼굴은 여러 가지였다. 고통스러운, 기쁜, 능
글맞은, 우는. 이 가운데 무엇이 그의 진정한 표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창! 잔이 부딪이는 소리가 경쾌했다. 젠티아의 갈색 눈동자는 바라보는 것
만으로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시즈는 전부터 가
지고 있던 의문에 대해 질문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그, 그냥 당신이
왠지 모르게 친근합니다. 마, 마치 가족!?"
이상하게 생각한 가능성이 다분한 내용이었다. 질문하는 시즈도 그걸 모르
지는 않았기에 긁적이며 쑥스러움을 감췄다. 글로디프리아의 젊은 성주는
대답을 하기 전에 술잔을 비웠다. '푸른 바닷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실베니
아의 대표적인 술은 상당히 씁쓸하면서도 끝맛이 깔끔한 특이한 술이었다.
"후‥ 좋군. 혹시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나?"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면‥ 오래 전 펜실바니카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었던
4명의 음유술사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그래. 잘 아는 군. 그게 너야."
"예?"
"표정이 멋지군."
현재 시즈의 표정을 멋지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은 대륙의 전인구를 들어
1명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 정도로 충격을 먹은 시즈의 얼굴은 차마 묘사
하기 불쌍한 수준이었다. 젠티아의 칭찬이 타인에게는 욕이라는 걸 그 동안
의 여행으로 충분히 습득하고 있던 시즈였다. 얼른 진지한 모습으로 돌변하
자 젠티아는 아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잔에 '푸른 바닷물'을 따라 들이
켰다.
"아릴을 만나지 못했나?"
"아릴 님이요?"
"만났군. 그래. 그 아이가 바로 '바다의 악보를 그리는 이'다. 들어봤겠지?
"
"예."
"그리고 내가 '대지의 고동, 노래를 듣는 자'지."
시즈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 속의 인물과 얼굴을 마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전설 속의 인물이기는 했지만‥. '술이 마시고
싶은 모양이군.'이라고 생각한 젠티아가 그의 잔에 넘치도록 '푸른 바닷물'
을 따랐다.
"그‥ 그만!"
"어허! 남자가!"
"그거 비싼 거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마시라고 만든 게 아니겠나?"
헤모가 들었으면 목을 조르며 내동댕이칠 말이었지만 젠티아는 거리낌없이
말했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기에 시즈는
내심 탄복했다. 시즈도 술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했기에 비싼 술을 마다하지
는 않았다. 곧 얼굴이 달아오르도록 마신 그는 몸을 흐늘거리게 만드는 취
기에 들떠 풀쩍 뛰어 성벽 난간에 앉았다. 매우 위험했지만 그 자리에서 자
살할 정도로 정신이 엉망이지는 않았고 포근한 바람이 그를 감싸안아 취기
를 약간은 씻어주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바람을 부리는 군."
"그런가요? 이 곳에 와서 많은 것을 얻었지요. 그리고 잃기도 했고요. 하지
만 모든 게 사라져도 바람과 저 달만은 저와 함께 해줄 겁니다."
"느끼고 있는 건가? 역시 대륙이 인정하는 현자 '마땅찮은 시즈'로다!"
"큭큭큭‥ 그래서인지 저를 마땅찮아 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시즈는 자조적인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시니컬한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의 목소리는 느릿한 곡조를 만들어갔다.
저편 하늘로 먹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들이칠 게 두려워 창문을 닫아보지만
가슴속에 내리는 빗줄기는 누가 막을 수 있을지
흐르고 흘러 넘치고 방울이 되어 흘러내리네.
오 보석같은 슬픔이여
그대는 나를 상쾌하게 쓰다듬는 작은 새소리지만
바닥에 남겨진 먼지들은 쌓이고 쌓여
투명하길 원하는 내 마음을 변색시키네.
그만 내버려두라고 외쳐보지만
빛나는 슬픔을 가져갈 때까지
끊임없이 내 심장에 연장을 대고 파 내려가네.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은 갑자기 벅차 오르는 슬픔에 춤을 멈추고 눈가를 훔
쳤다. 맑고도 청아한 음성은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름다웠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안타까움도 포함하고 있었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성벽을 바라보기만 하자 젠티아는 사람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시즈의 노래에
놀랐지만 축제의 분위기가 장례식처럼 변해버리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시즈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바로 우렁찬 노래가 글로디프리아에 울려 퍼졌다
.
별들은 고요한 시선에 여인의 가슴은 설레이고
달은 내민 빛의 손바닥은 사나이의 용기를 어루만진다.
밤은 아름다운 춤을 청하는 시간 사내여 무릎을 꿇고 고백하라
푸른 바다보다도 넓고 깊은 그대의 사랑을!
밤은 수줍은 미소를 감추는 시간 여인이여 손을 내밀어 허락하라
어둠 속에서 태양처럼 따스이 그대를 감싸줄 사랑을!
사내의 힘있는 발걸음! 내딛는 곳곳마다 타오르는 열정을!
여인의 흩날리는 원피스. 휘도는 순간마다 풍겨나는 순정을!
짙은 회색 빛깔의 구름을 사라지고 투명한 밤은 우리를 축복하네.
시즈처럼 깨끗하지도 청아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투박하기만 했지만 그 투
박함은 노래에 젠티아 특유의 익살스러움을 잘 느끼게 했다. 그 와중에도
왠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불협화음은 슬픔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웃음
을 되돌려놓았다. 무심결에 따라가는 선율, 피어오르는 미소, 축제는 다시
시작되었다.
활기가 오른 축제를 잠시 지켜보던 젠티아는 반쯤 눈이 감긴 채 히끅거리고
있는 시즈를 감싸안아 난간에서 내려놓았다. 시즈는 키가 작은 청년이었기
때문에 그의 품에 꼭 맞았다.
"좀더 먹어야 겠군. 아직 2, 3년 정도는 더 자랄 수 있을 거야."
"꺄악! 뭐, 뭐하는 거에욧!"
젠티아는 갑자기 시즈가 여자처럼 비명을 지르자 눈을 의심했다. 내가 남자
라고 생각했던 게 여자였단 말인가? 다시 한번 날카로운 여성의 음성이 들
리자 젠티아는 계단 방향이 그 발원지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당장 떨어지지 못해욧!"
"시끄러워‥."
잠깐 졸았던 시즈가 여자의 비명에 깨어나 젠티아를 밀치고 계단으로 걸음
을 옮겼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려왔지만 그리고 히끅거리는 소리
는 멈추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하하‥ 오늘 못한 이야기는 내일 해야겠군."
"무슨 얘기인데요?"
도끼눈을 치켜 뜬 여인은 바로 데린이었다. 젠티아는 그 예의 능글맞은 표
정으로 그녀를 이제서야 봤다는 듯 놀라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오호‥ 무례한 사람을 약혼자로 두신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 님 아니십니까
. 여기는 무슨 일이신가요?"
그가 놀라는 게 아니라 놀리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데린이었다. 입을
삐쭉인 데린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와 젠티아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짜악!
"정말 끝까지 무례하군요. 아무리 그대가 '값싼 남작'이라지만!"
"괜히 '값싼 남작'이 아닙니다만 공녀 전하‥."
젠티아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면서도 능글맞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화
가 머리끝까지 침투한 데린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아무리 삼류잡배라고 해도 약혼녀한테 이러지는 않아요."
그럼 약혼녀는 약혼자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된다는 건가? 젠티아는 그렇
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데린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는 것을 보고 얌전히 인
형처럼 흔들렸다. 얼마나 흔들었을까? 머리 속이 죽이 되지 않았을지 걱정
하는 젠티아에게 한껏 화가 풀린 데린은 도도하게 말했다.
"나 당신을 유혹하러 왔어요."
"‥‥."
쿨럭. 막 '푸른 바닷물'을 들이키려던 젠티아는 여인의 얼굴에 물고 있던
액체를 뿜어버리고 말았다. 데린은 축축한 물방울이 맺혀있는 머리칼을 닦
지도 않고 부들부들 떨어댔다. 젠티아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걸 느끼게
만든 여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딱 붙은 붉은 드레스로 드러난 육감적인
몸매는 남자라면 누구든지 두근거릴 만큼 매혹적이었고 풍성하니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은 술방울이 촉촉하게(?) 맺혀 달빛에 반짝였다.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의 라인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던 젠티아는 여인의 피부가 얼마
나 새하얀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 이 무뢰한!"
이번에는 맞을 수 없지. 데린의 가는 팔은 도도한 성격과는 달리 가냘픈 여
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가늘고 깨끗하게 솟아오른 아미와 화가 나 살짝
깨문 붉은 입술. 젠티아는 변태 아저씨같은 미소를 지워버렸다. 데린은 잡
힌 팔을 뿌리치려고 발버둥치다가 고요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시선에 흠칫 놀랐다.
'뭐, 뭐야? 그 눈빛은?'
갑자기 드레스선이 깊게 파인 가슴을 가리고 싶어지는 거지? 왜 그의 눈길
을 받아내기가 힘들지? 오기를 내여 발끈하고 고개를 든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띠고 가득히 자신을 담은 갈색의 눈동자에 화끈하고 볼이 달아오르
는 걸 느끼고 눈을 내리깔았다. 젠티아는 그녀를 잡아당기며 귀에 은은하게
울리도록 속삭였다.
"날 유혹하겠다고 했지?"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이미 늦었어."
"아! 앗!"
"쉿!"
데린은 목덜미에 느껴지기 시작한 감촉에 도망치려고 했지만 젠티아는 놓아
주지 않았다. 몸을 섬짓섬짓하게 만드는 감각이 입술에 닿을 때까지는 그녀
는 눈을 꼭 감고 장난꾸러기 약혼자에게 매달렸다. 숨쉬기가 곤란해 때쯤
되어서야 입술을 뗀 젠티아는 의외라는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유혹한다고 하길래 기대했는데‥ 완전 초보군!"
데린의 하이힐이 젠티아의 발등을 찍었다. 한 남자의 능글맞은 비명이 글로
디프리아의 성벽에 울려퍼졌다.
그로부터 5일 후 '값싼 남작' 젠티아 드로안과 공녀 데린 킬유시의 결혼식
이 거행됐다. 그 때까지 시즈는 레소니에게 여러 가지 마법을 가르치며 시
간을 보냈는데 하루도 우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느끼고 있었다.
바람이 알려주는 대륙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불안한 기운을‥. 그리고 그 기
운은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뺏어가 리라는 걸.
'또 다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맡고 싶지는 않다.'
결혼식이 끝나고 젠티아는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곧 능력에 완전히 눈을 뜨겠군. 미리 말해두겠지만 눈을 뜰 때는
고통이 따를 것이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기를 바라네. '바람을 노
래하는 이여'. 그대를 믿네. 소중한 존재를 지킬 수 있기를 바라겠네. 자네
의 힘이 불러온 불행이니 그 힘으로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엘시크에서는 시즈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세
이서스가(家)가 반란 모의에 가담한 사실이 들통나 헤트라임크가 곧 처형된
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은 그에게 주었던 존재들을 다시 빼앗기 시작했다. 시즈는 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