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24 악장 청년, (자신의)생명의 무게를 알게 되다.
초원는 며칠 사이에 여기저기로 들꽃이 피어 있어 바람에 하늘거렸다. 여느 때 같으면 잠시 멈춰서서 향기라도 맡
아보고 싶었을 레소니였지만 지금은 눈길조차도 마차 밖으로 줄 수 없었다.
"시즈‥ 헤트라임크 님은 괜찮을 거에요."
"그, 그럴까요?"
미소를 지어 보이는 시즈였지만 그 헬쓱한 미소가 단순한 근육작용으로 인한 억지스런 표정이라는 걸 부인할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마차의 진동과는 상관없이 그의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기를 끌어안 듯 안고 있
는 레소니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시즈의 슬픔을 자신이 조금이라도 덜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듬은
팔에 힘을 주었다.
시즈는 미쳐 날뛰지 않는 자신이 경외스러웠다. 만약 젠티아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벌써 그랬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에게는 참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했다.
'난 알고 있었다.'
- 난 묻고 싶습니다. 마땅찮은 이여…. 그대는 막힌 물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 폐단적인 귀족들을 뜯어고칠 것입니
까, 백성들을 위한 직접적인 구제정책을 펼칠 것 입니까?
- 썩어가는 근본을 뜯어고치겠지요.
- 그 말은?
- 귀족을 부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왕족도.
- 이거 예상 이상입니다. 그대는 정말로 〈마땅찮은 이〉로군요. 하지만 기억해 두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그대는 이
름 그대로 인식되어버릴 겁니다.
이미 그들은 시즈에게 경고하였다. 몇 번이고 깨물어 검게 변색된 입술이었지만 흰 이빨은 주저없이 파고들었다. 언
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적의 어린 시선들. 일어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엎드린 자리를 기대와 시기의
흙으로 채워 나갔다.
'아마도 왕자를 끌어드린 리미뇌 홀에 대한 일은 그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눈에는 내
가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비쳤을 테지.'
그러나 설마하니 전혀 상관도 없는 헤트라임크를 끌어드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대마법사로서의 헤트라임
크를 믿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입지나 권력에 대해 바퀴벌레보다 예민하게 반응했고 드래곤보다
포악하게 대처했다. 그리고‥.
- 그들과 우리는 특별한 관계지.
- 특별한 관계라니요? 자세히 말해주십시오, 젠티아.
잠시 뜸을 드린 젠티아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연기의 빛깔처럼 비바랜 회색의 역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으로부터 20000여년 전, 대륙에는 아주 발달된 문명이 자리했었다고 한다. 과학문명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하늘
을 나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고 바다 속을 탐험할 수 있는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학자들은 대부분은 전
설에나 나오는 허구이며 현실성없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지만 우리는 과학문명이 있었다는 걸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고대 문명의 잔재이니까.
자신들을 '역사의 고리'라고 부르는 그들은 과학문명의 멸망에 대해 의구성을 가졌다. 추측하기에 아마도 '역사의
고리'는 과학문명의 후손이기보다는 과학문명을 찬양하고 부흥시키려고 했던 이들의 후손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찬란했던 고대문명의 멸망에 대한 원인으로 한 가지 종착점을 꼽는데 성공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문명.'
그들은 누구보다도 찬양하던 문명을 연구하여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그 과학문명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도 숙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대 문명을 다시 부흥시키는 것을 망설인다. 우선 그들이 행한 것은 자신들의 연구 바
탕이 되었던 자료들을 모두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멸망으로 다가가지 않도록 고대 문명의 역사 속에
서 가장 안정된 시기를 되풀이한다. 마치 고리를 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15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시즈,
아무리 지식이 얕은 역사학자에게 물어봐도 15000년이라는 세월은 짧은 게 아니다. 예상일 뿐이지만 아마도 고대
문명이 찬란했지만 이토록 긴 역사를 지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륙을 지배하는 '역사의 고리'일지라
도 시간과 함께 발전해가는 생명의 진화를 막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될
기미를 보이면 즉시 그 원인을 박멸했다. 어떤 때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녀석들은 그 잔혹
하고도 저주받을 행위를 '신성한 회귀'라고 지칭했다.
'네가 알고 있는 펜실바니카 또한 그들이 만들어낸 존재다.'
아무리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그들의 행위는 만행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았다고 해도 그들의 힘은 너무나 강대
했다. 세일피어론아드의 모든 생물들이 진화를 거듭했지만 오직 인간만이 만 년이 넘는 세월을 상태로 보냈다. 생태
계는, 아니 세일피어론아드 자체는 그런 인간을 인정하지 못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게 바로 우리의 존재이유니
까.
제일 먼저 '역사의 고리'와 맞선 이는 '대지의 노래를 듣는 자'였다. 그가 나타날 당시, '역사의 고리'는 '신성한 회
귀'를 발동하고 있었다. 노래를 듣는 자답게 사람들의 고통과 듣던 그는 '역사의 고리'와 맞서 싸우지만 실패한다.
그리하여 그는 죽고 대지의 의지는 '대지의 노래를 듣는 자'의 검에 숨어서 새로운 때를 기다린다. 그 검이 바로 내
손에 들린 이 녀석이야.
'성음검(聖音劍)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그러다가 '대지의 노래를 듣는 자'에게도 동료가 생긴다. 언제나 패배를 하면서도 맞설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는 기
쁜 일이었지. 동료는 당시에 개혁을 꿈꾸던 레이모하 교단의 작은 일파였어. 하지만 총교단은 '역사의 고리', 그 자
체였지. 개혁파는 멸망하기 직전 그들의 모든 신성력으로 쏟아서 성수 병 하나를 만들어내고 물의 의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 성수 병을 맡긴다.
'그게 바로 '바다의 악보를 그리는 이'의 탄생이었지. 물의 의지는 그 성수 병, 이플리샤에 들어있어. 지금은 아릴이
가지고 있지.'
신성력과 물의 의지를 함께 가진 이의 힘은 그야말로 끝없이 넓고 깊은 바다처럼 거대하여 처음으로 '신성한 회귀'
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고리'가 내보인 힘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물의 악보를 그리는 이'가 강하
기는 했지만 파괴적이지는 못했고 음유술사들은 다시 한번 패하고 만다.
'다음은 '불꽃의 춤을 추는 이'지? 간만에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컬컬하군.'
솔직히 말해서 음유술사 중 최고의 말썽꾸러기라고 할 수 있지. 탄생도 특이했다고 하더군. 원래 불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게 아니니까. 물론 부싯돌 긁어대면 불씨가 튀기고 나무가 번개를 맞으면 그 열로 불이 붙기는 하지만 불
이라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자연과 어울려 나타난다고는 보기 어렵다. 불이라는 존재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린 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그렇듯 '불꽃의 춤을 추는 이' 역시 인간의 금지된 실험에서 태어난다. 사실 그는 두 음유술사를
막기 위해 '역사의 고리'에 의하여 만들어지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역사의 고리'에서 도망쳐
나온 불꽃이라는 존재는 실제로 불이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어지듯이 등장할 때마다 점점 강해졌다. 어떻게 전승되
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의 의지는 내가 알기로 전승되지 않는다. 시대마다 불의 의지는 계속 남아있던 걸로 봐서
그들이 직접 전승시키는 모양인데 그 내용은 알 수 없지. 어쨌든 대지와 물, 두 의지의 음유술사와 불의 음유술사가
3번째 만났을 때는 '불꽃의 춤을 추는 이'는 이미 두 술사의 힘을 훨씬 능가해버린 상태였지. 그러나 술사의 힘은
자신이 띄는 의지와 연관된 것. 언젠가 불꽃을 태우는 연소물이 사라지면 꺼지게 되겠지.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불
안해했다고 전해진다. 어떤 과정이었는지 모르지만 존재 자체에 불의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언제인가부터 너
무나 강대해진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여 죽을 때까지 거의 힘을 쓰지 않았다.그런 꺼져가는 불의 의지를 되살릴 수
있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바람의 존재지. 바로 너, 바람을 노래하는 이.'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언제부터 존재했고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존재가 드러낸 게 2
번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펜실바니카 사건이었다. 그리고 시즈, 네가 두 번째지. 우리의 이름이
나타내듯이 악보를 그리고 노래를 듣고 춤을 추는 것은 노래를 부르는 이가 없으면 불가능하듯이 '바람의 노래를
부르는 이'가 나타났다는 것은 음유술사들에게 가장 완벽한 기회였다. 그러나 전설대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지. 이
처럼 우리 음유술사들, 일명 '음향의 축제'과 '역사의 고리'는 가히 100 세기에 달하는 세월을 투쟁하며 흘러왔다.
그리고 지금 다시 세계는 '마땅찮은 시즈'의 등장으로 인하여 개혁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바람의 노래를
부르는 이'로서의 시즈가 아니라 마땅찮은 자로서의 너를 없애려고 한 거야. 바람의 등장은 스치듯이 빨리 지나갔
기 때문에 그 능력은 나도 알 수 없다. 단, 바람은 어디에나 존재하듯 가장 광범위하고 토네이도처럼 자연이 일으키
는 최고의 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밖에는. 진정한 바람의 의지를 깨달아라. 절대로 광풍이 되어서는 안돼. 온
화한 봄바람처럼 귓가를 스치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을 수 있는 그런 바람이 너의 의지이길 빌겠다.
미안합니다. 젠티아, 난 도저히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 * *
"저 분은 그 유명한 대마법사라는데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어쩌다 저렇게 되신 건지‥."
"역적 모의에 가담했다더군. 아스틴의 밀정과 손을 잡았대."
웅성거리던 구경꾼들은 한 기사의 고함 소리에 밀쳐 넘어지면서도 발길을 떼지 않았다.
"비켜라. 죄인을 형장으로 후송 중이다!"
그 구경꾼들 사이에는 시즈 일행도 끼여있었다. 부르르 하고 가슴을 뚫고 나오려는 분노를 힘겹게 가라앉히면서 시
즈는 끌려가는 헤트라임크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시즈‥. 시즈!"
"네‥."
몇 번이나 불러야 대답할 정도로 멍해진 정신을 가지고도 시즈의 대답은 너무나 차분했다. 도리어 흠칫하고 놀란
보를레스가 말했다. 보를레스의 시선은 헤트라임크가 아니라 그 뒤로 후송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구경꾼들의 얘기를 듣자니 헤트라임크 님 뒤의 사람들은 랑쉐르 백작가의 사람들 같다. 저들도 아마 무고한 이들
일거야."
"그렇겠지요."
젠티아의 이야기를 빌려보자면 그들은 역사의 후면을 100 세기동안 지배했고 반항의 역사는 가차없이 삭제시켰다.
그들에게 인간은 역사라는 한 편의 예술품을 만드는 붓일 뿐인가? 랑쉐르 백작가는 제플론 내에서 사병이 많기로
유명했다.
'나 하나 때문에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구나. 왕가는 죄없는 사람을 하나 죽이는 김에 귀찮은 사병력
을 가지고 있던 백작가도 함께 삭제하는 것이군.'
철저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절대로 존경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었다. 이윽고 후송이 '모욕의 광장'에 들어서자 기사
들은 헤트라임크를 비롯한 백작가의 인물들을 뒷무릎을 걷어찼다.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도 전(前) 귀족
에게는, 누명을 쓴 이들로서는 엄청난 모욕이었으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야유와 함께 쏟아지는 썩은 계란, 쓰레기. 멀찍이 떨어진 기사들은 그걸 보면서 키득거렸다. 서민들에게나 기사들에
게나 대마법사라는 지고한 자리의 주인이 무릎을 꿇고 오물 세례를 받는다는 게 삶에 있어서 상당한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레소니가 고개를 돌리고 보를레스가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시즈는 잠자코 손을 내밀어 만류했다. 그의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모든 상황을 받아드리는 듯, 아니 모든 것을 초월해버린 듯 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시
즈는 가슴 속 깊이 새겨 넣었다. 누군가를 향한 차가운 증오와 함께‥.
"어마마마, 꼭 이렇게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슨 뜻인가요, 폐하? 그들은 역적이에요. 명백한 증인으로써 아스틴의 밀정도 잡혔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학자들이 확실한 조사를 원할 겁니다. '마땅찮은 이'라는 이름을 레이모하
의 기도문 대신 웅얼대며 다닐 정도로 그들은 시즈님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모함이나 계략이라는 게
후일 드러나면 이 왕가는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없애야지요. 리페른‥. 어미의 말을 잘 들어요. 난 사랑스러운 리페른에게 흠이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
아요. 시즈라는 인물은 좋게보든 나쁘게 보든 왕권을 위협할 존재에요."
"‥‥."
리페른은 갑작스럽게 변해가는 왕궁의 정세를 어디서부터 짚어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승
하한 국왕. 이유는 아스틴의 자객. 시즈라는 이름을 등뒤에 업고 있던 리페른은 신흥 귀족들과 학자들의 대대적인
지지로 가볍게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이 되는 순간 깨달았다. 이 나라의 절대적인 지배자는 따로 있었다
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또한 그 절대적인 세력의 일원이라는 것을‥. 리페른의 착잡한 마음을 모르는 롤젠미아누 왕
비는 마냥 사랑스러운 아들을 끌어안았다.
그 시간, 제플론의 지하감옥. 두 사내와 한 명의 소년이 한 사람이 눕기도 힘든 독방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설마 그대가 밀정의 역할을 자처할 줄이야."
왕족들이나 입는 최고급 비단으로 온몸을 둘둘 말고 서있는 노인이 눈을 한 번 크게 떠 보이며 즐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인의 곁에는 15,6세쯤 되어 보이는 푸른 머리의 소년이 어딘가 겁을 먹은 듯 긴장된 표정으로 나무조각처
럼 서있었다.
"글쎄요. 며칠간 고되기야 했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방법을 생각해낸 것은 그대가 아닙
니까? 페노스톨멘가(家)의 가주, 크레오드 페노스톨멘 자작."
벽에 기댄 사내는 상당한 고문을 받았는지 허름한 죄수복이 피로 얼룩지고 겉으로 드러난 피부가 쩍쩍 갈라져 있었
는데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양 담담했다.
"그래도 설마 아스틴네글로드의 7 번째 은자라는 그대가 이런 모욕과 고문을 자처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애송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선입견을 바꿔야 겠군."
"이제라도 바꿔주니 고맙구려, 쳇. 그런데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까?"
"걱정말게. 일말의 차질도 없네."
크레오드가 자신있게 말했지만 사내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감옥을 둘러싼 돌들에 엄지의 긴 손톱을
다듬으면서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과연 계획대로 될지 설마 같은 고리의 일원을 잘라버리지는 않으시겠지요?"
"이대로 처형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로군. 걱정말게. 계획대로 될 거야. 헤트라임크가 처형당하기 직전 그의 아들은
나서서 구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럼 그 때 관심을 도망치는 세이서스 부자에게 돌림과 동시에 자네를 아스틴으로
책임지고 빼돌리겠네."
"아하하하. 죄송합니다. 아스틴네글로드에 한동안 몸을 담다보니 그들의 규약이 머리 속에 배어들었나 봅니다. '페노
스톨멘과는 거래하지 말라.' 아스틴네글로드의 규약 중에 하나지요."
"바람을 노래하는 이의 재현을 예견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네. 무엇하러 아군을 없앤다는 말인가?"
얌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년의 팔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크레오드가 인자한 표정으로 손자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느냐? 로길드."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할아버지."
"하하핫. 손자가 긴장한 모양이군요."
껄껄대며 감옷을 웃음으로 채우는 두 사람을 보며 페노스톨멘가의 어린 후계자는 말하려던 것을 망설였다. 아니, 그
냥 넘어가기로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시즈 세이서스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는 걸 모르시는 모양이군. 뭐‥ 이번에는 넘어가도록 하지
요, 시즈 님. 당신에게는 빚을 진 게 있으니까‥.'
엘시크는 짧은 시간 너무나 많이 변해있었다.
"역적을 도모한 죄인, 헤트라임크에 대한 마지막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납시겠습니다."
보를레스는 무표정하게 걸어나오는 국왕의 모습이 낯익은 소년과 닮았다는데 경악했다. 젊은 국왕은 천천히 단상
위에 올라서자 주위의 웅성임이 서서히 멎어들었다.
"마지막 재판을 시행하도록 하겠소. 우선 나 리페른은 엘시크 에도린 왕가의 28번째 국왕으로써 정의에 어긋나지
않은 판결을 내릴 것이오."
기사들이 검을 들어 국왕의 판결이 곧 정의임을 시사하고 자리에 앉자 죄인이라고 명명된 이들이 끌려나왔다. 잠시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그들의 온몸이 질척질척하고 더러운 오물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서 폐하를 보라."
'마지막 재판'이라는 것은 이미 처형이 정해진 죄인들의 죄를 대중 앞에 시사하고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판결에 대
한 정당성을 얻기 위한 자리였다. 그렇기에 죄인들은 어떤 누구라도 죽기 전에 신분을 초월하여 국왕의 얼굴을 대
면할 수 있었다.
"블테인 랑쉐르 백작. 그대는 아바마마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아스틴과 결탁하여 자객을 보내여 끝내 아바마마를 살
해했다. 이에 랑쉐르라는 성을 거두고 죽음을 대신 내린다. 이의있는가?"
"폐하! 저는 결단코 결백합니다. 모함입니다! 이것은 모함입니다."
"이의가 있는 모양이군. 증인을 부르라."
병사들은 준비하고 있던 증인을 거칠게 끌어내어 결백을 주장하는 백작 앞에 내던졌다. 날카로운 눈매에 얇은 입술
을 가진 사내는 방금 전까지도 고문을 받았는지 살이 뭉텅이째 터져 있었다.
"그는 폐하를 살해한 자객으로 왕궁을 벗어나지 못하고 근위기사단에게 붙잡혔다. 블테인, 안면이 있지 않은가?"
"레이모하에 맹세코 없습니다. 이것은 모함입니다."
"그러나 증인은 다른 모양이네."
리페른이 고개를 끄덕이자, 증인의 옆에 있던 병사가 창으로 증인의 턱을 들어올리고 물었다.
"네게 국왕 폐하의 살해를 청부한 자가 이자가 맞는가?"
"트, 틀림없습니다."
"이, 이녀석!! 언제 나를 봤다고 그런 망언을 해대느냐―!!"
"조용히 햇!"
블테인이 벌떡 일어서 증인을 죽일 듯이 달려들자 병사가 그를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땅바닥을 뒹굴던 블테인은 헤
트라임크와 눈을 마주쳤다. 희대의 대마법사라고 불렸던 노인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군.'
알 수 있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모략의 그물에 걸린 것이다. 억울하여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가솔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 흙 속에 눈물을 묻은 그는 자세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슬픈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들. 하다못해 사랑하는 딸만이라도 살아주었으면‥.
리페른이 바라본 헤트라임크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고요한 호수였다. 죽음을 앞에 두고 형장에 꿇어앉았는
데도 마치 흔들의자에 몸을 실은 듯 했다.
'저게 바로 초월자의 눈빛인가?'
연설이 입안을 헛돈다.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옆에서 탐욕스런 눈빛으로 지켜보는 롤젠미아누, 그의 어머니를 실
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대, 헤트라임크는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가졌으면서도 국왕을 살해했다‥. 엘시크 마법사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으로써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대의 세이서스라는 성을 거두고 역시 죽음을 내린다. 이의있는가?"
"없소. 난 다만 속해있는 단체의 명에 따랐을 뿐이오."
"!"
기사들이 벌떡 일어서고 군중이 술렁였다. 그의 말은 배후가 있다는 뜻이었으니 귀족들을 비롯하여 서민들이 놀라
워하는 게 당연했다. 헤트라임크는 시선을 리페른에게서 증인으로 나온 사내에게 옮기며 미소를 지었다.
"기억하시오. 우리의 이름은 '역사의 고리'‥.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수는 없소. 대륙은 모두 우리의 눈 아래 있소.
으하하하핫!"
그의 광소가 형장에 메아리쳤다. 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크레오드 페노스톨멘이 무심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과연‥ 죽을 때도 그냥 죽진 않는 군."
"죄가 만천하에 밝혀졌는데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죄인들의 목을 쳐라!"
순간 광폭한 회오리가 형장에 몰아쳤다. 사람이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 쓰러질 강풍이었다. 죄인들을 지키다가 몰아
친 바람에 뒷걸음질치던 병사들은 복부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 기사가 실눈을 뜨고 외쳤다.
"죄인들이 도망간다!"
"아버지!"
시즈는 마법으로 단숨에 사람들을 속박하던 쇠사슬을 끊어버렸다. 너무 쉽게 끊어진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바람이 승천하는 비룡처럼 꿈틀거리며 가로막은 군중들을 밀
어내자 시즈들은 헤트라임크와 랑쉐르 가의 사람들을 보호하며 형장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기사들의 외침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잡아랏!"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사방이 포위된 상태였지만 시즈는 외쳤다. 사람들이 장식품이라고 치부할 정도로 깨끗했던 그의 검은 이미 검붉은
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왕을 살해한 죄인이 처형되는 처형장인데 경비가 가만히 있겠는가. 수 천명의 병사
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둘러쌌다. 일행의 주위로 눈에 보이는 인원만 천 여명은 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닿
기만 해도 살갗이 베어지는 바람의 벽 때문에 섣불리 일행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그만하거라. 아들아‥ 이렇게 와준 것만 해도 고맙구나. "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시즈는 절규하듯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헤트라임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자하게 미소를 띠고 헤트라임크는 허공에 글씨를 써나갔고 그의 손가락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빛이 뿜어
지기 시작했다. 이제 시동어를 외치기만 하면 주문이 시전될 것이다.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말하듯 입을 앙다물고 도리질을 치는 아들의 은백색 머리를 주름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
으며 그 감촉을 기억한 헤트라임크는 말했다.
"다 큰 녀석이 눈물이라니‥. 그러고도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안됩니다. 이곳을 뚫고 나가겠습니다."
눈물을 참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는 시즈의 볼을 타고 눈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렸다. 그가 포위병들의 무리로
뛰쳐나가려고 하자 헤트라임크가 보를레스에게 눈짓을 했다.
퍼―억!
바람의 벽안에 있어서인지 더욱 크게 울리는 충격음이 퍼지며 시즈가 비틀거렸다. 희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그는 이미 너덜해진 입술을 깨물었다. 헤트라임크는 정신을 잃지 않고 노려보는 시즈가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랑쉐르 백작. 이 친구들을 제외하고도 한 명이 더 갈 수 있소. 누구를 보내겠소?"
블테인은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그는 헤트라임크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을 보내야지요. 아리에, 행복하거라."
아리에는 얼마 전 18살의 생일을 맞은 소녀였다. 그녀는 얼굴의 근육이 굳어버린 것인지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가
족들을 끌어안으며 인사를 끝내고 레소니의 곁으로 가는 그녀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즈의 정신이 혼미해짐에 따라 바람의 장벽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헤트라임크가 부드러운 어조로 보를레스
와 레소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보를레스, 시즈을 지켜주게."
"걱정 마십시오."
"레소니‥.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겠지?."
"흐흑‥ 네‥."
"그럼 잘 가거라. 아들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여줘서 고마웠다."
보를레스를 뿌리치고 입술에서 터져 나온 피를 떨구며 시즈는 희미하게 보이는 헤트라임크를 향하여 무거워진 다리
를 움직였다. 창백해진 안색에 투명한 눈동자, 자신보다도 더 하얗게 세어진 머리칼의 아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헤트
라임크는 조금은 덜어주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시즈의 손가락이 옷깃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
다.
"염원하는 그 곳으로‥ '텔레포트.'"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들이 사라져버리고 헤트라임크를 비롯한 랑쉐르의 사람들이 서있
었다. 바람의 장벽이 사라지자 빗발치는 화살이 하늘을 수놓는다. 비오는 곳 저 편에서 마법서적응로 보이는 책을
품에 안은 청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오‥. 에빌드, 기다리고 있었느냐? 내가 곧 가마. 묻은 흙은 모두 씻고 갈 테니 기다리거라."
헤트라임크는 빗줄기가 더러워진 몸은 시원하게 씻어주길 바라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혈우(血雨)가 내렸다.
* * *
"그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였다니! 이런 오차가 있나!"
"크레오드 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실수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사내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위로하자 노인은 만면에 이채를 띠고 물었다.
"실수라는 것은 만회할 수 있다는 것. 자네는 복안이 있는 모양이군."
"이런 위대한 페노스톨멘 가의 가주께서도 나이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크레오드는 자존심이 쥐에게 파 먹히는 것 같았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바람을 노래하는 이'는 쓸데없는 오기만
불러일으키는 자존심 수백보다 중요한 존재였다.
"내 어찌 젊은 현자의 신지식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어서 말을 해보게."
그쯤 되자 사내는 냉소하며 입술을 한 번 핥고는 머리 속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헤트라임크는 솔직히 그는 살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죽었을까요?"
"그는 '역사의 고리'를 움직이던 인물이네. 우리는 서로마다 제약이 있지 않은가. 아마 도망친다고 해도 얼마 가지
못했을 거야."
"하하핫.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그런 비참한 죽음
을 택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사내가 껄껄대고 웃자 크레오드는 그가 자신을 비웃는 하여 기분이 심히 나빴다. 화가 난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
다.
"시즈가 도망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 아닌가!"
"잘 아시는 군요. 시즈를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인 시즈를 위해서 헤트라임크는 그대로 죽고 끝내겠습니까?
인간은 자손에게 뭔가를 남기는 법이지요. 그리고 헤트라임크는 '역사의 고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물입
니다. 아마도 '바람을 노래하는 이'에게 줄 게 많겠지요."
"과연‥. 그럼 숨박꼭질이 되겠군. 후후후‥."
* * *
- 잘 가거라. 아들아.
"안돼―엣! 헉?"
벌떡 일어난 풍경은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방호 마법이 걸려있는 갈색 침대보를 걷어내고 일어서자 문가에 서있던
한 사내가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케‥케츠타?"
그는 시즈에게 궁중예법을 가르켰던 세이서스가의 시종이었다. 창 문을 열어보니 봄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들어왔다.
"이곳은 어디죠?"
"주인님. 무슨 헛소리를 하고 계신 겁니까? 열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면 악몽이라도?"
그렇게 말하며 케츠타는 시즈의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갸웃한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악몽을 꾼 모양이에요‥. 악몽‥."
꿈이라고 생각되는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젖던 시즈의 눈에 거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비친 누군가
의 투명한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빌어먹을, 날 시험한 겁니까? 케츠타. 그러고 보니 호칭이 도련님에서 주인님으로 바뀌었으니 시험은 아닌가?"
"‥‥."
"다들 어디에 있지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일행은 한가롭게도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시즈의 모습이 보이자 그들은 벌떡 일어섰다.
"괜찮은 건가?"
보를레스의 물음은 '부작용은 없는 건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는 평생의 주군으로 삼은 이가 이런 고난에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시즈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리에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처음 인사드리는 군요. 아리에 양."
'백작 영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시즈가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리에는 몇
십분 전과는 너무나 다른 청년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런 그녀를 아랑곳없이 시즈는 건조한 시선을 케츠
타에게 돌렸다. 흰자위 위에 유리구슬이 박혀있는 듯한 그의 눈동자가 스칠 때마다 사람들은 냉기를 느끼고 몸을
떨었다.
"케츠타, 이 곳은 아직 위험한데 아버지께서 이리 보내셨다는 것은 무슨 안배가 있다는 뜻 같군요."
"물론입니다. 역시 '바람은 노래하시는 분'. 주인님께서는 도련님의 거론이 있지 않다면 없애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련님을 멀리 피신시켜 평범하게‥."
"닥치고 내놔요!"
샹들리에 수십 개가 불빛을 반사하듯 시즈의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올랐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차가운 이성으
로 막고 있었으나 언제 불길이 얼음을 뚫고 나와 폭발할지 몰랐다. 케츠타가 건넨 것은 한 장의 편지였다. 받아든
시즈는 보지도 않고 코푼 휴지를 휴지통에 넣듯이 주머니에 구겨 넣고 일행에게 말했다.
"어서 갑시다. 등잔 밑이 어둡기는 하지만 불꽃이 흔들리면 '그들'의 촛대는 등잔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케츠타, 비
밀문 있겠지요? 어서 안내해주십시오."
그의 말대로 궁정기사단이 들이닥친 것은 보를레스들이 나간 후 마시고 있던 차의 온기가 다 식지도 않은 때였다.
한 기사가 차에 손가락을 담가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멀리 가지 못했다. 수색대는 10 마리의 개로 집안을 수색하고 나머지는 저택 둘레에서부터 점점 범위를 펼치며 수
색을 개시한다. 비밀 통로 같은 게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
유능한 상관이 있다는 것은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지만 시즈들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불행이었
다. 비밀통로를 통하여 밖으로 나오자마자 컹컹 짙는 개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이제 믿을 것은 다리뿐. 케츠타
가 그 자리에 멈추어 두 자루의 시미터를 뽑으며 시즈에게 말했다.
"전 뒷처리를 하고 가겠습니다. 제플론을 나가서 성문의 남서쪽에 숲이 있습니다. 그 곳에 용병국으로 갈 수 있는
마법진이 있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빌어먹을! 도대체 나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먹으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네가 이 편지를 보게 되는 날,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헛헛헛‥ 내가 생각해도 너무 상투적인 편지인사말이로
구나.
얼마나 도망쳤을까? 발이 떨어진 곳마다 화살이 박혔고 말발굽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봄의 기운으로
한층 푸르러진 숲도 시선에 잡혔다.
사실 나는 네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로서가 아니라 평범하고 평화롭게 살아주기를 바랬기에 이 편지를 쓸 것인가
에 대해 매우 망설였단다. 그러나 나는 쓰고 말았고 너는 보고 말았으니 과연 운명이라는 게 세상에는 존재하지도
모르겠구나.
푹!
왼쪽 겨드랑이가 따끔하다. 내가 뒤를 돌아보니 수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궁수들은 가장 중요한 인물인 나를 집중사
격을 하고 있었다. 냉소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바람이란 점차 강해지는 것. 갑자기 생성된 바람은 화살의 빠
르기를 조금 약화시켰을 뿐 막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왼팔을 들어 막자 뼈를 관통하는 기분 나쁜 감각이 신
경계를 쑤셨다. 그러나 뛰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뛰는 속도를 늦추었다.
일년 전 가을, 한 청년을 보았을 때 40년 전 '역사의 고리'의 일원으로써 열심히 연구를 하다가 죽은 에빌트의 얼굴
이 떠올랐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무저갱처럼 깊은 지하 깊숙이 묻어두었던 금기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단다.
그러나 착각이었어. 두려워했던 이유는 자신을 잠식해버릴 듯한 슬픔과 그리움이었다. 허공의 뜬구름처럼 고요하여
인식도 못하던 감정들이 시즈라는 청년과의 만남으로 자극을 받아 화산처럼 솟아났지.
'제발 여자들을 목표로 삼지 않기를‥.'
나가 내심 외친 바램을 들었는지 기사들은 모두 나를 향해 달려왔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이다. 식인귀처럼 생명을 먹
고 살아왔는데, 아버지의 목숨도 먹었는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픽픽 하는 석궁 소리가 나의 귓가에 울렸다.
이제는 뇌가 왼팔을 방패대용이라고 인식했는지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막았다.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새롭
게 솟아나는 핏줄기가 바닥을 적실 뿐.
처음 내게 마법을 보여주었을 때부터 이미 난 네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아들이라고 생각하게 된 내 마음을 깨달았을 때, 이런 이별이 찾아올 순간도 어렴풋이 바라볼 수 있었다.
힘들어하는 숨소리가 들린다. 누구지? 그렇군. 바로 내 뒤까지 쫓아왔었군. 그러나 난 죽지 않아. 몇 걸음만 더 가면
숲이고 나는 살 수 있다. 생명을 먹어가며 유지해온 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어. 수풀을 뛰어넘기만 하면 돼.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굉장히 차가운, 너무나 차가워서 마치 뜨겁게 느껴지는 그런 무언가가 내 등을 훑고 지나갔다.
털썩!
땅바닥에 구른다기보다는 물 속에서 회전하는 느낌이 들었다.
죽는가보군. 광기에 물든 얼굴로 달려오는 기사가 보인다. 검에 묻어있는 붉은 액체는 내 피가 틀림없어 보인다. 젠
티아, 역겨워서라도 저런 인간을 용서할 수 없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잠시만, 죽기 전에 한 번만 광풍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 단다. 아들아.
네 녀석이 비록 여기저기 납치되어서 걱정시키는 못된 자식이었지만 말이다.
아마 에빌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네 녀석 만한 손자를 가지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 아이도 시즈라는 기묘한 이
름을 가진 청년만큼 사랑스럽지는 않았을 게다.
압축된 바람의 의지가 손안에 느껴졌다. 양팔을 내밀기만 하면 눈앞의 기사는 갈가리 찢겨서 사라질 것이다. 아마
나와 함께 가겠지. 기사가 힘차게 휘둘러지는 검이 보였다. 끝이야.
"시―즈!"
누가 날 부르지? 레소니? ‥아‥잠깐! 안‥돼! 멈춰어‥!
넌 내게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아들아.
네가 나에게 주었던 시간은 신이 또다시 100년이라는 인생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행복, 자체가 되었단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었지만 언제까지나 깨지 않을 꿈이길 바랬단다.
행복하거라 아들아. 사랑한다‥‥.
흩날리는 핏줄기‥ 형제를 알아볼 수 없이 조각난 인간의 살들와 함께 그에게 쏟아져 내렸다.
"아‥? 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이 때부터다. 그는 증오하기 시작했다‥. 자꾸만 생명을 먹이는 사랑을‥.
* * *
어깨에서 반대편 옆구리까지를 가로지르는 검상과 이쑤시개를 잔뜩 꽂아놓은 과일을 연상시키는 왼쪽 팔. 보를레스
가 상의를 벗긴 시즈의 상반신 처참했다.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마에서는 나무라도 태우는지 뜨
거워서 파상풍이 몸의 저항력을 이기고 득세하기 시작했음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었다.
"흐흐흐‥. 보를레스, 난 죽지 않습니다. 나는‥ 쿨럭. 절대로 죽을 수 없어요."
"알고 있어. 넌 죽을 수 없지. 암! 죽을 수 없어."
누구에게 답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상처를 싸매보는 보를레스의 얼굴에는 절망이 떠올라있었다.
"그래가지고는 소용없네."
동굴 속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굵직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는 보를레스의 눈동자에 반가운 얼굴이 묻어났다.
"헤모 사제! 어디 있었습니까?"
헤모는 제플론으로 돌아온 뒤에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었다. 신전에 보고없이 실베니아에 갔었기 때문에 시즈
들은 그가 신전에 한동안의 보고를 하러 갔다고 생각했다.
"보를레스! 가면 안돼!"
당장 달려가 얼싸안으려는 보를레스를 막은 것은 시즈의 피를 토하는 음성이었다. 의아한 보를레스가 멈춰있자 시
즈가 만신창이의 몸으로 벽을 짚고 일어섰다.
"후후‥ 그대도 나의 이 괴물같은 목숨을 가지러 왔습니까? 교단의 명령이겠군요."
"‥‥."
"그럴 리가! 정말입니까?"
헤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를레스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어차피 내가 살려주었던 목숨이니, 내가 가져가겠네."
아무리 주제를 모르는 보를레스였지만 눈앞에 거신처럼 서있는 사제의 무서움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일말의 감정도
없이 헤모, 아니 성투사 헤라즈 모히튼가 살기 뻗아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쳐졌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이 숲이로군요. 당신과 처음 만난 곳. 그 때 내 생명을 구해주었지요? 후후‥ 와서 가져가
십시오."
"시, 시즈! 안돼!"
보를레스가 막아보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헤모는 그를 스쳐 시즈 앞에 도달해 있었다.
'이, 이게 말로만 듣던 고속이동술인가?'
주먹을 들어올린 헤모를 가로막은 것은 바로 아리에였다. 눈을 꼭 감은 채 팔을 벌리고 있는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
보던 헤라즈는 껄껄대고 웃기 시작했다.
"우하하하핫! 그렇군. 시즈 네 녀석은 참 운도 좋은 녀석이구나. 레소니에 이어서는 이 아가씨인가? 이렇게 한 명씩
너를 가리고 죽어주는 구나!"
"보고 있었으면서 모른 채 했단 말인가!?"
분노를 참지 못한 보를레스가 얼굴을 붉히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고개도 돌리지 않은 헤라즈의 맨손에 잡혀버렸
다. 자신의 손에 잡힌 금속체가 무엇인지 상관없는지 한동안 주물대던 성투사는 비웃음에 가득한 표정으로 시즈에
게 말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시즈. 그러고도 '마땅찮은 이'라는 광오한 이름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천둥이 그러할까. 아리에는 마른 침을 꼴깍꼴깍 삼켰지만 절대로 비켜서지 않았다. 그 때 시
즈가 희미하게 말했다.
"아리에, 비켜요.."
"그래! 그래야지!"
더 이상 말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헤라즈는 아리에를 보를레스에게 내던져버렸다. 귀족 출신의 소녀를 조심스럽게
받아 내려놓은 보를레스는 헤라즈의 악력 속에서 더 이상 검이 아니게 된 물체를 버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검도
통하지 않았는데 맨몸이 통하겠는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를 아리에가 달려가 잡아주었다.
"하하하핫! 아주 좋은 동지애로군. 그렇지 않나? 시즈. 그 동지애 덕분에 너는 이렇게 살아남았잖아?"
"내 목숨은 언제 가져갈 거요?"
시즈는 이미 모든 것을 헤라즈에게 내맡기고 포기한 듯 싶었다.
"그래. 잘 가거라. 레이모하의 축복이 있길‥."
"바람이여‥."
주먹을 들어올린 헤라즈는 시즈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마치 이교도의 기도문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불안한 느낌이었
다. 그리고 바람이 자신을 휘감는 걸 느낀 그는 순간적으로 옆으로 움직였다.
촤악!
그가 있던 자리에 몇 줄기의 피가 소용돌이치는 자국이 남겨졌다. 고속이동술로 피했는데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
는지 오른쪽 팔에는 수십 개의 검이 스치고 간 듯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아직 삶을 포기하지는 않는 건가?"
헤라즈는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끼고 말했다. 스친 위력으로만 볼 때 그 자리에서 손을 내질렀다면 시즈의 머리가
박살나기 전에 그가 고기산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냥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게 레소니를 산산조각 내버린 바람이라고‥.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다."
"앞의 물음에 대해서라면 당연히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생명의 무게를 알고 있습니다."
"!"
원하던 시즈의 대답을 들은 헤라즈는 어린애에게 따귀라도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얼굴을 가
린 채 큭큭대더니 점점 크게 웃어댔다.
"우하하하핫!"
보를레스와 아리에는 알 리가 없었다. 아니, 시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래. 네가 지금 한 대답‥은 내가 너를 구하면서 했던 말이었지. 그런데 내가 한 의미는 타인의 생명이 가지는 무
게였다. 그런데 넌 자신의 생명이 가지는 무게란 말이지?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나‥.'
"큭큭큭‥. 아주 재미있는 대답이구나. 매우 만족스럽군. 받아라. 성투사들에게도 한 달에 한 번 밖에는 지급되지 않
는 치료물약이다. 트롤의 피와 신관 수십 명의 신성력을 응축시킨 것이니 상처가 바로 낫는 것은 물론이고 왠만한
독도 해독할 수 있을 거다. 파상풍 따위는 말할 것도 없지. 그 정도로 네 생명을 포기하려고 했으면 교단에 공이라
도 하나 추가하려고 했더니 오늘은 관둬야 겠군. 너희가 찾는 마법진은 남쪽으로 좀더 내려가야 된다. 수풀에 가려
져있더군. 내가 표시를 했으니까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야."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치가 다 떨리는군요."
다른 사내에게 업혀 도망가면서도 시즈는 헤라즈를 갈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쏘아봤다.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
자 헤라즈는 키득거리면서 중얼댔다.
"시즈, 생명의 무게를 안다면 좀더 강해지게나. 타인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을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