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악장 붉은 산양과 푸른 물병.
후세의 역사가들이 '봄의 혈사'라고 이름 붙인 사건으로부터 1 여년의 시간이 흘러 여름이 되었다. 많은 '혈사'들에
비해볼 때 '봄의 혈사'는 뿌려진 피는 매우 적었지만 그로 인한 엘시크의 피해는 막대했다. 세이서스 라는 성(姓)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은 마법과 학문에서 대륙을 움직이던 두 별을 동시에 잃음을 뜻했다. 엘시크의 학문과 마법이
막대한 피를 흘린 것이다. 이를 수혈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녀석들‥. 또 살아남았다며?"
"그래! 덕분에 괜찮은 건수는 죄다 놈들한테 돌아간다고! 우리는 남은 거나 해먹는 거지. 솔직히 겨울이랑 봄의 의
뢰들은 좀 힘드냐?"
"그 놈들은 상금 리스트 1위인 주제에 그런 것까지 싹쓸이하잖아. 전생에 돈 못 만져보고 죽었나? 그런데 여기 음
식 끝내주는 군."
"그러고 보니 정말 좋군. 고기가 쫄깃쫄깃한 게 탄력이 있는데!?"
여름이 오면 용병국의 사람들은 분주해진다. 늦겨울과 초봄에는 식량란으로 인하여 잠시 중단되었던 분쟁이나 전쟁
의 막이 다시 오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배가 슬슬 불러오면 인간은 욕망을 부풀려 분쟁을 만들었다. 이런 본능적인
광경은 전쟁이 일어나는 곳뿐만 아니라 용병들이 모여서 술과 음식을 즐기는 용병 식당에서도 볼 수 있었다.
값싼 용병식당치고는 고급 고기가 나온다는 걸 눈치챈 두 용병은 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이봐! 여기 요리사 누구야!?"
용병들은 대부분은 빵빵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한다. 그러니 단 두명의 용병이었지만 이들이 난동을 부릴 듯 하자
식당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손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들은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이쁘장한 웨이트리스를 원했으나 아쉽게도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그 음성이 젊은
두 용병만큼이나 우렁차서 그들은 움찔했으나 곧 눈을 부라리고 소리쳤다.
"이거 음식을 어떻게 하는 거요? 머리카락이 들어가 있잖아!"
"내 거에도 들어가 있어! 만든 요리사 불러와!"
그들이 음식에서 꺼낸 머리카락을 유심히 살펴보던 노인은 씨익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둘에게 속삭였다.
"음식이 맛있어서 돈 안내고 한 번 더 드시려는 군?"
'헉! 어떻게?'
"우리 식당이 재료가 값에 비해서 매우 고급이지. 게다가 요리는 수준급이라서 그런 손님들이 꽤 있지요. 난동을 부
리지 않겠다면 한 그릇 더 드리겠소."
상당히 유혹적인 제의였으나 용병으로서의 오기가 있는 법. 어찌 돈 없어서 수작 부릴려고 했다고 인정하겠는가. 오
히려 그들은 소리를 더욱 높였다.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머리카락이 들어갔다니까! 요리사 나오라고 해!"
"반어터, 무슨 일로 이렇게 시끄러워요?"
그들의 난동에 더 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주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놀랍게도 웨이트리스로서의 희망사
항을 꼭 맞춘 미소녀였다. 서서히 소녀에서 여인으로 탈바꿈을 하는 과도기(?)에 들어선 그녀는 미녀로서의 색기와
미소녀로서의 앳된 순수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목덜미과 귀를 조금씩 덮
어 귀여움을 배가시켰고, 동그랗고 무표정한 눈매 안에서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는 물기가 살짝 배인 입술과 함께
잘 익은 사과를 연상시켰다.
"무슨 일이세요?"
요리사의 미모에 넋을 놓고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용병 둘은 조금 더듬거리며 말했다.
"여, 여기 머리카락이 빠져 있었소. 흠흠."
"어디 봐요. 으음‥. 이건 제 머리카락이 아닌데요. 갈색인데다가 곱슬 머리에요. 전 검은 생머리인걸요."
"열을 받아서 탈색과 구브러지는 작용이 일어난 거요. 오징어 쪼그러드는 것처럼."
"아저씨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허리에 양손을 턱 올리며 쏘아보는 모습은 투박한 용병들에게 있어 애교일 뿐 그리 위협이
되지 못했다. 솔직히 두 용병의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주문했던 요리는 차가운 육수와
고기를 곁들인 국수였다. 둘은 자신의 논리성이 투철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이해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안 통하자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막 의자를 집어들어서‥
끼익‥.
"아아 배고프다. 시즈, 뭐 먹을래?"
"‥양념 안된 베이컨."
"반어터! 들었죠? 양념 안된 베이컨이래요. 난 간장에 하루종일 조린 베이컨!"
"‥‥."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매우 대조적인 모습의 두 사람은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조용한 식당의 분위기를 느끼고 의아
하게 원인지를 바라보았다. 침묵을 깬 것은 막 들어온 두 사람 중에서 키도 작고 생김새도 곱상한 청년이었다. 그는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회색의 긴팔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표정이 어찌나 냉랭한지 절대로 더워 보이지 않았다. 게다
가 막 눈이 내린 듯한 은백색의 머리카락과 수정을 박아넣은 듯한 눈동자. 청년은 외모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리에가 왜 주방에서 나와 있습니까?"
자세히 들어보면 그리 낮고 굵은 목소리도 아니었고 오히려 여자만큼이나 청아한 목소리에 정중한 어투였다. 그런
데도 난동을 부리고 있던 두 사내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이 움추러드는 걸 느꼈다.
"아! 시즈, 보를레스! 언제 도착한 거에요?"
"방금 전에 도착했지. 그런데 저 두 사람은 뭐하는 거야? 의자를 옮기는 중인가?"
"‥‥."
이번에 물어온 사내는 덩치가 거의 2미터에 육박하는 장신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음성과 어조에서 풍겨나는 느낌은
작은 청년의 정반대였다.
"아하하하. 네. 여기에 내려놓을 생각이었죠. 그럼 주인장, 그리고 요리사 아가씨. 많이 파시오."
그렇게 난동을 포기하고 의자를 내려놓은 사내는 동료의 팔을 끌고 재빨리 식당 밖으로 나갔다.
"왜 도망치듯 나오는 거야?"
"그 녀석들이야."
"그 녀석들이라니?"
"그 녀석들 말이야. 의뢰 순위 리스트와 상금 리스트를 동시에 거머쥐고 있는‥."
"우리 장사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그?"
"그래. 그룹명 '세이서스'. 별명은 '노래하는 두꺼비와 침묵하는 개구리.'"
"‥‥."
"어서 가자."
난동을 부리던 두 용병이 비루먹은 말의 흉내를 내며 사라지자 식당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막 들어온 두 사내는
엘시크에서 도망쳐 나온 보를레스와 시즈였고 여자 종업원은 백작 영애였던 아리에였다. 당시 시즈는 다른 사람들
의 생명을 희생하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무력감을, 보를레스도 역시 마지막에 헤라즈에게서 느낀 무력감을 느꼈
다. 공통의 과제를 찾은 그들은 미친 듯이 힘을 쏟고 기술을 수련할 장소를 찾아다녔다. 온몸이 엉망진창이 되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그들의 이름은 용병국 서부의 용병들 사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제 거리가
되어버렸다.
"미안한데 아까 못 들었거든. 주문이 뭐였죠?"
"‥‥.
"난 간장에 푹 조린 베이컨. 시즈는 양념없이 구운 베이컨."
"시즈는 점점 싱겁게 먹네?"
주문서에 식단을 적는 아리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냐하면 짜게 먹는 사람보다 싱겁게 먹는 사람은 미각이
매우 까다로워서 취향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아, 맞아. 본인의 말로는 본래의 맛을 느끼기 위해서라는데 이렇게 본래의 맛을 찾다가는 아예 날생선과 날고기
를 달라고 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아."
"보를레스는 편리해요. 이렇게 짜게 먹다가는 곧 음식 대신 소금만 한 부대 가져다주면 될 것 같거든요.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기다려요."
오랜만에 두 사람을 봐서 기분이 좋은 아리에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생명의 무게. 용병이라는 직업으로 1년을 살면서 시즈의 머리 속을 괴롭히던 문제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
서 그는 생각들을 정리해 나갔다.
'나 때문에 희생된 이들의 생명은 무척 값지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난 부담감을 가졌지. 나의 생명만큼이나 귀
중하기에 그들을 위하여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나는 아무 생각없이 적병의 목을 날리고 목
숨을 갈랐다. 하지만‥ 그들의 목숨에 대한 댓가로 내 생명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이해
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보다 우선인 것이다. 그렇
기에 나는 적병의 목을 주저없이 자른 거지. 그의 생명보다 나의 생명이 더 중요하기에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목
숨을 머리면서 남겨놓은 편지의 그 말 때문에, 사랑한다는 그 말 때문에 점점 내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 되어간다.'
"시즈, 이제는 마법을 안 쓰는 모양이지. 천천히 마법사라기보다는 용병의 티가 나."
끄덕.
'혹시 내가 레소니에게 느꼈던 감정이 사랑이었을까? 대신 죽을 만큼 좋아하는 감정이었나?'
"그런데도 아직은 학자의 본능이 남아있나봐? 그렇게 어디서나 생각을 멈추지 않는 걸 보면‥. 혹시 싸울 때도 생
각하면서 싸우니?"
끄덕.
"아유! 제발 말 좀 해봐. 요즘 머리가 너무 길어지지 않았어? 등까지 내려오네. 내가 잘라줄까? 면도도 해야겠다."
끄덕.
거의 10일만에 시즈와 단둘이 외출을 하게 된 아리에는 설렘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이것저것을 질문했지만 곧 포
기하고 말았다. 용병국에 도착한 이후로 그녀와 시즈는 마치 인격을 맞바꾸기라도 한 것 같았다. 쾌활하면서도 온화
한 성격은 시즈에게서 아리에에게로. 무심하고 냉랭한 성격은 아리에에게서 시즈에게로. 그렇지 않아도 투명한 눈동
자와 은백의 머리카락 때문에 사람같지 않은데 행동마저 인형과 비슷했다. 그녀는 예전에 자신을 돌봐주던 유모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녀가 어딜 가든지 잘 따라다니고 시키는 것도 잘했다.
시키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큭큭큭!"
멀리서 곤혹스러워하는 아리에를 보고 있던 보를레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벽에 손을 기댄 채 키득거렸다. 그러나
제 3자의 관점에서 보면 키가 커다란 남자가 벽을 부여잡고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은 간질의 초기 증상과 틀림없었
다. 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남자들은 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시즈와 매일같이 있어서 익숙해졌지만 자주 있지 않는 아리에는 이해하기가 좀 힘들 걸.'
보를레스의 경험으로 볼 때 예전과 다름없이 성격은 친절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흘려듣는 법이 없었다. 다만 겉으
로 드러나는 감정표현이 없을 뿐이었다. 말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에게 '기초마법학의 법칙들을 열거해
봐.'라고 말하면 아마도 밤이 새도록 주절대고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필요 이하의 대답에 있어서는 입을 여는 걸
피했다.
'문제는 아리에의 질문이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거지. 큭큭.'
그나저나 이대로 가다가는 반어터가 사겠다는 맛있는 저녁을 거절하고 미행을 하는 까닭이 없어질 게 분명했다.
'할 수 없지. 내가 나서주는 수밖에.'
보를레스는 바닥의 손가락만한 돌멩이를 주어서 힘껏 던졌다. 그의 칼 던지기 실력이 용병들 중에서도 수준급이었
기 때문에 빗나갈 일은 전혀 없었다. 시즈가 걸음을 멈추는 순간, 보를레스는 깊은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시즈, 왜 그래?"
아리에는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가던 중 갑자기 손을 잡고 있던 시즈가 멈추자 뒤로 넘어질 뻔한 몸을 겨우 가누고
물었다. 시즈는 한 쪽 눈을 약간 찡그리고 귀 뒤에 대고 있던 손을 보여주었다.
"앗! 피잖아!? 괜찮아?"
도리도리.
그는 솔직했다. 아리에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뒤졌지만 붕대와 상처에 바를 약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피가 아
리에의 판단능력을 흐리게 했기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던 시즈는 손을 꼭 잡고 보를레스가 돌
을 던졌던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도착하자 시즈는 아리에의 손을 놓았다.
"여기보다는 어서 의사한테‥. 아!"
아리에는 시즈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흰 빛을 보고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빛나는 손을 상처에 가져다대
고 시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상처치료‥."
피가 멎자 아리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하고 그녀가 생각하는 사이 시즈는 다시 인
형 상태로 되돌아가 있었다.
"또 그 표정이 되어버렸네."
끄덕.
이제는 아예 오기가 나기 시작했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아리에는 눈을 작게 뜨고 말했다.
"시즈, 저녁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얼굴 좀 풀어."
끄덕.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끄덕.
아리에의 질문들은 그렇게도 가치가 없는 것밖에 없었을까? 그녀는 20번이 넘는 질문을 하면서 시즈에게서 끄덕임
이외의 대답을 받을 수가 없었다. 포기를 해버린 아리에는 중얼거렸다.
"휴우‥. 그렇게 죽어버린 사람들이 중요한 거야? 가끔은 함께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웃어줘도 되잖아‥."
멀리서 숨어서보고 있던 보를레스는 갑자기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말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시즈에게 변화를 일이킨 것은 아리에였지만 보를레스와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시즈의 미소를 처음으로
보기 때문에 더 했다. 창백한 피부에 살짝 늘어난 붉은 선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뤘고 원래보다 약간 크게 뜬 눈동
자 속에서 차가움은 사라지고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안개 속에서 보이는 듯한 몽환적인 미소.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듯 하던 미소는 찰나에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에는 한동안 술에 취한 듯 멍
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19세 소녀? 여인?은 볼을 붉히고 다시 시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또르르. 그녀의 시선을 피해 굴러다니는 수정. 결국은 얌전히 아리에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아리에가
물었다.
"시즈, 키스해줄까?"
그녀의 어조가 말의 내용과는 달리 굉장히 쾌활하여 누구라도 장난이라는 걸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시즈는 아무래
도 무리였던 모양이다. 꽤나 고민하는지 눈을 깜빡거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눈동자가 데굴거리는 게 오히려 장난친
아리에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싶었을 때,
끄덕.
"에? 정말?"
그녀는 대답 대신에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고 싶어 자신도 약간
벌린 아리에는 순식간에 입안에 들어와 얽히기 시작한 혀의 감촉에 정신이 없었다. 숨어있던 보를레스도 긴장감을
가지고 지켜볼 정도로 진한 입맞춤이었다
"뭐, 뭐야!?"
입술을 뗀 수줍음이라는 감정을 떨치기 위해 아리에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크게 소리쳤다. 손으로 입가를
훔친 그녀는 그런 격렬한 입맞춤 후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나쁘지 않군이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할
수 있는 시즈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놓고 갈수는 없는 현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시즈의 손을 꼭 잡았다.
* * *
용병국은 이름대로 용병들을 사고 파는 곳 있었지만 상당한 국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용병국의 국왕을 비롯
한 지배세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용병들의 나라에 무슨 토지가 필요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필요하다'였다. 물
론 농경지라기보다는 도망자들의 자유지대로서 말이다. 용병은 분쟁이 없으면 망하는 직업인만큼 국가산업으로는
그 위험도가 컸다. 그렇기에 용병국은 용병산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즉시 농업 체제와 어업체제로 국가산업
을 잠시 이전하는 간교한 술책을 보였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변칙적인 국가정책을 뒷받침해주는 기본
자신은 바로 토지였다. 용병국은 자국 내에서 저지른 범죄만 아니라면 자유인이었다. 즉 타국에서라면 살인을 하던
반역을 하였든 간에 용병국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자유지대였다. 그렇다면 자유지대가 좀 넓어야 도망자들이 쉽
게 도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에 용병국의 국민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타국에
서는 범죄를 저지르고 용병국으로 도망가는 짓을 반복하는 치사하고도 야비한 죄인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
니었다. 용병국은 몇 개의 통로를 제외하고는 산으로 둘러 쌓여있어 공격경로를 예측하기가 쉬웠다. 그 말은 곧 방
어하기가 편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산을 넘자니 선악전투에서는 용병을 당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용병이라는
직업이 신분과 종족을 상관하지 않는 것이라 인간 외의 종족들의 도움도 대단했다.
그렇다고 상습적인 범죄자를 처단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용병국은 법적으로 청부살인을 허용했기 때
문이다. 그렇다‥. 청부살인은 합법이다‥.
"991 992 993 994‥ 1000타로운. 정확하게 지난 달 수익은‥."
"왜그래? 시즈. 뭐가 문제라도 있어? 자세하게 말해봐."
"어제 야시장에서 정확히 자정에 아리에한테 수정 목걸이를 하나 사줬는데 지난 달 지출로 넣어야 할까요?"
"아니, 이번 달 지출로 넣어. 그런데 자정까지 함께 있었다면 그 후에는 뭐했는데?"
"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골목에‥읍!"
"보를레스‥. 순진한 시즈에게 뭘 묻는 거죠?"
"핫핫핫! 아리에 왜 요리 준비를 하다말고 나왔어?"
"호호홋! 갑자기 오한이 일어나서 말이죠―. 시즈한테 수작부리지 마요!"
이렇게 시즈와 보를레스는 아침 일찍부터 반어터의 용병 식당에 앉아서 이번에 해결할 때 사용한 물품 등의 소비와
보상금의 수입으로 인한 한 달의 수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아마도 시즈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때가
아닌가 싶다.
"당신들이 바로 세이서스 입니까?"
그들의 움직임은 실로 번개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접수되는 즉시 빗자루 대용이
되어 테이블 위를 쓰는 오른팔과 반짝이는 쓰레기를 담는 갈색 주머니. 무표정한 시즈의 얼굴은 혹시 모를 의혹의
조각도 남기지 않는 천혜의 조건이었다.
보통 자신들의 그룹명을 부르는 사람들은 의뢰를 부탁하러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고객을 대하는 보를레
스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고 말투는 싹싹했다.
"여기 앉으시죠. 저희가 세이서스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고객은 찜통같은 여름에 천으로 눈을 제외한 얼굴을 모두 가린 여인이었다.
'사막의 나라에서 온 건가?'
"젊군요‥."
여인의 목소리와 눈매로 볼 때 그녀는 20대 초반에서 중반이었다. 의뢰를 받는데 왜 고객의 나이를 예측하냐고 물
을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용병은 의뢰의 내용을 듣고 의뢰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뢰인의 나이는 큰 상
관이 없었지만 보를레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돈! 이었다.
"못 미더우시면 다른 곳에 가서 의뢰를 하십시오."
"아니에요. 그대들이 분명 서부 제일의 용병, 세이서스라면 꼭 부탁드릴게요.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살인청
부입니다."
"살인청부는 용병국에서는 흔한 일거리입니다. 뭘 그렇게 뜸을 들이시죠?"
흔하기만 한가? 일의 난이도에 비해서 사례금도 많아서 편하게 부자되는 일거리였다. 솔직히 먼 이국 땅에서 전쟁
에 참여하고 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그게 저기‥."
"아니면 혹시 청부금이 부족하신 것 아닙니까?"
흠칫하고 놀란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찌푸린 보를레스가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설마 몸이라도 팔겠다는 심산으로 오셨다면 그만 두십시오. 저희는 노예매매 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다시 흠칫하는 여인은 아마도 거짓말을 못할 체질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알아차린 보를레스
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됩니다. 다른 용병들도 있으니 길드에 가서 알아보세요. 다른 용병들도 먹고 살아야할 게 아닙니까?"
만약 서부 용병 길드의 길드원들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가슴을 내리치다가 죽을 소리였지만 그는 태연스러웠다. 여
인은 보를레스에게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
"흑‥ 제발 부탁드려요. 제발‥ 흑흑‥."
막 주방의 준비를 끝낸 아리에가 나와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천으로 얼굴을 감싼 여인이 보를레스를 잡고 흐느끼
고 있었다. 신파극에나 어울릴 장면이었으나 곧 식당이 문을 열 시간이었기에 아리에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보를레스, 왜 여자를 울리는 거에요?"
여인에게 아리에는 한 줄기 찬란한 광휘 속에 서있는 구원의 여신이었다. 아무리 눈치를 보아도 눈앞의 우람한 사
내는 돈을 가져오지 않는 한은 부탁을 수락할 것 같지 않았고 처음부터 이때까지 무표정한 청년은 자신의 눈물로
움직일 감정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고속이동술에 비견될 정도로 빠르게 아리에에게 매달린 그녀는 더욱 애절하게 울음소리를 높였다.
아리에는 감정이 동했다기 보다는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백작 영애라는 게 믿어지지 않
을 정도로 의자를 시즈 옆에 놓고 털썩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다른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어디 의뢰 내용이나 자세하게 말해봐요. 나도 세이서스의 일원이니까."
"아리에, 아무거나 다 받아주면 수익이 남지를 않는다구."
"보를레스, 좀 조용히 해요. 그래도 의뢰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여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사막의 왕국 남부의 초원 지대에서 산양을 키우던 유목민의 외동딸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그녀 가족의 거주지에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사람이 죽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었던 그녀는 거주지로 데려와서 남자를 치료했다. 그가 깨어난 후의 이야기를 들으니 남자는 사막의
왕국에서 살인누명을 쓰고 용병국으로 도망을 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 남자의 상처를 돌봐주던 여인은 그와 사랑에 빠지고 남자는 어느 날 그녀에게 한 가지 청을 한다.
"내 비록 지금은 누명을 쓰고 쫓기는 몸이지만 용병국에서 부자가 된 후 언젠가는 그대를 데려가겠소. 그러나 나에
게는 용병국에 도착한다고 해도 사업을 할 자금이 없소. 그대는 내게 꿈을 주었으니 희망 또한 내게 주시오."
사랑에 빠진 여인의 눈에는 그 무엇도 남자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의 눈을 속여 그녀는 초원의 대부분을 팔아
그의 사업자금으로 내어준다.
부모가 크게 분노하고 집안은 크게 몰락했지만 그녀는 남자를 기다리며 참을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
이 지났다. 3년이 되던 작년에 용병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남자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저는 깨달은 거죠. 속았다는 걸‥."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세이서스 사람
들이 의뢰에 대한 승낙을 하기를 기다렸다.
"좋아요. 의뢰를 받아드리죠."
"하지만! 아리에!"
"뭐에욧! 보를레스!"
보를레스가 반대라는 의사를 밝히듯 벌떡 일어섰지만 아리에는 여인의 손을 꼭 잡고 쏘아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여인이 살인을 의뢰한 자의 이름은 프레페오. 큰 키에 적갈색의 머리와 품위있는 콧수염을 가진 절륜한 외모의 31
세 사내라고 했다. 그러나 용병 길드의 정보통들을 활용해봐도 30대 초반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일에 진척이 없자 보를레스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달 적자가 엄청나게 크겠군. 그 여자는 줄 돈도 없다고 했는데‥."
"자꾸 궁시렁 거릴래요? 보를레스와 시즈가 용병을 하는 이유는 돈이 아니라 힘을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그
러기 위해서 경험이 필요했거요. 이제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만큼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죠?"
대답은 '아니오'였다. 1년 간의 용병일로 강해지기는 했으나 하윌이나 헤라즈처럼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에 비
하면 세발의 피였다. 할 말이 궁해진 보를레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시즈, 무슨 좋은 방법 없니? 대륙의 현자라고 불렸던 너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수염은 기르느냐 자르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이미지를 확연히 변화시키지요. 특히 길렀을
경우는‥ 그 차이가 심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지?"
시즈는 투명한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수염을 잘라야 겠지요."
다음 날 용병 길드에는 아주 특이한 의뢰가 접수되었다.
- 적갈색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A 사이즈의 바구니로 부피를 계산하여 한 바구니 당 10 타로운씩
지급한다.
의뢰문을 보고 난 용병들의 반응은 가지가지 였다. 10 타로운이면 반어터의 용병식당에서 3개월은 먹을 수 있는 금
액이었기에 '돈 벌기 쉬워졌다.'라고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의뢰인은 분명 대머리 갑부일 것이다.'라는 추측
을 조심스레 내놓는 이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이제부터 적갈색 머리의 소유자는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적갈
색 머리카락을 가져오는 용병이 없어지자 아리에는 시즈에게 물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는 구별이 쉬울 테니 다시 정보를 수집해야지요."
그렇게 해서 용병길드의 정보통들도 특이한 의뢰를 받게 되었다.
- 문서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30대 초반인 조사하라.
모든 정보 수집이 끝났을 때 세이서스는 여인의 의뢰에 맞아떨어지는 남자를 찾을 수 있었다. 조사된 사람 중에서
4년 전 사막의 나라에서 도망쳐온 남자는 1 명밖에 없었다.
"우와‥. 집이 굉장히 크군."
무려 5층은 되어 보이는 저택을 바라보며 보를레스가 감탄사를 토했다. 용병들 중에는 재산이 많아도 거대한 저택
에서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에 끼어들어 흙바닥에서 자는 사람들이었고 굳이 좋은 침대와 자신을
보호해줄 저택은 그리 필요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갑부라면 호위로 용병을 꽤나 두었을 거야. 그것도 실력있는 놈들로‥."
보를레스는 한 장의 보고서를 훑어보며 이번 의뢰를 해결하는 게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보고서
에는 바클로시크 라는 대상인에 대한 설명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바클로시크의 저택 2층을 지키고 있던 용병, 쿠엔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아니, 기척이라기보다는 바람이라는 표
현이 맞을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가 온몸을 슥하고 훑고 지나가는 느낌.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는 바람이 불어온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시즈가 그렇게 말하고 계단으로 올라가 버렸다. 따라가려는 아리에를 만류하며 보를레스가 말
했다.
"기다려. 녀석은 실력자야. 남의 목숨을 지켜줄 수 없을지 몰라도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나도 이제 내 목숨을 지킬 수 있을 정도는 되요."
"글세‥."
혓바닥을 내밀어 보인 아리에는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시즈가 사라진 방향을 힐끔힐끔 거렸다.
그 시간, 쿠엔은 자객과 대적하며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자객은 별빛과 같은 색깔의 눈동자와 머리칼을 가진 청
년이었는데 섬뜩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은 벌써 소리쳐서 위험을 알려야 했
지만 만약 신경을 풀어버리는 순간 실처럼 잡고 있던 청년의 기운을 놓쳐버릴게 분명했다.
'그럼 난 죽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쿠엔은 목덜미에 느껴지는 예기에 고개를 숙였다. ‥‥ 놀랍게도 소리나 기척이 없는 것은 자
객뿐이 아니었다. 그의 검 또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반응이 늦어질 수밖에‥.
'왼쪽!'
분명히 느껴졌다. 손에 힘을 주어 내지르니 하지만 곧 그는 목젖을 베어오는 자객의 모습을 보며 착각이었다는 걸
알았다. 왼쪽으로 느껴졌던 것은 검집이었다.
바클로시크는 그 날따라 불안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전날 꿈을 꾸길 그 여자가 자신을 찾아오는 꿈이었던 것
이다. 무서운 여인‥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머리를 감싸쥐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3
명의 인영이 들어왔다. 그들 중 장신의 사내가 말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한 살인 청부를 받고 왔소."
"나는 상인으로써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누구의 의뢰를 받고 오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사내는 코웃음치며 반문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병들이 이토록 많은 거요?"
바클로시크의 사병들은 하나같이 뛰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 이토록 가볍게 뚫고 들어왔다는 것은 이 3인
이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숨겨진 비밀을 그들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사막의 왕국에서 유목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작은 초원이었지만 나는 사는데 큰 무리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굉장히 20세쯤 먹은 젊은 여인이 찾아와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붉은 산양을 한 마리을 가지고 있는데 능력 또한 겉모습만큼이나 대단하답니다. 풀을 뜯어먹을 때 침을 흘리
는데 그 침에 식물에게만 미치는 재생능력이 있어 산양이 먹은 자리는 하루만에 풀이 다시 솟는 답니다. 그 풀은
자생력이 뛰어나서 사막도 다시 초원으로 만들어주지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내게 나의 좁은 초원보다 수십배는 큰 초원을 보여주었지요. 그것을 본 나는 욕심이 났서 말
했습니다.
"그 산양이 그렇게 좋다면 나에게도 좀 빌려주시오. 당신은 이미 충분할만치의 넓은 초원을 가지고 있잖소."
그러자 여인은 내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지요.
"좋아요. 그렇다면 넓은 초원을 갖게 되면 댓가를 갚아야 합니다."
금방이라도 부자가 될 기분에 휩싸인 나는 당장 돌아와서 내 초원의 풀을 붉은 산양에게 먹였습니다. 그러나 이게
왠일입니까? 그 때까지만 해도 건강하던 산양이 픽하고 쓰러지더니 죽어버린 것입니다. 저로서는 안절부절못하여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그녀는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나타나서 붉은 산양이 죽은 책임을 물었습니다.
"당신이 나의 소중한 산양을 죽게 만들었으니 그 책임을 대신하여 당신의 초원은 나의 소유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그런 식으로 초원을 조금씩 넓혀왔던 것입니다. 나는 전부터 알고 있던 마법사에게 찾아
가서 하소연을 했지요. 이야기를 들은 마법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그녀는 매우 질이 나쁜 마녀임에 틀림이 없군. 아마도 그 붉은 산양은 마법에 걸린 양이 틀림없네. 내가 자네의 땅
을 되찾아줄 방법은 없지만 그녀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네."
마법사는 나에게 푸른 색깔의 물병과 붉은 루비 3개를 주며 말했지요.
"이 물병에 든 액체를 손 끝에 묻혀 그녀의 초원과 가장 가까운 사막에 손가락만한 막대기를 그리면 그 자리에서
초원이 만들어질 겁니다."
과연 그 말대로 했더니 초원이 만들어 졌습니다. 하루는 갑자기 사막에 생겨난 초원의 모습에 의아했는지 그 마녀
가 찾아왔지요.
"당신은 지난번에 나에게서 붉은 양을 빼앗아간 분이시군요. 그런데 갑자기 사막에 왠 조화인가요?"
나는 마법사의 조언대로 시치미를 떼고 말했습니다.
"어느 마법사께서 저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이 물병을 주셨답니다. 이 물병의 물은 어디에나 생기를 불어넣어 사막
을 초원으로 만들고 초원을 숲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녀가 뭔가를 생각하는 동안 나는 시범을 보이듯 계속 막대기를 그려나갔지요. 속아넘어간 마녀가 내게 말했습니
다.
"나는 꿈이 있는데 넓은 초원 사이에 숲이 들어가길 바래요. 그래서 그러니까 그대의 물병을 잠시 빌려주지 않겠어
요?"
난 망설이지 않고 물병을 빌려주었지요. 그녀는 자신의 초원 여기저기에 그 물을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물
에는 한 가지 마법이 더 걸려 있었는데 사막에 바르면 초원이 되지만 초원에 바르면 다시 초원이 사막으로 변하는
마법이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3일 한정이었죠.
잠시 후 자신의 초원이 사막으로 변하자 그녀가 길길이 뛰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당신의 물은 엉터리에요. 나의 초원이 죄다 사막이 되었으니 어떻게 할 거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물 때문이라면 내 목숨을 주겠소. 그대는 사막이 되어버린 당신의 땅을 주시오."
제의를 승낙한 그녀를 데리고 나는 원래부터 사막이었던 곳으로 갔지요. 그리고 처음에 했던대로 막대기를 그리자
사막은 초원으로 변했습니다. 나는 약속대로 초원을 얻었지만 그 마녀가 언제 날 위협할까봐 잠을 자지 못했습니
다.. 그래서 초원을 팔고 용병국으로 넘어온 것이지요. 사막의 왕국에서 초원은 토지 중에 가장 비싼 곳이기 때문에
초원을 판돈으로 난 이렇게 대부호가 될 수 있었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세이서스는 어이가 없었다.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시즈가
바클로시크에게 물었다.
"혹시 아직도 푸른 병을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바클로시크는 목걸이처럼 줄에 묶어 놓았던 푸른 병을 끌러 시즈에게 건넸다. 시즈가 살펴보니 푸른 병에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잠시 얼굴을 찌푸렸던 시즈는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당했군요."
"무슨 일입니까?"
인형처럼 표정을 고정할 것 같던 시즈가 눈썹을 찌푸리자 방안의 모든 이들은 불안해졌다. 바클로시크의 물음에 그
는 창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박쥐가 창에 붙어있다가 날아갔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 거에요."
"그렇다면?"
"당신을 노리는 게 아니라면 누구겠습니까?"
아리에와 보를레스가 서로를 마주 봤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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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야 했다. 바클로시크의 이야기에서 마법사가 직접 말했듯이 마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면 죽게 될 것이니까.
예전에는 프레페오라는 이름이었던 대상인은 5000 타로운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그들에게 주면서 마법사를 보호하고
마녀를 살해할 것을 청부했다.
"그녀가 마녀라면 빗자루를 타고 떠났을 거야. 지금가도 늦지 않았을까?"
아리에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보를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가면 늦는 거지. 아직 늦지는 않았어. 시즈, 지난번의 그 방법을 좀 쓰자."
끄덕.
시즈가 눈을 감고 마법의 의지를 모으자 주위에서 바람이 몰려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바람의 벽을 제외하고는
그가 마법을 쓰는 걸 보지 못한 아리에는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더 강해졌군. 마법을 쓰기도 전에 이 정도라니‥."
날이 갈수록 시즈의 바람과 마법은 힘을 더해갔다. 어떤 때는 함께 있는 보를레스도 겁이 날 정도였다.
"근육은 고래심줄보다 질기니 끊어짐을 모르네. 바람의 자유를 잠시 그대에게 부여하니 세상에 그대보다 빠를 자가
없어라."
주문을 영창하는 시즈의 두 눈은 밤하늘의 별을 차곡히 빻아넣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의 주문이 끝나자 마차는 그
야말로 번개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