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악장 사람들은 각성이라는 말로 새로운 가능성을 표현한다.
머리 위의 어두운 위압감을 사방으로 흩뿌리던 검은 요새, 글로디프리아도 밤의 고요함 속에서는 휴식을 취하는 것
일까.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 평온함이 감돌았다. 요새 안은 어둠이 성을 품은 것인지 성이 어둠을 품었는지 구별할
수 없이 어두웠다. 그런 한 치 앞의 사물도 구별가지 않는 밤의 장막을 헤치고 누군가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데린, 먼저 자도록 해. 난 아무래도 확인해야할 문서가 많이 남아있어서 조금 늦게 자리에 누울 것 같군."
"괜찮아요. 그 문서들은 이번 내전에 대한 것들이겠지요? 피로에 좋다는 이실진을 우려낸 차랍니다. 마시면서 하세
요. 여기 과자도 있어요."
자상한 정이 횃불에 일렁이는 그림자처럼 은은히 감도는 목소리에 데린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혼전에는 행동에서
나 말투에서나 무례하고 무정하게만 느껴지던 사람이 이제 그녀에게 있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가 되었다. 그런 사랑스런 이가 눈가에 그늘이 질 정도로 피곤해 하늘 걸 조금도 덜어줄 수 없는 게 미안했다. 더
욱이 남편의 책상 위에 놓은 많은 문서들의 상당수는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이 짙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 고마워. 이거 아내가 생기니 호강하는 걸. 핫핫."
"놀리지 말아요."
얼굴이 빨갛게 된 아내가 노려보자 젠티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차를 홀짝거렸다. 일년 전 천방지축에 완벽한 안하무
인의 자세까지 완비하였던 여인이 바로 데린이었다. 솔직히 당시에는 주위에서 쏟아지는 청혼에 못 이겨 '이 여자
라면 함께 평생을 살아도 심심하지는 않겠군.'이라는 생각에 냉큼 결혼을 해버렸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생각하면 '
이 좋은 걸 왜 진작 안 했을까?'라는 한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즐거웠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결혼은 자유로부터의
구속이다.'라는 외침들이 의외로 많이 쏟아지는 것으로 봐서 결혼 자체가 좋다기 보다는‥.
'내가 아내를 잘 만난 거지. 이제는 장인어른이 되돌려 달래도 안 준다.'
갑자기 탐욕의 기운을 주렁주렁 매달고 젠티아가 시선을 집중하자 데린은 그나마 붉기만 했던 얼굴이 더욱 시뻘겋
게 달아오르며 고온의 열기까지 방출했다. 혹시라도 더욱 뜨거워지면 까맣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녀는 서둘
러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젠티아!? 그나저나 해결책이라도 있는 건가요?"
"으음‥ 그렇지. 솔직히 다루고 계신 두 공작께서는 분명 옳은 말씀들을 하고 계시지. 둘 다 옳으니 양보하기도 힘
들겠고 양보를 못하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하고 젠티아는 안타까움으로 혼탁한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실베니아에 있어 그들은 유능했고 필요한 존재였다. 그런데 내정에 있어서 국가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서로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으니 나라가 흔들리는 게 당연했다.
젠티아도 어떻게도 말리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약간이라도 어느 쪽의 편을 들면 다른 공작의 입지가 확연히
줄어들게 분명했다. 그래서는 제대로 된 정치가 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낀 그는 이실린 차를 들이키고 있을 때였다.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각하! 아이킨입니다."
"들어와."
"아! 부인께서 계셨군요."
"후훗‥ 안녕하세요? 아이킨. 반가워요."
아이킨은 이제 나이 열네 살인 홍안으로 입고 있는 붉은 색 집배원 복장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곱슬
곱슬한 금발에 주근깨가 자잘하게 난 얼굴이 아무래도 해츨링 저리 가라 할 만큼 개구쟁이 같았지만 소년은 성숙한
입냄새(?)가 풍기는 어투를 사용했다.
"금슬이 좋으시군요. 각하의 뽀얀 볼이 보기에도 참 좋습니다."
하지만 데린이 생각하기를 젠티아의 진정한 후계자는 소년이 아닐까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점잖은 어조로 말하면서
어떻게 저런 능글맞은 표정을 지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그래. 고맙구나, 아이킨. 그 녀석은 어떻게 되었지? 네가 붙어있지 않으니 일은 끝난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각하. 조금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던데요."
"귀찮은 일‥!? 그건 됐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게 그 녀석의 일상사지."
쇠붙이처럼 널려있는 사건들을 시즈가 자석처럼 끌어당긴다는 걸 알고 있는 젠티아는 별 거 아니야! 하고 손을 휘
휘 저었다. 곤란한 표정을 아이킨은 지어 보였지만 곧 할 수 없다는 듯 그의 상관이 앉아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각하께서 말씀하신 그‥ ‥‥‥."
"뭐엇!? 시즈의 머리칼이 은색?"
누가 들을 세라 데린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던 아이킨은 젠티아의 비명과 다름없는 외침에 머리를 감
싸쥐었다. 화가 난 소년은 가까이 있는 찻잔을 집어들어 꿀꺽꿀꺽 삼켜버리고는 말했다.
"각하, 저한테는 중대한 사항이니 발설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하셔지 않습니까?"
"여기는 자네와 나, 그리고 내 사랑스런 아내 밖에 없는데 무슨 걱정인가. 그리고 자네가 방금 전에 마신 거 내 꺼
야."
"토해드릴까요?"
"‥그냥 소화하게. 그건 그렇고, 이제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 단 말이지?"
"그런 것 같더군요. 얼마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제하던 마법을 요즘은 가볍게 쓰고 있습니다."
'봄의 혈사'가 일어난 지 1년, 그 동안 젠티아가 이 작은 밀정의 눈을 통해 시즈를 간접적이나마 바라보고 있었다.
용병국으로 도망간 이후 얼마나 그가 고통스러워했던가. 소년의 설명을 들으며 자신의 머리가 얌전히 갈색이라는데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을 정도였다.
"그래‥. 놀랍군. 벌써‥ 그 자리에 와 있다니 알았다. 보고할 내용은 그게 다 인가?"
"예, 각하."
"잠깐‥. 그런데 왜 자꾸 남의 걸 집어먹는 거야?"
"뱉어드릴까요?"
"‥‥."
아이킨이 혀를 내밀고 정확치 않은 발음으로 묻자 젠티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을 찌르는 억울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펜대가 부러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됐어. 삼켜."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각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소년은 어딘가 승리한 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나가고 나자 데린은 남은 과자를
입에 넣으며 암울한 시선을 보고서에 던지는 젠티아를 보듬어 안고서 위로해야 했다.
"그런데 젠티아."
"응?"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뭔데!? 나 졸려."
"시즈님의 머리카락이 은백색이 되어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무슨 중요한 사항이죠?"
"일종의 각성이지. 전에 말했지? 우리 네 사람에 대해서‥."
"네. 불, 대지, 물, 그리고 바람."
"그래. 우리는 자신이 가진 의지에 맞추어 눈동자의 색과 머리색이 바뀌지. 나의 머리카락이 토지의 갈색인 것처
럼‥. 만지지맛!"
"신기한 걸요‥ 싫어요?"
"아니. 그래서 불은 검붉은 머리, 물은 청은색, 그리고 바람은 은색의 빛깔을 띠지. 그런데 문제는 현재 각성한 음유
술사는 나 밖에 없어."
"흐음‥."
"보통은 어떤 심적인 충격과 깨달음 같은 계기가 있어야 하지. 물의 의지를 가진 아릴 같은 경우는 나와 불인 '그
녀석'이 너무 감싸줘서 겉은 각성 같지만 속은 전혀 아니야. 그래서 조금이라도 한계를 넘어서면 무리가 오겠지. 그
리고 불은‥ 각성했지. 하지만 각성했다고 보기 어려워. 불은 바람이 없는 한 완전한 불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아마 '그 녀석'이 시즈를 만난다면 몰라도 아니면 영원히 힘들겠지. 마지막으로 시즈는‥ 가장 짧은 시간동안 많은
파도와 폭풍을 지났으니‥ 바람이 각성한 거지."
"‥‥."
"데린? ‥데린? ‥‥ 자잖아‥."
그는 그렇게 허탈해 했다.
* * * * *
삼인 일조의 용병단, 세이서스가 어두운 밤의 경계와 용병국의 국경을 넘어 사막의 왕국, 볼케아스로 향하고 드로안
부부가 침대에서 잠을 청할 무렵, 세이서스의 의뢰인이자 의뢰대상이기도 한 여인은 이미 지팡이로 목적지에 도달
해 있었다.
흰모래의 대지 위에 어울리지 않는 불순물처럼 마법사의 유르트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여인의 눈은 불을 뿜었다.
허공을 스치는 그녀의 기척을 들은 것일까. 스르륵하고 문이 열렸다. 사람이 직접 열지 않았다는데 사물이 움직이는
걸로 보아 주인이 마법사인 게 틀림없었다. 듣기만 해도 상당히 오랜 시간에 노출되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목소
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소. 들어오시오, 파마리나."
"‥‥."
"어서 들어오시오. 모래바람이 들이치는 구려."
밖으로 몇 마리의 낙타와 산양이 매어져 있는 유르트는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햇볕을 방어하기 위해 펠트를 비롯한
밝은 수직물로 짜여져 있었다. 파마리나가 안으로 들어가자 수학자나 연금술사들이 좋아할 기하학적 무늬가 가득히
채워진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 합사장식 양탄자는 별다른 모피를 덮지 않아도 따스함과 안락함을 제공할
게 틀림없었다. 여인이 눈을 힐끔거리며 실내의 물품들을 살피자 방금 전까지 실을 뽑고 있었는지 돌아가던 물레를
멈추고 노인이 말했다.
"허허‥ 뭐가 그리 신기하오?"
"당신같은 마법사의 유르트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게 신기하군요."
"그럼 마도구로 가득히 채워놓았을 줄 알았소?"
"뭐‥ 좋아요. 남의 유르트 속 내부사정까지 신경쓸만큼 나도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까‥. 아크로프디, 당신은 내가
찾아오는 걸 기다렸다고 했으니 왜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겠군요."
"물론이오. 그대도 알고 있다시피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점성술사니까 말이오."하고 노인은 품에서 몇 장의 카드를
꺼냈다. 지나온 세월을 황금빛으로 도금한 이빨을 내보이며 씨익 웃는 모습이 마치 '어디 점을 한 번 보시겠소?'하
고 묻는 듯 했다. 그러나 파마리나는 만면에 가득히 비웃음과 경계심을 드러내고 지팡이를 내밀었다. 옅게 그윽한
향기가 흘러나와야 할 자단목의 지팡이에서는 향기 대신 푸른 안개를 내뿜었다. 노인이 기겁을 하여 피하자 안개는
카드와 함께 물레를 삼키고 함께 자취를 감췄다.
"쓸데없는 짓 말아요, 아크로프디. 여우보다도 그대가 뇌를 굴리는데 능숙하다는 걸 스승님한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어요. 당신은 스승님을 피해 도망 다닌 주제에 스승님이 돌아가시자 그녀의 제자인 나의 일을 방해하는 건가요?"
"허허‥ 어째서 그대는 그대의 스승이 죽자마자 내게 방해받을 짓을 하는 건가? 어허허‥ 헛!"
껄껄대며 웃으려던 아크로프디는 여인의 지팡이에서 토해진 한 줄기 번개를 피하기 위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파마리나가 눈에 힙을 주고 쏘아보며 소리를 높였다.
"장난치지 말아요! 난 스승님보다 강해요. 당신이 날 방해하고도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그대가 나에게 무언가를 남겨줄 정도로 마음이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어차피
내가 거둬야 할 업보 중에 하나였으니까. 그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쉽게 죽어줄 수는 없소. 더 이상 나의 친구
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대처럼 악독한 마녀에 의해 희생당하면 곤란합니다."
"호호호. 바보 같군요. 당신의 친구는 이미 내가 청부한 자객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어요."
천둥이 유르트의 천을 뚫고 둘의 귀에까지 와 닿았다. 아마도 밖은 비가 오고 있으리라. 아크로프디는 다시 품에서
카드를 꺼내며 미소지었다.
"벌써 잊은 모양이구려. 나는 미래를 조금 훔쳐볼 줄 안다오. 그들은 어느 게 옳은 선택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
오. 새로운 손님들이 오기 전에 그대를 제압하겠소."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네 장의 카드를 던졌다. 표면에 푸른빛이 감도는 게 칼과 같은 예기를 품은 마력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확신한 파마리나는 지팡이에 걸려있는 부양의 힘을 이용하여 뒤로 멀찍이 피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조금 떠있는 모습이 마치 여인의 강대한 마력을 과시하는 듯 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이들은 보통 자신의 미래는 볼 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정답이에요. 당신은 그들이 오기
전에 죽을 테니까‥."
지상에서 번개가 천상으로 솟구쳤다.
숲은 초원으로, 초원은 사막으로. 용병단 세이서스는 마차가 부서지지 않은 게 천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칠
게 말을 재촉했다. 조금 전부터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빗발이 내리치기 시작하자 쓰러질 것 같던 더위는 사라지고 온
몸이 아릴 듯이 추워졌다. 아무리 의뢰로 인한 많은 역경으로 단련된 시즈와 보를레스였지만 이토록 갑작스런 기온
변화에 적응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한 여름 내륙 지방에서 입는 의복 - 보를레스의 경우는 반팔이다. -을 재주껏
여며며 코를 훌쩍이는 작태가 너무나 처량하여 의뢰 수락을 적극 주장한 아리에는 미안한 마음을 샘솟았다.
"모두 미안해. 내 잘못이야."하고 아리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의뢰가 힘들다는 것은 둘째치고 죄도 없는 무고한
이를 죽일 뻔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있어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불필요하고 위험한지 절감했
다.
"아니야. 꼭 해결해야할 의뢰였어. 대상이 반대이긴 했지만‥. 용병 상금 리스트 서부 지구 최고의 세이서스 다운
선택이었어. 쿨럭!"
보를레스의 말은 만약 마지막의 기침만 없었다면 위로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아리에는 완전히 풀이 죽
어버렸고 연신 콧물만 훔치던 시즈는 뭐가 생각났는지 품에서 구슬을 세 개 꺼냈다. 보기만 해도 청량함을 느끼게
만드는 푸른색의 자그마한 구체는 안에 무슨 액체가 들어있는지 흔들 때 찰랑거리는 감각이 손끝에 남겼다.
"바클로시크 씨에게 마법사가 주었다는 거지? 무슨 물건이야?"
쉴 새 없이 말을 재촉하면서도 보를레스가 뒤를 돌아보며 묻자 시즈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빗줄기 사이
로 유난히 격돌하는 번개의 집합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곧 알 수 있을 겁니다."
사막은 비가 오지 않기에 사막이 되어버린 토지. 어찌 보면 사막은 비가 올 때 그 본연의 푸름으로 장식할 수 있는
땅으로 조금이나마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없이 갈라진 땅의 조각들은 비와 함께 도착한 방문자를 환영하듯
그들의 발걸음에 까칠한 축복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미리 도착해있던 다른 방문자는 새로운 이들이 영 꺼림칙했다. 그러니 말투 또한 고울 리가 없었다.
"당신들, 의뢰는 잘 처리했나요? 수락한 의뢰를 처리하지 못한 것은 아니겠죠? 서부 최고의 용병단, 『세이서스.』"
"우리가 처리하지 못하는 의뢰는 거의 없소. 당신이야말로 각오했으리라고 믿소. 살인청부의 의뢰내역이 거짓일 시
에는‥"
"거짓일 시에는? 거짓일 시에는 어쩌겠다는 거죠?"
여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깔고 보를레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모래 언덕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아래에
서있는 보를레스들은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의외로 열 받는군.'이라고 생각하며 보를레스는 검을 뽑아 여
인을 겨누고 외쳤다.
"용병의 철칙을 무시했으니 그 대가는 검이 말해줄 거요. 마녀, 파마리나."
"호호호호! 아크로프다도 날 당해내지 못했는데 감히 당신들 따위가 날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요? 어리석군
요. 난 힘이 없어서 당신들에게 의뢰를 맡겼던 게 아니에요. 냄새를 맡은 일은 당연히 사람보다 개가 잘하지 않겠어
요?"
그녀가 자신만만한 것은 당연했다. 숙적이라고 생각했던 아크로프다가 시즈의 품에서 마지막 남은 숨을 힘겹게 들
이키고 있었으니까. 가슴을 들썩이던 노인은 얼굴에 부딪히던 빗줄기가 뜸해지자 눈을 힘겹게 떴다. 희미하게 보이
는 은발의 머리카락과 수정의 동공. 사막처럼 메마른 그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오오‥ 그대가 바로 예정된 바람이구려. 예언의 증표, 예언의 시선! 이 아크로프다는 그대의 방문에, 함께 찾아온
죽음마저 환영하고 싶을 지경이오."
시즈는 늙은 마법사의 대부분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흰 수염과 얼굴의 곳곳을 장식하
고 있는 주름, 그리고 마법사라는 사실이 헤트라임크를 떠올리게 했다.
"아크로프다님. 이걸 기억하십니까? 바클로시크 씨는 당신에게서 받았다고 했습니다."
시즈가 푸른 구슬을 꺼내자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쥐었다. 확인의 일종인지 노인은
어린아이처럼 구슬을 흔들어 보고는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오랜 지기를 본 사람처럼 말이다.
"이 구슬은 『생명의 구슬』이라고 합니다. 사막의 왕국을 모두 녹지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작은 오아시스 정도는
만들어줄 겁니다.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사막의 작은 물웅덩이는 밀림의 큰 늪지만큼이나 많은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탐내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특히‥."
"생명의 구슬을 당장 내놧!"
파마리나의 고함 덕분에 아크로프다는 한 마디 정도의 힘겨운 입술 노동은 덜 수 있었다. 그러나 파마리나의 행동
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 지팡이의 움직임에 따라 불기둥이 생성되었고 그것은 점차 뱀의 형상을 띄고 줄기
를 꼬며 허공을 기어왔다. 놀란 세이서스들이 뒤로 물러서며 피할 준비를 하자 아크로프다가 시즈에게 말했다.
"마족의 힘도, 신의 힘도, 생물에게는 생명에 미치는 힘이오. 생명의 구슬을 내밀어 방어해보십시오."
다시 시즈가 구슬을 건네 받아 하나를 내미니 먹이를 노리던 불꽃의 뱀이 감히 덤비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았다. 두
개를 내밀자 반대로 위협을 받는지 움직임이 점차 둔해지기 시작했고 마지막 구슬도 함께 내밀자 그물에 묶인 것처
럼 꼼짝도 못하고 발버둥치더니 소멸됐다.
"감히!"
마법이 효과도 없이 사라지자 파마리나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불의 뱀'은 상당한 마력을 요하는 마법이
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공격을 못하자 보를레스가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모래 때문에 그의 움직임이
조금 둔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통 여인의 운동신경을 가진 파마니아에게는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특출한 실력의 마녀고 마법사나 마녀들의 필수품인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지팡이에 비행 마법을 거는 게 마녀들의
특기가 아니겠는가? 잽싸게 지팡이에 올라타고 멀찍이 비켜버리자 보를레스는 애꿎은 모래바닥만 신경질적으로 후
려치고 얼굴을 찌푸렸다.
"후후후‥. 내 지팡이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어. 지팡이야, 저 애송이에게 혼을 좀 내주렴."
주인이 명령을 하자 지팡이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를레스에게 돌진했다. 마치 일류 전사의 움직임을 기억에 담고 있
는 듯 지팡이는 순식간에 보를레스의 검을 수 번이나 두들겼다. 보를레스로서는 도대체 어디에 눈이 달렸는지 조각
조각 분해를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도 실력으로는 일류가 아닌가. 지팡이는 몇 번 공격을 해보고 효과
가 없자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기회를 노렸다. 여자 마법사들의 특징 중 하나가 사물에 마력을 부여하면서도 다른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마녀'라고 이름 붙여진 여인들은 그 능력이 더 했다. 자식을 보는 듯
한 흐뭇한 심정으로 지팡이를 바라보던 파마리나는 한 손을 하늘로 다른 손을 땅으로 향하고 주문을 외웠다. 타는
듯한 시선이 시즈에게로 옮겨온 걸 보니 목표가 아크로프다인 모양이었다.
"마법에 『생명의 구슬』이 망가지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죠?"
아리에의 질문에 노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상처로 인하여 힘이 거의 남지 않는 그는 입을 여는 것도 힘겨웠다. 어
떻게든 시즈가 치료를 해보려고 했으나 체력이 없는 대상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파마리나는
주문의 영창을 끝냈는지 벌리고 있던 두 팔을 모아서 양손으로 인(印)을 만들고 내밀었다.
"마(魔)의 일곱 계단 중 둘째 계위를 지배하는 황금의 수렁이여‥. 공멸(共滅)의 계약서를 앞에 마련하고 생명의 한
조각을 마치며 비오니 계약의 증거로서 힘을 보여 대답하소서."
예로부터 마법사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마녀가 특히 배척을 받아온 것에는 그들이 너무나 강하다는 것도 포
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지향하는 『데몬demon의 힘』은 다른 말로 '초월적인 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이름이란 사물의 본질과 의지를 나타내며 자체만으로도 대상을 평가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이라는 걸 알고 있는
시즈는 마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파마리나의 마력이 상상할 수 없을 만치 강대하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겪어보지 않으면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 그는 마녀의 수인(手印)이 그린 허공의 원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검은 기운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법을 모르는 아리에조차 무심결에 침을 목젖
뒤로 넘기며 긴장했지만 시즈의 손가락 사이에 껴있는 세 개의 작은 구체를 힐끔거리며 두려움이 들이친 가슴을 달
랬다.
'하지만 『생명의 구슬』로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시즈는 구슬로는 파마리나의 마법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그렇지 않다면
소용도 없는 짓에 파마리나가 괜히 마력을 소비하는 것일 테니까.
"아리에, 아크로프다 님을 데리고 뒤로 물러나 있어요."
주위의 공기가 멈추는 듯한 목소리. 낮고 부드럽지만 힘을 가진 게 바로 시즈의 목소리였다. 더욱이 말이 적어진 현
재에 이르러서는 그 위력(?)이 더욱 강해져 아리에는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가 시키는 대로 노마법사를 안
고 뒤로 물러섰다. 아리에가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아서 파마리나의 마법원에서는 검은 기운이 강렬한 기세로 시즈
에게 퍼부어졌다. 구름의 이동을 연상시키듯 느린 듯하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시즈도 눈을 빛내며 바람의 의지 중 분노를 소환했다.
"혼돈으로의 회귀를 돕는 바람이여‥."
그 힘은 태풍만큼이나 거대했으나 그 범위는 키 작은 청년의 양손이 그리고 있는 작은 원에 불과했으니 그 위력 또
한 상상할 수 없었다. 시즈의 마법은 파마리나의 그것과는 달리 엄청난 압력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검은 기운
과 충돌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폭발의 충격으로 마법의 시전자들은 뒤로 튕겨 날아갔지만 여운은 무지막지한 상태를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밀고
당기는 두 힘의 격돌은 천공과 대지를 비롯한 공간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어느 한 쪽이 강했다면 모르지만 겨루고
있는 두 힘은 거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공간이 일그러질 지경이었지만 시전자들은 마법을 감히
거두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굉음을 내며 겨루는 힘들이 집중 폭격을 받아 흔적도 남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그러기
에 재빨리 일어나 마력을 쏟아 부으며 상대에게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눈이 제대로 붙어있는 사람
이라면 볼 수 있을 것이다. 검은 기운이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
다는 것을.
아크로프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세일피어론아드가 선택한 존재 중의 하나가 마력으로 밀리고 있다는 것이.
'설마 내가 잘못 본 것이란 말인가?'
아무리 파마리나가 초월한 존재, 마녀이기는 했지만 어젯밤 그가 예지한 존재는 그보다 몇 단계나 높은 전설 속의
음유술사였다. 그것도 세일피어론아드의 역사를 들추어 겨우 한 번 나타났던‥. 지금 전설 속의 음유술사는 정신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지 어딘가를 자꾸 힐끔거리며 마녀와 맞서고 있었다.
파마리나는 조금씩 시즈가 조금씩 밀려나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용병 주제에 이런 하이클래스 마법을 사용할 줄이야. 힘든 상대였다. 그러나‥ 이제‥'
"끝이야앗!"
"정답!"
굵직한 남자의 음성과 함께 번재가 마구 떨어지는 듯한 마법의 굉음 속에서도 뇌리를 울리는 격타음.
퍼억!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이 소리가 자신의 뺨에서 들려온다는데 파마리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곧이어 전신
피부에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비에 젖은 사막의 모래를 온 몸에 바르는 여인의 눈에 양쪽으로 나눠진 지팡이가 들어왔다. 마법사 청년에게만 신
경을 쓴 걸 후회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후였다.
'그, 그랬었군. 귀인은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동료와 타이밍을 맞출 시기를 기다리며 마녀의 정신을 빼
놓기 위해 일부러 밀리는 척 하고 있었던 게야."
아크로프다가 내심 감탄을 늘어놓는 사이 시즈는 마법의 뒤처리를 했다. 보를레스의 공격으로 파마리나가 마법에
대한 제어력을 잃을 것을 미리 계산하고 있던 그는 혼돈의 바람을 약하게 하는 동시에 방향을 돌려놓았다. 힘이란
약할 때 방향을 틀기 쉬운 법, 그의 생각대로 혼돈의 바람은 뒤로 조금씩 밀리면서 검은 기운의 방향을 틀어놓았고
그 둘은 유성운(流星雲)이 하늘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늘로 사라져갔다.
"쿠, 쿨럭! 쿨럭!"
"시즈!"
싸움은 이겼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아크로프다의 상세가 너무나 심하여 신전에서 가공된 토롤 혈액 가공품
이 아니면 회복되기가 어려울 정도였던 것이다. 시즈가 치료 마법과 약초로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하여 피는 많이
멎었지만 체력은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비로 인하여 떨어진 체온을 견디지 못하고 노인이 부들부들 떨어
졌다. 그나마 시즈와 보를레스가 입고 있던 의복을 벗어 덮어주었지만 여름옷이 뭐그리 추위를 막아주겠는가. 아크
로프다는 아래 위의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말했다.
"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귀인이여.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 나는 이미 그대를 보았을 때 사신
마저 환영할 마음을 품고 있었소."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보를레스가 고개를 저으며 시즈를 바라보니 그는 『생명의 구슬』을 노인에게 사용하려는지 구슬 하나를 꺼내고 있
었다. 아크로프다가 씨익 하고 억지로 웃음을 내보이며 말했다.
"난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하는 몸. 살아나도 몇 년이나 더 세상을 유희하겠소? 내 부탁이 있으니 들어주시겠소?"
그의 얼굴이 너무 간절하여 시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노마법사는 하하하 하고 어울리지
않게 호탕한 웃음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생명의 구슬』이 마녀에게 들어가게 되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소. 그들이 마족과 계약하는 조건 중 하나
가 생명이오. 생명은 그 크기를 따지지 않고 지고함이 말할 수 없소. 그러니 이 구슬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많은 생
명을 살릴 수도 있기에 마왕과도 거래를 할 수 있는 무서운 물건이 될 수 있소. 사실 이것은 고대의 어느 마족이
나의 선조와의 내기에서 진 대가로 준 구슬이라고 하오. 나는 이 불모지인 사막에 생명의 숨을 조금이나마 불어넣
기 위해 모래의 바다를 끊임없이 돌아다녔소. 제 아무리 『생명의 구슬』이지만 그 힘을 조금씩이나마 보충하지 못
하는 곳에서는 그리 효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소. 그러나 난 적당한 장소를 찾기 전에 마녀에게 구슬의 존재를
들키게 되었고 그녀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다녔지. 도망 다니는 와중에서도 드디어 찾아냈소이다. 불모
지에 작은 생명의 보충지를 만들 수 있는 장소를‥. 하늘의 도움인지 마녀는 죽고 말았소. 물론 파마리나라는 더욱
제자가 대를 이었지만 그녀의 스승은 죽기 직전에 『생명의 구슬』에 대해 알려주었으니 나는 그로 인해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마녀 사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지. 그러나 파마리나는 영악함이 스승을 능가했소. 저 여인은 사람들의 녹
지를 빼앗아가며 날 찾았지. 그리고 어느 날, 바클로시크가 날 찾아왔소. 그에게 얘기를 듣고 나는 구슬을 맡겨야
겠다는 생각을 했소. 그 당시에도 나는 제법 미래를 엿볼 수 있었기에 언젠가 다시 내 손에 들어올 수 있으리라 믿
었거든. 그리고 이렇게 그대들과 함께 찾아왔소. 나의 숙원‥ 그 마지막은 그대들이 장식해주구려. '바람을 노래하
는 이'와 그 동료들. 난 영광스럽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소.
"‥끝났군. 이제 이 여인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데려가는 게 어떨까요? 함부로 죽일 수는 없고 그냥 놔두면 또 어떤 악행을 저지를지 모르잖아요? 거기다가 이번
의뢰에 대한 대금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아하‥ 그렇군."
손뼉을 쳐가며 맞장구를 치는 둘의 눈빛은 탐욕에 일그러진 짐승,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나타냈다. 파마리나가 공포
에 질려 도망치려고 했지만 온몸은 꽁꽁 묵인 상태. 얌전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부석에 오른 보를레스가
시즈를 불렀다.
"시즈, 이제 그만 하고 가자고!"
끄덕. 돌아서는 시즈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가 마차에 오르자 보를레스는 말에게 채찍을 내리쳤
다. 서서히 움직이는 마차의 흔들림과 함께 노을도 함께 기우뚱거렸다. 비가 온 직후이기 때문일까? 왠지 맑게 보이
는 노을의 하늘 아래로 불모지에 마지막 낙원처럼 남겨진 자그마한 숲이 더욱 싱그러운 듯이 느껴지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