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00)

                              27 악장 천사도 악마도 날개로 하늘을 난다.

"푸우‥. 역시 북쪽은 다르군. 아무리 해가 저물고 있다지만 무슨 놈의 여름 바람이 이토록 매섭지?"

건조한 사막의 저녁 바람. 기온의 일교차가 보통 4∼50℃를 웃도는  대륙의 머리.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세일피

어론아드는 발열과 흡열이 뛰어난 대머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시즈, 이제 그만해. 곧 마을이 보일 거야."

터번을 걷자 흑단 같은 머리칼에 엿보였다. 아니, 비단이라고 해도 그토록 신비롭게 검을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까

만 색의 머리칼이었다. 군데군데 모래가 묻어있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윤기의 반짝임은 맑은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했다. 만면에 걱정을 가득 담은 채 아리에는 들썩거리는 마차를 열심히 기어 시즈에게 다가갔다. 푸른빛

이 감도는 투명한 유리. 누구라도 청년의 눈동자를 본다면 특이함보다는 경이로움에 놀랄 것이다. 사막과 같은 회색 

머리칼은 그가 입고 있는 회색 자켓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청년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지 해가 지는 모습을 물끄

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리에에게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끄덕임과 같이 방금 전과는 다른 강렬한 모래바

람이 마차를 강타했다. 꽁꽁 묶인 채로 시즈를 주시하고 있던 파마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사막의 대기 자체를 조절할 정도라니‥. 그것도 무려 2시간이나. 그런 마력을 가지고 있으면 왜 

이런 용병단이나 하고 있는 거지?"

파마리나가 용병단 세이서스와 함께 사막을 지나온  시간도 6일에 이르렀다. 그동안 그녀가  봐왔던 이들의 모습은 

비천한 싸움꾼이라고 생각했던 용병의 이미지를 산산이 부셔버렸다. 특히 외모부터  사람 같지 않은 은발의 청년이 

발휘하는 마법은 기가 찰 지경이었다. 혼돈의 의지를 담고 있는 세일피어론아드의 조각, 사막의 바람 자체를 움직이

다니‥. 고작 몇 시간이기는 했지만 이 몇 시간이 몇 십 년 후에 태풍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몸의 

포승을 풀고 주문을 외우는 시간을 갖게 된다고 해도 이들의 손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도 좋았다. 게

다가 지팡이나 빗자루도 없는 상태. 번개처럼 빠른 저 사내의 검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파마리나의 시선이 옮겨진 대상인 보를레스는 그녀와는 다른 이유로  걱정스러웠다. 아리에의 말대로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사막 도시'가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고도의 높낮이가 크게는  170m에 달하는 모래 동산은 사방을 막고 아

무 것도 보여줄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다. 사막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도시. 광활한 사장(沙場)만큼이나 웅장한 느낌

을 자아낸다는 '로트스'. 파마리나를 제압한 후 세이서스들은 주위의 오아시스에 자리한 작은 마을에서 사막을 건너

기에 알맞은 옷을 구입했다. 국경을 넘어 용병국으로 돌아가기보다 사막 도시, 로트스로 향하는 게 더  가까웠기 때

문이다. 물론 '사막의 보석(로트스)'을 보고 싶다는 아리에의 열망 어린 협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면 주방일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인지 더욱 극성스러웠다. 그러나 역시 쏟아지는 모래들과 햇볕, 그리고 갈증에 그녀는 후회를 하

고 말았다. 징징거리는 목소리에 참지 못한 시즈는 결국 한 여인을 위하여 세일피어론아드의 대기가 움직이는 속도

를 늦춰버렸다.

'말들도 지쳤어. 이래서는 앞으로 한 시간도 더 못 간다.'

고문에 가까운 채찍질에 말들이 뛰쳐나가는 것도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그는 어서 도시의 흔적이라도 발견하게 되

길 바랬다.

"저, 저기 뭔가 보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지. 일행의 불행을 원하는 파마리나조차 아리에의 말에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정도로 지루함이 지난 후였다.

붉은 석양이 어둠에 밀려가는 하늘 아래로 보이는 도시. 고대에는 석양을 마왕의  뿔을 지나는 태양의 잔재라고 생

각하였다는 말처럼 붉은 반사광으로 채색된 도시의 모습은 인간을 유혹하는  보석이었다. 그 유혹에 말려든 자들에

는 세이서스라는 용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이야. 시즈가 마법을 오래 사용해서 녹초가 되었었는데‥."

이봐, 이봐. 녹초가 된 것은 시즈만  아니라고! 보를레스와 파마리나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아리에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그리 정정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들이  마차를 세우고 들어간 곳은 여행자들의 집합장소인 여관이었다. 

그러나 뭔가 달랐다. '용의 숨결을 뚫고'라는 용맹스러운 이름이 붙은 간판부터 말이다. 

"뭐야!? 이 곳은!?"하고 파마리나도 얼굴을 찌푸리며 놀란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온통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용병 전용 여관이라고나 할까요? 길드에서 운영하고 있죠."

큰 도시에 위치한 용병 길드에서는 의뢰 거리를 기다리는 용병들의 숙소를 제공하는 곳이 몇몇 있었다. 도시에서도 

적극 나서서 도와주었는데 그 이유는 말썽의 소지가 있는 용병들을 모아놓으면  사고(?)의 위험성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자랑스러운 어조로 아리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명하자 파마리나는 정말 끔찍한 장소에 끌려왔다는 걸 직감했다. 

아마도 독약이 가득한 장소에 감금을 한다고 해도 이런 심각한 냄새(땀냄새)가 건물 안을 완전히 채우지는 못할 것

이다. 같은 여자인 아리에가 이런 냄새를 참을 수 있다는 게 기묘하고도 신비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럼 난 길드에 이번 결과를 보고하고 갈게. 먼저 가 있도록 해."

보를레스가 보고한다는 내용은 의뢰로 인한 대금과 일이 끝나 의뢰가 비어있다는 걸 알리는 것이었다. 설사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해도 보고하는 게 길드에 속한 자들로서의 규칙이었다. 그가 길드 업무소가 있는 윗층으로 올라가자 

여인들은 시즈와 함께 숙소가 자리한 지하로 내려갔다.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한  사막에서 유일하게 기온 변동이 적

은 지하는 뜨거운 햇볕과 얼음장같은 달빛 아래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보금자리였다. 벽에는 어떤 짐승

의 몸을 덮었던 작은 가죽들이 실로 이어져 걸려있었다. 침대는 방 양쪽의 벽이 불쑥  뛰어나온- 일부러 깍지 않은 

듯 했다. -돌 위에 쿠션과 이불을 올려놓은 것이었다. 모래뿐인 사막에서 어떻게 돌을 구할 수 있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사막에서 모래를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암석이 풍화된 흔적인 것이다.

피곤했는지 눕자마자 곤히 잠들어버린 시즈를 잠깐 살펴보다가 문을 닫은 아리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허리춤에

서 단도를 꺼내 등뒤로 던졌다. 파바박! 하는 소리는 실제로는 작았다. 그러나 귀밑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스친 파마

리나의 입장에서는 천둥같은 굉음으로 느껴졌다.

"남자들이 없는 걸 틈타 도망갈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에요."

실제로 그녀는 아리에를 쓰러뜨리고 도망을 가려고 주문을 외우기 위해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아리에는 도신(刀

身)의 1/3이나 박혔던 단도를 가볍게 뽑아 흔들며 동그란  입술과 눈,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린 여인에게 찡긋하고 

눈웃음을 지었다. 파마리나의 입장에서는 왠지 한기가 스며들 듯한 미소였다. 그녀는  깨달은 것이다. 눈 앞의 조그

만 계집애조차도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한 편 보를레스는 길드에 넘길 보고서를 열심히 기입하고 있었다.  아무리 시즈가 바람을 약화시켰다지만 마부석에

서 모래 바람을 직접 받으며 말을 몰아가는  것은 상당한 피로를 요했다. 돌아갈 때는 마부를  한 명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펜대를 놀리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 툭툭 건들며 말을 걸어왔다.

"어이! 자네가 바로 용병국 서부의 리스트를 손에 쥐고 있다는 용병단 세이서스의 '두꺼비'인가?"

굵직한 음성은 전혀 힘을 주어 말한 듯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매우 저절로 고개를 돌려지게 하는, 체력이 

매우 뛰어남을 알려주는 음성이었다.

"그렇소. 그런데 어떻게 알았소? 우리는 이 곳에 오늘 처음 왔소."

사내는 보를레스에게는 미치는 신장은 아니었지만 근육이  매우 발달하여 오히려 더 거대하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볼케아스의 전사들이 애용하는 만곡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그의 우람한 체격 때문에 매우 어울리지  않았

다. 그러나 보를레스는 어색한-전사로서- 그에게서 자신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무용(武勇)이 잠재되어 있음을 직감

했다. 근육이 굵다는 것은 순간적인 파괴력, 그것은 검의 속도와도 관계가 있다. 게다가 무거움 물건보다 가벼운 물

건이 휘두르기 편한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걸 생각할 때  사내의 검이 상당한 빠르기 일 것이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검으로는 어느 정도 휘둘러서는 저런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하던 보를레스의 

중얼거림은 사내가 대답하자 끊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하하. 내 일행 중에 용병국에서 온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그  쪽에서 자네들이 엄청나게 유명하다고 하더군. 내 

이름은 '토실흐덴'라고 하네. 이 주변에서는 한 가닥 하지."

"무슨‥ 용건이라도 있소?"

"물론이지! 용건이 없다면 왜 접근했겠나? 어떤가, 자네? 나랑 한 번 겨뤄보지 않겠나?"하고 토실흐덴은  피식 웃었

다. 마치 '자네 참 귀엽게 생겼군.'하는 말투여서 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는 건드리면 침이 흘러내릴 때까지 멍하게 

있을 듯한 보를레스의 모습을 재밌어하며 '난 먼저 나가서 있을 테니 나오게.'하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밖은 완전히 어둠이 깔린 상태였다. 길드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밝혀놓은 횃불  옆에 방금 전의 황당한 사내가 서있

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절대로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했다. '왜 내려왔나?'라는 생각이 보를레스의 뇌리를 스

쳤다. 조금 전에 로트스의 용병 리스트를  보던 그의 눈동자에 맨 윗자리에 자리한  토실흐덴이라는 이름이 비쳤던 

것이다. 개인 용병으로서는 제일 강하다는 뜻과 동일했다.

"뭐하는 거지? 어서 검을 뽑아."

내심 울상을 짓고 있는 보를레스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로트스 제일의 용병은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

단한 승부욕을 가진 모양이었다. 재촉을 하는 토실흐덴의 주위로는 구경꾼들이 미리 예고된 결투를 보기 위해 원을 

이루고 있었다. 멋지게 검을 뽑지 않는다면 관중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가득히 메울 정도로 기

대에 휩싸인 눈동자들‥ 저주스러웠다.

그러나 강한 자에 대한 호승심이 강한 것은 보를레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검집을  빠져 나오는 특유의 마찰음에 관

중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보를레스가 뛰어올랐고 검과 칼이 부딪었다.

"뭐 하는 거야?"하고 소란스러워진 여관의 분위기에 지상으로 올라온 아리에는 달이 몸체를 들어 낸 시간에 시끄러

운 소음을 일으키는 장본인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일행이라는데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 새 또 문제를 만들다니, 어쩔 수 없다니까!"

짜증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린 아리에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딱딱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막의 

모래밭에서 눕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녀와  달리 파마리나는 보를레스의 싸움이 흥미로운지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그극! 횃불과 달빛, 그리고 별빛만이 밤을 밝히는 모든 것이 아니라는 듯 불똥이 흩날렸다. 보를레스는 다리를 한

껏 벌리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비록 토실흐덴이 쉽게 피해버렸지만 바닥에서 쉬고 있던 먼지들이 한꺼번에 떠오

르는 부가적인 공격이 득을 보았다. 물러서는 로트스 제일의 용병에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두께

가 4cm나 되고 검신의 길이만 1.3m가 넘는 육중한 검이 낙뢰처럼 떨어지자 토실흐덴은 당황했다. 막자니 바스타드 

소드에 비하면 어린애처럼 작은 만곡도가 충격을 견딜지 의문이었고, 피하자면  방금 전처럼 모래가 일어나 시야를 

가릴 텐데 그렇게 되면 승기를 잡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검이 큰 걸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할 수 없군!'

토실흐덴이 택한 방법은 막기였다. 둘러싸고 있는 관중들이 보기에도 그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보

를레스는 자신의 검이 토실흐덴의 만곡도와 부딪히는 순간 묘한 느낌에 움찔했다. 마치  물에 손을 천천히 넣는 느

낌이랄까. 아마도 상대는 자신의 공격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며 충격을 완벽하게 완화시키는  게 분명했다. '과연‥. 

왼손잡이 검사답군.'하고 보를레스는 중얼거렸다. 토실흐덴이 칼을 꺼내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는 왼손잡이

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상대하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세상에 오른손잡이들이 많으니 왼손잡이는 그리 힘들게  없었

지만. 게다가 왼손을 잘 사용하는 이들은 왠지 모르게  정교했다. 힘의 사용이나 움직임에 있어서도 전혀 쓸모없을 

듯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빠뜨리는 일도 허다했다.

"체구에 걸맞게 대단한 힘이군.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어."

무릎이 바닥에 닿고 허리가 굽어질 때까지도 보를레스의 검에 위력이  살아있자 토실흐덴은 감탄했다. 그러나 감탄

만 하다가 반으로 쪼개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가 검등을 받치고 있던 오른손을 빼자 칼이 보를레스의 공격

을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졌다. 두 무기가 긁기는 소리는 바스타드가 만곡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인 동시에 토실

흐덴이 보를레스에게 파고드는 소리이기도 했다. 

"걸렸어!"하고 누군가 외쳤다. 밤에는 음파가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작게  말해도 멀리 있는 사람에게 잘 들린다. 

덕분에 뒷줄에서 구경하던 관중들도 누가 소리쳤는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쿠당! 하고 토실흐덴이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승패를 알게 된 관중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찰나였지만 모두에

게 숨을 들이키게 만드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크으! 대단하군, 대단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안면을 강타하는 짜릿함이라니!"하고 토실흐덴은 메조키스트의 취

향을 의심케하는 말을 내뱉으며 코피를 훔쳤다. 바스타드 소드의  공격 범위를 완전히 재끼고 만곡도를 뻗는 순간, 

보를레스가 검을 잡고 있던 한 손을 놓고 팔꿈치로 얼굴을 찍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뒤를 이어 복부를 걷어차는 강

렬한 공격으로 그는 데굴데굴 굴러버렸다.

"누가 할 소리를‥ 욱!"

보를레스의 말이 '나도 메조키스트야'라는 동질적인 대답일 거라고  착각하는 이가 없을 거라고 믿는다. 그의 손질 

잘된 하드웨어가 옆구리 부분이 완전히 잘라져 있었다. 물론 만곡도가 워낙 날카로운 칼이기도 했지만 안면을 공격

당해 공격력이 급감했는데도 불구하고 깨끗하게 절단된 것이다. 보를레스의 옆구리도  피부가 길게 베어져 피가 흘

러나왔다.

"이제 그만 하도록 하지. 자네가 대단한 실력인 걸 충분히 경험했네."하며 토실흐덴이 손을 내밀었다. 보를레스도 악

수를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고맙소. 당신이야말로 대단한 실력이오. 그렇다면 이제 본래의 용건을 말해 주시겠소?"

"좋아. 간단하게 말하지. 난, 아니 우리 일행은 어떤 의뢰를 맡게 되었네. 그런데‥.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하지."

긴장이 풀려버린 보를레스였다.

얼마 전 용병단 '케이소'는 무려 일만 타로운이라는 엄청난 금액의 의뢰를 받게 되었다. 로트스 최고의  용병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일만 타로운이라는 금액은 그들로서도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의뢰자가 『풍암의 바다』에서 왔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풍암의 바다』에 위치한 고대

의 유적이었으나, 삭막함이 가득한 최악의 모래바다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 열성적인 고고학자조차 포기하는 유적이

었다. 게다가 일설에 따르면 유적 안에는 알려지지 않은 몬스터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어쩌면 드래곤의 안식처일 수

도 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일만 타로운이라는 금액과 불모의 유적을 개척했다는 명예는 너무나도 색정적인 유

혹이었다. 

"흐음‥ 결국 한 마디로 의뢰가 어려우니 파티가 되어 달라는 말이군요?"

아리에가 고명한 학자처럼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묻자 토실흐덴은  고개를 열정적으로 끄덕였다. 삼십대 중

반의 나이에도 설명하기 곤란할 정도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이대며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그래! 자네들이야말로 적임자지. 듣자하니 자네들은  남들이 마다하는 어려운 의뢰를 주로  맡는다더군. 이 의뢰는 

많은 돈이 걸렸어. 일만 타로운이면 아무리 헤프게 써도 일 년은 마음 편히 먹고 놀 수 있다고."

그러나 세이서스의 사람들은 꽤나 금액에 대한  욕망이 그처럼 깊지 않았다. 예도를 손질하는  시즈와 그에게 자기 

칼의 손질까지 맡기는 보를레스. 

'하긴‥ 일만 타로운이라는 금액이 대단하기는 하다.'

실제로 용병국 서부의 리스트를 쥐고 있는 세이서스도 한 달 동안 벌 수 있는 금액은 일천 타로운 정도였다. 그 것

도 아주 열심히 뛰어야 가능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에에게 토실흐덴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나보군. 이쁘게 생긴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도 밝군. 흐

흐‥ 어때? 아저씨랑 친하게 지낼까?"

"토실흐덴 씨. 그녀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보를레스가 충고했다.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토실흐덴은 온몸을 엄습하는 살기에 아리에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누구지?'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살기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싱글거리는 보를레스, 새침하게 째려보는 아리에, 무심하게 검을 손질하는 시즈, 그런 시즈를 유심히 바라보는 파마

리나. 분명 이들 중 한 사람일 게 분명했다. 토실흐덴의 입가에 뭔가 즐거운 미소가 피어났다. 

"이견이 없다면 손을 잡는 걸로 결정났다고 믿겠네.  재미있는 여행이 되겠어.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걸세. 그 때 내 

일행도 소개해주도록 하지." 

듀쿠스는 몇 시간 전부터 마누라 바가지 긁듯이 속을 뒤집어놓는 30대 중반의 사내 때문에 통증이 느껴지는 머리를 

두들겼다.

"이봐요, 할아범. 할아범이 아니라면 누가 '풍암의 바다'를 안내하겠소? 좀 도와주시구려. 제발, 부디, 기필코! 아! 기

필코는 아닌가?"

이렇게 떼를 쓰는 사람을 누가 로트스 최고의 용병단 중 하나라는 케이소의 단장이라는 토실흐덴이라고 생각하겠는

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눈치를 살피는 근육질의 남성에게 내일 모레면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병앓이를 할 것 같은 

노인은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이 미친놈아. 아침부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동반자살 하자고 졸라대는 거냐!? 옷 벗고 사막에 나가서 땡볕에 누

워있기만 해도 잘 익어서 죽을 텐데 왜 하필 '풍암의 바다'를 간다고 나를 사지(死地)로 끌어드리는 게냐!"

"할아범이 길 안내만 제대로 하면 사지가 아닌 보석의 대지일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의뢰대금이  얼마인지 아

십니까? 무려 일만 타로운이라고요! 언제까지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고 살 겁니까?"

뭐라고 하던 간에 듀쿠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막의 무서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불모지이나, 불모지

가 아닌 땅, 사막. 모래와, 바위 밑에서 살아 숨쉬는 수많은 생물과 도처에 숨어있는 몬스터. 적응의 천재라는  인간

조차 발을 붙이지 못한 곳에서 억척스럽게 살아온 그들의 힘은 강했다.

"자네는 '풍암의 바다'가 가진 무서움을 모르지 않나. 그만 하고 돌아가게."하고 노인은 뒤로 돌아누웠다. 등 건너편

으로 토실흐덴이 씩씩대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듀쿠스는 눈을 감았다. 그 날의 처참한 전경이 눈에 아른거렸

다. 겨우겨우 살아서 도망치며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으리'하고 다짐했던 것도 기억났다.  그러나 그가 사막으로 

떠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할아버지‥."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방에서 문을 열고 빠끔히 내다보는 어린 소녀. 듀쿠스가 양팔을 벌리자 그녀는 달려와 폴짝 

안기고는 할아버지의 안개 낀 얼굴을 눈물을 글썽이며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 가야 돼? 안 갈 거지? 나 혼자 두고 가지마."

"걱정 말거라. 이토록 귀여운 손녀를 버리고 내가 어디를 가겠느냐."

"어때?"

"말도 말라고. 얼마나 완고한지‥. 꿈쩍도 안 하더군."

의자를 꺼내 털썩 앉은 토실흐덴은 어깨를 으쓱하며 실패를 보고했다.

"꼭 그 사람이어야 하는 건가요?"하는 아리에의 물음에 용병단, 케이소의 사람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보를레

스는 듀쿠스라는 길 안내원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될 정도로 '풍암의 바다'라는 곳이 위험하다는 뜻이군요."

무미하면서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세이서스와  케이소의 시선을 한꺼번에 돌아갔다.  보를레스와 아리에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듯 흔들렸다. 토실흐덴의  좌측에 앉아있던 남자가 껄껄대며 입을 열었다. 붉은 

머리칼이 불꽃을 연상시키는 그는 올해로 25살인 쿠라마스였다.

"하도 말을 안 해서 벙어리인 줄 알았군.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무서운 곳이지. 그래서 지금이 기회라는 거야. 승리

라는 것은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곳을 정복하는 것을 뜻하는 거라고!"

"문제는 정복하지 못하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패배가 놓여 있다는 것이고요?"

차가운 얼음으로 뽑아낸 듯한 머리카락 아래로 입술 끝에 살짝 당겨졌다. 쿠라마스는 무감각한 인형같은 청년이 자

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자자‥. 그만하게. 자네, 시즈라고 했지? 우리도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네. 그러나 용병이란 어차피  죽음을 염

두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네. 그렇다고 언제 죽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야. 우리도 살아가는 자체로 소중함을 느끼

고 있네. 그래서 조금이라도 뛰어난 사람을 끌어드리려고 노력하는 거지."

끄덕. 시즈는 수긍했는지 입을 다물고 평소의 침묵하는 개구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케이소는 세이서스에 대한  소

문이 상당 부분 잘못되었다는 걸 실제로 그들을 만나서야 알았다. 어디에 은발을 가진 개구리가 있단 말인가. 시즈

의 외모가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눈동자와 머리칼은 그에게  신비함을 부여하기 충분했다. 나직하게 흘러나

오는 목소리는 청년이 가진 신비감 이상의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두 마디를 했을 뿐인데 테이블 위를 하늘

거리는 침묵의 냉기가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뛰어나다는 안내원을 끌어드릴 겁니까?

보를레스가 콧등을 긁적이며 묻자 케이소의 사람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서 용병단, 케이소에 대해  설명

을 하자면 이들은 모두 6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파티였다. 진(陣)을 이루어서 소 대  다수(小 對 多數)로 싸우는데 

능숙했다. 마법사나, 사제처럼 비싼(?) 인원은 없었지만 그들이 던지는 도끼와 창은 백 걸음이나 떨어진 거리에서도 

정확하게 목표에 꽂혔고, 용병으로 잔뼈가 굵다는 걸 증명하듯이 웬만한 독초와 그에 대한 해독, 그리고  상처에 좋

은 약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았다.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키틀볼이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다시 가서 말해보지. 나이가 비슷하니 아마 노인네의 변덕을 일으킬 수 있는 것도 내가 가장 쉬울 걸세."

"부탁합니다, 키틀볼. 일만 타로운을 위하여‥!"

그 구호에 별다른 이유 없이 웃음이 나오는 시즈였다.

"이제는 자네까지 왔군. 다른 녀석들은 '풍암의 바다'의 무서움에 대해 모른다고 쳐도 자네는 뭐지?  혹시 망령이라

도 든 겐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하겠지? 천사든 악마든 간에 날개가 없으면 하늘조차 날 수  없네. 자네

가 귀여운 손녀에게 해주어야 할 것은 앞으로 남은 얼마의 세월을 곁에 있는 것일까? 이대로 라면 자네는 만족스러

운 여생의 끝을 맛볼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사랑스러운 핑계거리는  자네를 떠나 시작해야 할 때 무슨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난단 말인가. 행복하게 죽어 무엇을 남기겠나? 그럴 바에야 목숨을  걸고 손녀에게 목숨을 달아주게 인간들

에게 있어 무엇이 날개인지는 알고 있겠지? 그럼 기다리겠네."

과연 인간은 날개를 가질 수 있는가? 결론은 '없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날개'라고 불리는 것은 많다. 돈, 권력, 명

예 등‥. 듀쿠스는 일어서서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노망난 노인네 때문에 들떠버린 마음속을 가라앉힐 필

요가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터로 알맞을 듯한 작은 공터에 와서야 발을 멈춘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쯤에서 놀고 있겠지?"하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듀쿠스의 눈동자가 놀람과, 분노로  한꺼번에 부풀었다. 바

닥을 뒹굴며 울고 있는 작은 소녀와 그녀를 거리낌없이 걷어차는 사내, 그  남자는 훈제 바비큐를 장사하는 남자로 

듀쿠스와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소녀를 공처럼 멀리 걷어낸 남자는 더러운 쓰레기를 걷어찼다는 듯이 침을 뱉

으며 소리쳤다.

"우리 애랑 놀지 말라고 했지? 거지같은 게 어디서 우리 아들한테 빌붙어서 먹을 걸 얻어내는 거야? 하는  짓과 모

습이 조금도 다르지 않잖아. 에이, 더러운 것. 퉤!"

주위에서는 그런 모습이 당연하다는 듯 울고  있는 소녀에게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는다.  오히려 다가오면 피하는 

이가 있을지언정. 분노하지 말자. 각오하지 않았던가. 노인의 얼마 있지도 않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고 깨문 입

술에서는 짭짤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의 힘없는 어깨가, 등허리가 눈에 비친  상황을 외면하고 방향을 돌렸다. 혼이 

사라진 발걸음으로 말이다.

얼마 후, 오두막으로 손녀 녀석이 돌아왔다. 부어오른 뺨이 보기 흉하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녀석은  듀쿠스에게 오

늘 즐겁게 놀았다는 양 떠벌리기 시작했다. 보통 때라면 몰라도 이미 모두 알아버린 그녀의 할아버지에게는 그녀의 

멈칫거림조차 말을 만들어내기 위한 어색함으로 느껴졌다.

그 날 저녁, 듀쿠스는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스러운 '핑계거리'를 부탁하고 용병길드로 향했다.

시즈들이 케이소와 함께 의뢰를 받아드린 이유는  상당히 의외적인 경우였다. 유일한 안내원마저  두려워하는 사지

(死地)에 일부러 찾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지만 현재는 그 이유가 생겨버렸다.

"사론! 너는 사론이 아닌가?"

"보를레스 님!"하고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청년은 분명 시즈과 피브드닌들을 아스틴네글로드까지 호위했던 수행

원 중 하나인 사론이었다. 아예 얼싸안아버린 보를레스와 사론을 향해 쿠라마스가 물었다.

"아는 사이였나 보군요?"

"그야 당연하지요. 우리는 함께 아스틴네글로드와‥."

당연하다는 어조로 대답을 하던 사론의 입술과 혀가 갑자기 멈췄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을 테이블에 앉아있는 은발

의 인형을 가리키며 소리를 높였다.

"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입니까?"

선수를 쳐버린 시즈.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발하자 사론은 그가  자신의 입에서 나올 이름을 꺼린다

는 걸 알아채고 혀를 있는 힘껏 꺾었다.

"전에 아스틴에서 본 일이 있지요? 그 때 보를레스 님과 함께 뛰어난 활약이 눈부셨습니다."

그의 얼버무리는 솜씨는 뛰어났는지 케이소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았다. 아리에와  파마리나가 세이서스의 일원- 파

마리나는 말도 안된다고 거부하려 했지만 아리에가 단도로 손톱을 다듬기 시작하자 곧 조용히 받아드렸다 -이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사론에게 보를레스가 물었다.

"자네는 토루반과 피브드닌을 수행하지 않았나? 이 사막의 왕국에는 무슨 일이지?"

"말도 마십시오. 두 분께서는 모르셨습니까? 피브드닌 님, 토루반 님은 함께 유적 탐사연구를 나오셨습니다. 볼케아

스의 유적들을 돌아보며 연구를 하던 중에‥. 결국 가서는 안 되는 곳까지 탐사 방향을 향한 겁니다."

"모두 살아 계시겠지? 하긴 죽을 사람들도 아니지. 피해는?"

갑자기 사론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실 그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가 혼자서 왔다는 점-  수행기사는 죽는 한이 있어

도 수행 대상을 버리는 걸 가장 큰 수치로 생각한다. -과 입고 왔다는 옷이 넝마처럼 피폐해진 걸 볼 때 꽤나 심각

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아는 계십니다‥. 천정을 무너뜨려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았으니까요. 그러나 언제까지나 안에 있을  수는 없었습

니다. 물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가지고 있던 마법도구를 활용하여 몬스터들의 주위를 끄는 사이에 저 혼자

서 도움을 청하러 탈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거 시급했잖아. 어이! 토실흐덴, 바로 출발합시다. 다들 준비는 미리 해뒀겠지요?"

"보를레스, 진정하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듀쿠스가 없이 '풍암의 바다'에 간다는 것은 승산이 없네."

바로 그 때였다. '용의 숨결을 뚫고'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길드 안으로 들어온 노인은 시끌벅적한 식당의 테이

블들을 둘러보다가 세이서스와 케이소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키틀볼 앞에  멈춰선 노인은 모자를 벗어 테이

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말이 맞았네, 키틀볼. 날개를 찾으러 가겠네."

그렇게 또 다른 여행의 길은 막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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