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악장 모래알 사이로 흐르는 사막의 의지
장비가 구비된 두 용병단은 밤을 시작으로 하여 길을 떠났다. 얼마 전 시즈들이 로트스에 들어올 때는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밤의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지만 장비가 갖춰진 후에는 오히려 시원한 밤이 낮보다 걸음을 옮기기
좋았다. 게다가 케이소들의 신임이 헛되지 않았을 정도로 사막에서의 듀쿠스의 인도능력은 뛰어나 지칠 때쯤이면
오아시스에 도착하게 되어 시즈들은 감탄했고 한편으로는 왜소한 몸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노인을 믿게 됐다.
"사론,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토루반들이 얼마나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마도 앞으로 나흘 정도일 겁니다. 벌써 제가 로트스에 도착하는데 사흘이라는 시간을 소요했으니까요. 떠나오기
전에 견딜 수 있는 수량이 딱 열흘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생겼을지 알 수가 없으니‥."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사막에서 섣불리 뛰거나 서두르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오히려 가장 수분의
소모가 적은 속도로 오랫동안 가는 게 더 중요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세."
듀쿠스가 쉴 장소로 제시한 곳은 바로 바위 밑이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사막은 모래보다는 건조한 바위로 이루어
진 지형이었다. 둔탁하게 튀어오른 바위들이 모를 들어고 기괴한 모습으로 예술품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아마도 이 때만은 듀쿠스도 그 동안의 사고 없는 여행으로 방심을 했었던 모양이다. 철저한 준비도 무의미해지는
상황은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법. 사막에서는 더욱 빈번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취리리리리리리릭!"
"흐억!"
"방울뱀이다. 움직이지 마!"
쿠라마스가 소리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케이소의 실력 좋은 검사, 마필트는 종아리에 이빨을 박고 매달린 방울뱀에
게 몸서리치며 검을 내리쳤다. 사실 어느 동물이나 자신보다 큰 상대에게는 공격하지 않는다. 그게 약육강식의 철칙
이었다. 그러나 공격을 받았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마필트는 위협하는 소리에 버둥대다가 방울뱀을 반대로 위협
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신의 반토막이 사라진 후에도 그의 다리를 물고 놓지 않는 뱀의 머리를 칼로 찢어버린 쿠라마스가 얼른 여분의
천으로 상처의 독이 타고 올라갈 예정 부위를 꽁꽁 묶었다.
"참아!"
사막에서 부싯돌로 쇠를 달구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쿠라마스는 단도를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은 모래에 날을 파
묻었다가 꺼냈다. 아지랑이가 일어나는 게 손을 댔다가는 데여 버릴 것 같았지만 그는 망설임없이 마필트의 환부에
가져다 댔다.
"크으으으윽!"
생피부와 살이 한꺼번에 십자형으로 갈라지는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아픔일 게 분명했다. 아리에는 이를 악
물고 고통을 참는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치료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곧 그는 쿠라마스가 검은 색의 금속
을 꺼내자 기겁을 했다. 빛을 반사하는 보통의 금속색과는 달리 검은 색의 철을 햇볕이 내리치는 사막 한 가운데
올려놓으면‥.
"취익!"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자 순간적으로 증발해버리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는 쿠라마스는 마치 악마처럼 느껴졌다.
"치이이이익!"
"흐아아악"하고 사내의 비명과 함께 살타는 냄새가 구역질나게 허공에 퍼졌다. 다들 얼굴을 찡그리고 치료가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독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입으로 독을 빨아내는 단순한 방법도 있었지만 빨아내는 쪽이 만약 입
안에 충치나 작은 상처라도 있으면 즉사해버릴 수도 있었다.
"자네의 비명소리는 언제 들어도 우렁차군, 마필드. 갓 태어난 아이들이 본받았으면 할 정도야."
"칭찬처럼 들리지 않는 걸."
"당연하지. 칭찬이라고 생각했냐?"하고 쿠라마스는 코를 벌렁거리며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두 동강이 나 있는 뱀을
들어서 보자기에 넣으며 말했다.
"이 놈에게 체력을 뺏겼으니 다시 돌려받아야지. 푹 고아서 먹으면 어느 정도 기운이 될 거다."
그들이 하는 양을 뒤에서 보고 있던 듀쿠스는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막을 건널 때는 앞으로 나가는데
만 신경을 집중하는 게 제일이다. 흥분을 한다든지 깜짝 놀란다면 그것은 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 투명한 눈동자의 청년을 빼놓고는 대부분 수분조절로 골치 아프겠군.'
유심히 보고 있었지만 정말 신기한 자였다. 방울뱀의 위협과 용병들의 소란에도 그는 사막의 저 편을 바라보며- 노
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의 주위는 다른 차원 같다고나 할까?
'어느 멍청한 족속들은 은발을 신비롭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다. 내가 장담하건데 신들은 모두 검은머리
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모든 빛을 받아 드릴 수 있는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이지. 은빛은‥ 가장 순수한 빛깔일지는
몰라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저주의 빛깔이다. 저 모든 생물의 근원적인 힘인 태양 빛을 거부하지 않는가.'
그러나 청년은 모든 것을 거부해야할 모습에 한 가닥 포근함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다른 것을 거부하는 연극을 하
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꾸만 자신을 쳐다보자 신경이 쓰였던 걸까? 그는 듀큐스에게 눈짓을 하며 손가락으로 아까
전부터 바라보던 사막의 끝자락을 가리켰다.
지평선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로트스 제일의 안내원이라는 듀쿠스가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모래 폭풍이 밀려온다! 바위 뒤로 숨어!"
작지만 수를 셀 수 없는 암기가 일행이 숨어있는 바위에 마구 부딪힌 것은 그가 외친 후로부터 수십 초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30분이 지나도록 그칠 줄을 모르는 그 기세에 아리에가 시즈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숨어 있어야 하는 거지?"
"이 바람이 사그라들려면 앞으로 이틀은 더 있어야 할겁니다. 우리가 로트스에 도착할 때 아무리 태양이 없었다지
만 너무 추웠습니다. 이유는 이 곳이 대륙 북부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기온이었던 모양입니다. 바람은‥. 환경의
법칙에 충실하니까요."
뜨거운 장소에서 차가운 곳으로 불어 가는 게 바람이었다. 그 의지를 알고 있는 시즈는 이 바람이 자신이 조절하는
한도를 넘어선 위대한 대륙의 의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었다면 걱정이 되는 토루반들을 위해서라도 억지로 그
의지를 거슬렀을 것이다.
"앞으로 1시간 후부터 바람이 그나마 약해질 겁니다. 그 때 떠나기로 합시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자신있는 목소리로 단언할 수 있는지 아무도 묻는 이는 없었다. 사막에서는 불안하게 정확성을
따지기보다는 단순한 행운로 주사위의 패를 정하더라도 자신있는 결단이 중요했다.
"그럼 떠납시다."
다리를 다친 마필드였지만 누구도 부축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버둥거리는 말과 낙타를 안정시키고 올라탄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차를 가했다. 어차피 낙타와 말에게 먹일 풀을 싣고 사막을 다니지는 않는다. 한계점에 다
다르면 두 헌신적인 동물들을 내버리고 일행은 냉정하게 떠나버릴 것이었으므로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부려먹어야
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바람에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아리에의 낙타의 거체가 모래 속에 자취를 녹여버린 것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여
자남자 할 것 없이 자신의 두 발로 모래를 헤치며 걷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앞으로 하루는 낙타들이 견뎌주어야
했는데 모래 바람의 피해는 컸다. 파마리나는 겨우 몇 시간밖에 걷지 않았는데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들기며 지팡이
를 잘라버린 보를레스를 원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여자들을 제외한 남자들은 반나절하고도 세 시간에 이른
강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장 약하다고 생각했던 시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지
독해서 다른 이들이 더위에 흘리는 땀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하는 게 좋소. 유사를 밟게 되면 큰일이니까."
듀쿠스가 말하길 유사(流砂)는 밞은 존재를 모두 끌어들여 죽이는 사막 최고의 생명 탐욕자라고 했다. 유사의 움직
임이 심한 낮을 피해 밤에 가는 게 좋다고 결정한 듀쿠스에게 시즈가 다가가 말했다.
"듀쿠스, 강행합니다."
듀쿠스를 제외하더라도 세이서스를 제외한 사막의 민족들이 찬성할 리가 없었다. 파마리나마저도 '저런 미친놈이
있는 파티에 들어오다니 나도 명줄이 다했어.'라고 중얼댔을 정도였으니까.
"자네는 유사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아는가?"
"유사가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두렵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어이없는 어조로 물어오는 키틀볼에게 시즈는 담담하게 말했다.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도 한번 입이 열릴 때마다 시
즈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어째서지?"하며 보를레스가 앞으로 나섰다. 사론의 얼굴에도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시즈는 아스틴네글로드조
차도 한 걸음 양보했던 대륙의 현자, '마땅찮은 이'. 그의 말에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고 함께 여행했던 이들은 믿었
다.
아리에는 모래에 가슴까지 파묻힌 채 힘겹게 앞으로 전진했다.
'하여튼 저 사람을 만난 후로는 편할 날이 없다니까‥.'
내심 그녀는 시즈를 바라보며 투덜거렸지만 불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조가 쾌활했다. 17년의 가까운 세월을 목
욕물과 향수를 제외한 액체는 몸에 대어본 적도 없이 지내왔다. 사람들이 말하는 부귀의 안락함이랄까? 그녀는 너
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가문이 몰락하고 시즈와 보를레스를 따라 나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간신의 반란으로
피신하는 공주님의 환상을 머리 속에 품고 있던 걸 기억해내고는 아리에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 후 다가온 현
실은 환상처럼 로망스적인 게 아니었다. 보를레스와 시즈는 힘을 기르기 위해 매일같이 싸움과 전쟁을 찾아다녔고
자신을 구하러 와줄 왕자를 기다리던 그녀에게 달려든 것들은 우락부락한 용병들과 그들이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
가 붙은 접시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공주라는 환상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던 얼굴, 즉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빼
어난 미모는 납치, 강간, 성추행 등 반갑지 않은 현상을 초래했고 신변 보호를 위해서라도 아리에는 자연스럽게 강
해졌다. 일 년 전의 그녀를 알던 이를 대면한다면 분명 그 사람은 신의 은총이라면서 놀라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언제부터 안락함에 빠져있던 때보다 즐겁게 느껴졌다.
"정말 빠지지 않는 군요."
어렵게 모래 속에서 걸음을 옮기던 아리에는 누가 여유 있게 감탄할 수 있는지 궁금해 고개를 돌렸다. 사론의 말투
에 서린 감정을 모두들 표시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시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
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매 한가지였다. 그들을 대표하듯 듀쿠스가 무심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고 있는 시
즈에게 물었다.
"어떻게 빠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나? 나는 사막을 종횡무진하고 다닌 많은 이들의 전설에 대해서 들었지만 그 중
에 유사를 타고 사막을 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네. 어떤 이라도 유사를 어떻게 피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사
람이 대부분이었지. 전설 속의 이들조차 골치를 썩혀야 했던 문제를 어이없게 풀어버리다니‥."
그렇게 어이없는 청년은 대답없이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가 말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어떻게 이계의 지식을 이
해하겠는가. 사람들의 인식과 이해는 비슷한 것이라도 경험한 사람과 전혀 모르던 이에 따라서 천지의 차이만큼이
나 구별된다.
유사(流砂)에 대한 인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즈가 왔던 이계에서도 유사는 문학작품에 널리 유포하는 미신을 낳게
한 존재였다. 볼케아스와 사막의 건설기술자들은 유사가 특별한 형태의 모래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모래가 지표의 간극수(間隙水)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과 동물이 빠진다면 그 속
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지만 모래와 물이 함께 섟여있는 밀도가 인체나 동물의 몸보다 크기 때문에 몸 표면 아래로
는 가라앉지 않는다. 오히려 몸부림을 치게 되면 평행을 잃게 되므로 빠져죽을 수 있었다. 그것은 깊은 물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가 유사에 빠져서 얌전히 빠져들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는가. 모두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두려움에 질려 발버둥을 쳤고 누구하나 유사의 비밀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 결과, 유사는 생명을 빼
앗는 사막의 의지로서 인식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의심이라는 감정로 눈매를 더욱 찢어가며 노려보는 이들의 대한 답변을 해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시즈는 대답했다.
"전에 한 번 빠져보았습니다. 발버둥치기가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더니 멈추더군요."
"‥‥."
이 기가 막힌 대답에 시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다시 한번 잘못 박혀 버렸다. '미친 놈'이라고 확고하게.
유사지대를 건너 용병단 일행은 바위들이 불쑥불쑥 솟아있는 산맥지대를 지났다. 바람만 불어도 떨어질 듯한 거대
한 바위들이 작은 연결점으로 버티고 묘기를 부리는 아슬아슬한 곳이었다. 그 덕에 아리에는 바위산에서 돌 부스러
기가 떨어질 때마다 놀란 가슴을 움켜지고 시즈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24세의 나이동안 마법에 취해 애인 하
나 없었던 파마리나는 눈꼴이 사나워 닭살이 돋은 피부를 슥슥 문질렀다. 마녀라는 것은 때로는 마족과의 계약을
비롯하여 잘못된 마법의 부작용 등으로 의외의 일과 대면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무슨 일에
도 흔들림이 없는 부동심과 냉정함을 강요받았는데 파마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위험해!"
마필드는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람 몸통 만한 바위를 보고는 달려가려다가 다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 소
리만 크게 질렀다. 아직은 그의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사막에서 살아남은 방울뱀의 독은 그만큼 신
경에 치명적이었다.
그의 외침에 위를 올려다본 파마리나는 코웃음쳤다. 이런 돌멩이 따위가 날 어떻게 하겠어?
"허공에서 뭉쳐진 공기의 망치!"
보통의 마법사라면 주문을 외울 새도 없이 뭉게져 버렸을 것이나 파마리나는 마녀였다. 뛰어난 재능으로 선택받은
여인답게 그녀의 이죽거림이 끝나자마자 바위는 산산조각 났다.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어떻하오!?"하고 부서진 바위의 파편에 머리를 맞을 뻔한 쿠라마스가 소리쳤으나 파마리나
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썹을 찡그리며 맞받아쳤다.
"그럼 어떤 식으로 처리하라는 거죠? 떨어지는 바위를 아무에게도 튀기지 않게 내가 몸으로 감싸안으라는 건가요?"
"저 여자가! 그러고도 동료라고 할 수 있어?"
"언제 내가 당신의 동료라고 했죠?"
'난 이 파티에도 억지로 끌려온 거라고!'하고 외치려던 파마리나는 한기(寒氣)가 풍기는 시즈의 투명한 눈동자와,
굳건히 검의 손잡이를 잡은 보를레스의 손과, 장난치듯 단도를 돌리는 아리에의 미소에 의도한 바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짜증을 부리듯 뒤로 돌아서자 키틀볼이 나서서 말했다.
"그만 하시오. 여기는 단결한다고 해도 살아가기 힘든 사막이오. 쿠라마스, 레이디께서는 고의로 자네에 돌의 파편
을 튀긴 게 아니지 않은가. 그 상황에서 방어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압출된 고깃덩이가 됐을 거야. 그리고 파마리나
라고 했소? 그대도 알아두시오. 우리가 임시적으로 뭉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여행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
으니 동료나 다름없소. 조금은 동료들을 배려해주었으면 좋겠구려."
그는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위험하군. 방금 전 같은 바위가 이 곳에서는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내리잖아."
사람들은 씁씁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보를레스의 말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두리번대며 암석의 산을 빠져나가는 그들.
돌산 위에서 서두르는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검은 후드 위에 흰색의 큰 천을
받쳐입은 그는 전통적인 볼케아스식 사제의 모습을 한 그는 사라져 가는 보를레스들을 쫓아 몸을 날렸다.
시즈의 말대로 모래바람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바람을 막아주던 돌의 산을 벗
어나자 일행은 마치 바다 속에서 파도가 몰아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자신들이 걷고 있는 사막이 바로 '풍암의 사
막'이라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저것은?"
"저게 바로 '풍암'이지. 보통 버섯바위라고도 불린다네."
보를레스가 보고 탄성을 지른 존재는 사막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바위였다.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지면에 닿는 부
분부터 풍화 침식되어 그 별명처럼 버섯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기경(寄經)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나 듀쿠스는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는 십 년 전의 참혹한 회상이 눈앞을 가렸다. 그 때, 시즈가 손을 들어
서 사람들의 걸음을 만류하며 말했다.
"멈추세요. 위험합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자 주위를 둘러보던 키틀볼이 동조하며 뒤로 물러섰다.
"다들 물러서라. 그의 말이 맞다. 주위에 동물의 뼈가 이상하리 만치 많지 않은가!"
듀쿠스는 분명 비슷한 상황이 예전에 있다고 생각하고 무언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여러 개의 풍암
중 흔들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는 녀석들을 발견하고는 중얼거렸다.
"피로운웜피스‥."
보를레스는 듀쿠스의 중얼거림이 뜻하는 것이 지금 땅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거대한 지렁이(?)가 아니길 빌고도 빌
었다. '피로운웜피스'라는 몬스터에 대해 인디움프스 생태학은 아래와 같이 기재하고 있다.
사막에 사는 거대 몬스터.
바위가 많은 지역에서 땅 속에 몸을 숨긴 채 먹이가 올 것을 기다린다고 한다.
길이가 무려 30 미터에 육박하는 초대형 괴물인 피로운웜피스는 바다뱀이 육지로 올라온 후 진화한 게 아닌가하는
추측이 있으나 진실은 알 수 없다.
메뚜기, 전갈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낙타까지 잡아먹는 폭식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피로운웜피스는 목격한-목격
은 했지만 살아온 사람이 드물다-사람이 드물어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사막의 암석지반 속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
직이는 걸로 보아 엄청난 힘과, 단단한 거죽을 가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대면했을 시에는 검이나 물리적인 힘을 가하는 무기로는 상처를 내기가 힘들 것이다. 마법도 이 괴물이 어떤 내성
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
단,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모든 생물의 약점인 눈일 것이다.
사막인들에게 드래곤만큼이나 포악하고 두려운 몬스터로 알려진 피로운웜피스. 바위 암반이 무슨 늪지대인양 놈은
머리를 박았다가 뺏다가 하면서 지렁이들 특유의 움직임으로 일행에게 다가왔을 때 시즈는 중얼거렸다.
"지식을 가진 이들은 그 지식의 벽에 막혔다는 걸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몬스터로군."
기괴하게도 피로운웜피스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느린 듯 보이면서도 빠른 게 마치 썰물이 술렁거리며 밀려드는 듯
한 그 움직임에 보이는 것은 커다랗게 벌려진 입이었다. 이빨을 없었지만 몸 전체가 근육인 듯한 녀석에게 물렸다
가는 그 압력으로 질겅질겅 씹혀서 껌이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수, 숨어!"
쿠라마스는 외치고 도망치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어디로 숨는단 말인가? 있는 것이라고는 바위뿐이지만 피
로운웜피스가 덮쳐오는 모습은 마치 바위가 종이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마필드도 바람처
럼 몸을 날렸다. 죽음 앞에서 나아가는 다리의 부상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뭐 이렇게 빨라!?"
그러나 그는 순식간에 쇄도해온 괴물의 입을 바라본 순간, 죽음이 다가왔다는 걸 직감했다. 입을 악물고 만곡도를
빼어든 펄쩍 뛰어올랐다.
빠캉! 하고 두 물체의 충돌이 소리로 터져 오르자 도망치던 용병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리에는 차라리 뒤
로 돌아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했다. 그녀와 일행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마필드를
휘감기 시작한 거대한 지렁이의 모습이었다.
"으악! 으아아아아악! 으아‥ 앗‥ 쿠억‥."
인간의 생명은 그렇게도 허무한 것인가? 이로써 한 사람의 존재는 걸어다니던 생물에서 거대한 지렁이의 뱃속에서
녹기만을 기다리는 영양분이 되어 버렸다. 비위가 약한 아리에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등을 두들기
며 달래줄 여유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죽어버린 자보다 살아있는 자가 중요하다. 그 말에 맞게 시즈는 뒤도 돌아보
지 않은 채 아리에의 손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했고 파마리나를 안은 보를레스와, 케이소의 사람들이 처질 세라 뒤
를 따랐다.
다시 암석의 산으로 되돌아오게 된 그들은 허무하지만 안도한 한숨을 희미하게 내뱉었다. 보를레스의 목에 꼬옥 매
달려 있던 파마리나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 괴물의 몸을 덥고 있는 각질은 아무래도 뱀의 비늘과 성분이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 말은?"하고 시즈가 반문했다. 위기에 몰린 상태에서도 무미한 느낌의 간단명료한 어조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파
마리나가 대답했다.
"뱀의 비늘과 같다면‥ 이게 효과가 있을 거 에요."
그녀가 내민 주머니에는 흰색의 반투명한 가루가 수북히 들어있었는데 시즈가 보아하니 붕산의 종류 같았다. 눈썹
을 살짝 찌푸리는 그에게 파마리나가 덧붙였다.
"야영이나 노숙을 할 때 누구나 가지고 다니는 붕산가루의 일종이지만 그 강도가 20배는 강해요. 아무리 두꺼운 비
늘이라도 단숨에 녹아버릴 거에요."
"‥‥."
시즈는 대답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 챈 파마리나가 쳇! 하고 투덜거
렸다.
"의심하지 말아요. 인간에게는 쓰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인간에게 큰 해가 없는 붕산이라지만 그녀가 내어준 종류의 강도라면 아마 염산만큼의 끔찍한 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인간에게 그러한데 비늘에 미치는 효과는 거대할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땅의 진동이 전해지며 암석 산에서 굵직한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놈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
엄청난 몸에 겨우 인간 한 명으로는 부족했겠지. 피로운웜피스는 낙타처럼 한번에 많이 먹고 오랫동안 먹지 않아도
되지는 특이한 넘들이었다. 아마도 꽤나 굶주렸을 것이다. 그런 놈이 오랜만에 차려진 잔치상을 포기할 리가 없었
다.
"보를레스! 암석 산에 올라가서 이 가루를 뿌리십시오. 그 뒤는 저와 파마리나가 하겠습니다."
"알았어!"
용병들은 산을 잘 탄다. 나무꾼이나 사냥꾼처럼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싸움으로 단련된 체력과 근력, 그
리고 발 밑의 지면이 어떤 상태이건 간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보를레스가 바위를 붙잡고 암벽을 타고
올라가자 시즈의 투명한 시선이 케이소의 남자들에게서 멈췄다. 토실흐덴이 나서서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지?"
"미끼가 되어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시즈가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의 입은 가차없었다. 케이소의 단원들이 얼굴을 잔뜩 얼굴을
찌푸렸고 쿠라마스가 나서서 외쳤다.
"우리에게 위험한 일을 맡기고 너희들은 그 사이에 도망갈 생각인가?"
"그만해! 쿠라마스.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는 동료다, 알고 있겠지? 시즈."
"물론입니다."하고 끄덕인 시즈는 보를레스가 올라간 암벽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가 붕산을 공중에 뿌리기 전에 신호를 할겁니다. 그럼 일제히 물러서 주십시오. 그리고! 눈이 없다는 것은 냄새
로 먹이를 찾는다는 말과 같을 겁니다. 빨리 움직인다면 놈을 혼란시킬 수 있을 거에요."
"알겠네. 그럼 부탁하네. 아가씨도‥ 부탁하오."
진중하기 그지 없는 그의 말에 '내가 왜 이 사람들을 도와야하지?'하고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있던 파마리나는 얼
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소 단원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오랫동안 사막을 함께 쓸고(?) 다녔던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의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루루루루루"
"녀석이 우릴 찾고 있군. 그럼 흩어지자."
토실흐덴의 눈빛을 신호로 그들이 흩어지자마자 땅에서 피로운웜피스가 머리를 빠끔히(?) 내밀었다. 고개를 내민 주
변의 지변이 완전히 파열되는 걸 본 케이소들은 자신들이 저런 놈의 미끼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에 무의식적으로 신
께 기도를 올렸다.
"신이여, 불공평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공격을 해야 하는 거야?"
죽어버리는 것은 미끼가 되는 것으로서는 성공일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더 없는 실패라는 걸 아는 그들은
빠르게 다리를 움직이며 피로운웜피스의 주위를 맴돌았다.
시즈의 말대로 거대한 지렁이는 후각으로 먹이가 있는 곳을 알아채는지 주위에서 온통 먹이의 냄새가 몰렸다, 흩어
졌다, 하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냄새로 어지럼증을 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놈은 거대한 몸집과는
달리 뇌용량은 한없이 부족한지 무작정 냄새를 따라서 머리를 처박았다. 그 무식함은 오히려 득이었다. 왜냐하면 다
른 남자들에 비해 움직임이 느리고 하체의 버티는 힘이 부족한 아리에가 지반이 흔들리자 비틀댔기 때문이다. 피로
운웜피스가 본능대로 달려든 것은 자명한 일.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순식간에 달려드는 거대한 지렁이의 위압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누군가 아리에를 밀쳤다.
"멍청히 서있지마!"
정면으로 피로운웜피스에게 뛰어든 자는 바로 토실흐덴이었다. 그의 건장한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만곡도를
대단한 속도로 밀고 피로운웜피스에게 짓겨 들었다. 그 역시 굵기의 지름이 사람 정도인 지렁이에게 섬짓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눈은 화산만큼이나 투지의 빛이 쏟아졌다.
'비록 용병의 마구잡이식 검술이나 난 지금껏 함께 살아온 내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이런 지렁이 따위에게
밀릴 정도의 약한 자부심이 아니다!'
그런 자부심의 검에게서 위기를 느꼈던 것일까? 피로운웜피스는 그 거대한 몸과 두꺼운 갑옷을 둘렀으면서도 덮쳐
가던 아리에를 포기하고 토실흐덴에게 맞섰다. 가볍게 귓가를 울리는 타격음 속에 묵직한 마찰음이 섟여있는 게 분
명 토실흐덴의 검이 피로운웜피스의 거죽에 흠짐을 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겨우 용기가 생긴 키틀볼도 성인 남자의
몸통만큼 육중한 도끼 날을 내리쳤다.
'손가락 만할 때는 머리털 하나도 건들지 못하는 지렁이도 저렇게 거대해지면 무서운 존재일 수밖에 없군. 결국 육
체의 차이로군.'
시즈는 그들의 격투를 멀리에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인간의 두뇌가 발전하고 새로운 지식들이 개발된다고
해도 개인의 목숨을 지키는 일은 사실 신체를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작은아이들의 싸움은 그렇다하여도
어른들의 주먹다짐, 수많은 제도와 규율를 만들어놓은 인간 사회에서 그 육체를 이용한 힘 겨루기가 어찌하여 통용
되는가. '주먹이 법보다 빠르다'는 말 역시 틀리지 않은 말일 것이다. 그런 신체적인, 신경적인 능력이 본능으로 살
아가는 동물이나, 곤충에게 인간이 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육체적인 능력에서 떨어질지는 몰라도 우리
에게는 기술, 두뇌가 있다.'라고 외쳐대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족이 말하는 위로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난 지식인들이 무식하다고 말하는 그 힘을 길러온 것이다.'
시즈는 자잘한 근육까지 힘을 조절할 수 있는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비록 체질상으로 우락부락할 정도는 아
니었지만 그가 원하는 힘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었다.
"시즈! 조심해!"
자기식대로의 근육적인(?) 철학에 빠져있던 시즈는 전투 중에 한 눈을 팔면 목숨을 잃는 것은 손안에 들어있는 잠
자리의 날개를 뜯어내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은 인식했다. 물론 일년동안 겪은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이미 알고 있
었지만 눈앞에서 지독한 냄새와 함께 사막의 모래를 녹이는 녹색의 액체를 바라본다면 한층 새롭게 인식될 것이다.
피로운웜피스는 외부 신체적으로 거대하다는 장점을 이용한 근접 공격 외에도 침을 뱉어대는 원거리 공격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어째서 다른 모래를 녹일 정도의 산을 몸에 지니고 있을 수 있는지 신기했지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요액(尿液)은 다른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었으니까.
자신에게 득이 되는 존재가 다른 이에게 해가 되는 경우는 이 세상에 널리고도 널린 일이었다.
다른 이 같으면 호들갑을 떨면서 뒤로 물러섰겠지만 시즈는 그저 무심한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경계를 표할 뿐이었
다.
피로운웜피스는 오늘따라 강력하게 부딪혀 오는 먹이들의 저항에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먹이들은 그들의 사회에서 로스트 최고의 용병이라고 인정받는 케이소였다. 한 군데만 집중적으로 노리며 달려들던
그들은 갑작스런 피로운웜피스의 독액 공격을 노련하게 피하고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특히 구릿빛 피부가 잘 익은
살덩이를 가진 먹이의 반항은 거세어 콜리언(집게의 크기가 1.5m에 달하고 꼬리까지의 길이는 5m에 이르는 거대한
전갈. 사막 암산의 골짜기에서 서식한다.)의 집게 공격에도 흠집이 나지 않는 비늘이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잘려
나갔다. 피로운웜피스는 뒤로 물러서며 다시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그 순간,
"자아! 모두 비켜요!"하고 보를레스가 발을 구르며 손을 흔들었다. 혹시라도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봐 몸으로 표현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은 파마리나도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육감적인 표현방법이야."
키틀볼이 손에 들었던 두 개의 커다란 도끼 중 하나를 던지고 마지막으로 물러서며 외쳤다.
"됐어! 비밀무기를 살포하라고!"
보를레스의 행동은 시즈의 설명과는 조금 틀렸다. 아예 주머니 채로 암벽 아래로 강하게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뛰어났다. 피로운웜피스의 몸 중간 부근에서 퍼엉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흩어지기 시작
했다.
"쿠워워워워!"
몸이 타들어 가는 걸 느끼며 피로운웜피스가 발버둥치자 그 몸에 충돌한 돌산이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다. 보를레스
는 엎드려 주위의 튀어나온 물체를 꽉 잡고 시즈와 파마리나가 마법을 발동시키기를 기다렸다. 시작은 긴 주문의
영창을 마치고 발현만을 기다리고 있던 파마리나였다.
"'그대'라고 표현되는 존재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멈춰질지니!"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피로운웜피스의 발광이 쥐죽은 것처럼 멈춰버렸다. 몸이 녹아가면서도 부들부들 떨며 애달픈
비명만 질러댔다. 파마리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즈를 재촉했다.
"어서 해요! 워낙 힘이 엄청난 녀석이라서 얼마 못 버틴다고요."
"끊임없이 이어져있는 이에게‥ 내 옆에 함께 있는 이를 붙잡고 부탁하나니 멀리 있는 그대여 내 부름을 들으시오.
나의 뜻대로 잠시 그대는 따라주시오‥!"
처음 싸웠을 때부터 느꼈지만 시즈가 마법을 구현할 때 움직이는 마나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번에도
그 범위는 사막 전체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여서 바로 옆에 있던 파마리나는 그 거대한 존재감에 마른침을 계속 삼
켰다.
―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공기가, 바람이 시즈의 청을 수락하고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소리였다. 케이소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싸웠던 존재의
주위의 공기가 멈춰버렸다는 것을 가만히 떠있는 모래와 붕산가루로 알 수 있었다. 공기 중의 불순물들은 잠시 멈
춰 햇빛에 아름답게 반짝이다가 시즈의 의지에 따라서 피로운웜피스의 비늘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아름다
움의 다음 과정은 끔찍함으로 나타났다. 공기가 차단되었기에 들려오던 비명소리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조금씩 날리
게 하는 저녁의 사막, 암산에 둘러싸인 지역에서는 지름이 10m나 되는 광대한 토네이도가 일어났다. 공기가 자연적
으로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강대한 힘 중에서도 막강한 힘이었다. 곧 아우성이 사라지면서 거대한 존재가 토네이도
속에 완전히 갇혀버리자 파마리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멀리 자신의 통제에 반발하던 존재보다 옆에서 느껴지던 엄
청난 위압감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위압감을 안겨준 존재는 보통의 마법사라면 탈진하여 몇 일 밤낮을 쉬어야할
마법을 사용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숨만 몇 번 고를 뿐이었다.
'정말 불공평해.'
그게 현재 그녀의 머리 속을 채우는 생각이었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솟구치던 토네이도는 주위의 흩어졌던 붕산가루만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까지도 빨아들였다. 붕
산을 피하여 도망갔던 케이소들과, 암벽 위에 있던 보를레스는 바위틈으로 몸을 껴놓고 잡아당기는 바람의 세력과
전투를 벌어야 했다.
"꺄아아아아악!"
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풍압에 못 이겨 아리에의 몸이 공중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듀쿠스가 팔을 잡고 있었지만 그
는 키틀볼처럼 싸움으로 단련된 완력과 악력을 가지지는 못했으므로 견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다가 손을 놓고
말았다. 바람 속에서 가냘픈 비명을 지르며 아리에가 바람에 휩쓸렸다.
시즈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도 동료들이 바람에 휩쓸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었었다. 다만 그들이 견뎌주리
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무래도 무리한 신용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땅 속에 박혀있는 피로운웜피스의 신체를 모두 끌
어내지 못한 상태로 아쉬운 심정을 감추며 의지를 누그러뜨렸다. 토네이도의 강렬하고도 우아한 자태가 붕괴되자
막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던 아리에는 공중에 붕하고 떠있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인간은 공중에서 빨리 움직
일 때보다 몸 안의 진공상태를 느낄 때 한 순간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아리에 또한 인간인지라 공포스러운
감각이 얌전히 지나갈 리는 없었다. 다시 한 번 강렬한 비명이 허공을 수놓으려는 순간, 보를레스가 날쌔게 그녀를
받아들었다. 그것으로 아리에가 보를레스가 엎드려 있던 암산의 정상부근까지 떠올랐다는 설명은 불필요하리라. 암
벽의 돌출부를 발로 차며 낙하 속도를 줄이는 보를레스는 한 마리의 새가 천천히 착륙을 시도하듯 여유 있었다.
"쿠르르르르‥"
그러나 독약이나 다름없는 붕산이 비늘 사이마다 스며들고 몸을 동강내버릴 듯한 토네이도에 휘말려서도 생명의 끈
을 놓지 않은 생물체의 끈질긴 속삭임이 들려오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다. 허파의 폐포까지 긴장으로 곤두서게 만드
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자 보를레스는 다급해졌다. 아리에를 왼손으로 옮긴 그는 힘겹게- 바스타드 소드는 검신
이 길어 허리를 돌리지 않고 뽑기는 어렵다 -검을 빼어들었다. 고통에 작은 꿈틀거림만을 보이고 있지만 다시 발광
이라도 했다가는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단숨에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다. 피로운웜피스도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
르는 한 종속인 이상 본능은 녀석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결정짓게 하는 광범위한 조건이었으므로 보이지 않는 살
기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휘익― !"
그 휘파람은 보통 사람이 흉내내기에는 너무나 고성(高聲)이라 언 듯 느끼기에는 토네이도의 남은 기세로 일어나는
바람의 소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피로운웜피스의 민첩한 반응은 그것이 일종의 신호라는 걸 암시시켰다. 꼬불꼬불한
미로에서도 사람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시즈였다. 사방이 모래와 바위밖에 없는 사막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미행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자연스럽게 끌어낼 기회를 찾고 있던 그는 외침의 음성이 많아야 14
세 소년 정도로 예상보다 훨씬 어리다는데 눈썹을 찡그렸다. 달려오던 이들도 놀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
온 방향으로 시선을 이동시켰다. 위험하기로 이름이 대륙에서 손을 꼽는 '풍암의바다'라는 걸 짚어볼 때 과연 이 장
소가 있을 수 있는가라고 의심하게 만들 앳된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 나쁜 놈들아! 웜피스를 공격하면 그냥 두지 않겠어!"
"미안하지만 우리는 정당방위야. 먼저 공격한 건 저쪽이라고. 한 명은 벌써 잡아먹혔어."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사막 부족에게 널리 퍼져있는 소레인 교의 전통적인 사제 복장을 입고
있었다. 사막의 왕국, 볼케이스에서는 대륙에 가장 널리 퍼진 레이모하와 함께 예로부터 '모래와 구성'을 맡고 있는
여신, 실러오나를 섬겼는데 그녀는 '지나친 실러오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신이었다. 그러나 소레인 교는 함부
로 사제를 맞아들이지 않는다. 땅이 사막의 햇발을 받아 이리저리 갈라치고 다시 홍수에 축축해지기를 반복하는 것
과 같은 인생을 겪어야 진실로 신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소레인 교의 사제들은 메마른
사막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굉장히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어쨌든 예의 이유로 소레인 교의 사제 중에 어린 사
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알려진 바로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사막의 여러 부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듀쿠스의 머리 속에도 저토록 간소하기 짝이 없다못해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복장은 소레인 교의 사제들
만이 입을 수 있게 허용된 법의가 틀림없었다.
잠시 사막의 모래 바람 소리가 귓가를 가득히 메웠다. 보를레스의 말에 소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미간
을 찌푸린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더듬거리다가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럴 리가!? 난 다만 겁을 줘서 쫓아 보내라고 했어. 당신들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지난번에도 사막의 의지가
담겨있는 인형을 훔치러 왔잖아! 웜피스가 내 말을 어길 리가 없는데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웜피스, 이 사람들을
혼내줘!"
소년의 명령에 충실히 피로운웜피스는 몸을 날렸다. 그러나 아무도 명령이 나왔던 입에서 비명도 터질 줄은 생각하
기 못했다.
"아아아아아악!"
피로운웜피스가 입을 들이댄 대상은 소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비 자세를 하고 준비하고 있던 토실흐덴이 박차
고 검을 휘둘렀다.
푸욱! 단단했던 갑주가 녹아버린 녀석의 몸에 토실흐덴의 검이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단단한 보호벽이 없어도 두께
가 웬만한 곰 다섯 마리의 허리를 묶어 놓았을 정도로 굵었기에 박히기만 했을 뿐 자를 수가 없었다. 지척에서 거
대한 몸체가 발버둥치자 용병 일행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물러서 있으세요."하고 음성이 모두의 귀를 스쳤다. 언 듯 들어서 '오늘 아침 따온 이 다과 좀 들어보세요.'하는 아
낙의 친절처럼 온화한 목소리를 쫓아 시선을 가져간 이들은 놀라움을 참을 수 없었다. 용병국 서부 제일의 용병들,
세이서스의 '침묵하는 개구리' 시즈의 허공을 나는 모습은 잠시 바람이 사라져 부유하는 모래 속에서 단아한 아름
다움마저 감돌았다. 그 목소리와 광경에 이어진 것은 앞의 두 가지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머리 부근이 사라진
거대한 지렁이 몸에서 녹색의 채액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이 어찌 아름다움과 인연이 있겠는가. 있다고 말할 수 있
는 사람은 그 취향을 깊숙이 의심해볼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시즈의 공격은 애벌레가 갑자기 벌로 변해 독침을 쏜
것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털썩!
"허억! 헉! 헉! 왜!? 왜에!?"
피로운웜피스가 무섭게 보인 것은 소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끝없는 암흑이 감춰진 입은 공포와 함께 그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잠깐동안 긴장이 풀려버린 소년이 털썩하고 땅바닥에 엉덩이를 깔며 멈췄던 숨을 급히 내뿜었다.
현기(賢氣)대신 눈매를 흐르는 눈물, 생명의 위험을 벗어난 안도감과 이해할 수 없다는 의구심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변질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도를 검집에 집어넣으며 시즈는 담담하게 말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검 형식과 비슷해 '고조예도'라는 이름
을 가진 그의 검은 한 방울의 채액도 남김없이 모래로 떨군 채 흑색의 집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엄청난 움직임을
보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인 그에게 용병 일행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금 전의 충격으로 멍하니 땅만 쳐다
보는 소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사실 피로운웜피스는 사막에서 죽은 동물의 사체를 주식으로 하므로 생물(生物)은 건드는 법이 없었으나 소년의 말
대로 침입해오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동안, 싱싱한 피 맛을 알게 됐다. 따스하면서 약간 달착지근한 혈향에 빠져 본
래의 식성을 잊게 된 녀석은 끝내 자신의 친구조차 먹이로 착각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더욱이 붕산의 영향으로 엉
망이 된 감각기관도 한 몫을 톡톡히 했다.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는 소년에게서는 방금 전의 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괜찮니?"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리에가 다가가 살짝 보듬어 안았지만 한 마디 물음 외에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시즈
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청년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동물은 그 습성을 갑자기 벗어나면 적응하면서도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이 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 피로운웜피스
또한, 그렇지 않았나 싶군요. 그대가 모르는 사이에 생피을 선호하게 된 겁니다. 그대는 멀리서 신호를 보내니 상황
을 알기 힘들었을 겁니다. 사람을 완전히 삼켜버린다면 그야말로 감쪽같겠지요. 어쨌든 가장 진화적이고 적응적이라
는 인간조차 원래의 습관이나 습성을 바꾸면 신경질적으로 변하는데 본능에 충실한 다른 생물이 그리 되었으니‥.
그대가 사람을 해치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것이 진실이고, 피로운웜피스가 생물을 먹지 않는다는 게 진실입니다‥. 그
러나 진실은 상황에 따라 변질될 수도 있는 것이랍니다. 진실의 변화는 예측하기 힘들고 그대에게는 그대의 진실이
옳은 것이었으니 그만 슬퍼하십시오. 그보다 왜 우리를 공격했는지 알려주었으면 좋겠군요."
다 좋았지만 역시 용건을 놓치지 않는 시즈였다. 어찌 보면 냉혹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기에 누구도 대답을 듣는
것을 막지 않지 않았다. 아리에도 소년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며 달랬다.
"말해주지 않을래? 우리를 왜 공격했지?"
"여러분은 '인형' 때문에 오신 분들이 아닌 겁니까?"
이미 상황을 판단할 줄 아는 냉정함을 되찾은 소년이었다. 자신을 '블이세미트 케이론'이라고 소개한 그는 대답 대
신 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자 얼굴을 찌푸리며 시즈에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긴 머리칼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모래의 빛깔을 띤 머리칼을 가진 그라면 이번에도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
다.(제법 눈치가 빠른 소년이다.) 소년의 기대를 청년은 저버리지 않았다. 자세하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러울 정도로
눈 앞에 서있는 이들의 여행경과 과정과 이유를 알게 된 소년은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이거 제가 완전히 오해를 한 모양이네요."
"이제 우리를 공격한 이유에 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방금 전의 말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군요."
소년은 공감하는 표정의 사람들을 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후드 사이로 시야를 어지럽게 하는 모래가
성가셔서 우선은 이야기할 장소로 일행을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한 행동이 죄송해서라도 당연히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그 전에 저를 따라오세요. 여기는 대화하기에 좋은 장
소가 아니잖아요?"
소년은 방금 전까지 일행에게 적의를 불태웠던 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활달했다. 가벼운 윙크로 '블리세미
트 케이론'이라는 이름에 밝은 이미지를 부여한 그는 황량한 바람에 올라탄 듯한 발걸음으로 용병 일행을 이끌었
다.
"이제 다 왔어요. 바로 저 곳이에요."
"대화 열 번만 하면 '풍암의 사막'을 횡단하겠군."
"뭐 힘드셨다면 죄송해요‥."
블리세미트는 입가에 겸연쩍은 미소를 띠고 불만스러운 보를레스를 피했다. 소년은 어린 나이와 그에 따른 이익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표정에 겉도는 가식의 티를 숨길 수는 없었으나 그게 은근히 마음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하며 보를레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걸음을 옮겼다. 블리세미트가 말한 유적은 공교롭게도 시즈들
이 목적에 두고 있던 곳과 동일한 듯 싶었다. 인간이 만들었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유적은 광활한 사막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언 듯 봐서는 고대부터 사막에 분포하는 피라미드 형식의 건물이었는데 구성하는 벽돌의 색깔이 적색
을 띠어 가까이 가 본다면 노을이 진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벽돌의 크기가 일정치 않아 피라미드의 빗면
이 뒤죽박죽하여 어린아이가 나무토막으로 장난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조잡하다 말할 수 있으리.
시즈는 유적에 다가갈수록 인간이라는 존재의 만들어놓은 위대함에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벽돌의 불규칙
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유적의 겉면을 휘휘 싸고 있는 한 마리의 뱀이 나타난다. 거대한
붉은 뱀을 향해 주위에 즐비한 선인장들은 경배하고 있는 게 보였다. 듀쿠스를 필두로 한 이방인들은 허락 받지 않
은 방문에도 선인장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허리를 구부려서 말이다.
"여기가 바로 항간에 몇 백년 동안 소문으로만 내려오던 '붉은 뱀의 사원'인가? 대륙에서 가장 보기 힘들다는 전설
의 유적‥."
"전 매일 지겹도록 보는 걸요. 다루기 힘든 몬스터가 제법 많고 주위에는 유사가 잔뜩 있기는 하지만 못 찾을 정도
는 아니라고요."
못 찾을 정도였다. 시즈라는 상식을 벗어난 인물이 있었기에 유사를 건넜지만, 아니었다면 하루 이상의 시간은 더
지체되었을 게 뻔했다.
'결과는 단 하나의 조건이 변함으로 수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아리에는 귀족 시절 가정교사에게 배웠던 말을 떠올렸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유사에 대하여 시즈는 '빠져 죽는다.'
를 '죽지 않는다'로 바꿔놓은 것뿐이었지만 갈증 속에서 보내는 사막에서의 한 두 시간이 생명의 모래시계라는 걸
생각하면 결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 컸다.
토실흐덴은 지나가는 길에 선인장을 툭툭 차보며 혀도 찼다.
"신기한 걸!? 선인장이 유적을 향해 줄기를 구부리고 있다니, 마치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린다는 해바라기 같잖아.
아니, 허리까지 구브렸으니 그보다 더한가? 키틀볼, 이런 광경을 본 적 있어요?"
"아니, 나도 처음이구먼‥.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관심이 온통 선인장에게 쏠려 걸음을 떼지 못하는 그들의 엉덩이를 듀쿠스가 걷어차며 재촉했다.
"이해할 수 있도록 머리를 바닥에 박아 선인장을 만들어쥬랴? 빨리 가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