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선인장의 성지
해가 모래 언덕 너머에서 긴 머리칼을 하늘에 걸친 시간, 자칭 드워프 제일의 현자이자 대륙 학식의 금자탑 아스틴
네글로드의 일곱 현인 중 한 명인 토루반은 한 쪽 무릎을 꿇어 자신에게 키를 맞춘 청년을 살짝 끌어안았다가 놓고
주름진 노안(老眼)으로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세이서스가에 닥친 사건에 대해 듣긴 했지만‥ 변했군‥. 아주 슬픈 변신이야‥."
빙그레 미소를 짓는 시즈의 모습은 예전으로 돌아간 듯 하면서도 달랐다. 용병이 된 후의 모습만 알고 있는 아리에
과 토실흐덴 일행에게는 그의 입가가 약간이나마 미소의 형태를 띄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눈꺼풀을 뒤집어서 시신경
의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로 시즈의 미소는 귀했지만. 보를레스는 약간이나마 그가 예전의 웃음을 찾았다는
데 기뻐했다.
"또 다시 은발이 되어버렸군. 괜찮은 건가? 자네, 전에는 고통에 힘겨워했는데‥. 행동을 보니 눈동자도 투명해졌을
뿐 시력을 잃지는 않았군."
초췌하진 자신들의 몸에 학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고통스러웠던 시절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젊은 친우(親友)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반가움과 같이 찾아온 슬픔에 피브드닌은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옆에서 조용히 지켜
보던 사론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론, 자네 덕에 우리가 사는 군. 역시 아스틴 최고의 수행기사야."
"별말씀을요. 시즈님이 아니셨다면 시간을 맞추지 못했을 겁니다."
"하하! 또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도 못했을 방법으로 온 모양이군."
"특이하다면 특이하죠. 유사를 몸으로 건넜으니 말입니다."
"오‥ 유사를!"
역시 그들은 학자인지 사막의 늪이라고 불리는 유사를 어떻게 건넜는지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사론은 상황의
이해를 원하는 또 다른 눈동자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아‥ 토루반님, 이 쪽이 바로 의뢰를 수락한 용병들입니다."
"그런가? '풍암의 바다'가 천혜(天惠)의 위험지역이라는 걸 알면서도 의뢰를 받아들이다니‥. 사막의 용병이라면 더
욱 오기 어렵거늘, 그 용기에 감탄하며 또한 감사하네."
"하하하! 우리는 다만 의뢰에 걸린 막대한 금액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무모한 용병일 뿐입니다. 대학자께서 칭찬하
실 게 아닙니다."
웬만큼 수양이 된 사람이라면 욕설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심어린 칭찬은 아무리 현인이라고 해도 가볍
게 지나치지 못하고 마음의 한 구석을 내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장 천한 직업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용병, 토
실흐덴이 칭찬을 의연하게 받아넘기자 토루반은 더욱 감탄했다.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토실흐덴의
뒤에 서 있던 키틀볼이 물었다.
"시즈와 안면이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보아하니 지금은 용병이 된 모양이구려."하고 피브드닌이 말했다. 대학자에게 물었는데 초췌한 꼴에
가늘고 얍삽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대신 대답하자 키틀볼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조용히 경청하는
것에 그 또한 존경받는 학자라는 걸 알고 내심 놀라며 공손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이서스 용병단은 용병국 서부 제일의 실력자들 중 손을 꼽는 수에 들어갑니다"
"시즈는 학자인 시절에도 대단했다오. '마땅찮은 시즈'라면 대륙의 학자들 가운데 모르는 이가 드물었을 정도지."
피브드닌의 말에 키틀볼은 노골적으로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땅찮은 시즈'. 그 이름으로 하여 대륙의 중심을 차지한 나라가 얼마나 흔들렸던가. 학자들은 몇 세기에 나올 만
한 신인(神人)을 무참히 제거해버린 당국의 처세에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으니 그나마 세상의 여러 소문에 민감한
용병들로서 모를 수가 없었다. 노골적으로 경악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찬바람이 이는 모래벌판에 내버려두기가 못했
는지 블리세미트와 같은 사제복의 남자가 안으로 이들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반가워하시는 기분은 알겠으나 밖이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시지요. 손님들을 밖에 세워두는 것은
실러오나님의 도리에 어긋납니다."
"자아‥ 이 술을 한 잔 드십시오. 이 곳은 '풍암의 바다'는 대륙 북방에 자리하고 있기에 밤이 되면 툰드라의 횡포
가 몸 속 깊이 스며든답니다."
사제가 권하는 술을 매우 쓰고 취향이 독특했다. 몸의 수분이 물보다 술로 되어있을지 모른다는 종족, 드워프 토루
반조차도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잔을 내려놓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보통 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금계(禁戒)에 금주
(禁酒)를 넣고 있었고 소레인 교단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레인 교의 신자인 쿠라마스는 명색이 사제라는
남자를 눈썹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술맛 때문이라고 생각한 남자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너무 술이 독한 모양이군요. 하지만 전갈의 피로 만든 롤큰(술의 이름)은 몸의 체온을 올려주는데 아주 좋은 효과
를 가지고 있으니 약간이라도 마시는 게 이 밤을 좀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어요. 시가로는 13 타로운에 가까운 엄
청난 고가품(高價品)이지만 외부에서 오신 분들은 툰드라의 밤에 적응하시기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내놓는 것이랍
니다."
번쩍! 역시 용병은 돈에 반응하는가? 금세 쿠라마스의 시선은 존경으로 가득 차 버렸고 실러오나께 '이토록 친절한
사제를 보내주심에 감사드립니다.'하고 마음속으로 감사드렸다.
취기로 인해 얼굴이 대추 빛으로 얼큰하게 달아오른 토루반이 짧은 팔을 내밀어 롤큰의 병을 잡았다. 일명 '병나발
의 초래'를 전개할만한 눈빛과 동작이었기에 사제의 눈가가 경련으로 방정을 떨었지만 눈치없는 드워프는 주먹을
꽈악 쥐어 보이며 값진 주향(酒香)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무언가 술과 더불어 그의 과장적인 행동을 만들어내는 기
분좋은 요인이 있을 법도 한데‥.
"허허헛! 내 생애에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로군. 죽은 줄만 알았던 현우(賢友)를 다시 찾게 되고‥ 400년에 가까
운 일생을 살면서 말로만 들었던 '사막의 신부'를 보게 될 줄이야."
토루반은 무려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건량 몇 개로 굶주린 배를 달래는 고달픈 일을 겪었으면서도 친인과의,
그리고 타인과의 만남에 대한 반가움에 모두 잊어 버렸다.
"사막의 신부요!?"
사제복의 남자는 소처럼 검고 커다란 눈을 굴리며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는 걸 시인하듯 볼을 긁적였다. '붉은 뱀의
사원' 내에서 바깥 세상의 소식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는 거의 없었다. 있다면 술에 은근한 관심을 보이면서도 쏨
살같은 남자의 방어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던 블리세미트가 유일할 것이다.
"에크라이 사제님, 바깥 사람들은 저희를 그렇게 부르나봐요."
"그런 것 같구나. 그런데 블리세미트‥ 왜 네 손에 잔이 쥐어져 있는 거지? 분명 붉은 색이 연하게 감도는 액체는
롤큰이 아닌가 싶은데‥?"
"아이‥ 사제님도‥. 이건 피가 떨어져서 그래요. 여기 보라고요."
시즈들이 전투할 때 일으킨 토네이도로 날아온 돌멩이에 약간 살갗이 벌어졌던 걸 에크라이에게 자랑스럽게 내밀며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소년의 붉은 입술에서 뜨거운 입김(?)이 뿜어져 나왔을 때 에크라이는 실수를 통감했지만 이
미 넘어가 버린 술을 블리세미트의 목을 쥐고 토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사막의 신부' 또는 '사막의 사제'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의적으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세간에 은밀한 자들로
인식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사막 한 복판에서 실러오나를 믿는 사제들의 집단으로, 현재 공인된 교단에서는 잊혀
져버린 고행- 신체적인 것 뿐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한다-까지 행했는데 진정으로 신을 믿기 위해 사막에
몸을 던진 자들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사막의 신부'들이 가진 신앙의 힘은 대단하여 신성력은 모든 종단을 통
틀어 따라올 사제들이 없다고 알려졌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280년 전, 대륙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신성력을 가졌던 성
자 일로진스도 '사막의 신부'라는 말이 나돌았겠는가. 마법사나 정령술사들에게 있어서도 '사막의 신부'들은 입술에
서 떨어지지 않는 화제거리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생명력이 전무하다 싶은-다른 지역에 비해-사막의 생태계와 친
화력을 키워왔기에 자연 친화력 또한 대단했기 때문이다. 단식 등의 고행을 하기에 신체는 말랐지만 사원의 모든
이들이 짓는 미소는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어머니의 품처럼 부드러웠다. 술이 몇 잔 오가고 그릇이 비워져갈 무렵,
이 평화로운 사제의 작은 일원 블리세미트는 시즈들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다. 소년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붉은 뱀의 사원'의 원장 에크라이는 점점 얼굴빛이 어두워져 갔다.
그들이 쳐들어 왔을 때 우리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어요. 검은 갑옷들이 가을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 않
게 아름다웠던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사막의 모래 위로 지저분한 말발굽자국을 남기면 달려왔지요. 악적들의 검술
실력은 어린 저로서는 듣도보도 못한 것이었지만 만곡도를 약간이나마 다룰 줄 알기에 그들이 휘둘러대는 커다란
검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있었어요. 하루라도 신의 경건함을 잊지 않고 살아온 사제님들의 가슴에서는 붉은 피
가 쏟아지고 그 피는 매일같이 청소하던 사원의 바닥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남았어요.
"사막의 의지를 담은 인형을 내놓아라."
이게 잔혹스러운 행각을 벌인 악적들이 사원을 쳐들어온 목적이었지요. 여기서 우선은 '인형'에 대해 알려 드릴게
요. 저희 사원에는 보를레스님의 팔뚝만한 돌인형이 있어요. 일종의 골렘인데 설마 팔뚝만한 크기로 산을 들어올리
는 괴력을 바란 것은 아니겠지요? 전설에 말하기를 '사막의 의지를 품고 있다는 인형'은 고대에 이 곳이 사막이 되
어버리기 전의 문자와 마법을 담고 있는 유일한 유산이라고 했어요. 볼케이스 최고의 고문연구가였던 파일스렐루는
수도, 카글의 왕립 도서관에서 한 고서를 해석하고 서적의 예언을 발표하기를 '저‥ 사막의 한복판, 바람이 날카로
운 쓰다듬은 곳에는 붉은 뱀이 있다고 합니다. 그 붉은 뱀은 작고 귀여운 인형이 가진 수 만년 전의 지식이 세상으
로 나가는 것을 위해 막고 있지만 흰 모래 바닥이 검은 물결에 가려지고 성스러운 피가 뱀의 몸을 적시면 인형은
눈을 뜰 것입니다.'라고 했지요. 맞죠, 에크라이 사제님?
이 순간 소년의 표정은 '나 잘했죠?'하고 칭찬해달라는 강아지를 닮아있었기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에크라이가 씁쓸한 표정으로 소년의 말을 받으면서 웃음은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웃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가벼운 일이 아니니까요. 지금부터는 제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도 저희가 가진
믿음의 힘은 미천한 것이나 실러오나께서는 제 몸 하나를 지킬 능력 정도는 충분히 부여하셨기에 '그들'을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사원에서는 아무런 욕심 없이 실러오나를 경배하며 함께 친애하던 함께 존경했던 이들을 일곱이나
사막 저편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저희는 고행이라는 수행과 생명력이라고는 없는 사막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신에게
향하는 참된 길을 찾고 있지만 또 다른 임무가 있습니다. 블리세미트의 말대로 수 만년을 이어온, 절대로 깨져서는
안 되는‥. 하지만 지금 약속이, 금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토루반님의 일행을 몬스터들로 하여금 위협한 것도 혹
시 있을지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휩쓸고 간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기 때
문에 저희는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후 에크라이 사제는 토루반과 피브드닌 일행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괜찮다는 표현으로 토루
반들이 손을 좌우로 흔들 때 다시 블리세미트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에크라이 사제님이 사과할 정도는 아니에요. 솔직히 크라인 대사제님께서도 사람이 찾아온 것은 100년동안 처음 보
았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한 달만에 두 번이나 왔으니 같은 무리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그들은 자신들이
야말로 세일피어론아드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이며 시간마저도 손에 쥐고 있는 '원의 힘'을 가진 자들이라고 했어
요. 수많은 기사가 휘두르는 검과 무지막지한 위력을 가진 술사들의 마법이 실러오나의 힘만을 믿는 저에게 공포를
줄 정도였다고요.
"원의 힘?"라는 말이 시즈는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되묻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블리세미트는 눈을 작게 떠서
그 날을 회상하듯 말했다.
"그래요. '역사의 고리'라고 말했어."
* * *
"노르벨. 노르벨!"
"그렇게 연신 부르짖지 않아도 제 귀는 뚫려있답니다. 무슨 일이죠, 바스티너?"
노르벨 플루타사는 푸른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가 묘하게 어울리는 이지적인 외모를 지닌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허벌죽하게 벌어진 입가는 안타깝게도 그런 장점을 눈곱만큼도 살리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는 그에게 철걱철걱하고
묵직한 쇳소리를 내며 검은 갑옷을 입은 자가 걸어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일어나는 모래가 갑옷의 무게를 암묵
적으로 말해주었지만 착용자는 가벼운 비단을 몸에 걸친 듯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지? 그래봤자 우리가 내일 아침이면 쓸어버릴 녀석들이잖아."
"바스티너‥ 저들은 소레인 교단의 전설 중에 하나인 '사막의 신부'라고요. 일주일 전에도 된통 당했지 않습니까."
하고 푸념을 털어놓으며 노르벨은 망원경을 바스티너에게 건넸다. 동방에서 건너왔다고 하는 신기한 물품인 망원경
은 1km 전방의 상황을 바스티너의 눈알에 정확하게 구현했다.
"그거야 이상하게도 저 사원에서는 마법의 위력이 절반이하로 반감되어 버리니까 그렇지. 아니었다면 벌써 싸움은
끝났을 걸. 그런데 저들은 누구지? 우리말고도 '인형'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나?"
"설마요. 그랬다면 사제들이 저렇게 살갑게 대할 리가 없죠."
"어쨌든 사제들과 친하다면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들은 아니겠군. ‥!!"
중얼거리던 바스티너의 커다란 눈동자-가면 속의 눈을 보이지 않았지만 망원경 렌즈로 커다랗게 확대된 눈동자-는
한 인영을 향한 후 급속하게 동공을 확대했다. 고개를 흔들며 머리 속에 잡스러운 영상을 도려낸 바스티너는 다시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저‥ 저‥ 저 사람은 설마‥."
"왜 그래요, 바스티너? 점심을 잘못 먹은 게 이제야 탈이 난 거에요?"
부들부들 떨어대는 검은 갑옷을 향해 노르벨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였다. 그의 생각에는 두꺼운 갑
옷을 벗고 일을 본다는 게 너무나 힘든 고역일 듯 했다.
"호, 혹시 노르벨‥ 저 흰 머리의 남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어?"
"흰머리의?"
늙은 드워프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있는, 부드러운 미소가 마치 산들바람같은 이‥. 놀라운 것을 본 사람처럼 노
르벨은 발작적으로 일어서며 외쳤다.
"헉! 저 사람!!!"
"노르벨, 알고 있어? 누구지?"
"저 사람, 왜 저렇게 특이하게 생겼데요? 머리가 왜 저래!"
쾅! 노르벨의 머리가 분명 미스릴 이상의 강도를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며 바스티너는 몸을 돌렸다.
분명히 '그'였어‥.
― 공자님은 작은 것도 혼자서 짊어지려고 하는군요.
― 작은 것이니까 짊어지려고 하는 거죠. 무거운 것이었다면 당장 내던지고 도망쳤을 겁니다.
모닥불에 비친 온화한 미소,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잡던 새하얀 손가락. 떠올릴 때마다 무심결의 행복을 가져다주었
던 '그'‥. 옆에 있던 자는 분명 추위에 보들보들 떨던, 이름이 보를레스인가 하는 청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 때문에!?"
단순한 귀족 청년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꽤나 위세 높은 집안의 자제이며 뛰어난 마법사였으면서도 겸손했
던 태도가 인상에 남았던 사람이이지만 고작 브로큰 스도무 하나도 생물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겨우 이길 정도였을
뿐이다. 그 실력에서 전설적인 불모지이자 위험지역인 '풍암의 바다'에 올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노르벨 또한 놀라고 있었다. 그의 뇌를 공포스럽게 자극하는 존재는 바스티너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놀라는
이유는 완전히 틀렸다.
'은백색의 빛나는 머리칼‥. 마치 음유술사들이 의지를 과도하게 운용했을 때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하지만 후유증
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백은의 머리칼을 가진 존재는‥ 바람을 노래하
는 이 밖에 없다.'
동그랗게 오무라져 있던 입술이 얇게 펴지며 미소를 만들어냈다.
"뭐 상관없지. 죽이면 되니까. 정말로 '원의 힘'로서도 두려워하는 그라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겠군. 쿡쿡‥."
한 사람의 살기어린, 또 한 사람의 애수어린 설레임 속에 노을은 사막의 검은 장막에 밀려나가고 있었다.
* * *
"그 말씀대로라면 저희에게 그 인형을 보여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에크라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피브드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언성을 높이며 다시 물었다.
"그대들이 수 만년을 수호해온 물건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그 언약을 저희들로 하여금 깨게 만들려는 겁니까?"
"핫하하‥ 수호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아하니 시즈님과 보를레스님도 '역사의 고리'라는 무리에 대해 뭔가 아
시는 듯 하군요. 그렇다면 얼마나 강한 지도 아실 겁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기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인형'의 존재는 가벼운 것이 아니므로 한 번에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막을 자신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적을 막을 수가 없기에 업을 저희에게 맡긴다는 뜻입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포기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도와드리겠소이다. 실러오나의 힘을 믿으시겠죠?"
물론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확신하게 되었다. 피브드닌의 격렬한 대답은 에크라이가 바랬던 반응이었던 것이다.
에크라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시즈를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이 맞다면 청년은 분명‥
'바람을 노래하는 이‥. 그것도 각성 직전인 음유술사를 만나게 될 줄이야.'
아주 오래 전부터 '붉은 뱀의 사원'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사원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전설이었다는 네 명의 사
람들 중에서도 '바람을 노래하는 이'는 '인형'과 특별한 인연이 맞닿아있었다.
"뜨거운 사막의 열이 넘쳐날 때 태고적부터 있던 약속을 지키러 바람이 오리니 그에게 과도한 열을 맡기고 사막은
다시 평안해지리라. 실러오나의 말씀대로 일어난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의 중얼거림에 대해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신을 향한 기도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편안한 숙식의 장소가 되리라고 믿었던 사원이 막노동의 공사장으로 변화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무너져있던
벽을 보수하며 보를레스는 숨을 투덜거리듯 푸르르하고 내뱉었다. 상큼한 주향과 함께 퍼진 샹들리에의 불빛과 찰
랑이는 술잔 대신 한 치 앞도 구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지하 깊숙한 곳에서 파낸 흙을 사원에 벽에 바르는 것
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드는 진행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대한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보호의 장소를
찾거나 만드는 것은 약간이나마 고등생물에게는 당연한 것. '역사의 고리'의 힘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 보를레스로서
는 현재 두께의 세네배는 굵게 벽을 쌓아도 안심이 되지 않았기에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하지만 블리
세미트라는 이름의 꼬마 파트너는 정말이지 귀찮은 상대였다. 아래로 손을 내밀 때마다 바구니에 진흙을 퍼 담아주
는 것이 소년의 담당이었는데 그는 그대로 무슨 불만이 있었는지 작은 입을 쉬지 않고 쫑알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짜증이 뇌의 반을 가득 채운 보를레스에게 소년은 도와주기보다는 나머지 뇌를 콕콕 찔러대는 존재에 더 가까웠다.
'이것은 마치 수컷을 짊어지고 집을 짓는 거위벌레- 거위벌레는 알을 낳을 때 풀잎으로 집을 짓고 그 안에 산란을
하는데 암컷이 수컷을 업고 집을 만든다- 같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주방으로 달려가 양고기 스튜를 내놓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는 힘없이 외쳤다.
"블리세미트. 여기 흙이 다 떨어졌어."
'어째서지?'
한 때는 붉은 색의 진흙이 들어있었던 바구니를 양팔에 하나씩 끼고 흔들면서도 소년은 입을 삐죽거렸다. 앞으로
20년만 더 있었다면 사원의 원장이 되었을 블리세미트였다. 사원에는 20명 가량의 사제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처
음부터 신을 경배하여 사제가 된 이들이 없었고 소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붉은 뱀의 사원'에서는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사제들 밖에 없는데 어떻게 아이가 태어나겠는가. 그럼에도 명맥을 이어온 이유는 일종의
입양이었다. 블리세미트 같은 경우는 사막의 대상(大商)이었던 듯하다고 에크라이는 말한 일이 있었다. 노적단에게
습격 당해 모두 죽고 혼자 버려진 그를 에크라이가 데려온 것이다. 지금은 태어나서부터 '오오‥ 찬양하는 실러오
나시여‥.'라고 중얼대는 사제들만 보고 성장하는 은밀한 세뇌교육을 받아서인지 부모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
았다. 블리세미트가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지 않을 정도로 사제들이 정을 쏟아 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막을
배경으로 한 에크라이의 간단하지만 세상을 지탱하는 깨달음의 가르침과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는 삭막한 자연은 불
과 열 네 살의 소년을 생명이라는 의미에 누구보다 다가간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똑같은 방울뱀도 숲보다 사막에서 많이 꼬리를 흔든다.'
설마 방울뱀의 꼬리 흔들기를 강아지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으리라 믿는다. 위의 말은 '사막의 신부'들
이 필수 지참하고 있는 초대 '사막의 신부'들의 명언집에 수록된 문장으로 실제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블리세미트
는 굳건하게 믿었다. 확인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사막의 짐승들은 생물적인 천적이외에 또 다른 적이 있다. 바로 태
양이다. 사막을 지나는 사람들이 수분 부족에 힘겨워하듯 그들도 수분의 소모를 막기 위해, 또 살인적인 광선을 피
하여 그들은 땅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러나 천적이 함께 들어온다면 꼼짝없이 죽은목숨이 될 수밖에 없었음으로
동물들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탈출구를 만들고, 돌로 입구를 막고, 독액을 뿜고 위협할 방법을 개발한다. 그리
고 살아남은 것이 바로 현재의 동물들. 인간의 세상은 불공평함으로 가득히 메워져있다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으니
살아남은 이들은 뛰어난 어쌔신이나 무사들도 놀라워할 육체적 능력과 현자들의 지혜도 따르지 못한 본능의 힘을
부여받은 것이다. 다른 상태계에서는 은근히 이루어지는 과정이 보다 자극적으로 표현되는 사막은 사제들이 자연을
어떤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사막의 신부'들은 그런 자연을 이해하고 인정하였기에 친화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말을 하기 전부터 그들과 살아온 블리세미트는 아무런 걸림돌 없이 순수하게 당
연한 사실로 자연을 받아드렸고 웜피스같은 몬스터들과도 미소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소년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인형'을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지만 어제 첫 대면을 한 이들에게 보인다
니‥.
"확실히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기는 해‥."
자신보다도 무려 수배나 거대한 생물을 상대하여 도리어 궁지로 몰아넣던 검술. 생명이 살아가기에 극한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인 사막에서 '사막의 신부'들은 육체적인 단련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웬만한 검술이라면 블
리세미트의 작은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었으나 바위도 자를 것 같은 토실흐덴의 화려한 검술과 키틀볼의 풍차를 연
상시키던 배틀엑스는 멀리서 지겨보고 있었는데도 무서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가장 인상이 깊었던 사람은 용모도
특이한 시즈라는 마법사였다. 대기의 유동이 빠른 사막에서 실러오나의 분노라고 불릴 정도로 가차없고 무시무시한
힘의 상징인 토네이도를 인간의 힘으로 불러냈으니 얼마나 거대한 존재로 비쳤겠는가. 저런 이들이라면 여느 모험
담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여행을 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하‥ 나도 그들처럼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그랬다면 좋을 텐데‥."
우연일까? 그 중얼거림과 함께 유성하나가 소년의 머리위를 스친 것은?
"벽의 보수는 대충 끝난 것 같군요. 한데 시즈는 저기서 뭐하는 겁니까?"
토실흐덴은 건물의 공사일을 마무리 지은 후 뭉친 어깨의 근육을 풀며 밖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아무리 뛰어난 용
병이자 마법사이고 또한, 전설적인 학자였지만 남들 일할 때 놀고만 있는 시즈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차를 들고
준비하고 있던 에크라이 사제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주변의 선인장들이 사원을 향해 구부러져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를 생각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역시 학자라는 건가?"하고 토실흐덴은 에크라이가 건넨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정도의 마법과 검술에도 모잘
라서 전설적인 학자라‥ 괜찮은 동업자라고 생각했는데 잘하면 끝내주는 고객이 될 수도 있겠군. 차 맛이 꽤나 마
음에 들었다. 입술에 남은 향마저 음미하려는지 그는 혀를 낼름거렸다.
그 때, 시즈는 경배하듯 허리를 굽힌 채 사원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선인장들에 대한 심각한 고찰에 빠져있었다.
간단한 호기심이었다면 그가 이토록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시즈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있자 아리에
가 에크라이가 준 찻잔을 두 개 나란히 쟁반 위에 받쳐들고 다가왔다. 용병의 식당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서인지 흙
담으로 묘한 형상을 이루고 있는 사원의 벽에서도 차는 작은 찰랑임 이상의 흔들림이 없었다.
"시즈, 이것 좀 마시면서 생각해."
"고마워요."
희미하지만 가는 미소를 띠고 있는 시즈는 너무나 생소한 모습이었다. 물론 싫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도 쉽게 열
리지 않던 그의 마음이 옛 친구들을 만남으로 풀려버렸다는데 가슴이 쓰렸다.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어?"
아리에가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내며 묻자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말똥거리며 바라보는 그녀가 귀여워 어
깨를 잡고 끌어당긴 시즈는 깜짝 놀라 도망치려는 품안의 소녀에게 속삭였다.
"이 곳은 말 그대로 성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곳이에요."
"에?"
반항을 해보려던 그녀였으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전신을 흠칫하며 가느다랗게 반문했다. 저항이 사
그라든게 마음에 들었을까? 한층 짙은 미소로 아리에를 내려다보며 시즈는 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그대의 의지는 춤, 열기가 가득한 끝없는 변화의 동작!"
그의 손에서,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나의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거리를 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열기가 엄
청났지만 아리에는 곧 그 뜨거움이 가셔버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곳은 선인장의 결계에요."하고 시즈는 중얼거렸다.
"뭐, 뭐야!?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당신은 마법을 쓰는 마녀잖아. 그 성격에서 보아하니 세이서스에서 당신을 잡기 전까지 얼
마나 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다녔을까 싶어서 말야. 뭐 지금이야 아무 것도 못하는 계집에 불과하지만."
전부터 파마리나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쿠라마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빈정댄 것이다. 마녀들은 냉정한 성격을 가
지고 있지만 예외도 있다. 게다가 성격과는 다르게 그들은 생각은 극단적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한 번 당해보시지! 생명을 잠식하는 어둠 속에 숨겨진 검이여! 빛을 삼키는 입
을 벌려라!"
쿠라마스는 쓸데없이 입을 놀린 것을 후회했다. 파마리나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속 좁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지난 시간 속에 과거로 녹아들 뿐. 그에게 날아오는 검은 기운의 검기(劍氣)를 막
아줄 수는 없었다. 그저 눈만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기만 할 때
스르륵‥하고 허무하게 검은 기운은 사라져버렸다. 쿠라마스의 입술이 섬뜩간 곡선이 되어 파마리나의 시선에 들이
박혔다.
"선인장의 결계?"
어렸을 때부터 읽은 책으로 인해 마법에 대한 약간의 견식이 있는 아리에는 결계라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요
리조리 눈동자가 굴러다니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시즈는 말했다.
"그래요. 참 신기한 곳입니다. 설마 선인장을 이런 식으로 이용했을 줄이야. 아마 그 곳에서도 생각지 못할 일이군
요."
시즈는 일 년간 많은 전쟁터와 유적을 돌아다녔고 이세계의 지식까지 가진 자였다. 그는 생각하길 세일피어론아드
의 지식으로는 이 유적의 수수께끼를 절대 풀 수 없으리라고 여겼다. 시즈가 멍하게 중얼거리기만 하자 아리에는
아예 팔을 풀기를 포기하고 반대로 파고 들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꼼지락거리며 아예 자리를 잡은 그녀는 시즈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재촉했다.
"뭔데 그래?"
"아마 이해하기 힘들 거에요."
스윽!
"말해드리죠."
시즈가 이토록 자연스럽게 생각을 바꾸도록 만든 것은 어느 새 뽑혀나와 그의 목 경동맥에 몸을 부벼대고 있는 단
검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허깨비인양 사라져버렸고 아리에는 헤헤거리며 웃어댔다. ‥무서운 여자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사원에서는 굉장히 강력한 힘의 파장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몸에도 치명적일
정도의 거센 파도와 같아요."
"에!? 그럼 어서 여기를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마도 괜찮을 겁니다. 이 곳은 선인장들이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제 생각에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양의 선
인장은 인위적으로 심어진 게 틀림없습니다. 선인장이 파장의 먹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사한 거지요. 한 마디로
선인장의 결계는 사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사원에 잠재된 어떤 힘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하
지만 힘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에요. 마법은 자연에서 기존된 것. 인위의 결계와 자연을 벗어난 힘의 파장은 마법
의 힘을 절반이하로 축소시키고 있는 거에요. 알겠나요? 이 힘의 근원은 사원 내에 있는‥ ‥‥‥"
선인장은 전자파를 흡수하는 성질과 전자기파가 발생되는 지점을 향해 쉬어지며 자라는 성질이 있다. 시즈는 사원
안에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력한 전자기장을 발생시키는 물체 또는 무언가가 존재하리라고 예상했다. 어
쩌면 '인형'이라는 게 바로 그것인지도 몰랐다.
아리에는 얘기가 진행될수록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시즈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귀족의 배움에 대한 오기가 남아서 칼을 들고 대답을 재촉했지만 시즈는 역시 전설적인 학자답
게 그 지식이 어디서 듣지도 못한 단어와 언어까지 난무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그들이 앉아있는 난간을 향해
보를레스가 창문에서 외쳤다.
"어이! 아리에, 시즈‥ 이리 좀 와봐! 야식으로 타르바칸 스프를 만들려고 하는데 간을 어느 정도로 맞춰야 할지 모
르겠어."
"아! 보를레스! 일은 다 끝냈어요? 아리에, 그럼 가죠."
"응‥."
"훗‥ 이해 가지 않는 걸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뭐라고! 내가 이런 것도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 사람의 작은 투닥거림이 난간에서 잊혀져갈 때 달은 또 하나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달의 기억에 그는 이 시간이
되면 사원의 난간 어두운 구석에 앉아서 명상에 잠겨있는 노인이었다. 이름이 크라인 데위르였던가? 사원에서 유일
하게 대사제라는 칭호를 얻은 자였다. '사막의 신부'들은 서로가 동등한 존재로서 인식하기 때문에 대사제라는 칭호
는 사실 없었다. 다만 그의 깨달음이 크기에 어느 사이에 사제들은 그를 대사제라고 칭할 뿐. 타칭 대사제 크라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즈들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허허‥ 이런 것도 이해하지 못할까봐‥라‥. 숙녀분께서 자존심이 너무나 강하군. 그로 인해 실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걸. 그나저나 실러오나여‥ 그는 정말로 예정된 노래를 이어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사
원에 몸을 담은 지 60년에 걸쳐 알아낸 사실은 단 하루만에 알아내다니‥ 더욱이 뒤에 이어진 들어보지 못한 지식
들은 나도 이해할 수 없었어. 고작 20세 정도의 나이에 어디서 그런 지식을 머리에 담았을까."
전자파니 뭐니 하는 명칭을 크라인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리에처럼 억지로 이해하려기 보다는 시즈라는 인물의
대단함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전환시켜 머리 속에 인식시켰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크라인은 주름진 입을 오물거
렸다.
"이것 참‥. 실러오나여‥. 당신 외의 다른 존재에게 믿음을 가지게 된 이 몸을 용서하시길‥."
그가 노망난 노인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을 때 아리에는‥.
"소금이 큰 스푼으로 아홉 스푼은 되어야 돼."하며 타르바칸 스프에 소금을 부어대고 있었다. 마치 소금죽을 만드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보를레스를 비롯한 입을 가진 존재들은 등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말렸다. 그러나 아리에는 요지
부동이었고 그녀의 자존심이 빛을 발했다.
"타르바칸은 아주아주 느끼한 기름이 있는 동물이라고 옛날에 책에서 본 일이 있어. 요리서에는 적어도 아홉 스푼
은 넣어줘야 알맞은 간이 된다고 쓰여있었다고!"
잠시 후‥.
"으엑! 화, 화장실!"
"아, 안돼. 보를레스! 문 열어! 내가 먼저야!"
"아앗! 키틀볼‥ 바닥에다 토하지 말아요! 원장실은 내가 치워야 된다고요!"
"우웩! 에크라이‥ 사제라는 사람이 어린 양의 고통을 화장실에서만 풀게 할 속셈이시오? 우웩!"
그들이 잠잠해진 것은 두 시간 후‥. 붉게 달아오른 사내들의 눈을 피하여 배당받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리에
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신 중얼대고 있었다.
"그래요‥ 시즈의 이야기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실 타르바칸 고기에 대해서도 제대로 몰라요. 모른다고 하면 무시하
려고 하니까 그런 거라고요‥. 히잉‥!"
옆방에서 멍든 눈 주변을 문지르며 책을 읽고 있던 파마리나가 투덜거렸다.
"저 녀석은 또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그녀가 읽고 있는 책장의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친 자존심이란 섣부른 판단과 만용을 부르는 지름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