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악장 시간 속에 사라진 눈물조차 우리의 삶 속에‥.
촉촉하도록 아름다운 여름도 가고 있다. 무성하게 열대수의 그늘 속에서 야자 열매에 베토리 나무 줄기로 빨대를
만들어 꼽고 쪽쪽 빨아대며 늘씬한 여인들에 몸매에 시선을 던지는 일이야말로 남자의 로망이 아니겠는가? 이 말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남자들은 당장 가랑이 사이에 달려있는 살덩이를 당장 떼어버려라. 남자의 로망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으로 볼 때 그 살덩이 또한 서지 못하는 임포와 다를 바가 없으니‥. 물론 예외는 있다. 그 존재들은 바
로‥.
"후우‥ 남작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언제부터 남작님의 집무실이 개인 욕실로 이전했습니까!? 게다가 욕실
안이 이게 뭐예요? 방안에 야자수를 들여놓다니요! 지금 제 정신이십니까?"
어린 소년들이다. 아직 어미 뱃속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덕에 볼이 뽀얀 저 녀석은 용병국으로 시즈를 주시하
기 위해 보낸 아이킨. 주근깨와 개구쟁이 같은 외모를 볼 때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다.
"아아! 아이킨‥. 벌써 돌아온 거야? 넌 아직 어려서 이해할 수 없어. 용병국에 가서 그들과 지내다보면 좀더 남자
들의 로망에 대해서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남작님‥ 욕실에 열대수를 가져다놓고 그 아래서 달랑 반바지만 걸치고 있는 게 남자의 로망이라면 전 사양하겠어
요."
"자네는 너무 하는 군. 내가 집무에 얼마나 시달리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주군이 집무의 피로에 시달리다못해
과로로 세상에 뜨기를 바라는 것을 아닐 테지? 이 뜨거운 여름이 다 가도록 난 이 검둥이 성벽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밀지 못했어. 더욱이 지난 번 스트레스를 풀어주던 과자를 누.군.가 먹어치운 후에 나는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져
들 지경이 되어 버렸다고."
후훗. 그러기에 누가 남의 간식을 먹어 치우랬냐? 나는 하나의 빚도 잊지 않고 받아내는 값싼 남작이란 말이다. 솔
직히 말해서 아이킨은 남.자의.로.망.도 이해 못하는 꼬맹이인 주제에 말은 어찌나 잘하는지 상대하기 곤란했기 때문
에 난 눈을 부릅뜨고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과연‥ 내 심기를 눈치챘는지 아이킨은 입술을 삐죽인 후 입을
다물었다.
"젠티아‥? 누가 왔나요?"
"으음‥ 데린. 아이킨이 용병국에서 돌아왔으니 얼음을 넣은 야자 열매 하나 부탁해."
"네에에‥. 조금만 기다려요."
아아 나긋나긋한 목소리. 내 비록 해변에는 가지 못할지라도 해변의 바닷바람만큼이나 날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존
재가 있으니 바로 나의 아름다운 아내가 아니겠어? 곧이어 휘장을 걷고 걸어나오는 데린의 모습에 아이킨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비틀거렸다. 암암! 비틀거릴 만큼 멋진 모습이지. 살짝 물방울이 걸려있는 머리칼, 어깨의 선을 드러
낸 검은 색 셔츠조끼는 그녀의 매끈한 몸매에 달라붙어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살포시 미
소짓는 붉은 입술과 세상이 환해지는 듯한 눈웃음에 나는 살아가고 있지 않겠는가?
"자아‥ 여기요. 아이킨,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고요? 여기 간편한 음료 한 잔 하세요."
"그, 그러죠‥. 하아‥ 이제는 공녀님까지‥."
"너무 그러지 말아요. 아이킨은 모르지만 젠티아가 얼마 전에는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했다고요. 그래서 뭘 해주면
좋을까해서 물어보니 이걸 간절히 바라시더라고요. 만족해요? 여보."
일부러 쪽 소리가 나도록 나와 입을 맞춘 그녀는 싱글거리며 내 옆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잠깐의 황홀함 뒤 아
쉬움이 입술 표현을 쓰다듬고 있을 때 아이킨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좋아요. 그나마 일은 하시니 제가 뭐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제가 맡았던 시즈님의 행적에 대해서 말씀드
리지요."
자신감이 넘치던 아이킨의 목소리가 왠지 떨려나왔다. 설마 놓친 건가? 저 작은 소년이 나이에 맞지 않는 지식과
성숙한 사고방식보다 뛰어난 게 바로 추적술이었다.
"놓쳐버렸나?"
"그렇다기 보다는‥."
역시‥. 전설적인 어쌔신 일가, '플로먼'들에 비교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 아이킨이 놓쳤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시
즈라는 녀석은 음유술사 중 가장 은밀한 자라고 꼽히는 '바람을 노래하는 이'였다. 실로 바람을 연상시키는 그 행실
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지. 나는 조용히 아이킨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볼케이스의 사막 중심지로 향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옅들은 바로 예상해볼 때 아무래도 '풍암의 바다'가 목
적지인 듯 했습니다."
"하하하‥ '풍암의 바다'?"
"풍암의 바다라면 인간이 생존하기 힘든 절지(絶地) 중에 하나가 아닌가요? 시즈님이 거기에 가셨다고요?"
확실히 풍암의 바다라면 따라가는 것도 불가능하지. 나는 안타까운 감정으로 넘실거리는 마음을 베토리 나무 줄기
를 쪼옥 빨아 야자액으로 달랬다.
"이거 큰일이군. 그 친구들의 힘이 필요할 텐데‥."
"벌써요?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까?"
"으음‥ 뭐 이미 일어났어도 당연한 시간이지. 곧 준비를 해야 할거야. 내전은 나라를 갉아먹는 쓸모 없는 행위니
까‥."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데린이 나와 맺어진 것은 그녀의 아버지 킬유시 공작은 글로디프리아의 군사력과 사
돈을 맺기 위해서였으니까. 나를 바라보는 데린의 시선에서 물기가 느껴진다. 욕실의 목욕물보다는 좀더 끈끈한 물
기가 말이다.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 걸리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편안해졌다.
"걱정 말아요."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여인의 손을 꼭 잡았다.
* * *
"그들이 언제쯤 올까요?"
에크라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대사제라고 불리며 별의 움직임으로 미래까지 바라볼 수 있는 사원의 유일한 존재에
게 물었다. 그 존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샛별만이 남아있는 새벽하늘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이미 예언되었던 바람이 우리 곁에 불고 있지 않나. 그런데 또 다른 예언이 언제 올지를 묻는 겐가?"
토루반들과 시즈 일행를 비롯한 용병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대사제는 '현재라도 그들이 쳐들어올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민하는 사람들 앞에 피브드닌이 나섰다.
"아마도 저녁때가 될 겁니다. 사제들과 보를레스의 말을 들어보자면 '역사의 고리'는 대부분 유목 민족이 아닌 이민
족들 같더군요. 그렇다면 광열하는 태양이 있는 시간은 그들에게 싸움이 끝난 후든, 시작하든 꺼릴 수밖에 없는 시
간일 겁니다. 공성전이나 다름없는 싸움에 시간의 필요함을 저들이라고 모르지는 않겠습니까? 그들은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에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는 흐릿한 눈빛에 숨겨진 예지를 빛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판관이 재판을 선고할 때와 같이. 혹시나 아니라
면 사원으로서는 커다란 타격을 입겠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칼로 끊는 듯한 '대학자'의 의견에 마음의 불안을 조금
이나마 잊어버렸다.
'불안은 어떤 정의를 내리지 못했을 때 크게 마음을 차지한다.'
피브드닌은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수학공식처럼 규정을 내려두는 학자였고 자신의 방식에 충실했다.
다른 학자들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개미만큼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모두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공식은 의
외로 잘 들어맞았다. 새우처럼 한 가닥의 굵직한 수염을 양쪽으로 기른, 약간은 치사한 인상을 주는 학자는 외모에
맞게 잔꾀라고 칭할 수 있는 부분이 뛰어났다. 잔꾀는 임기응변, 상황파악. 그는 상황을 파악함에 따라 대다수와 소
수를 구분할 줄 아는 이였다.
아스틴 네글로드 원탁의 칠 인인 피브드닌의 이름은 결코 작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은 이름에, 명칭에, 어이없도록 쉽게 현혹된다.'
인간들에게만 있는 특성-요즘 들어서 그가 가장 많이 이용해먹는 특성-이라고 피브드닌은 규정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서는 아무리해도 믿음이 안 가던 그의 얼굴은 아스틴 네글로드라는 명칭 하나에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는 외모로
탈바꿈했다. 그와 같은 얼굴이 아스틴 네글로드에 두 세 명만 더 존재했더라면 '현자는 치사한 인상을 풍긴다.'라고
소문이 날지도 모를 정도로 인간의 마음은 하늘거리기 그지없었다.
"그럼 밤을 기다리도록 하죠. 모두들 질릴 정도의 휴식으로 몸을 풀어주십시오. 우리는 이 곳을 지켜야 합니다. 그
리고 학자들께서는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에크라이가 안내한 장소는 사원의 지하 깊숙한 곳이었다.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토루반, 시즈, 블리세미트, 파마리
나, 피브드닌이 그의 뒤를 따랐다.
'크으‥ 예상은 했지만 내려갈수록 온몸이 떨려온다. 도대체 어떤 존재가 숨어있길래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 숨
이 가빠지는 걸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가슴속에 메아리쳤다. 따라오겠다고 고집 피우는 아리에를 지상에 두
고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라면 그녀는 피브드닌처럼 축 늘어진 파김치가 되어 버릴 테니까.
"다들 괜찮습니까? 나는 왠지 알 수 없지만 머리가 아픈 게 참기가 힘들군요."
사원 지하에 퍼져있는 힘은 외부에서 압박을 하는 게 아니라 내부를 진탕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아니 끊임없이 흔
들어대고 있었다. 내장뿐이 아니라 뇌 속까지.
"피브드닌께서는 체력이 약하시군요. 이제까지 여기에서 쓰러지시는 분은 처음입니다. 할 수 없군요. 좀 더 내려가
면 쓸려고 했는데‥."
볼을 긁적거린 에크라이는 손가락으로 행위 예술을 하듯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며 입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입술
에서는 기도문의 한 종류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가 맺고 있는 수인(手印)은 마법, 그 중에서도 마녀들의 부류가 많
이 사용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파마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제가 수인을 맺다니 처음 보는 군. 여기 사제들은 마법도 사용하나?"
"정말입니까?"
머리 속이 엉망인 피브드닌이었지만 호기심은 참을 수 없었나보다. 그만큼 성신(聖神)을 믿는 교단에서 마법은 금단
이었고 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현재는 마법이 자연을 수행하는 방법으로써 자리잡았지만 마나의 사용법을 몰라 악
마의 마나를 빌어 왔을 때-지금은 이런 이들을 일컬어 흑마법사라고 부르며 금기시한다-에는 마법은 사람들의 두
려움과 참살 대상이었다. 질문했던 사람들을 비롯한 이들은 금세 자신들을 둘러싸는 청량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빙그레하고 에크라이가 부드러운 어조로 파마리나에게 대답했다.
"악마나 마법도 사실은 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지요. 교리에 어긋남을 부여하는 이론이 많기에 금단
으로 치부하는 것일 뿐 신앙에는 아무런 위배되지 않는답니다. 뭐 가끔씩 악마를 믿는다면서 나오는 사람들이 문제
가 아니겠습니까? 마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수인이 마나의 운용을 위한, 또는 악마와의 계약을 위한 매개체나 문
자라고들 하는데 저희들도 비슷합니다. 단결하면서도 신앙을 내보이는 문장, 단어! 그게 바로 수인으로 변화된 거죠.
그러니 저희라고 쓰지 말란 법은 없지요, 핫핫핫."
그가 호탕하게 웃어버리자 파마리나는 무슨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처럼 씩씩거렸다.
'적어도 무언가를 연구하는 이들인 만큼 그 분야에서 말로 밀린다는 게 기분 나쁜 걸까? 약간 유치한걸!?'
그러면서도 블리세미트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 * *
"뭐지? 저들은? 저게 바로 '원의 힘'이라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차가워지고 있는 날씨에 보를레스는 식은땀마저 등을 쓰다듬자 소름이 돋았다. 적어도 50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의 기사들이 사원을 둘러싸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의 윤곽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있었지만 근
육이 부르르 떨려오는 게 기사들의 위압감이 대단했다.
'말도 안돼. 이런 기세는 엘시크의 궁정기사단, 500명이 모두 모인다고 해도 느낄 수 없을 거야.'
그의 물음에 사원의 사제 중에서 유일하게 외눈 안경을 쓴 페리실브라는 사제는 긴장도 안 되는 모양인지 뒷머리만
긁적였다.
"하지만 지난번에는 저것보다 더 많았어요. 오죽하면 저희들이 일곱 명이나 죽었겠습니까."
믿을 수가 없군. 일곱 명.이.나 라니‥. 보를레스의 생각에는 아무리 해도 조사가 잘못 쓰인 것 같았다. 그만큼 사제
들의 무위가 뛰어나고 믿음직스러워해야 했지만 말이다. '원의 힘'들이 적은 인원이고 그들과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
였던 페리실브가 '저 정도야 가볍지, 가벼워.'하고 입이 찢어져 있던 시간도 길지 않았다. 토실흐덴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툭툭 건드렸다.
"저, 저기 혹시 지난번에도 저 정도였나요?"
"오‥ 실러오나여‥."
페리실브는 신을 찾을 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번에 왔던 '원의 힘'은 100명이 되어 보이지는 않
았다. 그러나 사원 주위를 빼곡이 둘러싼 이들은 아무리 낮게 세어도 100여명은 가뿐하게 넘었다.
"어떻게 저 많은 수의 기사가 사막을 넘어올 수 있었던 거지?"
듀쿠스는 기사들이 두렵기보다는 누구는 죽음을 무릅쓰고 건넌 사막을 앞동산 놀이터인양 서있는 그들이 얄미워 견
딜 수가 없었다.
"노르벨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지?"
"핫핫핫‥. 바스티너 저기 사원 난간에 서있는 사람들의 얼굴 좀 보라고요. '말도 안돼!'라고 외치는 듯한 저 표정을
보니 지난번에 물러서야만 했던 전투의 아픔이 싹 가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요!"
"별로 좋지 않은 취미로군. 남의 놀란 얼굴에 쾌감을 느끼다니‥."
자세가 한치도 벗어남이 없이 고정된 채 바스티너는 피식하고 웃었다. 노르벨은 눈에서 망원경을 떼고 손가락을 까
딱거리며 말했다.
"그럼 누가 놀라는데 쾌감을 느낄 건데요? 저들과 우리는 적이라고요. 쯧쯧쯧, 적의 슬픔은 나의 기쁨. 명언 정도는
알아두세요. 이쪽의 인원에 많이 놀란 모양이네. 우하하하하! '풍암의 바다'에 150여명이 말을 타고 도착했다는 게
믿기 어려울 테지! 암! 그렇고 말고!"
"추해‥."
거의 발광하다시피 웃어대는 노르벨에게서 바스티너는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가면 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역
겨운 표정을 짓고 있을 지도 몰랐다.
가끔씩 어딘가 이상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노르벨이라지만 실력 하나만은 바스티너도 불만이 없었다. 전설적인 어쌔
신 집단, 플로먼 중에서도 특출하다는 실력자였다는 그의 추적술과 은신술, 정보 수집은 타의추종을 불허했고 그보
다도 더 뛰어난 게 본업인 암살. 노르벨은 암살이 잔꾀를 많이 써야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노르벨이라
는 어쌔신에 대해 아는 이들은 그의 뇌가 어떤 구조로 생겨먹었길래 기발한 착상들을 해낼 수 있는지 신비로움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살기를 만연하게 뿌릴 줄 아는-물론 뿌릴 줄만 아는 것은 아니다.-기사들을 가득히 끌고 온 방법은 솔
직히 말해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간단하게 하나하나씩 마법으로 이동시켜버린 것이다.
"추하다니요! 저의 멋들어진 웃음소리와 포즈에 그런 감평을 지어내는 분은 당신이 유일할 겁니다. 주점에 가면 아
가씨들이 껌뻑 죽는 호탕함을 추하다니‥ 제가 이번에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아십니까? 흐윽‥ 정말 너무해
요‥."
마지막의 애처로운 한 마디는 싸늘한 표정으로 묵묵하게 사원을 쏘아보며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150여명의 기
사들에게 오돌도돌한 소름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틀릴 게 않았다.
이동마법은 간단하지만 장거리를 이동할 시에는 필수조건을 필요시하는데 마법진이 그것이었다. 이동할 장소에 마
법도구로 그림을 그리는 유치한 짓을 해야했지만 문제는 '풍암의 바다'까지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뛰어난 전사나 기사도 그럴진데 마법사는 말할 가치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법진을 그렸던 것일까? 영
특하게도 노르벨은 어이없을 기발함과 초인이라고 불리우는 체력적 조건을 갖춘 인간-그 덕분에 많이 부려먹는다고
본인은 자주 투덜거린다.-이었다. 한 마디로 몸으로 직접 뛰었다는 뜻이다. 어쌔신은 암살자이며, 은신자이고, 또 뛰
어난 투사이기도 하다. 은신과 암살은 어떤 상태, 어떤 지역에 있든 간에 몸을 적응시켜 오래 버틸 수 있는 기술이
필수였다. 그러나 '풍암의 바다'는 악마가 살고 있다는 장소다웠다. 특히 바다라고 불릴 만큼 주위를 둘러싼 유사를
피해서 '붉은 뱀의 사원'까지 도착하는 것은 노르벨에게 '이번 일 끝나면 사표 쓴다!'라는 결심을 부추키는 요인으
로 작용될만큼 힘들었다. 결국 플로먼의 일인이었고 어쌔신으로써 최고라고 불리울 수 있는 노르벨은 유사를 만나
지 않았는데 반도 가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구조를 알 수 없는 뇌는 빛을 발했다.
"도대체 왜 부른거요!?"
"무, 물을‥"
이 더듬거리는 한 마디가 임무에 불타올라 제일 먼저 이동한 마법사가 그에게서 들은 한 마디였다. 게다가 얘기와
는 다르게 마법진이 그려진 곳에는 사원은커녕 '풍암의 바다'의 상징물이라는 풍암도 눈 씻고 찾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껏 물과 음식을 섭취하며 휴식을 취한 노르벨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쏘아보는 마법사를 향해 손바닥
을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법시약 다 썼다. 하나 더 주고 가라."
그가 내미는 손을 보며 결국 마법사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게 보통 시약인 줄 아시오!? 150명을 옮길 수 있는 마법매개의 진을 그리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낸 시약이란 말
이오! 그거면 이쪽 '원의 신비' 사람들이 4개월 동안 쓸 연구비를 모두 쏟아부어서 겨우 3개를 만들었는데!!"
물론 한번의 이동으로 150명을 옮길 수 있는 마법진을 그릴 시약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전세계는 대규모 침투가 성
행하게 됨은 물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마법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약은 물론
마법사 역시 역사상 전무했고 앞으로도 전무할 것이다.
마법사가 목에 피를 토하듯 주장하는 시약은 위의 방법보다는 약간(?) 부담스러운 방식이었지만 대단한 발명이었다.
보통 마법진이 지워지지만 않는다면 오랜 세월 그 기능을 유지하는 이유는 자연의 마나를 받아들여 매개로서의 마
나를 보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보충력에는 하루마다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옮길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었
다. 만약 마법사의 능력이 뛰어나 마법진에 마나를 많이 주입시킨다고 해도 150여명의 인원을 견뎌내려면 7클레스
이상의 마나를 주입해두어야 했다. 그렇기에 '역사의 고리'에서 마법 연구 및 마법사 육성을 담당하는 '고리의 신비
'에서는 단기간에 많은 인원의 전송을 마칠 수 있는 마법진을, 그것도 마법에 대해 물으면 식은땀이나 흘리며 볼을
긁어댈 인물이 그릴 수 있도록 시약을 만들었고 엄청나게 고되고 힘든 일이었음은 당연했다. 그래서! 몸을 꼬아대며
절규하는 마법사의 모습은 처참할 정도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노르벨은 코를 후벼가며 고개를 끄덕이는 고난도의 기술을 보이며 드러누워 버렸다. 마법사가 다리를 굴르며 애꿎
은 모래에 분풀이를 해대고 돌아가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서 결국 받아낸 시약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걸 포함해서 두 개나 남았단 말이지? 흠‥ 조금 여유있게 가도 되겠군."
마법사가 들었으면 멱살을 쥐고 흔들어냈을 말이었다.
힘겨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노르벨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옆에서 바라보는 마법사들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
지만‥. 그래도 상관이나 다름없는, 뛰어난 자였으니 다가가서 그의 상념을 깨워주어야 했다.
"해가 넘어갔습니다. 슬슬 공격을 시작하죠."
남자는 로진스라는 이름의 마법사였다. 특이하게도 눈썹만 붉은 색을 띄고 있는 자였는데 덕분에 눈썹만 강조되어
마치 싸움닭같은 인상을 느끼게 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노르벨은 바닥을 뒹굴며 웃음을 터뜨렸겠지만 이번에는 그
도 엄숙하게 대답했다. 시기도 시기였지만 그보다도 로진스는 '고리의 신비'를 관장하는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자신
의 주군과 동급인 존재 앞에서 장난스러운 노르벨도 진지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기사 여러분, 들으세요. 우리들의 전언입니다. '제군들이여‥ 우리들의 시간
이 영원하기를, 우리의 역사가 영원하기를!' 이상입니다. 열심히 싸워주세요."
"와아아아! 영원의 시간! 영원의 역사! 영원히 끊임없는 고리를 위해!"
커다란 구호와 함께 그들을 사원을 향해 돌진을 시작했다.
"온다!"
긴장감에 굳어진 얼굴로 키틀볼이 배틀엑스을 더욱 꽉 쥐고 중얼거렸지만 사원의 사람들은 모두 잠을 자는 듯 고요
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생하게 들렸다.
"막아랏!"
"한 녀석도 들어오게 해서는 안돼!"
토실흐덴과 페실라브의 외침은 무의미했다. 모두들 150명의 기사를 막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
으니까.
‥전쟁은 시작되었다.
* * *
"도대체 저 놈들의 신성력은 끝이 없군."
노르벨은 상처를 입는 즉시 신성력으로 피를 멈추고 체력회복까지 하면서 덤벼드는 사제들을 보며 치를 떨었다. 벌
써 1시간이 넘도록 150명이 공격을 퍼부었건만 사제들은 마치 불사신 같았다.
'크윽! '인형'의 정체에 대해 알면서도 소레인 교단이 건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 너무나 강하다. 기사들의
갑옷을 파괴할 공격술만 없다뿐이지. 거의 일당백이다.'
처음 공격했을 때는 사원은 평화로웠기 때문에 먹혔던 것이다. 현재처럼 방어준비를 최대한 갖추지 않았었다. 50여
명이 말발굽 소리에 놀라 뛰어나온 사제 한두 사람에게 검을 꽂아댔으니 사원 사람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으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을 패퇴시켰다. 그러니 오늘 이 정도로 버티는 것도 당연하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신성력이 끝이 있을 리가 없다. 곧 바닥을 들어내겠지. 그 때까지 기사들을 상하게 할 능력자는 거의 없다.'
노르벨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그는 잠깐 사이에 흰 머리의 사내를 비롯한 이방인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노르벨의
얼굴이 소란스러운 사원 한 구석에 향하는 순간, 동방의 귀신(鬼神)처럼 일그러졌다.
"하앗!"
찰나의 시간동안에도 검들은 몇 번이나 조우하며 날카로운 충돌음을 공중에 산산이 흩뿌렸다.
"저 사람은‥."
보를레스라는 이름이었나? 아니 보들레스? 시즈님 옆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했었지. 그 때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검
술이 정말 뛰어나‥. '원의 힘'을 상대로 하여 일대 삼사로 싸울 수 있다니 저 정도면 어느 나라의 궁정기사단에 들
어가서 말단 기사단이라고 하나 맡을 수 있을 정도겠지?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야. 그를 호위하는 사람이 강하
다는 것에 미소를 짓는 날 들키지 않아도 좋을 테니‥.
"으악!"
보를레스의 검은 '원의 힘'이 입고 있는 중장갑옷을 자를 수는 없었지만 뼈 째 부러뜨릴 수 있는 힘이 담겨있었다.
갑옷을 입은 상태로 뼈가 부러지면 뭉개진 갑옷와 뼈에 신경이 자극을 받아 고통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찌 보
면 토실흐덴의 검보다도 능률적이었다. 아리에는 싸우겠다고 발을 굴렀으나 기사들의 굉장한 무력에 질려 듀크스와
함께 지하로 내려갔지만 쿠라마스와 키틀볼도 만만한 용병은 아니었다. 로트스 최고의 용병들, 그들은 노련한 케이
소(방울뱀)였던 것이다.
"도대체 저 녀석들은 뭐지? 저런 실력자들이 있었나?"
언제나 유쾌하게 살고 싶은 노르벨은 오늘따라 여기저기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요인들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
경이었다. 사제들만으로도 귀찮은데 저 날파리들도 보통이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말벌 정도를 파리로 착각한 게 아
닌가 싶었다. 그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의 복장은 분명 용병의 차림새였다. 용병이 정규 기사 수명의 검을 막아가
며 반대로 반격을 가하고 중장갑옷을 베어 넘긴다? 그런 존재들이라면 진작에 이름이 알려졌을 게 분명했다. 무명
의 존재에게 당한다 할 시면 그의 주군이 할 말은 딱 한 마디 밖에 없었다.
"돌았냐? 나가 죽어라."
게다가 정작 그에게 긴장을 가져다주었던 존재는 그 신비로운 은발의 실타래도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할 수 없지‥ 이미 일당 이상으로 일하기는 했지만‥.'
"크아아아악!"
"이래가지고는 한 푼도 못 받고 욕만 더럽게 먹겠군. 바스티너!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몰려드는 기사들을 서너 명씩 상대하던 보를레스는 점점 힘이 붙였지만 그 때마다 사제들이 체력을 회복시키는 성
법술을 시전했기 때문에 고되지만 어렵사리 헤쳐 나갔다. 용병이 된 이후 횟수를 세기도 힘들었던 전투를 겪으며
그는 마스터라고 해도 부족치 않을 경지였다. 시즈에게서 동방검법의 묘를 배운 후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검을 지탱하는 서해검격은 이미 극에 도달했다고 말해도 부족치 않았다. 동방 검법이 술(術)이 아
니라 법(法)이라고 칭하는 원인은 바로 초식이라는 정해진-동방 검법의 달인은 초식을 잊는다지만 세일피어론아드
에는 고차원적인 동방 검법의 이론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다-검로(劍路)에 있었다. 서해검격에는 물의 흐름같이 자
연스러운 검술은 없었지만 상대의 공격을 읽는 예측력에 그 힘이 있었다. 일종의 경험을 믿는 모험이라고 해도 좋
았지만 모험이라는 불안한 단어와는 다르게 그의 검은 완성된 풍미를 느끼게 했다. 아마도 레이모하의 가증스러운
사제, 헤라즈를 만난다고 해도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보를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오
르자 눈에 불꽃이 일었고 강하게 기사 하나를 걷어찼다.
'뭐야!? 겁이라도 먹었나?'
적은 분명 정규 훈련을 받은 기사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전통적인 기사도를 아는. 한 명에게 여럿이 떼를 지어 공격
하는 게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일대일은 결투에서나 쓰이는 방법이었다. 전쟁에서는 뒤
에서 등을 찌르건 가랑이를 걷어차건 비겁한 게 정당화되는 사건이고 현재는 전쟁 중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사도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를 뜻했다. 하지만 보를레스는 곧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물길이 갈라지듯 검은 갑옷의 기
사들이 양 옆으로 물러서고 그 사이를 묵직한 느낌을 주는 암묵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걸어나왔다. 기사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이 다른 기사들을 밀어내는 듯 했다.
흑철갑 안의 눈은 잠시 보를레스를 눈여겨봤다. 맹수가 먹이를 사냥하기 전의 빛깔만이 어둠 속에서 발산됐다. 다른
사람들도 싸움을 멈춘 채 바스티너와 보를레스의 전투에 주의를 집중하게 만들 정도 두 사람의 투기는 팽팽했다.
살 에리는 투기와 살기가 눈에 보인다면 아마도 사원만큼 거대한 문어처럼 생겼을 거라고 파마리나는 생각했다.
기긱‥ 철컥! 바스티너의 무릎이 살짝 굽어지며 무게가 앞으로 쏠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검은 표범처럼 돌진하는
바스티너의 그림자를 접하고 공포에 질려버렸겠지만 보를레스는 약간 움찔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작은 찰나의 멈칫
거림을 지나칠 만큼 바스티너는 무르지 않았다. 0도 이하로 내려간 툰드라의 기온 속에 묵철갑옷은 하얀 입김을 증
기기관처럼 내뿜으며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검을 내리꽂았다. 금속끼리의 충돌이 낸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
큼 쾅하고 굉음이 울리며 보를레스는 뒤로 몇 미터나 밀려났다. 과격한 소리를 신호로 동시에 침묵이 감돌았던 사
원은 다시 사투의 소음 속으로 갇혀들었다.
"우와아아아앗!"하고 검은 물결은 다시 휘몰아쳤다.
이차 격돌. 이번에는 만만치 않으리라고 토실흐덴는 눈앞의 사내를 보며 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산보 나온
사람처럼 실실 웃어대다니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지만 오랜 용병 생활로 다듬어져온 본능적인 위험센서는 미치광
이 같은 사내가 지금까지 만난 적수 중 가장 조심해야할 상대라는 걸 가리켰기에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하하하핫‥.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빌어먹을 음성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드러운 듯하지만 착 깔린 목젖의 떨림 밑바탕을 채우고 있는 냉기에 온몸
이 떨려왔다. 시즈의 목소리는 어찌 들으면 냉혹하지만 잘 들으면 온화한 기운과 무엇인가에 대한 그리움이 풍겨난
다. 그런데 푸른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의 이지적인 외모를 가진 청년의 목소리는 그의 괘도를 반대로 돌리고 있었
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 토실흐덴은 말했다.
"뭐‥?"
"긴장할 필요 없다고요. 어차피 느낄 새도 없을 테니까‥."
스륵‥하고 청년의 모습이 사라져버리자 토실흐덴은 당황했다. 모습만 사라졌다면 모르되 살기와 기척까지 완전히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요오오‥."
발 밑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검을 거꾸로 잡고 급히 아래를 찔렀다. 귓가에 맴도는 음성은 그치질 않았
다. 주위를 살피던 토실흐덴은 다시 한번 아래를 내려다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림자 속에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 표
정이 느껴졌다.
"꼭 뱀에 놀란 여자아이 같군요. 당신처럼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요."
"넌 도대체 뭐야? 꼭! 꼭! 뱀파이어‥."
샤앗! 말을 끝맺지도 않은 순간 날아온 검광은 반짝하고 빛나며 떨어지는 유성의 속도와 비교해도 되짐이 없었다.
토실흐덴이 목의 근육을 비명을 지르도록 억지로 고개를 꺾었지만 왼쪽 뺨이 화끈거렸다.
"미안하지만 날 몬스터 취급하지 마세요. 기분이 언짢군요."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호랑이처럼 코 주름을 잔뜩 찡그리며 그는 검이 날아온 방향을 쏘아보았다.
"오른쪽‥이었나?"
"정답! 하지만 목이 베어진 다음에는 알아봤자 소용없답니다."
"어쌔신의 움직임‥ 그러나 넌 볼케이스의 사람이 아닌 게로군."
"싸움에서 출신을 알 필요가 있는 건가요?"
"글세‥ 어쌔신은 원래 볼케이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어쌔신을 상대하는 방법도 볼케이스를 따를 나라가 없
지."
"훗‥ 해보세요. 재미있겠군요."
어쌔신 특유의 움직임으로 달빛의 그림자을 이용하여 토실흐덴의 사각 속에 교묘히 피해있던 푸른 머리는 서서히
피어나는 상대의 살기에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 눈이 완전히 잘못된 모양이야. 저런 자를 가볍게 보다니. 한 번에 끝냈어야 했는데‥ 귀찮게 됐군.'
볼케이스의 검사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독특한 검술을 가졌다. 동방 검술에 가깝지만 보다 실전에 뛰어난 검술이었
는데 '페라 검술'이라는 명칭이었다. 하지만 페라 검술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볼케이스의 '사람'이다. 사막의 나라는
실러오나를 모시는 완전한 신성국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잡다한 민족들이 모여있었지만 그들은 거의 소레인
의 독신한 신자들이었고 그들 중에는 광적인 이들도 다분했다. 용병이나 어쌔신 등 검에 종사하는 이들은 광적인
신앙이 더한 이들이 많아 다른 나라의 시선으로 생각하면 죄다 앞에 성(聖)이라는 글자를 붙여야 할 정도였다. 그러
나 그들에게는 붙여지는 다른 이름이 있으니‥.
"실러오나여‥ 제 스스로 용자(勇者)가 되기를 간청하오니‥."
용기를 가진 자, 용자. 이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오히려 죽음의 갈림길에 걸려있다는 실러오나의 포도주를 마시기를
바란다. 적이라고 규정지은 상대에게는 잔혹할 정도의 살심(殺心)을 가지고 일말의 동정도 남겨두지 않는다. 검의
빠르기는 동방의 무사와 같고 잔혹함은 어쌔신과 같으며 날카로운 투기는 기사들을 웃돈다.
용자라는 칭호를 받기 위해서는 도전자는 시험을 겪는다. 전설에 나오는 용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라는 둥의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더 간단하고 어찌 보면 더 위험하다. 볼케이스의 전국 각지에는 '암광의 시험대'가 있는데 그 정
체는 검은 색의 커다란 바위다. 사람들은 바위를 깎아서 침대처럼 평평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도전자는 해가 뜰 때
에 맞추어 돌 위에 눕는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바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누워있기만 하면 된다. 아주 편한 시험
이라고 보이지 않는가? 신앙이 투철한 볼케이스의 국민들은 너도나도 시험에 도전해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용자
라고 불리게 되는 이들은 백 중 하나씩 나와도 과도한 용자의 배출이라고 비리를 캘 지경이었다.
낮 동안 계속 노릇노릇하게 육체가 구워지는 고통을 참는다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이제 용자들의 무서운 특기가
무엇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들은 의지에 따라서 고통을 무시해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 레이모하의 교단에서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성자, 성녀라는 말을 붙이며 칭송했지만 실러오나의 교단에서는 용자라는 이름 하에 당연한 일
로 치부했다.
용자들의 의지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너무나 강렬한 신앙은 일종의 암시를 낳게 되는데 암시의 결과를
노르벨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난 투기‥. 너무나도 노골적인 살기‥ 이게 바로 용자라는 녀석들인가? 게다가 근육이‥ 저 상태에서 더 부풀
고 있어‥."
"목소리가 들린다. 두려움에 떨고 있구나, 청년이여‥."
토실흐덴의 몸이 잠시 움츠러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근섬유는 사내의 몸을 총알처럼 쏘아보냈다. 아마도 인간의
움직임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움직임일 것이다.
'바스티너에 뒤지지 않는 위세‥.'
정면으로 맞서면 검과 몸이 동시에 분단되어 버린다. 노르벨은 사원의 기둥 뒤로 피해보려 했다. 그러나 그를 비웃
는지 만곡도는 그 얆은 칼날로 기둥까지 자르며 날아왔다. 땅바닥에 온몸을 부벼가며 가까스로 몸이 양단되는 걸
피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아름의 돌기둥까지 베어버린 괴물 같은 사내는 아직 멀었다는 듯 투기가 피우며 천
천히 걸음을 옮겨왔다. 숨을 가다듬던 노르벨이 입술을 핥으며 키득거렸다.
"재밌어‥ 재밌어‥."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둘 정도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암흑의 감옥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걸친 후로 이 정도까지 견딘 이가 몇이나 되었던가. 한쪽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눈에 투지(鬪志)를 잃지 않은 청년이 대륙의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실력이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
'브로큰스도무에게 쩔쩔 매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걸‥.'
예전의 어설펐던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 완숙함이 바스티너에게 전력을 다해 싸워보고 싶은 마음을 자극했다. 과
거는 상관없었다. 뛰어난 검사를 싸울 수 있다는데 가슴이 설레였다.
'하지만 죽여버리면 그가 슬퍼하겠지? 아깝지만 인형을 찾고 '사막의 신부들'을 없애라는 게 명령이었으니까‥. 방
해하지 못할 정도로만 상대해줄까?'
반면 보를레스는 연신 휘몰아쳐 오는 바스티너가 잠시 공격을 멈추자 뒤로 물러나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겨우 수
번의 공격을 막았을 뿐 반격다운 반격도 하지 못했는데 수십 번의 전투를 치른 듯 숨이 가쁘고 땀이 쏟아졌다. 묵
빛 갑옷의 기사의 공격은 하나같이 허를 찌르는 요소들, 막기는 했지만 엄청난 파워에 팔 전체에 경련이 일었다.
"또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온 거지?"
억울했다. 왜 나는 이토록 많은 괴물들을 만나야 하는 거지? 적어도 대륙 최강의 용병국 카로안 서부에서 적수가
없다고 알려진 '노래하는 두꺼비' 보를레스였다. 한데 지금 상황을 보고 누가 그를 최고의 용병이라고 생각하겠는
가.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상대가 암흑의 갑옷, 바스티너를 입은 기사라는 걸 알기 전에는 말이다.
이제 어느 정도는 최강이라는 이름에 웬만큼 근접했다고 자부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난 저자의 연습상대도 안 된다. 그 녀석들이라면 가능할까?'
날카로운 인상의 엘프와, 인상이 부드러운 건장한 사제의 얼굴이 머리 속에 스쳤다. 그러나 곧 사제의 얼굴에 잔혹
한 미소가 깃들자 보를레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질 수 없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굴욕감은 한 번으로 족하다. 나는 걸어갈 것이고 그 자리에 서있지는 않을 것
이다."
"좋은 말이야‥. 그 때를 기약하기로 하지."
보를레스가 다시 일어서자 바스티너는 앞으로도 즐거울 긴장감을 가져다줄 사내에게 암흑의 무구이자 방어구로서
최강의 힘을 보여주기로 했다.
"알고 있나? 어둠은 암흑 속에서 수없이 폭발하고 있다는 걸‥."
'어두운데 알 리가 없지 않은가.'라고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머리 앞에 도달한 그림자를 보며 보를레스는
입을 벌린 후 다물지를 못했다. 바스티너의 가면에서 다시 흰 입김이 푸욱 뿜어져 나왔다.
"모른다면 막을 수 없겠군."
보를레스는 눈을 부릅떴다. 동체 시력이 발달한 그의 눈에 바스티너가 내뻗은 묵색의 검이 통나무처럼 굵어져 갔다.
너무나 빠른 공격에 한 줄기 굵은 암흑줄기처럼 느껴지는 게 분명했다.
'모두 공격일 리가 없다. 나머지는 잔상‥ 몸에 닿는 것은 결국 똑같은 검이다. 난 묵빛의 그레이트 소드를 하나만
막으면 된다. 하지만‥.'
몸통을 모두 가리는 암흑 속에서 과연 어느 게 폭발하는 검인가. 바스티너의 말대로 보를레스는 막을 수 없었다. 하
나를 막을 수 없다면 모두 막을 수 없다. 그는 약간은(?) 굵직한 바늘이 상반신을 무수히 침범하는 걸 느꼈다. 정신
이 혼미해졌다.
"보를레스‥!"
상반신 전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청년을 토실흐덴을 안타깝게 소리쳐 불렀다.
"다른 곳에 정신을 팔 정도로 내가 가볍게 느껴졌나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노르벨은 '난 무서운 적이에요.'라고 말하듯 은근히 다가와 옆구리에 순식간에 세 자
루의 단검을 찔러 넣었다.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당했다는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전투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보를레스와 토실흐덴이 패하자 사제들의 비명이 사원에 하나 둘씩 터졌다. 노르벨의 미소처럼 옆구리에서 퍼
져나가는 피가 역겨웠다.
"대장, 도망칩시다."
성급하게 보를레스에게 다가가다가 기사의 일격을 맞고 어깨에 피를 흘리며 외쳤다. 보를레스의 검상(檢詳)은 신기
하게도 급소를 모두 벗어나 사제가 얼른 성법술을 시전하자 목숨에 지장을 없었다. 그러나 '원의 힘' 기사들이 퍼붓
는 공격은 강도는 점점 거세졌고 이대로 가다가는 저항도 제대도 못하고 단체로 실러오나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지
경이었다. 용병이라는 족속들은 제대로 저항하다가 죽느니 차라리 기회만 된다면 저항을 못해도 목숨을 살려 도망
치는 사람들이었다. 쿠라마스의 한 마디는 싸움의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걸 뜻했다.
"안돼! 사제들을 어찌하고 떠나단 말인가‥?"
"대장, 미쳤소? 우리가 언제 남 죽는 걸 따졌습니까?"
"그러나‥."
"먼저 가십시오‥."
보를레스의 치료하며 페리실브가 입을 열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약간 겸연쩍은 듯 시선을 돌리며 정신을 잃은 보를
레스를 쿠라마스에게 건네고 말했다.
"저희는 이 사원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다른 곳에서 다른 방법으로 다른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곳이야말로 저희가 선택한, 실러오나에게 가기 전의 유일한 고향입니다."
"들었죠? 대장 갑시다!"
"건물 중앙의 계단으로 내려가십시오. 길은 외길입니다.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인형'의 힘으로부터 당신들을 지켜
줄 것입니다. 그럼 부디 실러오나의 가호가‥!"
그는 목에 걸고 있던 고대 소레인 교의 상징, 실러오나의 문양을 벗어서 키틀볼의 목에 걸어주었다. 수염이 가득 난
노인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모양이 날 리가 없었지만 키틀볼은 진심으로 감사하며 문양을 꼭 쥐었다.
도망치는 용병들을 쫓을까하고 노르벨은 생각했으나 곧 마음을 바꿨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진군을 막을 수 없었
고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다. 사기가 오른 기사들에게 치명적인 급소를 맞고 성법술을 쓸 기회도 없이 죽어가는
사제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쫓지 마라. 우선은 사제들을 그들의 신에게 보내준 후에 따라가도 늦지 않는다."
"그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페라실브는 볼을 긁적거리다가 손을 높이 들었다. 신호였는지 사제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무미건조한 바스티너의 음성에는 의혹으로 작은 파문이 일었다. 페라실브는 사제답게 친절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실러오나께서 왜 '지나친 실러오나'라고 불리시는지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사제들은 무엇이 즐거운지 저마다 온화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마지막 그들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봉인을 해둔 겁니까?"
벌써 두 시간째 봉인만 풀고 있다는데 지친 피브드닌이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아마 침입자가 '인형'이라는 물건을
훔치려 온다고 해도 봉인을 푸는데 지쳐 쓰러지고 말리라.
그 때였다.
쿠르르르릉!―
그들이 있는 지하 10미터의 방까지 들려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 흠칫한 에크라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섰다.
"다 되었습니다. 이 '인형'입니다."
시즈에게 인형을 건넨 그는 조용히 계단 입구로 가서 등을 돌리고 섰다. 그가 내뱉는 흐느낌에 가까운 작은 중얼거
림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먼저 가시오‥ 형제들이여‥ 우리의 염원이 끝을 다해 가고 있소‥. 나도 곧 가리다‥ 늦게 온다고 실러오나의 포
도주를 모두 마셔 버리지는 않겠지요?"
"빌어먹을 사제놈들!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화낼 것 없소. 그들의 능력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뛰어났을 뿐이니까."
"나는 그런 것 따위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게 중요한 건 임무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일 뿐이오."
노르벨은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절윤한 얼굴이 추하게 보일 정도로 이가 갈렸다. 그러나 분만 태울 수는
없는 일, 걸음을 옮기는 게 급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빌어먹을 사제 놈을 한 명 더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아주 나
이를 지긋이 먹은 이였다.
쿠르르르르릉―
"도대체 뭐야!? 아까부터 이 소리는‥!"
'대사제께서도 가셨군‥. 그 분께서는 포도주라면 통째 가져다놔도 모질라는 분인데‥.'
몇 번이나 굉음이 들려오자 에크라이도 이제는 담담해졌다. 걱정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블리세미트의 연한
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인형을 둘러싸고 쑥덕거림을 멈추지 않는 학자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피브드닌, 이런 문자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내 생애에 이런 문자는 처음 보는 군. 마치 그림을 그린 듯한‥."
"예. 요상하기 그지없는 문자로군요. 게다가 왜 이리도 복잡한 겁니까? 이런 기괴한 문자를 익혔던 나라의 학자들은
정말 존경받을만 했겠는데요."
대륙 최고의 학자들은 문자를 해석할 수 없자 얼굴의 주름살을 찌푸려 인형에 쓰여있는 문자처럼 만들려고 노력하
는 모양이었다. 남은 희망이라고는 '마땅찮은 시즈'. 그가 '또 다른 고향'을 표현했을 때처럼 처럼 '또 다른 언어'를
읽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燕子‥ 進上‥.(인연이 닿은 자에게 올립니다.)"
"아니! 시즈, 이 문자에 대해 아는 건가?"
"저도 잘은 모릅니다."
"잘은? 잘은은 무슨 잘은 인가! 읽을 수만 있다는 게 어디인데‥. 어서 계속 해보게."
토루반은 희망이었을 뿐 설마 그가 읽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손바닥으로 어깨를‥, 아니 닿지
않는 관계로 엉덩이를 두들기며 격려했다. 시즈가 인형과 그 주위를 유심히 살펴 보다가 기괴한 문자, 지구에서는
한문(漢文)이라고 불렸을 문자가 일종의 주술적인 언령의 역할로 쓰여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렇다면‥. 인형을 움직이게 할만한 장치가 없나요?"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발동원이 있을 텐데‥. 학자들은 바닥을 기어다니며 뭔가 튀어나온 바닥이나 들어간 벽을
만지고 쓰다듬고 돌려보기까지 했으나 석실은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모두가 고개를 저을 때, 계단에서 우
당탕하고 케이소의 용병들과 파마리나가 내려왔다.
"사제들은 어찌 되셨나?"라는 질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들을 살짝 감싸 안아주며 에크라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모두 가고 싶은 곳으로 갔을 뿐입니다. 그리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혹시 페라실브 사제께서 '이실리스의
펜던트'를 주셨습니까?"
"여기 있네. 이걸 말씀하시는 게지?"
마지막으로 페라실브가 도망치는 케이소들에게 건넨 목걸이. 에크라이에게 건네기 전 힘있게 쥐어 보인 키틀볼은
말했다.
"그들은 사제가 아니었네. 진정한 용자였어‥."
"하하하‥. 지금쯤 실러오나의 만찬을 드시느라 정신이 없어 듣지 못 하시는 게 안타깝군요. 아마 듣게 된다면 사제
들께서는 적극 부인하실 겁니다."
벌써부터 에크라이는 애수에 빠진다는 게 어색했지만 잠시 오랜 지우(知友)이자, 동료이고 스승이었던 이들과의 지
난날을 되새겨 보았다. 살아가기 힘든 사막이었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얼마나 행복했었나. 이제는 모두 떠나고 나도
떠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자아‥. 블리세미트, 받으세요. 이제 그대의 것입니다. '붉은 뱀의 사원'의 원장을 나타내는 '이실리스의 펜던트'에
요. 펜던트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원래 신성력의 두 배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러나 그대도 이 펜
던트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대는 펜던트의 능력보다 의미를 소중히 하세요."
"에‥?"
등을 거칠게 돌리는 그 때문에 정신이 번쩍 띄었다. 블리세미트는 총명한 소년이었다. 원장의 증표는 다른 사제에게
잠시 맡길 수는 있어도 현(現) 원장이 사망하지 않는 한 후계에게 넘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에크라이의 행동은 과연
무엇인가.
'잡아야 해.'
가슴이 꽉꽉 막히고 목이 매어왔다. 가지 말라고 소리를 쳐야 했지만 무엇 때문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쫓아
가려던 소년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충격이 목을 내리치는 걸 느끼고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고맙습니다."
"사제님께서도 가셔야 합니까?"
"블리세미트를 부탁드립니다. 그는 사제로서는 뛰어나지만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 곳을 벗어나면 꽤 혼란을 겪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믿겠습니다."
순한 양 같은 눈동자가 두렵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살기도 투기도 그렇다고 적의도 아니었지만 석실 안의 사람
들은 부드러운 사제의 시선에 압도당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터벅터벅터벅터벅‥
발걸음이 사라질 때에 겨우 정신을 차린 시즈는 석실이 암울함에 침몰되어 가는 속에서 힘든 현실을 해결할 수 있
는 열쇠를 '인형'이라고 보았다.
'인형에는 '태엽 장치가 없지만 찾아보라.'고 써있다. 없지만 '찾아보라?'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잘 생각해보자. 이 말
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태엽 장치는 없다. 여기에서 발동장치는 잊자. 그리고 찾아보라는 것은 발동 장치
가 아니므로 인형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맞나? ‥크으, 도저히 모르겠다.'
모를 때는 묻고 찾는다. 시즈를 있게 한 원동력인 성격은 또 한번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토루반, 피브드닌. 혹시 '태엽 장치는 없지만 찾아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그 말은 드워프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말로 유명하지. 발동 장치가 없다는 뜻은 그 말대로 발동 장치가 없다는 뜻
이네. 그러나 찾아보라고 했으니 뭔가 장치가 있다는 뜻이고. 이 말은 태엽이 필요없다는 뜻이니 인형은 이미 움직
이고 있다는 뜻일세. 그러나 찾아보라는 것은 우리의 눈에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지."
"알고 있는가? '암흑 속에서 어둠은 수없이 폭발하고 있다는 걸.' 쿨럭!"
"보를레스‥ 깨어나셨습니까? 그 말은 무슨 뜻이죠?"
블리세미트와 나란히 누워있던 그가 몸을 일으키자 토실흐덴과 쿠라마스가 옆에서 어깨를 잡고 부축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보를레스는 자신의 깨어남보다 방금 전 말에 관심을 보이는 시즈의 눈동자를 보며 '이 놈은 천성
이 학자로구나.'라고 생각했다.
"아까 기사단의 대장인가 하는 놈이 한 말이지. 큰 존재에 가려진 작은 존재의 움직임은 눈치채기 어렵다는 거지.
아니 아예 알 수 없다고 봐도 되겠군."
"그렇다면‥ 수수께끼가 풀리는 군요."
"나도 알겠군. 자네의 생각은 이미 인형이 움직이고 있다는 거겠지? 그래서 발동 장치가 필요 없고!?"
"그렇습니다. 문제는 더 큰 존재가 무엇인가지만 이미 그것도 알았습니다."
인형에 쓰여있는 대로 연자(燕子)가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시즈는 자신의 머리 속에 그려지는 '붉은 뱀의 사
원'의 구조는 이세계의 지식에 따라 만들어진 세일피어론아드의 유물이라고 확신했다. '이세계의 문자'와 '이세계의
지식'‥ 이 둘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두운 하늘의 찡그림에서 비롯된 눈부신 윙크‥. 누구나 전율할 끝없는 고통의 속삭임을 부여하라‥."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유혹적이며 공포스러운 주문. 파마리나는 시즈의 양손에 모여드는 엄청난 양의 마나를 느꼈
다. 수없이 박동하면서 순간순간 안에서 터져 나오는 파괴적인 마나로 구현될 마법은 그녀가 알고 있는 한 하나 밖
에는 없었다.
"‥라이트닝이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번개는 빛으로 구성된 에너지. 강렬한 전자기를 띄는 형체를 규정지을 수 없는 존재를 시즈는 무
자비하게도 어린애의 손놀림으로 만든 듯한 토기 인형에 퍼부어 댔다.
"시, 시즈‥ 인형이 망가지겠어. 그만해!"
피브드닌의 말리는 외침을 무시하고 눈뜰 수 없는 빛의 광란(狂亂)은 멈추지 않았다. 겨우 눈꺼풀을 열고도 사물을
구별하게 되었을 때 피브드닌은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동공이 흰자를 삼켜버릴 것 같은 그의 눈동자를 향해 속박에
서 풀려난 인형은 인사를 건넸다.
―흐음. 그 친구 참 멍청하게 생겼군.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커졌어. 이런 현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건 경악, 놀람,
공포 등의 극적인 감정을 맛보았을 때지. 물론 나의 등장 연출이 빛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하지. 게다
가 촌스럽기 짝이 없는 흙 장식들이 떨어져간 대다가 예언되었던 친구의 번개 영향으로 전신에 흐르는 광택은 그야
말로 계란을 깨고 튀어나온 어여쁜 병아리가 아니겠나?
생김새는 병아리와 비교하여 눈곱 하나만큼도 비슷하지 않았지만 조잘대는 게 꼭 삐악거리는 듯 해서 아리에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암울했던 석실의 분위기가 새싹 피어나는 봄날처럼 훈훈해졌다.
―아가씨가 아주 미인이군. 내가 비록 이만 년 전에 속박의 인을 받고 갇혀있었지만 눈 하나만은 확실하지. 아가씨
는 이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손꼽히는 미인이 틀림없어.
"이봐.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파마리나가 허리를 쑥 내밀었다. 아담 사이즈인 아리에에 비해 그녀는 성숙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
다. 철상(鐵像)의 반응을 예상해보던 사람들은 상(像)의 대답에 박장대소했다.
―훗‥! 이봐, 내가 아무리 매력적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설마하니 유혹할 심산인가? 안타깝게도 인간 남자의 영역까
지 빼앗고 싶은 맘은 없어.
파마리나의 마법지식으로 볼 때 철상은 일종의 아이언골렘에 준하는 유물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골렘에 고대인간
등의 세람류(드래곤들은 호비트류라고 부르기도 한다. 엘프, 인간, 드워프, 스칼프가 그 안에 속한다.)나 요정족의 영
혼을 잠재된 종류가 아닐까 싶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놀랄 만한 사실이었다. 검과 같은 종류도 영혼이 들어가면 성
검, 마검, 영검들 여러 가지 수식어들이 붙으면서 칭송의 대상이 되는데 철인형 주제에 움직이면서 말까지 하다
니‥. 아마 고대의 어떤 골렘 유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탐욕의 혀가 파마리나의 뇌를 간
질이고 있을 때, 토루반은 토루반대로 드워프의 기술로도 흉내낼 수 없을 듯한 철인형의 구조에 대해서 고민을 거
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놔두면 영원히 수다떨기를 멈추지 않을까봐 걱정이 된 시즈는 입김을 불어 철상의 주의를 돌리고 말
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대를 속박하고 있던 자기력을 봉인함으로써 이제 마법의 힘이 사원 내에서 원래의 위력을 발
휘하게 되었소. 우리는 쫓기고 있고, 나는 물을 게 많습니다."
―그래. 말해주지. 전승 속에 기록된 자여‥. 내 이 만년 동안 그대같은 외모는 처음 보는 군. 내가 돌 속에 갇혀있
었지만 눈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그 동안 사원을 다녀간 이들의 얼굴 정도는 견식할 수 있었지.
"다시 말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노려보는 눈동자가 섬뜩하군. 마치 광학유리를 넣은 듯한‥
"전승을 이어받은 자로서 명령한다. 네가 여기 남은 이유가 무엇이고 나에게 전할 것은 무엇인가!?"
―‥그대가 원하는 질문이 무엇일지는 알고 있다.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시간이 없는 듯하니 정답을 말해주도
록 하지.
난 이만 년 전 최고의 주술사라고 불리던 아플로이크 라는 이름의 작자와 마법사 토그체드롤에 의해 만들어졌다.
혹자는 영혼을 집어넣은 게 아닐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가진 것은 아플로이크라는 인물과 멍청하니 자기 이름
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제, 두 사람의 기억뿐이다. 임무는 단순한 연자(燕子)에게 약속의 언어와 그에 따른 의지의
마법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지금처럼 되었냐고? 성급하게 묻지 말고 기다리라고. 우선 아플로이크에 대해
서 설명하도록 하지.
아플로이크는 사막 소수 민족의 주술사였다. 사막민족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모래뿐인 대지에서 선인장이나
풍란같이 영양성 제로의 식물이 아닌 벼나 콩 같은 작물이 무럭무럭 자라나 사막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배고픔과 목
마름으로 죽어 가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하나만으로 알 수 있다
시피 이만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미래까지 바라볼 수 있는 이였다. 영겁의 시간이 지나가도 그는 모래 속에서 생명
력이 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절망했다. 끝없는 시간 속에서 굶주려할 후손들을 생각하니 신이라는 족속들을
모두 저주하고 싶었다.
그 때 한 토그체드롤이라는 마법사가 아플로이크에게 접근했다. 그가 속한 단체는 '역사의 고리'라는 암중에 세일피
어론아드의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신비한 녀석들이었다. 특히 토그체드롤은 능력이 아플로이크에 뒤지지 않았던
모양인지 후일 '음유술사'라는 '역사의 고리'의 방해자들이 출현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세일피어론아
드의 의지에 의해 태어날 '음유술사'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연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파멸을 위한 존재를 만들어내고
또 존재에게 약속의 언어를 부여하기로 하려고 아플로이크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이만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도 기
능을 연장해날 수 있는 골렘의 주술을 가진 사람은 아플로이크 뿐이었으니까. 사막 민족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절
망으로 끝내는 원망과 저주로 변해가던 불쌍한 주술가는 이미 별의 정기(精氣)를 짚던 총기(聰氣)를 잃은 지 오래였
다. 광기만으로 '파멸의 춤을 추는 이'가 가진 힘이 절정이 될 시기를 찾아낸 아플로이크는 주술력으로 내 몸에 약
속의 언어를 새겼다. 전승 속에 기록된 자여, 그대가 과연 연자가 틀림없다면 약속의 언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언어. 간단한 하나의 발음만으로도 수많은 의미를 가지고 또 의미
로서 사용되었던 언어. 시간의 흐름 속에 드래곤의 용언을 능가하는 창조력과 파괴력을 가진 힘의 상징으로 신어
(神語), 아스트랄과 비교할 수 있는 금지된 의지의 조각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을 몸
에 새긴 채 시간 속에서 뜬 눈으로 연자를 기다렸다. 단 한 가지 아플로이크는 총기를 잃었기 때문인지 그답지 않
은 실수를 했는데 바로 '파멸의 춤을 추는 존재'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지. 바로 전승될 인형, 바로 나에 대해서는
미래를 보지 않았던 거지.
어쨌든 이천 년이 흘렀다. 고대 문명은 흔적도 없이 망해버렸지만 그 시대의 학자와 마법사들은 바퀴벌레보다도 끔
찍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성한 회귀'를 원하는 '역사의 고리'는 그들을 한 수 웃도는 살충력(殺蟲力)을 보
였다. 암중의 힘에 대응할 수 있었던 단체는 오직 대중의 힘을 모은 종교들뿐이었다. 하지만 시도는 소용없었다. 모
를 리 없겠지? 이 주위는 나를 봉인하는 자기장의 힘으로 인간은 들어올 수 없다. 혹시 있다면 '파멸의 존재'나 '음
유술사' 정도겠지. 그렇기에 '역사의 고리'에서도 신경 쓰지 않았었지. 그러나 아주 우연스럽게 소레인 교단의 한
사제에 의하여 아플로이크가 내다보았던 미래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내 기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사제는 자기 이름을 언제나 모른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그 이름을 찾겠다고 신을
섬기고 있던 웃기는 녀석이었다. 신성력이라고는 사막의 모래 속에서 소금을 찾아내는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던 녀
석은 소레인 교단에서 파견된 조사단에 속해 있었다. 성법술도 못 쓰는 녀석이었는데 아마도 짐꾼으로 끌려온 모양
이었다. 역시 주변에서 몰아닥치는 자기폭풍에 휩쓸려 모두 정신이상을 일으켜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지만 유일하게
멍청한 사제만 살아남았다. 어쩌면 더 이상 이상해질 구석이 없는 뇌를 가져서 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유를 생각
하던 그는 자신을 보호하듯이 서있는 선인장을 보게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인장은 자기폭풍을 막아내는
작용을 한다고 규정지은 사제는 주위에 텐트를 치고 살면서-어떻게 살았냐고? 인간의 힘은 무한한 법이다. 이 말로
대충 알겠지?-멀리서부터 선인장을 하나씩 심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선인장 심기를 끝내고 사원 안
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생명이라는데 대하여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인지 마지막에 이르러서 생명의 파멸을 원했
던 아플로이크의 주술에 반대되는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 몸에 쓰여진 약속의 언어를 해석해내지. 녀석은
바로 문자 연구가였으며 유적 탐사 학자 출신이었던 거다. 그것도 아주 고명하다고 일컬어지는‥. 그래서 신성력도
없는 주제에 조사단에 포함되었던 거지.
내 몸에 남겨져있던 문자가 세상에 나가서는 안 될 힘을 가진 존재라는 걸 깨달은 그는 사원 전체를 정화시키고 사
람들을 하나 둘씩 끌어들여 자신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도와준다. 그게 바로 이 사원의 시초야. 아플로이크가 절망
했던 사막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에 적당한 장소였던 듯 했다. 최고의 주술사라던 아플로이
크의 주술력을 상회하는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을 줄줄이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멍청한 사제는 죽기 전에 동
료들에게 나를 '파멸의 존재'가 아닌 '순환 속의 자유와 미래를 지향하는 존재'에게 전하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모든 신성력을 내게 주입시켜 아플로이크의 저주 섞인 저주를 정화시키지. 덕분에 난 자아에 눈을
떴거지. ‥‥벌써 헤어질 시간이구나. 내 힘이 다 되었어. 사실 사람을 만나면 그들처럼 수다를 떨어대고 싶었다. 그
래야 조금이라도‥ 내가‥ 이‥만 년‥동안 기다‥리며‥ 존‥재‥해‥야‥할 이‥유‥를‥ 더‥ 부‥여어‥어‥
할‥테에‥니이이‥.
* * *
한 편 시즈가 인형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무렵, 에크라이 원장과 크라인 대사제는 토혈을 해가면서
'원의 힘'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모래처럼 백색 빛의 알갱이가 하늘까지 솟구치며 거대한 장
벽을 만들어 '원의 힘'들은 사원 안으로 한 걸음도 들여놓지 못했다. 노르벨은 발을 동동 굴러대며 지금까지 죽인
모든 이들에게 쏟았던 것보다 더 지독한 살기로 두 사제를 쏘아봤고 '고리의 신비'를 관장하는 로진스는 무미한 표
정으로 묵묵히 서있었다. 로진스는 비록 기괴한 힘의 파장 때문에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었지만 지하에서 거대한
양의 마나가 유동하고 있다는데 앞으로 반전을 일으킬 무언가가 일어나리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파직!
그리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느낌이 왔다. 그러나 어떤 반응보다도 로진스는 반가웠다. 마법을 방해하던 힘의
장막이 걷어졌기 때문이다. 낯설게 느껴지는 마나의 느낌이 반가웠다.
"시간끌기는 끝이다!"
로진스의 손짓을 신호로 7명이나 되는 '고리의 신비' 마법사들이 동시에 마력을 발출했다. 결계(結界)나 결막(結膜)
은 반대 속성으로 깨는 게 원칙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마력이나 신성력의 크기로 부숴야 했다. 마법사 중에
는 감춰진 마나의 구조를 파악하여 작은 마나로도 결계를 해체한다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희대의 인재들만이
가능했다. 게다가 로진스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방법보다는 힘으로 눌러버리는데 자신이 있었다.
신성력과 마력. 두 상반된 에너지가 부딪혔다. 소리는 없었다. 다만 마법사들의 몸이 흔들렸고 두 사제는 다시 한
번 피를 토하며 앞으로 허리를 굽혔다는 사실이 충돌과 힘의 우위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피로 물든 수염을 치켜들고 다시 손을 모으는 대사제를 향해 로진스는 말했다. 에크라이는 방금 전의 충격으로 이
미 기절한 상태였다.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다. 어떤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저희를 방해하던 힘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각혈이 내장이 상한 징조라면 토혈은 죽음의 징조였다. 하지만 대사제는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힘을 쓸 수 있다는데 기쁘오? 나도 기쁘오. 그가 예정되었던 사람이었다는 게‥ 곧 우리의 염원이 이뤄진다는
게‥. 그렇기에 좀 더 그대들을 막아야 겠소."
"그러시다면‥."
마법사들이 한발자국씩 걸어나오자 로진스는 고개를 저었다. 노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다른 목적을
가졌을 뿐이지 철천지원수도 아니지 않은가. 하늘을 향해 뻗은 손위에서 작은 구체가 스파크를 내며 부피를 늘려갔
다. 무려 어린 아이만큼이나 커진 구체를 누가 라이트닝의 구체라고 생각할까. 마법사들의 얼굴에서 존경심과 동경
을 느껴졌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쉴 시간은 내가 결정하네."
자신만만하던 로진스는 노사제의 신성력이 아직도 굳건한 바위처럼 끄덕도 하지 않고 견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과연 어디까지 견딜까하며 마력의 세기를 점점 강화했다. 그러나 노사제는 얼굴이 하얗게
변색되고 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면서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가 쓰러질 듯 하면서도 오뚝이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로진스는 입술을 꽉 물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마력에도 죽어갈 듯한 노인이 버텨내자 자존심에 상처
를 받은 것이다. 물론 좀더 시간이 지나면 부상을 입은 크라인은 쓰러지겠지만 이미 승패의 결과는 버젓이 가슴을
괴롭힐 게 뻔했다. 감탄을 숨기지 않고 로진스는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제가 졌습니다."
크라인의 얼굴에 창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때 로진스가 한 마디를 더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겼습니다!"
동시에 손을 쓰지 않던 마법사들은 저마다의 마법을 시전 했다. 타들어 가는 사제의 복장에 크라인은 중얼거렸다.
"기도만 하고도 만족했던 사람들 중에 나는 싸움이라는 멋진 경험으로 삶을 마무리하니 다른 이들보다 훨씬 낫구
나. 녀석들이 포도주를 남겨놓아야 할 텐데‥. 이런이런‥ 자네도 함께 가도록 하세. 설마 20년 전 '이실리스의 펜
던트'를 달라고 조르던 꼬마가 죽음의 순간을 함께 할 사람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으음 따뜻하군‥."
쓰러져 가는 불길을 노르벨은 신경도 쓰지 않고 뛰어넘었다. 그 뒤를 바로 따르는 철컥임은 바스티너였다. 그는 몸
을 운신하는 실력이 뛰어나기에 철컥이는 소리가 가벼웠지만 뒤를 따르는 기사들은 덜컥거리는 소리가 계단을 가득
채워 완전히 소음이었다.
계단 끝에 방이 여러 개 일까봐 걱정스러웠지만 모퉁이로 몸을 들이 넣자 그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키득거렸
다. 목표가 눈 앞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되찾았을 뿐 아니라 한 층 느끼해진 노르벨의 미소에 기분, 아니 속까지 상
한 것은 토실흐덴이었다. 시즈를 제외한 사람들은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사원을 빠져나갔고 그가 마지막이었던 게
재수가 없다면 없는 것이다.
"사제들은?"
"지금쯤 실러오나가 환영의 잿가루를 뿌려대고 있을 겁니다."
흔쾌히 대답한 노르벨은 한 가닥의 투명한 시선이 지긋이 짓고 있는 표정에 의아했다. 시즈는 도저히 궁지에 몰린
사람이 떠올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약간의 슬픔과 안타까움, 사제들에게 향해지는 감정일 텐데 어찌하여 내 몸이 떨
려오는 거지. 바스티너나 로진스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는 심정이었다. 그들은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
라며 시즈를 노려보았다.
곧 시즈가 들고 있는 철인형을 발견한 노르벨이 소리쳤다.
"사막의 의지가 담긴 인형!"
"필요하신 가요?"
"내놔라!"
휘익.
엥? 내놓으라고 정말로 내놓는단 말인가? 받아들고도 믿을 수 없던 노르벨은 인형을 로진스에게 들이밀었다. '고리
의 신비'의 수장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마나나 주술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소."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시즈는 냉소했다. 하긴 그들이 이세계의 지식에 대해 알 리가 없겠지.
인형을 봉인하는 존재이자 인형이 놓여있던 돌은 사실 커다란 자석으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인공적으로
제조된 전자석이었다. 아마도 번개의 마법을 이용하여 강력한 전자기파를 발산하는 자석으로 변성된 듯 했다. 인형
은 원래 발동장치가 필요 없었고 전자기가 보충되는 한 영원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겉은 돌이면서도 안이 쇠
로 만들어져있으니 꼼짝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인형은 에너지원에 봉인 당해 있었던 것이다.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존재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동일하다니 이율배반적인 지혜에 시즈는 그저 혀를 내둘렀다. 그 전자석을 시
즈가 또 다시 더 강한 전자력을 지닌 번개 마법으로 자성을 없애버려 인형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전자기장도 사라졌고 에너지원은 끊겨 버렸다. 결국 철상은 이야기를 다 마치고 입술을 열지 못했다.
"혹시 아시오? '의지가 바로 마법이라는 것을?'"
바스티너는 부드러운 시즈의 목소리에서 오래 전 '그'와 같은 기운을 느꼈다. 너무나도 두려웠던 이에게서 느껴지던
위압감이었고 자신을 억누르는 공포였다. 갑옷 '바스티너' 안에서는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안전하다던 법칙을 단숨에
깨뜨렸던 '불꽃의 춤을 추던 이'. 그에 비견되리라고 느껴지는 힘이 유일하게 가슴 속에 파고든 상대에게서 느껴지
는 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저마다의 걱정과 공포 등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즈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힘들게 외워서 주절대는 주문도 사실은 그대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그대는 아십니까? 세상에서
마법에 가장 유리한 종족은‥ 엘프도, 드워프도, 드래곤도 아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공포에 얼어버린 이들은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로진스는 이대로 가다가는 죽는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쓸모없어진 인형을 내팽기치고 절규하다시피 그가 외쳤다.
"나가라! 여기 있으면‥."
"노래하십시오! 그대의 의지와 신념에 숲이 울고 바다가 춤을 추도록! 세상은! 당신을 중심으로! 마법을 구현할 것
입니다!"
"죽는다! 나가라! 개죽음이 싫으면 뛰어라!"
땅이 울고 있었다. 바닥을 덮은 벽돌이 우릉대며 들썩거렸고 천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노래를 마친 시즈가 손을
들며 외쳤다.
"나는 노래합니다. 말(言)에 신념과 의지를 담아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존재를 향한 분노를! 破(파)! 나의 적의요!
분노의 표현입니다!"
이만 년 동안 한 주술사의 지나친 사랑의 저주가 무너지고 있었다. 시즈는 한 사내의 지나친 사랑의 결과를 그가
사랑했던 민족들이 죽어서 떠 안아야 했다는 사실의 잔혹함에 가슴이 아려왔다. 가만히 그는 찌부러져 버려진 채
건너 편 구석에 떨어진 인형을 떨어지는 모래 사이로 바라보았다. 똑똑‥ 모래 위에 물방울이 자국을 남겼다.
"아플로이크여‥, 그대의 사랑, 그대의 의지. 얼마나 많은 눈물 속에서 세상을 원망하였는지 저는 모릅니다. 미래의
절망을 아는 이의 슬픔을 모릅니다. 이제 가져가겠습니다. 그대의 수많은 바램 중에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버렸을
눈물에 담겼을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이뤄드리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저를 바람이라고 말하는군요.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이름을 받아드리고 싶습니다. 그대의 지나친 사랑이 비록 저주로 남았다지만 다시 나누면
생명을 포근히 감싸안는 사랑이 되겠지요?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눈물을 옮기여 비처럼 뿌릴 겁니다. 시간
속에 묻혀버린 눈물이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히 따스한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천천히 유리 눈동자가 돌아서고 머리칼이 그 여운을 쓰다듬고 지나쳐 통로로 사라져갔을 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
께 철인형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놓여있던 자리로 비틀거리며 기어올라간 인형은 시즈가 나간 자리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처음의 능수능란한 말투도, 그렇다고 에너지가 떨어져 더듬거리던 말투도 아닌 온화한 음성이었
다.
"나의 의지를 전승한 자여‥. 그대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지요. 사막의 절망에 빠져 이 금속의 몸에 인정이라고는
없는 저주스러운 의지를 집어넣었지요. 그리고 파멸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천 년의 시간이 흘러서 만난 사제
의 이름은 '크실로브라스(후회하기에)'이었다오. 얼마나 우스운 일이오. 절망했던 세상이 걱정스러워 '저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사랑'이라니‥. 그럴 거라면 무엇 때문에 세상을 저주했단 말이오? 그랬다오. 그래서 나는 돌아온
나 자신을 '멍청한 사제'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거요‥.'
표정이 정교하지 않는 철의 얼굴이었지만 왠지 미소를 짓는다고 느껴진 것은 우연이었을까? 한 사내의 사막을 향한
'지나친 사랑'은 이만 년의 방황을 마치고 모래 속에서, 사막 속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