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200)

                               31장 휴식의 시간이 되면 떠오르는 회상.

딸랑. 딸랑. 구슬이 떨어지는 소리냐고 묻는다면 사내는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를 지우고 질문한 사람의 뒤통수를 후

려 갈겨버릴 것이다. 감히 비교해야할 물건을 비교해야지. 투명도가 0에 가까운 유리구슬이라고 해도 타로운이라는 

금전 단위에는 미치지 못한다.

"으흐흐흐흐‥. 오천 타로운이야 오천 타로운! 대장 보라구!"

"흐흐‥ 일이 년은 죽도록 일해야 벌 수 있는 양이었는데!"

한 달에 일천 타로운에 가까이 버는 용병들-세이서스-이 있다고는  하지만 용병왕국 카로안에서도 각 지역의 리스

트를 잡고 있는 아주아주 극소수였다. 식비며 용병길드에 정규적으로 지불하는 정보료(情報料). 더 정확하고 중요한 

정보는 따로 돈을 내야했고 장비를 마련하고 수선하다보면 그들도 한 달에 순이익이 500 타로운 정도라고 보는 게 

옳았다. 금화를 품에 안고 던지고 비벼대던 토실흐덴은 문득 발광해야할 인원이 한 명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쿠라마스. 할아범은 어디 간거야?"

"그 나이 때도 친구가 있는 법이 아니겠소? 듀쿠스에게 간다고 합디다. 크아‥ 좋구나! 물렁하니 날 행복하게 만드

는 금화여어‥."

나이가 지긋한 두 노인은 로트스를 '사막의 보석'으로 만들어준 푸른 물길의 흐름, 실로나레이(여신의 사랑)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로트스에서 시작된 실로나레이의  물길은 점점 강줄기가 되어 동쪽으로  흐르고 볼케이스의 

수도를 비롯한 주요도시를 먹여 살리는, 그야말로 실러오나의 사랑이었다. 학자들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우기(雨期) 때 퍼부어진 빗줄기는 지하수가 되어 모래 밑과 바위틈을 흐르다가 로트스의 서쪽에 모이고 

동쪽으로 흘러가는 시작이 된다는 것. 

어쨌든 한 사람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촌로(村老)라면 다른 쪽은 젊은이처럼 눈이 형형이 빛나  노익장의 기세를 

풍기는 그들은 듀쿠스와 키틀볼로 일생일대 최고의 모험이라고 자부할만한 의뢰가 끝난 후 처음으로 여유로운 산책

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키틀볼의 날카롭고 과격한 눈매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지만 전처럼 늑대 이빨을 연

상시키던 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말없이 수로를 따라 걷던 듀크스가 문득 멈춰서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옳았어‥. 날개를 갖아야 진정 하늘을 나는 천사더군."

키틀볼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타인이 보았다면 차라리 무표정한 게 사교생활에  순탄하리라 생각할 듯 했지만 듀쿠

스는 알 수 있었다. 생사의 구름다리를 몇 번이나 함께 걸었던 친우가 나잇살은  먹은 주제에 어린 아이가 칭찬 받

았을 때처럼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저 상태에서 몸까지 비비꼰다면 진정 엽기적이겠군.'

키틀볼은 듀크스가 닭살스러움에 몸을 움츠리는 게 나이를 먹어서 그런 줄로 착각하고 지나간 세월에 쓸려  내려간 

젊음과 추억에 물끄러미 수로의 흘러가는 물결로 눈을 돌렸다.

"흠흠. 그래‥ 어땠나? 자네의 꼬마천사에게 날개를 건넸겠지?"

"후우‥. 몰랐어. 그토록 바라고 있었는지. 그 아이가 그렇게 밝게 웃을 수 있었는지. 할애비로서 부끄럽군."

다리의 관절 마디가 시큰하고 어깨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듀쿠스의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얼굴빛이 어둡게 

느껴지는 이유는 달 그림자가 드리워서지 절대로 불안이나,  걱정으로 인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샹들리에의 조명 

대신 달빛 아래서 춤이라도 출 수 있을 만큼 그는 기분이 좋게 손녀를 맡겨놓았던 친구, 맨덜슨의 저택으로 향했다.

거짓을 조금 보태서 사실을 말하자면 맨덜슨의 저택은 저택이라고 부를  수 없는 통나무집이었다. 그나마 로트스에 

기거하는 친구 중에서는 얼마 안 되게 굶어죽을 걱정 않고 생활했다.

"맨덜슨! 내가 왔네‥. 듀쿠스가 돌아왔다네."

듀쿠스가 힘차게 문을 두들이며 외치자 안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뭔가 넘어지는 소리와 와장창 깨져 나가는 

소리. 삐걱하고 문이 열리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허허‥ 저녁 식사 중이었나 보군. 그런데 왜 유령을 보는 듯한 표정인가?"

"그, 그래. 자네 정말 유령 아닌가? 난 자네가 '풍암의 바다'에 가겠다고 했을 때, 하늘 나라가 그리운 줄 알았다네. 

하하하! 그런데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다니! 실러오나의 보살핌이 틀림없네."

"후후‥. 나도 믿기지 않네. 그런데 테레미아가 보이지 않는 걸. 설마 무슨 일이 생긴‥."

듀쿠스가 어깨를 잡고 다그치자 맨덜슨은 시선을 피하며 미안한 감정을 띄우며 말했다.

"걱정 말게. 착한 아이야. 아무 일 없다네. 다만 자네가 말없이 떠난 후 부탁대로 내가  데려오기는 했지 않나. 헌데 

자네를 기다리느라 잘 먹지를 않네."

"하아‥ 이 친구야.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면 어떻게 하나. 난 테레미아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에끼. 자네야말로 손녀를 걱정시키지 말게. 지금쯤 아마 자네 집에 쪼그리고 있을 거야. 잠깐만 기다리게."

"되었네. 내 집이었던 곳인데 내 발로 못 찾아갈까봐 그러나? 테레미아는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작별  인사라도 하

고 싶나? 아! 그리고 이건 손녀를 보살펴준 보답이네."

웃옷을 걸치며 뛰쳐나오려는 맨덜슨을 만류한 듀쿠스는 자신이 진정 부자라고  생각했다. 비록 돈은 없었지만 진정

한 친구들이 있었으니‥. 용병들의 암묵적인 감사 표시 방법대로 문턱을 두 번 두들인 그는 금화가 든 주먹만한 주

머니를 발 밑에 놓아두고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등뒤에서 시끌벅적한 비명 소리가 연발했다. 

"금화에요. 금화!"

"저, 정말이었어. 듀쿠스가 정말로 '풍암의 바다'에서 살아온 거라고! 그 날의 동료들이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할

꼬‥."

듀쿠스는 약간은 빠른 걸음걸이로 숨가쁘게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가난에 신음하는 골목, 그 중에서도 시궁창에 가

까운 구석에 허름한 집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오두막이 자리하고 있다. 두께는 무술을 수련한다고  떼를 부리는 열 

살짜리 꼬마가 사용한 송판보다 얇은 썩은 나무판을 조심스럽게 밀자 부스러기가 투둑하고 떨어졌다.

'어디 있을까?'

어릴 적 잠자리를 잡기 위해 발소리를 죽일 때처럼 듀쿠스는 숨을 죽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고작 한 달 정도를 떠

나있었을 뿐이었는데 10년을 타지에 있다가 돌아온 것 같이 낯설었다. 저건 식사를 하던 테이블, 다리가 다 떨어져

나가고 가운데 하나만 남아서 밥을 먹을 때는 한 손으로 테이블을 잡아야 했지.  또 저건 담요를 보관할 자리가 없

어서 땅을 파서 만들었던 담요자리. 그러나 실상 중요한 테레미아가 보이지 않자 듀쿠스는 조바심이 났다. 그러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담요자리로 다가가 담요를 들추었다. 한 달이나 자리를 비웠는데도 담요에 먼지가 없었

기 때문이었는데 과연 그가 찾던 소녀는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천사처럼 자고 있었다.

"테레미아‥ 내 사랑스러운 천사‥  할아버지가 왔단다. 네게  달아줄 날개를 가지고 돌아왔어‥.  어서 눈을 떠보

렴‥."

테레미아는 잠결에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익숙한 향기를 맡고  헤∼하고 입을 벌였다.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아봤어. 누가 이토록, 포근한 손길을 가지고 있었지? 

"우웅‥."

부스스하게 일어난 테레미아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자애로운 표정의 노인을 향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행동은 이미 

그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역시, 할아버지였어. 돌아온 거야?"

"그래. 말없이 떠나서 미안하구나."

듀쿠스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 있어준 손녀를 본 것만으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라는 듯 할아버

지를 끌어안은 테레미아는 뺨을 부비며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요. 할아버지는 다시 테레미아의 곁으로 와줬잖아."

그대로는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나 성숙해진 모습에 듀쿠스는 안타까웠지만 우선 소녀를 일으켰다. 어린  아이

는 어린 아이다워야 한다. 날개를 달아주면 억지로 어른 흉내를 내지 않아도 될 거다.

"테레미아‥. 그래. 어서 가자구나."

"어디로?"

"어디긴‥ 집으로 가야지 않겠니?"

테레미아는 잠시 할아버지가 노망이 든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무슨 소리에요?'라고 반문할지 망설였지만 곧 그

녀는 노안(老眼)이 보름달처럼 맑다는 걸 깨닫고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또 이사를 가는 걸까?'

할아버지는 사막의 길 안내자로 이름은 높았지만 호신(護身)에 있어서는 장정들을 당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테

레미아가 '또 장정들에게 집 자리를 내놓으라는 협박을 받으신 모양이구나.'하고  시무룩하게 있을 때, 듀쿠스가 손

가락을 까닥였다.

"테레미아. 어째서 시무룩한 거니? 어서 이리 오렴."

"아이∼ 시무룩하다니요. 어두워서 잘못 보신 거에요. 전 할아버지가 돌아오셔서 기분이 좋은 걸요. 게다가 집이 기

대대기도 하고‥."

허둥지둥 밝게 지어 보이며 팔에 매달렸지만 듀쿠스가 어린 손녀의 슬픔을 눈치챈 후였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실망할 필요 없을 거란다.'

"이 녀석! 나이는 11살이나 되어 가지고 어리광을 부리다니!"

"베∼ 11살이니까 어리광이죠."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두 노소(老小)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간다기보다는 이런  저런 이야기로 즐겁게 떠들며 밤 

산책을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듀쿠스는 웃어대고 입을 몇 번 놀리는 사이-그의 관점에서-에 손녀에게 날개를 달아

줄 수 있을 곳에 도착했고 다리를 멈췄다. 테레미아는 갑자기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자 그의 시선을 따라 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듀쿠스가 보고 있는 건물은 저택이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턱없이 높아 오를 수 

없는 산과 같았다. 그런 집을 보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듀쿠스의  낌새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곧 다

리를 그리로 옮기는 할아버지가 노망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하,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테레미아?"

테레미아는 익숙하게 열쇠를 꺼내어 문을 따는 듀쿠스의 행동에 입을  다물었다. 혹시 할아버지는 그동안 도둑질을 

수련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테레미아가 불안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듀쿠스는 집 안 벽에 걸려있는 촛대에 불은 붙

이고 뒤를 돌아섰다.

"언제까지 밖에 있을 거니? '집'에 들어오지 않고?"

"설마‥. 정말로?"

그래봤자 이층 정도의 높이를 가진, 덤으로 삼층에는 조그마한 다락방을  곁들인 웬만큼 여유있게 사는 서민들에게

는 평범한 집이었지만 테레미아는 마치 공주님이 산다는  궁전에 온 것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구경하기에 바빴

다. 그리고 이런 곳에 산다는 게 자신에게는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저기 할아버지의 친구 분은?"

"허허, 테레미아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여기는 집이라니까. 우리 집이야. 그리고‥ 이리 와보거라."

그가 테레미아를 이끌고 간 곳은 3층의 자그마한 다락방이었다.

"네 방이란다."

사실 2층의 커다란 방을 줄 수도 있었지만 테레미아가 작고 아담한 장소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게 취미라는 걸 

아는 듀쿠스의 배려였다. 그러나 손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너털웃음을  지으

며 듀쿠스는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손녀에게 그동안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시간이 유사를 건너고 '사막의 신부'들을 만나고 '역사의 고리'와의 전투를 지나 무너지던 

'붉은 뱀의 사원'을 되돌아보았을 때 테레미아의 눈가에서는  맺혔던 눈물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랬군. 잘 되었어‥. 지금은 즐겁게 놀고 있겠구만."

"아니라네. 보통 때라면 놀러나갈 시간이지만, 지금은 더 관심을 끄는 존재가 들어와서 말이야‥ 그  녀석에게 신경

쓰느냐고 할애비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네."

"그게 무슨 말인가?"

"허허허‥ 그 녀석 있지 않나. 마지막 남은 꼬마 사제‥ 벌서 실의에 빠져있는 게 일주일이 넘었지 않은가? 세이서

스 용병단은 어디에 좀 다녀올 생각인지 나에게 녀석을 맡겼다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휴‥ 고집쟁이!"

발을 굴러대며 분을 참지 못하는 소녀는 듀쿠스의 사랑스러운 천사, 테레미아였다. 할아버지가 보았다면 눈이  휘둥

그레질 과격한 표정을 만면 가득히 드러내고 그녀는 투덜대고 있었다.  천사같은 소녀에게 이처럼 불쾌감을 초래한 

원인은 어제 갑자기 들이닥친 소년 때문이었다. 나이가 많다고 해봐야 그녀보다 세 살 이상 차이가 나지 않을 소년

은 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짊어진 듯 암울한 분위기를 풀풀 풍겨댔다.  말도 하지 않았고 음식도 먹지 않았

다. 화를 내며 억지로 먹여야 입을 벌릴 정도였다.

"어쩔 수 없잖니? 블리세미트는 사랑하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는 걸.  테레미아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슬프겠어?"

"알아요. 슬프다는 건‥ 하지만 저렇게 슬픔에만 빠져있지는 않을 거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다 죽고 혼자 살아

남았다고 해도 그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길을 살아가는 게 진정 죽은 이들을 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어른스러운 거야?'

아리에는 인생을 꽤나 맛본 노인들이나 해댈 말을 고작 11살 난 계집애가  주절거리자 마음 속으로 절규했다. 하늘

이여, 왜 제 주위에는 이토록 애늙은이들 밖에 없는 겁니까? 제발 나이에 맞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 아하하. 그, 그래? 그, 그런데 지금 뭘 만들고 있는 거니?"

"죽이에요. 전갈의 살과 타르바칸의 살을 삶은 다음 아주 잘게 썰어서 밀죽에 섞는 거죠. 워낙  먹으려고 하지 않으

니 어쩔 수 없잖아요. 죽으로라도 밀어 넣어야죠. 입을 찢어서라도‥ 흐흐흐."

테레미아는 블리세미트가 침묵의 도가니를 만들고 있을 이층 방의 바닥을  올려다보며 섬뜩한 의지를 불태웠다. 의

미심장한 웃음소리에 마녀인 파마리아조차 움찔했고 아리에는 블리세미트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

계단을 올라갈 때부터 기선을 제압하는 테레미아. 그러나 문을 힘껏 열어젖힌 순간 그녀는 후회했다. 창가에 걸터앉

은 소년의 어깨와 손가락에 앉아있던 새들이  푸드득하고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다루기 힘들던 

블리세미트가 기분이 상해 얼굴을 찡그리자 반대로 기선을 제압 당한 테레미아였지만 금세 전세(戰勢)(?)를 가다듬

고 쟁반을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 너 때문에 힘들게 만든 죽이야."

"언제 희생해달라고 말한 적 있나?"

블리세미트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나 때문에'라는 한 마디가 머리 속을 떠돌며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

었다. 그런데 테레미아에게 직접적으로 똑같은 소리를 듣자 가슴속이 터져 들어갔다.

"다른 사람의 희생은 지겨워!"

쨍그랑―! 고막을 찌르는 소리와 함께 자기(瓷器)의 파편이 나뒹굴었다. 아리에와  파마리나는 블리세미트가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 정도의 상황은 예상 범위 안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다음 상황 그들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 바보야!"

퍼억! 그렇다. 테레미아가 듀쿠스에게 숨기고 키워왔던 동네 싸움꾼의 실력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소리. 멀리서 지켜

보던 두 여인의 시선이 블리세미트의 복부에 꽂혀있는 한 소녀의 무지막지한 발꿈치에서 멈췄다. 소년과 소녀의 사

이로 뛰어들어 둘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테레미아는 귀곡성처럼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른 사람이 널 위해서 희생을 한다는 건 그만큼 네가 약하고 힘이 없다는 뜻이야. 넌 나 같이 연약하고(?) 가련한

(?) 여자애가 희생해야 할 정도로 형편없는 녀석이라고! 약해서 동정을  받았으면 얌전히 처먹기나 할 것이지 뭐가 

잘났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너 같은 계집애가 뭘 알아!?"

"뭘 알긴‥? 네가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고 해서 자신까지 죽은 사람인양 행동하며 어리광을 부려대고  있다는 걸 

알지. 게다가 15살이나 먹은, 그것도 사제복을 뒤집어쓴 남자가 할  말이 없으니까 남녀 차별의 논리시비(論理是非)

상 절대로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내서 4살이나 어린 여자를 눌러보려고 기를 쓰고 있다는 것도! 

"테레미아‥ 그만 하렴."

아리에는 새파랗게 질려버린 블리세미트를 보다못해 테레미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왜 그래욧!?'하는 눈초리

로 테레미아가 쏘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너무 잔혹해. 블리세미트는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얼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테레미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판단하고 정의를 내려버릴 수는 없단다."

"그, 그렇지만!"

"그만해. 블리세미트도 곧 실의에서 벗어날 거야. 티격대는 너희 둘을 보니까 나와 시즈가 다투던 때가 생각나."

아리에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일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현재의 블리세미트는 

일년 전의 시즈를 닮아있었다. 그 때 잠자코 지켜보던 파마리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상상할 수 없는 마법력을 

가진 시즈는 무엇이나 연구의 대상이었다. 솔직히 마법과는 관련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너와 시즈는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거야? 너 정도의 여자에게 그 얼음장같은 남자가  무엇 때문에 마음

을 열었지?"

"너 정도의? 무슨 뜻이죠? 파마리나."

으쓱하고 마녀는 대답을 회피했다. 허리춤을 뒤적이며 단검을 찾던 아리에는  불타는 듯한 테레미아의 눈동자에 등

뒤로 흐르는 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 때, 시즈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었어. 밥도  먹지 않았고 잠도 자지 않았지. 그렇다고 블리세미트처럼 

막무가내로 음식을 내던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정중하기 그지없었지. 하지만 그가 예의를 지켰다고 해서 다가가기가 

쉬웠던 것은 아니야. 더 힘들다고 해야 옳았지. 블리세미트같이 '먹기 싫어!'라고 소리치며 음식을 내동댕이치면 빌

미를 삼아서 얘기를 걸 수도 있었지만‥

"저리 치워 주시겠습니까?"

이게 바로 그의 말투였거든.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당시에는 훨씬 싸늘해서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반경 안

에만 들어가도 온몸이 으스스하게 되어버린 달까? 분명한 것은 얘기를 걸 시비를 주지 않아서 잠자코 지켜볼 수밖

에 없었어. 

그리고 내가 시즈의 곁에 다가갈 수 있었을 때는 이미 탈진으로 목숨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가 된 후였지. 그는 처

음 기절하고 3일이 지나서 정신을 차렸는데 언제나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켰어. 작은 반지나 돌멩이 같은 물체가 주

위를 항상 떠다녔지. 나는 그가 바람으로 장난을 치며 기분을 풀려고 노력하는 줄 알았지. 시즈는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금세 알아야 했지.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보를

레스가 버럭하고 화를 냈거든. 그는 이미 혼자서 용병일을 하고 있었어.  먹고살아야 하잖아. 어쨌든 여관에 들어온 

보를레스는 쌩쌩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시즈를 보고 소리쳤지.

"너! 도대체 뭘 한 거야!? 왜 저렇게 되도록 놔뒀어! 기절을 시켜서라도 말렸어야지."

"무슨 말이죠?"

조금 민망했어. 알고 보니 시즈는 자기자신을 고문하고 있었던 거야. 솔직히 전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게 마법을 쓰

면 당연한 건 줄 알았지. 파마리나! 웃지 마세요. 시즈는 처음 보았을 때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였어. 까마귀꽁지깃

털처럼 아주 까매서 맑은 밤하늘로 장식한 듯 했었다고. 그런데 마법을 쓰니까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눈동

자가 유리알처럼 투명해져서 마법사는 다 그런 줄 알았지. 나중에 들어보니 그게  바로 마나를 과다로 사용하여 나

타나는 부작용으로 엄청난 고통이 뒤따른다는 거야.

"그래서요? 내가 방안에 들어가 봤자 소용없어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고요."

약간은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사과하고 싶지 않았어. 나 역시 너무나 변해버린 현실에 힘이 들었으니까. 보를레스

가 시즈에게 다가갔지만 거부는 더 강렬해서 살의까지 풍겼어.

"시즈‥ 언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일 거냐? 하늘에서 널 내려다보고 있을 레소니와 헤트라임크님께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그 이름을 한 번만 더 꺼낸다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그만 나가주십시오."

결국 시즈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실명(失明)했고 고통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어. 죄책감에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거부해버린 거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

테레미아는 시즈가 블리세미트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 않는  심적 상처를 받아들여야 했다는 걸 눈치채고 물었

다. 그녀는 볼리세미트에게 날카롭운 시선을 쏘아보내며 '잘 들어. 너만 소중한 이을 유일한 자가 아니야.'라고 압박

을 넣는 듯했다.

"보를레스의 말대로라면 시즈의 아버지는 대마법사였어.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역사의 고리'에게 어떤 금제를 받고 있었던 듯해. 그는  시즈가 '역사의 고리'에게 쫓기지 않도록 피할 수 

있던 죽음을 받아드린 거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

"그리고‥?"

인간의 신체는 너무나도 약했다. 뿌려지는 선혈(鮮血)과 인체의 파견을 보며  당시의 아리에는 절실하게 느꼈다. 그 

아래서 하늘이 무너져 버리는 표정의 청년,  머리카락도 얼굴빛도 백지장처럼 변한 그는 조금만  힘을 주면 찢어질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지는 절규‥.

그 때였는지 모른다. 부모의 죽음에도 담담하던 아리에의 마음 속에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이를 죽였지. 실수였다고는 하지만 시즈의 마법에 그녀는 손가락의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어."

시간은 몇 일하고도 몇 시간이 지났을까. 시즈가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눈물을 흘릴 때마다 

꼭 끌어안고 토닥여주는 내 자신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어. 시즈도 점차 울부짖는 횟수가 줄어들었지. 익숙해진 거

야. 그는 자신의 아픔에‥ 나는 그의 슬픔에‥. 

"시즈? 입을 좀 벌려봐. 아침에는 잘 먹더니‥."

더 이상 고통에 겨운 비명으로 인해 여관 주인 아저씨의 질책을 받지 않았지만 시즈의 머리카락과 눈의 빛깔은  두 

번 다시 검은 색으로 돌아오지 않았어. 의사는 실명된 눈은 영양을 잘 섭취하면 회복되리라고 말했지만 그 것도 쉽

지 않았어. 시즈는 엘시크에서 도망칠 때 왼팔에 많은 화살이 박혀서 두 달 동안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는 작은 행동

도 힘들었으니까.

한 마디로 그는 내가 곁에 없다면 식사도 할 수 없었어. 

"아아‥ 몸과 정신이 상처받은 남자를 보살피는 여인‥ 앞이 보이는 사랑이야기야‥."

"파마리나!"

"아리에, 얼굴이 빨갛게 되었네요."

"자꾸 그러면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흥!"

파마리나와 테레미아의 이중공세(二中攻勢)에 아리에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삐쭉거렸다. 킥킥거리

며 테레미아가 아리에를 흔들었다.

"이제 안 놀릴 게요. 아리에 어서 이야기를 계속해요. 블리세미트가 보고 있다고요‥."

마지막 한 마디는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기 때문에 아리에 이외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귀를 토끼가 쫑긋거리듯 

살짝 떨렸다. 토라진 듯 테레미아를 피하는 척  하면서 블리세미트를 곁눈질했다. 분명히 이야기하기를 기다리는지 

아리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흔들어대는 테레미아에게 못 이기는 척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는 내가 먹여주는 것도 얼마지 않아 익숙해졌는지 아무런 반항없이 받아먹기 시작했지. 문제는 눈의 시력이 돌아

왔는데도 혼자서 먹지를 않는 거야. 시즈는 완전히 어린 아이 같았어. 하지만 가끔씩 먼 곳을 보며 슬픈 미소를 짓

는 모습은 날개를 잃고 소리없이 오열하는 천사를 보는 듯 했어. 어느 게 진짜 시즈 세이서스인지 알 수가 없어 고

심하는 사이에‥ 그래, 파마리나의 말대로 나는 수프를 흘릴까 조심스레 떠 먹이고  보듬어 안아야 잠이 드는 커다

란 아이로 마음이 가득 차버렸어.

"시즈‥ 오늘은 밖에 나가보지 않을래?"

그의 일과는 자고 먹고 창 밖을 내다보는 게 전부였지. 하루는 시즈에게 바람을  쬐게 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거부

하는 걸 달래서 겨우 데리고 나갔어.

"시즈? 시즈‥. 그냥 산책을 하는 것뿐인데 왜 그렇게 불안해?"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 수 있었어. 우리가 머물던 도시 아무루는 용병국  서부의 중심 도시였고 당연히 용병은 까

마득히 많았지. 지나다니는 사람 중 절반이 용병일 지경이었어. 힘이 있는 자들  중에는 난봉꾼도 많은 법, 그 날은 

운이 안 좋았는지 그들의 집게발에 걸려들고 만 거지. 사람도 없이 한적한 숲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두 명의 남자가 

앞을 막고 훑어보더군.

"호오‥ 아가씨? 이쁜 얼굴에 꼬마랑 붙어다니니 얼마나  슬프겠어. 우리가 시간 내서 놀아줄 테니까 이리  오라고. 

척 보니 이제 여자가 될 시기인데 오늘 밤 부드럽게 해줄게."

정말이지 역겨운 놈들이었어. 지금 같았으면 당장 온몸을 단검 꽂이로 써버렸겠지만 당시에는 힘이 없었지.

"난 당신들한테 관심 없어요. 그러니 길을 가게 비켜주겠어요?"

"핫핫핫! 밤까지 기다리기 힘든 모양인데!? 사람도 없는데 여기서 여자로 만들어주지‥."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잘 생긴 미남이라고 해도 소름이 끼치는데 그들은 더욱이 생태학적으로 인간이라기보다 오크

나 오거에 가까운 외모였어. 그런 놈들한테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안길 수야 없는 노릇이지. 절대로 말야.

"그럼 시즈한테는 괜찮고? 어머머! 아리에 양, 짐∼승∼"

"파, 파마리나. 웃는 게 왜 그래요? 그, 그리고 애들 있는데서 이상한 얘기는 그만둬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잖아. 네가  보듬어 안지 않으면 잠들지  않는다며? 만약 그에게 약간의  흑심이라도 있었다면 

벌∼써‥ 흐흐흐."

용광로에 들어갔다 나온 쇠처럼 달아오른 채 아리에는  겨우 목소리를 내여 소리쳤지만 파마리나는 전혀 움츠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테레미아는 음흉한 미소-11세의 음흉한 미소라니‥ 끔찍했다-를 지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다∼ 아니까 걱정 마. 블리세미트도 다 알고 있을 거야. 그나저나 아리에∼ 열 아홉 살이나 먹어서 귀엽

긴∼"

안타깝게도 추측은 빗나갔다. 소년은 정말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사막에서 남자들과 자랐으니 그런 걸 알려줄 리가 없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리에는 왠지 다행스러웠다. 블

리세미트마저 테레미아나 파마리나처럼 반응해버린다면 정말로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헛기침을 해가

며 당황함을 약간이나마 무마시킨 그녀는 입맛을 다셔대는 두 여자에게 말을 이어 들려줘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녀석들은 날 잡고 놓아주지 않았어. 귓가에 발정난 개가 숨을 몰아쉬는  듯한 숨소리가 들리는데 정말 죽고

만 싶었지. 시즈는 이미 적의를 느끼고 있었던 데다 나까지 소리를 지르자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어. 그의 이미지

와는 다른 광폭하고 짐승같은 기세로 말이야. 허약하게 보였던 시즈가 빠르고 강하게 달려들자 그들은 당황한 눈치

였어. 하지만 역시 용병이었는지 반대로 순식간에 시즈를 제압해버렸지.

우두두둑!

"그, 그만 둬!"

"으아아아아아악!"

그렇지 않아도 고정되어 있던 왼팔이 가차없이 부러져 흐느적거렸고 웬만한 아픔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시즈는  숲

조차 소름끼칠 비명을 질렀어. 

"뭐, 뭐 하는 거야!? 그만 둬! 그를 그냥 놔두라고옷!"

"흐흐‥ 가만히 있어. 리키! 그 녀석을 완전히 보내버리라고. 이 여자가 다른 생각할 수 없게!"

"좋았어."

시즈는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랬듯이 나를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 난 발버둥쳤어. 그런 녀석들한테 당하는 

것이나, 시즈가 다친다는 것이나 둘 다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음만  용납할 수 없으면 뭐해. 내게는 힘이 

없었는 걸. 

"가만히 있지 못해!?"

짜악! 팔을 잡고 있던 남자는 심하게 반항하는 내게 뺨을 때렸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어오르는 게 어스름하게 느

껴졌지만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어. 멈추는 순간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으니까.

"이 계집이!"

짜악! 고개가 돌아갔지만 나는 독설을 퍼부었지.

"퉤! 너 같은 녀석들한테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겠어."

짜악! 역시 남자의 힘은 강하더군. 겨우 세 대 맞았는데 눈물이 나고 입에서는 피맛이 났지. 하지만 그게 바로 그들

의 실수였던 거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던 시즈의 투명한 망막은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한 방울의 피가 맺히자 새

파란 한광(寒光)을 들어냈어. 뚫어지게 핏방울을 주시하던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서 흐느적거리는 팔과 자신을 억

누르고 있는 리키라는 사내를 바라보았어. 마치 다른 사람처럼 현재의  상황을 가름해보는 듯한 무미하고도 냉정한 

시선에 나는 곧 무언가 일어날 거라는 예감으로 등은  땀으로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그는 다시 빨갛게 부어있는 내 

뺨과 턱 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다가 말했지.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엥!? 지금 이 꼬맹이가 뭐라고 주절대는 거야?"

"하하핫! 못들었나, 리키? '비켜주시겠습니까?'라는데!? 으하하!"

시즈는 비웃는 사내들을 무시하고 하던 말을 독백처럼 담담하게 이었어.

"당신들은 용병이군요. 싸움에서의 부상은 당연한 일이겠군요. 당신들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결과이니 원망은 마시기 

바랍니다."

"뭐? 어!? 자, 잠깐! 지금 튀어 오른 저건?"

"눈이 나쁘시군요. 당신의 팔입니다."

사내는 자신이 팔이 잘려나간 후에도 믿지 못하고 한동안 멍청한 얼굴이었지. 하지만‥.

"역시 하나로는 감각이 일깨워지지 않는 겁니까? 그렇다면‥."

"으아아아아아아악!"

다른 팔도 잘려나가니 확실하게 비명을 지르더군. 나를 잡고 있는 남자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느껴졌어. 자신들

이 깔봤던 상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는데 동료의 팔이 난도질을 당해버린 것이다. 외팔

이도 부러워진 사내를 발로 걷어차고 일어서는 시즈를 향해 그는 말했어.

"마, 마법사? 그렇지만 마법사라면 주문을‥."

"뭐‥ 가끔은 예외도 있는 법이죠. 범법  행위에 대한 형벌이 제법 가혹하다는 소리를  듣는 용병국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그대들처럼 말입니다. 아리에를 놓아주세요. 그렇다면 놓아드리지요."

쥐와 고양이 역할은 이제 바뀌었지. 역할의 변화에 용병은 당황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는 분별력을 잃

을 정도로 공포에 질리지는 않았는지 동료를 짊어지고 도망쳤어.

"‥‥."

"괜찮습니까, 아리에?"

그리고 시즈는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작게 말했어.

"미안합니다. 나의 생명의 무게를 안다고 하면서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다니‥ 아리에 당신에게 안 좋은 모습만 계

속 보였군요."

"시, 시즈?"

끄덕‥.

그래. 이때부터였지. 그가 입을 열기보다는 작은 몸짓으로 의사를 표현하기 사작한 것은. 

"나 역시 당시에는 시즈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줄은 알았어도 그렇게 막강한 마법사인지는 몰랐기  때문에 얼어있었

어. 하지만 실수였어. 때문에 그 후로 시즈는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나는 다시 그에게 다가가는 일을 반복해

야 했지. 조금 힘들었어. 흐음‥ 말을 하다보니까 도대체 어디까지 말해버린 거지? 나도 참‥."

"참 귀엽지. 하하핫‥."

파마리나는 아리에를 놀리는 재미에 중독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이제는 당하지  않겠다는 듯 아리에는 짐직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쨌든 난 그가 이후로 약한 모습을 보인 일이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누구나 힘든 일은 있고 소중한 이는 떠

나게 되겠지. 그게 바로 사람들이 사는 일이니까. 하지만 소중한 이를 잃는다고 하여 자기 자신까지 잃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블리세미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리에는 파마리나와 테레미아를 

이끌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괜찮을 거야."

"암‥ 괜찮겠지. 아리에가 사랑에 빠지게 된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파마리나 이제 그만 좀 해요."

"그나저나 테레미아, 아리에를 사랑에 빠지게 한 남자는 어디 갔는지 아니?"

"보를레스랑 함께 의사한테 간다고 하는 것 같던데?"

아리에는 그 날의 이야기를 후회했다. 이 두 여인은 평생토록 자신을 놀려먹을 사람들이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 * *

"또 어쩌자고 마법을 사용한 거요? 마법으로 하여금 생명력을 유동시켜 당신의 왼팔을 지탱시키고 있다는 걸! 이것 

보시오. 마법을 사용하게 되면 유동시켜야 할 생명력이 멈춰버린단 말이오. 도대체 얼마나 마법을 써댔는지  모르지

만 벌써 근육의 조합이 뒤틀리고 있소."

"미안합니다. 하지만 쓰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었습니다."

사내는 아리에를 제외하고 시즈가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유일한 이였다. 이유는? 원래 인간은 약점이 잡히면 약해지

는 법이다. 그러나 사내는 사내대로 자기이 시즈에게 약하다고 생각 중이었다. 그래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

'골치를 썩어 들어가게 하는 녀석이지.'

그의 기억이 일 년 전으로 역류에 올라갔다.

"이보시오! 당신이 의사(醫師) 토슬레요?"

"그렇네만‥?"

서부 용병들의 집합지에서 그는 꽤나 이름있는 의사였다. 일거리가 상처나는 사람들이 가득하니 벌이도 제법,  아니 

무진장 짭짤했다. 서른 세 살의 노총각이었지만 결혼할 생각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다만 일이 너무 바쁘

다보니 그 쪽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을 뿐. 하루는 신장이 2미터나 되는 20대 후반의 청년이 방안으로 달려 들어왔

다. 그는 눈 씻고 찾아봐도 상처‥ 두 개? 세 개? 밖에는 보이지 않는, 한 마디로 돈줄 안 될 고객을 향해 눈을  부

라렸다. 그러나‥

"나 따라오시오!"

"하하하‥ 이보시게. 나도 할 일이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여기를 뜨면 어떻게 하겠나? 다 자기 본분에 충실해야 하

는 거라고."

"그 본분이래봤자 사람 치료하는 일이잖소. 날 따라가는 것은 출장치료니 그야말로 의사의 본분이오. 알았으면 어서 

따라오시오."

"자, 잠깐! 치료용 가방은 가져가야 하지 않소!"

청년은 난폭했으며 작은 눈매는 더 이상 움츠러들 수 없을 만큼 작게 토슬레를 쏘아보고 있었다. 알았다고 말한 일

도 없었지만 목덜미를 잡고 무작정 들쳐 없었다. 납치된(?) 의사 토슬레가 끌려간 곳은 음식 맛이 유명한 반어터의 

용병 여관이었다. 이층 오른쪽에서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토슬레는 만나본 환자 중에서 가장 말 안 듣

는 환자를 대면하게 된다. 시즈이라는 이름은 평범한 케이스인 그는 첫 인상부터 장난이 아니었다.

"헉! 이건‥! 도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이 지경이요!?"

토슬레는 의사의 본능대로 환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눈앞의 청년을 살리느니 그나마 움직이는 좀비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게 쉬우리라고. 화살이 가시 돋은 듯 무수히 박혀있는 왼팔과 척추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검상. 

하지만 척추가 빗나갔다 뿐이지 오른쪽 어깨에서 골반에 이르기까지 양단을 내놓은 상처가 가벼울 리가 없었다. 

이건 살릴 수 없다는 걸 의사인 토슬레가 모를 리 없었다. 잔혹한 사람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와 

18세 정도의 여인에게 이를 갈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이를 치료하는 것만큼 의사에게 끔찍한 주문은 없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입에 '의사의 본분'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내였다. 환자의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시체라고 본다

면 의사라는 이름을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가망이 희박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소. 하지만 진정 당신이 실력이 있는 의사고, 이게 있다면 가능할거요."

"이게 뭐요?"

"리오스라는 최고급 치료 물약과 생명수 에릭사. 그럼 부탁하겠소."

"뭐요? 에릭사?"

에릭사? 그게 어디 애 이름인가? 에릭사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목숨을 드러낸 일은 단 한번. 190년 전 기사,  롤지스

탄타뉴가 약혼녀인 아스틴의 왕녀, 마시넬를 위해 드래곤과 싸워 가져왔으나  자신은 힘겨운 전투의 휴우증으로 목

숨을 잃고 말았다는 전설을 낳은 성약(聖藥)이 아니던가.

"이 사내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오? 그러나 이  물약이 진정 무한한 생명력의 상징 에릭사라면 살리는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오. 다만 왼쪽 팔은 내 의술로는 완전히 고칠 수가 없소. 완전히 벌집이 되어 버렸소. 아마 신의

(神醫) 펠트 산의 엘프 장로가 직접 온다고 해도 무리일거요. 에릭사가 성약이라고는 하나 무한한 생명력을  보충해

주는 것이지 구멍이 송송 뚫린 근육과 뼈를 이어주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지는  않소. 물약으로 과연 원상복구 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소. 그렇게 알고 나가주시오. 치료를 시작할 테니."

보를레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가치가 있다. 시즈는. 마지막  세이서스가의 유산‥ 성약(聖藥) 에릭사. 

세이서스가의 저택에서 도망칠 때 헤트라임크가 부탁했다며 최후의 하인이 자부심에 찬 표정으로 건넨 물건.

에릭사가 있으니 시간에 쫓기지는 않아서 좋았다. 천국으로 초고속 전송(傳送)되려는 영혼도 숨만 끊어지지 않았다

면 붙들어놓을 수 있었으니까.

가장 시급한 일은 어깨부터 양단된 상처보다  영원히 거추장스러운 부속품으로 변해버릴지 모를  왼팔이었다. 우선 

에릭사를 한 모금 정도 먹이자 청년의 몸은 연분홍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팔에 있는 화살들을‥. 흠, 엘시크 궁정 기사단의 화살이군. 기사도는 빌어먹을 만큼도 없는 화살."

기사라는 말은 처바르고 있으니 독은 바르지 않았지만 중간 부분에 구리를 살짝 도금에 두었다. 혹자는 겉멋 든 엘

시크 기사들의 폼잡기로 착각하지만 구리는 인체 속에서 독이다. 조금한 구리가 벗겨져  인체에 남거나 하면 그 부

분을 좀 먹기 시작하기 때문에 당장 뽑아내는 게 그나마 살길이 있는 편이다. 단도를 든 토슬레는 재빠르게 화살의 

양끝을 다르고 뽑아냈다. 청년은 이미 정신을 잃어 신경 선을 핥아대는 고통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화살이 

가지런히 쌓이자 넓은 그릇 위에 시즈의 팔을 올려놓고 에릭사를 붓기 시작했다. 동방 의학에서는 잠재된 생명력을 

'기(氣)'라고 표현하는데 기(氣)는 성질이 강함이 약함을 가져가는  경우, 약함이 강함에게 나눠 받는다는 모순적인 

성질로 알려졌다. 마나mana와는 또 다른 형태의 에너지는 세일피어론아드의 학자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동

방의 학자들이 내세우는 기(氣)의 이론은 현실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

끔은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법. 

"에릭사는 그릇이 약하다. 그러므로 좀더 강한 그릇인 인간의 몸으로 흡수될 거야."

그게 아니라면 다시 받아서 써야 했으므로 아래에 쟁반을 받혔으나 분홍 빛깔이 새어나오면 나올까 에릭사는 한 방

울도 아래로 흐르지 않았다. 쾌재를 부르며 물약을 들이부은 토슬레는 스펀지같은 시즈의 팔을 주물거렸다.  조금이

라도 물약이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선홍색 피가 주르륵하고 흘러나와 보는 사람의 얼굴에게 심하게는 구토증

상을 가져올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아‥ 무슨 굽기 전의 고기를 양념에 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람. 후우‥ 역시 강기(强氣)에 속하는 

에릭사가 약기(弱氣)에 속하는 리오스를 흡수했군. 어떻게 보면 간편하기도 하군. 상처를 봉하는 것도 아니고. 고름

을 짜낼 필요도 없으니‥."

그러나 이보다 더 긴장되는 치료가 있었던가. 점점 주무르는 사이 팔이 아물어 가는 걸 보며 한숨을 놓은 토플레는 

등의 검상(劍傷)을 벌리고 남은 에릭사를 콸콸 부었다. 상해버린 내장에까지 에릭사가 흡수되어야 했으니까. 입으로 

마시게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곳으로 흡수되는 양이 많다. 치료할 때는 치료할 부위의 회복력을 최상으

로 만들어두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리오스를 붓자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를  보며 긴장이 풀린 토플레는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힘들게 하는 군."

"자넨 정말이지 힘들게 하는 사람이야."

일 년 전에는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든 토플레는 코에 주름을 잡아가며 중얼거렸다. 이러

니 담배를 놓을 수가 없다니까‥. 무겁게 느껴지는 파이프를 입으로 가져간 토플레는  담배 맛이 씁쓸한 입맛을 달

래주기를 바라며 힘껏 빨았다. 담담하게 듣고 있던 시즈는 기계 팔을 점검하는 로봇처럼 왼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

며 상태를 시험해보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입니까?"

"후우‥ 앞으로 10년, 빠르면 5년이네. 전에 말했듯이 자네의 왼팔이 에릭사의 생명의 흐름이 유통되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는 거지. 한 시라도 유통이 끊기면 계속 데미지는 축적될 걸세. 만약 이번처럼 마법을 계속 쓰면‥ 당

장에라도 멈춰버릴지 몰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단료는‥?"

"이 타로운만 내게. 사실 진단으로 이  타로운은 턱없이 비싸지만‥ 자네는 수 천만  타로운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몸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싼 거지."

시즈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금화를 두 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잽싸게 낚아챈 토플레는 문을 밀치는 

그를 씨익하고 웃으며 배웅했다.

"잘 가게. 다른 건 몰라도 자네는 계산이 정확해서 좋아."

철컥.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토플레는 아무래도 돈을 세어볼 작정인 듯 했다. 케이소 용병단의 사람들

과 같은 취미를 가졌다고 해서 그리 꺼릴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자리를 피해주고 싶어지는 게 시즈만의 심리

일까, 사람의 심리일까? 기다리고 있던 보를레스가 다가오면 물었다.

"어때? 괜찮데!?"

"예. 그래서 제가 이 정도 가지고는 별 영향도 가지 않는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아하하하하, 그렇군. 다행이야."

자주 볼 수 없던 미소까지 지어 보이는 시즈의 모습이 어쩐지 불안해 보였지만 보를레스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토플레 씨도 대단하군. 골치 아프다, 골치  아프다 하고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면서 아무루에서  여기까지 

자네의 상태를 보러 와주지를 않나?"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토플레는 시즈가 아니라 타로운의 금화를  보기 위해서라는 게 천리길을 마다않는다

는 게 더 신빙성 있었다. 금화를 벌 수 있는 용병은 많지 않았다. 그것도 진단료로 선듯 내놓을 정도의 용병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긴 그는 의사로서의 본분이라기보다는 돈에 대한 욕구가 더 깊은 사람이지. 그나저나 진단료로 몇 타로운 씩 떼

어먹히다니 그렇게 떼어먹힐 수 있는 우리도 참 대단해."

'그렇게 되기까지 그러고 보면 일 년 동안은 참 바쁘게 살았군.'

서부 용병의 집합지라는 아무루에서 리스트를 차지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대단해. 언제 그렇게 실력이 향상된 거야?"

보를레스는 주위에 널려있는 고블린들의 시체를 보면서 감탄했다. 그가 동굴 서쪽을 처리하는 동안 나머지 삼면(三

面)을 시즈 혼자서 모두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뭇잎으로 예도의 피를 닦으며 시즈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은 그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었다.

"에릭사의 힘인가?"

아마도. 대답하지 않고 머리와 목만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시즈는 긍정을 나타냈다. 보약을 섭취하면 몸이  좋아진다

는 것은 당연했다. 시즈는 죽을 사람도 살린다는 성약으로 포도주로 고기 절이듯  몸을 절여댄 사람인데 그 이상의 

효과는 당연했다. 전에는 보를레스를 위협할 수 있는 속도- 그것도 예전의 보를레스와 당시의 보를레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한 마디로 그 때는 약한 보를레스 -로 공격만 해도 손바닥의 거죽이 온통  벗겨지고 숨이 가빠했으나 용병 

일을 시작한 후에는 오른팔만으로 보를레스의 양팔에 버금가는 힘을 보이고  있었다. 근육도 그리 없는 호리호리한 

팔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생명력이 깃들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보를레스가 대단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힘이 아니었다. 힘이 특출한 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시즈가 양팔을 모

두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 힘에 놀랄 수도 있었겠지만  왼팔로 강한 힘을 주는 것은 토플레가 눈을 부릅뜰 금기사

항. 그렇다면 어디일까? 하나의 오작동 없이 돌아가는 두 다리, 그리고 1m 밖의 책표지도 읽지 못하던 두 눈.

"한 마리 남았습니다."

스륵. 전광석화라는 느낌이 바로 그럴까. 좋아진 시력으로  수풀에 숨어있는 고블린를 포착하자마자 모습이 모래성 

무너지듯 사라지는 듯한 현상은 아마도 잔상을 일으킬 정도에 조금 못미치는 속도를 뜻하는 게 분명했다. 보를레스

이 동체시력으로도 정신을 집중해야 잡아낼 수 있는 빠르기로 시즈는 이미 고블린의 앞에 육박해 있었다. 

"키엑!?"

예전의 물이 흐르는 듯한 움직임은 여전했다. 목표에게 다다르자 빙그르르 돌아 뒤로 돌아간 그의 자연스러움에 고

블린은 보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시즈는 오크의 등을 향해 주저없이 의뢰의 성공을 알리는 예도를 내뻗었다.

"커억! 쿠륵! 쿠르르륵!"

고블린가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전율이 인다고 할까. 시즈는 '보기보다 빠르다'라는 말 그 자체였다. 보

통 검사들에게 검의 빠르기는 물론 중요하지만 상대의  공격을 피해 후면이나 측면을 잡아내는 것이야말로 승패를 

좌우하는 최고의 관건이었다. 하지만 측면이나 후면을 잡아내려면 상대가 등만 돌리면 되는 속도보다 빨리 긴 동선

을 따라 움직여야 했으므로 같은 수준의 검사들은 대부분 포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서해검술은 철저한 정면

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있었다. 너무나도 쉽게 적의  측면과 후면을 잡을 수 있는 이가. 동방도예(東方銳

刀)와 함께 전해진다는 움직임, '보법'이라고 보를레스는 추측했다.

"하아‥ 생각보다 시간이 적게 걸렸어. 돌아가면 시원하게 샤워나 하자고. 시즈!? 왜 그래?"

백은발의 청년은 방금 전 죽인 고블린에게서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했는지 시체를 미심쩍게 내려다보았다. 보를레스

가 다가가려 하자 손을 들어 다가오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살짝 얼굴을 찌푸린 시즈.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의

문이 풀렸는지 눈을 번쩍 떴다. 투명한 눈동자가 훤히 보일 정도로 눈매가 커진 게 분명 놀란 모습이었다.

"보를레스, 도망칩시다."

운이 나쁘다면 아주! 무지! 엄청나게 나쁜 날이었다. 시즈는 설마하니 바람이 일러주는 경고가  자연의 혼돈으로 인

한 오차이기를 바랬으나 고블린에게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갈색의 빛깔은 꿈이 아니라는 듯 시즈의 몸을  긴장으

로 꼬집었다.

"무슨 일이야? 왜 도망쳐야 하는 건데?"

그래도 시즈가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일은 드물었으므로 보를레스는 질문을 하면서도 발은 열심히 시즈의 뒤를  따르

고 있었다. 그가 과연 이토록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다니 방금 전의 갈색 빛깔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가 현재 전

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고 덕분에 자신은 따라가기 힘들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시즈를 이토록 

다급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 물음은 잠시 후에 풀렸다.

"쿠아아아아아!"

"뭐, 뭐야!?"

산 전체가 울리는 포효. 보를레스는 순간 눈앞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귀에 균형을 조절하는 기관이 있어서 충격을 

받은 걸까? 아니었다. 단순하게 대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단순한 내용이 얼마나 두려움을 끼치는 일인지  당해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베히모스입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요."

그러나 사람의 심리는 하지 말라면 더욱 욕망에 자극을 받는다.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를 욕망에 뒤를 돌아본 보를

레스. 인간에게는 또 다른 심리가 있는데‥

'충고를 무시했다가 후회만 한다.'

"쿠아아아아아!"

보통 베히모스가 일어나면 산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조금 과장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후일 살아 돌아온 보를레스 

역시 '베히모스가 어땠소?'라는 질문에 '산이 움직이는 듯 했어.'라고 대답했다는 걸 알아두자. 산만하지 않은 덩치

라고는 해도 한 사람 정도는 가볍게 삼켜버리고도 트림조차 하지 않을 크기였다.  돌로 만든 정교한 모형이라고 착

각할 듯한 표범은 거대한 몸체를 날 듯이 달려오면서도 겉보기로 느껴지는 거친 질감과는 다리게 쿵쿵거리는  소리

도 없었다. 드래곤에게 대항하기 위한 성수,  '천둥의 유니콘', '불꽃의 피닉스', 그리고  '수호의 베헤모스'만으로도 

뒤에서 쫓아오는 존재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확신하건데 저 발에  살∼포시 밞히며 보를레스는 그 자리

에서 육포가 되어버리리라. 

인간의 멍청한 습관적인 심리에 따라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죽을 지도 모를 상황인지 분별

도 못하는지 농담을 해대기 시작했다.

"시즈, 시즈, 자네 달리는 속도가 너무 느리군. 뒤를 한 번 쳐다보라고! 단숨에 속도가 배는 빨라질 거야. 머리 속에 

하얗게 비어져 버리는 게 문제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으음‥ 그 때는 정말 죽을 뻔했지. 너 역시 기억나지? 베헤모스한테 쫓길 때 말야."

"아아 그 때‥ 고생했습니다. 묵묵히 다리를 놀려도 살아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데 옆의 누가 소리를 빽빽 지

르면서 베헤모스를 약올려대서‥."

시즈는 말끝을 흐렸다. 그 날의 끔찍한 광경이 다시 머리 속에 가득 차는 듯 했다. 호탕하게, 그러나 약간의 찔리는 

구석이 있지 가식적으로 웃어대며 보를레스는 시즈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하핫‥. 난 그래도 재주껏 베헤모스와 대화를 해보려고 그런 거라고."

"과연 누가 그렇게 동의할지 의심스럽군요. 아마도 당시에 열받아서  절규하듯 포효하던 베헤모스는 절대로 동의하

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웬만하면 피브드닌에게 변설(辨說)에 대해 좀 배워 두지 그러십니까?"

"관두겠어. 차라리 베헤모스한테 오해를 받아서 밟혀죽고 말지. 그런데 토루반 일행은 어디 간 거지? 사론도  안 보

이는데?"

"글쎄요‥. 그나저나 저는 편지가 왔나 좀 보고 오겠습니다. 유적에 가기 전에 편지를 보내두었거든요."

대륙에는 여러 길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집배원들의 길드는 대단히  광범하고 친밀했다. 발로 여기저기 뛰어다

니는 사람인 만큼 발이 넓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럴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주민들은 편지를 주고 받는데 아주 편했

다. 편지나 연락을 받을 주소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고 해도 길드에 보고만 해놓으면 설사  직장 출장을 갔더라도 

현지에서 받아볼 수 있었다.

"그 곳이냐?"

네 녀석이 편지를 보낼 곳이라면 한 곳 밖에는 없지. 보를레스의 물음에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

히 붐비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갔다. 보를레스는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기운차게 말했다.

"후우‥ 저 녀석 폴로즈의 아이들은 도대체 언제 잊을 거지? 이제 토루반이나 찾으러 가볼까?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노을이 지고 있군. 피브드닌, 그만 일어서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렇지만! 크윽!"

"죄송합니다. 제가 불민하여‥."

"괜찮아. 괜찮아. 사론 자네는 우리를 구하려고 그런 게 아닌가."

때는 하늘 한켠이 어둑해지고 있는 저녁, 실로나레이 강변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던 토루반은 기운이 빠져 초췌한 얼

굴로 입을 열었다. 피브드닌은 약간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분을 삭히는 게 역력히 분명했다. 그 옆에서 사론이 연

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토루반! 그러나 일 만 타로운은 저희의 이번 유적조사 원조금이 아닙니까. 아무런 성과도 없는데 뭐라고 학회에 변

명을 할 겁니까?"

"그 대신 우리가 살아 돌아왔지 않은가. 게다가 일 년 전 엘시크의 세이서스 후작이 처형당할 때 언급했던 '역사의 

고리'라는 단체에 대해서도 알았고‥. 자네가 이렇게 투덜거릴 수 있게 살아남았으니 만족하게. 강물을 보고 있자니 

별 생각이 다 떠오르는 군. '평화로운 때가 되면 추억이 떠오른다'더니 위험한 사건을 겪어서인지 옛 생각이 떠오르

네. 그리고 협회에서의 발표 내용은 걱정하지 말게."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것일까? 피브드닌은 잔머리 잘 돌아가는 드워프의 현자가 자신만만한 만큼 좋은 해결책을 가

지고 있기를 바랬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토루반은 씨익하고 웃었다.

"블리세미트의 그 목걸이가 있지 않나! 이름이‥"

"이실리스의 펜던트."

"그래. 그거야. 이실리스의 펜던트는 사막의 신부들의 유물이자, 붉은 뱀의 사원의 원장을 뜻하는 상징물이  아닌가! 

그걸 연구하면 변명할 정도의 성과는 나오지 않겠나?"

"그, 그렇군요!"

"그렇지? 아하하하하하‥ 하아‥."

"하아‥."

"하아‥."

그렇게 학자들의 밤은 찾아오고 있었다. 가난한 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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