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1)
뜻하지 않게(?) 넘실대는 파도 아래로 바다구경을 바친 그들은 아무도 없는 절벽의 땅에 발을 내렸다. 어둠 속에서
윤곽만 보이는 육지는 바다와 그리 다르지 않음에 레스난은 실망했지만 차갑게 불어온 밤바람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한류(寒流)에 몸을 바들바들 떨며 인식했다.
'여기는 육지구나‥.'
원래대로라면 도착하자마자 푸른 들판에 몸을 뒹굴며 환호성을 지를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생각은 시차
로 인하여 완전히 벗어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은 되야 할 듯 싶었다.
"과연‥ 남쪽은 따뜻한 걸. 음‥ 아닌가?"
보를레스는 상쾌한 듯 가슴을 피다가 오들거리는 레스난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깊은 바다에서 살던 그녀는 육지
의 심한 기온 차에 대항할 면역성이 없었다.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주자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하는 레스난.
그녀는 이 추운 날씨에 옷을 벗어주는 보를레스가 대단해 보일 뿐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군. 혹시 배에서 지도를 가져왔소?"
"여기 있습니다."
피브드닌의 말에 준비성 좋은 사론이 얼른 바닥에 지도를 펼쳤다. 사방에 모닥불을 피우고 그들은 지도 주위에 앉
았다. 역시 지리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실베니아의 사람인 카이젤이었다.
"수도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이 상태에서 북쪽으로 곧장 올라가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대도시라고 할 수
있는 낭아플에서 마차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이죠."
"그냥 마을에서는 마차가 안되나?"
"실베니아는 엘시크 육상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왕복하여 이 주일에 가까운 거리를 태워다주려 하겠습
니까?"
레스난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회의보다는 타오르는 불꽃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녀의 어머니
는 말하기를 불꽃은 육지에만 허락된 축복이며 동시에 저주라고 말했다. 생물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 불을 인간은
개발하였으며 그로 인해 고작 원숭이의 진화류를 뛰어넘어 영장이라는 자리에 도달했다.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의
힘의 춤에 순진한 어린 인어는 푹 빠져 눈을 떼지 않았고 천천히 손가락을 가져갔다.
"안돼!"
"???"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토록 예쁜 것에 닿는 것을 왜 맞는지. 눈썹을 찌푸리며 막은 손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레스난이 먼저 고개를 돌려야 했다. 상대는 냉랭한 눈빛의 카이젤이었으니까. 회의는 끝났는지 사람들은 하
나 둘씩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생각에 잠겨있었다. 입이 뾰죽해진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이쁜데‥."
"바다에서는 예쁘면 무조건 손을 들이대는 모양이지?"
투덜거림조차 허락하지 않는 카이젤이었다.
일행은 카이젤이 제시한 방법 중 곧장 수도, 펴온으로 올라가는 방향을 택했다. 가장 신이 난 건 토루반이었다. 사
흘동안 쉬지 않고 걸어서 대부분 녹초가 되었건만 그는 폴짝폴짝 뛰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견실한 세일피어론아드의 밑받침.
이 발이 닿는 자리마다 천년 만년 굳건하니
절벽에 해일이 몰아친들 물러섬이 있을 소냐.
혹시나 지진이 일어난들 멀미는 느껴지지 않으니
그야말로 지상의 축복이로다.
"토루반, 말은 안했지만 처절했었군."
자리에 주저앉으며 토플레는 중얼거렸다. 등을 비롯하여 온통 땀으로 범벅이었다.
"좀 쉬었다가 갑시다. 아무리 '역사의 고리'인지 뭔지가 두렵다지만 너무 강행군이야."
"하하핫. 겨우 그 정도의 녹초가 되다니 역시 의사들이란 연약하기 짝이 없군. 자기 몸 간수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
을 치료한다니 모순이야."
"이봐. 고명하신 학자선생. 자네의 떨리는 다리나 어떻게 주체를 해주시지."
토플레가 가리킨 다리를 피브드닌은 연신 주물렀다. 토루반을 따라다니면서 제법 근육이 생긴 다리였지만 사흘을
쉬지 않고 걸은 것은 무리가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할 수 있었다. 이제껏 처음 육지를 밟은 레스난에 비하면
자신은 강철처럼 튼튼하다고.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요."
아리에는 레스난의 다리를 토닥거리며 물었다. 물론 대답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화난 멍게처럼 탱탱하
게 부풀어 있었으니까.
"아직도 남은 거리는 온 것보다 많아. 이 정도에 주저앉으면 안돼. 사정을 봐주는 것도 어느 정도라고."
말도 안돼. 레스난은 냉정한 카이젤의 말에 울상을 지었다. 지금까지만 해도 막 생겨난 다리가 과도한 운동으로 파
열지경이었는데 그는 사정을 봐준 거라는 기가 막힌 주장을 펴는 것이다. 피브드닌이 거친 숨을 토하며 중얼거렸다.
"요즘 상인은 다리에 철이라도 박아 넣었나? 왜 저렇게 쌩쌩해."
"젊어서 그런 거야."
"그럼 저 사람은?"
토플레는 피브드닌의 손가락이 다리를 구르며 이상한 동작을 연발하는 토루반을 가리키자 답변을 잃었다. 과연 점
잖던 드워프의 현자는 어딜 갔는가. 시선을 느꼈는지 토루반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다소곳이(?) 가까운 바위에 걸터
앉았다. 체력이 약한 이들이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사론은 지도를 펼쳐 놓고 입을 열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4km만 더 가면 츠키롤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작지만 대륙 지도에 표시되었을 정도면 휴식할
장소 정도는 있을 겁니다. 들으시겠습니까?"
일행의 과반수가 찬성의 환호를 외쳤다. 보를레스와 카이젤이 투덜대고 불만을 표시하자 '강하다면 약한 사람도 생
각할 줄 알아야 하나의 일행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라며 토루반이 엉덩이를 두들겨댔다.
* * *
"아무래도 그대의 예상은 틀린 듯 하오."
"그렇군요. 인정합니다. 역시 '마땅찮은 시즈'와 아스틴네글로드의 생각을 따라잡는데 저로서는 무리였나봅니다."
"너무 그렇게 자학하지 마시오. 원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들이 아니오.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이니‥"
고개를 숙인 로길드를 로진스는 위로했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감에도 소년은 그리 실망한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틀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가슴을 펴며 일어섰다.
"그렇다면 다음의 계략을 짜봅시다. 이미 빗나간 화살을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오히려 해맑은 웃음에 위로한 로진스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옆자리의 노르벨이 입을 열었다.
"'고리의 신비' 수장께서 무안해하시잖아. 예의상 좀더 시무룩해보라고. 아니면 뭔가 사과의 표시가‥."
어쩔 수 없군. 그의 혀가 낼름거리는 걸 잠시 지켜보던 로길드는 푸른 눈동자를 긴 속눈썹으로 살짝 가리며 미소지
었다.
"이런‥. 이번 임무가 끝나면 펴온의 고급 음식점에서 주머니를 털겠습니다.
"좋았어. 회의를 진행하라고. 로길드가 혹시나 틀린 생각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난 다 눈감아줄 자신이 되어있어."
"저기‥ 그럼 오히려 곤란합니다만‥. 제가 느끼기에는 노르벨님께서 무슨 생각이 있으신 듯 하군요."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2)
노르벨은 '괜찮아, 괜찮아'하고 얼른 회의를 진행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예상이 빗나갔
다는 게 큰 걱정거리는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 이유인즉 일명 전략가라고 칭해지는 이들은 전쟁이나 자잘한 전투,
그리고 암투에서 실패를 예측을 하기 위한 과정으로 두기 때문이다. 로길드의 밝은 표정도 그들과 같지 않다면 나
올 수 없다는 걸 자리의 앉은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제 소년이 제대로 된 전략가인지 그리고 계략가인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탐색하는 눈초리를 웃음으로 받아넘긴 로길드는 지도를 지휘봉으로 하나하나 짚어
설명을 시작했다.
"그들이 강풍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동부 해안에 내렸다면 저희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벌레처럼 박멸되었을 게 분
명합니다. 저는 그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만 그들은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혹시나라
는 말에 대해 대비를 해두는 법이겠지요. 아마도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기사와 병사를 분포시킨 사항에 의
문을 가진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그들의 행로가 우리 눈을 벗어났다는 말은 대
륙 동부은 우선 제외해야겠지요. 그리고 낭아플의 항구와 마차의 감시에서도 벗어났으니 그들에게 남은 길은 둘 뿐
입니다. 걷고 뛰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하늘을 날아가는 것. 상식이라는 것은 착오가 덜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죠.
상식 중에서도 당연하다고 지칭되는 부분을 두 번이나 벗어난다면 저는 그들을 인간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지. 음유술사들이 아무리 인간 같지 않다지만‥."
바스티너의 중얼거림은 작았지만 모두의 귀까지 끊이지 않고 도착했다. 그러자 건너편의 노르벨이 이죽거렸다.
"나는 당신이 더 인간 같지 않습니다만‥."
"칭찬 고맙군."
그들의 대화를 듣던 로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좌중이 잠잠해지자 로길드는 말을 계속했다.
"그들은 걷거나 뛰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로진스님은 휘하의 마법사들과 먼저 수도로 가주십시오. 그들은 걸음이
우리의 눈에 걸리지는 않지만 느리다는 약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수도에서 최단거리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겠지요. 그 진행방향으로 본다면 그들은 아마도 온천이 유명한 츠키롤의 반경 30km 내에 와있을 겁니
다. '원의 힘'이 도착할 때까지 그들의 발을 조금씩 늦춰주십시오. 막아낼 필요는 없습니다. 큰 피해만 남길 뿐이니
까요."
"너무 나와 수하들을 무시하는 거 아닌가?"
"하하‥ 설마요. 좀더 확실한 승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 들었을까? 로진스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그리고 그 웃음은 다른 이들에게도 번져나갔다. 단, 바스티너만
빼고.
* * *
"크으‥ 시원하다‥."
"정말입니까, 토루반?"
바다에서는 완전히 굴러다니는 드럼통이었던 토루반이었으나 현재는 무척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양손에 깍지를 끼고
머리를 받친 채 다리를 꼬고 배를 수면 위로 드러내고 둥둥 떠다니는 그에게 피브드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때
첨벙하는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으음‥ 과연 여기 온천은 좋군요. 유명한 값을 하는 모양입니다. 아주 시원하군요."
"그렇지? 흐흐 오랜만에 유황냄새 풍기는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고향 생각이 절로 나는 구만‥."
흐뭇한 웃음을 흘려대던 토루반은 아직도 발을 슬쩍 담그며 머뭇거리고 있는 피브드닌과 블리세미트를 슬쩍 올려다
보았다.
"뭐하나? 들어오지 않고?"
"뜨겁지 않습니까?"
"에잉― 그렇게 소심하다니 남자들이 아닌가."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나이를 먹은 노인들은 피부가 두껍다고 하였습니다."
"어디서 그런 헛된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군. 저길 보게나."
블리세미트는 수건 한 장으로 가린 모습 자체가 부끄러운 모양인지 피브드닌이 움직이다가 건드린 것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토루반이 가리키는 뜨거운 김이 서린 곳 깊숙한 자리에 그가 있었다. 블리세미트의 입에서 한숨처럼 한 이
름이 흘러나왔다.
"시즈 님‥."
뿌연 색의 김과 머리카락이 은근히 감싸는 그의 얼굴은 술에 취한 듯 약간 홍조를 띈 채 탈속한 듯한 느낌을 주었
다. 무척 익숙한 것처럼 수건을 머리 위에 올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긴소매의 옷을 입고
다녀서인지 그의 피부는 새하얀 빛깔이었다.
"머리까지 기니 꼭 여자아이 같군. 어때? 시즈는 충분히 젊지? 저 녀석
의 얼굴이 뜨거운 인두에 지져지는 듯한 표정이냐? 내가 보기에는 흔들의자에 앉은 것 같구먼‥. 자아‥ 증거는 보
여주었으니 어서 들어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토루반은 블리세미트의 발을 잡아당겼다. '으앗!'하는 소리에 이어 풍덩하고 웅덩이에 파문이
일어났다. 힛힛힛하고 웃어대는 드워프가 부러웠는지 토플레는 곧바로 피브드닌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똑같은 상
황이 벌어졌다.
"크아아아아악!"
어느 비명이 이토록 처절할 수 있단 말인가. 갸냘픈 여인의 비명이 아니라는 데서 남다르게 소름끼치기는 했지만
누군가 들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한 비명이었다. 멀리 건너의 탈의실에서 나와 물에 몸을 담그던 보를레스와
사론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시즈에게 물었다.
"괜찮을까?"
"아마도‥."
하고 시즈가 미소지었다. 온천물이 몸의 피로를 풀어주는데 아주 적당한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3)
"끄아아아아아아악!"
"저게 무슨 소리지?"
막 물에 몸을 담그려던 아리에는 멀리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몸을 얼른 물 속으로 숨겼다.
"걱정할 것 없어. 여기는 산지가 아니라서 몬스터들이 있을 리가 없어. 아마 남자들이 장난을 치는 모양이야. 그 나
이들을 먹어서는‥."
파마리나가 수건을 두른 채 빗자루를 타고 아리에 옆에 발을 담갔다. 정말이지 편리한 빗자루였다.
"안 뜨거워?"
"아, 네. 적당해요. 레스난은요?"
"아? 벌써 들어갔는데!? 어디있지?"
"여기요."
파마리나는 바로 아래에서 레스난이 머리를 불쑥 내밀자 놀라 뒤로 벌렁 넘어갔다. 풍덩하고 잠시의 고요가 있은
후 그녀는 이빨을 갈아대며 일어섰다.
"후후후‥."
"죄, 죄송해요."
"어차피 몸에 좋은 온천까지 왔는데 이 기회에 인어고기로 몸보신까지 하고 말테닷!"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멀리 떨어져있어서인지 그 소리를 길게 메아리쳤다. 무슨 일인가하여 시즈가 벌떡 일어섰지만 보를레스는 그를 잡
았다.
"걱정말라고. 이런 곳이면 여자들은 장난을 치기 마련이지. 쯧쯧 나이들이 몇인데‥. 그런데 시즈‥."
"‥‥."
시즈는 순간 숨을 멈췄다. 보를레스의 분위기가 검을 겨눴을 때처럼 진지했기 때문이다. 보를레스는 손을 놓고 빙긋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론에게 속삭였다.
"저 녀석, 보기보다 건실한데‥."
"예. 놀랍습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시즈는 귀가 좋았다. 바람을 이용한 게 아니라 에릭사로 몸을 회복시킨 후 근육을 비롯한 감각기관의 능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인간의 몸에서 향상되어 봤자 인간이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이 훈련 등을 통하여 강화
되는 것은 몇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심장, 폐의 기관과 신경계, 근육계, 감각계가 모두 향상되었을 때의 능력은 보
통 인간의 몇 배에 달한다. 그게 시즈가 연약한 몸을 가지고서도 보를레스 등의 검사들에 비견, 아니 이상 가는 힘
을 발휘하는 이유였다. 어쨌든 보를레스와 사론의 밀어(密語)(?)를 듣게 된 시즈는 얼굴이 온천에 오래 있어 탈진한
사람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보를레스는 그가 들을 걸 알고서 속삭인 게 틀림없었다.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부른 보를레스는 화를 내는
시즈를 휙 돌아보았다.
"뭐야!? 들었냐? 하하‥ 칭찬이야 칭찬. 왜소한 것보다야 건실한 게 좋지. 그래야 아리에와‥."
시즈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는지 잠수를 해버렸고 보를레스와 사론은 껄껄대기 시작했다. 토루반들은 물 밖으로 내
놓은 머리만 돌려서 그 쪽을 쳐다봤다.
"재미있는 일이 있는가보군. 그나저나 온천은 오랜만이야. 피로가 풀리는 걸‥."
토루반은 오래 걸어서 뭉쳤던 근육이 풀어지자 말끝을 느긋하게 흐렸다. 그러나 온천이 처음인 블리세미트는 피로
가 풀리는 느낌도 꺼림직한지 안팎을 들락거렸다. 그게 뜨거움을 참고 있는 피브드닌으로써는 견디기 힘든 유혹이
었나보다.
"블리세미트 사제. 좀 한 군데 가만히 있으시오. 정신이 사납소."
"허허‥ 익숙치않아 그렇지. 나이가 있는 자네가 참게."
"토루반은 바다에는 질색하면서 같은 물인 온천에는 오히려 활개를 치시는 겁니까? 매우 익숙하신 듯 싶군요."
피브드닌은 토루반이 온천에 빠져 허우적대기라도 하면 좋을 것처럼 투덜거렸다. 그의 음성이 불만에 차있다는 걸
알아챈 토루반은 더욱 약올리려는지 키득거렸다.
"미안하지만 익숙한 게 당연하지. 드워프들은 땅을 파며 살아가는 종족이네. 그리고 보석과 유황을 캐지. 유황이 있
는 곳은 대부분 화산이고, 화산에서는 온천이 성하기 마련이야. 우리는 광산에서 일하고 노곤해진 육체를 온천에 담
가 다음 날이 기약하는 게 습관화 되어있다네."
"고향에 온 느낌이겠군요."
"그래. 현재 쫓기고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될까요? 아무리 이런 작은 휴식이 그들에게 혼란을 준다고 미화시키긴 했지만, 역시
불안하군요."
"믿어봐야지. '마땅찮은 이'의 생각을‥."
토루반들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여자들은 열심히 서로에게 물을 튕기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역시 몸의 동작이 가
장 날쌔고 자연스러운 아리에의 빠르기에 당하지 못하는지 나머지 소녀와 여인은 얼굴을 찌푸리고 허우적거렸다.
"으윽! 아리에 너무 잘해요!"
"후훗, 능력이야, 능력!"
"그, 그렇다면!"
레스난의 몸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리에와 파마리나가 손을 멈춘 사이 그녀는 물 밖으로 드러낸 꼬리지
느러미를 흔들며 빙긋 미소지었다. 그리고‥.
파악! 촤아아아아아아악!
사람 높이까지 일어나는 파도가 온천에서 일었다.
"콜록!콜록!"
물에서 어떻게 인어를 당할 수 있으리. 아리에와 파마리나는 몰아쳐오는 물살에 속수무책으로 물을 먹었다. 그렇다.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어들이 물 속에서 살아가니 괜찮겠지만 아리에와 파마리나는 숨쉬기 곤란할 정도였다.
그리고 파마리나가 끝내 폭발했다.
"이 꼬마 생선! 가만두지 않겠어! 창조의 물이여‥ 심연의 물이여‥ 나의 의지에 따라 손가락이 가리킨 이를 멸하
랏!"
나선형으로 꼬이며 파마리나의 양손을 따라 솟구치는 물줄기. 상당한 회전에도 불구하고 물이 튀지 않는 게 맞으면
큰 안마효과를 줄 게 분명했다. 레스난은 움찔했다.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듣던 미소가 파마리나의 입가에 흐르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녀의 미소'였다.
"자, 잠깐만요. 그렇다고 마법까지 쓰다니‥. 끼악! 끼아아아아아악!"
적의 추적으로부터의 잠깐의 휴식. 휴식의 하루는 레스난의 비명에 묻혀 지나가고 있었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4)
아침이라고 사람들이 정해놓은 시간의 정의는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정의라는 단어의 의미와는 달리 말이다. 계절에
따라 바뀌고 가끔은 사람들의 사정과 습관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습관에 의해 굳어진 아침과 사정에 의
해 필요해진 아침이 충돌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알아보도록 하자.
"레스난! 일어나요! 레스난!"
"우우‥ 아리에? 왜 그래요?"
"일어나요. 아침이에요."
레스난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창 밖이 어두캄캄했다. 깊은 물 속에서 생활하면 시간이 적은 빛에도 신체적으로
민감해져 신체리듬을 만들기 때문에 그녀는 몸의 상태를 거부하지 못하고 베개에 머리를 푹 박았다. 그러자 아리에
의 다그침이 그 뒤를 따라 베개의 가려진 그녀의 귀에 파고들었다. 레스난은 반항을 시작했다.
"아침 아니에요. 하늘이 까매요. 아침 아니에요. 밤이에요."
"그래서‥ 못 일어나겠다는 건가요?"
아리에는 엉덩이를 세우고 이불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아닌 소녀를 어찌할지 몰라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일어난 눈동자를 보아하니 눈이 풀려있는 게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상당히 고생을 해야 할 듯 싶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파마리나를 부르는 수밖에‥."
벌떡. 동양의 좀비라는 강시를 연상케 하는 동작으로 레스난은 몸을 일으켰다. 보를레스가 보았다면 그녀의 움직임
이야말로 고속 이동술의 시초라는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를 정도의 빠르기였다.
"자, 잠깐만요. 아리에 일어났어요. 레스난 일어났어요."
역시 어제의 마법이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수면에 배를 뒤집고 기절했었던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우선 파마리나에게
서 안전 거리를 확보하는데 정신을 쏟았다. 아마도 마녀들이 마음만 먹으면 인어들을 실험재료로 써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어기적어기적하며 세수를 한 후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별빛이 총총하여 아침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지만 이
미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감히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갓난아이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는 그녀에게 시즈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저희는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서요. 그게 끝나면 당신의 여행을 도와드리기로 하겠습
니다. 그 때까지만 좀 참아주세요."
"흥! 말은 누가 못해?"
레스난은 이상하게도 아리에의 연인인 시즈가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거나 부드러운 목소
리를 들을 참이면 몸의 신경들이 위험신호를 보내오는 것이다. 위험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를 지도 모른다. 시즈에게
서 풍겨오는 존재감은 고대 세람류의 종족들이 숭배했던 자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다가설 수 없었고 다가오는
것조차도 그녀는 무서웠다. 마녀 파마리나보다도‥. 레스난은 자신도 모르게 블리세미트와 카이젤이 있는 곳에 붙어
있었다. 쓴웃음을 지은 시즈는 피브드닌에게 물었다. 아직 모습이 모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피브드닌, 사론과 보를레스가 안 보이는데‥."
"글세‥ 늦을 사람들이 아닌데 무슨 일이지?"
그 때였다. 보를레스가 꼬리를 불에 데인 강아지처럼 부리나케 달려온 것은. 뛰어오면서도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지 손과 표정에 허둥거림이 역력했고 그 후유증으로 정작 도착해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숨이 차 헥헥거렸다. 한심
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토루반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인가? 그리고 사론은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지?"
"대형 마차가 있습니다. 수도까지 갈 수 있는 마차가 말이죠. 제대로 된 도로가 없어서 빨리 달릴 수는 없지만 걷어
서 가기보다는 훨씬 무난합니다. 지금 사론이 길드에서 운삯을 흥정하고 있어요. 불경기라서 할인도 가능하다는 군
요."
그의 말이 계속 진행될수록 토루반의 얼굴은 점점 침울해져 갔다.
"오늘따라 하늘이 맑은데‥."하고 말끝을 흐리는 토루반은 어쩌면 '걸어서 가자.'고 항변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러나 환호하며 보를레스의 뒤를 따라나선 이들은 중에는 자신들의 시야를 낮춰 토루반에게 아무도 신경을 기울이
지 않았다.
"휴우‥ 그래. 옛날부터 조상들이 키가 큰 종족들은 상종 못할 것들이라고 종종 그랬었지. 옳은 말이었어."
투덜대면서도 토루반은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일행을 쫓았다.
보통 기사들하면 융통성없는 자부심으로 뇌부터 심장의 조직까지 하나하나 뭉쳐져 상업적인 기질이라고는 전무하다
시피 했지만 그 안에서 사론은 제외였다. 몇 번 이야기를 건네 보았던 카이젤이 입맛을 다실 - 결코 이상한 의미가
아니다 - 정도로 흥정 수완이 탁월하여 웬만한 장사꾼도 그에게서는 큰 이익을 얻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즉, 장사를
해서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보를레스가 일행을 끌고 올 쯤하여 이미 마부와의 얘기를 마치고 기다리던
사론은 보를레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소가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보였다.
"무슨 사내가 그리도 해맑게 웃는 거야?"
가장 먼저 달려온 파마리나가 기분 나쁘다는 듯 중얼거렸다. 솔직히 겸연쩍게 머리를 긁는 사론의 모습은 눈을 빛
내며 장사꾼들을 제압하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어쩌면 저토록 해맑은 모습이 흥정에서 상당한 (+)작용을 이
루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마차는 컸다. 제법 사람이 되는 시즈 일행이 전부 올랐는대도 자리가 남을 만큼.
"이거 아무래도 꼭 농장에서 짚을 나르던 마차 같군."
"어때? 호화롭지 않지만 감지덕지지."
불만스러운 듯 찡그리는 피브드닌에게 토플레가 독침 쏘듯이 내뱉었다. 확실히 귀하신 학자분이었던 사람들의 마음
에는 차지 않는 마차였다. 그러나 짚단을 듬뿍 깔아 오랫동안 앉아있어도 그리 불편하지 않을 듯 싶었다. 막 마차가
출발하려는 순간, 두 명의 남자가 허둥지둥 달려와 올라탔다.
"어이쿠, 이거 죄송합니다. 이것 보라고. 내가 아침은 조금만 먹으라고 했잖아. 가다가 휴게장소가 있다고 했잖아."
"놓치지 않았으니 됐잖아. 난 배고픈 것은 못참는다고."
시즈는 그 새로운 사내들을 보는 순간 흠칫했다. 안면이 눈에 익었던 것이다. 그의 반응이 이상했는지 두 사내 중
하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얼른 외면하는 시즈. 그의 얼굴이 온통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흰 복장의 가운
을 입은 사내, 즉 츠바틴은 내심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저 녀석 이상한 외모 주제에 남자를 보고 얼굴이 벌게졌어. 설마‥ 말로만 듣던‥!?'
그리고 그는 더욱 자세히 시력을 키웠다. 시즈는 그가 자신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예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동안 주위의 일행은 한동안 같은 공간을 공유해야 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
누고 있었다.
"엘시크에서 온 노리스라고 합니다."
"검사시군요. 검이 매우 좋아 보입니다. 전 보를레스라고 합니다."
"하핫, 눈이 좋으시군요. 검집에 녹칠을 해놓아서 대부분 그냥 지나치는데‥."
"저도 검사니까요."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마차가 시끄럽도록 떠들었다. 여자들이 얼굴을 찡그리고 그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진 곳
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노리스와 보를레스 어느 쪽도 그런 데 신경을 쓰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만하면 혀의 물기도
모두 말라버렸으리라 생각될 쯤 노리스는 불편해보이는 인상을 유지한 츠바틴을 툭툭 건드렸다.
"이봐. 왜 그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으면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노리스, 노리스. 저 녀석 말이야."
"저 특이한 머리카락을 가진 친구 말이야? 왜? 해부용으로 갖고 싶나?"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틀림없어 저 녀석은 분명 변태라고! 그것도 남색이 틀림없어!"
'정말인가?'하고 노리스는 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츠바틴에게 한 마디 했다.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나기 때문에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노리스는 다시 보를레스와의 검 재질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다. 자신의 진지한 의견이 묵살 당한 츠
바틴은 배신감이 가슴 속에 사무쳤다.
'어떻게 해서든 내 의견이 옳다는 걸 증명하고 말 테다.'하고 그는 꿇어져라 시즈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변태'라
고 규정지은 사내의 얼굴이 가끔씩 그리움을 떠올리게 만들던 청년과 겹쳐지는 걸 느끼고 벌떡 일어섰다. 시즈의
곁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츠바틴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가 갑자기 시즈를 향해 손을 뻗자 움찔했다. 동시에 보를레
스와 사론 등의 검사들은 경악했다. 둘러가며 쓸어봐도 유약하게만 보이는 사내가 기척도 없이 시즈을 꽉 안아버렸
기 때문이다. 놀라 경계를 발동한 그들은 츠바틴이 하는 말을 듣고 곧 긴장이 풀려 주저앉았다.
"살아있었군. 그토록 작게만 보이던 녀석이‥ 살아있었어. 하하핫."
그가 자신을 기억해내자 시즈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생명의 은인이자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노
리스가 츠바틴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봐, 자네. 갑자기 남색으로 취향을 바꾼 건가?"
"이 바보야. 모르겠나? 시즈야. 이 녀석은 시즈라고. 손에서 놓아버리면 죽을 것 같던 그 약한 녀석이야. 하하핫!"
"정말인가? 그러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오랜만입니다, 노리스."
노리스의 몸이 경직했다. 자신의 호통을 들으며 '녀석'이 힘이 없는 표정에서도 검술의 요점을 물어오던 음성이었
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커져갔다.
"하하하‥. 그렇군. 츠바틴, 지난번에는 별 거 아닌 듯 말하더니 무슨 수십 년 만에 아들 놈 상봉한 것처럼 껴안아
대는 건가? 어차피 걱정할 필요 없었던 녀석이었어. 그나저나 멋지게 성장했군. 여전과는 다른 생명력이 넘치는 게
보인다."
"감사합니다."
칭찬이 수줍은 듯 시즈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즐겁게 노리스는 껄껄거렸다.
"변하지 않았어. 변하지 않았어. 하하하핫!"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5)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누구지요?"
로길드는 보고서에 붉은 글씨로 줄이 쳐져있는 이름들을 가리켰다. 그의 뒤에서 노르벨이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대
답했다.
"아! 그 아저씨들. '원의 힘' 총수들이야. 로길드도 알아둬야 할 걸. 사실 '원의 힘'이라는 무리는 고리의 단체 중 전
체적으로 따졌을 때 가장 파괴력이 약하지. 하지만 그 붉은 줄의 아저씨들이 없었을 때의 얘기라고. 특히 츠바틴이
라고 불리는 아저씨는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리지. 로진스 씨 같은 마법사가 아니라 전술의 마법사야. 전법들이 신
출귀몰해서 그야말로 상대는 '원의 힘'의 기사들이 마법이라도 부리는 줄 알지."
"대단하군요."
"그럼! 대단하고 말고. 자네나, 로진스와는 달리 그는 출신이 불확정하기 때문에 더욱 놀랍지. 그리고 노리스라고 하
는 아저씨는 고리 최강의 전사 중에 한 명이야."
"최강이라‥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인데 바스티너님은 소속이 어떻게 되시는 거죠?"
"부대장이다."
"예?"
갑자기 들린 퉁명스럽고 차가운 대답. 바스티너는 붙어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 멀리 떨어져 걷고 있었음으로 로길
드는 그의 귀는 얼마나 밝은 것일지 계산을 해보았다.
"바스티너는 '원의 힘'의 부대장이야."
"누가 더 강하죠?"
반짝이는 호기심의 눈동자는 그가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의외라는 듯 피식하고 실소를 머금
었던 노르벨은 혹시나 귀를 세우고 있을 바스티너를 힐끗 돌아보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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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녀석 누구지? 강하잖아."
그 때 나는 바스티너를 처음 보았지. 아니 모두들 처음 보았을 거야. 당시에도 바스티너는 칠흙같은 감옷을 입고 있
었지. 주위까지 어둑어둑한 느낌을 주는 게 멀리서 보면 마치 진흙을 아무렇게나 몸에 바른 듯 했어. 보다시피 성격
이 거지같잖아? 그 때라고 다를 게 없었지.
"크윽! 억!"
내가 막 잠에 깨어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검집 째로 상대를 후려갈기는 중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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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잠깐만요."
궁금한 게 있다는 듯 로길드가 말을 잘랐다. 노르벨은 기분이 상한 듯 이마를 약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
다.
"노르벨이 어디서 잤길래 고개를 들자마자 그런 걸 본 거죠?"
"지붕."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여름에는 노른하게 온몸을 구워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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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시비가 붙었나봐. 상대는 '원의 힘'에서 그
래도 제법 한가닥한다고 알려진 실력자였는데 막 들어온 신참이 화려한
갑옷에 분위기 잡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상대를 잘못 건드린 거지. 바스티너는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그를 두들겼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봐준 거지. 요즘 같았다면 목이 날아갔을 거야. 하지만 안면이 없는
데 사람들이 알 리가 있나.
"이 자식. 너무 심하잖아!? 이상한 갑옷을 믿고 그러는 거냐? 단숨에 부숴주지."
새로운 상대는 근육을 자랑하는 덩치에 거대한 칼을 들고 소리쳤어. 바스티너의 철투구에서 하연 김이 뿜어져 나왔
지. 아마도 코웃음이었을 거야. 잠시 후 그 덩치는 연병장 구석에 처박혀서 피 거품을 물었지. 바스티너는 거만하게
중얼거렸다.
"약하군. 대륙 최고의 기사단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헛소문이었나? 이런 약한 녀석들의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지."
말이 중얼거렸다는 거지. 솔직히 다 들렸어. 그리고 시작됐지. 바스티너 일인 대 '원의 힘' 기사들의 격돌이.
바스티너는 대단했어. 동시에 찔러오는 3개의 검을 갑옷으로 받았는데 몸을 살짝 돌려서 긁히는 정도의 충격만 그
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더군. 그 정도야 등 긁어주는 밖에는 안 되지. 내가 이제껏 많은 기사들의 갑옷 운용법을 보
았지만 그토록 능숙하게 사용하는 자는 바스티너만한 기사는 보지 못했어. 검사들이 검을 사용하는 것처럼 갑옷을
사용하는 직업이 따로 있는 듯 했지. 좌측의 사내에게 번개처럼 파고들어서 그대로 어깨 보호대로 그의 턱을 올리
면서 남은 두 명의 검을 검으로 막았어. 사내들은 미소지었어. 아무리 바스티너가 강하다고 해도 그들은 훈련에 인
색하지 않았으므로 힘으로 둘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하지. 바스티너도 알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난 보았지. 그 비릿
한 미소가 기운으로 퍼지는 걸‥. 아마 정면으로 검을 맞댄 친구들은 소름이 돋았을 거야. 바스티너는 오른손은 검
손잡이에 왼손은 검집 중간으로 잡고 손 사이로 검을 막고 있었는데 검집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오른 손목 위에
얹으며 몸을 회전시켰어. 놀라운 광경이었지. 두 사내의 검은 검집을 내리꽂았고 바스티너는 빠져나간 거야. 그리고
결과는 그 때까지 패배자들과 같았지. 잠시지만 '원의 힘' 구성원들의 얼굴에 공포가 스쳤어. 하지만 곧 그들은 진
형을 만들어서 바스티너를 압박했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바스티너였지만 뛰어난 기사 수십 명에게는 당할 수 없
었지. 그를 쇠사슬로 묶었을 때였어.
"무슨 일이야?"
정말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였어. 약간 둔해 보인다고 할까? 달려와서 사정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손바
닥을 다른 주먹으로 내리치고는 말했다.
"간단하잖아. 신참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으면 되는 거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윗옷을 벗었는데 누가 잡아끌었어. 뒤로 끌려가다못해 번쩍 들려진 그는 뒤로 휙 하고 날아갔
지. 던진 사람은 신체의 균형이 잘 잡혀보이는 청년이었어. 청년은 지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던진 사내를 받은 사람
들에게 외쳤어.
"츠바틴, 그 주정뱅이 좀 숙소에 데려다 놔."
그리고 바스티너 앞으로 터벅터벅 다가온 청년은 바로 털썩 주저 앉아서 분한 김을 뿜어대는 바스티너에게 말했어.
"방금 전 주정뱅이의 말 들었지? 동의해?"
"뭘 말인가?"
쇠를 갈리는 소리를 연상시키는 음성에도 청년은 씨익 웃기만 했어.
"자네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면 명령을 듣겠냐는 말이야."
"어디에 있나?"
"여기에 있잖아. 이름은 노리스이라고 해."
넉살 좋게 웃는 노리스를 바스티너는 말없이 바라보았어.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지. 역시 말만 중얼거렸다는 거지.
"멍청이로군."
"뭐!? 이 자식이 좋게 봐 줄려고 했더니! 야. 그 놈 사슬 당장 끊어."
참 성격파악하기 쉽더군. 그는 자기 영역에서 다른 곰의 오줌 냄새라도 맡은 불곰 마냥 길길이 날뛰었지. 바스티너
와는 불과 얼음 같은 성격의 차이더군. 그렇지만 싸움에 임하자 그의 동작은 물처럼 부드럽고 번개처럼 빨랐어. 선
공은 바스티너였지.
깡! 이라기보다는 쾅에 가까운 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졌어. 멀리서 듣고 있던 내 귓가가 울릴 정도로 컸지. 노리
스가 바스티너의 공격을 받아낸 거야.
"제법이군."
"크으‥ 너야말로.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라니 다른 녀석들이 애먹을만 하군. 이건 사람의 힘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강한 걸."
난 그 때 어이없는 의문이 들더군. 사람의 힘이 아닌 공격을 받아낸 사람의 근력은 뭐지? 여하튼 추리를 해볼 시간
도 없이 노리스의 반격이 시작됐어. 그의 검술은 용병들이나 쓴다는 동방의 검법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바스티너의
패도적인 검격은 조금도 노리스의 몸에 스치질 못했어. 오히려 공격한 바스티너가 자세를 못 잡고 뒤로 물러나거나
앞으로 기울어져 노리스에게 타격을 허용했지. 그렇다고 바스티너도 약하진 않았어. 그 상황에서도 최대한 갑옷을
이용하여 공격을 흘려보내더군. 계속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가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어. 하지만 공
격이 통하지 않는 걸 알자 노리스는 고개를 젖히고 바스티너의 검을 간발의 차로 피하면서 동시에 검을 놓은 손으
로 바스티너의 손목을 잡았어. 그리고 고릴라같은 몸집 주제에 원숭이처럼 부드럽게 바스티너의 팔에 몸을 얹고 회
전력을 실어서 돌려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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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길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군요."
"그래. 덕분에 바스티너는 몇 주일은 요양을 하고 '원의 힘'의 일원이 되었지."
직접 목격할 수는 없었지만 노르벨의 말로도 로길드는 충분히 붉은 줄의 사람들이 놀라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왕실의 보조역이자 참모역인 그에게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다시 떠올리는 일이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럼
에도 중요한 두 사람에 대해 그가 빠뜨린 이유는 노리스와 츠바틴은 잠적한지 8년이 넘은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한 차례 쓰다듬은 로길드는 붉은 글씨 위에 한 번 더 별
을 그리고 잉크병의 뚜껑을 닫았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6)
"두 분께서는 어쩐 일로 관리하시던 영지를 떠나오셨습니까?"
덜컹거리는 시골마차는 차분한 시즈의 목소리도 덜렁거리게 만들었다. 그가 알기로 노리스와 츠바틴은 심벌튼에서
뼈를 묻히고 살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엘시크에서 멀다면 굉장한 거리인데 말입니다."
"아아‥ 빚을 갚으러 왔지. 빛을 갚을 사람이 있거든."
그런 이들이 세상으로 몸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찌 보면 평화로움을 망가뜨리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오래 전의 일이신데 복수할 생각이십니까?
"음‥.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싸워온 적이거든. 언젠가 시즈도 숙적이라는 사람이나 무리를 만나게 될 거야. 하긴
시즈라면 앞으로도 만들지 않을지도 모르지."
"벌써 만들었는 걸요."
"허허, 인기도 좋군. 도대체 누구야? 시즈의 숙적을 자처한 바보 같은 놈은‥."
그렇다. 노리스는 모르고 있었다. 그 바보에 이미 자신이 속해있다는 것을. 꿈에도‥. 그와 다르게 츠바틴은 상대해
야 할 숙적에 대해 고심 중이었다. 마차의 진동이 무언가 떠오를 때마다 지워놓아서 골치가 아팠지만‥. 그의 마음
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 무엇 때문이지?'
전술가로서의 예감일지 모른다. 시즈를 바라보는 게 두려웠다.
'이런 느낌이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적군의 총수이나 참모들인데 그들은 모두 내게 죽었지. 그런데 왜 시즈에게
서‥. 이름이 같아서 그럴 거야. 이름이 같아서‥.'
츠바틴은 '마땅찮은 시즈'가 로길드와 겨루고 있거나 낭아플에서 수도로 올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로를 생
각할 때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시즈, 마땅찮은 이에 대해 들었나?"
"아아‥ 대륙의 현자라는 분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전 학문에 뜻이 없어서‥. 그래도 워낙 유명한 분인지라 여행
중에 들으니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그의 전직은 인형극이 아니었을까? 아리에와 보를레스는 어이없는 눈초리로 시즈를 바라보았다. 언제 저토록 능청
스럽게 변한 걸까. 이것은 아스틴네글로드들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시즈는 생각을 말함에 있어 정돈되고 논리적이었
으며 지혜가 많았지만 능청스럽지는 않았다. 아마도 값싼 남작과의 교류가 그를 흐려놓은 것이라 아리에는 짐작했
다.
'그 성에는 다시는 가지 않을 테다. 시즈는 약간은 바보 같은 게 매력인데‥ 나중에 다루기도 좋고‥. 차라리 냉정
한 게 나아. 능청스러운 시즈라니‥.'
내심 눈물을 흘리는 아리에였다. 그런 심중을 알리 없는 시즈의 능글맞은 연기에 츠바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만났던 당시만 하더라도 시즈는 백치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속을 수밖에.
"갑자기 왠 '마땅찮은 이'를?"
"아‥ 네 이름과 같아서 물어본 거야."
"설마 절 마땅찮은 시즈라고 생각하신 것은 아니겠죠? 하하핫."
"그럴 리가 있겠나? 하하핫!"
어색해 보이는 웃음. 시즈는 양쪽에서 째려보는 여인들과 학자들의 눈빛에 얘기의 화제를 돌릴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숙적을 만드신 겁니까?"
"흐음‥ 만들기보다는 상대가 숙적이 되었다는 게 옳겠지. 세상일은 정말 알 수 없는 거야."
츠바틴은 긴 이야기를 하려는지 자세를 편하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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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다. 츠바틴의 머리 속에 악몽처럼 자리잡고 있는 사건은‥. 그와 노리스는 세계의 평화
를 어그러뜨리는 어떤 집단에 대항하고 있었다. -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 과연 어느 쪽이 옳은 판단을 하고 있
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맹신하며 일어설 뿐. 맹신, 광신도처럼 변해갔다. 그렇지 않았다
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와의 전투를 공포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 날 연병장은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전 날, 훈련을 혹독하게 시킨다는 노리스의 강화 프로그램을 전원 완수
했기 때문이다. 노리스는 꽤나 호탕하게 한 턱 내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기대가 대단했다. 이윽고 그가 츠바
틴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연병장에 함성이 메아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녀석들을 봤나. 평소에는 지르지도 않던 환호성을."
"자네의 교육 탓이지 않은가."
그들은 고작 20대 중반에 대륙 최강이라고 불리는 군단의 수장이 되었다. 연병장에는 그들보다 많게는 30세가 많은
이들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젊은 대장과 참모으로 인하여 불만을 품지 않았다. 나이들은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어
린애처럼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여간 징그럽지 않았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 노리스는 입을 열었다.
"제군들, 안타깝게도 그대들이 원하는 휴식은 없을 것 같다."
"우 ― !!"
"무섭군."
터져 나오는 원성에 츠바틴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것은 거의 살기 수준이다. 역시 노리스가 무사들을 길들인 것은
실력이나 카리스마가 아닌 돈이었던가.
"조용히! 오늘 우리 기사단은 정식으로 출병을 요청 받았다. 장소는 실베니아 남부의 페를로이트 섬이다."
"‥‥."
웅성웅성. 맨 앞줄의 사내가 엉거주춤하게 걸어나왔다.
"정말입니까?"
불만스럽다기보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이 속한 단체
에서 기사단은 사실 이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체에서 마법사를 우대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단체의 마
법사들은 거의 천재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뛰어난 이들이어서 기사들의 일도 도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
에 오죽하면 마법사들이 그들의 이름을 일컬어 써커스라고 말하겠는가. 마법사들은 이름을 줄여 부르는 것이라고
발뼘했지만 놀림이라는 것을 기사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정식 출병 요청을 받은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단상 위의 건장한 사내를 주시했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싸울 수 있다. 가검- 날을 갈지 않은 검-이 아니라 진검을 쓰면서 싸우는 거다."
"오‥오오‥ 우와아아아앗!"
첫 출전의 흥분은 목적지인 페를로이트 섬에 도착해서도 이어졌다. 숲에 진영을 잡은 그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어
모닥불 둘레로 앉아서 웅성거렸다.
"츠바틴, 어떻게 생각하나?"
"무얼 말이야?"
노리스는 말없이 츠바틴을 꿇어지게 쳐다보았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7)
의미 있는 침묵이 츠바틴에게 압박감을 주었으리라. 한동안 면도를 못해 꺼칠한 턱을 씁쓸하게 쓰다듬으며 츠바틴
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갑자기 우리를 출병시켰는지 묻고 싶은 거겠지? 간단하게 말하지. 아마도 우리는 희생양일 거야."
"희생양!?"
"그 날 회의에서 원로들의 얼굴을 봤어? 종말의 날이라도 되는 양 불안한 모습. 그림자 속에서 세계를 좌지우지하
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하지만 페를로이트 섬의 수정동굴에 숨어있는 유니콘을 잡아오라는 게 그리 어려운 것일까? 아! 물론, 성체(成體)
라면 모르겠지만 아직 어리고 고리의 신비에서 오래전부터 관리하여 족쇄에 묶여있다고 들었는데‥."
"맞아. 재미있는 것은 유니콘의 피를 가공한 성약(聖藥)이 에릭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거지. 어떤 이유
로든 우리가 유니콘을 갖고 돌려주었을 때 그들로서는 그로인한 이익을 상당 부분 우리에게 나눠줘야 할 텐데 왜
자신들이 나서지 않았을까? 그건 분명히‥."
"분명히!?"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있을 거야."
노리스는 말 끝을 흐리는 츠바틴을 재촉했다. 이제까지 그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떠돌아다졌지만 이토록 불안한 예
측을 하는 츠바틴은 기억에 없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활로를 뚫었던 지인(知人)이다.
'솔직히 이번 임무가 너무나 알 수 없기는 하다.'
섬에 들어서면서 였다. 노리스가 임무에 의심을 갖은 것은‥. 너무 쉽다라는 이유가 아니었다. 갑자기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섬 어딘가에 건들여서는 안될 무언가가 숨쉬고 있는 게 오랜 전장의 육감는 공포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게다가,
'군대 전체가 이상할 정도로 들떠있다.'
첫 임무라 흥분해서? 아니다. 기사들은 느끼고 있었다. 불안한 무언가의 존재를‥. 무의식중에 떨치려 웅성되는 것
이다.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예감 때문에 돌아설 수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임무에는 드래곤처
럼 승산 없는 적과 싸우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 아직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작은 유니콘을 잡아오라고 했다. 그저
돌아가면 웃음거리가 된다. 처음 출전에서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어. 부딪혀보는 수밖에. 임무의 내용이 진실이기를 하늘에 맡기고."
재미있지 않은가. 몇 년 동안 단련을 하며 싸울 날만 기다려왔던 무사, 기사들이 절대적인 상부의 명령을 의심하며
떨고 있었다. 그러나 미약하기 짝이 없는 예감을 무시한 댓가가 지독한 참사로 나타났을 때 그들은 어떤 무리 내에
서 절대적인 신용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이상하군."
"그 말 좀 그만하게. 이제 거의 다 왔어. 귀찮은 숲도 이제 끝났다고."
"하지만 없지 않은가. 마을이 없어. 이토록 거대한 섬에 마을 하나도 볼 수 없다니‥. 그것도 마을 사람들의 흔적이
요 몇 년간에 갑자기 사라진 거야. 전에는 살았었다고. 돌아가야 해. 이 곳은 위험하다고!"
울 듯한 표정으로 소매를 붙잡은 츠바틴을 노리스는 건틀릿 째로 후려갈겼다. 갑작스런 수뇌들의 다툼에 주위가 침
묵하고 주시했다.
"이 멍청아! 우리는 검사고, 기사며, 모험가다. 부딪히기도 전에 꼬리를 말지 않는다. 이제 어린애 같은 투정은 그만
둬."
"후회할 거다."
"‥‥."
"후회할 거라고! 노리스, 넌 후회할 거야."
"바스티너! 저 녀석을 끌어내라! 나중에 되돌아 올 때 풀어줄 테니 나무로 창살이라도 만들어서 식량과 함께 가둬두
도록!"
부대는 대장과 참모의 의아한 싸움에 혼란스러웠지만 정작 땅을 파 만든 구덩이에 참모를 던져 넣은 바스티너는 무
표정했다. 바스티너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노리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할건가? 뒤는 언제나 열려있다."
바스티너의 착용자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암흑의 갑옷이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리스는 말할 가치
도 없다는 듯 주먹을 쥐고 말했다.
"간다."
츠바틴을 가둔 곳에서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숲이 사라지자 널찍한 공터 건너에 서있는 암벽에 거대한 공혈(孔穴)
이 자리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바스티너가 말했다.
"누군가 있다."
여느 때라면 '아! 누군가 있구나.'하고 지나쳤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츠바틴이 말하기를 마을은 없고 그 곳은
깊은 숲 속을 지난 후에 나온 공터였다. 긴장한 노리스의 눈이 빛났다.
"어린애들이잖아!?"
천천히 걸음을 옮긴 무리의 눈에도 사람의 윤곽이 잡혔을 때 진영 맨 앞의 청년이 중얼거렸다. 두 명의 소년이 동
굴 앞에 서있었다. 흑백의 명암을 갈라놓듯 한 소년은 16세 정도의 나이에 아무렇게나 자란 검붉은 머리칼이 인상
적이었고 옆에서 그 소매를 붙잡고 겁먹은 사슴 같은 눈동자의 소년은 이슬로 뭉친 듯한 은백의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르고 있었다. 중성적인 착각을 일으키는 두 소년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걷던 발이 마비된 것처럼 멈춰 설 지경이
었다. 흑적색의 머리칼을 지나 백색의 소년을 향하던 그의 눈이 잠시 멈칫했다.
'저 머리칼 사이로 튀어나와 보이는 건 뭐지?'
"뿔이다!"
'그렇군. 뿔이야.'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백색의 소년이 유니콘의 변신체라는 걸 알자 그들은 바빠졌다. 성체가 아닐지라
도 유니콘은 선천적인 번개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긴장을 돋궈줄 존재로서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앞의 소년은?
'역시 유니콘이겠지. 그보다 약간 더 나이 먹은‥.'
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뿔이 보일 정도의 서툰 변신은 어린 유니콘이나 하는 것일 테니까. 아마도 두 유니콘은 자
신들과 난폭한 앙탈(?)을 부려 그 동안 억눌러왔던 전투본능을 달래줄 것이다. 과분할 정도로.
"내가 먼저다!"
"이봐, 죽이면 안된다고!"
참지 못한 두 명의 검사가 명령도 듣지 않고 뛰어나갔다. 명령도 필요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
상과는 달리 노리스는 외쳤다.
"자, 잠깐! 가면 안돼!"
흑적발의 소년이 살짝 미소 짓는다고 느낀 순간 노리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바로 이 녀석이다. 이 녀
석이 그 공포의 존재다. 뛰어가던 부하들이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노리스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
"걱정마십시오. 유니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저희들을 한 번에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들은 대장이 말을 주저하는 게 자신들을 걱정해서라고 생각했다. 머뭇거리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는 대장이었
다. 피식하고 멋진 웃음을 날리며 그들이 다시 몸을 날리려고 할 때였다.
"헉!?"
그 중 한 명은 소리도 없이 다가온 소년의 그림자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잘 생각해보니 해는 그의 등에서 비치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이 드리워 어둡게 보이는 소년의 옷과 머리칼에 놀라 반대로 착각한 것이다. 뒷걸음질치는 그
에게 소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뒷걸음절 치는 속도가 빨라져도 여유로운 소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
고 손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소년이 팔을 뻗었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8)
"헉!?"
그 중 한 명은 소리도 없이 다가온 소년의 그림자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잘 생각해보니 해는 그의 등에서 비치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이 드리워 어둡게 보이는 소년의 옷과 머리칼에 놀라 반대로 착각한 것이다. 뒷걸음질치는 그
에게 소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뒷걸음절 치는 속도가 빨라져도 여유로운 소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
고 소년이 천천히 팔을 뻗는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손에 몸을 가져다댄
느낌처럼 손끝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그리고 작은 불꽃이 일었다.
화르르르르르륵!
"끄아아아아아아아악!"
"‥‥."
공허한 침묵이 허공을 가득히 매웠다. 노리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머리 속에 통 잡히지 않았다. 죽었나?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까지 저토록 허무한 죽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죽었다'보다는 '사라졌다'라는 표현이 어울
릴 듯 불꽃으로 화해 사라져버린 것이다. 신이 지우개를 가지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운다면 지금과 같지 않을까?
전율이 솟았다.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다리를 떨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한 번 움직인 몸을 멈출 생각이 없었
다.
"흐악! 흐으아아아악!"
다시 한 번의 절규. 달려가던 두 명 중 남은 하나였다. 태운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솜뭉치 같은 엶은 불구름(火
雲)이 한 사람의 사라진 자리를 채우듯 수놓아질 뿐이었다. 비명이 없다면 스스로 빠져들고만 싶은 따뜻함과 포근
함이 느껴지는 화운(火雲)이었다. 그 가운데 한 소년이 서있었다. 한 인간이 화(化)한 작은 불꽃들이 흩날리는 속에
서 미소를 짓는 모습은 당장이라도 눈을 멀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노리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공격해!"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소년의 살해법에 그 대상이 될 걸 생각하면 끔찍했지만 원래 무사들은 죽
음을 앞에 두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두 명의 동료를 죽인 정도로 겁을 먹지는 않았다. 생명을 단숨에 앗을 정도의
실력자는 그들 내에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하앗!"
먼저 누구는 찔렀다. 정돈된 자세에서 깔끔한 속도가 위협적인 검을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긴 지팡이로 가볍게 막
았다. 지팡이는 곧고 육각형의 몸체로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온통 음각되어 있었으나 무술가들이 사용하는
봉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에 뭐라고 부를지 애매했다. 하지만 그 애매함은 그만큼 여러 가지에 유용할 수 잇다는 가
능성을 담고 있었다. 소년은 능숙하게 검을 걷어내며 지팡이를 돌려 상대를 후려갈겼다. 작은 몸에서 나온 힘이라고
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고 맞은 청년은 투구에서 피를 나풀거리며 동료들에게 날아갔다.
"돌아가라. 더 이상은 나도 멈출 수 없다."
공허한 음성은 분명 경고였다. 하지만 수많은 감정도 흔적 없이 깔끔하게 갈무리된 청량한 음성은 물러서게 하기보
다는 유혹하는 것 같았다.
"정말 주제를 모르는 구나! 겨우 몇 명 쓰러뜨린 정도로 우리에게 겁을 주려는 거냐?"
"그렇다면 모두 죽여야 주제가 맞는 사람이 되겠군?"
'으아아아악! 저 녀석들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노리스가 보기에는 건들지 않고 피하는 게 상책인 소년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어린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자신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판단함이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들은 몰랐다.
"나의 의지는 불꽃‥. 홍염의 춤을 추는 존재가 친구들에게 청하노니‥."
안전한 거리를 확인하는 듯 은발 소년을 힐끗 쳐다본 흑발의 소년은 코웃음을 치며 주문의 영창을 시작했다. 단아
한 흑빛의 옷과 망토가 마구 마나의 기류(氣流)에 주체를 못하고 휘날렸다.
"마법을 쓰려고 한다!"
대(對) 마법사 전법은 마법사라는 존재와 신체의 무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생긴 이래로 잡다한 방법들이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기사들이 사용하는 방법만큼 통속적이고 대중적이며 효율적인 방식은 없다. 여러 가지 수식어를 제외
하고 단순하게 주문 다 외우기 전에 때려눕히면 되는 것이다. 수많은 전쟁과 전투의 역사에서 그 위력을 자랑하는
방법을 펼치기 위해 검을 뽑은 기사들은 갑옷- 대부분 링 메일이나 체인 메일이다 -을 철렁거리며 밀물처럼 밀어
닥쳤다.
"나의 춤에 영롱한 광휘로 잠시나마 발맞춰주오."
그러나 소년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비웃음과 함께 떨치는 손가락 사이에서는 무엇이든 태울 듯한 홍염이 용
솟음쳤다. 그 모습은 그대로 휩쓸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기사들은 언제부터인가 공포에 질려 검을 내지
르고 있었다. 기합인지 절규인지 판단할 수 없는 울부짖음와 함께. 노리스는 소년이 춤을 추듯 움직일 때마다 뿌려
지는 불꽃의 잔가지에 휩쓸려 버리는 기사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을 자
신이 있었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리라는 게 그의 인생이었다. 노리스 뿐이겠는가? 기사들은 검에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걸고 운명을 걸고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한기를 품고 휘둘러지는 검에 손을 가져다댔다면 당연
히 피를 쏟으며 베어 지는 게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설사 아니라고 해도 기사들의 기(氣)를 품은 검에 손을
가져다대고 멀쩡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검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의 눈앞에서.
처음 소년의 몸에 검이 닿으면 "베었다!"하고 환성을 지르던 이들은 더 이상 없었다. 오히려 닿은 검이 불꽃으로 화
(化)해 허공으로 흩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기사들을 놀리듯 소년은 유연한 체술로 검을 가볍게 뛰어넘고 부드럽게 구
르며 손을 떨치고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잔혹스러운 춤을‥.
"악몽이야."
노리스는 중얼거렸다. 검을 잡을 힘이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치는 게 옳은 판단일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홀린 듯 싸우는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들, 기사는 어리석으니까.'
첫 출전을 위해 잘 갈아놓았던 검의 광택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옆을 보니 바스티너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노리스와 보조를 맞춰 공격해볼 생각인 듯 싶었다.
'좋겠지.'하고 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최강의 기사단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두 사람의 협공이었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당해낼 자가 없을 것
이다. 단, 눈앞의 상대가 그 예외라는 게 안타까웠지만. 자신과 싸울 때 팔이 꺽이는 와중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바
스티너였지만 그 역시 긴장이 되는지 흰 숨이 뿜어져나오는 횟수가 평소보다 늘어있었다.
"그럼 간다! 모두 비켜라!"
물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듯 기사들이 옆으로 길을 터주었다. 동료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라면 어떻게 해주리라 믿는 것이다.
"흐압! 어디 내 검도 태워봐라."
달려가는 다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노리스의 전력(全力)은 그만큼 뛰어났다. 순간적으로 춤을 추는 소년 앞
에 도달한 그는 높이 쳐들었던 검을 힘차게 내리그었다.
쿠아아아!
파공성이 먼저 소년을 덮쳤다. 블레이드를 휘둘러도 나기 힘든 굉음이 롱소드의 검압(劍壓)으로 일어나자 무표정하
던 소년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물끄러미 검을 바라보던 그는 검이 몸에 닿기 직전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공중
제비를 돌아 공격을 피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때 뒤에서 막 도착한 바스티너
가 검을 뿌렸다. 노리스와는 달리 거체의 검이었지만 속도는 뒤지지 않았다. 공중에 뜬 소년는 피할 방법이 없었으
므로 바스티너의 검은 자신감에 차있었다.
"크윽!"
마법을 외울 시간조차 없는 상황에서 소년은 침착하게 지팡이로 몸을 보호했다. 바스티너의 공격이 닿는 순간 폭풍
에 휘말린 듯한 충격이 그의 온몸을 흔들었다. 방어는 했지만 강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간 작은 몸이 암벽
에 부딪히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대단하군."
쇠를 갈아넣는 듯한 음성이 감탄과 아쉬움에 차있었다. 뛰어난 검사도 꼼짝없이 당할 공격이었는데 막힌 것이다. 하
지만 소년이 튕겨나간 속도로 볼 때 암벽에 충돌한 타격이 작지 않았을 게 분명했고 공격이 먹힌다는 걸 안 것으로
성과는 충분했다. 오히려 바스티너는 노리스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 노리스의 속도는 그로서도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굴욕감에 빠져든 것이다.
"저럴 수가‥. 말도 안돼."
노리스는 그와는 다른 감정에 빠져있었다. 가냘픈 체구로 봐서 그대로 절명하거나 기절했어야 옳을 소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기계처럼 목을 양쪽으로 젖혀보며 성능(?)을 감식한 소년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노리스에게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꽤 무서운 공격이었다. 내 차례인가?"
'넌 더 이상 무섭지 않아도 돼!'
내심 소리친 노리스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던지며 동시에 팔다리를 웅크리고 굴렀다. 서있던 방향에서 화끈한
감각이 느껴지는 게 가만히 있었다면 당장 통구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등 전체에서 식은땀이
온천 솟구치듯 흘러내렸다.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 인간은 발밑에 위험이 느껴지면 전후(前後)보다는 양 옆으로 피하는 게 편하지. 그렇
다면 확률은 1/2인데‥ 당신은 운이 나쁘군. 아니, 내가 운이 좋을 걸까?"
운이 좋은 게 어느 쪽이든 노리스는 무조건 굴렀다.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발걸음이 급속히 접근하는 걸로 볼 때
바스티너가 곧 달려와 도와주리라 믿었다. 그의 믿음은 틀리지 않아서 소년이 바스티너를 상대하는 사이에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과 반격이 서너 번 교차하자 바스티너는 밀리기 시작했다. 소년이 딛은 발끝에서는 불기둥이
솟고 휘젓는 손에서는 불의 날개가 춤을 췄으니 상대하기 곤란함을 보기만 해도 알았다.
"호오‥ 너는 상당히 재밌는 걸 입고 있네. 미크릴의 갑옷이라니‥. 의지도 가지고 있어. 갑옷 안이 궁금하군. 미크
릴의 갑옷을 입고서 고작 이런 위력이라니 이해가 안 가. 혹시 평범한 여자가 아닐까?"
움찔! 농담으로 던져본 말인데 정말로 바스티너의 동작에 틈이 드러났다. 소년의 입가에 웃음이 짙어졌다. '정말로
벗겨볼까?'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공격당할까 당황한 바스티너가 크게 검을 횡으로 휘둘렀지만 소년은 그 자리
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묘한 갑옷의 소유자가 자세를 잃어버리는 순간을‥.
"전투에서 상대가 당황했다고 선뜻 공격하면 진정한 기회를 놓치고 만다. 한 번 더 기다려 기회가 손에 쥐어질 때
까지 끌어당기면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보통의 검사가 찔러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바스티너는 자세가 무너졌으므로 소년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매끄럽
게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걸 바라보면서도 대응하지 못했다. 곧 옆구리 쪽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폭음이 일어났다.
콰앙!
"꺄아아아아아악!"
34 악장 수많은 가지의 기억, 같은 시간의 줄기를 타고 흐르네.(9)
어떤 충격도 막아낼 듯하던 검은 갑옷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날아오는 바스티너를 받으며 노리스는 어안이 벙
벙했다. 소년의 말을 듣고 설마 했는데 투구가 벗겨진 바스티너의 얼굴은 10대 소녀의 앳된 얼굴이었던 것이다. 이
런 꼬마가 대륙 최강의 기사단을 이끌었다면 누가 믿을까.
"역시 여자였나? 어떻게 평범한 여자가 바스티너의 주인이 됐지? 역대 바스티너들이 봤다면 혀를 차겠는 걸."
네 녀석이 너무 강한 것뿐이다.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의 붉은 눈동자에 혈기와 광기가 흐르고 있음을
깨달은 노리스의 입술은 솜씨놓은 재봉사가 꿰매놓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즐
기듯 지켜보던 소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길래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나. 무시하고 덤비기에 이번에는 좀 저항을 하겠구나 싶었는데 실망인 걸. 어쨌든
처음에 말했듯이 내 주제를 찾기 위해서는 너희들을 모두 죽여야 겠지?"
그는 불꽃이 일렁이는 양손으로 겹쳐 수인(手印)을 만들고 작게 주문을 웅얼거렸다. 이제까지 주문없이 간단한 몸동
작 하나로 사람을 흔적없이 소멸시켰던 소년이다. 눈을 감고 주문의 영창에 집중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할 주문일지
노리스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츠바틴, 난 먼저 간다. 대충 살다가 쫓아오거라.'하고 중얼거리는 노
리스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주문을 멈추라고!"
오랜 지우(知友)의 음성이었다. 절망을 경험한 직후이기 때문인지 노리스는 만면에 놀라움을 띄고 그의 이름을 외쳤
다.
"츠바틴!"
"그렇게 반가울 것 없어, 노리스. 날 땅 구덩이에 버려두고 가다니‥. 잘못해서 아사(餓死)라도 당하면 어쩔 거야?
어쨌든 그에 대한 잘못은 좀 있다가 따지기로 하고 우선 협상을 해야겠지? 조그만 친구."
소년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은 이내 칼날처럼 변해 은발의 소년을 날카롭게 노려보
았다. 시선을 받은 상대는 뭔가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지 고개를 돌렸다. 미간을 찌푸린 체 적흑발의 소년이 츠바틴
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그가 내세울 조건은 하나 밖에 없었고 소년은 무서운 존재였지만 약속을 어
길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제서야 츠바틴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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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노리스 녀석, 정말 올라가기 힘들게 만들었잖아!"
땅 구덩이 속에 츠바틴이 기어나온 것은 노리스가 떠나고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튀어나온 돌로는 2.5m에 달하는
구덩이를 기어올라온다는 게 쉽지 않았으므로 벽 중간 중간에 손에 돌을 쥐고 딛을 수 있게 작은 패임을 만들었다.
덕분에 그의 손은 올라오다가 다시 떨어져 생긴 상처로 엉망이 된 다리와 함께 피투성이였다.
"정말로 죽여버릴 생각을 갖은 건 아니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와 다투며 살아온 게 근 이십 년의 세월이 아니던가. 어쩌다가는 저 녀석 없어졌으면 좋겠어라
는 생각이 날 때도 있는 법이다.
"멍청해서 뒷생각을 하지 않았겠군."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츠바틴은 노리스가 갔을 방향을 노려보았다. 화광(火光)이 하늘까지 치솟는 모습이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꺼림직했던 임무, 그 원인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자 그는 끔찍한 상상에 몸을 떨었다.
"설마 벌써 시체가 되진 않았겠지? 조금만 기다려라."
힘도 없는 자신이 가봤자 무엇을 하겠냐만은 웬지 꼭 가야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 놈의 목숨이 걸려서인지 무
척이나 예민해진 감이었다.
마침 내 노리스가 있는 공터에 도착한 츠바틴, 그가 나무 수풀을 막 젓히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공터 가운데서
춤을 추는 소년과 그가 뻗을 때마다 불씨가 되어 흩어지는 기사들의 광경이었다.
"괴, 괴물이로구나. 혹시 마족이 아닐까?"
소년이 쓰는 마법은 그가 속해있는 집단에서도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불씨로 변하게 만
들다니 오래 전 천족(天族)의 적수였다는 마족(魔族)도 저보다는 무섭진 않을 것이다. 처음 집단에 들어왔을 때 이
미 무리원이었던 친구와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로진스라는 이름으로 당시 마법을 연구하는 분야
에서는 젊은 인재라고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지금은 마법 왕국이라는 아스틴에서 근무 중이라고 한 걸 들은
기억이 났다.
― 헬 파이어? 그게 이번에 자네가 연구해야 할 마법인 모양이지?
― 그래. 9 써클이라는 절대의 경지에 도달해야 주문이나 한 번 외워볼 수 있다는 주문이지.
솔직히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 이름부터 '지옥의 불'이니 민간에도 소문으로는 은근히 전해지는 마법의 이름이었
다. 어느 낡은 서점에 가면 그 주문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츠바틴이 껄걸 웃으며 로진스의 어깨를 두들겼
다.
― 그거라면 나도 좀 알지. 저기 제플론 시내 중심에 낡은 서점이 있지 않나? 거기 구석탱이에 보면 페르미안 마법
서 시리즈, 그 서민들 중에 가끔 마법에 꿈을 키우느니 어쩌니 하는 친구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보는 책.
― 페르미안 시리즈 중에 고급편에 들어있는 헬 파이어 주문을 보았나?
― 아하하하‥. 그래, 그 주문서 말야. 자네 동료들하고 있을 때 '그런 마법원의 강아지나 보는 주문서'라고 비하했
던 그 거 말일세.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적혀있는 주문이 정말로 가능한 줄 알던데!? 아아‥ 나도 처음에는 가능한
줄 알았지.
― 가능해.
― 그럼 가능하지. 가능하고 말‥ 예?
― 그 주문은 진짜일세.
― 하, 하지만 헬 파이어는 9 써클의 주문 중에서도 유일하게 10써클에 대응하는 파괴력을 지렸다는 마법이 아닌가.
그래서 익히는 게 금지된 금기 주문의 대표적인 예로 자리잡고 있는 걸 익히 알고 있는데‥. 아하하, 이 사람이 내
가 마법을 잘 모른다고 놀리는 게로군.
― 놀리는 게 아니야. 그 주문이 금기 주문 헬 파이어의 주문이 분명해. 페르미안 시리즈 중에서는 웬일인가 할 정
도로 오자 하나없이 완벽하지.
― 놀라운 일이군. 그렇다면 누군가 8 클래스의 벽만 넘어선다면 헬 파이어가 세상에 구현되는 게 아닌가.
― 그럴 수는 없다네. 안타깝게도‥가 아니라 다행스럽게도 라고 해야 하나? 현재 전해지는 헬 파이어의 주문을 분
석하면 넓은 지역에 강렬한 폭발, 드래곤의 피부도 찢겨나갈 파괴력을 지닌 마법으로 판명됐어.
드래곤의 피부도 찢겨나갈 파괴력인데 다행스럽다니 잠시 츠바틴은 오랜 친구의 뇌가 마법의 성취 부진으로 인하여
심각한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을 추리해보았다. 그가 얘기를 들은 체 만 체 하는데도 로진스는 자신의 이야기에 자
기가 빠진 듯 암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헬 파이어의 어원은 '지옥의 불'. 현재의 헬 파이어가 위력이 강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폭발력이지. 불 자체의 뜨
거움 때문이 아니야. 뜨거움 자체로만 본다면 더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있는 화염계 마법이 7 써클의 분류 중에도
몇 있다네. 내가 왜 현재, 현재, 하는지 의심스럽겠지? 전설에 의하면 '지옥의 불'은 마계에서 고문용으로 쓰여진다
고 하지. 연금술사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같은 생물은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강도(强度)가 아니라 범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네. 만약 인간의 최단위 구성 하나하나에 작은 불씨를 놓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 ‥‥ 끔찍하군.
― 그래. 그게 지옥의 불, 헬 파이어의 진짜 모습이네. 인간의 세포 하나하나에 불씨를 소환시키는 거야. 드워프들이
미스릴이나 오르하르콘을 녹일 때처럼 뜨거울 불길도 필요없지. 불꽃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만으로도 세포는 충
분히 타버릴 테니까. 그래. 헬 파이어를 죽지 않은 이승에서 당한다면 그 자는 불씨가 되어 결국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지. 드래곤이라 할 지라도 불씨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없을 거야.
"그렇다면 저게 바로‥. 진정한 헬 파이어?"
은은한 잔상을 남기고 사라져가는 생명의 불씨들이 그를 다시 현실로 이끌었다. 서둘러 츠바틴은 노리스를 찾았다.
다행히 얌전히(?) 있었는지 죽지 않고 허여멀건하게 탈색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는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저, 저, 저 멍청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검을 뽑아들고 노리스가 소년에게 달려들자 츠바틴은 이마를 탁탁 쳤다. 저 무대포 성격에 부
하들을 잃고서 조용히 물러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처럼 노리스는 불씨로 화하
진 않았다. 소년이 꺼림직한 듯 슬쩍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왜지?'하고 고민하던 그는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이 밝게 빛났다.
"그래. 상대의 온몸 구석구석에 동일한 불의 기운을 심을 려면, 잠시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저 소년은 손을 가져다
대는 행위는 그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함이 틀림없다. 하지만 노리스와 바스티너의 검이 빨라서 마나를 검에 넣기도
전에 베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선거지!"
주먹을 꽉 쥔 그는 여유있게 눈을 돌렸다. 소년의 체술이 뛰어났지만 몸을 사용하는 분야에서는 대륙 최고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닌 노리스였다. 바스티너까지 가세해있지 않은가. 이제는 도망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찌하면, 어찌하면 살 수 있지? 저 소년의 약점은‥? 역시 저 것 밖에 없겠지? 위험하지만‥ 모두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츠바틴아, 조금만 용기를 내자."
노리스와 바스티너의 막강함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장난치듯이 200명의 1/4에 달하는 기사들을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린 소년이다. 9 써클의 마법을 밥먹듯이 사용하는데 8써클이라고 사용하지 못하겠는가. 여러 가지 마법을 혼용한
다면 이 공터에서 어떤 결과가 서있을지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츠바틴의 발이 빨라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긴 비명소리, 검은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바스티너가 허공을 날았다. 비명 소리가 특이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바스티너가 쓰러진 이상 노리스가 얼마나 버틸지 계산해봤자 몇 초의 차이 뿐일 테니.
츠바틴이 노리는 상대는 순백의 긴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서있는 유니콘 소년이었다. 유니콘은 무표정했지만 미친
듯이 사람들을 죽이는 소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슬픔을 미약하게 내비쳤다. 역시 성수(聖獸)답게 생명을
사랑하는 건가? 꼴사납군. 솔직히 검붉은 소년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하다.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를 퇴치
하고 있는 것이니까. 단지 완전 말살이라는 행동이 당하고 있는 츠바틴들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느껴졌을 뿐이지.
성수라는 생물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동정이다. 그렇게 츠바틴은 생각했다.
"윽!"
'이런! 다 틀렸군. 들켜버렸어‥.'
빛깔마저 희미한 눈동자가 작은 기척을 느끼고 그를 향하자 츠바틴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유니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는 달리 너무나도 쉽게 잡힌 유니콘 소년.
'어떻게 된 거지?'
저항도 없이 자신의 팔에 잡힌 채 소년이 인형처럼 저항도 없자 오히려 츠바틴이 의아했다. 그 때 유니콘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뭐하지? 이러다가 당신 일행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그런 동정 따위는 필요없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츠바틴에게는 유니콘을 빼고는 흑적발의 소년에게
서 노리스를 구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마법사 소년은 손으로 주문의 인(印)을 만들며 주문을 영창하고 있
었던 것이다.
"잠깐! 기다려! 주문을 멈추라고!"
츠바틴이 크게 외치자 소년은 오물거리던 입술을 멈췄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유니콘이 인질로 잡혀 당황한 기색
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던 장난(?) - 조금 과격한 불장난 -을 멈춰 불만스러운 어린애처럼 얼굴을
찌푸렸을 뿐이다.
"츠바틴!"
"그렇게 반가울 것 없어, 노리스. 날 땅 구덩이에 버려두고 가다니‥. 잘못해서 아사(餓死)라도 당하면 어쩔 거야?
어쨌든 그에 대한 잘못은 좀 있다가 따지기로 하고 우선 협상을 해야겠지? 조그만 친구."
날카로운 조그만 친구의 시선이 내가 잡고 있는 소년의 회색 눈동자에 쏘아졌다. 화가 나니까 마치 붉은 눈동자가
타오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흑적발의 소년은 아직도 공포를 얼굴에서 지운 채 떨어대며 바라보는 장년들을 한
차례 쓰윽 훑어봤다. 그리고 기절한 바스티너와 그녀를 안고 있는 노리스까지 돌아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았어. 조그만 친구, 자네 말이 통하는 군."
"난 조그맣지 않아."
"하하핫!"
노리스가 갑자기 웃어 재꼈다. 사실 웃기긴 했다. 지금 작지 않다고 주장하는 소년의 키는 츠바틴 손에 잡혀있는 은
발의 소년보다 작았다. 그리고 츠바틴에 비하면 은발 소년은 작았고 또 츠바틴은 노리스에 비하면 역시 작았다. 노
리스의 웃음에 검붉은 소년은 지금까지의 표정 중 가장 사람답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고
츠바틴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얼른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를 살려 보내주는 거야. 물론 죽어버린 멍청이까지 살려줄 필요는 없어. 지금 멀쩡히 살아있는
녀석들만 안전하게 돌려 보내주면 된다고."
"앞으로도?"
"아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츠바틴은 소년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지?"
자고로 인질의 효과라는 것은 1회 사용으로 만족하는 게 가장 올바른 사용법이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자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다시 만나면 조그만 친구, 자네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난 작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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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페를로이트 섬을 빠져 나왔지. 우리 기사단의 인원은 들어갈 때는 200여 명이었지만 나올 때는 140
여명이었어. 60여명이 한 소년에게 몰살을 당해버린 거지."
"그 소년도 대단하지만 그에 대항했던 흑기사 - 바스티너 -와 노리스님
도 대단하군요."
"아니, 놀이감밖에 되지 않았어. 나중에 다시 상면하니 그 소년은 우리 집단과는 같이 하늘을 볼 수 없는 존재였지.
그 후로 몇 년을 싸웠어."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지 노리스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복수라는 것은‥."
"그래. 그 녀석과 관련된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야. 집단에서는 '그'가 죽었다고 하지만, 죽을 녀석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짐작하네."
그리고 노리스와 츠바틴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엘로고라토의 전령이 세차게 몰아져왔다. 잠시 후 몰아칠 사건을
먼저 예고하듯이‥. 그 바람에 모두가 탄 마차가 심하게 요동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