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악장 만남은 불행인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 (1)
시즈 일행이 온천에서 피로를 풀고 있을 무렵, 실베니아 서남부 카마 영지, 론리 호수의 거대한 저택.
"쿨럭! 쿨럭! 집사! 쿨럭!"
비가 와서인지 그 날 따라 몸이 더욱 결리고 시렸다. 두꺼운 이불을 몇 겹이나 덥고서도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
는 인물은 실베니아의 궁정 마법사로 유명한 마나이츠 페르베이안이었다. 늦가을의 심한 일교차(日較差)를 견디지
못하고 늙은 몸으로 맞은 감기는 그에게 초췌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게 만들었다. 좋은 옷으로 몸을 감쌌다 뿐이
지 주름살에 감기로 인한 피곤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그를 예전, 엘시크의 헤트라임크, 실베니아의 마나이츠라고 칭
송받던 마법사라 생각하겠는가.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군. 늙으면 죽어야 된다는 말이 명언(名言)이었어'하고 중얼거렸지만 내심 아직은 삶의 미
련이 남았는지 이불을 끌어당기며 노인은 소리를 높였다.
"집사아―! 넬피엘! 넬피엘, 어디있나? 쿨럭! 쿨럭!"
마나이츠가 몇 번을 부르자 방 밖 복도에서 누군가 허둥지둥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애타게 부르던 집사
일 것이다. 이윽고 문이 벌컥하고 열리며 작은 키의 소년이 뛰어들어왔다. 불타는 듯한 검붉은 색이 인상적인 머리
카락을 가진 그는 여인이 남장을 한 것처럼 깨끗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소녀적인 외모는 가뜩이나 작은 키와 합
산(合算)되어 소년의 체격을 더욱 왜소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눈매가 그나마 남자라
는 인상을 조금 더해주기는 했지만 색기(色氣)까지 덤으로 부여해주는 덕에 위압감을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목소리가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았지만 흩어짐이 없이 곧은 음색은 평온함과 함께 왠지 차가움을 느끼게 만들었
다. 아들들도 분가(分家)하고 집사와 하인들도 좀더 권력에 야심을 갖는 그들을 따라 출세의 길로 저택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서 넬피엘이라는 착살하고 성실한 집사의 발굴을 마나이츠는 올해의 쾌거(快擧) 중에 다섯 손가락에 꼽
았다. 그만큼 넬피엘의 저택 관리 수완은 뛰어났다. 물론 처음에는 실수도 많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넬피
엘은 잘못된 것을 고치는 속도가 다른 이들보다 빨랐다. 덕분에 언제나 어지러웠던 마나이츠의 방도 깔끔하게 정돈
된 게 아니겠는가.
"자네가 우리 집에 있은 지도 벌써 반년이지? 집안 일을 하는 게 제법 숙련되었더군. 달라졌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찬란한 미모만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 창고 정리만 해도 제법 근육이 붙어야 할 텐데 여전히 여
자아이 같지 않은가."
머리만 길었다면 미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을 넬피엘의 나이가 올해로 28살이라는 게 마나이츠는 반년이 지나
도록 믿어지지 않았다. 근육도 얼마 없는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웬만한 장정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라 처음
에는 에릭사와 같은 영약이라도 복용하지 않았나 싶어 몇 방울의 피로 실험을 해보았지만 평인(平人)의 것과 다름
이 없다는 걸 알고 의구심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깊어졌다 뿐이지 어떻게 의문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현재는
그 때의 관심 덕인지 넬피엘이라는 청년이 아들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놀림으로 기분 상했는지 넬피엘은 얼굴을 찌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세상을 이해할 만큼 살아온 노인은 지금
의 반응이 어리숙한 청년이 부끄러워하는 반응이라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싱글벙글한
웃음을 연신 지우지 못하는 노인의 얼굴에 넬피엘의 입술은 점점 삐죽이 솟아올랐다. 그러자 얼른 마나이츠는 손을
끄덕여 그를 가까이 불렀다.
"이런, 이런‥. 기껏 불러놓고 넋을 놓다니‥ 역시 자네의 얼굴은 매혹적인 힘이 있어."
"주인님‥. 흘러내린 콧물은 닦으시고 말씀하시는 게 좀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아예 이제는 포기를 했는지 넬피엘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두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흐응! 고맙군. 자네의 판단능력은 언제나 정확하기 이를 때 없어."
"별 말씀."
"자네를 만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야."
"손수건 빌려드린 대가로는 과한 칭찬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넬피엘은 전혀 칭찬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나이츠는 그가 담담하게 고개를 숙
이자 씨익 웃었다.
"눈치가 빨라서 더욱 맘에 들어.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네. 요즘 이 나라에 바람이 불고 있어."
"엘로고라토의 전령이 바쁜 시기입니다.."
넬피엘이 당연하다는 뜻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노인의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
"내 말은 그게 아닐세. 난 왕실의 일에서 손을 뗀 지 벌써 일 년이 되어가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제법 점성술에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며칠 전에 별 자리가 이상한 징조를 보이길래 카드를 뒤집어봐도 여전히 불길하기 짝이 없
어. 매일 밤 다시 시도해봐도 마찬가지야."
"왜 이렇게 주인님의 감기가 오래가나 했더니만‥ 밤 바람도 차가운 때 창문을 열고 별 보고 점을 치셨기 때문이셨
습니까? 오늘 당장 목수를 불러서 창문을 잠정 폐쇄하겠습니다."
"아, 아니, 네, 넬피엘‥."
"집사는 주인님께서 병에 걸리셨거나 위중하실 때 그에 위험이 되는 행위를 막을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넬피엘이 창틀에 놓아두었던 노트를 펼치고 집사 일정의 스케쥴을 변경했다. '이 친구는 너무 성실하단 말이야.'하
고 마나이츠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네, 좋아. 자네 생각대로 하게. 그 전에 내 본론을 마저 들어야지?"
"말씀하십시오."
"내 처음 볼 때부터 자네의 능력을 눈치챘네. 넬피엘 자네는 5클레스에 육박하는 마법사라는 걸 말이야. 그 나이를
생각할 때 감히 근접할 수도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는데 자네의 외모만큼이나 경탄하네. 떠돌이 하인 생활이나 하면
서 그 정도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부인할 것 없네. 나도 아주 우연찮게 알게 됐으니까. 아마도 국가의 눈을 벗어난 마법사 중에서 자네의 실
력은 수위를 차지하겠지? 그러니 부탁할 게 있네."
"하명하십시오."
"허허, 이 사람아‥. 부탁이래도‥. 당장 수도로 가주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 조사해서 내게 알려줬으면 하
네. 해줄 수 있겠지."
노인의 눈동자는 마치 어린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처럼 인자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넬피엘의 무언은 곧 그가
부탁을 수락했다는 걸 말했다. 마나이츠는 빙긋이 웃으며 편히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결코 과한 칭찬이 아니야. 자네를 만난 것은 내 생애에서 몇 번을 꼽을 정도로 얼마 없었던 행운이야."
* * *
"하하하‥ 어쨌든 노리스님이 같이 한다면 도적들에게 당한 염려는 놓아도 되겠군요. 이런 걸 행운이라고 말하는
거겠죠?"
"보를레스, 너무 추켜세우지 말라고. 이 친구는 추켜세우는 만큼 고개를 버젓이 쳐드니까."
"하하하하!"
바람이 세차게 마차를 때렸지만 의기투합한 이들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들은 시끄럽게 조잘대는 남자- 그것
도 말 묵묵하다고 알려진 검사들 -들을 피해 구석으로 피해 생각에 잠겨있거나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잠이 들었고 시
즈를 비롯한 학자들은 엘로고라토의 전령이 지나갈 시간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러던 중 갑자기 마차의 요동이
멎었다.
"무슨 일이지? 요르몬 씨!?"
"‥‥."
대답이 없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은 일행이 각자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자 마차 안은 침
묵이 팽배해졌다. 블리세미트와 토플레가 조용히 여자들을 깨우는 사이 보를레스가 마차 뒷칸에 바람이 들이닥치지
않게 가려놓았던 천을 거두었다.
"조심해!"
시즈의 고함 소리에 보를레스는 기겁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시즈가 고함을 지르게 만든 원인, 지척까지 날아온 불
덩어리 때문이었다.
"흐읍!"
검을 뽑을 시간도 없었다. 보를레스는 검의 옆면으로 불덩어리를 강하게 후려졌다. 불덩이는 속이 은은히 비치는 게
불꽃 그 자체였기 때문에 검으로 베어도 없앨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적중하여 강렬한 풍압에 불덩이가
행태를 일그러뜨리며 흩어졌다.
푸화아아아악!
하지만 이미 지척에서 와있던 불덩이라 흩어지는 불꽃이 모두 온도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서 보를레스의 옷과 머리
카락은 심하게 그슬였고 피부가 드러난 상태에서 불덩이와 가까웠던 손 부분은 화상을 피할 수 없었다..
"윽!"
블리세미트가 얼른 다가와 신성 주문을 외웠고 일행은 마차에서 내렸다. 다행히 보를레스가 막아냈지만 만약 마차
안에서 화염계 주문을 맞는다면 피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꺄악―!"
마부였던 오르몬은 이미 심장 부근이 허공에 드러나 있었다. 강력한 마력구(魔力球)에 당했다는 눈썰미가 있는 사람
들은 한 눈에 알아챘다. 처참하게 죽어있는 말과 마부의 모습에 레스난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자 카이젤이 얼
굴을 찌푸리고 짜증을 냈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레스난에게 있어 인간들 중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믿는 게 카이젤이었다. 그러나 카이젤은 여자들이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예절은 그의 예절 교범에서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그녀에게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레스난을 약 먹은 쥐새
끼처럼 얌전하게 만드는 카이젤은 정령을 이용해서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마차는 산길을 달리고 있었으므로
주위는 온통 수풀로 가득했다. 하지만 카이젤보다 먼저 노리스가 말했다.
"전방 50m 정도에 50 여명 정도의 무리가 있다. 느껴지는 기운은 검사들보다는 마법사들이 많군. 그리고 양 옆에
도‥ 미세하지만 살기가 느껴진다."
"‥‥."
50m라면 마법사들이 공격하기에 최상의 거리 조건이었다. 그리고 양쪽 숲에서 느껴진다는 살기는 어쌔신일 가능성
이 컸다. 어떻게 해야할지 일행이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멀리 있던 무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얼굴을 자세히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그들 무리 중에서 한 소년이 나와서 손을 흔들고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시즈 세이서스."
35 악장 만남은 불행인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 (2)
"자네는 누구지?"
생글생글 웃는 소년의 모습에 시즈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자 토루반은 소년의 정체가 궁금했다. 뒷짐을 진 채 작은
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조그만 몸에서 오우거도 물러서게 할 위엄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스틴네글로드의 드워프 현자시군요. 전 엘시크의 페노스톨멘가의 로길드 라고 합니다."
"흐음‥ 고명한‥."
"예. 왕실의 고명한 시종‥ 페노스톨멘입니다."
"자네가 왜 여기 있는 건가? 페노스톨멘가는 왠만해서는 엘시크를 떠나지 않는다고 들었네만."
"왠만한 일이 생겨서 이렇게 떠나왔습니다."
로길드는 시즈의 일행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눈동자가 보를레스 뒤에 이르러 의아한 빛깔을 드러냈
다.
"이상하군요. 저희 정보에 없는 두 분이신 듯한데‥."
"글세‥ 나는 자네를 알 것 같군."
노리스와 츠바틴은 뭔가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이미 로길드를 비롯한 마법사 무리가 다가올 때부터 그들의 정
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고길드의 옆에 붙어있는 '고리의 신비'의 수장, 로진스는 츠바틴의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었다. 두 사람은 현재 자신들이 속한 집단에 왜 시즈들의 앞을 막았는지 의아했지만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시즈의 반응으로 쉽게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한 쪽은 친인(親人)이요, 다른 한 쪽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이었다. 그 때 로진스가 로길드에게 다가서서 귓속말을 건넸다.
"재미있게 되었소. 저들이 바로 노리스와 츠바틴이오..
"어째서 시즈님 일행과 함께 있는 거지요? 두 분께서는 저들이 우리의 공격 대상이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모르고 있는 것 같소. 아마도‥."
로길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토루반들과 시즈들은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에 더욱 긴장했다. 그들이 주고 받고 있는
내용에 따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전투가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힐끔 시즈와 노리스를 바라본 로길드는
로진스에게 말을 이었다.
"시즈님과도 안면이 있는 듯 한데요. 아주 절친할 정도로‥."
"옛날부터 진정한 기사들은 전투를 위해 가족까지 죽인다고 했지. 걱정마시오. 공(公)을 위해 정(情)을 버릴 줄 아는
인물들이오. 두 사람을 만난 게 불행이었다는 걸 저들은 모를 거요."
"그렇게 되기를 빌어야겠지요. 솔직히 저들이 나서주지 않고 모른 체만 해준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며 로길드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고개를 들었다.
"과연 '마땅찮은 시즈'라는 이름을 헛되지 않군요. 저는 당신을 또 놓쳤
으니 말입니다."
시즈가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놓쳤다 해도 시즈들은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길을 막혀버렸으니 두
사람의 머리 싸움은 로길드가 승리한 것이다. 여유를 가진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솔직히 시즈님의 일행이 너무 늦어서 또 놓친 게 아닌가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온천에서 피로라도 풀고 오신 모
양이지요?"
"그렇습니다. 시차를 착각하게 하여 스스로 길을 비키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참을성이 그렇게 좋을 줄은 몰랐지요."
"하하하하!"
시즈가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짓자 로길드는 소년답지 않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제가 그렇게 운이 좋은지 몰랐습니다. 시즈님을 따라잡기 위해서 저희는 낭아플에서 대로를 통해 달려와야
했지만 엘로고라토의 전령 때문에 속력을 낼 수가 없었죠. 그래서 어제 도착을 했지요. 저희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늦었기에 엘로고라토의 전령과의 만남을 저주하고 있었는데‥ 하하핫. 이제 보니 행운이었군요."
"‥‥."
"이제 슬슬 시작하기로 할까요? 저희의 만남은 가벼운 말로 끝날 게 아니니까요."
로길드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서 마법사들이 시전한 화염과 바람의 마법을 시즈들에게 쏟아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은 시즈 측도 마찬가지였다. 블리세미트의 손이 합쳐지는 순간 거대한
신성 방어막이 일행을 보호했고 카이젤의 곁에서는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마리나의 손에 들린 빗자루는 번
개를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며 스파크를 일으키더니 강렬한 라이트닝을 분출했다.
"은혜도 모르는 녀석이로구나, 로길드. 각오해라!"
"보를레스, 오랜만에 보았는데 안색이 수척해져서 매우 안타깝군요. 그렇다고 해도 설마 저처럼 연약한 학자를 핍박
하셔야 되겠습니까? 당신의 상대는 이쪽입니다."
로길드가 한 걸음 물러서자 그의 뒤에서 호위를 하고 있던 사내가 걸어나왔다.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였는데 체격은
보를레스와 비슷했다.
"오랜만이군, 보를레스. 다시 만날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의 재회는 생각지도 못 했는 걸."
사내는 검을 단숨에 뽑았다. 장년 남자의 가슴까지 올라오는 바스타드 소드를 단숨에 뽑는다는 것은 그만큼 검에
숙련되었다는 암시였으므로 보를레스도 검을 뽑아 정면을 겨누고 정신을 집중하다가 상대가 자신을 아는 듯 하자
검 끝을 약간 내렸다. 후드 속에서 사내의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멍청한 놈!"
번개가 일 듯 검이 잔상을 뿌리며 보를레스의 목 앞에 와있었다. 막을 준비도 할 수 없었던 보를레스는 있는 힘껏
허리를 뒤로 젖혔다. 목 언저리를 불로 지지는 듯 뜨거운 느낌이 뇌까지 번졌지만 어떤 상태인지 살펴볼 여유도 없
었다. 사내가 보를레스의 시선이 어긋난 걸 기회로 하여 번쩍 처들고 뛰어올랐다.
콰―앙!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푹 파이며 흙이 하늘로 치솟았다.
"보를레스!"
토플레가 달려가려 했을 때 파마리나가 그를 막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하지 않았으니까."
마법의 충돌음 때문에 귀가 멍멍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흙먼지가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금속이 부딪히는 소
리가 작지만 들려왔다. 안개처럼 퍼진 먼지가 가라앉자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이 드러났다. 장검을 가지고서도 두
검사의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인지 충돌로 인한 불꽃이 불꽃놀이를 연상케했다. 하지만 보를레스는 방금 전의 기습
과 일격으로 상당한 부상을 입었는지 목과 어깨에서 피를 흘렸다.
"그 동안 실력이 늘기는 늘었군.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에 쓰러 졌을 텐데‥."
"네 녀석은 도대체 누구냐?"
"글세, 누굴까?"
사내가 쓰는 검법은 굉장히 실용적이고 잔인한 방식이었다. 기사들을 많이 상대했던 보를레스로서는 용병들의 검술
로 이렇게 강한 이를 만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는 보를레스가 기억하지 못하자 실망했는지 더욱 힘을 주
어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정말 잊은 모양이군."
"누구냐니까!"
콰악! 두 검이 서로 맞물렸다. 힘겨루기에 이를 악문 상태에서 일그러진 음성으로 사내가 말했다.
"보를레스, 멋진 한 탕이었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크윽!"
"하지만 아직도 내가 힘은 더 세."
"하앗!"
떨어지는 순간 보를레스는 상대의 발을 밟았다. 정정당당한 기사들이라면 쓰지 않을 편법. 그 정도로 보를레스는 육
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내가 어쩔 줄을 모를 찰나 보를레스의 검이
사내의 미간을 갈랐다.
스르르르륵‥.
사내는 의아했다. 눈 사이를 가른 검광은 분명 자신을 가르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머리에서 흘러내리
는 느낌은 피가 아니었다. 후드가 흘러내리는 걸 안 사내는 이죽거렸다.
"어리석군, 보를레스. 어리석어. 지금 날 죽였다면 좋았을 거야. 자네나 나나 말이야."
"‥‥어, 어째서!"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잊었나? '현재를 살아가기에 우리는 미래를 장식할 수 있지.'하고 우리가 외쳤던 말들을‥.
하지만 우리의 현재가 꼭 같은 미래를 바라는 것은 아니잖아?"
"어째서냐? 바크호!"
"이봐, 보를레스 그렇게 놀란 표정 짖지 말라고. 자네가 바라는 미래가 나와 다르다고 해도 인정하고 있어. 그러니
까 이렇게 전력을 다해 싸우는 거라고! 자네가 원하는 미래를 향한 믿음은 한낱 과거를 함께 해온 사람에게 묶일
정도였나?"
그렇게 말하며 과거, '춤추는 칼'의 대장 네모꼴 바크호는 검을 어깨에 수직이 되게 세워 공격 자세를 취했다.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 따위는 버려도 좋다는 건가? 그렇다면 사람들의 만남은 대부분 불행이라고 봐야겠군. 어차
피 버릴 과거일 테니까 말이야."
정면을 베어오는 검을 강하게 쳐낸 후 가슴을 찌르며 보를레스가 반문했다. 그의 분노마저도 느껴졌으므로 공격도
만만할 리가 없었다. 오른쪽 어깨를 젖히며 피한 바크호는 연달아 찔러오는 검을 피해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우하핫! 난 자네와의 만남이 불행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현재 이렇게 싸우고 있을 지라도 말이야. 우리의 현재는
서로의 미래를 위해서지. 묻겠네. 자네는 과거를 위해서 미래를 미루겠나,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젖혀두겠나?"
"모순적일 질문은 하지도 마라!"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이다."
"후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찮은 도적떼라도 그들의 대장이었던 자였다. 실력으로 대장을 뽑았을 게 당연했고 바크호의 실력이 보를레스를
상회하는 것도 당연했다. 바크호는 보를레스의 향상된 실력에 내심 놀랐지만 그만큼 투지도 불타올랐다.
"내가 속한 '고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질문과도 같지!"
"크으윽!"
보를레스의 어깨에서 피 분수가 터졌다. 이미 당한 부상이 동작에 적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지장을 주었고
결국 검에 깊이 찔리고 만 것이다. 검을 겨누며 바크호가 말했다.
"항복해라. 그러면 우리의 만남은 행운이 될 거다."
"운의 확률을 네 맘대로 정하지 마랏!"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고지식한 기사 양반!"
오기로 일어선 보를레스였지만 몸이 정상이었어도 힘든 상대였을 바크호를 부상당한 몸으로 견디기는 힘든 게 당연
했다. 바크호는 뒤로 밀리며 상처만 늘어가는 보를레스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죽이진 않겠지만 앞으로 검은 쓰기 힘들 거다."
파앙!
바크호는 공격을 성공시킬 수 없었다. 무언가 무형의 힘이 그의 검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힘의 원인
을 바라본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후퇴했다.
"이런 구원군인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구원군을 둬서 행복하겠어."
"잔소리말고 덤빌 테면 덤벼."
"사양하겠어. 마녀에게 혼자서 대항할 만큼 난 멍청하지 않다고."
무형의 힘으로 보를레스를 보호한 자는 파마리나였다.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한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보를레스를 부축했다.
"바보같이‥. 뭐하는 거야? 어서 일어서."
"미안하군 그래."
"블리세미트! 블리세미트! 어서 와서 이 녀석을 치료해!"
파마리나도 치료할 수 있었지만 마녀의 치료는 사람에게 귀찮은 부작용 -
간지럽다거나 식욕이 사라지는 등의 -이 따랐다. 그러나 부름을 받은 블리세미트는 다른 일행들을 보호하는 것도
바빠서 고개도 돌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제가 봐드릴게요."
"네가?"
파마리나가 놀란 이유는 나선 사람이 바로 레스난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어들은 생명의 원천인 바다의 마력을 지
니고 있다지만 레스난은 성체(成體)가 아니기에 그 능력이 별 볼일 없다고 여긴 것이다. 파마리나가 무시하는 듯 하
자 레스난이 입을 삐죽거리고 돌아서는 시늉을 했다.
"뭐에요? 도와주려고 했더니. 싫으면 관둬요."
"할 수 있다면 어서 치료해! 전력(戰力)이 부족하면 모두 죽을 판이야. 다들 쓰러지면 인어라고 인간들이 그냥 둘
것 같아? 아래는 허리 아래는 회를 쳐 먹고 위는 노리개로 쓸 걸."
파마리나가 담담하게 말하는 내용에 레스난은 뼛속까지 섬짓하게 저려왔다. 휙 돌아선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고여있었다.
"알았어요. 치료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협박은 하지 말아요. 듣기만 해도 겁이 난다고요."
그러게 말하고 레스난은 허리춤의 물통을 세워 손바닥에 물을 쏟고는 그 물에 입을 맞추고 중얼거렸다. 서서히 물
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이여‥. 작은 물방울 하나에 숨쉬는 수많은 생명의 힘이여‥ 그 숨의 조각들을 조금만
나누어주세요."
레스난은 주문을 마치고 빛나는 물을 보를레스의 상처에 부었다. 그러자
상처에 눈부신 광체가 서리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보를레스는 감탄했다. 빛과 함께 상처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해. 고마워."
"좋아하지 말아요. 협박 좋아하는 마녀만 아니었어도‥."
그 협박 좋아하는 마녀는 레스난에게 보를레스를 맡긴 채 로진스와 겨루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마녀라지
만 상대는 '고리의 신비'를 담당하는 수장, 로진스. 그의 마력은 주문의 영창이 간단하고 위력적인 파마리나를 오히
려 위협할 정도로 강했다.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푸른 마력에 파마리나는 뼛속의 마력까지도 뽑아서 가까스로 대항
했다.
"무리하지 말아요, 마녀 아가씨. 당신은 마법이 아직 설익었어."
"호호홋! 어디 잘 구워진 마법 좀 보여주시죠."
"그러지!"
로진스가 수인(手印)을 만들어 변화시킴에 따라 화염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화려한 문양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의 영창이 시작됨에 따라 점점 강열하게 타오르던 불길은 새의 형상을 띠어갔다.
―끼이이이익!
불새가 날개를 펼치자 그 길이는 5m에 달할 만큼 거대했다.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로진스의 불새는 괴성을 질
렀는데 마치 맹수가 포효하는 듯 사람들을 움찔거리게 했다. 그처럼 화려하고 위압적인 마법을 본 적 없던 이들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고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파마리나도 질 수 없다는 듯 주머니를 꺼
내어 안의 가루를 바닥에 힘차게 뿌렸다. 그리고 땅 위에 마법의 문양을 그렸다.
"확실히 잘 익었군요. 하지만 과연 이것도 익을까요?"
그러자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일어났다. 식물이 자라듯이 바닥에서 돌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확연히 구
분할 수 있는 머리와 팔, 다리. 6m에 이르는 거인의 형상을 가진 그것은 골렘이었다. 하지만 파마리나의 마법은 끝
난 게 아니었다. 보를레스를 돌보고 있는 레스난에게 달려가 주특기인 협박을 개시했다.
"당장 저 골렘을 얼려버려! 할 수 있지?"
"예?"
"얼려버리라고!"
"하지만 그러면 못 움직일 텐 데요!"
"그 꼬리를 싱싱한 저녁 회감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어서 해! 네 마법 정도로 못 움직일 내 골렘이 아니란 말이
야!"
그 정도까지 가자 레스난도 자존심에 불길이 일었다. 그녀는 '어디 두고 보자.'하고 목에 걸고 있던 조개 목걸이에
서 조개 껍질을 하나 빼어 쥔 채로 손을 합장(合掌)했다. 푸른빛이 새오나오자 물통의 물을 살짝 뿌리고 골렘에게
던졌다. 불새가 골렘을 덮치는 순간과 레스난이 조개껍질을 던진 시간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불새의 부리가 골렘
에 닿는 순간 골렘은 엄청난 속도로 얼어붙었다. 어찌나 얼음이 굵게 맺혔는지 골렘은 전보다 절반은 더 커 보였다.
파마리나와 로진스의 얼굴이 동시에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승리자는 레스난이었다. '어떠냐?'하고 우쭐되는 것 같은
레스난의 얼굴에 파마리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주문을 영창했다. 투두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골렘의 관절부위에서
얼음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히스테릭하게 날카로운 음성으로 그녀가 외쳤다.
"아하하하핫! 어디 이것도 구워 보시죠!"
스톤골렘에서 한 층 업그레이드된 아이스 골렘은 불새의 어깨죽지를 내려치듯 강하게 잡고 흔들었다. 불새도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고 불길이 골렘의 얼음을 녹이며 주위의 나무에도 옮겨 붙었다. 로진스는 어이가 없었다. 돌
에 얼음을 씌워서 불에 대항하다니 바위 자체로도 불에 대항하는데는 모자라지 않았는데 얼음이라니 마력은 확연하
게 그가 우세했지만 방식에서 완전히 밀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다른 공격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 동안에 골
렘은 바닥을 쿵쾅거리며 달려와 자신과 마법사들의 태반을 뭉개버릴 테니까. 혼신의 마력을 다 기울리고 있을 때
로길드가 손가락으로 골렘과 불새가 엉킨 곳을 가리켰다.
"자유로움에도 지친 이들이여, 잠시 나의 이름으로 정해진 길을 따라 속박의 걸음을 걸어가다오."
주문과 함께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래바람이 심했는데 로길드의 주문까지 합쳐지니 그 위력은 더욱
강했다. 그러자 바람에 맞춰 불새도 불길을 일제히 뿜어냈다. 바람에 실려 불꽃의 공격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카이
젤이 정령술로 바람을 일으켜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점점 밀려오는 불길에 시즈가 중얼거렸다.
"나의 의지는 마법, 세상을 움직이는 마법이 되리라‥."
그 소리는 작았지만 노리스는 훈련으로 인해 발달된 청각으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츠바틴과 함께 어찌할지 모
르던 그는 그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람이‥."
"‥멈췄다."
소름이 돋았다. 실감한 것이다. 시즈는 '바람을 노래하는 이'였다. 음유술사였다.
적이었다‥.
그의 이빨이 드러나며 눈에 살기가 맺히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35악장 만남은 불행일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3)
"바람이 분다."
깔끔하게 정돈된 검은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어 휘날렸지만 넬피엘은 그리 불만스럽지 않았다. 바람이 이처럼 개구
쟁이처럼 예측도 못 하게 찾아왔다는 걸 그는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바람'을 찾아 떠나고 싶었지만
그가 '바람'을 찾는 것처럼 그들 또한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그의 타는 의지도 깔끔하게 꺼버릴 수
있는, 사랑스러운 물의 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골치 아플 거야."
게다가 귀찮은 '대지의 기사'은 넬피엘을 발견하는 즉시 '역사의 고리'와의 싸움으로 끌어드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난 이제 어리지 않다."
지금은 분위기, 사상, 감정 등에 휘말리던 넬피엘이 아니었다. 그가 발하는 힘은 인간들과 어울리기에는 허락되지
않은 정도의 것이었다. 턱을 쓰다듬으며 멀리 왕성이 있을 수도를 바라보는 넬피엘의 눈동자에는 애수(哀愁)가 가득
했다.
툭!
"넬피엘!? 자네, 백작님의 심부름으로 수도에 간다고 하더니 왜 가다가 말고 멍하니 서서 폼을 잡는 건가?"
"에!? 파켄스 씨. 요즘 일은 잘 되십니까?"
"에이‥ 별로야.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이 어째 위험스러운 분위기가 풍기지 않는가. 덕분에 사람들이 돈을 쓰려고
하지를 않아. 꽁꽁 숨겨놓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어."
넬피엘은 힐끔 서있는 장소를 내려다보았다. 빨리 수도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쳤고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
다.
"후훗! 이거 위험하겠는데요. 빨리 갔다 와야겠어요."
"어, 그, 그래. 어서 가봐."
어색하게 파켄스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신경쓸 틈이 없다고 판단한 넬피엘은
걸음을 재촉했다.
"저 친구는 여전히 사람을 녹아나게 만드는 군."
그 날, 식지 않는 얼굴빛으로 집에 들어간 파켄스는 부인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으며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 편 몇 시간 후, 넬피엘은 길을 가다가 말고 다시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 곳은 마나이츠의 저택이 자리한 마을에
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의 침묵을 참지 못하는 존재가 있었는데 슬쩍 보아도 험상궂은 인상을 가장 사내였
다.
"이봐, 젊은이. 이제 고민하고 어서 결정을 하라고. 동행세를 내고 여기를 지나갈 건지 아니면 다시 마을로 돌아갈
건지‥."
아무래도 사내는 소년이 금전적인 문제로 고민한다고 생각했는지 제법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넬피엘은
전혀 그를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서쪽인가? 바람이 모여드는 곳은?'
"이봐, 젊은이. 어서 결정을 하라니까."
"좀 조용히 해보세요."
"뭐!?"
사내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넬피엘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노려보며 말했다.
"얼마면 될까요?"
"‥‥."
"이백? 삼백? 오백이면 되겠죠? 요즘은 물가가 안 좋으니까. 그럼 이만.
휙. 돈주머니를 던져주고 넬피엘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자 사내는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수풀 속에서 걸어나온
사내의 동료가 주머니를 열어보더니 말했다.
"대단하군. 정확하게 오백이야."
넬피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는 다른 음유술사들을 꺼리면서도 '바람을 노래하는 이'에 대해서만큼은 호기심
을 참지 못했다. 불꽃의 업을 지녔던 존재들이 몇 천년을 기다렸기 때문일까. 그는 소리없이 공간 자체를 넘어서 이
동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느낌이 들었다. 나무 위에 앉아서 마나의
막으로 기척을 막은 그는 살짝 고개를 빼밀고 사태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호오‥. 저 친구들은‥."
잊을 수가 없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의 적으로서 시간을 공유해왔으나 그래도 몇 년이라는 시간동안 얼굴을 맞댔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흠, 노리스와 츠바틴이 왜 저 쪽에 가있는 거지? '역사의 고리'를 탈퇴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뭐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넬피엘은 흥미롭게 상황을 주시했다. 곧 있어 그가 기대하는 구경거리가 펼쳐졌다. 마법사 무리 측에서 공격을 시작
한 것이다. 상대도 가만히 당할 리는 없었으므로 반격을 개시했고 선두의 전투가 전체로 확산되면서 숲은 마법의
빛과 검들의 충돌음으로 가득 차버렸다.
과연 싸움구경은 재밌었다. 넬피엘이 가진 소멸의 의지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두 무리는 부
상자 없이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손에 땀이 일어날 정도였다. 보를레스라는 사내와 바크호라는 남자
는 서로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검을 휘두르는 게 척 보아도 꽤나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젠티아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한 수준들이군.'
그런데로가 아니라 두 검사의 실력은 분명 상위급이었다. 주위 수풀에 숨어있는 어쌔신들이 껴들지 못할 정도로. 다
만 넬피엘의 눈이 특이할 뿐이었다. 하품을 하면서 그는 크고 둥근 눈동자를 뒤굴뒤굴 굴렸다. 애초에 관심 대상이
었던 '바람을 노래하는 이'를 감지해보았지만 대상의 의지만 느껴질 뿐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이래가지고는 도와줄 수도 없는데‥. 그냥 가버릴까?'
그나마 넬피엘의 흥미를 자극하던 검사들의 싸움은 바크호의 우세로 점점 보를레스는 방어에 급급했다. 자고로 싸
움은 치고 박고가 제격이지, 한 쪽에 일방적이라면 그저 구타에 지나지 않았다. 보를레스의 패배에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이 살벌하게 달려왔는데 넬피엘은 이미 여인이 마녀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주위에서 밀
집되어야 할 마나가 그녀에게서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전 그와 상대했던 마법사, 로진스에 뒤지지 않
는 마력이 느껴졌으니 마계의 마나를 사용하는 마녀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특이한 그룹 인원들인 걸!?'
어렵지 않게 눈에 보이는 마녀와 드워프, 그리고 막 보를레스를 치료하기 시작한 소녀는 인어였다. 몇 년전 '역사의
고리'와 겨루며 수많은 종족과 상종한 넬피엘이었지만 인어는 육지의 종족에 대해 극심한 혐오증에 시달리고 있는
정신병자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천적이라는 인간,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생체실험 정신을
갖추고 있는 마녀와 함께 다니고 있다니‥.
'아무래도 봉인에 갖혀있는 동안 세상이 꽤 변했나!?
책이라도 읽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 넬피엘. 그는 곧 자기만큼이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로진스
의 불꽃 튀기는 마법에 혀를 찼다.
"쯧쯧‥. 저 기술은 아직도 변함이 없군. 상투적이고 구식인데다가 화력(火力)에 비해 효율도 없어서 구질구질하기
까지 하군."
넬피엘이 졸린 눈을 비비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만약 로진스가 들었다면 당장 달려와 나무 째로 바비큐를 만들었을
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마법사은 고지식한 인물'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말은 정답이어서 로진스의 마법은 아
직도 마법사들에게 전설처럼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환호성과 경탄이 끊이지 않는 걸 보니까 말이다.
그에 맞서는 마법은 골렘과 동결마법이라는 평범한 종류의 주문이었지만 전문직이라고 할 수 있는 마녀와 인어가
힘을 함치자 효과는 몇 배의 상승작용을 가져와 불새에도 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넬피엘이 추구하는 개성이 넘치
는 마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의 호감도가 약간 상승했고 넬피엘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탐색하듯 두 여
인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주시했다. 동시에 파마리나와 레스난의 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녀들이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평범하지 않은 출신의 두 여인은 그들만의 독특한 마나 분야(?)에서는 일가견을 자연적으로 쌓고 있었기에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대륙의 5대 마법사에 뒤지지 않는다는 '신비의 고리'의 수장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힘겨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로진스가 마력(魔力)을 높이고 마법사들이 바람은 일으키자 넬피엘은 쓴웃음을 지
었다. 사자가 여우를 잡는데 늑대까지 사자를 도우니 어떻게 상대가 되겠는가. 보기만 해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
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정령술로 바람을 일으켰지만 밀리기 시작한 마력의 전세(戰勢)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새카맣게 타버릴 두 여인이 넬피엘의 뇌리 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그의 상상이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마법사들의 바
람이 막혀버린 것이다. 그것도 그들의 숲 전체를 감싸안고 대기(大氣)조차도 벗어나지 않는 거대한 의지에‥.
"뭐, 뭐야!? 이건?"
마나에 친근한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압박감, 특히 의지에 민감한 음유술사는 이를 악물고 경악성을 토했다. '불
꽃의 소멸'이라는 의지가 가장 파괴적이라고는 하나 바람만큼 거대하고 광범위할 수는 없었다. 넬피엘로서는 처음
으로 느껴보는 존재감에 잠시나마 몸을 떨었다.
'저 사람인가? 녀석과 싸운 이후 이런 존재감은 처음이군. 하긴 녀석은 세일피어론아드의 생물이라고 볼 수 없었으
니까.'
흥미로움으로 넬피엘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는 넬피엘의 의지에 노리스가 무언가 색다른 심적 변화를 겪고 있
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가늠 하는 듯 두리번거리는 노리스의 눈동자. 그의 이빨이 서
서히 드러나는 순간, 넬피엘은 미소지었다.
'어느 쪽이지? 저 남자의 검 끝이 향하는 방향은?'
곧 정해질 것이다. 그리고 검 끝은 망설이지 않고 적이 된 상대를 베겠지. 서서히 노리스의 손이 검자루를 잡아갔
다.
* * *
"츠바틴, 혹시 내가 자네의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하더라도 용서하길 바란다."
검은 뽑은 노리스는 혹시나 츠바틴이 반대를 할 게 두려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츠바틴의
음성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자 그는 피식 웃었다. 노리스의 옆에서 걸어가며 츠바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훗! 네 덜떨어진 생각 정도는 예측하고 있다고."
"그럼 죽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아아아앗!"
노리스의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상대는 전혀 예측하지 못해 눈이 커지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쇄기를 박듯이
노리스가 외쳤다.
"죽어라! 음유술사여! '바람을 노래하는 이' 시즈 세이서스!"
35악장 만남은 불행일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4)
"츠바틴, 혹시 내가 자네의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하더라도 용서하길 바란다."
검은 뽑은 노리스는 혹시나 츠바틴이 반대를 할 게 두려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츠바틴의
음성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자 그는 피식 웃었다. 노리스의 옆에서 걸어가며 츠바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훗! 네 덜떨어진 생각 정도는 예측하고 있다고."
"그럼 죽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아아아앗!"
노리스의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상대는 전혀 예측하지 못해 눈이 커지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쇄기를 박듯이
노리스가 외쳤다.
"죽어라! 음유술사여! '바람을 노래하는 이' 시즈 세이서스!"
완전한 허점이었다. 뛰어난 지혜를 가진 로길드조차도 볼 수 없었던 시즈의 표정, 어찌 보면 노리스는 로길드 일생
의 목표를 가볍게 해낸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려고 할 때 전부터 노리스와 츠바틴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존
재가 있었다.
캉!
"꺄악!"
"아리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노리스의 공격을 막아낸 사람은 아리에였다. 노리스의 공격이 워낙 강해 바로 검을 놓치고
뒤로 튕겼지만 그로 인해 시즈가 피할 틈이 생겼다. 옆으로 급히 몸을 굴리는 시즈. 그러나 위기는 끝이 아니었다.
노리스에 이어서 민첩하게 다가온 츠바틴은 막 일어서며 자세를 잡는 시즈에게 한 움큼의 가루를 뿌렸다.
"크윽!"
바람의 의지를 일으키고 있던 시즈는 바람에 실려서 날아온 가루를 흡입하고 가슴을 움켜잡았다. 노리스의 검을 바
람의 장벽으로 막으려고 했는데 츠바틴은 그 예측을 뛰어넘어 바람에 잘 퍼지는 독약의 가루를 뿌린 것이다. 황급
히 바람을 멈췄지만 이미 독은 몸에 영향을 미쳐 눈앞이 어지럽기 시작했다.
"호오‥. 저런 방법이 있었군. 풍향을 가늠해서 바람에 휩쓸리는 존재로 공격하다니‥."
츠바틴의 공격에 로길드가 경탄했다. 옆에서 파마리나와 마력을 겨루던 로진스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 친구
로서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츠바틴의 전투술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어째서!?"
시즈는 독에 당한 것보다 노리스와 츠바틴에게 공격을 당했다는데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행복
하게 만들어주던 이들이었는데‥. 그렇다고 망연자실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뒤로 구른 아리에의 무사를 살피며 그
가 반문하자 노리스는 고소를 짓고 검을 바로 잡았다.
"나도 그렇게 묻고 싶구나, 시즈. 설마하니 네가 '마땅찮은 시즈'이며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러냐고? 내가 복수하길 원한다는 사람에 대해 말했었지? 그가 '불꽃의 춤을 추는 이'라면!? 이제 이해가
가나? 죽어! 나, '원의 힘'의 사령관 노리스가 널 죽이겠다."
노리스의 검에 어린 살기(殺氣)는 진짜였다. 피하지 않으면 두 쪽이 날 기운이 시즈를 덮쳤다. '바람을 노래하는 이'
가 다시 역사 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지려는 순간이었다. 검을 막는 긴 할버드가 없었다면.
"뭐 하는 거냐? 시즈, 어서 일어나!"
작은 키에 보통인간보다도 기다란 할버드를 힘차게 휘둘러 노리스를 뒤로 물러서게 한 토루반은 얼굴을 한껏 찌푸
렸다. 겨우 한 번 부딪혔을 뿐인데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저려왔다. 한 편, 노리스는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아리에
에게 막혔을 때처럼 망설이고 내려친 게 아니었다. 다시 아리에가 막았다면 그녀가 가진 두 자루의 망고슈가 드워
프가 만든 명품이라고 해도 단숨에 두 쪽이 났을 것이다. 물론 드워프가 힘이 강하긴 하지만 체격도 작다. 무게감이
있는 노리스의 일격을 막아낸 것도 아니고 완전히 튕겨냈으니 그가 놀랄 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공격하
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달랐다.
'도대체 저 할버드는 뭐지?'
긴 몸체, 거대한 날. 보통의 할버드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솜씨 좋은 드워프는 커다란 무기를 나누어서 들고 다니
다가 위험해지면 조립해서 쓴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므로 당황스럽진 않았다. 다만 몸체 끝부분에 달려있는 원통의
물체가 신경쓰였다.
"츠바틴, 뭔지 알겠나?"
"글세, 암기 종류가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정면으로 맞서지 말고 측면으로 상대하는 게 좋을 거야."
"측면이라‥. 예상외의 복병이군."
실력자들의 싸움에서 얼마나 피하는 시간을 단축하고 상대의 허점을 노리느냐가 승부의 갈림길임을 생각할 때 정면
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약점이었다.
"복병이라니, 우리가 할 소리군. 어서 덤비게. 설마 겁을 내는 건가?"
"웃기는 군."
노리스가 발끈하여 공격을 시작하자 얼마 되지 않아 토루반은 위기에 몰렸다. 조금만 방어가 늦으면 토루반의 짧은
목이 떨어질 찰나, 츠바틴이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노리스는 방심하여 토루반의 할버드
가 정면을 향했다는 걸 주의하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해도 극적인 상황이 계속되면 냉정할 수 없는 법이지."
"노리스, 피해!"
눈앞이 번쩍했고 귀에는 츠바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를 악물고 구르는 순간 복부에 강한 충격이 왔다.
"커억!"
마법사들도 싸울 생각을 않고 토루반을 멍하니 주시했다. 키득키득하고 전설에 나오는 마왕처럼 웃어대는 토루반의
할버드, 그 중에서도 몸체에 달려있던 원통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무럭무럭 솟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토루반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발을 가리켰다.
"흐흐흐. 어때? 내 짧은 다리로도 이 정도의 발차기는 충분하지."
"쿨럭! 쿨럭! 드워프들의 힘은 역시 무섭군."
보통 타격력의 차이는 무게와 속도, 그리고 길이다. 짧디 짧은 드워프의 다리에서 인간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노리스의 복부를 넘어서 내장에까지 타격을 입힐 타격력과 속도라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짐작이 가능했
다. 하지만 정말로 드워프의 무서운 점은 바로 도구를 개발하는 기술.
"그게 바로 화염의 칼날이로군."
"맞았어. 드워프들이 집안에 하나씩 숨겨두었다는 화염의 칼날이지."
35악장 만남은 불행일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5)
예로부터 신화나 영웅의 전기에는 전설적인 무기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제조자는 대부분 드워프다. 아직까지도
드워프의 무기들은 동방의 무기를 제외하고는 서방에서는 부르는 게 값인 보물이었다. 그러나 세간에 그들의 예술
품(?)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게 있었는데 전설에서 나오는 불을 뿜고 우레를 부르는 마법 무구들은 절대로 드워프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무기에 마법사들이 주문을 주입시긴 게 있기는 하지만 드워프는 마법을 모르
는 종족이었다. 아니, 모르기보다는 무시했다. 인간처럼 이익을 계산할 줄 아는 존재라면 좋은 기술이나 능력을 받
아드리는 게 당연했으니 드워프들이 마법을 익히지 않는데는 그에 뒤지지 않는, 오히려 압도하는 기술이나 능력을
가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금속과 보석을 다루는 기술도 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지만 드워프들을 지키는데는 부족
함이 있을 것이다.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니 정말 굉장하군요."하고 로길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드워프들의 최대 무기는 바로 화
약이었다. 발명한 동방에서조차 사용하기를 금지하고 있다는 화약은 서방에서는 대부분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강철과의 싸움으로 동방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던 드워프들만이 화약의 개발기술을 훔쳐낼 수 있었는데
그들 역시도 화약의 발전이 미칠 영향이 두려워 사용을 극히 제한했다. 작은 사용범위 중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화
염의 칼날이라고 불리는 원통이었는데 바로 현재 토루반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긴 장대나 무기에 달아 사용하는 것
으로 화염방사기라고 볼 수 있었는데 50cm 정도의 불꽃 중심이 눈이 부신 밝은 빛을 띄는 걸 생각할 때 얼마나 뜨
거울지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한 편, 할버드의 원통에서 토해지는 불줄기에 노리스는 연신 뒤로 물러서기 바빴다. 불줄기는 어떻게 칼로 상대할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피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폭염(暴炎). 멀찍이 피
하는데도 노리스의 머리카락은 이미 불에 그을렸고 상반신은 온통 화상 투성이었다. 아마도 토루반의 검술 실력에
맞춰 빠르게 휘둘러지는 불줄기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릴 게 분명했다.
"화염의 칼날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요. 바크호, 다시 나서주셔야 겠는데요."
로길드의 여유 있는 모습이 바크호는 가늠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자신이 나서서 노리스와 함께 협공을 한다고 해
도 화염의 칼날을 지닌 드워프에게서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었다. 그런 바크호의 고민을 짐작이라도 하듯 로길드는
말을 이었다.
"싸워서 이겨달라는 게 아닙니다. 시간을 끌어주었으면 하는 거에요. 드워프의 현자가 사용하는 게 화약이라면 '화
염의 칼날'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러다가는 '원의 힘' 수장이 '역사의 고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생을 마감해버리겠군요."
그의 말대로 바크호는 토루반의 후방에 서서 화염 줄기가 계속 노리스에게 몰아치지 않도록 서서히 압박했다. 자존
심이 상했는지 노리스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츠바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하는
데 열중했다.
그 옆에서는 아직도 아이스 고렘과 불새가 힘을 겨루고 있었는데 시즈가 바람의 원조를 멈추자 마법사들의 힘에 의
해 불새의 불이 거세게 골렘의 얼음을 녹여댔다.
치이이익!
"크윽! 밀리겠어."
"이미 밀리고 있어."
악에 바친 파마리나의 외침에 카이젤이 무미하게 대꾸했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그들의 대조되는 표정과 말을 주고
받는 모습들은 익살스런 연극을 보는 듯 하여 레스난은 키득하고 웃고 말았다. 그러자 파마리나가 손으로 종이 구
기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 빌어먹을 생선이, 지금 죽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오냐!? 당장 보를레스 갔다버리고 달려와서 도우란 말야!"
"아, 알았어요."
레스난이 낑낑거리며 보를레스를 끌고 시즈와 아리에의 곁으로 가는 모습은 마치 애완용 강아지가 커다란 투견(鬪
犬)을 끌고 가는 듯했다. 혼신의 힘으로 바둥거려 겨우 보를레스를 옮기는데 성공한 그녀는 한 쪽 눈을 감은 채 입
술이 파랗게 변색되어 있는 시즈에게 물었다.
"괘, 괜찮아요?"
그녀의 말투가 공손하게 변한 이유는 방금 전 대기(大氣)를 움직이던 의지의 마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거
대하여 거역할 수 없을 정도의 의지. 만약 시즈가 그녀에게 의지를 담아 명령한다면 과연 거절할 수 있을지 의심스
러웠다.
"별로 괜찮지 않은 듯 하군요."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여전히 담담하기는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중독되자마자 손끝이 보랏빛을 내기 시작했다. 공
기 중으로 흡입해서 이 정도의 증세를 나타내는 독분(毒紛)이라면 극약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즈의 입에서 독기
운 서린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후후‥ 처참하군."
"시즈‥."
아리에가 울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탐스러운 흑발을 그의 볼에 부비며 위로하는 것
이 시즈로서는 눈앞이 가리워지는 어둠에서도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고개를 드니 바크호와 노리
스를 불꽃의 칼날로 위협하는 토루반이 보였고 그 뒤의 심각한 얼굴의 츠바틴도 보였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로
길드도 보였다.
누구는 시즈에게 도움을 주었던 이였고, 어느 누구는 도움을 받았던 이였다. 잠시지만 생사(生死)를 함께 하던 사람
은 그를 자신을 죽이기 위해 머리카락을 곤두세웠고 생명의 은인(恩人)들은 검광(劍光)과 독을 뿌렸다. 그래도 증오
가 일지 않았다. 다만 자조의 웃음만 나올 뿐.
'그런 것이었습니까? 썩어빠진 사회의 근본을 부숴 버린다는 게‥. 세상을 바꾼다는 의지는 이토록 힘겨운 것이었
습니까? 은인(恩人)이 검을 겨누고 지인(知人)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내가 그토록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시즈!?"
시즈의 기색이 이상했는지 아리에는 그의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불안한 시선을 쳐다봤다. 피식하고 웃음을
흘린 시즈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역시 난 '마땅찮은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군요. 가요, 아리에."
"에!? 어디로?"
"이들과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시즈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사람은 로길드 뿐이었다. 눈동자가 풀린 걸로 보아서 중독된 게 분명했는데 무언가
를 하려는 듯 제법 힘차게 몸을 일으키자 그는 긴장했다. 다른 이들에게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그 주의에 귀를 기
울일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할 수 없군. 내가 나서야 하나?'
로길드는 몸이 약한 주제에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마법을 익히긴 했지만 그렇게 뛰어난 수준도 아닌지라 지금 그
가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간단한 마력탄이었다. 하지만 손가락 마디마다 끼어있는 반지의 증폭력을 한꺼번에 사용
한다면 충분히 독에 정신을 못 차리는 시즈를 상처 입히기 충분했다.
파마리나, 카이젤, 레스난이 힘을 합쳐 겨우 로진스를 막아내고 있는 것에 비해 토루반은 두 명의 실력자를 상대로
몰아쳐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그의 속마음은 다른 동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이러다가는 이 놈들을 해치우기 전에 화약이 모두 떨어져버리겠어.'
아마도 상대가 '화염의 칼날'에 대해 파악했다고 생각됐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화상을 입으면서 억지로 견디지
않을 것이다. 땀이 등을 매끄럽게 쓰다듬었다. 할버드에서 쏟아지는 폭염(暴炎) 때문이 아니다. 식은땀이었다. 화약
이 다하면 이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막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누군가 옆으로 접근하는 걸 느끼고 불을 뿌리려는 토루반. 그러나 이미 상대는 그의 어
깨를 짚고 있었다.
"토루반. 이제 되었습니다."
"시즈. 무슨 소리인가?"
납득할 수 없다는 목소리를 크게 높이면서도 토루반은 할버드를 거둔 상태였다. 소리는 없었지만 바위가 내리누르
는 듯한 존재감. 마치 깊은 바다 속에 들어갔을 때 온몸으로 수압을 받는 것 같은 무게가 귀여운 소녀에게 부축되
어 가까스로 서있는 청년에게서 느껴졌다. 싸움을 멈춘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긴장된 눈초리로 시
즈를 주시할 뿐.
시즈는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함께 꿈을 꾸고 싶었습니다. 함께 날아오르고 싶었습니다. 나의 바램이 누군가는 좋지 않게 받아드리리라고 생각했
지만 현실은 그 이상이군요. 어쩌면 나는 이 곳에 오지 않았어야 했을 지도 모르겠군요."
한숨, 그리고 그는 입을 벌려 소리를 높였다. 노래를 불렀다.
가끔은 삶이 너무 조용해... 내가 살아있긴 한 걸까...
아무 일 없겠지... 또 오늘 하루도...
모두들 그런 상상을 할까..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기지개를 펴다가... 날개가 돋아나...
다들 사는 대로 따라서 산다는 게 난 정말 싫었거든...
항상 꿈꿔왔던 바램은 나의 작은 노래로 세상을 말하는 것...
함께 해준 친구들과... 꿈을 믿는 사람들과..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어...
움츠렸던 너의 어제... 불안하던 너의 미래...
오늘만은 활짝 펴보는 거야...
눈에 보여지는 것들만 쫓으면서 사는 건 싫었거든
항상 꿈꿔왔던 바램은 나의 작은 맘으로 세상을 비추는 것
웃고 있는 사람들과 울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웃고 눈물 흘리고 싶어
쌓여있던 걱정들과 지루했던 한숨들도 이제 모두 날려 버리는 거야
- 신승훈 〈비상(飛上)〉
35악장 만남은 불행일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6)
경쾌한 노래였다. 그러나 시즈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어 오히려 더 슬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화려한 거미줄에 걸려
지쳐버린 곤충의 미약한 요동처럼 작은 떨림의 느낌이 베어 나오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검을
들었던 이도, 주문을 외우던 이도 가만히 서서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 청년의 꿈을 바라는 노래, 그리고
희망과는 다른 현실에 안타까워하는 목소리. 시즈의 머리카락이 새하얀 깃털처럼 은백의 빛깔이었기 때문일까? 노
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이 바람에 날리는 깃털을 잡지 못하고 우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
피브드닌은 노래와 함께 풍겨오는 따스한 바람에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들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고 싶어하지만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은 없다. 그렇게 볼 때 수많은 꿈과 수많은 희
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만남은 불행이 아닐까?'
그의 귓가에 시즈의 노래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건 작은 절규였다.
'윽! 몸이!
모두가 노래에 빠져있을 때 로길드는 발 밑이 허전해지자 깜짝 놀라서 버둥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잡히는 것은 없
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더욱이 아무리 목청에 힘을 줘도 소리가 나지 않았
다.
'침묵의 주문인가? 헌데 어떻게 시즈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지?'
마법사들과 숲에 숨어있던 인원까지 합치면 100여명에 가까웠지만 시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노래를 부를 뿐이었
다. 곤란했다. 허공에서는 운신(運身)하기도 힘들어 검사는 균형잡기에 바빴고 마법사들은 주문도 외우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결과를 낳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주문을 외울 수 없다고 마법을 쓰지 못하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어쩌면‥ 하는 마음에 반지에 응축 해두었던 마나의 힘. 이것이라면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바위도 뚫을 정도는 될 것이다. 힘준다고 더 강한 마력탄도 아니었지만 로길드는 손가락에 힘을 잔뜩 주고서 시즈
를 겨냥했다.
웅 ―
소리는 없었다. 오직 고막을 울리는 파공의 울림은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는데 열중하고 있는 시즈 바로 앞에 순식
간에 도달했다. 그러나,
‥.
로길드가 기대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없었던 것처럼 마력의 구체는 시즈의 머리 앞에 이르러 비누방울이 터
지듯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부릅뜬 '역사의 고리'들. 시즈는 방금 전 자신에게 무
슨 일이 생길 뻔했는지 아는 듯 모르는 듯 담담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이상(理想)은 모두와 함께 걸어가는 게 아니라 모두를 물리치고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허나‥ 그렇다고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서있는 이유가 '마땅찮은 이'가 되기 위해서라면 정말
로 '마땅찮은' 존재가 되어 보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즈 일행의 모습은 천천히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로진스를 비롯한 마법사들과 남은 검사들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발에 닿는 게 없어 그저 허우적대는 걸로 보였다.
"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흘러 시즈들이 사라지고 한 시간이 되어서야 허공에서 풀려난 로길드는 츠바틴에게 다가가 물었다. 멍하니
시즈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던 츠바틴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을 데리고?"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는 공중에서 떨어질 때 착지를 잘못하여 다리가 삐거나 부러진 마법사들을 가리켰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쓱 훑은 츠바틴은 떨어질 때 엉덩이를 찌었는지 마사지에 열중하고 있는 로진스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길래 마법사들, 운동이나 좀 시키지!"
"말은 쉽지. 다들 주문 연구하기도 바쁜 몸이라고!"
"이봐, 이봐. 츠바틴, 로진스. 다툴 시간 있으면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는 거나 도와주지 그래!?"
방금 전 츠바틴은 자신이 눈동자에 품었던 것을 노리스의 표정에서 발견하고 얼굴이 시뻘게졌다. 로진스도 다를 바
가 없었다. 10 년 전에는 이 검 밖에 모르는 친구의 무식함을 흉보곤 했는데 그 상대에게 한심하게 보이다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후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티격대며 마법사들에게 다가가는 츠바틴을 바라보던 노리스는 공기 속으로 사라졌던 사람들
이 있을 숲 건너 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츠바틴‥ 무리하는 군. 그리고‥ 나 역시‥.'
그가 검을 휘둘렀을 때 시즈의 눈동자가 아직도 뇌리를 떠돌았다. '왜?' '어째서?'라는 의문이 유성우처럼 쏟아지던
눈빛. 모른 척, 당연하게 검을 휘둘렀던 팔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하지만 마지막 시즈의 결연한 표정이 떠오르자 그
는 약간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잘 된 거야.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서로가 믿는 곳을 향해 나아가기를 주저할 테니까."
중얼거린 노리스는 부상자들을 치료하러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유심히 관찰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길드였다. 노리스 일행이 시즈를 공격한 것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엿들었던 것이다.
"배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나저나 누구였지? 나의 마력탄을 막아낸 자는‥. 분명히 시즈님은 아니었다. 도
대체 누구였을까. 침묵의 마법에 의해 주문은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나의 마력탄은 반지의 증폭으로 인
하여 5써클에 달하는 파괴력을 가진 상태였는데 쉽게 막아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바람을 노래하는
이'의 마법을 무효화하면서 5써클의 마력을 막아낼 수 있는 자!? 제발 나의 예상이 맞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