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1)
대륙 중북부에만 존재한다는 계절, 가을. 그 가을의 단풍은 소문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때가 지나서 그럴 것이다. 이
미 가을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기온은 차가웠고 바람은 매서웠다. 겨울이 다가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숲
의 동물들은 벌써 두꺼운 털옷으로 갈아입은 채 눈이 내릴 때를 대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날 내리는 것은 눈이 아니었다. 롤크 산 중턱의 회색 느티나무에서 보금자리를 차린 다람쥐는 생전 경험
하기 힘든 광경을 본 자신을 의심했다. 올해 가을은 저장고가 가득 찼는지라 내년 봄까지, 아니 여름까지 늦잠을 잔
다고 해도 먹이 걱정은 없었기에 특별히 새하얀 눈을 보고 겨울잠에 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기다리던 눈 대신 거대한 물체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들은 가지각색의 괴상한 소리마저 포함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으악!"
나무에서 도토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칙-다람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법칙이다 -을 괴물체들이라고
거스를 수는 없었다. 몇몇은 다람쥐의 동족이라고 할만큼 날렵하게 착지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괴상한 소리
를 내지르며 떨어지는 물체일수록 바닥에 강렬하게 엉덩이를 들이박았는데 뒹굴뒹굴 구르며 부딪힌 곳을 문질러대
는 게 매우 추해 보였다. 특히 까치 꼬리 깃털처럼 가느다란 수염을 코밑에 달고 있는 두 마리는 거친 경련까지 일
으켰는데 그 모습에 다람쥐는 너무 잠을 안 자 헛것을 본았다는 자괴심마저 갖을 정도였다. 그 후로 회색 느티나무
의 다람쥐는 잘 시간을 꼬박꼬박 지키는 착한 다람쥐(?)가 되었다.
"으아아‥."
정말이지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아팠다. 볼일 보는 아낙처럼 엉덩이를 까고 앉은 토플레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
약(秘藥)을 물에 고아서 조심스럽게 환부에 발랐다. 엄청나게 쓰리고 아픈 게 마치 동요에서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
아 있을 때 느꼈을 뜨거움이 연상됐다.
멀리서 그 신음 소리를 듣고 있던 피브드닌은 있는 친구 놈이라고 나이값도 못하는 소리나 지르고 있는 토플레가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는 삐걱거리는 관절 하나 없이 멀쩡했다. 참고로 떨어질 때의 토플레와 피브드닌
은 제법 가까웠다. 다만 팔길이의 문제랄까. 토플레가 닿지 않은 파마리나의 지팡이에 허우적거리던 피브드닌의 손
이 닿았다는 게 현 사태의 이유였다. 덕분에 승합용 지팡이가 되어버린 파마리나의 지팡이는 현재 과도한 출력으로
비실거리는 상태였다.
"그러지 말고 블리세미트한테 치료를 받지 그래? 매우 추해."
"그랬으면 나도 좋겠지만 그 꼬마 사제는 지금 시즈를 치료하느라 바빠. 그 츠바틴이라는 빌어먹을 매복자가 뿌린
독이 시즈가 바람을 움직이던 차에 흡입되어서 기관지가 심하게 중독되었어."
"그, 그런데 네 녀석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어서 가서 시즈를 봐줘야 할 게 아니야?"
"이미 보고 왔어.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다고. 다만 약효가 독기(毒氣)와 싸울 때 시즈의 생명력이 급속히
감소되기 때문에 꼬마사제가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 토플레는 다시 고약을 바르는데 열중했다.
'그래도 역시 의사는 의사인 모양이군.'
그래도 역시 못 볼 것은 못 볼 것인 모양이다. 피브드닌은 수풀에서 끙끙대는 소리를 듣기가 싫어 시즈가 있는 곳
으로 자리를 피했다. 이미 다른 이들도 시즈의 상세 때문에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운데서는 블리세미트의
성력(聖力)에 의한 초록빛 광채가 무지개처럼 둥글게 반원을 만들며 맴돌았다.
"상태는 어때?"
"저야 뭐 원래 튼튼하지 않습니까? 하하핫!"
"자네말고 시즈 말이야. 자네는 상관도 안 하네."
냉정한 그의 어투에 보를레스는 가슴에 깊은 상처를 얻고 말았다.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지며 슬픈 표정을 지은 사
내는 중얼댔다.
"쳇, 다들 난 관심도 없군. 나도 부상자라고."
"뭐라고 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아마도 그렇게 심각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다들 저렇게 여유가 있는 걸 보면 말이죠."
다들 여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시즈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블리세미트로서는 죽을 지경이었다. 보통은 성력
(聖力)으로 인한 생명술을 행할 때 인간은 새로운 기운을 받아드리기 보다는 배척하는데 시즈는 오히려 마꾸 끌어
당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기와 약효과 싸우는 그 부가재료이기 때문인가보다 하고 힘을 쏟고 있었지만 사실은
시즈의 몸에 산재되어있는 에릭사의 기운 때문이었다. 사실 생명력으로 치자면 시즈는 독과 토플레의 치료약이 평
생 몸 속에서 싸운다고 해도 끄덕 없었다. 다만 기(氣)나 마나mana는 강한 쪽이 약한 쪽을 끌어당기기 때문에 강력
한 에릭사의 기운에 블리세미트의 성력이 휩쓸려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를 알 리가 없는 소년은 생명에 대한 애착
이 강한 사제답게 혼신을 다해 생명술을 행했다. 보통 생명술은 환부에서 약한 성광(聖光)이 이는 정도다. 그런데
시즈와 블리세미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녹색 광체는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물론 필요 없는
노력이었지만‥.
"이제 거의 되었습니다. 약간의 독기운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곧 회복될 거에요."
잠시 후 숨을 거칠게 내쉬며 시즈로부터 떨어진 블리세미트의 여린 어깨를 토루반은 껄껄 웃으며 두들겼다.
"허허헛. 블리세미트, 너무 무리하지 말게나."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좀 도와주시지 그랬어요?"
"자네는 신의 축복을 넘치게 받는 사제가 아닌가. 우리는 나눠줄 만큼 넘치게 받지는 못했거든. 하하하. 게다가 시
즈는 여기서 죽을 놈이면 예전에 죽었을 거라고."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불안했던 토루반. 피식 웃으며 시즈의 곁을 떠날 줄 모르는 아리에를 바라보았다. 그
녀는 얼마나 몸을 졸였는지 아직까지도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이미 독으로 안색이 처참할 만큼 썩은 빛을 발
하던 시즈는 착지를 하자마자 비틀거리더니 곧 기절해버렸고 그녀는 얼마나 놀랐던가. 물끄러미 제 색깔이 돌아온
청년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에을 토루반이 팔꿉치로 쿡쿡 찔렀다.
"걱정마. 중독은 거의 나았으니까. 저 붉은 입술에 언제든지 입을 맞춰도 상관없어.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토루반!? 난 그냥‥."
"자자‥ 내가 다 안다니까. 많이 무서웠지, 아리에? 연인의 입이 시퍼렇게 변하면 왠지 껄끄러울 거야."
"그게 아니라고요!"
아리에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러자 토루반은 더욱 재미를 붙이고 놀려대기 시작했
다. 거기에 파마리나까지 가세하자 그녀는 귀는 물론이고 목까지 빨게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게 아니긴‥ 평소에 얼마나 닭살스럽게 구는지. 남자가 없어서 이렇게 서러울 줄 누가 알았겠어."
"파마리나, 남자가 없다니! 난 남자로 안 보인단 말입니까? 이 근육이! 멋진 상체근육이 안보입니까?"
"보를레스, 붕대감긴 근육은 별로 매력이 없어."
"윽!"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건 사투를 했다는 걸 잊은 걸까? 그들은 금새 서로를 잡고 농담을 건네며 웃어댔다.
잠시 후, 깨어난 시즈는 눈을 뜨자마자 눈물을 일렁이며 품에 안겨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리에의 행동에 어리둥절
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리에."
"훌쩍! 훌쩍!"
토루반과 파마리나의 합동공격을 아리에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려보는 시즈의 눈길을 피해서 사람들은 고
개를 돌렸다. 그 중 몇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크게 투덜거렸다.
"마누라가 보고 싶군."
"남자를 찾아야 돼, 남자를‥."
"쳇! 나같은 남자도 드물다고!"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2)
그런 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었으니 바로 인어인 레스난이었다. 그녀는 시끌벅적한 육지의 종족들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무슨 붕어 아가미도 아니고 저렇게 쉴 새 없이 뻐끔거린담.
레스난은 그보다 유일하게 자신의 관심을 끄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녀는 현재 수풀에 숨어서 몰
래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청색 머리카락은 녹색의 풀잎에 가려져 은신(隱身)하기에 편리했지만 상대는 어떻게
알았는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뭘 보는 거야? 남자 소변(小便)보는 거 처음봐?"
"아! 네. 처음 봐요."
힘차게 대답하는 그녀의 기세에 카이젤은 일보다가 쓰러질 뻔한 위기상황을 겨우 넘겼다. 바지를 추스르며 뒤를 돌
아보니 레스난의 금색 눈동자는 호기심에 찬 고양이처럼 말똥말똥 그를 향해 있었다. 아무리 이종족이고 양성체라
지만 그 모습은 아름다운 여성이었기 때문에 이제 막 청년에 들어서고 있는 카이젤은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
다.
"왜 따라오는 거야?"
"그야‥. 저기‥ 따라가면 안 되는 거 에요?"
자꾸 발소리가 계속 뒤를 쫓으니까 짜증을 내며 소리쳤지만 레스난이 반문하자 카이젤은 할 말이 없었다. 조용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된 레스난은 이제는 아예 카이젤의 옆에서 함께 걸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 에요?"
"‥‥."
"어디 가는 거냐고요!?"
카이젤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는지 어떤 질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레스난은 정말로
붕어가 숨차서 아가미 뻐끔일 때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어디 가는 거 에요? 어디 가는 거 에요? 어디 가는 거 에요? 어디 가는 거 에요? 어디 가는 거 에요?"
수십 번을 늘어놓았을까. 결국 견디지 못하고 카이젤은 실토했다.
"사냥하러 가는 거야."
"사냥!?"
"그래. 아까 마차에 다 두고 와서 먹을 게 없다고. 다들 향락(?)에 정신이 없는데 나라도 먹을 걸 구해와야 하지 않
겠어?"
"음‥ 좋아요! 나도 도울 게요."
카이젤이 '안 도와줘도 되는데‥.'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인어인 레스난의 귀에 와 닿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풀벌레
소리처럼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카이젤이 골 아파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냥에 '도움'이라는 단어가 무성할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아니 익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레스난은
물통에서 뽑아낸 물방울로 화살을 만들어서 토끼를 비롯하여 꿩을 몇 마리씩이나 잡았는데 카이젤은 무안하게도 아
무 것도 잡지 못했다. 결국 식식거리며 숲 속으로 사라진 그는 그 때까지도 히히덕거리며 농담 건네기에 바쁘던 다
른 일행을 기쁘게 만드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이거‥ 멧돼지잖아!? 그것도 이렇게 큰 놈을 잡아오다니‥ 이런 놈들은 워낙 빨라서 도망치면 잡기도 힘들텐데‥.
게다가 꿩과 토끼까지 가지가지야!"
"흥‥."
콧날을 한껏 세우며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표정을 짓는 카이젤. 그러나 누가 알리요. 그가 레스난에게지지 않기 위해
서 바람의 정령으로 멧돼지를 탐색하고 땅의 정령으로 멧돼지의 공격을 막고 물의 정령으로 물대포를 쏘아대는 노
력을 했다는 것을‥.
그러나 자기를 이기기 위해서 카이젤이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걸 아는 걸까? 레스난은 사람 만한 멧돼지를 잡아오
는 그를 반짝이는 눈망울로 주시했고 이제는 아예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고기가 구워지자마자 재빨리
들어서 카이젤에게 바치는 것이다. 보고 있던 파마리나가 한마디했다.
"여기 눈꼴사나운 커플 하나 더 있었군."
"예?"
"한쪽이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것에 약간 문제가 있긴 하지만‥."
하지만 파마리나는 곧 그녀를 놀리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 레스난은 그저 큰 눈을 껌뻑이며 무슨 얘기하는 건가요?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스난은 일행 중에 유일하게 정령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잘 보이는 것뿐이었다. 아직 그녀에게는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미지의 것이었다.
오히려 레스난을 놀리자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리에였다. 정말이지 놀리는 기분이 살아나게 하는 여자였다. 불안한
기색인 그녀의 옆에서는 시즈가 먹는데 열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눈을 감자 서서
히 바람이 일어나며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겨울밤이라서 그의 따스한 기운이 섞인 바람은 일행에게 계속 유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낳았지만 시즈는 알 리가 없었다. 바람이 사그라들고 눈을 뜬 시즈는 태양의 옷자락만 남아
있는 하늘 아래의 나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오십시오."
시즈가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마법사들의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잠시 바람을 일으켰을 때였다. 바람은 그에게
동질적이면서도 극히 이질적인 존재가 근접해있음을 알렸다. 그것은 정말로 어느 순간 느껴진 것이라 시즈는 당황
했었다. 지금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 바람을 퍼뜨리니 이번에도 역시 상대의 기척이 느껴졌다.
일행은 시즈와 눈빛과 표정까지 비슷해져 그가 시선을 고정한 곳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늦가을의 붉게 타오르는
노을에 나무들마저도 붉게 보였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서 가만히 서있는 사람 또한 붉었다.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3)
"예!? 마나이츠 페르베이안 님이요?"
카이젤은 물론이고 토루반과 피브드닌, 심지어는 토플레까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나이츠라면 예전 살아있던 엘
시크의 헤트라임크와 함께 대륙에서 가장 유명했던 대마법사가 아니던가. 특히 실베니아인(人)인 카이젤은 눈에 가
득했던 경계심을 경애(敬愛)로 돌변시키고 열성적으로 되물었다.
정말이란 말인가? 이 붉은 색이 은은히 감도는 검은 정장을 입은 노인이‥. 솔직히 말해서 길게난 수염을 쓰다듬으
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노인이 입은 복장은 꼭 어느 귀족 가(家)의 집사들이나 입는 의상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즈가 저렇게 말을 하는데‥.
"반갑습니다. 아까 전에는 도와주신 덕분에 살았습니
다. 그 마력탄은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빙긋.
‥‥.
어색했다. 노마법사, 마나이츠가 지은 미소는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나 천진난만, 아니 상큼하다는 표현이 어울릴만
큼 신선한 것이어서 굉장히 어울리지 않았다. 시즈들은 침묵으로 그를 주시했고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장본인
은 서둘러 말했다.
"아하하‥ 비겁한 암습을 봐줄 수 없었을 뿐이라고. 아하하‥ 아하하!"
"그렇군요."
대답을 하면서 시즈는 '잠시 착각을 했었나보다.'하고 자신을 진정시켰다. 분명히 나무 아래서 그가 보았던 사람은
매우 젊고 멀리서 보기에도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게다가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 노을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이다 라고 말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한 마디로 눈을 의심했다. 더 이상 생각하면
마나이츠에게 실례라고 느꼈으므로 시즈는 회상을 정지시켰다.
한 편, 마나이츠, 아니 넬피엘은 무척이나 곤란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약간 도와주려고 했을 뿐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을 가볍게 찾아낸 이 청년.
'과연 바람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군. 이제까지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출현한 적이 없어서 그 능력에 대해서
는 전승되어진 내 기억 속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나저나 곤란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자신의 본모습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할 듯 싶어-혹시나 젠티아나 아릴을
만났다면 그로서는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되어릴 테니까- 주인님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연극이 서
툴렀다. 그것도, 무척이나.
"자네들을 찾는데 꽤나 고생했지. 텔레포트치고 그렇게 깔끔한 이동은 처음이더군. 마나의 흐트러짐조차 없다니‥.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찾지 못했을 거야."
그의 말에 아스틴 네글로드의 학자들은 얼굴이 어두컴컴해졌다. 마나이츠가 신성력으로 위치를 파악했다면 로진스
라고 못할 리가 없었다. 일행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노마법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 말게. 그들은 쫓으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쫓을 수 있었지만 쫓지 않았어. 게다가 높은 공중에서 떨어져서 부상
을 당한 마법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치료에도 바빴고."
"다행이군요.
"그런데 시즈라고 했나, 젊은이?"
"예. 그렇습니다."
마나이츠는 물끄러미 그를 살펴보다가 다짜고짜 옷을 벗겼다.
"으악!"
"가만히 있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마나이츠의 눈동자는 무언가 욕망에 타오르는 듯한‥이라는 것은 옆에서 보고 있던 아리에의
착각이었고 그는 시즈의 심장 부근에 손을 잠시 대었다가 떼고 일어섰다.
"어떤가?"
"‥‥. 괜찮은데요? 상쾌해졌어요."
"어떻게 여독(餘毒)을 없앤 거죠?"
신성력으로도 소용없었고 토플레도 완전히 해독할 수 없었던 독을 가볍게 없애자 호기심을 표한 사람은 블리세미트
였다. 그의 시선에는 호승심마저 보였는데 토플레에 이어서 치료사로서 라이벌이 하나 더 등장했다고 판단했기 때
문이다. 역시‥ 어린애였다.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마나이츠가 답변했다.
"간단하지. 몸 속에서 여독이 남아있는 부위를 찾아서 독기운만 태워버린 거야."
"예?"
블리세미트는 '그게 간단하다고요?'하고 소리를 높일 뻔했다. 하지만 상대가 세간에서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라는걸 주위의 반응으로 알았으므로 말을 조심했다. 사막의 사원에서만 살았던 순진한 소년은 대륙의 실정이나 사
람들의 생활 그리고 소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대마법사의 소문으로 손가락을 까딱이면 산이 뒤집어지고
트롤이 개구리로 변하며 독수리가 메뚜기로 변한다고 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그는 개구리가 되기 싫었으므로 입
을 조심했다.
그러자 마나이츠는 어리둥절했다. 방금 전까지는 기운차게 입을 열던 소년이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얌전
히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대마법사께서는 이런 곳에서 뭘 하시고 계셨소?"
"당신은?"
"난 토루반, 이쪽은 피브드닌이라고 한다오. 아스틴 네글로드에서 머리를 썩히고 있지."
"아‥ 고명하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던‥. 하하하! 200세가 넘으셨다고 들었는데 정정하시군요."
"내 생각에는 대마법사께서 더 정정하신 듯 하오. 그 웃음소리도 그렇고‥."
토루반은 늙어서까지 상큼한(?) 미소를 간직한 노마법사에게 질투를 은근히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알 리가 없는 장본인은 연극의 서투름에 지례 겁을 먹고 있었으므로 전혀 다른 의미로 날카롭게 찔렸다. 찔끔한 넬
피엘은 얼굴에 당황한 경련이 이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입을 과장되게 벌리고 말했다.
"아하하하하핫! 그렇습니까? 아! 질문에 대답을 안했군요. 요즘 펴온의 왕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 저택 주
변마저도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그래서 한 번 시찰을 나온 거지요."
"다행이군요. 요즘 마나이츠님께서 몸이 불편하다고 소문이 쫙 퍼져서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이 애도(?)를 미리(?) 표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뵈니‥.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낯익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왼쪽 눈썹이 찡그려지는 걸로 보아서 그리 친근하게 느꼈던 사람은 아닌 듯
했다. 고개를 돌리자 흑발을 어깨까지 기르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소년이 보였다. 아직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아까운
모습. 그 자를 보자 넬피엘은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저 자가 여기 있다니‥. 정령을 부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본 모습으로 나타났으면 큰 일 날 뻔했
군. 주인님이 저자를 어떻게 불렀더라‥.'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4)
'저 노인네가 왠일로 저렇게 얌전하지? 다른 때 같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게다가 저 복장은 어디로 많이 보았는
데‥ 기억이 안 나는 군.'
"자네는 값싼 남작의 식량보급원이 아닌가. 카이젤 자네가 이 곳에 있다는 말은 값싼 남작이 자네들과 관련되어 있
다는 뜻인가?"
"관련이 아니라 우리는 각하의 명령을 받들어서 수도로 향하는 중입니다."
넬피엘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어쩌면 이들은 근래 실베니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기미와 직접적으로 관
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의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까?"
"기밀입니다."하고 카이젤은 밀봉된 편지를 품에서 꺼내서 마나이츠의 앞에 한 번 흔들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물며 제가 이것을 귀하에게 전할 때까지 뜯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마나이츠님께서 꼭 궁금해하신다
면 편지를 보게 될 때 같이 있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마나이츠님은 수석 궁정 마법사니까 말입니다. 그
런 이유로 저희 사정을 이해해주시면 좋겠군요."
'교활한 놈.'
넬피엘은 평소 마나이츠가 왜 이 소년을 가르쳐서 위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이젤은 젠티
아의 명령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함께 동행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뜯을 때 있지 않기라도 한
다면 어물쩍 넘어갈 게 분명했다. 한 마디로 동행하며 보호해달라는 말이 아닌가.
"좋아. 그 편지가 요즘 일련의 심상치 않은 소문과 관계가 있을 것 같고‥ 자네들을 따라다니는 게 다른 소식도 취
하기 쉬울 듯 하군."
'계약 성립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카이젤. 보통 마나이츠하면 얼마나 괴팍한지 도통 생각의 축을 예측할 수가 없는 늙은이였다.
그 날따라 왜 이리 고분고분한지 모르겠지만 하나하나 따지다가는 될 밥도 죽이 될지 몰랐다.
"자아‥ 든든한 보호자도 생겼으니 다시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해봅시다."
* * *
"어여쁜 집사가 들어왔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습니다만, 어찌하여 당신만 외로이 계시는 겁니까?"
"어여쁜 아내를 데려와서 할 소리인가?"
"안타깝게도 전 아내를 약올리는 게 아니라 당신을 약올리는 겁니다, 마나이츠."
"으드드득!"
마나이츠는 나아가던 감기에 몸살이 겹쳐서 재발(再發)하는 걸 느꼈다. 오한이 일며 저절로 이가 갈리고 손에서 땀
이, 머리에서는 열이 솟았다. 그런 그를 모른 척하면서 젠티아는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데린에게 말했다.
"영지 내에서는 백작 각하의 심신(心身)이 많이 회복되었다고 축제마저 준비하고 있던데‥ 이거 취소해야 될 듯 싶
군요. 이렇게 안좋다니. 데린, 가서 물수건 좀 차갑게 적셔와줘."
"알았어요."
남작 부인이 직접 수건을 들고 방을 나서려고 하자 당황한 사람은 시녀들이었다.
"남작부인, 저희가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온 김에 물수건이라도 적셔가야지 백작 각하의 병간호를 했다는 말이라도 듣지 않겠어요."
'게다가 남편도 따로 할 말이 있는 듯 하고‥.'
그녀는 영악한 여인이었다. 어떤 기밀도 숨기지 않는 남편이 꺼릴 내용은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을 것뿐이었
으므로, 이해하고 자리를 비킨 것이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소를 짓는 데린의 모습은 정말이지 천사같았다. 사라져 가는 그녀의 등을 넋을 놓고 바라보
던 두 남자. 젠티아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부럽죠?"
"네 놈한테는 과분해."
피식. 퉁명스러운 마나이츠의 대꾸에 젠티아는 웃어 보였다. 그리고 한 쪽 눈을 상큼하게(!) 감으며 말했다.
"이미 제 꺼 랍니다. 첫날밤 치른 지 꽤 됐어요. 후‥ 귀여웠죠."
"이 능글맞은 놈아! 뭐 하러 온 거야?"
병든 노인의 악받친 소리를 들으면서도 젠티아는 능청스러웠다. 싱글거리던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채
고 입을 열었다. 고맙게도 데린이 하인과 시녀들을 잘 붙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문 밖에서 젠티아가 말하는
걸 듣고 얼굴을 붉힌 채 거실로 도망쳐버렸다. 당황한 그녀를 쫓아 시녀들도 문 주위에서 떨어졌으니 어찌 보면 좋
은(?) 결과였다. -
"이 나라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요? 그러면 뭐 합니까? 알고 있다고 흔들리는 나라가 망치로 두드린 것처럼 제 자리를 찾습니까?"
"집사를 보냈다."
"예?"
"집사를 보냈다고!"
젠티아는 어이가 없었다. 나라가 흔들리는데 고작 집사 한 사람을 보내서 어쩌자는 건가. 마나이츠는 보았다. '값싼
남작'이라는 특이한 별명을 가진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뒤로 돌아서서 돌리는 손
가락을. 분명히 손가락은 귀 옆 3cm 지점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나아아암작!!!"
"아, 예. 말씀하십시오, 각하."
"지금 뭔 짓 했나?"
"설마 각하께서는 제가 각하를 치매든 노인네로 생각하는 망발을 했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분명히 말
하건데 전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씨익‥.
'누, 누구라도 좋으니 저 놈 좀 끌어내줘.'
"자네는 지금 문병을 온 건가, 아니면 감기에 두통까지 추가를 시켜서 나를 저 세상으로 보낼 생각인가?"
"그러길래 누가 중요한 일에 농담을 늘어놓으라고 했습니까?"
"넬피엘을 내보낸 게 농담이라고 생각한 건가? 안타깝게도 그의 능력은 출중하네."
"넬피엘이든 누구든‥. ‥‥넬피엘?"
'아차!'
마나이츠는 뇌리를 스치던 넬피엘의 당부에 자신이 실수한 것을 자책했다.
- 다른 사람 앞에서 절대로 제 이름을 부리지 말아주십시오. 전 집사입니다. 그렇게만 불러주세요. 이유는 후에 말
씀드리겠습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전 여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것. 젠티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넬피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의 성은 무엇이지요?"
"하하하하핫! 자네 귀가 어두운 모양이군. 넬피엘이라니‥ 내 아무리 늙었다지만 발음마저 안 될까. 네이피엘이라고
했네, 네이피엘."
제법 능청스럽게 여유를 부려보는 마나이츠였지만 젠티아는 가을을 기름덩어리 계절로 바꿔 놓을 만큼 능글맞은 사
내였다. 오죽하면 구렁이도 그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예의를 지키기 위해 혀를 낼름거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글
로디프리아에 퍼져있겠는가. 한 때, 글로디프리아에서는 그들의 영주를 '구렁이 영주'라고 부르는 이들도 허다했다.
데린은 남편을 경박하게 부르는 서민들의 태도에 불쾌함을 나타냈고, 젠티아는 그녀를 달랬으나 결국 사랑스러운
아내의 투정에 못 이겼는지 소문의 근원지인 길드의 길드장들을 불렀다. 그들을 보면서 간단한 훈교를 한 젠티아는
불만스러워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띄운 얼굴로 혀를 내밀러 입술을 아주 천천히 핥았다. 스으으윽. 그 날로
소문은 없어졌다.
'넬피엘이 이런 곳에 있을 리는 없지만 어쩐지 수상스럽군.'
"그 네이피엘이라는 친구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납니까?"
"그럼! 내 제자들보다 낫다네. 아마도 길드나 국가에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 중 그와 비견될 사람은 손에 꼽을 거
야."
"그 정도입니까?"
비등록 마법사의 수위는 보통 5∼6의 클래스였다. 예전 편지에서 마나이츠가 집사의 미모를 자랑한 걸 염두에 둘
때 그는 매우 젊은 사람이었다. 그런 자가‥ 5클래스의 마법사다? 그것도 비등록?
'조사가 필요하겠군.'
"그렇다면 그것은 되었군요. 제가 찾은 이유는 백작 각하의 도움을 받을 게 있어서입니다."
진지한 어조의 젠티아. 그는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위압
감이 있었다. 마나이츠도 김장감을 가지고 귀를 기울렸다.
한 편, 데린은 일도 보지 않으면서 화장실에 있었는데 얼굴이 상기된 상태로 입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나 이제 다시는 여기 못 와.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젠티아,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잘, 찌그러진
냄비뚜껑‥."
밖에서는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남작 부인을 걱정하여 시녀들이 떠나지를 못했다.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5)
어느 국가든 수도는 발달한다. 진리라고 정의될 만큼 대부분의 역사와 국가는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고 실베니아의
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시장은 발전도를 보기에 아주 알맞았다. 물론 놀기에도 좋았고‥. 해상무역이
발달한 실베니아인 만큼 수도에는 엘시크나 아스틴에서 보지 못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우와아아아아‥."
"입 다물어, 블리세미트. 침 흐른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물품이 부족한 사막의 사원에서 자라온 어린 사제가 무자비할 정도로 사람이 분비는 광경을 구경이나 했던
가? 카이젤의 파마리나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곳곳에서는 맛좋은 냄새가 풍겼고 거
리에는 휘황찬란한 물건부터 자잘한 소도구까지 걸려있고 바닥에 깔려있었다. 발에 밟히지나 않을지 걱정될 지경이
었다.
"블리세미트‥. 내가 여기서 입을 다물라고 하는 이유는 간단해. 시골에서 올라온 만큼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지
만, 여기서는 어디쯤가서 입을 벌리느냐에 따라서 어느 정도 촌놈인지 판단이 가능하다고."
"그 말은 이 정도는 약과라는 뜻인가요?"
"그래. 여기서 촌놈으로 찍히게 되면 물건 살 때 바가지를 톡톡히 써야 돼. 적어도 저 사람들처럼 대처하는 게 좋겠
지."
블리세미트의 시선이 카이젤의 손가락을 타고 서서히 뻗어나간 자리, 토루반은 감상하듯이 주변을 졸린 눈동자로
훑어보고 있었다.
"건물들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만들어져 있군. 멋만 부렸잖아."
그 옆의 피브드닌.
"게다가 부린 멋도 어중간해서 엘시크가 훨씬 자연스럽고 고풍스러워. 이건 완전히 아무 것도 아닌 촌동네로군."
'아하‥ 저렇게 해야 하는 구나.'
블리세미트가 고개를 열성적으로 끄덕일 때 카이젤은 가리켰던 손가락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도가 너
무 지나쳐! 서둘러 아스틴네글로드의 건방짐을 배우려고 눈에 힘을 준 소년 사제의 어깨를 잡은 그는 힘을 주어서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냥, 마음대로 해!"
그러나 잠시 후 카이젤은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쓰러질 듯한 표정을 취했다. 어린 아이처럼 뛰어 노는 저 두 사람
을 어찌 표현해야 된단 말인가. 블리세미트는 어린애라고 봐주자.-카이젤은 그보다 두 살 많다.- 그러나 레스난은
20세에 가까운 성인이다.
"와아‥ 저거 맛있겠다."
"냄새도 맛있을 것 같아요."
반짝반짝반짝반짝‥한 눈망울이 물주(物主) 카이젤-상단(商團)의 후계자인 그는 명실상부한 갑부다-를 향하자 물주,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툭! 하고 사론의 손바닥에 놓이는 묵직한 주머니.
"저 두 사람에게 맡겼다가는 사탕 하나를 사고 모두 날아갈지도 몰라. 그러니까 사론이 저 꼬마들을 보살펴줘."
"그러지."(오오, 작가의 무관심 속에 잊혀져왔던 사론)
잠시 후‥.
오물오물오물오물‥. 주르르륵‥.
"맛있어!"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은 한이 컸던가. 블리세미트와 레스난은 오징어 꼬치를 입에 문 채 서로를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파마리나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새로 나온 신파극인가?"
"확실히 파마리나가 나서서 호객 행위를 한다면 수입도 짭짤하겠어."
"나야 능력도 좋으니까. 보를레스, 당신은 광대가 어울리겠군. 멋진 연기를 위해서 내가 붕산 가루로 경단을 만들어
주지."
"내가 그걸 먹고 죽는 연기를 하기를 원하는 거야?"
"아니, 죽기를 원하는 거야."
"날 바퀴벌레나 뱀으로 아는 모양이군."
"역시 아니야. 비슷한 종류로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일행에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왁자지껄하다. 저마다의 할 일이 생각난 이들은 무리를 나누었다.
"그럼 동쪽 성문에 있는 '백상어의 휴식처'로 오라고. 적어도 저녁 때까지!"
아리에는 눈치 있는 일행에게 감사했다. 피브드닌이 그녀와 시즈 단 둘의 무리에 끼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파마리
나의 '그러니까 노총각 신세를 못 면하지?'라는 핀잔-그녀는 다 듣고 말았다.-에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어쨌든 아
리에는 연인-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과 오붓한 오후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즈. 시즈는 내게서 떨어지는 즉시 미아가 되어버릴 테니까 절대로 떨어지면 안돼. 알았지?"
"알았어요."
믿음을 주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말이 끝나고 난 직 후 갑자기 그의 시선이 골
목 어느 지점을 향하고‥.
"‥‥게 구이‥."
"시즈! 내가 떨어지지 말라고 한지 아직 10초도 지나지 않았어."
"미안‥."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못 드는 시즈. 아리에는 한숨을 내쉬며 거의 팔을 꽉 잡아 팔짱을 꼈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은 상기되어 있었다.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6)
그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싫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끼리 부대끼는 모습은 눈동자에 추억에 어린 회상을 가져오고 그
기억에 묻힌 이들에게 자신 있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게 서글플 뿐. 펴온에서는 서비스가 좋기로 꽤 이름 있는 여관,
백상어의 휴식처에 가장 먼저 도착한 그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날아올라 굴뚝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63세의 나이
를 먹은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몸놀림이었지만, 그의 속내용은 28세의 생생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표연하게
긴 수염을 날리며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높은 곳을 좋아하는 군."
"드워프들은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던 모양이군요."
"글세‥ 선조들 중에는 그런 드워프들이 많았다고 했지.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어. 그 중에서도 드워프들은 말이
야‥. 곡괭이로 땅을 파던 때가 아니야. 동방에서 가져온 화약을 이용해서 쾅! 쾅!하는 소음과 함께 땅을 뚫지. 하늘
높이 솟는 건물을 만들고 다른 종족들로부터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양식을 사고‥."
넬피엘은 피식하고 웃었다. 벌써 몇 세대(世代)의 벽을 넘어서 살아온 이였다. 그리고 자신은 몇 천년을 이어온 존
재‥.
"과연 '나'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둘은 웃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까지. 하지만 시간
의 흐름‥ 역사의 흐름. 끝없이 흘러야 할 것들, 그렇기에 그에 대한 고민도 끝이 없을 것이다.
"위에 계신 여러분, 다들 왔으니까 저녁 식사하러 내려가요."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는 걸 넬피엘은 아리에의 목소리로 깨달았다. 대부분의 여관이
그렇듯 '백상어의 휴식처'도 식당이 갖춰져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려던 일행은 뭔가 특별한 요리를 기대하고 있던
두 어린애-블리세미트와 레스난의 부루퉁한 표정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카이젤이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몸
을 돌리자 그들의 얼굴은 한꺼번에 밝아졌다. 암탉을 따르는 병어리들처럼 쫄랑쫄랑 카이젤의 뒤에 얼른 달라붙는
둘.
"그러니까 말이죠. 아까 전부터 봐둔 게 있었어요. 맛있을 것 같다고요. 제가 안내할게요."
"이미 알고 있어. 너희들이 아까 타르바칸의 바비큐을 먹고 싶어서 기웃거리는 걸 봤거든."
* * *
밤. 비가 오려는지 까맣게 맑아야할 하늘은 회색 빛이 자욱하게 묻어났다.
"밖은 비가 내리나?"
"아닙니다.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추워졌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중년의 사내는 창가로 걸어가 몸을 기댔다. 약간 고개를 기울인 시선에 창문 밖으로 눈이 쌓
여 가는 게 엿보였다.
"겨울이군. 곧 신민들이 어려울 시기야‥. 이런 시기에 내전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기에 지금이 적기(適期)입니다. 궁정은 축제에 정신이 팔려 유흥만 일삼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지금 신민들이
전하를 탓하고 욕하더라도 후에는 칭송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난 그들을 이롭게 해줄 테니까. 실패는 하지 않는다. 난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거든."
"설사 당신이 역적이라고 해도 전 전하를 칭송할 겁니다."
"고맙군, 펠리언‥."
펠리언은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한 번 숙여보였다. 영원한 충성의 맹세의 확인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
본 사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아이를 '값싼 남작'에게 보낸 것을 용서하겠나?"
"저, 전하! 그 얘기는 말아주십시오. 저에게는 넘볼 수 없는‥ 분입니다."
"허허‥. 자네의 능력은 절대로 드로안 남작의 아래가 아니지. 검술은 좀 뒤쳐질지 모르지만‥."
삐걱‥. 창문을 열자 나풀거리던 눈송이가 방안으로 들
어왔다. 내리는 눈 때문일까? 중년 사내의 머리카락은 새어진 빛깔이 더욱 많게 보이는 것은‥.
"지금쯤 드로안 남작, 젠티아의 사절이 올 때가 되었군. 지난 번 자네가 갔을 때의 엉터리 대답이 아니라‥ 그의 진
심을 가지고 올 거야."
"예? 그렇다면 지난 번 남작의 대답은 본심이 아니었단 겁니까?"
"‥본심이겠지. 그는 현명한 자야. 인내(忍耐)를 가지고 있고 기회를 알아볼 줄도 알지. 서서히 이 나라를 바꿔 나갈
생각일 거야. 과연 내 사위라고 봐야겠지."
"‥‥."
말이 없는 펠리언. 중년의 사내, 하도너 킬유시 공작은 피식 웃었다. 그 동안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저 청년은 질투
를 벗어나는 정신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데린은 남작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지.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 이유
를 킬유시 공작은 입에 담았다.
"난 알고 있네. 그가 내 앞길을 막을 것이라는 것을‥. 내 딸이 그에게 있든‥ 그 에게 없든 말이지.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알고 있지만 정말 고마워. 그렇기에 데린을 그에게 보낸 거라네."
"무슨 말씀이신지‥."
"내 사위의 힘은 강력하지. 내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지만 그의 능력을 나는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야. 어쩌면
나는 호승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가 이기던, 내가 이기던 내 딸은 살아남는다
는 사실이야. 자식만은 소중히 하고 싶은 게 어버이의 마음 아니겠나‥."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7)
이기적인 생각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딸애는 원망하겠지. 그러나 젠티아는 전략가이자 기사로만이 아닌 사위이자 남
편으로서도 마음에 드는 남자였다. 충분히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기회를 보느라 '값싼 남작'은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심하다고도‥ 신중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로바메트 공작인데 그는 현명하지만 진취적이지를 못해. 현재의 상태에서 안정을 유지하려고 할거야. 그렇
기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인재를 만들어야 해. 아니면 내가 그 인재가 되던가."
"전하‥."
"걱정 말게. 죽더라도 자네들에게 힘은 주고 갈 테니까. 내가 내란을 일으키면 드로안 남작은 날 진압하기 위해 궁
정에 몸을 들이밀 수밖에 없을 거야. 진압되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진압된다고 해도 그는 권력을 움켜질 수 있을 거
야. 궁정으로 돌아올 수 있는 명분이 생겼을 테니‥. 중앙에 들어간 이상 남작의 걸음을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없을
거야. 설사 로바메트 공작이라도 말이야‥. 적어도 내 사위이니 만큼 내 바램 정도는 이뤄주겠지. 비록 과정이 다르
다고는 하지만‥."
그 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킬유시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는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드로안 남작님의 편지를 가지고 오셨다고 하는데요. 들여보낼까요?"
"왔군. 정중하게 맞이하게."
"예‥ 알겠습니다."
* * *
"킬유시 공작은 대단한 인물이에요."
중앙에 놓인 커다란 수정구슬은 '역사의 고리'가 300년을 과속 배양하여 키워낸 것이었다. 그 안에는 킬유시 공작의
방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킬유시는 모르겠지만 그의 방 샹들리에의 정 가운데 수정은 '역사의 고리'에서 애용하는
화상전송용이었다.
"과연‥ 그렇군. 우리는 뒷받침을 한다기보다는, 할 수밖에 없도록 끌려든 느낌마저 들 정도니‥. 쩝! 제대로 조사를
안 하고 뛰어드니까 상대에 대한 파악도 못하지. 도대체 누가 추진한 일이야?"
"나."
로진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츠바틴은 씨익하고 웃고 노리스에게 말했다.
"끌어내서 눈 속에 처박아."
"아직 처박힐 만큼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어."
"그럼 우물에라도 처박아."
로진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서 산산이 부서져 가는 것을 무시하며 츠바틴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테이블 주
위에 앉아있는 이들이 두려움에 찬 눈동자로 그의 뒤를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툭툭!
노리스는 그 사이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다가 문득 몰려든 시선에 씨익-하고 웃어주었다. 부르르르‥. 저절로 몸이
떨려오는 걸 느끼며 로길드는 깨달았다. 어째서 '원의 힘'이라는 단체가 완벽한 협동과 초월적인 단체적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지.
"그 사이에 눈송이가 많이 불었어. 잠깐 사이에 이렇게 쌓였다니‥."
"자네 어깨가 듬직해서 눈도 앉기가 편한 모양이지. 그나저나 첫 눈치고 그렇게 많이 내린다니‥. 순순히 로진스가
우물로 들어가던가?"
"설마‥. 뒷 모가지를 후려쳐서 기절시킨 다음 던져버렸지."
"쯧쯧‥ 어딘가 부러졌겠군."
로진스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게다가 몇 군데 부러졌다고 해도 부대에 있는 치료술사들이라면 금방 정상으로 돌려
놓을 수 있었기에 츠바틴과 노리스는 과격한 장난(?)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츠바틴 같은 경우
는 다른 지휘부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방법으로 현재 무리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신비의 고리'
수장을 매장해버리는 수단- 어쩌면 개인적인 불만이 포함되었는지도 모른다-을 쓴 것이다.
효과는 아주 좋았다. 츠바틴의 말 한 마디에 모두들 경청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니까.
"바람을 노래하는 이를 역사상에서 삭제하는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나 현재는 그를 쫓는데 신경 쓰기보다는 실베니
아의 내란(內亂)을 조정하는데 신경을 써야한다. 여러 군데 신경을 쓰는 것만큼 바보짓도 없지. 그 예가 바로 저 우
물 속에 처박힌 마법사다. 킬유시 공작을 과소 평가하다니 공작이라는 직위가 혈통만으로 주어지는 부산물(副産物)
로 알고 있는 건가? 로길드!"
"예, 예!"
어조에 긴장이 가득했지만 소년은 흥분으로 눈을 빛냈다.
'연약해보이는 주제에 괜찮은 녀석이군.'하고 미소를 지은 츠바틴은 턱을 쓰다듬던 손으로 로길드의 긴 머리카락을
흩트리고는 말했다.
"우리는 역사상으로 함부로 들어 나서는 안 되는 걸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래뵈도 저도 유명하다고요. 함부로 들어 나서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하하‥. 그렇다면 말이 필요 없지. 그렇다면 주의해야 할 사람은 노르벨인데‥."
그렇게 말하며 츠바틴은 흘깃, 구석에서 턱을 괴고 졸고 있는 노르벨에게 시선을 던졌다. 츠바틴이 물이라도 가져와
서 끼얹어야 할까 고민에 빠지려 할 때 천막-'역사의 고리'는 대부분 노숙을 한다-의 입구가 촤악하고 열리며 사람
머리 만한 물덩이가 노리스에게 날아들었다.
스르르릉. 전혀 당황함이 없이 노리스는 검을 뽑았다. 검이 뱀처럼 빠져나오는 게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정지되었다고 느낀 순간 검극(劍極)에 달한 검사에게서 뿜어진 위압감이 천막 안을 휘감았다. 노
르벨의 눈동자가 떠진 것도 바로 그 때였다. 그의 각막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날아오던 물덩이는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느릿하게 느껴지는 노리스의 검을 따라서 공중에서 방향을 바
꾼 것이다. 그 방향은 바로 노르벨의 정면이었다.
"윽!"
가까스로 피하는 노르벨. 노리스가 해보인 동작은 동방 검법의 극한(極限)에 달한 이들만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츠
바틴은 박수를 쳤다.
짝짝짝!
"멋진 공방이로군. 자네의 공격도 멋졌어, 로진스."
좌중(座中)은 얼떨결에 그를 따라 박수를 쳤고 고개를 물덩이가 날아온 입구 쪽으로 돌렸다. 식식거리는 로진스가
멋진 남색의 망토에서 물을 짜내며 들어서고 있었다. 츠바틴이 혀를 차고 말했다.
"안 부러졌군."
안타까움이 찌든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에게 시선을 준 시간은 잠시였다. 노르벨에게 고개를 돌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물을 뿌려준 로진스에게 감사하게, 노르벨. 아니었다면 함께 우물에 처박혀야 했을 테니까."
"츠바티이인‥!"
로진스가 이를 갈았지만 츠바틴은 가볍게 무시했다.
"노르벨, 로길드와 함께 조사해줄 사람이 있네. 이 사람의 행로(行路)에 따라서 '값싼 남작'의 운명이 달렸다고도 할
수 있지. 킬유시 공작은 그가 자연스럽게 남작의 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야.
우리는 그 모를 일을 예측 못하게 바꿔야 하는 거지."
"그 사람이 누굽니까?"
"로바메트 공작."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8)
시즈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뒤에 있던 일행도 한꺼번에 공작에 대한 예를 취했다.
"되었네. 뭔 사절들이 이렇게 많은지‥."
말 그래도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에 하도너 킬유시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뒤에서 따라 내려온 펠리언
이 시즈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로군요. 마땅찮은 시즈. 살아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마땅찮은!?"
킬유시는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다. 누가 마땅찮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겠는가. 하지만
의외는 있었다. 그것도 대륙에서도 제일가는 현인의 기관이라는 아스틴 네글로드의 학자들도 놀람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들었다는 현자(賢者)의 이름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는 세이서스 가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공작의 시선에 시즈는 말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내가 보장하지요. 그는 '또 다른 고향'의 저자인 '마땅찮은 시즈'입니다."
앞으로 나선 이는 피브드닌이었다. 그는 제법 귀족으로써의 풍채가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공작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보장할 수 있는 그대는 누구요? 복장을 보아하니 아스틴의 학사의(學士衣)같은데‥."
"전 아스틴 네글로드의 피브드닌 파우트시카라고 합니다. 원탁의 일곱 자리 중 말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나게 돼서 영광이군요, 파우트시카 씨. 그렇다면 저 작은 분은 드워프의 현자로 유명한 토루반 님이시군."
"만나서 반갑소. 토루반이오."
토루반이 손을 내밀자 킬유시는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잡기 위해서 허리를 숙여야 했던 것이다. 인사를
끝낸 시즈 일행을 킬유시는 식당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전하‥ 왜?"
"내 방은 느낌이 안 좋거든. 사람의 느낌이라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니까 꼭 무시할 필요는 없지."
긴 테이블 위에는 블리세미트와 레스난이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음식들이 차려졌다.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
시종들은 많은 음식들을 능숙하게 테이블 구석구석까지 채워갔다.
"맛있게 드시오."
"네!"
동시에 하늘을 찌를 듯한 소년 소녀의 목소리. 반짝이는 눈동자는 샛별도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허겁지겁 먹어대는
그들을 보면서 킬유시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쯧‥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군요. 오는 동안 뭐라도 먹이지 그러셨소?"
순간 예의를 갖춰 음식을 씹고 있던 카이젤의 입에서 이빨 가는 소리가 났지만 사람들은 실수로 알고 넘어갔다. 그
러나 카이젤은 블리세미트와 레스난이 요리하기 직전의 음식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았다.
'그렇게 먹어 놓고선‥.'
그런 생각은 킬유시 공작의 말에 끊어졌다. 식사를 끝난 공작은 시즈에게 입을 열었다.
"값싼 남작의 전갈을 가져왔겠지? 슬슬 보고 싶구려."
"여기 있습니다."
말아져있던 양피지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공작의 눈앞에 펼쳐졌다. 음식에 정신이 팔려있던 두 청소년조차 식기
에서 손을 놓을 정도로 침묵이 킬유시의 갈색 눈동자를 주시했다.
피식―
"역시 그렇군. 내 사위야. 하하하하!"
시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젠티아가 말하길 분명 킬유시 공작은 반란을,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막을 것이라 했다.
그런데 공작은 저렇게도 웃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웃음은 조금이나마 허탈해보였다. 내심 깊은 곳에 드로안 남작
이 자신과 뜻을 함께 해주면 좋았으리라.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애매한 웃음을 한동안 토해낸 그는 문득 눈을 날카
롭게 빛내고 시즈 일행을 바라보았다.
'분명 사절이라면 보통 사람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 그것도 평범하지 않은 이들을
이렇게 보냈다는 것은‥.'
아마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어린 소년, 소녀부터 수 백살의 드워프에 이
르기까지 평범하지가 않았다.
"이들을 동쪽 성곽의 방으로 데려다주게. 편히 쉬었다가 가도 좋을 것이야. 그럼 난 생각해볼게 있어서‥."
‥‥터벅터벅터벅!
"여자 분들은 이 곳입니다. 편히 쉬십시오."
"그럼 수고하도록 해요."
탐스러운 흑백이 휘르르 돌며 살짝 미소지었다. 예전 귀족의 영애였기에 여유있게 인사한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아
도 아름답던 아리에가 웃음을 보이자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던 시종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우물쭈물하는 그의
모습에 문을 닫은 아리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먼저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몸을 부벼대고 있던 레스난이
물었다.
"왜 그래?"
"역시 사람은 인상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나봐."
"무슨 일인데 그래?"
"시종이 몸살이라도 걸쳤는지 몸을 부르르 떨잖아. 날씨가 추워서 감기에 걸린 모양인데 저렇게 일을 시키다니‥.
공작님 인상은 참 좋아보였는데‥."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9)
"재미있는 사람들이군‥. 펠리언, 자네는 이미 알고 있던 것 같던데!?"
"예. 이미 안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랐습니다. 시즈 세이서스가 살아있었다니‥."
"엘시크의 늙은이들이 악에 바칠 일이군."
킬유시 공작은 평범하지 않은 사절들이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창고에서 꺼내온 와인이 졸졸 소리를 내며 그의
잔에 고였다. 향기를 음미하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로바메트에게 보내야겠어."
"값싼 남작과 로바메트가 손을 잡게 하시려는 겁니까?"
펠리언은 걱정스러웠다. 값싼 남작이나 로바메트 공작 모두 개인의 힘과 지략만 두고 보더라도 대륙을 좌지우지하
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려하다니‥. 펠리언이 근심을 얼굴에 그대로 들어내자 킬유시 공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이 사람아‥. 이왕 싸울 것이라면 진짜 멋지게 싸우고 싶은 게 남자라고. 설마 기사들이나 검사들만 호
승심이 있는 줄 알았나? 나 같은 정치가나 전략가도 승부에 대한 집착은 있어."
"하지만‥."
"걱정 말라니까. 뒷 배경을 알 수 없긴 해도 나를 지원하는 '역사의 고리'는 내게 두 사람을 상대하고도 남을 힘을
줄 테니까. 대여료 없이 말이야. 그런데 그들은 지금 뭘 하고 있나?"
킬유시는 하인에게 묻자 지목을 받은 하인은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거렸다.
"아, 그게‥."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한 방에 모여서 술판을 벌였습니다."
"뭐?"
펠리언은 경악성을 토했고 킬유시는 문득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그들은 즐거운 이들이었다. 자유로우면서도 행
동에 무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도 있다. 어떻게 그토록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음에 그는 얼굴을 잠시 찌푸렸다. 그리고 펠리언에게 말했다.
"안내해주게. 내가 가봐야겠군."
"아, 예."
"참, 그 전에 들려야 할 곳이 있군."
"그럼 어디로 먼저‥?"
"술 창고!"
시즈들(시즈, 사론, 블리세미트, 카이젤)의 방은 어느 새 옆방에서 찾아온 토루반들(토루반, 피브드닌, 보를레스, 토
플레)과 아리에들(아리에, 파마리나, 레스난)으로 북적거렸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남자들과 파마리나는 그 날, 킬유
시 공작의 반응에 대한 추리로 입이 쉬지 않고 주절거렸다. 그들 옆에는 꼭 한 병씩의 술이 놓여있었다.
"아니,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말까지 나온 거지?"
"아아‥ 공작 전하께 전갈을 전했으니 이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피브드닌이 공작의 표정에 대해
말을 꺼냈잖아요."
"솔직히 속을 추측할 수 없는 사람이잖나."
"그건 다음에 생각하고 우선은 앞으로의 일정이나 결정해요."
파마리나는 주문을 외울 때를 제외하고는 참을성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본래 성격일지도 몰랐다. 토라진 표정을
짓다가 하품을 쩍쩍해대는 게 그 증거일지도‥. 그 모습에 킥킥거리던 보를레스가 그녀의 눈째림을 받고 사래가 걸
려 콜록댔다.
"콜록! 벌써 정했다고."
"언제!?"
"그렇게 열내지마. 여자들이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벌써 30분전에 들어 왔다고. 그러니 벌써 얘기가 끝나고
도 남지."
"그렇게 어떻게 하기로 했죠?"
보를레스가 생각할 때 파마리나는 따분한 것을 상당히 싫어했다. 힘들게 느껴질 만도 한 여행을 진정으로 즐기면서
도 계획을 짤 때는 마치 모험을 꿈꾸는 귀족 아가씨처럼 얼굴을 잔뜩 붉히고 흥분했다. 술에 취해서였는지도 모르
겠다. 이렇게 생각해버렸으니까.
'귀여워‥.'
그러나 그는 곧 내심을 부정했다. 그의 웃는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파마리나가 물고 있던 술병을 던져버린 것이다.
그걸 가볍게 받아서 마시며 보를레스는 자신이 많이 취했다고 기정 해버렸다. 화를 내는 모습까지 귀엽게 느껴졌으
니까.
"저‥. 시즈는 어디 갔죠?"
그녀가 얼굴이 붉어진 것은 반병이나 되는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즈 이 녀석은 어느 새 내뺀 거야?"
"좀 전에 밖으로 나가던데요?"
졸리운 지 레스난과 서로 기댄 채 가장 맛있던 요리에 대한 토론을 벌이던 블리세미트가 대답하자마자 문이 열렸
다.
"여기 있습니다. 화장실에 좀 다녀왔어요."
"얼마 마시지도 않은 녀석이 벌써부터‥."
그렇다보니 내일 화장실 사정이 궁금해지는 사내. 필요 이상으로 쓸데없는 호기심을 갖는 자, 남자의 이름은 피브드
닌이었다. 그는 토플레를 돌아보고 물었다.
"새벽 몇 시쯤에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빌 것 같나?"
"글세‥ 아마 지금 먹은 술이 소화되면 우선 가볍게 방광을 쓸어내릴 것이란 말야‥ 그리고 나서‥‥."
역시 그들은 친구였다.
자기 멋대로들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즈는 문을 두들기면서 말했다.
"다들 제가 누굴 데려왔는지 보세요."
"화장실에 갔던 녀석이 누굴 데려오다니‥ 왠지 끔직한 상상이 드는 소리구나."
"그런 소리 말아요, 토루반."
주의가 집중된 순간을 타 시즈는 문을 활짝 열었다. 다리가 보이고 약간 내밀어진 배가 보이고 얼굴이 보이는 순간,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경직했다.
"즐거운 모양이군. 그런데‥."
굳은 표정의 킬유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방 안을 한 번 쓱 훑어보았다. 그리고 긴장한 사람들을 향해 가지고 온
고급술을 내밀며 씨익 웃었다.
"혹시 술이 모자르지는 않나?"
킬유시 공작은 붙임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병사(病死)한 뒤로 술을 될 수 있는 한 줄이고 일에 몰두했지만
예전에는 그럴 듯한 애주가였다는 걸 그가 가져온 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코칼리아! 오! 좋은 술이야."
코르크 마개를 뽑아내자 방에 한 가득 퍼지는 주향(酒香), 토루반은 코를 벌름거리며 감탄했다. 그리고 열기(?)에 찬
눈동자로 킬유시 공작에게 술을 권했다.
"자아‥ 주인이 우선 한 잔 받으시오."
그러나 킬유시는 고개를 저었다. 어리둥절한 토루반에게 그는 말했다.
"이왕 술을 마실 거라면 비좁은 방보다는 성벽에 자리를 마련하고 마시도록 합시다."
"공작께서 젊은 시절 많이 놀아보셨구만‥."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드워프, 킬유시는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그의 성벽에 올라가면 수도의 왕궁이 보인다. 보통은 왕실의 위엄 때문에 허락하지 않는 수도의 성. 물론 수도라고
보기에는 외곽이었지만 킬유시 공작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해주는 것이다. 성벽은 전 날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빛나고 있었다. 눈을 치우고 가죽을 바닥에 깔아 자리를 마련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세를 잡고 앉았다. 킬유시
공작이 토루반의 한 잔을 호쾌하게 넘기자 보를레스와 사론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
"다음은 토루반님이 이어서 드시죠?"
"좋지. 젊은이에게 질 수 있나?"
킬유시 공작은 벌써 중년이었지만 한 인간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세월을 살아온 토루반이 그렇게 말하자 정말 젊
은이가 된 느낌이었다. 공손하게 술을 따르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토루반이 말했다.
"으음‥ 술 따르는 예의도 좋고‥.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모범이야."
"하하하. 이런 자리에 노래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꺼낸 사람은 보를레스였지만 시선이 집중된 사람은 시즈였다. 보를레스는 아리에와 기대고 앉았던 시
즈를 아플 정도로 때리며 노래를 재촉했다. 킬유시가 호기심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 '마땅찮은 시즈'의 노래라니 영광이로군."
"공작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그의 노래는 그리 마땅찮지 않으니. 적어도 '값싼 남작'의 인정을 받을 수준이라오."
"호오‥?"
'값싼 남작'은 기사로서도 이름이 높았지만 음유시인으로서도 유명했다. 오죽하면 그의 수하들은 전투가 있기 전에
'값싼 남작'의 노래를 들으면 필승불패(必勝不敗)한다는 믿음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가실 정도니 그의 노래 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헌데 그런 사람의 인정을 받다니‥ 킬유시 공작과 사람들은 기대
에 찬 눈으로 시즈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운 걸‥.'
한 차례 머리를 긁적이던 시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노래를 부를까 고민하던 시즈는 결심했
다는 듯 굳은 표정을 지으며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옆에서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쳐다보자 씩 하고 억지스런 미소
를 보였다. 그리고 술이 쏟아질 정도로 잔을 하늘로 들며 외쳤다.
자! 이제 잔을 높이 들고 다 함께 노래를 불러요!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행동이었기에 일행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이해했다. 조금 전에 무리할 정
도로 한 꺼번에 술을 마셔댄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 비워요. 가뿐 세상을‥.
오늘만은 그대의 날이죠.
자! 채워요. 마음 가득히‥.
뜨거운 젊음을 느껴봐요.
거친 파도 같은 세상이 거품처럼 흩어져‥.
또 다른 미래가 열릴 거에요.
새로운 그대의 시작을 위하여!
자! 이제 잔을 높이 들고 그대의 행복을 빌어요.
그대 곁에 내가 있어요. 우리 모두 함께 있어요.
<카니발 - '축배'>
술기운에 원조를 얻어 힘찬 음성, 그러면서도 약간 꼬부러진 음성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가슴
이 벅차는 걸 느꼈다. 시즈의 노래 속에 함축된 기운이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는지도 몰랐다. 끝나는 노래 박자
에 맞춰 사람들은 술잔을 부딪히고 웃어댔다.
"헌데 이 중에서 가장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킬유시는 이런 질문을 한 것을 후회했다. 가벼운 질문에 가벼운 대답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사람들의 눈은 그게 아
니었던 것이다. 적의라고도 착각할만한 호승심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드워프, 검사, 학자, 그리고 여자(파마리나). 말
할 가치도 없다는 듯 토루반이 술잔을 가볍게 비우고 말했다.
"인간이 드워프를 당할 수 있을 리가 있나."
"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지요."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10)
결코 그들이 마시는 술은 맥주가 아니었다. 한 병에 1 타로운에 가까운 고급 술, 코칼리아였다. 헌데 아예 병째 잡
고 입에 들이 붙다니‥. 킬유시는 겉으로 웃고 있었지만 내심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블리세미트와 레스난까지
술을 홀짝거렸는데 블리세미트의 주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뭍사람들은 소년이 사막의 추운 겨울을 이기기
위해 독한 술을 자주 먹은 덕에 주량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상 질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한
계를 넘어서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밤을 새어 마셔도 지치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의 기세는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수그러들었다. 그 이유는 역시 과음
에 힘을 얻은 수면욕구 때문이었다. 파마리나와 레스난은 벌써 시종들에게 업혀서 방으로 옮겨진지 오래였고 이제
는 슬슬 남자들도 들려 방으로 내려가고 잇었다. 처음 방문한 공작의 성에서 잠이 들어버릴 만큼 마신 걸로 볼 때
무례할 정도로 신나게 퍼마신 파티는 그들의 기억 속에 즐거웠을 꿈으로 남을 것이다.
"질문이 있습니다, 토루반. 드워프의 현자여‥."
과연 드워프가 술에 강한 것은 종족적인 능력이었나 보다. 하인들에게 업히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일어서려는 토루반
에게 킬유시는 말을 걸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까? 서민들도 있지만 당신이나, 피브드닌님 등은 귀족이 아닙니
까. 그런데 왜?"
"간단하지 않은가. 우리는 권력에 관심이 없어. 그래서 또한 권력에 묶이지도 않는 거야. 생각해보게. 바다가 일렁이
는 이유를 아는가?"
"학자들에 의하면 달이 끌어당겨서라고 하더군요."
"그래. 그렇다면 생각해보게. 달이 하늘 위를 도는 이유를 바다가 모르고 있겠나?"
"모를 수 없겠지요.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기에 달은 세일피어론아드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닙니까?"
"그래 서로 끌어당기지. 자아‥. 권력과 주위의 시선에 신경 쓰는 것은 달이요, 자유는 바다라네. 달이 없다면, 바다
는 달의 힘에 묶일 일이 없을 거야. 공작의 마음에서 달을 없애보는 게 어떤가? 바다의 일렁임처럼 주위 시선에 흔
들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묻게나. 허허허허‥. 아, 그리고 오늘 코칼리아는 정말 일품이었네."
휘어지다 못해 꼬부라지는 음성으로 말한 토루반은 멍하니 앉아서 달을 바라보는 킬유시 공작을 뒤로 한 채 기분좋
은 웃음을 남기며 짧은 걸음을 느긋하게 옮겼다. 문득 성벽의 어둑한 곳에 인기척이 느껴서 바라보니 시즈가 엄지
손가락을 내밀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토루반은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즈가 찔끔했다.
"밤바람에 감기 걸릴지 모르지 적당히하고 내려와."
끄덕. 시즈의 어정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긍정을 표했을 때 이미 토루반은 발자국 소리만 남기고 계단을 내려
가는 중이었다.
무엇 때문에 시즈가 찔끔했던 걸까? 사람들이 다 내려가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갔어?"
"그런 것 같군요."
그의 어깨 뒤로 아리에가 빼곰이 얼굴을 내밀었다. 술을 제법 마신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사람들
의 분위기에 휩쓸려 술을 너무 마실까 두려워진 시즈가 자리를 벗어나자 아리에가 얼른 쫓아온 것이다. 물론 시즈
도 술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는 것은 사양하는 편이었다.
"음헤헤헤‥."
그에 비해 아리에는 술에 대한 저항력이 없다시피 했으므로 조금 시간이 지나자 취기가 올라서 혀가 비틀린 듯 웃
으며 비틀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팔을 잡아주자 품으로 파고드는 그녀를 시즈는 꼭 안아줄 수밖에.
솔직히‥ 싫진 않았다. 방에서 짐을 정리하는 동안 몸을 씻었는지 머리카락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겼고 기대는 얼
굴은 보들보들 부드러웠다. 부드러운 여성의 몸체에서 느껴지는 나긋나긋한 감촉에 시즈는 어쩔 줄 몰랐다.
'도대체 이렇게 취한 주제에 왜 따라온 거야!?'
"으음‥!?"
그가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나보다. 아리에가 고개를 들고 몽롱한 시선으로 시즈를 올려다보았다. 물끄러미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던 시즈에게 가슴의 고동소리가 저절로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심호흡을
몇 번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아리에는 위태위태한 모습이 귀엽고 유혹적이었다.
"아리에, 그만 들어가서 자는 게 좋지 않겠어요?"
"싫어."
"아, 아리에‥. 감기 걸릴 지도 몰라요."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시즈랑 있는 게 좋단 말이야. 시즈는 내가 싫은 거야? 싫은 거지? 흑‥. 훌쩍!"
아리에는 시즈의 팔을 뿌리치고 휘청거리면서도 훌쩍거리며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녀의 눈물이 어둠 속에서 달
빛을 튕긴 것은 허공이었지만 파문이 일어난 것은 시즈의 마음이었다.
"아, 아리에‥."
"히잉‥. 알고 있어‥. 끅! 네 마음 속에 아직도 레소니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록 사라지
지 않는 영상이라는 걸 난 인정하고 있어‥. 하지만‥ 이건 너무 비참해! 넌 네게 입을 맞췄잖아. 좋아한다고 말해
줬잖아.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망설였던 걸까?'
시즈는 자신 있게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울먹이는 아리에의 흐릿한 눈동자가 보이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시 아리에가 뿌리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악! 아파!"
"미, 미안!"
당황한 시즈가 팔에 힘을 빼고 뿌리칠 기회가 되었지만 아리에는 가만히 있었다. 그저 눈물이 흐르는 볼을 그의 어
깨에 부벼가며‥.
"‥‥."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어깨의 느껴지는 아리에의 숨결은 술 때문인지 뜨거웠고 시즈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갑자기 왜 격정적으로 돌변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그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아리에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않나‥ 불안해할지도 몰라‥
하지만 꼭 오늘밤에‥ 해야할 말이 있어.
약한 모습, 미안해도‥ 술김에 하는 말이라 생각지는 마‥.
언제나‥ 네 앞에 서면 준비했었던 말도
왜 난 반대로 말해놓고‥ 돌아서 후회하는지‥.
이젠 고백할게. 처음부터 너를 사랑해왔다고‥.
이렇게 널 사랑해‥. 어설픈 나의 말이‥.
촌스럽고, 못 미더워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
아침이 밝아오면 널 품에 안고 사랑한다, 말할게‥.
시즈는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긴장을 해버렸다. 직접적인 고백이 부끄러웠던 걸까? 보통 때처럼 그의 음성은 매
끄럽지 않았고 더듬거렸으며 우습기까지 했다. 부르다가 고개를 들어 아리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놀람이 자리했던 그 자리에 향기로운 미소가 그윽하게 피어있었다. 시즈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
노래했다.
자꾸‥ 왜 웃기만 하는 거니‥?
농담처럼 들리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린애 보듯 날 바라보기만 하니?
언제나 네 앞에 서면 준비했었던 말도 왜 난 반대로 말해놓고‥
돌아서 후회하는지‥
이젠 고백할게. 처음부터 너를 사랑해왔다고‥.
이렇게 널 사랑해‥.
어설픈 나의 말이‥ 촌스럽고 못 미더워도‥.
아무에게나 늘 이런 얘기하는 그런 사람은 아냐.
너만큼이나 나도 참 어색해‥ 너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자꾸만 아까부터 했던 말 또 해 미안해.
하지만 오늘 밤 난 모두 다 말할 거야.
이렇게 널 사랑해‥.
어설픈 나의 말이 촌스럽고 미더워도 그냥 하는 말이 아냐‥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
아침이 밝아오면 다시 한 번 널 품에 안고 사랑한다 말할게.
널 사랑해‥! 이렇게 널 사랑해‥.
<전람회 - 취중진담>
잦아드는 목소리에 아리에가 살짝 고개를 젖혀 시즈를 바라보니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흠흠!"
헛기침을 몇 번 해보는 청년. 아리에는 잠시 짖궂은 미소를 띄우고 그를 노려보다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를 꽉 하고 꼬집었다.
안절부절하는 청년의 감정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지만 그녀는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입술에서 따
스한 느낌을 받았다. 점점 강하게 안아오는 시즈의 팔을 느끼면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술기운을 교환했다.
잠시 후 입맞춤이 끝나고 서로의 몸에 기대고 있을 때, 아리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후우‥. 내가 어쩌다가 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걸까? 그저 단정한 외모를 가진 것뿐이고 조그만 키에 고백도 어
눌하고 키스까지 서툴러."
빙긋‥. 시즈는 가만히 웃고만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었는데 아리에는 마음 속이 꿰뚫린 것처럼 얼굴이 붉어
졌다. 그녀는 토라진 듯 달을 보면서 말했다.
"칫! 몰라! 나도‥. 달에게 물어보지 뭐‥. 내 마음의 일렁임을 달은 알고 있을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