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200)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1)

아침, 겨울의 아침은 이불 속으로 영원히 살고 싶을 만큼 추웠지만 그만큼 상쾌하고 맑았다. 창문을  열고 새소리에 

맞춰 길게 기지개를 폈을 때였다. 

"당장 문닫지 못해!? 추워죽겠는데 무슨 짓이야?"하는  카이젤의 비명(?)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가볍게 윙크를 

하며 웃음을 날리는 시즈. 카이젤은 잠시 멍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이 어제 술을 너무 마셨군. 아직도 취해있다니‥." 

그리고는 그는 이불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이불은 파고들수록 멀어졌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벌떡  드니 

시즈가 이불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일어날 시간이랍니다, 카이젤." 

그 순간에도 그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으니  카이젤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킨 그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 시즈에게 베개를 던져버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때마침 붉은 커튼이 창가의 바람에 거칠게 펄럭였다. 시즈는 잠시 멍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눈앞에서 불꽃

이 피어나는 착각일어 났던 것이다. 

'우리 방 커튼이 붉은 색이었나?' 

화들짝 고개를 돌리는 그에게 어느 새 창턱에 앉은 사내는 입을 열었다. 

"간밤에 잘 주무셨나? 오랜만이지?" 

차가운 아침 기온에는 어울리지 않는 빨간 빛깔의 망토. 얼마 전의 집사들이  즐겨입는 차분한-집사들은 대부분 예

의를 강조하기 위해 아주 단조로운 복장을 선호한다-정장보다는 훨씬 마법사적인 분위기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붉은 

계열의 옷차림은 흰 수염이 길게 난 노인에게 어울리지 않을 모습이었다. 

"마나이츠님이시군요. 

"아침이 지났는데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군. 여기는 공작가인데‥ 시간을 못 맞추면 실례야."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소녀가 뛰어들었다. 순백의  잠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금발의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소녀는 카이젤에게 달려들었다. 기겁을 하면서도 반항을 못하는 소년과 그 위에 올라탄 소녀, 레스난. 약간(?)  기괴

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포즈로 레스난은 발버둥치는 카이젤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대며 징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파마리나가 날 내쫓았어요. 위로해줘요, 카이젤." 

"저, 저리가아!" 

소년의 절규에 걷어차여 침대 옆으로 굴러 떨어진 레스난이 훌쩍거렸다. 하지만 카이젤은 일푼의 관심도 두지 않고 

마나이츠의 탈을 쓴 넬피엘을 쏘아보았다. 

"마법 학도 시절부터 연구실을 수면실로 알았다는 마나이츠님께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있을까요?" 

넬피엘은 다시금 찔끔하고 말았다. 확실히 마나이츠는 일찍 일어나는 시간이 드물었다. 해가 한창 떠올라야  깨어나

는 것도 그가 억지로 깨워서 일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야 집사라는 이유로 새벽부터 일어나서 분주하게 움직

였지만‥. 

"저, 적어도! 남의 집에 와서는 식사시간 정도는 맞춘단 말이다!" 

그 사이 징징대던 레스난은 이런 소란 속에서도 침대가 실러오나의 품 인양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고 잠들어있는 블

리세미트를 보았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녀는 블리세미트의 이불로 파고들었다. 포근했다‥. 레스난의 입

장에서는‥. 

'응‥ 이건 뭐지?' 

단, 블리세미트의 입장은 달랐다. 찬바람을 피해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서야 안도한 그를 어떤 무언가가  다리에서부

터 쓰다듬으며(?)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음!? 응! 앗! 아흑!" 

서로를 쏘아보며 살기를 뿜어대던 마나이츠와 카이젤은 갑자기 귓가를 자극하는  묘한 신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

들이 다음 순간 살기 대신 땀을 흘려야 했다. 이불 위로 얼굴만 내놓은  채 울먹이는 어린 사제와 침대 중간쯤에서 

꼬물거리며 올라가고 있는 물체. 마치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발버둥치는 듯한 형상을 띄고 있는 물체를 블리세미트

는 감히 쳐다보기도 무서운지 눈을 꼭 감고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카이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이불을 들쳤다. 비밀(?)에 쌓였던 물체가 들어  났다. 블리세미트를 묘하게 자극하던 것

은 레스난의 긴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그걸 모르는 블리세미트는 기도하듯이 중얼대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돼요. 전 이 한 몸, 실러오나에게 바친 경건한 성직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언제 일어났는지 구석에서 사론이 웃음을 참느라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오늘은 너희들이 마음대로는 안돼!" 

카이젤의 단호한 말에 블리세미트와 레스난은 시무룩해졌다. 그런 둘의 머리를  강렬하게 내리치며 사론은 씨익 웃

었다. 

"대신 오늘은 옷을 사잖냐?" 

"아욱! 사람의 삶에 있어서 옷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신의 축복으로 춥지 않고, 배를 만족시키면서 살 수 

있다면‥." 

사론은 손을 들어 경건한 성직자의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초롱초롱한 눈동자들. 블리세미트는  한숨

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여자는 제외하도록 하죠‥." 

마녀인 파마리나도 기대에 찬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일행을 살펴보다가 블리세미트

는 뭔가 부족함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시즈님과 아리에님은 왜 안오신 거죠?" 

"아리에가 감기에 걸렸거든‥. 사실 오늘 옷을 사러 가는 이유도 그녀의 전처를 밟지 않기 위해서지‥." 

'난 모두 다 알지롱‥.'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나쳐 가는 난쟁이 노인. 토루반이었다.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2)

"미안해요. 내가 어제 너무 늦게까지 잡고 있어서‥."

"음‥ 아냐. 내가 허약해서‥ 엣취!"

그렇기 보다는 옷을 너무 얇게 입은 게 이유일  것이다. 시즈야 언제나 날씨가 춥건 덥건 꽤 두껍게-  여름에도 긴 

코트를 입을 정도다 -무장을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직 가을에 맞춘 의복이었던 것이다. 아리에도 그 대상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데 눈까지 내린 밤을 새벽까지 지새웠으니‥. 과연 무엇이 그녀에게 추위마저 이겨내게 만들었을까?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

"시원해‥."

아리에는 와 닿은 시즈의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얼굴을 부볐다. 잠깐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던 

시즈는 이마에서 손을 멈췄다.

"물수건을 새로 갈아오는 게 좋겠는걸."

"괜찮아‥. 네 손이 더 차가우니까. 그것보다 좀 가까이 와 줘."

병자가 왜 그리 힘이 쎈 건지‥. 어쩌면 시즈가 반항하지 못 하기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의구심에 젖어 다가온 그의 

눈동자는 말똥말똥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게 재미있는지 흥미롭게 구경하던 아리에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 시즈의 

입술을 급습했다. 

"으음‥."

피살자(?)에게서 들려오는 깊은 신음‥ 그것은 매우 농밀한 직격탄일 게 분명했다. 그렇잖아도 감기의 열기로 붉었

던 아리에는 홍당무가 된 얼굴을 띄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감기 예방약이야."

그러게 말하고 그녀는 수줍음을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으로 숨겼다. 시즈만 달아오른  입술의 열기를 식힐 

곳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할 뿐. 눈만 이불 밖으로 들어낸 아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나이츠님은 다시 나가신 거야?"

"으‥응. 아무래도 껄끄러운 모양이에요."

"에? 누가?"

문득 시즈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보면 참 순진한 듯 하면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아마도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마나이츠님은 어제 뭘 하다가 오신 겁니까?"

"적어도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가졌는데 잘 곳이 없겠어?"

뒤에서 이죽거리는 카이젤을 넬피엘은 영혼까지 태워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실제의 마나이츠가 저 녀석한테 이렇

게 시달렸는데 아직 살려두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자기  주인의 성품을 의심해보는 넬피엘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다. 카이젤은 겁 없이 덤비는 이유는 이미 마나이츠에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악에 받쳤기 때문이었다.

"허허‥. 저 썩어빠진 녀석 말대로 마법사가 아닌가. 당연히 궁정의 마법사들을 만나고 왔지."

억지로 웃는 기색이 분명했다. 마나이츠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에서  위험한 감각을 전달받은 토플레는 보를

레스에게 슬쩍 신호를 보냈다. 미세한 눈신호를 눈치챈 보를레스가 조용히 카이젤의 목에 팔을 걸어 골목길로 사라

져갔다. 잠시 후 다음 골목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카이젤은 매우 온순해져 있었다. 무슨 이유일지 모르지만 그가 

다리를 절고 있는 걸 본 피브드닌은 고개를 저으면서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사려는가보지?"

파마리나와 레스난이 거리에 걸려있는 옷과 옷감을 만져보고 볼에 비벼보며 의견을 교환하고 있자 마나이츠가 물었

다. 솔직히 두 여인의 의견이래봤자 '꺄‥아. 부드럽다.' '색깔 곱다아‥.'하는 정도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꽤

나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는 걸로 보였다. 현재 '과연  여자들은 여자군. 옷감에 대한 이해가 역시‥.'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귀가 시즈처럼 좋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마녀와 인어에 대한 환상이 확 깨는 군요."

피식 웃으며 사론이 말했다. 토플레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이렇게 말하고 싶군. 저 깔끔한 검은 로브를 입은 미모의 여인은 모기 눈알을 수집하

는 마녀고‥. 그 옆에 늘씬한 다리의 활달한 느낌을 주는 소녀는 사실 비늘이 잔뜩 있는 꼬리를 가진 인어라고‥."

"그랬다가는 마녀 사냥을 계획하는 흑마법사로 혼쭐이 날 걸."

"저 두 사람 그냥 놔둬도 괜찮을까?"

마나이츠의 음성에는 약간의 걱정스러움이 배어있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두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재미있겠군."

아마도 토루반은 처음부터 그런 상황이 될 줄 예측하고 있었던 듯 하다.  과연 드워프의 현자‥라고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에 일어날 장면은 그리 즐길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찌푸리며 뭐라고 한 마디 

하려던 블리세미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두 여인에게 걸어갔다. 토플레의 대꾸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될지 내기하실래요?"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3)

"무슨 내기인가?" 

뒤에서 일행일지 모르는 사람들의 쑥덕임이 들렸지만 남자들은 상관없었다. 지금 옷을 고르는 여인들은 수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급 옷감도 아닌 평범한  옷의 진열장에서 꺅꺅하고 소리를 질러대

는 게 분명 시골- 확실히 레스난의 경우는 시골도 아주 심각한 시골이라고 봐야하니 틀린 생각은 아니다-처녀들이 

수도 구경을 하러 온 게 분명했다. 일행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 수도에서 갈고 닦은 자신들의  매너와 기름을 잘 

발라 고소하게(?) 구워낸 말솜씨를 당하겠는가. 

"이봐요. 아가씨들‥. 펴온은 처음이로군?" 

외모로 따지자면 제법 여자 꽤나 울렸게나 싶은 금발의 청년은 한쪽 눈을 찡긋하고  말했다. 뒤에 있는 두 명의 젊

은이는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요‥." 

낯선 사람이 말을 걸자 금발이 길게 내려앉은 소녀가 검은 머리카락의 날카로운 여인의 등뒤로 숨으며 대답했다. 

'흐흐‥ 부끄러워 그러는가보군.' 

이쯤되면 착각도 유분수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레스난이 그를 피한 이유는 일행 이외의 인간에게는 절대로 익숙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사내가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레스난 역시 반쪽

이긴 하지만 생선이 자랑하는 육감(六感)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파마리나 역시 위험을 느낀 것은 마찬가지였

다. 생선의 육감은 아닐지라도 주위에서 하는 소리 정도는 충분히 들리는 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놈한테 걸리다니 또 괜찮은 처녀 하나 버리는 구나‥." 

"저런 놈은 그 곳에 악성종양이나 생겨야 되는데‥!" 

그러나 금발의 청년 뒤의 사내들이 한 번 주위를 훑어보자 곧 조용해졌다. 능숙하게 벽에 팔을 기대고 모션을 잡은 

금발 청년은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걷어올리고 말했다. 

"아름다우신 두 아가씨들만 거리를 떠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도시를 안내해주지." 

"필요 없어." 

'음, 튕기는 군. 강렬해. 사냥하는 재미가 나는 군.' 

"그런 소리 말아요, 아가씨. 둘이서만 있다보면 심심할 테니까 우리가 

즐겁게 해주려는 거야. 원한다면 이런 싸구려 옷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것도 얼마든지 사주지." 

파마리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일행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실험용으로도  쓸 수 없을 종자-눈

동자가 흐릿하면 재료의 품질이 떨어진다고 한다-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옷자락을 꼭  잡고 있는 레스난을 이

끌고 귀찮은 존재를 피해 나오려는데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던 두 사내가 길을 막았다. 제법 덩치가 큰 게 주먹 좀 

쓰게 생긴 둘은 이 주변에서 시비 걸리기를 피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렇게 피할 것 없다니까‥. 이성끼리 섞여서 쓸쓸함을 좀 달래보자 이거야." 

"그만 두시죠." 

'쳇! 남자가 있었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앳된 음성이었다. 고개를 돌린 사내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작 16세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소년. 어느 신전의 견습생이라도 되는지 신관들의 복장을 입고 허리에 양 주

먹을 꼭 쥐어 올린 채 노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섭다기보다는 귀엽기만 했다. 

"꼬마, 넌 뭐야? 어른들 하는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게 좋단다." 

"전 소레인 교단의 사제입니다. 어른이든 어린애든 해서는 안될 짓을 당신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만 두세요." 

"신관이 꿈이라면! 포교나 잘 하라고!" 

건장한 사내 중 갈색의 가죽옷을 입은 자가 대끔 주먹을 내뻗었다. 보통 신관이었다면 꼼짝없이 눈에 퍼런 멍이 들

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리세미트는 마지막 '사막의 신부'였다. 붉은 뱀의  사원에서는 사원 가까이에 산재하는 몬스

터들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게 호신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공격하는 팔과 방어하는 팔이 교차하는 소리가 울렸다. 꿀의 냄새에는 벌레가 꼬이듯 사람들이 많고 먹을 게 있는-

시장- 곳에서 의례 볼 수 있는 건달이라고 생각했던 사론과 보를레스는 긴장했다. 전투에 전문인  그들이 볼 때 가

죽 옷의 남자가 지른 주먹은 제대로 가격당하면 목숨도 뺏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뒤에서 아직까지 여인들이 건달

을 어떻게 처리할지 내기를 걸고 있는 토루반과 토플레가 한심스러웠다. 그들은 여자들이 마법을 써서 건달을 혼내

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마법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아니, 마녀

인 파마리나라면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더 문제였다. 

'블리세미트의 격투술이 뒤떨어지진 않는다. 다만, 힘에서 너무 차이가 나‥.' 

보를레스의 걱정과는 달리 블리세미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내의 공격을 넘겨버렸다.  마치 앞의 금발 사내가 폼

잡고 머리카락 넘기듯이 가볍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붉은 뱀의 사원'에서는 격투술을 사람보다 힘이 비교도 할 

수 없는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 가르친 것이어서 소년에게 사내의 공격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타격을 흘

리는 기본 방법은 공격의 방향을 틀어주는 것이다. 

타악! 

날아오는 주먹 아래 손목을 밀어 공격을 빗나가게 한 블리세미트는 펄쩍 뛰어오르며 발끝으로 가죽옷의 턱을  노렸

다. 깔끔한 동작. 턱과 목이 만나는 부분은 급소 중에 하나로 날카로운 발차기가 성공했을 경우 사내는 기절할 수도 

있었다. 

'막는 것은 늦었어.'하고 급히 고개를 트는  사내. 얼굴을 스치는 소년의 공격에 사람들은  아쉬움이 내포된 탄성을 

질렀다. 분노한 가죽옷 사내가 외쳤다. 

"이 녀석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사실 처음부터 봐준 적이 없었다. 다만 소년이 공중에서 운신(運身)의 곤란으로 방어하기 힘들다는 상태가 되자  기

세를 올리기 위해 소리친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실로 느끼질 정도로 사내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공

격의 준비자세를 취하는 그는 더없이 신중했다. 생각 이외로 뛰어난 격투술을 가진 소년 신관의 발이 땅에 닿는 순

간을 노리고 있었다. 피한다면 넘어질 테고 막는다면 힘의 차이로 뼈가 부러뜨릴 수 있다는 결론이 그의 머리 속에

서 공격할 타이밍을 조심스레 잡아갔다. 

"지금이닷!" 

빠직! 

가까스로 두 팔을 겹치는 블리세미트.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4)

그릇 안에는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김이 되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안을 스푼은 유람하는 배처럼 이

리저리 휘젓다가 살며시 내용물을 들어올렸다. 감기 열 때문에  더욱 빨간 입술은 오물거리며 잠시 기다렸다. 어느 

정도 김이 잦아들자 입은 천천히 벌어지고 그 안으로 자취를 감추는 스푼.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것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후우‥ 뜨거워."

식힌다고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성급했던 모양이다. 지켜보던 시즈가 얼른 물을 건넸다.

"조심해요."

"음, 괜찮아. 맛있는 걸."

식욕을 느낀다는 것은 회복의 징조였다. 기쁜 마음을 가미한 채 물끄러미 시선을  떼지 않는 시즈에게 아리에는 불

만을 토로했다.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먹을 수가 없어."

"아! 미안해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 시즈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 밖에 놓아둔 물수건을 가져오려는 것이다. 겨울

이 다 된 만큼 물이 든 용기에 수건을 넣어 밖에 놓아두면 쉽게 차가운 기운을 잡아올 수 있었다.

"배가 고팠나요?"

"헤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잖아."

아리에가 금방 빈 용기를 내밀자 시즈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이마에 수건을 얹혔다. 눈

동자가 시릴 정도의 차가움에 아리에는 부르르 떨었다.

"다들 옷을 사러 갔지? 나도 새옷을 사고 싶은데‥."

"몸이 낫게 되면 밤에라도 저와 같이 나가죠. 펴온은 수도라서 밤 늦게까지 장이 열려있을 겁니다."

"그럴까?"

삐진 얼굴로 입을 삐죽이다가 시즈의 말에 금새 반색을 하며 좋아하는 게 완전히 어린애였다.

'보모가 된 기분인 걸‥.'

어린애는 보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빙그레 웃음을 보이자 마냥 좋아서 헤헤거렸다. 

"그런데 걱정이야. 이 사람들이 말썽이나 안 피울지‥. 우리 일행이 어느 정도 괴짜들이어야지. 제대로 된 사람이라

고는 사론 밖에 없으니‥. 블리세미트는 아직 어린애고‥."

"걱정 말아요. 혹시나 싸움이 벌어진다고 해도 군대하고도 견줄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게다가 마나이츠님도 계시잖

아요."

"지난번처럼 블리세미트와 레스난만 먹을 걸 찾아서 떨어지게 되면 큰일이잖아."

그녀의 말에 시즈는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아마도 아리에가  말한 상황을 머리 속에서 그려보는 듯 했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역시 걱정 없어요. 적어도 '사막의 신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면 격투 기술 정도는 익히고 있을  거 에요. 아리에, 

기억 안 나요? 전날 보았던 '사막의 신부'들이 싸우던 모습이? 블리세미트는 강하답니다."

"꺄악! 블리세미트!"

보를레스의 예측대로 부딪힌 양측의 힘 차이는 엄청났다. 소년이 바닥에 부딪히고서도 몇 바퀴나 땅을 구르자 기대

감 반, 불암감 반으로 지켜보던 파마리나는 얼굴을 찌푸렸고 그녀의 등 뒤로  레스난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묻었

다. 장난이나 치고 있던 토루반과 토플레도 어느 새 눈을 차갑게 빛내고 있었다.

"아직 아니다."

당장 뛰어나가려는 사론을 보를레스가 말렸다. 블리세미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크윽!"

블리세미트는 손목을 돌려보며 팔의 상태를 점검했다. 상당한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뼈에 이상이 있거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뭐지? 착각인가?"

'뼈가 부딪히는 느낌이 적었다. 닿는 순간 물속에서 움직이는 듯, 아니 끈끈한 꿀 속에서 움직이는 듯 했어.'

뭉클하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이 그의 주먹을 완충시켰다. 그는 소름끼칠 정도로  분명히 남아있는 감각의 흔적을 고

개를 저으며 착각으로 치부했다.

"그냥 놔둬도 될까요?"

침을 꿀꺽 삼킨 사론이 보를레스에게 물었다.

"아마도 괜찮을 걸세."

하지만 대답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마나이츠는 손가락을 블리세미트의 팔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걸 보라고. 팔 주변이 다른 곳보다 뿌옇게 보이지? 저것은 신성력이 발휘되었었다는 증거야.  아마도 신성력으로 

결계를 만들어서 덧씌웠겠지. 저 아이는 전설로만 일컬어지는 '사막의 신부'로군."

"결계요?"

사론은 물론 보를레스조차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아는 결계라면 무언가를 보호하거나 봉인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었다. 하지만 확실히 노마법사가 가리킨 블리세미트의 팔뚝에는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나이츠가 말을 이었다.

"사막의 신부들은 사막이라는 불모지와 더불어 강한 몬스터들과 싸우기 위해서 신성력을 그냥 사용하기보다 결계로 

형성시켜 몸의 부위를 보호했다고 하더군. 옛 문서에서는 멋대로 '성투결계'라고  이름을 붙여 놨더군. 그러니까 저 

사제는 '사막의 신부'겠지. 미약한 결계지만 저 정도의 공격은 막아낼 수 있을 거야."

"성투결계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사막의 신부'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은 성투사들이 사용하는 신성강화법과는 다

른 종류입니까?"

묻는 보를레스의 얼굴이 암담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헤모라는  이름으로 친구가 되었고 헤라즈라는 이

름으로 적이되었던 성투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분명 그는 맨손으로 칼도 받아냈었지‥.

그의 기세가 험상궂어진 걸 느낀 마나이츠가 흘깃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성투사라고 일컬어지는 신성 전투집단은 사실  고대 소레인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  현재는 레이모하의 성투사 

밖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하지만 일당백이라고 일컬어지는 성투사의 신성강화법은 안타깝게도 저 꼬마가 쓰는 방

법을 흉내내기 위한 편법일 뿐이야. 뭐 그 종류대로 발전이 되었다지만 성투결계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하지. 성투결

계는 엄청난 신성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내거든. 저 꼬마만 보아도 신성력 자체만으로는 대주교, 아니 

교황과도 겨룰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저토록  미약한 결계를 형성한다면 말 다한 거지. 그래서  사용한다면 '사막의 

신부'라고 판단된다네."

말을 주고받는 사이 소년 사제와 사내는 다시 공격과 방어를 교환하고 있었다.  요란스러운 발차기를 작은 키를 이

용하여 피한 블리세미트는 빠르게 달려들어 발로 사내의 가슴을 강하게 가격했다. 한  번에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

는 급소는 아니었지만 몸통은 피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맞았을 때 아프지 않을 리

가 없었다. 가죽옷의 사내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블리세미트가 그의 발뒤

꿈치를 차올리고 그 기세로 회전하면서 지면에 닿아있는 다른 발을 걸었다.

쿵!

가죽옷의 사내는 정신이 없었지만 다음 순간 위기가 온다는 걸 지금까지의 전투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제빨리 옆

으로 구르자 그가 있던 자리에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 사제의 발이 떨어졌다.

"우‥!"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의 야유를 보낸 이유는 가죽옷과 한 패인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소년을 공격했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런 야유에 신경쓸 건달들인가. 아예 한 층 더 나아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는 그의 손을 누군가 

잡았다.

"뭐야? 넌."

"당신은 내가 상대하지."

사론은 강하게 사내의 손목을 비틀었다. 비명을 지르며 단도를 떨어뜨린 건달 사내는  남은 손을 번쩍 들어서 머리

를 때리려 할 때 사론의 주먹이 그의 복부 깊숙이 파고 들었다.

"크윽!"

"이 정도로 하지‥."

두 건달들이 바닥에 누웠는데도 금발의 청년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빙긋이 웃더니 파마리나를 보고 물었

다.

"동료들입니까?"

끄덕.

"대단한 동료들을 두셨군요. 본심이 아니게 무례를 끼친 것 같습니다. 다음에 뵈었을 때 다시 사과하도록 하죠."

청년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조용히 비켜섰다. 그리고 두 건달들마저 그의 뒤를 따라 모습을 감추자 그들은 블리세미

트에게 몰려들었다.

"어이‥ 신관님. 주먹이 대단하던데!"

"무슨 소리야? 발차기가 더 대단했다고!"

"그렇게 싸움을 잘해서 신관 맞나? 혹시 성투사 지망생 아니야?"

극성스러워진 사람들 때문에 블리세미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한 편, 뒤에서는 피브드닌이 잔인한 미소를 지

으며 토루반과 토플레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자아‥. 1 타로운씩 줘요. 또 내기가 있으면 하자고. 언제든지 환영하죠. 후후후훗‥."

'역시 도박은 수학이야!'라고 내심 중얼거려보는 피브드닌이었다.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5)

"그런 일이 있었어? 대단해, 블리세미트."

"시, 실러오나를 모시는 자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도 들지 못하는 이 소년이 과연  여자들을 희롱하던 건달들과 맞서 싸우던 열혈 사제가 맞는 

걸까. 그의 뒤통수를 꾹 누르며 보를레스가 낄낄거렸다.

"이 녀석, 그런 재미없는 말이나 하다니‥."

"보를레스, 무서워서 숨어있던 주제에‥."

"무슨 소리야!?"

다 알고 있다는 듯 파마리나가 코웃음쳤다. 그녀야 원래 냉소적이니 이해했지만 보를레스가  참을 수 없는 게 있었

다.

'정말일까?'하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레스난의 순진한 얼굴. 보를레스로서는 한 인어가 정말로 자신을 겁쟁이로 확정

짓기 전에 열심히 부정해야 했다.

"아! 레스난, 옷은 많이 샀어?"

도리도리. 그 질문을 기다린 모양인지 레스난은 얼른-순식간의 돌변이었다.- 울먹거리며 파마리나를 가리켰다.

"아니, 파마리나가‥."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아리에. 글쎄‥ 레스난이 무슨 무도회를  가는지 드레스를 몇 벌이나 살려고 하잖아. 우리는 

어차피 여행을 떠나야하는데 말야‥. 그래서 내가 깔끔한 여행복을 골라줬지. 때가 타지 않는 남색으로 말야!"

"전혀 로멘틱하지 않은 색이란 말야!"

결국 레스난은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만약 그 때 카이젤이‥

"감기 옮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리저리 삐쭉거리며 들쑥날쑥하던 그녀의 입술은 카이젤이 귤을 권함

으로 원상태로 복귀되었다. 레스난의 울음 경보에서 벗어난 파마리나는 눈을 반짝이면서 아리에에게 말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아리에, 아침에는 열이 펄펄 끓었었는데 많이 좋아졌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간호는  헌신적

이야‥. 어떻게 했길래 벌써 완쾌에 가까운 거야?"

그녀는 조용히 서있던 시즈에게 화살을 돌렸다.

"시즈, 말해보라고. 누른 거야? 만진 거야? 핥은 거야?"

"쿨럭! 쿨럭! 쿨럭!"

제법 온유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던 시즈로서는 치명타였다. 사론의 주먹이 복부에 꽂혔던 사내처럼 그는 기침

과 함께 차를 내뿜었다. 그리고 눈물마저 맺힌 얼굴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파마리나, 핥다뇨‥. 처음에 수프의 양이 많아서 아리에가 남긴 걸 먹기는 했지만 접시를 핥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토루반은 창틀에 서 밖을 보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곤란해보이는 시즈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너무 신경쓰지 말게. 아까 블리세미트의 소동이 끝나고 간 주점에서 사람들이 술을 준 모양이야."

"도대체 몇 잔이나 마셨길래‥."

"얼마 안 마셨어. 혼자서 한 세 병정도‥. 그 정도면 기

분이 상승되기에는 충분하지. 그나저나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군."

그 정도면 충분을 넘어서 기분이 하늘이라도 날았다가 속을 버려서 땅에 처박힐 정도의 양이었다. 시즈는 토루반도 

취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깜빡 잊고 아리에 옷은 사지 않았어. 미안해."

"아, 아니야. 곧 시즈와 사러 나갈 거니까."

그러면서 아리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에 여자라고는 셋 뿐이었는데 그 셋이 나란히 어두운 색상의 여행

복을 입고 걸어간다면‥. 그녀는 끔찍한 상상을 고개를 저어서 날려보냈다. 하지만 파마리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아리에‥ 혹시 일부러 아픈 척 했던 거야?"

마녀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아리에는 말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아리에, 시장에 다녀올 거면 일찍 다녀오는 게 좋을 거야. 아까처럼 건달들이 낮에도 활보하는 걸  보면 밤에는 더 

심할 테니까."

"블리세미트와 사론이 혼을 내줬다면서요‥."

피브드닌은 심각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청년이 마음에 걸려. 그게 임기응변이었는지 다른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생각하나 상대하기 곤

란한 녀석임은 분명해. 그리고 아까 마지막에‥ 한 말‥."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시즈가 함께 가니까."

"뭐 그렇기는 하겠지만‥."

피브드닌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콧수염의 끝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했다. 가라앉으려는 조짐을 보이는 

방안의 분위기. 토루반은 방구석에서 졸고 있는 토플레의 옆구리를 발로 꾹꾹 찔렀다.

"토플레, 마나이츠 못 봤나?"

"몰라요. 또 궁정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곳에 갔겠죠."

"우리가 껄끄러운 걸까? 쩝, 그리고 자네 졸리면 우리 방에 가서 자라고."

"쳇! 여자들이랑 좀 같이 자볼까 했더니!"

토플레의 투덜거림. 파마리나는 친절한 어조에 살기를 집어넣고 물었다..

"제가 방으로 보내 드릴까요?"

"흥! 난 육체파라고!"

토플레가 나간 뒤 잠시 후 계단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체파가 발을 헛딛어 넘어지는 소리였다.

한 편, 피브드닌을 불안하게 만드는 주범. 금발의 청년은 어두운 골목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까워. 정말 미인들이었는데‥."

"그 꼬마와 기사만 아니었어도‥."

"조용히 해. 어쨌든 네 녀석들이 그들에게 당해서 그런 거 아닌가? 엣취! 젠장! 눈이 내리기 시작하잖아!"

"‥‥."

그는 발을 구르며 후회했다. 소년 사제 혼자였을 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제압을 해버릴 것을. 어리다고 얕본 댓가 

였다. 게다가 기사는 정식 수업을 받은 듯 그조차도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 때 낮의 가죽옷 사내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페스튼!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건 듯 것 같아. 그 녀석들은 마나이츠  공작의 성으로 들어가더라고. 공작의 손님이 

모양이야."

"가족인가?"

"거기서 일하는 잡부한테 물어보니 그건 아닌 것 같던데!? 다른 귀족의 전갈을 가져다준 심부름꾼들이래. 기사들은 

호위고."

"제법. 중요했던 문서였나보지? 그래도 기사로 보이는 녀석은 고작 두 명에 불과해. 아아‥ 그 꼬마 신관도 있었지. 

뭐, 상관없어. 애들을 불러모았겠지?"

다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론에게 복부를 맞았던 자로 주먹에 박쥐 날개 형상의 문신을 가지고 있었다.

"못 되도 스물은 돼. 곧 있으면 오겠지."

"그래야지. 5 타로운이나 주었는데. 애 하나 보내서 놈들이 언제 나올지 감시하라고 해."

페스튼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낼름거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사들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불러모은 건달들은 수

도의 암흑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무리들이었다. 

"응!?"

그 때 그의 눈동자가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빛났다. 먹

이를 아래위로 감식해본 금발 청년은 감탄을 토했다.

"호오‥ 오늘은 운이 좋군. 저런 미인이 또‥. 윤기나는 머리카락이 정말 감질맛나게 생겼군."

그는 두 사내에게 무언가 작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다며 그들이 사라지고 페스튼은 사냥을  위해 골목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사냥감은 검은 흑발이 어깨를 은근히 덮었고 쌓인 눈빛에  비쳐 얼굴은 달빛처럼 하얀 여인

이었다. 털이 풍성한 동물의 모피를 걸친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따라오는 청년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유∼! 시즈, 빨리 좀 와!"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6)

아리에는 감기가 아직 다 낳지도 않은 주제에 눈이 온다고 잔뜩 들떠 있었다. 한 두 번 해보는 게 아니었지만 시즈

와의 외출은 언제나 설레었다. 느그적느그적 다가온 시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춥지 않나요? 감기가 낫지 않았잖아요. 내일 낮에 사러가도 괜찮을 거에요."

"아냐아냐아냐! 괜찮아. 다 나았어"

병아리가 날개 퍼덕이듯이 양손을 휘젓던 아리에는  쪼르르 시즈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시즈의  키가 작아서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행복한 표정은 보는 이들에게 둘이 어떤 커플보다도 잘 맞는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

다. 물론 반(反)하는 무리도 있기 마련이다.

"어이, 아가씨. 아름다우시군요. 아무래도 옆의 남자보다는 제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십니까?"

시장의 불빛이 어렴풋이 보이는 지점이었다.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금발의  청년은 다짜고짜 길지도 않은 아리

에의 머리카락 향기를 맡으면서 말했다. 잠시 아리에는 굳었다. 그리고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어서 꺼지지 못해?"

"엥!?"

페스튼은 갑자기 터져나오는 그녀의 살기에 흠칫하고 물러섰다. 시즈가 옆에서 킥킥대고 있었다. 아리에는 일  년이

나 무식하고 포악한 용병들과 어울린 여인이었다. 그 동안 시즈와 보를레스에게 짐이  되지 않게 부단한 노력을 한 

덕에 그녀의 단검술은 날아가는 새도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더니 과연 그러하군요."

"알면 꺼져."

"그러나 가시를 무서워한다면 꽃을 꺽을 수 없지요."

금발 청년이 능글맞은 미소를 짓자 아리에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여자 꽤나 울릴 미남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징그맞은 변태로만 보일 뿐이다.

변태가 손을 들자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낮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페스튼은 한 번에 나무를 찍

어 쓰러뜨리는 방법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난 머리가 좋단 말이야.'

그러면서도 사내는 왜 아리에 옆의 청년이 싱글거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가씨, 조용히 우리랑 가자고. 잘 해준다니까. 이런 프로포즈하는 사람도 없어."

"그리 재미없군요."

웃고 있던 청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 작은 동작은 오묘해서 흑발 소녀를 페스튼의 시야에서 완전

히 가려버렸다. 청년은 키가 무척 작았는 대도 말이다. 불안감을 애써 감춘 페스튼은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싼 사내들이 두 남녀를 조여들었다.

"싸우자는 뜻입니까, 이건?"

"무슨 소리를‥ 우리는 그저 자네에게 과분해 보이는 그 숙녀 분을 인도 받으려고 하는 거야."

"아리에, 인도 되고 싶나요?"

"내가 미쳤어?"

아리에가 빽하고 소리를 질렀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귀를 막고 있던 시즈는 씩 웃었다.

"들었죠?"

"후후‥ 글쎄. 우리는 귀가 나빠서‥. 혹시 자네가 인질로 잡고 있는지도 모르잖나."

시즈는 무기를 가져오지 않을 것을 후회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상대는 적어도 스물이 

넘어보였고 그 안에서 아리에를 지키면서 싸울려면‥.

퍽!

"어딜 만지는 거야!?"

충분하겠군. 아리에의 발차기가 한 사내의 코에 정확하게 작렬하자 시즈의 걱정은 저 멀리 달빛에 섞여 스러져버렸

다. 그리고 순식간에 뻗어간 그의 주먹이 오른쪽에서 각목을 내리치려고 다가오던 남자의 옆구리에 박혔다.

"끄아아악!"

우두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는 길게 비명을 터뜨렸다. 그것을 신호로 싸움꾼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간단하게 시즈와 아리에는 등을 맞대고 때리고 차고 밟아버렸다. 특히 건달들이 무기를 쓰기 시작하자 발휘된 아리

에의 단검술은 화려했다. 바로 앞에서 당하는 남자 같은 경우는 검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허리끈이 

풀려 당황하는 순간 시즈의 발이 그의 턱을 걷어올렸다. 에릭사를 마신 후 육체적인 능력이 가히 초인에 가까운 시

즈였다. 바로 기절해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직도 저의 인질을 데려가실 요양이 있으십니까?"

페스튼의 눈가는 마치 찢어진 거미줄처럼 주름이 져있었다. 나무에 기대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조용히 윗옷을 벗

고 자세를 잡았다. 시즈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 추운 날씨에‥.'

상대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는 그를 아리에가 만류했다. 혀를 쏙 내민 그녀의 주위로는 싸움의 열기로 인해 김

이 솟아났고 공작이 빌려준 양털 모피는 바닥에서 눈과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모피를  주워 올려 눈을 털어 낸 시

즈는 아리에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이쪽 인질이 상대해겠어."

페스난이 얼굴을 찌푸렸다.

"난 적어도 신사요. 여자를 상대하진‥."

팍! 그렇지 않아도 추운데 식은땀이 흘렀다. 기대고 있던 나무에 꽂힌 단검이 자신을 겨냥했더라면 과연 피할 수 있

었을까라는 의문이 들며 그의 근육이 긴장으로 수축됐다.

"신사치고는 말이 너무 많아."

"좋소. 그쪽 친구가 끼어 들지 않는다면‥."

"걱정마. 시즈는 남자니까."

그녀는 건달들을 앞세워 둘을 제압하려한 페스튼을 비꼬는 것이다. 금발 청년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거칠게 가

죽 장갑을 끼고 그 위에 암렛을 착용했다.

"시작해볼까."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7)

오랜만에 자유. 청년을 묶어 두었던 것은 자신의 결심이었고 그런 족쇄를 풀어헤친 그의 느긋함은 자세에서도 드러

났다. 더구나 지금 몸을 눕히고 있는 지붕은 제법 금전적 여유가 있는지  굴뚝 주위까지 뜨끈뜨근했고 청년의 마음

을 더욱 풀어놓았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조금만 주의하여 살펴본다면 그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붉은 모발이 무척 화려했지만 단정하

게 정리되어 있었고 붉은 빛이 묘하게  감도는 흑색의 복장은 깔끔함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다만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포즈와 장소가 문제겠지만‥.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가 향한 곳은 조용해야 할 밤인데도 불구하고 소리가 요란했다.

 "제법이군."

역시 싸움 구경은 재미있었다. 게다가 여자와 남자가 막상막하로 싸우는 턱에 흥미는 몇 배에 달했다.

 "윽!"

가까스로 사내의 주먹을 피한 여인이 뒤로 물러서자 넬피엘은 내심 중얼거렸다.

 '맞으면 아프겠군.'

남자는 맨손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장갑은 손가락 마디와 손등에 철판이 붙어 있었다. 특히 손등의 철판은 두꺼워 

아직 소녀 티를 벗지 못한 여인이 휘두르는 단검 정도는 가볍게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인의 단검은 무시할 게 못됐다. 그녀의 뒤에 있는 남자, 시즈는 그녀의 연인이었기  때문에 위험

하다면 뛰어들텐데 그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니까. 그만큼 여인, 아리에의 공격은 매서웠다.

 "귀족집 숙녀가 익힐 기술이 아닌데‥."

어찌보면 조잡하게 느껴지는 게 단검술이었지만, 접근해서 싸울 때 그 변화무쌍함과 쾌속함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물론 격투술도 마찬가지였다. 검이 빠른 것과 주먹이 빠른 것은 아무래도 강도와 날카로움에서 차이가 있었다. 넬피

엘은 언제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소녀와 아리에를 비교해보았다.

 "그 녀석이 훨씬 강하겠지만 저 여인은 속성으로 익힌 듯 하니까‥ 비슷하다고 봐야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갑자기 치솟았다. 

 '아릴‥.'

더 이상 보고 있다가는 정말로 그녀를 찾아갈 지도 몰랐다. 넬피엘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라졌다.'

시즈는 넬피엘이 있던 지붕 위를 흘깃 쳐다보았다. 자신처럼 바람의 표연함도 아니었다. 마치 불꽃이  사그라들다가 

한 순간에 꺼져버리 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바람의 감각으로 주위에서 그의 기운이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는 걸 알

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뿜었다.

 "영악한 계집!"

페스튼은 오늘 하루는 행운이 아니라 불운의 날이라는 걸 점쳤다. 연약할 것만 같은 눈 앞의 미소녀는 번개처럼 검

을 찔리오는 걸로도 모자라 거둬갈 때도 손끝으로 회전을 시키며 시야를 혼란시키고 그의 주먹이 가는 길을 차단했

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제는 자존심 문제였다. 아무리 건달 짓이나 하고  있다고 해도 솜털도 안 가신 소녀에게 밀린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차가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맴돌자 아리에는 문득 불안감에 동작이 움츠러들었다.

바앗!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허리 밑을 쓸어 오는 발차기 공격에 아리에는 위로 뛰어올랐다. 단검술로 접근전을 구사하

고 있었던 그녀로서는 단 하나의 회피술이었다. 그 순간 뒤에 서있던 시즈가 움찔했다. 

모든 일에는 정직한 행동만 상수(上數)가 아니다.  결투에서도 마찬 가지인지라 전략과는 다른  속임수가 필요했다. 

작은 행동의 기색, 큰 과장의 동작 등  또는 실제로 공격하는 듯하면서도 힘이 전혀 들어있지  않아 타격을 입히지 

않고 다음 공격을 위한 자세를 잡거나 상대를 중요한  공격으로 끌어들였다. 동방의 무술가들은 이런 속임수를 '허

초'라고 하였는데 이런 수법에 능한 자들로는 당연 무술가나 무투가였지만  그보다도 뛰어난 자들은 어느 도시에나 

암흑 세계를 주름잡는 도둑과 건달들이었다. 특히 뒷골목의 물을 좀 먹었다하는 이들은 도망치기 위한 속임수를 따

로 준비하고 있어 그 표정과 기세에 휘말린 상대는  건달이 악독하게 함께 죽으려 한다고 착각하여 물러설 정도였

다. 항간에서는 그 순간 공격한다면 건달들의 주먹도 단순히 무시할 게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만약 그들의 공격이 

무투가들 이상의 파괴력만 담겨있다면 말이다.

 "속임수 였나?"

사내가 재빠르게 공격자세를 잡고 빠르게 접근하자 아리에는 경악성을 토했다.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어 물러설 수

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빨라!"

용병들이 행하는 임기응변을 수없이 보아온지라 아리에도  만만치 않았다. 아직 사내의 공격범위에  들어오지 않은 

그녀는 좌검(左劍)을 번개같이 내리그었다. 페스튼이 그대로 전진한다면 검에 맞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

에 떠오른 미소는 더욱 짙어졌을 뿐이다.

 "악!"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가 검을 손으로 잡아버릴 줄은‥. 검이 팍하고 살을 파고들며 피가 튀었지만 뼈를 자르진 

못했다. 공중에 뜬 자세에서는 무게를 실을 수 없었고 건틀렛의 가죽도 보호대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게 톡톡히 발

휘했기 때문이다.

 "속임수라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순진한 아가씨!"

그는 손에 피가 흐르는 것 따위는 전혀 상관없었다. 제대로 된 일격을 위해서  손에 생채기 난 정도는 애들 장난이

라고 여기는 것이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공중에서 아리에의 몸이 속절없이 기울어졌다.

 "흐압!"

그 순간, 아리에는 공포를 느꼈다. 드러난 이빨, 불을 뿜어내는 듯한 기합 소리,  맹수같은 눈빛. 그녀는 눈을 꼭 감

았다.

 "시즈으으으으!"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8)

팡! 

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뱃가죽이 터지는 소리일거야. 내장이 얼굴을 내밀었겠지? 얼마나 흉할까. 이런 저런 생

각이 아리에의 머릿속을 질주했다. 찰나가 영겁안 듯한 침묵. 그녀의 감각은 뭔가 빠져있는 조건을 감지했다. 

 '그런데 안 아프네.' 

용기를 가지고 힘겹게 눈을 뜨는 아리에. 그녀의 시야에 쏘아져 들어온 것은 한 손으로 자신을 안고 있는 시즈였다. 

그의 다른 손은 금발 사내의 주먹을 정확하게 막고 있었는데 그 손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뭐하는 거냐?" 

목표했던 복부가 아니었다. 페스튼은 싸움을 중단시킨 청년을 분노에 찬 표정으로 노려 보았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아리에는 무서움에 시즈의 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이 말을 듣자 화가 나기는 했다. 적어도 귀족일 때부터 넘쳐나던 자존심이었으니까. 그 자존심은 용병이 된 후 그녀

가 남자들에게 뒤쳐지지 않게 성장하게 만든 밑기둥이었다. 

 "그녀는 아직 하나의 검이 남아있었다." 

 "아마 당신의 공격을 아리에가 남은 단검으로 막았다고  해도 하나의 단검으로는 상처라면 몰라도 공격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전 그녀가 제 손바닥처럼 터져 나간다면 지금처럼 냉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협박이냐?" 

 "설명입니다." 

아리에는 시즈의 설명을 영상으로 떠올려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마도 좀전의 상상처럼 뱃가죽이 터진 채 내장

들이 흐물흐물 흘러나왔을 지도 몰랐다. 시즈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찢어진 걸레마냥 너덜너덜해진 손바닥이  피로 

후줄근했다. 

 "쳇! 재미없군. 시시해." 

잡아먹을 듯이 그를 쳐다보던 페스튼은 휙하고 몸을 돌렸다. 꼬리를 똘똘 말아버리고  연인 뒤에 숨은 여자를 보자 

투기(鬪氣)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어이, 여자. 다음부터는 얌전히 그 남자 품속에 숨어나 있으라고. 그 실력으로는 흉한 꼴밖에 못 당해." 

보통 사자의 탈을 쓴 늑대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시즈가 느낀 페스튼의 모습은 늑대의 탈을 쓴 사자였다. 사자에게 

물린 시즈의 손을 아리에는 천을 찢어 싸매고는 중얼거렸다. 

 "저 남자의 말대로 할까?" 

 "그렇다면 저로서는 편하겠지요. 꽤 큰 주머니를 마련해서 넣어 품고 다닐까요? 하하핫" 

 "흥! 뭐라고?" 

 "윽!" 

아리에는 시즈의 손을 감싼 천을 힘껏 조이고 아픔에 온몸을 부르르 떠는 시즈를 확 밀쳐냈다. 자존심이 고개를 든 

것이다. 

 "두고 봐. 시즈가 내 품에 들어가고 싶을 만큼 강해질 테니까." 

 "그래도 저로서는 편하겠네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세상에는 사자의 탈을 쓴 늑대도 있지만 늑대의 탈 쓰고 먹이를 

유인하는 사자도 있는 법입니다. 강한 자에게 지혜가 있다면 그만큼 무서운 것도 없겠지요. 이게 그 증거가 되겠구

요." 

시즈는 욱신거리는 왼손을 들어 보였다. 돌아가면 토플레에게 제법 잔소리를 들을 상처였다. 양털 모피를  아리에에

게 둘러주고 그는 중얼거렸다.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상처에요." 

다음 날, 

 "그냥 흑색 거성으로 돌아갈 텐가?" 

 "그렇습니다." 

킬유시는 시즈 일행에게 로바메트 공작을 만나보라고 하였으나 시즈는 거절했다. 전운(戰運)이 감돌고 있다는 것도 

모른 체 흥청망청한 귀족의 수도에서 어서 떠나고 싶었다. 

 "다음에 볼 때는 술잔 대신 검을 부딪히겠지." 

보를레스의 말에 펠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상대는 당신이 아니야." 

 "글세‥." 

그렇게 시즈들은 실베니아의 수도 펴온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펴온을 방문했을 때 이미 그 곳은 화려한 축제의 도

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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