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200)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1)

환기(環期) 4672년, 대륙 동남부의 국가, 실베니아. 나무들이 막 봉오리를 맺을  무렵, 킬유시 공작은 북동부 귀족들

의 동의를 얻어 방탕한 궁정타도를 천명(闡明)했다. 엘시크에서 일어났던 '봄의 혈사'와 더불어 46 세기의 봄을 장식

할 '봄의 반란'이었다. '봄의 혈사'가 일어난 지 정확히 2년 후였고 '마땅찮은 시즈'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였다.

 "설마하니 실베니아 사상 가장 성대한 축제가 시작되던 날 반란을 일으키고 케임성을 함락시킬 줄이야."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사내는 들고 있던 술잔을 한 번에 비워버렸다. 

 "가장 신민(臣民)의 고혈을 뽑아낸 축제겠지. 어쨌든 중앙 귀족들이 한 방 먹었겠어."

사내의 친구인지 맞장구를 치면서 술을 따른 남자는 멀리 수도에 있을 귀족들의 머리 속을 가늠하고 있었다. 

 "축제라면 누구나 풀어지기 마련 아니겠는가."

 "허허‥ 킬유시 공작이 일어났으니 다음은 '값싼 남작'이겠지. 과연 그가 왕가에 충성할 것인가,  아니면 장인을 따

라서 반란에 협력할 것인가. 정말 옆에서 보기만 한다면 재미있는 상황인데 말야."

 "문제는 우리가 그 전쟁에 징용된다는 게 문제겠지."

 "그러니까 술이나 마시자고. 전쟁에서 죽으면 마시지도 못 하잖아."

실베니아는 어느 주점이나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킬유시 공작의 반란가 화제가 되어  떠들썩했다. 어떤 이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어떤 이들은 미친 듯이 웃어댔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호기(呼氣)에 젖어 전쟁을 기대했다. 또한 다

른 나라에서는 전략가들이 이번 반란의 승패와 그 이후, 대륙의 정세를 예측하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반군은 현재 케임 성을 함락시키고 남하(南下)하여 수도에서 북쪽 피케이스 강의 북쪽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예

정보다 빠른 것은 북부의 주민들이 반군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값싼 남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젠티아 남작이 그들에게 가담할 것을 예상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더욱‥."

 "그만! 그만해!"

 "폐하!"

 "시끄럽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땅! 따르르르‥.

실베니아의 국왕 잉그라겔 파이론 3세가 내리친 주먹에 테이블 위의 은잔이 엎어져 바닥을 굴렀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내가 진정하게 되었는가? 이 나라에서 뛰어나다는 인물들이 바로 그대들 아닌가. 그래서 나라를 이끄는 귀족들이 

된 게 아닌가? 그런데 역적 하나 막을 인물이 없다니! 아~예 이제부터는 역적들만 데려다가 정치를 시키면 자네들 

모두보다 낫겠구만!"

 "폐하, 흥분하실 일이 아닙니다."

 "뭐가 흥분할 일이 아니라는 게야? 킬유시 공작을  능력을 의심하고 물러나게 주청한 사람들은 그대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의심받는 능력보다는 나아야지? 헐뜯을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그 능력이 뛰어나여' 막지 못하겠다는 

소리만 지껄이는 것이냐?"

 "망극하옵니다."

 "그 놈의 망극, 망극, 내가 벌써 어제부터 수 십 번은 들은 것 같다. 망극(罔極)하다는 소리 조금만  더 들었다가는 

망국(亡國)하겠구나."

마지막으로 '망극'을 입에 담았던 로시오 백작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국왕이 정사(政事)에 소홀할 틈을 타 

세금을 신나게 갈취한 귀족 중 하나였다. 물론 그러할 수 있는 이유는 요즘  신흥 권력 세력의 동맹에 들었기 때문

이리라. 신흥 세력층은 강력하게 킬유시 공작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니 지금 국왕의  말에 그럴 듯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회의실의 문을 열고 한 중년 사내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푸른 정장에 금색 수실이 구블구블 수놓아져 화려함

과 단정함을 동시에 풍기는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국왕의 얼굴은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오! 로바메트 경."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오. 그대도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왔겠지? 

다른 말은 필요없소. 특히 망극하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시오. 이 상황을  타계할 고견이 없다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로바메트의 얼굴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국왕 주위에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미소

는 비웃음이었다. 천천히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공작의 입술이 열렸다.

 "우선 제 자리 좀 주시지요. 좀 오래 걸릴 듯 싶습니다."

 "로시오 경. 자리 좀 비켜 주게. 자네는 집에 가서 쉬어도 좋아."

황당한 표정을 로시오는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이어진 국왕의 호통에 그는 맹수에 놀란 사슴처럼 벌떡 일어

나 모자를 쓰고 황급히 인사하며 회의실을 도망치듯 나갔다.

 "제법 끈기 있게 킬유시 공작을 모함하길래 뭔가 믿는 게 있나 했더니만, 내 실수로군."

그러면서 파이론 3세는 식기를 달그락거리며 떨고 있는 신흥 권력 세력을  쓰윽 훑어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로바

메트의 눈에서는 비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국왕을 너무 얕봤어. 역사는 폭군들을 매우 우둔하게 표현해놨지만 사실 폭군들은 선천적인 바보가 아닌 이상  매

우 뛰어난 머리를 가진 군주들이다. 다만 흥국성세(興國成歲)의 시기에 휩쓸려 긴장이 풀어지고 많은 유혹을 받아들

이는 것에 중독 되었을 뿐이지.'

보통 생활이 어려우면 부지런해지고 순탄하면 게을러지는 게 사람 성격이다. 넓게 세상을 보아도 마찬가지니,  어지

러우면 영웅이 나고 평화롭다면 건달이 난다. 국왕이라고 인간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모습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하나의 상황만 가지고 그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귀족들은 그걸 모른 것이다.

그리고 로바메트는 국왕의 다른 면을 시험하기 위한  운(韻)을 띄웠고 국왕은 로시오 백작을 내쫓았다. 만족스러운 

확인 작업을 마친 그는 자리에 앉았다.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2)

 "폐하께서는 이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킬유시 공작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있다고 보십니까?" 

 "없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뭐라고!?" 

발끈한 것은 국왕이 아니라 기사들이었다. 전시(戰時)상황이었기  때문에 갑옷을 입고 앉아있던 그들은 철컥거리며 

벌떡 일어섰다. 파이론 3세가 그들을 진정(?)시켰다. 

 "앉아라. 틀린 말도 아니니까." 

 "큭!" 

 "자아, 계속 해보시오. 설마 그게 끝은 아니겠지?" 

파이론 3세는 한 가닥 기대를 품고 로바메트를 보고 있었다. 타국의 전략가들은 실베니아를 가리켜 '수도에는  장미 

향기가 그윽하고 창공에는 푸른 매가 감시의 눈을 뜨고 날아다니며 변방에서는 거대한 흑기사가 버티고 있다.'고 하

였다. 여기서 장미 향기는 정치에 능한 로바메트 공작을, 푸른 매는 귀신같은 전략가 킬유시 공작을, 그리고 거대한 

꽃잎의 기사는 흑거성 글로디프리아의 드로안 남작을 뜻한다. 그러나 국왕이 신용할 만도 하지 않겠는가. 

 "킬유시 공작을 막아낼 수 있는 인물은 이 궁성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란 말인가? 막아낼 수 있는 자가!" 

 "젠티아 드로안. '값싼 남작'입니다." 

 "하지만 그는 킬유시의 사위가 아닌가." 

파이론 3세는 이번만큼은 로바메트가 착각을 했다고 판단했다. 두통이 나는지 머리를 손으로 받친 그에게 로바메트

는 한 번 더 말했다. 

 "드로안 경은 기사입니다. 현재 국왕에 대한 충성인가,  아니면 처가에 대한 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겁니

다. 그를 불러야 합니다. 지금 부른다면 폐하께 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때 콧수염을 양 옆으로 고아하게 기른  장년의 귀족이 일어섰다. 얼굴을 찌푸린 그는 근래에  들어 권력을 잡은 

신흥 세력의 중추역활을 하고 있는 자였다. 

 "폐하,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다." 

 "해보게, 코츠드 백작." 

 "드로안 경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를 펴온에 불러들이는 것은 늑대가 무서워 사자를 모

셔오는 것과 같습니다. 예전부터 그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칭되었음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으음‥." 

두통이 심해져왔다. 확실히 변방에서 대륙 최고의 정예를  가진 '값싼 남작'을 주의했던 게 사실이고, 제거하려고도 

했다. 만약 그가 궁성에 들어온다면 강력한 군사력과 민심을 바탕으로 실권을 잡을  것이고 그 위세는 왕마저 능가

할 가능성이 컸다. 

고민에 빠진 왕에게 로바메트가 말했다. 

 "그런 그가 킬유시에게 협력하게 된다면 이 반란은 절대로 막아낼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런 소식이 들리거든 저

는 폐하께 왕좌를 포기하라고 말씀드리겠지요." 

 "무, 무엄하다!" 

한 노기사가 벌떡 일어서서 검을 뽑았다. 파공성과 함께 로바메트는 목에 닿은 검날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파이

론 3세가 손을 저었다. 

 "존기어 경. 검을 거두게.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폐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기사들을 그렇게도 믿지 못하신단 말씀입니까?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반도(反

跳) 하도너 킬유시를 잡아다가 무릎을 꿀리겠습니다." 

파이론 3세는 한숨을 쉬었다. 조용히 로바메트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보시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요. 가망은 미약하지만‥."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 작아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존기어는 그의  코웃음에서 자신을 얕본다는 걸 느끼고 

살기를 띄웠다. 

 "좋아. 존기어 경을 믿기로 하겠네. 중앙군의 모든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지. 필요하다면 궁정 기사단의 출

진도‥." 

반란을 진압하는데 궁정 기사단이 출전한 일은 매우 드물었다. 기사단 한 두명의 기사가 중앙군을 이끌고 출전해도 

완승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만큼 궁정 기사단의 투입을 허락한다는 사실은 킬유시 공작의 반란과 그에서 퍼진  파장

이 거대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파장이 가장 영향을 미칠 곳은 바로 실베니아 북서부에 위치한 거성 글로디프리아였다. 

* * * 

태풍의 눈이 하도너 킬유시라면 그에 비견되는 게 바로 글로디프리아여다. 글로디프리아의 회의실에서는 가운데 원

의 공간을 둔 테이블에 4 인 

이 앉아있었다. 

 "존기어‥. 노기사께서 나섰군요." 

젠티아의 말투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그것은 마치 내기돈을 경마를 바라보는 듯하여 여유가 느껴졌다. 토루반이 

흥미로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존기어라면 용병왕조차도 칭찬했던 용맹한 기사가 아닌가?" 

 "그렇지만 용병왕이 정말로 곤란해했던 것은 킬유시 공작의 전략이었지요. 그는  존기어의 검술 이상은 칭찬한 일

이 없습니다." 

아스틴네글로드는 거의 순수한 학문의 연구를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쟁의 전술에 대한 연구는 미비했다. 이는 마

법의 발달도 원인이었다. 그래서 7인의 현자 중에서 전략에 관한 한 피브드닌을 따라을 이는 없다시피 했다. 토루반

이 입을 다물고 젠티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존기어를 잡을 수 있을만한 전사나 기사가 반란군에는 부족해. 궁정 기사단만 해도 뛰어나

지 않은 기사가 없어요." 

보랏빛 망토를 걸치고 조각상처럼 앉아있는 그에게서 고아한 기세가 풍겼다. 다만 능글능글한 미소가 상당히 그 고

아함에 불안함을 선사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아하다는 표현의 그의 옆에  앉아있는 마크렌서 자작에게 더욱 어울릴 

것이다. 

 "남작께서는 장인을 너무 과소 평가 하시는 군요. 킬유시 공작이 그  정도의 위인이었다면 전 각하의 부름은 신경

쓰지도 않고 가까운 호수에서 낚시나 즐기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존기어에게 토벌되는 반군을 예상하며 각하께 

애처로운 아내를 위로하길 권하겠죠." 

무성하게 자란 콧수염 사이로 보이는 웃음에 젠티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랐다. 

 "어이어이, 위험한 말이군. 명령 불복이라니. 그 말은 반군에 비장의 수라도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숨겨진 무기나, 

무인(武人)이라도?" 

 "없어도 됩니다, 각하. 그게 킬유시 공작의 무서운 점이죠." 

 "혹시‥ 그의 카리스마를 염두에 두신 겁니까?" 

 "과연 아스틴네글로드의 젊은 학자다우십니다, 피브드닌. 정답이에요. 하지만 하나가 빠졌습니다. 바로 현재 나라의 

실정이죠. 예로부터 편안하면 게을러지고, 어려우면 부지런해지는 게 인간입니다. 어려울수록 인물이 나오는 법이죠. 

이 나라는 현재 귀족들은 편안하고 서민들은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심각하다고 할 수준이지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뛰어난 학자와 기사인 만큼 금방 그의 말을 이해한 것이다. 

 "서민 중에는 기회를 기다리는 인물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킬유시 공작의 반란은 적절한  기회로 비춰지겠죠. 

그에 비해서 귀족들은 게을러졌습니다. 이번에 존기어  경으로 하여금 반란군과 겨룬다는 것은  일종의 발악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각하를 수도로 불러들이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만‥." 

 "내가 수도로 입성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그거야 킬유시 공작의 능력에 달렸겠지.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서민들의 변수도 포함되겠지만‥." 

토루반의 마무리였다. 서류를 정리하는 소리가 제법 귓가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종이들을 모은 마크렌서 자작이  말

했다. 

 "골치 아픈 전쟁이 되겠군요." 

 "그렇군. 헌데 시즈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갔나?" 

모두들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을 때 서류 정리가 늦어 이제서야테이블 위에서 뛰어내린 토루반이 말했다. 

 "연병장에 있던 모양이더군. 기사들이 훈련하는 걸 구경하는 것 같아."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3)

 "하앗!"

 "크윽!"

사론은 상대의 검이 마치 소용돌이 같다고 느꼈다. 검이 마치 넝쿨에 엉킨  듯 끌려들었고 끝내는 허공으로 치솟았

다.

촤아아아아악!

 "졌습니다."

목에 닿아있는 검 끝을 바라보며 그는 허탈하게 말했다. 피식하고 보를레스가 웃었다.

 "역시 힘에서 밀리는 듯 하군. 기술에서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팔굽혀펴기  양을 늘려

보는 게 어떤가?"

 "후우‥ 그래야 겠어요."

축 처진 어깨로 사론이 연병장 둘레에 쳐져있는 계단에 앉았다. 그러자 이미 터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위로했

다.

 "사론, 너무 실망하지 마. 저 인간, 힘 빼면 남는 것도 없는 위인이라고. 풀이 죽을 필요 없어."

 "그럴까요?"

한숨과 함께 사론이 되묻자 상대는 그의 어깨를 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날  믿어!'라고 말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보

를레스가 기가 막혀하며 말했다.

 "뭐가 그럴까요야? 파마리나, 이상한 위로하지 말라고!"

 "내가 언제 틀린 말했어?"

 "그걸 맞는 말이라고 인정하느니 차라리 레스난이 자진해서 네 실험도구가 되었다는 말을 믿겠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혓바닥들. 토플레는 저 둘의 혀를 당장 수술로 묶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귀를 막았다.

 '무료로 하라고 해도 서슴치 않을텐데‥.'

옆에서는 블리세미트가 방금 전 보를레스의 운검(運劍)을 떠올리고  있었다. 얼마 전 펴온에서 건달들과의 격돌 후 

그는 대륙은 '붉은 뱀의 사원'과는 다른 충돌이  많다는 건 인식했다. 그리고 말과 믿음으로는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권술에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때 파마리나와의 말싸움에 반쯤 지쳐버린 보를레스가 시즈를 향해 외쳤다.

 "시즈, 네 차례야. 한 번 붙어보자고."

 "괜찮겠어요?"

무리한 혀의 운동으로 숨을 헐떡이는 보를레스가 시즈는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나보다. 보를레스는 얼굴을 약간 붉히

고 소리쳤다.

 "당연하잖아. 어서 덤비기나 하라고."

 "흥! 한 방에 나가 떨어져 버려라."

파마리나가 레스난의 옆 자리에 앉으면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보를레스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아직 검을 뽑지 않고 

있는 시즈를 향해 말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다가 지고 나서 불평을 하려거든 파마리나에게 하도록 해. 끝까지 내가 질 수 없게 만드는 소리

나 해대는 사람이니까."

 "그럼 파마리나는 보를레스의 '승리의 여신'이네요?"

눈치 없는 레스난이 파마리나에게 강한 꿀밤을 맞고 그걸 신호로 시즈와 보를레스의 검이 부딪혔다.

 "호오‥. 서둘러 오길 잘했군. 이런 재밌는 구경거리가 시작되었을 줄이야."

털썩하고 젠티아가 사론 옆에 엉덩이를 깔았다.

 "데린님께 잔소리 들으시는 거 아닙니까? 예복 같은데‥."

 "나의 착한 아내가 이 정도 일로 잔소리를 할 리가 없지. 그건 그렇고 저 쪽 여자들은 벌써 자리를 잡은  듯 싶군. 

시즈를 응원할 생각인가? 그럼 여기는 보를레스 응원 측인가?"

 "그렇게 되겠군요."

 "나, 난 아니에요."

질색을 하며 벌떡 일어서는 카이젤을 토플레가 덥썩 잡아 어깨동무했다.

 "어허‥. 설마 여자들한테 인기 좀 있다고 배신을 하려는 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도로 앉은 카이젤. 피식하고 그에게 웃음을 짓던 젠티아는 옆에서 들려온 응원에 귀를 막았다.

 "어이! 보를레스! 시즈 같은 꼬맹이한테 지면 망신이야. 망신!"

 '그렇다면 우린 당신에게 절대로 질 수 없겠군.'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응원소리의 토루반을 보면서 젠티아는 내심  중얼거렸다. 레스난과 파마리나가 난쟁이 노인

을 째려보면서도 아무 말이 없는 게 '저건 응원이 아니라 야유야'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쐐애애애액!

응원이 도움이 되던, 되지 않던 보를레스의 검은 시즈에게  빠르게 쇄도했다. 그러나 시즈는 토루반의 응원 소리에 

날아오던 검의 날카로움이 순간 감소되는 걸 느꼈다.

까아아앙!

찌릿! 찌릿! 한 전류가 보를레스의 팔을 습격했다. 그의  힘을 가볍게 튕겨낼 정도로 에릭사를 흡수한 시즈의  힘은 

엄청났다.

 "끝내주는 군. 한 팔인데 저런 파워라면 양팔이었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토플레가 어이가 없는 듯 중얼거렸다. 기가 막힌 감정은 사론이 더 했다. 190 cm의 장신과  잘 단련된 근육에서 넘

쳐나오는 보를레스의 힘은 자신으로써는 도저히 감당 불가능이었다.  그런데 근육도 얼마 없는 팔, 하.나.로 우위를 

점하다니. 침을 꿀꺽 삼킨 그는 토플레의 옷자락을 붙잡고 속삭였다.

 "시즈 님께 사용하고 남은 에릭사가 한 방울도 없는 겁니까?"

 "없어. 한 방울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리는 사론이었다. 보를레스와 시즈가 싸우는 걸 보고 있던 젠티아도 한 마디 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저 근육에서는 있을 수 없는 힘이군. 게다가 저 빠르기. 몸 전체를 고속으로 움직이는 빠르

기만 따졌을 때 나보다도 뛰어나다."

 "대륙 최고의 기사라고 불리는 각하보다 말입니까?"

피브드닌이 경악을 참다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얼굴을  찌푸리고 젠티아의 말에 놀람을 감추

지 못했고 여자인 아리에도 마찬가지였다. 파마리나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뭐야? 저 아저씨가 그렇게 대단한 검사인가?"

 "물론이에요. 파마리나는 마녀니까 아마도 꺼림직한 상대로는 성투사나  성기사겠죠? '값싼 남작'이라는 이름은 예

전 성투사와 성기사의 수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유명해진 거에요."

 "헤에‥. 그 신의 이름으로 정체를 가린 악마들에게 이겼다고? 하지만 지금 그가 자기보다 시즈가 더 빠르다고 했

잖아."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젠티아가 말했다.

 "마녀 아가씨. 속도만 빠르다고 전투에서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지.  물론 유리한 승리의 조건은 되어주겠지만. 참

고로 나보다 운신의 속도가 빠른 걸로 치면 실베니아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어. 저 둘의 싸움을 잘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빠르기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관중의 시선은 시즈와 보를레스의 검으로 집중되었다.

가가가가각!

시즈가 보를레스보다 우위에 있는 조건은 운신(運身)만이 아니었다. 검의 속도도 훨씬 뛰어났다. 그래서 보를레스로

서는 공격을 위한 타이밍을 잡는 것도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나마 한 손이라 공격의 연환이 예전보다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야. 두 손이었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의 머리 속을 맴도는 생각은 현재 구경하는 검사들의 머리 속을 한꺼번에  괴롭히는 생각이었다. 현재는 그런 일

은 일어날 가망이 없었지만. 

그러나 보를레스는 꽤 많은 싸움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경우에 대한 대처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둘의 싸움은 금속음이 몇 번이  지나면서도 승패는 보일 기미조차 없었다. 시즈의 해동도예(海東刀藝)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날카로워졌지만 보를레스의 집중력은 단 하나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즈가 바

람과 같다면 보를레스는 바위였다. 바람이 끊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바위.

시즈가 검날이 뒤로 가게 바꿔잡자 보를레스는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비연참이다!'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4)

보를레스는 시즈의 비연참이 어떠한 각도로 공격해 들어올지 계산했다. 피브드닌의 수학적인 계산보다도 그는 자신

의 감이 말해주는 계산을 믿었다. 그리고 계산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옆구리 부근에 작은 허점을 만들어주었다. 

샤악! 다른 검사의 양손에 허락된 힘을 한 손으로  폭출시키는 시즈의 예도는 파공성부터가 달랐다. 날카로운 칼에 

종이가 베어지는 듯한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섬칫하게 만들었다. 보를레스의  검이 지르는 파공성이 지워질 정도

로.

 '빠, 빨라!'

보를레스는 기회를 잡았다고 여기면서도 시즈의 검세로 인한  압박감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검을, 그것도 

자신은 양손으로 정면 베기를 시도했기 때문에 훨씬 빨라야 할 텐데 느리다는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쾅! 도저히 금속끼리의 충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소리가 연병장을 가득 채웠다. 멀리서 훈련을 하고 있는 기사들

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게다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부딪힌  두 검 사이에서 불꽃이 번쩍하고 튀어

올라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누가 이겼지?'

화아아악! 하는 검풍의 모래를 날리며 시야를 가린 지 잠시 후 사론은 눈을 부릅떴다. 공격했던 시즈의 예도가 보를

레스의 검에 완벽하게 막혀있었는데 아직도 힘이 남았는지 부들부들하고 두 검의 겨루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비연참은 순간적인 힘과 속도를 극대화시키는 기술. 일단 막힌  이상 보를레스의 양손에서 지속적으로 나오

는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하아아아앗!"

스프링처럼 튕겨지는 시즈의 오른팔. 보를레스는 숨을 몰아쉬며 그의 목에 검날을 가져다가 댔다.

 "체스 메이트."

 "제가 졌습니다."

짝짝짝짝! 그제서야 주위를 돌아본 두 사람은 얼굴이 붉어졌다. 연병장에서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몽땅 모여 들어있

었던 것이다. 유난히 뚜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어내려온 젠티아가 말했다.

 "좋은 승부였다. 모두들 잘 봤겠지? 이들에게  뒤쳐져서야 과연 대륙 최고의 정예 기사단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알아서들 하라고!"

 "옛!"

우렁찬 대답. 휙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피브드닌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실력 상승을 위해 겨룬 것은 보를레스와 시즈인데 그에 대한 이익은 저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군."

 "그래. 판결은‥ 승자 '값싼 남작'."

그 때였다. 헐레벌떡 한 소년이 뛰어와서 젠티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일련의 사태에 모두들 소년과 젠

티아를 주시했고 젠티아는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아아킨?"

붉은 집배원 복장의 소년, 아이킨. 그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존기어가 패배했습니다."

* * *

 "도대체 저 놈은 누구야? 저런 기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당황하지 마라, 부관. 그렇지 않아도 본군의 진영이 거의 무너지려고  한다. 부관마저 그런다면 누가 군사를 통솔

하겠나?"

 "예, 옛! 알겠습니다."

 "저 애송이는 내가 상대하지."

불같은 상관이었다. 젊은 부관은 존기어가 말을 달려나가는 걸 보고도 감히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군을 통

솔하는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좌군과 우군은 물러서라. 중앙으로 몰리지 마라! 사단장들은 어서 진형을 다시 갖춰라!"

사단장들이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가 효과가 있는지 무너지던 진형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앞에서 내리치는 검을 

막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군사들이 진영을 찾아가는데 신경을 쓰겠는가.

 "무슨 꼴이란 말인가. 고작 애송이 하나를 잡지 못하여!"

존기어는 황금색 머리카락을 사자처럼 휘날리며 말을 재촉했다. 승리할 수 있다고 예상했던 일전(一戰)을 엉망으로 

만든 주범은 이 순간 또 하나의 기사를 저승으로 보내고 있었다. 분노의 일성(一聲)이 터져 나오며 그는 검을  내리

쳤다.

 "애송아! 내 검도 받아봐라!"

 "머리 정리나 하고 오라고. 늙은이!"

페스튼은 이미 존기어가 말을 달려오기 시작할 때부터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보통 병사들과는 다른 거대

한 기세가 멀리에서부터 풍겨 나왔던 것이다.

 '다 죽어 가는 늙은이가 뭐 이렇게 힘이 좋아?'

말의 속도가 배가(倍加)된 존기어의 검은 페스튼의 창을  활처럼 휘게 만들었다. 부러질 듯한 상황에서도 페스튼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가 익힌 건달패들의 싸움법은 기세에서 밀리면 끝장이나 다름없었다. 숨을 가득 들이마신 그

가 한 번 기합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압!"

가까스로 튕겨지는 그레이트 소드. 하지만 페스튼도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존기어는 말에서 내리며 페스튼을  탐색

하듯 노려보았다. 어딜 봐도 기사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말단 병사의 복장에  들고 있는 창 역시 보병들에게 기본

적으로 지급되는 창이 틀림없었다. 

 "수 만 명의 군대 속에서 호랑이처럼 날뛰는 게 기사도 아니고 말단 병사였다니. 자네 이름이 뭔가?"

 "페스튼. 성은 없소."

 "허허허‥."

존기어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도 아니오, 그렇다고 몰락 기사 가문의 후손도 아니다. 성도 없는 천민(賤

民)이 이름높은 기사들을 쓰러뜨리고 진형을 무너뜨렸으며 끝내 군단장과 겨룬다?

 '기가 막히는군. 이게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자네, 반군이 아니라 우리 군으로 오는 게 어떤가? 그대라면 내가 폐하께 주청을 드려 기사의 직위를 주지."

 "하하하! 안타깝게도 난 이미 선약이 있소. 당신의 목을 가기로 한 약속이 말이야!"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자네를 살려둘 수는 없지."

페스튼은 자신있게 가슴을 폈지만 심장은  쪼그라들고 있었다. 말에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존기어는 2m도 넘는 

엄청난 거신(巨身)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만한 그레이트 소드도 한 손으로 휘두르는 것이다.

 '온몸이 중장갑이다. 다른 곳은 쳐봤자 소용도 없다. 방법은 오직 하나! 머리를 부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무슨 수로? 2m보다도 높은 곳에  달려있는 머리를 치기 위해서는 상대의  공격범위 안으로 접근해야 했다. 

이번에는 말에 탄 게 아니라서 두 손으로 휘두를 텐데 파워는 몰라도 속도는 방금 전 가까스로 막아낸 검격보다 훨

씬 빠를 것임이 분명했다.

 "망설인다면 내가 가도록 하지."

뒤에서 얼쩡거리는 적군 두 명을 한꺼번에 양단하고 존기어는 분수처럼 치솟다가 떨어지는 피비 속에서 페스튼에게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지하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화산 같은 살기와 투기에  페스튼의 정신은 바늘의 끝처럼 날카로

워졌다. 한 순간의 방심은 그의 죽음과 직결될 것이다.

 "핫!"

쐐애애액!

우선은 창의 긴 리치를 이용하여 견제를 한다. 페스튼은 자신이  주먹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무투가의 형식이었기 

때문에 근거리 전투가들이 가장 곤란해하는 상태의 전투도 잘 알고 있었다. 

 '창이 무슨 활처럼 날아드는 거냐?'

중장갑을 입은 이상 존기어는 확실히 페스튼보다 둔했다. 청년의 창이 목을 스치자  강한 바람이라도 분 것처럼 머

리카락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페스튼의 예상처럼 그는 상대의 전법에 아주 곤혹스러웠다. 가까이 들어가려고  하면 

창으로 빠르게 여러 군대의 방위를 점해 거리를 떨어뜨리고 강한 찌르기로 일격을 노린다. 

점점 노기사는 초조해졌다.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5)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진형은 무너지고 있다. 킬유시라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 그렇다고 여기서 애송이

를 놓친다면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반대로 페스튼은 긴장했지만 전황(戰況)에 대해서는 여유가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적의 대장을 잡고 있는  것

만으로도 반군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을 테니까.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다고 해도  시간을 될 수 있는 한 끌

어놔야 했다

 '그래. 더 성급하게. 좀 더 과격하게 들어와라. 간발의 차로 피하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게 되면 나의 전진이 시작되

는 거다.'

그의 생각대로 존기어의 움직임은 점점 거칠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페스튼의 눈이 동굴 속에서 먹이의 움직

임을 살피는 박쥐의 초음파처럼 세밀하게 기회를 노렸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지금이야!'

존기어는 기다리다 못해 몸의 상처를 감수하고 돌격해왔다. 맹수같은 기세로 먹이를 덮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기세. 페스튼은 침착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던졌다!

 "흐아아아아압!"

존기어는 눈을 부릅떴다. 상대가 미소를 짓길래 긴장은 했지만 던지다니? 게다가 전력으로 던진 게 분명했다.  전쟁

에서 투창도 아니고 대창을 던져버리다니 무슨 행위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는 창을 피하는 게 문제였다. 달려나

가는 순간 지척에서 명치를 향해 창이 쏘아졌다. 서있는 상태였다면 모르되 달려나가는 중이었다. 그는 한 쪽 무릎

을 꿇으며 그레이트 소드를 땅에 박아 전진을 멈췄다. 

파캉!

어깨의 철 홀더가 박살이 났고 피가 쏟아졌다.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들자  금발의 미청년이 찡긋하고 윙크를 했

다. 그의 팔이 접혀진 채 힘을 폭발시킬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를 위하여, 장갑도 새로 샀다고.'

반짝!

가죽 갑옷을 입은 주제에 손에는 강철 건틀릿을 끼고 있었다. 건틀릿의 표면이  봄햇살을 받아서 광택이 줄줄 흐르

는 순간이 존기어에게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자, 잠깐‥."

콰직! 콰직! 퍽! 퍽! 퍽!

쇠가 뭉게지는 소리에 이어서 두부가 으깨지는 소리가 울려퍼졌고 병사들이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싸움을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 피와 뇌수로 범벅이 된 건틀렛을 높이 올려졌다.

전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 * *

 "페스튼?"

 "아는 사람인가, 시즈?"

 "글쎄요. 안다고 해야 할까요?"

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 달 전 펴온에서 건달들은 그 금발의 청년을 향해 페스튼라고 불렀지.'

 "흠흠, 어쨌든 이 사람의 출신이 매우 흥미로워요. 성(姓)도 없는 고아인데다가 건달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건달이

면서도 도둑 길드나 건달 조직 같은 곳에 몸을 담지 않았으면서도 꽤  이름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얼굴도 미남이고 

바람둥이 기질도 있어서 여자가 제법 꼬이는 형 같더라고요"

마지막 문장에서 아이킨은 웃는 건지 찌푸린 건지 분간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챈 파마리나가 물었

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부러워서요."

파마리나는 후 하고 입김을 분 주먹을 직각으로 세워 아이킨의 머리에 꽂아버렸다. 비명이 둥근 회의장을 채웠다.

 "악!"

 "왜 때려요?"

 "네가 바라는 대로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축복을 해준 거야. 싫다면 저주를 내려주는 방법도 있지."

아이킨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대들지는 않았다. 마녀의 저주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파마리나, 보고 중이에요."

무거운 어조로 젠티아가 파마리나를 말렸다. 힘을 얻은 아이킨이 입을 베―하고 내밀었다.

 "아이킨, 계속해라."

 "예, 각하. 키는 180cm 이상, 추정 몸무게는 74~80kg. 신체 특징은 긴 금발과 팔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길어요. 심

할 정도는 아니지만 싸우다가 한 대 맞으면 '아! 이 사람이구나'하실 거에요."

 "음‥. 수고했다. 마무리가 석연찮지만‥."

젠티아가 머리를 툭툭 쓰다듬자 소년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젠티아는 웃

음이 나왔다. 쓰다듬는 손에 아이킨이 파마리나에게 맞아 혹이 난 게 입체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 차례군요. 아! 피브드닌님도 현재는 엄연히 저희의 전략관이시니 일어나주시지요. 저 혼자 분석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흠흠. 그래야 겠군요."

뒤에서 토루반과 토플레가 휘파람을 불려 환성을 보냈다.

 "야아‥ 일개 학자 피브드닌, 출세했구만~."

딱딱!

 "자! 조용히 해주십시오. 지금부터 반군이 중앙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지도

를 봐주시죠."

마크렌서 자작은 지휘봉으로 테이블의 모서리를 때리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우선 두 군대의 병력입니다. 킬유시 공작이 이끄는 반군은 약 6만, 그리고 존기어가 이끌었던 중앙군은 정확히 보

급병을 포함하여 8만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피브드닌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일개 보병이 대장을 베었다는 사실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 킬유시 공작의 전술은 매우 뛰어나서 페스튼의 등장

이 없었다고 해도 승리했을 겁니다. 물론 그의 등장으로 압도적이긴 했지만요. 여기를 보세요. 두 군대가 싸움에 돌

입한 직후의 진형도(陣形圖)입니다. 그리고 이게 30분 후의 진형입니다. 어떻습니까?"

 "반군이 3 부류로 나눠져 있습니다. 좌측은 천재기사라고 불리는 펠리언 라카스. 우측은 킬유시 공작  자신이 맡았

습니다. 그리고 풍운아(風雲兒) 페스튼이 속해있던 중(中)군은 북동의 귀족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중군이 상대의 진

격을 막고 양쪽의 군단은 상대가 중군을 포위할 것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양측의 반군은 중앙 진압군의 양측

을 파고들던 방향을 처음 반군이 진군하던 쪽으로 틀었습니다. 그러면서 북동 귀족들의 중군은 뒤로 조금씩 후퇴했

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전투의 긴장감을 느끼는지 마크렌서 자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토루반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겠죠.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냈겠습니까?"

양쪽을 압박하는 적군. 지휘관은 수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으로 중앙돌파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 방향으

로 나눠진 반군은 같은 시간동안 전투에 참여하는 수가 많았고 중앙군은 뒤가  놀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반군의 

중군이 천천히 후퇴를 하자 진압군의 진형은 점점 길어졌고 양옆의 군대가 기승을  부려 반으로 뚝 하고 잘라졌다. 

만약 보통 기사들처럼 존기어가 후방에 있었다면 전투는 막상막하의 상태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상 전방에서 직접 적을 맞아싸웠고 나눠진 후방을 지휘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 목숨마저 보병에게 잃고 말았

으니 진압군은 패배가 마지막 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루반과 그 외에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이 침음성을 토하는 이유는 수가 부족하면서도 진압군

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린 킬유시와 펠리언의 지휘능력이었다. 이는 상대보다 몇 배는 뛰어난 정예가 있어도 힘든 일

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눈동자가 젠티아를 향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신임이  흘렀다. 그것을 아는지 토클레우스 

마크렌서는 씩 웃으며 한 마디 덪붙였다.

 "물론 드로안 남작께서는 가능하시겠지만요."

 "너무 추켜세우지 말아줘."

 "하하하하."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6)

젠티아의 익살스러운 어조에 기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오자 피브드닌도 빙그레 웃었다. 정말이지 마크렌서 자

작, 토클레우스와 젠티아는 짝짝궁이 잘 맞는 사람들이었다. 압도적인 지휘능력에 긴장했던 기사들의 마음을 순식간

에 풀어버리다니. 물론 그것은 이 두 사람의 지휘능력 또한 킬유시 공작에  뒤지지 않는다는 기본 조건이 깔려있기

에 가능하리라.

 '글로디프리아와 맞닿아있는 게 아스틴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마법사들이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궁정 마법사단을 거느린 중앙군에 비하면 역시 밀릴 테니까요. 저 같았어도 아꼈을 겁니다. 소수의 마법

사단을 운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피브드닌님이 설명해주실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인계해주자 피브드닌은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전 그의 버릇

이기도 했다.

 "현재로 워낙 마법사의 숫자와 질(質)에서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별다른 운용은 없을 겁니다. 그저 각 방위에서 특

별히 밀리는 쪽을 지원하는 수준이겠지요."

 "이제 곧 부르겠군. 폐하께서 언제쯤 부르실지 계산이 가능하오? 피브드닌. 준비를 해야할 테니."

 "아무래도 일주일 정도면 전갈이 올 겁니다."

 "좋아. 그러면 오늘 회의는 이 정도에서 마치도록 하지요."

젠티아가 박수를 짝짝하고 쳐 회의가 끝났음을 신호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저마다의 자료를 들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피브드닌에게 자세한 일정의 계획을 의논하고 있는 젠티아에게 시즈가 다가왔다.

 "젠티아,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는 일은 어떻게 되었죠?"

 "그 사람이라니?"

시즈의 말에 젠티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물쭈물하며 시즈가 대답했다.

 "마나이츠 님을 사칭하고 저희와 같이 다녔던 인물 말입니다."

 "아아‥. 그 친구."

홀 안의 공기가 수심(水深) 수십 미터에 들어온 것처럼 차갑게 변했다. 시즈 일행은 모두 그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

해하고 있었다. 막 글로디프리아에 돌아와서 젠티아를 만났을 때 그가  이제껏 대마법사 마나이츠와 있었다는 말에 

얼마나 경악했던가.

 "그는 마나이츠 씨의 집사라더군."

 "예? 집사요? 집사가 시즈의 힘을 뛰어넘는 마법을 발휘했다는 겁니까?"

 "그래. 왜냐하면 그는 강하거든. 아마도 대륙에서 가장 강할 걸. 시즈는 들어본 적이 있을 거야. 우리하고 역사적으

로 친분이 있는 자니까. 이름은 넬피엘 세로스. 다 늙어가는 주제에 마나이츠 씨는  왜 숨기려고 하는지‥ 쯧쯧. 그

래봤자 내 손아귀거늘."

 '느, 능구렁이.'

파마리나를 비롯한 시즈 일행은 근근히 성내에서 들을 수 있던 젠티아의 별명에  대해 통감했다. 지금 낄낄대며 좋

아하는 젠티아는 분명 혀를 날름거리는 한 마리 구렁이였다.

 "넬피엘 세로스라면‥."

 "영원히 춤을 추고 있는 녀석이지."

시즈는 고민에 빠졌다. '불꽃의 춤을 추는 이'마저  나타났다면 4 대 음유술사들이 모두 출현했다는 뜻이었다.  그의 

눈썹 사이에 수심(愁心)이 깃들었다.

 '역사의 고리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그리고‥ 데린은 괜찮아요?"

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리에는 시선을 돌려서 젠티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린은 언제나 명랑하고 상냥한 

여인으로 그녀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펴온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내를 걱정해주는 게 고마운 것일까? 젠티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친정에 갔지."

                                              * * *

 "오늘로 마지막이로구나."

하도너 킬유시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의 머리카락을, 만지면 다칠 위험한 물건처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죄송해요."

데린 킬유시는 그런 아버지 앞에서 마지막까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도너의 뒤에서 펠리언이 무표정하게 그녀

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네 남편이나 잘 보호하렴."

 "젠티아는 강해요. 아버지라고 해도 이길 수 없을 걸요."

 "이래서 딸래미는 키워봤자 시집 보내면 다 소용없다니까. 허허‥."

부녀(父女)는 말없이 마주 보았다.

 "미안하구나. 이런 애비가 되어서‥. 네게 힘겨운 선택을 하게 만들다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데린은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구슬처럼 또르르 조금씩 흘러내리던 눈물은 어느 새 걷잡을 수 없이 펑펑 쏟아졌

다. 손수건보다는 그저 어깨를 그녀의 눈가에 대어주며 하도너는 웃었다.

 "내 딸이 다 컸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울기나 하는 어린애였구나. 시집을 너무 일찍 보낸 모양이야."

대답 대신 데린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요 한 달 동안 네가 와줘서 즐거웠다. 혹시 다시 볼 수 없다고 해도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후회가 없구나. 즐거운 

추억을 선사해줘서 고맙다. 그럼 이만 떠나렴."

데린은 한 달에 가까운 기간동안 시녀들 대신 아버지를 시중들었다. 아침 일찍  정성스레 세수를 씻기는 것에서 차

를 끓이고 간단한 간식을 준비했다. 마을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고, 아버지나 딸이나 서로를 알게 된지 20년의 시간

동안 경험하지 못한 한 달이었다. 그렇기에 하도너는 미소를 지으며 딸을 떠나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모든 신들의 축복을‥. 흑!"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반군 대장 킬유시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 망설

임이나 슬픔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추상같은 호령을 시작했던 것이다.

페스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가 값싼 남작의 아내라면 왜 인질로 잡지 않는 거지? 게다가 자신의 딸이라면서‥."

 "전하는 기사시다. 기사가 뭔지 모른다면 조용히 있어."

펠리언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얼마 전 존기어를 죽이고 공(功)을 세운 금발의 청년은 반란군에서 기사의  직위

를 인정받고 용병대의 대장을 맡게 되었다. 처음 그가 존기어의 목을 베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펠리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셋으로 나누어진 부대 중에 중군의 최전방이 가장 위험했던 것이다. 자신이라고 해도 죽을 

각오로 돌격하는 8만의 군사 앞에서 무사하리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페스튼은 천재 기사라고 불리

는 그가 인정하는 또 다른 천재였다 하지만 건달이었다는 출신이 행동과 말투에서 풍겨났기 때문에 펠리언으로써는 

상대하기 언짢았다.

가시가 잔뜩 돋은 그의 대답에 페스튼은 어깨를 으쓱했다.

 "맞아. 난 기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그리고 멀어지는 기사의 뒷모습을 노려보면서 비웃었다.

 "하지만 싸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지. 전쟁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볼 

때 킬유시 공작은 필승의 전략을 하나 놓친 거지."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7)

 "정말이지. 일주일을 못 버티는 군."

실베니아를 감싸안을 지혜를 가졌다는 로바메트는 고심했지만 더 이상 방도가 없었다. 존기어의 자존심으로 인하여 

지리멸렬(支離滅裂)해버린 중앙군. 궁정기사단만 데려갔다면 그렇게 어이없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사도 아니

고 보병 하나를 뚫지 못하다니 얼마나 허무한가.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솔직히 자신이 나서서 중앙군과  궁정기사단을 비롯한 근위기사단까지 총동원한다면  승산은 있었다. 적어도 '푸른 

매' 킬유시와 쌍벽을 이룬다는 로바메트였으니까. 그러나 그로 인해 실베니아라는 국가가 받게 되는 상처는  끔찍하

다고도 말해도 좋았다. 내전만큼 쓸모없는 싸움도 없다는 게 로바메트의 지론(至論)이었다.

 "아무래도 자네가 이겼나보이. 킬유시‥."

킬유시 공작은 이런 자신의 심리마저도 꿰뚫고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경쟁자이자 친구. 마지막까지 부담감을  안

겨주는, 한 마디로 존경스러운 상대를 생각하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 집사."

 "부르셨나요? 전하."

 "넌 누구지? 새로 온 시녀인가? 어서 길틴 집사를 불러오거라."

 "길틴 집사님께서는 잠시 공자(公子)님께 불러가셔습니다."

새로 들어왔으리라는 예측을 하게 만드는 시녀는 이제 고작 17세 정도였다. 좋은  사내랑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꿈

을 꿔야할 소녀였다. 저 정도의 미모라면 충분할 것이다. 아마도 쪼들리는 집안 살림에 결국 남의 저택에서 걸레질

이나 해야하는 신세가 되었겠지.

 '이 나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고개를 저은 로바메트는 손을 까딱여서 시녀에게 나가라는 표시를 보냈다.

 "어서 물러가고 길틴 집사에게 왕궁으로 갈 채비를 서두르라 했다고 전하거라."

 "혹시 반란군의 승리로 인하여 값싼 남작에게 도움을 청해야하기 때문인가요?"

로바메트 공작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굳은 채로 경련했다. 진압군의 패배소식을 방금 전에 받았지만 민간(民間)에는 

철저하게 소문이 도는 걸 막을 시기였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녀에게 고개를 돌린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넌 누구냐?"

 "호호‥. 이번에 새로 시녀가 된 에즈민이라고 하는 걸요."

 "자객이냐?"

 "어머머머‥. 절 믿지 못하시는 군요? 너무해요! 뭐 전직이 자객이긴 했지만‥."

 "원하는 게 뭐지?"

로바메트의 질문에 소녀는 새빨간 입술에 매혹적인 미소

를 담았다.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는 도저히 17세의 앳된 소녀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도발적이었다. 책상에 엉덩

이를 걸친 그녀는 긴장으로 흰수염을 떨고 있는 중년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평화를 위한 약간의 혼란이랄까요‥."

 "서둘러라."

 "옛!"

마부는 평소와는 달리 로바메트의 어조가 거칠다고 느꼈지만 요즘 집무로 피곤해서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래서 조금

의 움직임도 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대재상의 눈에 붉은 기운이 맴돌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이런 수까지 써야하다니‥."

멀어져가는 마차를 창문으로 바라보며 노르벨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시녀옷을 입은 소녀가  혀를 삐죽하게 

내밀고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어쩔 수 없잖아. 당신이 부탁해놓고선 이제 와서 그러기야?"

 "미안, 미안. 하지만 너도 이제 일원(一員)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왠만하면 내 나이에 맞는 일을 시켜 달라고. 오빠라는 사람이 여동생한테 이상한 거나 시키고 

말야!"

 "미안."

 "흥! 알면 됐어."

대리석의 우유빛 색채를 밟고 걸음을 옮긴 로바메트는 힘차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폐하. 아직 제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용병왕조차도 칭찬했던 기사가 패했네. 고작 보병에게  말이야. 그대가 뛰어나다고 인정하지만 그들은 차원이  틀

려. 킬유시 공작은 너무나 뛰어난 인물이었던 거야."

 '가증스럽군.'

국왕 파이론 3세는 완전히 체념한 듯 눈물마저 글썽거렸지만 로바메트는 속지  않았다. 늙은 여우같은 국왕은 킬유

시 공작을 추켜세우고 포기한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기사들에게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역겹지만 넘어가 줘야겠지.'

 "소신이 아무리 능력이 없다고 하나, 킬유시 공작과 자웅을 결할 정도의 지략은 가지고 있습니다. 제게  중앙군 전

부와, 궁정 기사단을 운용할 권한을!"

 "오오‥ 그대의 충정에 내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뜻대로 하게."

귀족들은 연극의 명 연기자였다.

* * *

아리에와 파마리나는 힐끔힐끔 데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둘의 심정을  아는지 옆에서는 레스난이 데린이 과일을 

깍아서 던지는 즉시 덥썩덥썩 받아먹었고 데린은 천진난만한 모습의 레스난이 마냥 귀여운지 바라보는 눈길에 웃음

이 떠나질 않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졌어. 모두 조심해서 대해주길 바래.'

그답지 않게 시무룩하던 젠티아. 두 여인은 그가 돌아서면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들어냈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그

러니 데린의 미소가 마음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방패로 보여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데린은 쥐가 고양이 눈치 살

피듯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는 아리에와 파마리나의 행동에서 자신의 장난꾸러기 남편이 또 무슨 장난을 쳤는지 

은근히 걱정이 됐다.

 "왜 먹지 않고 있어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요?"

 "아, 아니에요."

 "걱정이 있는 것 같은데요?"

자애롭게 바라보는 데린의 모습이 아리에는 너무나 안쓰러웠다. 당장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녀는  서둘러 

둘러댔다.

 "아직까지 수도에서 부름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러고 보니‥."

데린도 과일을 깍던 손을 잠시 멈췄다.

 '그 일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지?'

그녀의 예상대로 회의실 안은 분분을 넘어서 아니라 모두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머리에 개미가 집이라도 지었는

지 다들 끙끙거리던 기사와 학들. 몇 사람은 두뇌의 한계를 느꼈는지 애꿎은 테이블에 두개골 망치질을 해댔다.

 "휴우‥. 이해할 수가 없군. 그 사람의 성격이 이렇게 저돌적이었나?"

젠티아를 비롯한 회의장의 사람들은 쉴 틈도 없이 몰려오는 격전의 소식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벌써 일주일 동안 벌써 12회의 교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분명 내전을 가라앉히고 안정을 원하리라 생각했거늘‥."

계산 착오였다. 젠티아는 머리를 잡고 흔들며 자책했다.

 "성격이 바뀌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갑작스럽습니다."

그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렸다. 이제껏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자 모두들 고개를 들어서 귀

를 기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마땅찮은 시즈'. 2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의 학자들이 오매불망하여  칭송하던 젊

은 현자였다

 "사람의 생각은 원치 않아도 바뀔 때가 있습니다."

 "어떤 존재가 개입했다는 뜻인가?"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요."

서로를 바라보는 시즈와 젠티아. 두 음유술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의 고리'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자네들이 한 번 더 펴온에 다녀와 줘야겠어."

 "배후를 알아낸다고 해도 시간이 맞춰질까요?"

 "마법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거야. 게다가 좋은 마법사도 알고 있으니까 그에게 부탁해보자고."

 "좋았어! 또 모험이다!"

마녀라는 이름 자체가 꿈 많은 소년, 소녀들의 모험에 등장하는 척살대상인 주제에 파마리나는 입을 귀까지 늘어뜨

리며 좋아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8)

 "이번에는 시즈와 나만 간다."

 "예!?"

 "가, 각하!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로바메트 공작이 각하께 도움도 청하지 않은 채 출정했다는 말은 즉, 각하도 반

란군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 수도에 갔다가 발각된다면 즉시 반란의 죄상을 물을 겁니다."

눈에 핏발까지 서가며 열변을 토하는 토클레우스였지만 젠티아는 막무가내였다.  심지어는 데린마저도 그의 옹고집

을 당해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미안해, 데린. 나의 숙명이야."라고 말을 하는데 어떻게 막겠는가. 그 동안 음유술사의 숙명에 대해서 남편에게 들

었던 데린인지라 슬픈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조심하세요."

그러나 시즈와 젠티아를 더욱 곤란에 빠트리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아리에였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시즈에게 매달

려있는 그녀의 모습에 젊은 기사들은 왠지 아파오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이  정도니 젠티아라고 해도 감히 건

들 수도 없는 것이다.

 "아리에‥."

시즈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도 아리에는 놔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보다못한 데린이 다가갔지만 파마리나가 고개

를 지으며 그녀를 말렸다. 아리에는 마치  인형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소녀처럼 유리같은  눈동자를 가진 인형을 

더욱 꼭 안았다. 몽클한 여인의 느낌. 아직 귀여운 소녀의 얼굴인 아리에였지만 포근한 감촉에 시즈는 화르륵 달아

올랐다.

 '휴우‥ 여자한테 저토록 휘둘려서야.'

한숨이 나오는 젠티아였다. 시즈 자신의 속성처럼 바람둥이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쑥맥의 기질은 벗어줬으면 싶

었다. '역사의 고리'는 아무리 작은 약점도 풍선처럼 부풀릴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인물들의 모임이니까. 안되겠다 싶

은 그는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천천히 얘기하고 나오게."

사람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가는 동안  시즈는 마치 대장간에서 달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대장장이의 망치질처럼 그의 내부를 두들겼다.

 "아리에‥.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주고 시즈는 작게 아리에를 불렀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녀. 시즈가 떼어 내려 하자 안

간힘을 쓰며 매달렸다. 서서히 시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음! 시, 시즈?"

아리에는 놀란 토끼처럼 목을 움츠렸다. 부드러운 시즈의 손길에 목과 귓가에 닿을 때마다 너무나 간지러웠다. 도망

가려는 그녀를 이번에는 시즈가 반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아! 앙! 그, 그만‥. 하, 하지 마아‥."

간지러움에 움직이질 못하는 아리에에게 시즈는 말했다.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자꾸 사람들 있는 곳에서 투정부를 거에요?"

 "하지만! 정말 난 같이 가면 안돼?"

그 말에 시즈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마음을 모두 들켜버린 아리에는 부끄러움

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시즈는 살포시 안아주며 말했다.

 "금방 올게요."

 "아, 알았어."

시즈는 시무룩해진 아리에의 하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시즈의 품에 안기면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

이었다. 연인이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시즈의 주위에는 언제나  포근하면서도 상쾌한 바람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에 취해버린 아리에가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거실을 지나 밖으로 나오자 젠티아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설마‥.'

 "걸어가실 생각이십니까?"

 "마법으로 간다고 했잖아. 마법사를 찾을 때까지는 발로 뛰는 게 좋아."

길을 떠나는 그들 뒤에서 사람들이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 중에서 아리에의 축복은 가히 압권이었다.

 "남작님한테 못된 것 배우지 말고 돌아와!"

여기저기 봄의 흔적이 피어나고 있는 산길. 상쾌한 풀잎의 향기를 맡으며 시즈가 물었다.

 "그 마법사가 누구죠? 상당히 믿고 계신 것 같은데‥."

 "아‥. 우리의 숙적이자 영원한 동료."

 "그렇다면 우리는 마나이츠 씨의 영지로 가야겠군요?"

 "그렇지. 역시 '마땅찮은 시즈'."

 "뭐가 그렇지, 입니까? 여기서 거기까지는 마차를 타고 가도 반나절은 꼬박 걸리는 거리라고요!"

 "그러니까‥ 뛰자고."

하드레더를 입은 20대 후반의 청년과 팔과 다리에 보호대만 한 아직은 소년의 티가 남은 은발의 청년이 산길을  달

리고 있었다. 어쩌면 죽지 못해 달려나가는  듯한 모습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보았다면 손가락질을  했을지도 모르는 

모습이었다. 둘 다 이를 악물고 뒤에서 뭐가 쫓아오는 거처럼 달리고 있었으니 뒤는 텅 비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

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주위 시선을 의식한 모습이었다. 전 마을까지는 천천히 조깅하는 정도였으나  하드레

더를 입고 양손을 가슴에 붙인 채 뛰는 모습에 사람들은 구경거리 마냥 시선을  집중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두 사

람의 외모는 단정하기 짝이 없는 귀공자 풍이어서 더욱 신기한 광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 잠깐. 이제 좀 쉬었다가 가지요."

에릭사를 복용한 후 보를레스도 따르지 못한  체력이었다. 그런 그가 오기로 뒤를 쫓았지만  결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버렸는지 완전히 바닥에 드러누운 시즈를 내려보며 젠티아도 털썩 엉덩이를 깔았다.

 "역시. 에릭사를 마신 후에 무리한 일이 없는 모양이로군."

 "무슨 뜻입니까?"

 "네 근육 말이다. 날 처음 보았을 때보다 많이 줄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그의 물음에 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러했으니까. 현재는 완전히 여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리여리한  체

격이 되어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근육이 없다고 해도 그를 이길 정도의 힘을 가

진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용병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보를레스도 전력을 다해야 가까스로 막

아낼 정도였으니까.

 "에릭사의 무한한 생명력이 있는 한 넌 근육이 필요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틀렸다. 생물에게 있어

서 생명력의 표출, 그 중에서도 힘이라는 종류는 근육을 통해서 발출(發出)되는 거지. 한마디로 통로라는 뜻이야. 그

런데 에릭사라는 에너지의 효율이 높다보니까 자네는 통로의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거야. 즉 근육이 피로를 느낄

만큼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거지. 에릭사로 인하여 효율이 높은 에너지를 얻은  것은 자네에게 아주 커다란 가능

성이야. 하지만 그대로 만족한다면 자네는 영원히 보를레스에게 이길 수 없어. 토플레에게 들으니 왼팔 때문에 마법

을 사용하는 것을 제약받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을 더 만들어야지."

 '왜 이 사람을 실베니아 최고의 기사라고 부르는지 알겠군.'

엄청난 카리스마였다. 그가 앉아있는 평범한 바위가 더없이 높아 보였다. 저절로 끄덕여지는 내 것이 아닌 듯한 모

가지와 머리.

 '누가 글로디프리아가 값싼 남작을 키웠다고 말하던가. 이 사람이 있는 곳이  바로 곧 거성이고, 이 사람을 따르는 

사람은 정예의 기사단이다.'

 "그것 때문에 마차를 마다하신 겁니까?"

 "뭐 그런 이유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지. 알고 싶은 게 있었거든. 얼마 전 마나이츠를 만나 뵈러 왔을 때 한 가지 

소문을 들었지."

 "무슨 소문입니까?"

젠티아는 미소했다. 데린이 은근히 말해줬지만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는데 둘만 있으니 확연히 느껴졌다.

- 시즈는 예전으로 돌아왔어요. 이제 분노의 바람이 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거에요.

 '그렇군. 당신의 말이 옳았어. 아리에에게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군. 그랬다가는 당신에게  얻어터질 

테지?'

상상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는 그를 시즈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 마나이츠님이 건강이 안 좋아져 자신의 영지를 돌보지  못하자 산적들이 들끓기 시작한 모양이야. 그런데 이 

놈들이 영악해서 마나이츠에게 소식을 전할지도 모르는 귀족이나 대부호는 건들지 않고 힘없는 서민이나 품팔이나 

하는 상인들을 노린다더군."

 "악질이군요."

 "그래. 그러니까 마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힘겹게 다리로 걸어가는 걸 택한 거지. 어차피 넬피엘을 만나면 하면 수

도까지 가는 건 금방이야. 그럼 또 뛰어볼까. 넌 다른 사람보다 수십 배는 체력 회복이 빠르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꾀 부릴 생각 마."

다시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그들은 소문의 진상을 만날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그들은 산적

들의 눈에도 특이하게 띄었던 것이다.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9)

팍팍! 파바박! 숲에서 날아온 화살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와 

동료들.

 "어이! 두 놈. 여행자 같은데 그렇게 급하게 달릴 필요가 있나? 우리랑 조용히 대화나 하다가 가자구."

 "아이구~ 선생님. 저희는 카마 영지에 살고 있는데 잠시 여행을 나왔다가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편지를 받고 급

히 가는 길입니다."

그가 얼마 전 시즈에게 카리스마 가득한 기사로 망막에 남았던 사람인지 의심스러웠다.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

을 꿇고 머리를 수없이 조아리는 게 몇 번을 확인해도 산적에게 겁을 먹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니 어쩌겠는가. 내 특별히 차를 대접하고 싶었지만‥ 그렇다면 그냥 가도록 하게."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때 산적들이 둘을 놓아주었다면 젠티아도 이들과 대화할 가치가 있다고 보고  검을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발걸

음을 옮기려는 젠티아와 시즈의 앞을 거대한 참마도가 가로막았다.

 "어허, 그래도 통행세는 내고 가야지. 한 사람당 10 크로운 씩 20 크로운만 내도록 하게."

 "아니, 나으리이이이! 집에는 돈이 없습니다. 이 돈으로는 어머님의 약을 해드려야 합니다."

젠티아는 허리춤의 주머니를 잡고 뒤로 물러서며 애원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처음에 두 사람

의 용모가 귀공자풍이라 내심 경계했던 산적들은 이제 완전히 둘을 카마 영지에 사는 평버만 형제라고 믿어버렸다.

 "그렇게 돈이 없으면 살림가지라도 팔아서 마련하면 될 게 아닌가. 자네는 어머님이 편찮다고 하시는데 살림이 문

제인가? 가서 집이라도 팔게. 그 전에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를 지날 통행세를 내야할 게 아닌가. 어머니가 위독하시

다면 어서 통행세를 내고 가봐야지!"

나무 위에 앉아있던 궁수들이 그의 연설에 맞장구를 치며 웃어댔다. 그러나 그들은 젠티아의 겁먹은 눈동자가 어느 

새 분노의 광망을 띄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후우‥ 할 수 없군. 소문이 맞지 않기를 바랬는데‥."

 "그래그래. 우리가 없기를 바랬겠지? 하지만 우리도 살기가 어려워서 말이야."

 "당신들은 아무래도 실베니아 사람들이 아닌 것 같군."

 "호오‥ 카로안에서 귀족을 죽여버렸거든. 하하하핫!"

시즈는 긴장했다. 카로안은 용병국가. 귀족이라면 실력있는 기사- 카로안은  기사도 용병에 가깝다-를 호위로 두고 

있었을 것인데 주겼다니. 그러나 젠티아는 망설임이 없었다.

 "윽?"

이상한 낌새에 막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길게 늘어진 은빛의 실은 사내의 검을 교묘히 지나쳐 목을 스쳤다. 얼음처

럼 차갑다는 감각을 느꼈을 뿐이었다. 사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거지? 눈앞이 어두워진다. 왜 이러지?'

시즈는 보고 있는 입장에서 굉장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허공에서 춤을 추는 빛의 실타래.

 "살인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라고 중얼거리는 사이 정신을 차린 궁수들이 활을 쐈다.

 "뭐하는 거냐? 시즈! 오른쪽 숲을 맡아라."

보통 기사들은 갑옷을 입은 채로 움직이기 때문에 몸의 움직임은 거의 기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젠티아의 검은 

철저한 살인의 검이었다. 검 끝에서 흘러나온 빛의 실이 붉게 물들 때마다 비명이 숲에 울려 퍼졌다. 30명에 달하는 

인원을 전멸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0분. 일검도 막는 자가 없었다.

 "호오‥ 벌써 다 없앤 건가? 역시 움직임 자체는 나보다 훨씬 빨라."

간편한 체조거리도 안 되었는지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숲에서 젠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가 묻어있는 것은 오직 

검신 뿐이었다. 그것도 한 번 털자 한 방울 남지 않았다. 

 "아닙니다."

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젠티아의 말대로 움직임이 빨라서라기보다는 사람이 없었다. 표적이 도망갈 것을 대비해서 

배치해두었던 두 세명의 궁수가 고작이었다.

 '그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숨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문득 의문이 생긴 시즈가 말했다.

 "방금 전 그 은색의 실은 뭐지요?"

 "기(氣). 동방의 검법을 익힌 너라면 익숙한 단어일지도 모르겠군."

검기란 말인가? 시즈는 자신감이 없어졌다. 이  사내라면 시즈와 보를레스가 한꺼번에 덤빈다고 해도  승산이 없을 

것이다. 대륙 3 대 기사라는 말은 괜히 들러붙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감이 없어졌다고 의지마저 없어지지는 않

았다. 이미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보았으니까 누구에게서라도 남아있는 존재들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해져야 했다.  그

런 그의 생각을 눈치챈 것일까? 젠티아가 말했다.

 "자아! 그럼 또 뛰어볼까? 시합하자고!"

도망쳐야 했다. 놈들이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이 든 주인님이 발설을 한 모양이다. 아니, 발설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인간은 분명히 알아챌 수 있을만큼 능구렁이를 속에 키우고 있으니까. 게다가 얼마 전에 호기심에  만난 '바람을 

노래하는 이'까지 함께 오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그래. 도망치는 거야. 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자신에게 암시를 건 소년은 방문을 열었다. 그의 극진한 간호로 상당히  몸 상태가 호전된 마나이츠가 미소

를 띄고 반겼다.

 "오! 넬피엘, 무슨 일이냐? 얼굴에 근심이 서렸구나. 할 말이라도 있느냐?"

 "예. 죄송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만 일이 생겨서 집사 일을 그만 둬야 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마나이츠는 벌떡 일어섰다. 그의 과격한 반응에 넬피엘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마나이츠는 더욱 격분했다.

 '저토록 귀여운 녀석이 나가려고 하다니. 이 때까지 그런 기색조차 없었는데. 누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무슨 일이냐? 누가 널 괴롭힌 게냐? 집사라는 이유로?  누구냐? 당장 끌어내서 모가지를 베어 버릴 테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보거라."

서슬 같은 마나이츠의 기세에 넬피엘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희대의 음유술사 넬피엘 세로스. 그는 어쩌면 노인네의 투정에 집사 생활에서 탈피를 하지 못하는 지도 몰랐다.

마나이츠가 넬피엘의 이상한 기색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무렵 폭풍같은 등장이 있었으니‥.

우당당당탕!

 "드, 드로안 남작님! 무슨 일로‥ 으악! 그렇게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시끄러워, 난 바쁘다고!"

젠티아는 하인들의 만류도 무시한 채 문을 왈칵 열어재꼈다. 그리고 멈칫,  굳어버렸다. 묵묵히 뒤를 따라온 시즈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방으로 들이밀려는 순간,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흐아아아악!"

돼지의 목을 딸 때 들을 수 있는 소리. 그것도 매우 늙은 돼지였다.

잠시 후‥.

 "남작이나 된 녀석이 예의도 모르냐?"

 "닳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요? 솔직히 그 나이면 봐줄 눈도 없어서 서러울 텐데 내가 눈 희생한 걸 고맙게 여기진 

않을 지 언정‥. 그나마 시즈의 눈이 오염되는 걸 막아서 다행이었어."

 "흥! 고마워할 것도 많군. 너 혹시 시즈군에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말라는 소리 자주 듣지 않나?"

 '윽! 늙은 너구리. 쪽집개로군.'

찰나적으로 흠칫한 젠티아였지만 겉으로는 피식 웃었을 뿐이었다.

 "마나이츠, 사람들은 나에게 배울 게 많은 영웅이라고 칭송하고들 하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누가 한다고 

그러십니까?"

 "엣취!"

봄날에 일교차에 감기가 걸렸던가. 시즈는 재채기를 한 후  젠티아의 날카로운 눈빛 공격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네'라고 얘기할 뻔했던 것이다. 마나이츠는 의심스럽게 표정을 지우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반란에 대한 건은 지난번에 얘기한 듯 싶은데 말야."

 "그 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소식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로바메트가 직접 나섰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 네  놈과 네 장인이 골머리를 썩을 걸 생각하니  속이 다 후련하더

군."

스르르르릉‥.

 "농담이야. 검 집어넣으라고. 어쨌든 어떤 상황이 되든 간에 난 어느 한 편에도 협력하지 않는다는  정도의 지원밖

에는 해줄 수가 없어."

 "알고 있습니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에게 힘겨운 일 시킬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시죠."

 "그럼 대체 뭐야?"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어조에 화가 났는지 이불을 끌어당기던 마나이츠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

던 젠티아의 손에 눌려 다시 이불 속으로 파묻혀 버리는 마나이츠. 그의 귀에 은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당신의 귀여운 집사를 좀 빌려주셔야 겠습니다."

 "뭐, 뭐라고!?"

소리를 치려고 했다. 호통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목에 닿는 금속이 명을 재촉하지 

말라고 차갑게 속삭였기 때문이다. 마나이츠가 새파랗게 질려 말을 더듬거렸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아무래도 녀석이 순순히 나올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안 그러냐? 넬피엘. 널 귀여워 해주는  주인님의 목숨이 아

깝다면 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을 거야. 곧 가실 주인님인데 적어도 편히 보내드려야지. 나 같은 불한당 손에 가시게 

해야 되겠나?"

마나이츠는 그제서야 넬피엘이 평상시와는 다른 기색으로 안절부절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분노로 일었지만 소

용없었다. 입을 막지 않았다고 해도 젠티아는 대륙 최고의 검사였다. 주문이라고 생각되는 단어가 귀에 들리는 순간 

자신의 목은 몸통과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검을 든 이상 젠티아는 농담이나 해대는 능글맞은 귀족이 아니었다. 누

구보다도 냉정하게 목표한 바를 자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고. 마나이츠는 내심 그에게 

마구 욕을 해댔지만 젠티아는 들리지도 않는데 신경쓸 필요가 없었으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오‥. 이 사람이 죽어도 되는 모양이군. 난 넬피엘 자네가 내 성격에 대해서 약간은 파악을 하고 있을  줄 알았

는데‥."

한 치 한 치. 젠티아의 검은 예리함을 자랑하기라도 하는지 마나이츠의 주름진 목을 파고 들었다. 그에 따라 조금씩 

베어 나오기 시작한 핏줄기가 어느 새 마나이츠의 옷 앞섬을 완전히 적셨다. 

 "성주가 되어서 조금은 머리가 좋아졌나 했더니, 여전히 멍청하군."

시즈는 흠칫했다. 방 전체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 굉장히 앳되다고 생각되는 음성은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발 밑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뱀처럼 시즈의 몸을  타고 오르는 불꽃. 하지만 저택

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젠티아의 언질을  받았던 시즈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유술사  제일의 힘을 가졌다는 

존재와의 작은 격돌에 기쁨으로 흥분했을 정도였다.

발에서 뜨거움이 느껴졌을 때 그는 양손을 펼쳤다. 양팔에서 모아진 바람의 의지가 눈깜짝할 사이에 시즈를 중심으

로 소용돌이쳤고 불꽃은 천조각이 가위에 짤리듯 찢어졌다.

 "크윽!"

허를 찔린 신음소리를 듣자 젠티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렸다.

 "큭큭! 이봐, 넬피엘. 난 성주가 되기 전부터 머리가 많.이. 좋았어. 아무리 너라고 해도 '바람을 노래하는 이'와 '대

지의 고동을 밞는 이'를 동시에 상대 못하지. 아니,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 전에 인질이 죽겠지만."

 "빌어먹을!"

육두문자와 함께 방 한 구석에 화르륵하고 불꽃이 피어나더니 천천히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적색의 머리가

카락과 같은 일색(一色)의 정장. 다른 사람이 그렇게  입고 있다면 굉장히 화려하다는 느낌을 주었겠지만 소년에게 

있어서는 그저 평범한 옷가지 중에 하나라고 느껴졌다. 이유는 소년 자체로서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넬피엘이 나타나자 젠티아의 미소는 더욱 살아났다.

 "여전히 예쁘군요, 넬피엘 양!"

 "원하는 게 뭐지?"

누구라도 부러워할 그의 미모는 그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콤플렉스였다. 만약  인질만 아니었다면 젠티아에게 헬 파

이어를 시전했을 표정으로 넬피엘은 물었다. 

사실 시즈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방금 전 찢어발겼던 불꽃도 흩어지면서 그에게 그을림을 남겼다. 게다가 모습을 드

러낸 이후 분노로 일그러진 살기가 방 안에 가득 차자 마치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런 가장 강한 음유술사의 분노

하고 있는데도 젠티아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어쩌면 가장 굳건한 대지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지.'

 "너무하잖아. 넬피엘, 넌 우리의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착각하지마."

 "아릴한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움찔!

젠티아는 시즈조차 두려움에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잘도 웃어댔다. 그것은  상대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

는 승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하하하핫! 마나이츠,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마나이츠는 기절할 것 같이 놀랐다. 앞섬을 적시고 있던 피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고급의  환영마법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라면 눈앞에 보이는 젠티아의 마법실력은 가히 절세적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놀

라기는 넬피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눈썹을 잠시 찌푸리는 정도로 끝났을 뿐이다. 젠티아의 계략에 빠져서  당황

한 나머지 속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시즈는 호탕하게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킨 젠티아에게 존경의 미소룰 보냈다.  사실 젠티아의 마법실력은 그리 뛰어

난 편이 아니었다. 좋게 봐줘야 고작 3 써클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검에서 풍기는 살기는 사람들을  혼란으로 

빠뜨려 자신들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마법으로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이 어찌 놀랍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왜 이런 연극을 했는지 알려드리죠. 마나이츠님도 들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나 마나이츠는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휘파람을 불어대는 젠티아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놈아, 듣고 싶지 않다! 네 녀석은 정말로 내 모가지를 베어버릴려고 했지? 그 살기는 진심이었어!"

 "그러길 바라십니까?"

젠티아는 혀를 낼름 핥으며 손을 검자루로 뻗었다. 금새 조용해지는 노마법사. 씨익 웃어준 능구렁이는 넬피엘을 찾

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수도로 가야겠다는 건가? 로바메트 공작가 변심(變心)하게 된 배후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로바메트 공작의 능력은 가히 놀랍습니다. 아무리 궁정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의 일부까지 동원했다지

만 존기어마저 한 번에 패배시킨 반란군에 맞설 정도니까요."

 '그러는 반란군에게 맞서려는 네놈은?'이라고 말하려던 마나이츠는 고개를 저었다. 저 기고만장한 놈을 더 이상 추

켜올렸다가는 국왕이 되겠다고 날뛸지 몰랐다.

 "하지만 공간 이동이 가능한 마법사라면 얼마든지 있네. 굳이 넬피엘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아, 마나이츠님은 모르시겠지만 넬피엘은 이미 8년 전에 저와  함께 여행을 다닌 일이 있습니다. 그 때도  그의 

능력은 가히 궁극이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궁극?"

 "아마도 마나이츠님의 마법에 뒤지진 않을 겁니다."

 "뭐라고?!"

마나이츠는 놀라움에 입이 쩍 벌어졌다. 아직 30도 되지 않은 넬피엘이다. 그런데 8 클래스에 도달한 그에게 뒤지지 

않다니. 그런 재능을 지닌 자는 마법이 세일피어론아드에 전해진 이후 인간의 역사에는 없다. 넬피엘로서는  곤혹스

러웠다. 자신의 능력이 새간에 알려지면 귀찮은 일들이 많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더욱 젠티아의 계략에서 벗

어나기 힘들었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나마 분쟁의 소굴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더만‥. 하지만‥.'

아릴, 그 꼬마가 보고 싶기도 했다. 

젠티아는 마나이츠를 설득하기보다 놀리는데 더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마나이츠를 툭툭치

더니 시즈를 가르키며 말했다.

 "참고로 저 친구도 넬피엘과 동급입니다."

 "‥‥."

이제는 대답도 없었다. 입이 벌어진 채 움직일 줄 모르는 그를 조용히 뉘여준 젠티아는 넬피엘에게 말했다.

 "자아‥ 어떻게 하겠는가? '불꽃의 춤을 추는 이'여‥."

넬피엘은 생각했다. 젠티아를 보았고 마나이츠를 보았고 다시 시즈를  보았을 때 그의 눈은 이채를 띄었다. 예전에 

확인하고 다시 보는 바람의 음유술사. 물끄러미 시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넬피엘은 입을 열었다.

 "젠티아, 기억하나? 내가 했던 질문을? 난 당신의 대답을 아직 기억하고 있지."

젠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일들이 빗방울처럼 그의 머리 속에 쏟아졌다.

 "물론이야."

 "확인할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거야."

환한 미소. 시즈로서는 처음 보는 젠티아의 온화한 미소였다. 작은 소년의 몸을 아주 절친한 친구처럼 꼭 안은 그는 

중얼거렸다.

 "살아서 널 다시 볼 수 있어서 신에게 감사한다. 그런데‥."

 "???"

 "여전히 말랐군, 넬피엘 양! 여전히 '꽃'이야."

카마 영지의 사람들은 영주의 성 한 쪽 귀퉁이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는 걸 보며 마나이츠가 새로운 연금술이라고 

실험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 *

 "젠티아, 불꽃도 음유술사의 자격이 있는 걸까?"

 "글쎄‥."

 "그리고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백치의 자폐증을 가진 바보일까? 아니면 4000년의 망령일까?"

 "글쎄‥."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 괴물일까. 노래를 부르지도 않는 주제에 나의  기억은 나 자신을 음유술사라고 말하고 있

는 걸까."

 "무슨 소리야? 넌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난 부른 적 없어."

 "하하하핫! 바보로군. 어쩌면 너 자신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

 "무슨 소리야? 설명해봐."

달려드는데 목숨을 건듯한 소년을 겨우 떼어낸 청년은 킥킥댔지만 아무래도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게다가  귀.찮.았.

다. 결국 그는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이에게 책임을 넘기기로 했다.

 "음‥. 나로서는 설명하기가 힘들어."

 "그, 그럼 누가‥."

 "아! 어쩌면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면 알려줄 지도 몰라."

 "‥ '바람을 노래하는 이'?"

 "큭큭!"

넬피엘은 의아한 눈초리로 징그럽다는 듯 젠티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젠티아는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오히려 검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시즈를 향해 은근한 설렘을 내포하고 있는 시선을 보내는 그에게 말했다.

 "순진한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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