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200)

39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2)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욱 심각해."

수도 펴온는 황폐했다. 반란군이 쳐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고민하던  시즈는 금새 알 수 있었

다.

쾅!

 "아, 안 되요! 그건 저희가 한 달 동안 연명할‥."

여자는 말을 다하지 못했다. 그녀가 매달려있던 다리의 주인에게 거칠게 복부를 걷어차였기 때문이다.

 "시끄러워. 난 난민(難民)이야. 내란을 피해서 겨우겨우 살아 수도에 왔는데  먹을 게 없다니 말이나 돼? 그러니까 

좀 나눠달라고!"

 "제, 제발‥. 제가 굶는다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아이들에게만 이라도 인정을 베풀어주세요. 선생님! 제발‥."

언제부터 강도가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시대가 되었을까. 여인은 바닥을 기어서  사내의 다리에 다시 매달려 애원했

다. 집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자 사내의 악귀같은 눈빛도 서서히 누그러들었다. 그러나 잠시 

뿐. 자신의 배고픔을 무시하고 빵을 양보할 정도로 인정이 움직인 정도는 크지 않았다.

퍽!

 "아악!"

아예 이번에는 다시 매달리게 하지 못할  심산인지 완전히 여자를 마구 걷어차고 밟아댔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여인은 남자의 다리에서 손을 놓지 않고 매달렸다. 예전의 시즈라면 지금 같은 광경에 당장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

만 용병이 되어 몇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이러한 모습이 자연스러운 전란(戰亂)의 부분이라는 걸 깨닫은 지금은 이

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죽을 때까지 내버려둘 수는 없었음으로 젠티아는 남자의 손을 잡고 말렸다.

 "그만 두십시오. 사람을 죽일 생각입니까?"

 "이미 동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지."

 "그렇다고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돈을 줄테니 그 빵은 이 여자에게‥."

젠티아가 내민 손을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남자는 가만히 그를 탐색하듯이 바라보더니 비웃었다.

 "호오‥ 당신은 수도에 지금 온 거로군. 그것도 전란이 없는 곳에서 온 게 틀림없어. 안 그렇다면 지금  돈이 아무

런 가치가 없다는 걸 알 리가 있나. 하하핫.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견딜 수 있는 체력이 있을 때 돌아가도록 

하시오. 이곳은 점점 지옥이 되어가니까."

그는 껄걸 웃더니 빵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여인과 그녀의 아이들이 한 달을 연명할 식량이라고 말한 그 양은 빵 

대 여섯 개 정도였다. 배부르게 먹는다 치면 고작 사오일도 버티지 못할 양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한꺼번에 다 먹어

치웠다.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에 토할 것처럼 구역질을 몇 번했으나 입을 막고 꿋꿋이 참았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

리고 바라보는 젠티아들을 향해 말했다.

 "흐흐흐‥ 몸에 지니고 있으면 습격 당하기 일쑤라서 말이야."

빵이 사내의 입 속으로 모두 자취를 감춰버리자 여인은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울부짖으며 사내에게 

덤벼들었다.

 "이 나쁜!"

아무리 그녀가 이를 갈며 공격한다고 해도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는 법. 가차없이 사내가 주먹으로 때리자 곧 

기절해버렸다.

 "그만 하시죠!"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시즈가 외쳤다. 그렇지만 그

의 외모는 나약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사내는 주먹을 그치지 않았다.

 "그만 하랬잖아!"

슉!

분노가 깃든 바람의 칼날이 시즈의 몸 주위로 넘실거렸다.

 "으아아악!"

바람의 칼날에 땅마저 깊게 패였고 건물 지붕이 들썩거렸다. 그제야 사내는 공포에 질렸고 도망쳐 버렸다.

 "시즈 그만해! 사람을 살리려고 다른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저 사람도 평범한 서민 중 한 사람이었을 거다."

 "전쟁이 죄인이지"

시즈를 말리는 젠티아를 스치며 넬피엘이 중얼거렸다. 전쟁이 멎질 않는 한, 혼자의 힘으로는 혼란을 막을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음유술사라고 하더라도. 시즈는 허탈함에 주저앉았다.

그의 주위는 땅부터 건물까지 완전히 난도질되어 있었다. 괜찮은 것은 젠티아와 넬피엘이 서있던 자리 뿐. 

 "왕궁에서는 뭘 하기에 수도를 이토록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겁니까?"

시즈의 물음에 젠티아는 고소(苦笑)했다. 전쟁은 언제나 서민에게 잔인하다.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킬유

시나 로바메트나, 젠티아는 빨리 내란(內亂)을 끝내려 했다. 킬유시가 어려운 봄에 전쟁을  일으킨 것도 다른 두 사

람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로바메트는 일어섰다. 킬유시와 그  휘하의 

기사들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로바메트의 지혜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반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해

야 한다.

그 동안 실베니아를 지탱했던 힘줄은 모두 끊겨 결국 나라는 짚으로 이루어진 허수아비가 되어 버릴 것이다.

 "치안을 유지할 군사력이 없겠지. 반란군에 맞서기 위해 최소한의 왕궁을 수비할 인원을 제외하고는 근위기사단까

지 출정했을 정도니까. 전쟁을 피해 온 난민들과 그 안에서 새로 생겨나는 난민. 이들을 왕궁은 제어할 수 없을 거

다."

 "바보 같은 왕실이군."

펴온은 전쟁의 휩싸인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었다. 골목에서는 비명이 가득했고 폭력, 살인, 강간까지도  성행했다. 

여자들은 조용히 지하실에서 몸을 숨겼고 밖을 나  다니는 남자들은 대부분 근육이 울둥불퉁하거나 무기를 휴대한 

남자들이 다였다.

 "우선 로바메트 공작가를 들려야 해."

 "공작가를요? 공작 본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근위 기사단과 함께 있을 공작을 어떻게 만나냐? 아무리 음유술사라지만 그들은 국가 제일의 기사들이야. 적어도 

드래곤 정도는 되어야지‥ 잠깐!"

젠티아의 머리가 풍차처럼 휘리릭 돌았다. 그리고 애써 시선을 피하려는 넬피엘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래곤을 능가하는 놈이 있었지."

 "난 힘을 사용하기 싫어. 더욱이 불꽃의 춤은‥."

 "불꽃의 춤을 추지 않아도 넌 충분히 강하잖아. 드래곤들조차 네 이름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있어."

결국 넬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의 정치판에 휩쓸리며 살아온 젠티아의  언변을 그로써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었다.

 "좋았어. 그에게 가자!"

호기스럽게 외치는 건 젠티아 뿐이었다. 목적지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는  시즈는 말은 안했지만 굳어있었고 넬피

엘은 귀찮은 사건에 휘말린 게 짜증스러웠다.  중얼중얼하고 주문을 외운 넬피엘은 신경질적으로 발동어(發動語)를 

외쳤다.

 "염원하는 그 곳으로! 텔레포트!"

 "윽! 매스꺼워."

 "어쩔 수 없어. 좌표도 정해지지 않을 곳을 머리 속으로 계산해서 이동하느라 마나가 약간  파란(波瀾)을 일으켜서 

그래."

마법사라고 지칭되는 사람이 넬피엘의 말을 들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완전하지 않은 좌표로 공간을 뛰어넘는다

면 공간의 틈에 갖혀버릴 수 있기 때문에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자들도 고개를  휘휘 젓는 짓이었다. 젠티아도 모르

지는 않았다. 그렇게 꼬투리를 잡지 않는 이유가 있었지만 다른 것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젠티아는 쑤셔오는 머

리 한쪽을 문지르며 말했다.

 "잠깐, 넬피엘. 도대체 좌표를 어디로 계산한 거야?"

 "젠티아 당신이 말한 대로 사람들이 얽혀 싸우는 자리로 왔을 뿐이야."

챙! 채챙! 

 "으아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아알!"

 "쿨럭! 쿨럭!"

심상치 않은 배경음. 젠티아는 당당하게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넬피엘을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그렇다고 전쟁터 한 복판으로 오냐?!"

 "조심해요!"

어느 쪽의 군사도 아닌 그들은 반란군과 진압군의 협공을 받았다. 시즈가 잠시  동안 막고 있었지만 혼자서 모두를 

가로막을 수는 없는 노릇, 몇 명이 티격대고 있는 청년과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아아아!"

 "시끄럿! 대화를 할 수가 없잖아!"

스르릉! 이를 갈던 젠티아가 짜증스럽게 검을 휘두르자 검풍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덕분에 그들을 공격하려

던 자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어서 텔레포트하라고!"

결과를 얘기하자면 그 후로 3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그들은 안전하게 전쟁을 관전할 수 있는 위치에 도착했다. 

그 대가로 처음에는 속이 울렁이는 정도였던 젠티아는 수풀 속에서 토액질을 해댔다.

 "우웨에에에엑! 넬피엘,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생각의 자유를 가로막지 않겠다. 그게 아무리 헛된 망상일지라도!"

시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게 수 천년을 내려온 동료들이란 말인가? 역사의 고리와 만난다고 해도 저토록 티격

대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검과 마법이 날아다니겠지만.

 "그나저나 이번에도 '역사의 고리'가 관련되었을까요?"

 "당연하지!"

 "아마도‥."

두 사람의 자신있는 확신은 지금까지 수많이 시달린 경험에서 나오는 추리였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나타난다던 

말은 세일피어론아드에서도 여전히 통용되는 모양이었다.

 "역시 자네들은 우리에 대해서 너무 잘 안다니까."

푸른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한 눈에도 자유로움에 취해있는 듯한 청년이었다. 나무에서 다리를 흔들거리던  그는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노르벨‥. 오랜만이군. 많이 컸잖아? 어린애였는데‥."

 "그 쪽도 마찬가지. 아저씨 다 됐군, '대지의 고동을 밟는 이'여‥. 새로운 인원이 첨가된 것 같은데?"

 "‥드디어 찾았다. '불꽃의 춤을 추는 이'‥."

그 때 이가 갈리는 듯 소름끼치는 음성이 진동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음성에  담겨진 의미는 노르벨을 더욱 긴장시

켰다. 

 "파멸의 음유술사?"

긍정 대신 넬피엘의 유혹적인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당장이라도 안아줄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였지만 노르벨에게

는 지옥의 망자(亡者)가 울부짖는 것보다 더욱 공포스러웠다. 

 "이거 동창회에 온 기분이군."

수풀 속에서 사자 같은 기세로 천천히 걸어나오는 두 사람, 노리스와 바스티너에게  반가운 듯 젠티아가 손을 흔들

었다. 방금 전의 이를 가는 목소리는 노리스였다. 그러나 살기와 복수심에 차있는 그의 눈동자도 넬피엘은 전혀 위

협이라고도 느껴지지 않는지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람을 느끼려고 눈을  감고 있던 시즈가 입을 열었

다.

 "아직도 세 명 정도가 남았어요."

 "라고 하는 군. 나머지도 얼굴을 보여주겠어?"

 "얼마든지. 츠바틴의 말이 옳았군."

망토가 펄럭이는 소리가 갑자기 요란해졌다. 이유를 대자면 마법사는 기사보다 스스로 연출하기가 쉽다고 할까.

 "로진스, 축하하네. '신비의 고리' 수장이 되었다면서?"

 "역사의 고리가 해체할 때가 다가왔나보군. 내가 음유술사한테 취임 축하를 받다니."

 "그리고 꼬마 친구는 신참인가?"

젠티아의 시선이 로진스 옆으로 푸른 머리의  소년에게 옮겨갔다. 시험을 할 요양으로 살짝  살기를 가미한 눈빛을 

가볍게 소년은 머리카락을 넘기는 동작으로 보내버렸다.

 "로길드 페노스톨멘이라고 합니다. '값싼 남작'을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이쪽은 제 호위인 바크호라고 하지요."

 "그렇군. 크레오드 노인네의 핏줄인가?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나보군. 귀찮은  호위까지 거느리고 다니는 걸 보

면‥."

로길드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관심은 시즈 세이서스였다. 일생의 목표로 삼은 이. 그는 대륙 최고의 기사

와 마법사들에게 둘러 싸여서도 담담하게 서있다.

 "이번에는 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고민을 소홀히 하신 것  같습니다, 시즈님. 세 번이나 텔레포트를 하다니. 

그 정도의 마나가 몇 번이나 요동을 치면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아챌 겁니다. 게다가‥."

 "넬피엘 군의 마법은 너무나 강력해서 알아채기가 쉬워."

로진스의 부연설명을 끝으로 로길드는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젠티아가  증오스러운 눈으로 넬피엘을 후벼팠음은 말

할 것도 없다.

한 편, 바스티너의 갑옷을 입은 에레나는 폭풍같이 몰아치는 넬피엘의  기세에 몸을 떨어가면서도 시즈를 힐끔거리

고 있었다. 그런 중에‥.

 "오늘도 바스티너는 여전히 말이 없군. 얘기를 듣자하니 주인이 바뀌었다던데, 솔직히 나와는 만난 적이 없잖아요? 

소문에는 미인이라는‥."

하고 눈을 반짝이며 젠티아가 말을 걸었으니 흠칫하고 놀랄 수밖에. 그러나 그런  반응에 다른 사람들이 되려 경악

했다. 그들의 머릿 속에는 같은 생각이 소용돌이가 되어 몰아쳤다.

 '저 철갑괴물이 놀라다니‥. 설마 정말로 미인이란 말인가?'

잠시 정신 공황에 빠진 음유술사들와 역사의 고리들. 그들은  제각기 바스티너의 반응을 추리했다. 그런 공황이 깬 

것은 넬피엘의 맑으면서도 무감각한 목소리였다.

 "지루해. 얼굴보고 끝낼 거면 그만 가봐도 되나?"

그 한 마디에 침묵은 공황으로써의 침묵이 아니라 긴장이 원인인  침묵으로 뒤바뀌었다. 그리고 로진스의 영창에서 

재빠르게 튀어나온 나뭇잎들의 공격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 젠티아와 노르벨의 얼굴에서는 장난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투지에 살기가 끈끈하게 들러붙어 

검과 함께 몰아칠 뿐. 로진스의 나뭇잎 마법은 굉장히 까다로웠다. 기류를 따라서 흐르는 나뭇잎을 피하기도 곤란했

을뿐더러 그냥 나뭇잎도 아니었다. 닿으면 폭발하는 폭약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걸 젠티아 같은 경우는  가볍게 

피하다가 머리카락이 잔뜩 그을리고서야 깨달았다.

 "조, 조심해!"

시즈와 넬피엘에게 소리친 그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드로안 가문의 보검인 성음검(聖音劍)이 바람을 가르면

서 긴 노래를 불렀고 그와 함께 은빛의 실을 뽑아냈다. 그물처럼 잔상의 광선을 남긴 젠티아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

다. 

콰아아앙!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들이 힘차게 요동쳤다. 허공의 바다에 힘찬 파도가 일 정도로. 폭발로 일어난 바람에 넬피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골치 아픈 마법이로군."

그러면서도 그는 가장 간편하게 나뭇잎을 처리했다. 손을 가볍게 뻗자 앞에서 불의 벽이 나타났는데 사람의 키만한 

불벽은 거대한 해일처럼 팔랑이는 물고기를 삼켜버렸다.

 '꽤 고심해서 만들어낸 마법이었는데‥.'

파이어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화염계, 또 하나는 폭렬계이다.  화염계는 그저 태울 뿐이고, 폭렬계는 

폭발하는데. 그의 나뭇잎 폭발 마법은 폭렬계 라고 할 수 있었다. 폭렬계의 파이어볼은 상당히 고난이도이기 때문에 

저(低)단계의 마법사는 공같은 매개체를 사용하여 파이어볼을 만들어냈다. 로진스는 이와 같은 매개체를 이용한 파

이어볼을 나뭇잎에 대입한 것이다. 그 말은 나뭇잎 하나 하나가  파이어볼이라는 뜻이었음으로 굉장한 마력이 소모

되었다. 그러니까 넬피엘의 간편한 방어에 쓴웃음이 나는 것이다.

 "크윽!"

그러나 젠티아도 고전을 치뤘 듯이 시즈도 피하기에 정신이 없는 모습에서 조금  위안을 받았다. 왠만한 바람은 기

류를 사이를 타고 흐르는 나뭇잎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공기가 갈라짐에  따라서 파고 들어왔기 때문에 시즈

로서는 무리를 하여 바람의 칼날로 폭발 범위 밖에서 베는 게 전부였다.

로길드는 넋을 잃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음유술사들의 마법과 검술은 이야기 속에서 전해지던 모습 그대로였다.  전

설이 재현되었다고나 할까. 어린 그로서는 입을 쩍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날리는 불씨 속에서 얼음 같은 표정으로 검은 눈을 빛내는 '불꽃의 춤을 추는 이', 길게 허공에 늘어뜨린 빛의 실자

락 속에서 은근하게 미소를 내보이는 '대지의 고동을 밟는 이'. 그리고‥. 바람의 비단을 휘감은 채 은색의 머리카락

을 휘날리는 '바람을 노래하는 이'.

 "뭐 하는 거야? 어서 마법을 써!"

수 십 개의 나뭇잎을 날려보낸 로진스이 기진맥진하여 소리쳤다. 그제서야  로길드는 날아오는 거대한 불덩이의 열

기를 느꼈다.

 "마르지 않는 생명의 창조자이자 보호자여!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로부터 나를 지켜다오!"

파~웅! 물기가 번들거리는 방어막과 넬피엘이 날린 불덩이가 충돌했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은 채 물기와 맞서는 걸 

보니 화염계의 파이어볼이었다. 하지만 그 열기가 타(他) 마법사가 펼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미 늦었어! 피해!"

로진스가 급히 그를 잡고 옆으로 뛰었다.

화르르르르르륵!

불덩이가 땅에 부딪히며 바닥을 쓸었다. 겨우 피한 로진스와 로길드는 뒤로 돌아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경 

2m의 모래가 그을려 흰 김을 뿜어냈다. 만약 그 안에 있었다면 숯덩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흐압!"

넬피엘의 마법은 너무 파괴적이었다.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순식간에 열세가 되어버릴 게 뻔했기 때문에 노리스는 

전력을 다해서 검을 내리쳤다.

슈앙! 하고 공간 자체를 자를 듯한 검이 허공을 갈랐다. 약간 얼굴이 찌푸려진 넬피엘을 보고 노리스는 자신만만하

게 말했다.

 "어떤가? 그 동안 실력이 약간 늘었지?"

약간이 아니었다. 젠티아마저도 그 기세에 뒤를 돌아볼 정도의 검이었다. 다시 공격할는 그의 검을 젠티아가 막아섰

다.

 "넬피엘, 이 자는 내가 상대하지."

 "비켜!"

카앙! 옆구리를 단숨에 갈라 버리려는 검을 막자 손이 저렸다. 정말 대단해졌군. 솔직히 예전에 노리스와 검을 나눴

을 무렵의 젠티아는 애송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검으로  말하자면 누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는

데. 그의 입술 끝 부분이 말려 올라갔다. 

 "음!"

가가가가각!

젠티아가 띄워 보낸 빛의 실에 검이 스칠 때마다 푸른 불꽃이 튀었다. 노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대륙 최고의 검사라고 불리는 자의 검이란 말인가?'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 즐기는 듯 허공에서 춤추는 실은 분명히 '검기'일 것이다. 그러나 시즈에게 동방 검법

의 요체를 전수한 노리스로서도 처음 보는 식의 검기였다. 어떻게 검기로 실을 만든단 말인가? 게다가 허공에 날리

는 검기의 실이라니‥.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와 같은 능력은 없었지만 상대할 실력은 있었다.

 '과연‥.'

점점 노리스의 검이 빨라졌다. 게다가 젠티아의 성음검과 부딪힐 때마다 흰 연기가 팍 하고 터져 나왔다. 호흡을 곤

란하게 만들 정도로 연기는 아니었지만 젠티아는 알고 있었다. 그 연기야말로 동방의 무술이나 검법을 연마한 자들

이 기를 공격에 내포시켰을 때 드러나는 '경'의 증거였다. 검을 맞았다가는 당장에 두 쪽이 되리라.

그의 눈이 점점 가늘게 빛났다.

 "‥‥."

시즈는 의아했다. 자신의 상대라고 생각했던 바스티너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검을 뽑지 않는 것이다. 공격할 

상대가 하지를 않으니 오히려 불안했다. 그리고 서서히 검은 갑옷의 기세가 일어났다. 보를레스도 이길 수 없던 상

대였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여 바람의 의지도 동원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시즈의 검집에서 강렬한 번개가 튀어나왔다. 바스티너는 막아냈지만 그 안에 내포된 힘에 놀랐다. 순간적인  파괴력

으로 치자면 노리스의 에도 뒤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버티는 것은 바보짓이다. 손목을 비틀며 뒤로 

물러서자 허리 한 치 앞으로 예도가 지나갔다. 이제는 시즈가 당황할 차례였다. 이제까지 이토록 쉽게 발도술을 방

어한 자가 없었다. 검을 높이 치켜드는 자세가  너무나도 거대해 보였다. 하지만 밀릴 수는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절망의 갑옷이라고 불리는 '바스티너'라 해도.

 "크아아아아악!"

카아아아앙! 

빠득! 이빨이 금이 가고 피가 줄줄 흘렀다.

 '무리에요.'

에레나-바스티너는 공격을 하면서 오히려 걱정스러웠다. 시즈의 왼팔이 불구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용하

면 할수록 진짜로 불구가 될 날이 빨리 다가온다는 것도. 사실 방금 전 내려치기는 자신으로써는 그렇게 강한 공격

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팔을 다 써서 겨우 막아내니 걱정이 온천수 솟듯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게 사랑하는 이와 싸워야 하는 괴로움이구나.'

그렇다고 역사의 고리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전대(前隊)가 그랬듯이 당장 죽임을 당하고 바스티너를 뺏길 게 불 보

듯 뻔했다. 한숨을 내뿜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기가 오른 입김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무리를 했기 때문일까. 

바스티너의 연이은 공격에도 시즈는 잘 버텨가고 있었다.

 "안돼죠. 당신은 날 상대해야 되요."

넬피엘이 위태위태한 시즈를 돕기 위해 움직일 때였다.  그림자가 갑자기 기괴한 모습으로 일그러지며 낄낄거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유령이라면서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넬피엘에게서는 코웃음밖에 볼 수 없었다.

 "후‥. 그림자. 플로먼인가?"

그의 중얼거림에 이글거리던 그림자의 웃음이 가볍게  날아갔다. 한순간에 벌어진 틈. 넬피엘이  놓칠 리가 없었다. 

두 손을 모아 인을 만들어 뻗으며 외쳤다.

 "炎暴!"

그의 그림자 공략법은 매우 간단했다. 그림자를 없애버리는  것이었으니까. 넬피엘의 전방위 지면에서 작은 화산이 

폭발하듯 불꽃이 터져 나왔다.

 "으악!"

 '아픔의 비명이 아니다.'

화염이 큰 타격을 주지 않았다고 확신한  넬피엘은 경악성이 들린 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노르벨에 비하여 뒤지지 

않는 빠르기. 커다랗게 눈이 부푼 노르벨이 급히 몸을 젖혔지만 생각보다 넬피엘의 공격범위는 길었다.

 '어, 어떻게?' 

 "크아아아아아악!"

양팔을 겹쳐서 막았지만 우득거리는 소리만 요란했다. 악다문  이로 내장에서 솟구쳐온 핏물이 튀어나왔다. 아픔을 

참아보려고 애를 쓰는 노르벨의 시야가 점점 작아졌다.

 '이번엔 제대로 맞았군.'

타격을 방어하던 힘이 묵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축 처져버린 노르벨. 그렇다고 넬피엘은 봐주는 성격이 아니었

다. 원조를 위해 달려오는 바크호를 힐끗 바라본 그는 다시 한번 노르벨을 후려쳤다. 가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날

아온 노르벨을 바크호는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서며 잡아냈다.

 "현자의 검‥."

노르벨은 궁금해하던 리치의 수수께끼는 하나의 지팡이였다. 로진스가 '현자의 검'이라고 지칭하며 두려워하는 넬피

엘의 무기는 검이라기보다는 육각형의 얇은 몸을 자랑하는 봉에 가까웠던  것이다. 뭘로 만들었는지 봉신은 투명했

고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히 적혀 마법무기라는 걸 어린애도 알 수 있었다.

 "넬피엘 세로스는 공간의 결계 속에 무기를 감추고 있다가 필요할 때 꺼내쓰지. 그는 마법뿐이 아니라 육탄전에도 

강해."

한 마디로 노르벨에게 달려들면서 공간 결계 속에서 무기를 꺼냈다는 뜻이 된다. 바크호로서는 식은땀을 흘리는 방

법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말은 들었지만 진정한 괴물이군.'

로길드도 침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간 결계를 만들려면 적어도 드래곤 이상의  마력을 가진 존재여야 했기 때문

이다.

 '정말 저런 존재를 상대로 할아버지는 승리를 거뒀단 말인가?'

사실 바크호와 노르벨, 로진스와 로길드가 상대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제대로 된 공격도  하기 전에 노르벨이 

정신을 잃어버렸으니 막막했다. 오히려 걸레처럼 변한 그가 죽지 않은 게 신기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잖은가."

의기를 다잡으며 로진스가 손을 겹쳐 하늘로 뻗었다. 몸에서 강렬한 마나가 마구 피어올랐다. 적어도 7써클  이상의 

마나. 쉴 새없이 입을 웅얼대는 모습이 엄숙했다. 그 모습에서 넬피엘은 추리했다.

 '마법이 완성되면 골치 아프다.'

자신은 몰라도 젠티아나 시즈는 궁극에 가까운 마법을 방어할 방법이 없다시피 했다. 그로써는 다급해졌다.

 "불꽃이여‥. 화염이여‥. 나의 의지여‥."

손날로 허공을 가르자 이글거리는 화염의 칼날이 생성되어 날아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현자의 검을 

내리치자 똑같은 화염의 칼날이지만 훨씬 거대한 칼날이 곧바로 뒤를 이었다.

 '곤란해‥.'

바크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첫 번째 화염도는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겠지만 열기로 온몸이 그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열기가 식기 전에 두 번째 화염도가 덮치면 검풍으로 갈라낸다고 해도 두 열기가 겹쳐 자신은 상당한 화상을 타

격을 감수하게 된다. 정말이지 신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입맞추고 싶은 입술과 사랑하고 싶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 미소년은 마법이 강할 뿐 아니라 공격을 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효율적이고 지능적인 플레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크호, 이걸 받아!"

상대의 생각과 바크호의 곤란함을 금방 눈치챈 로길드가 작은 단검을 던졌다. 화려한 금장식과 보석으로  수놓아진, 

첫 눈에도 값이 무척 나갈 듯한 단검이었다. 소년은 던지고 다급하게 외쳤다.

 "물의 정령이 깃들어 있는 검이야!"

감사하다고 말할 시간도 없었다. 롱소르도 화염을 갈라내자마자 두 번째 화염이 덮쳐왔다. 우선은 검풍을  일으켰고 

바로 뒤를 이어 물의 단검을 휘둘렀다. 치이이이익! 갈라진 화염의 칼날과 물줄기가 부딪히며 수증기가 자욱하게 일

어났다.

그 때 로진스가 외쳤다.

 "모두 물러섯! 내 주위로!"

사전에 계획했던지 노리스들은 재빨랐다. 다만 바스티너가 머뭇거렸는데 노리스가  걷어차자 금새 시즈에게서 떨어

졌다. 그들의 계획을 안 것은 하늘에서 우르르릉하는 소리가 들린 후였다. 

 "넬피엘! 텔레포트를!"

 "모이기나 해!"

로진스는 다급한 음유술사들을 보면서 냉소했다.

 '츠바틴이 계획한 전술인데 쉽게 빠져나가게 만들 수는 없지.'

 "떨어져라. 천상의 검이여!"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이미 모아진 먹구름에서 거대한 낙뢰가 떨어졌다. 잘 지어진 저택하나는 통째로 삼켜버릴 거대한 벼락이었다.  글로

디프리아에서도 동남쪽에서 무언가 번쩍이는 걸 목격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헉! 헉!"

라이트닝 같은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위력이었다. 초대형 라이트닝이랄까. 사람을 죽이는 정도는 라이트닝도  충

분하기 때문에 어찌보면 낭비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음유술사를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지 않았나 싶었기 

때문에. 로진스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연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가 가라앉고 노리스들이 경계를 하며 시선을 집중했다. 침묵의 바람처럼 폐허의 공간을 쓸어갔다. 

안도의 한숨과 미소가 그들의 얼굴에 지어졌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그들의 뒤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콰릉!

깡! 쨍그랑!

 "데린? 아리에? 둘 다 왜 그래?"

 "미, 미끌어졌어요."

 "저도."

글로디프리아에서는 식사 중이었다. 느닷없이 들려온 천둥소리에 놀랐다고 생각한  피브드닌이 밖을 바라보고 중얼

거렸다.

 "구름 한 점 없는 봄하늘에 왠 날벼락이지?"

 "저, 전 그만 먹겠어요."

 "저도 그만 일어설게요."

두 여인 모두 얼굴이 살짝 질려있었다.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왜들 저러지?"하고 레스난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토플레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전장(戰場)에 연인과 남편을 보낸 이들의 공통점이겠지."

그 말대로 두 여인은 한 방에 앉아서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아리에도 걱정으로 잠이 안 오지?"

탐스럽게 등을 덥기 시작한 흑발이 아래위로 가볍게 찰랑거렸다.

 "둘이 수도로 간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어. 아마도 그 거대한 번개가 치던 날,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어."

 "네에‥."

아리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깊어가는 근심에 피부마저 거칠어진 그녀의  모습은 날개를 잃은 천사처럼 애처로

웠다. 그녀를 안아 위로하던 데린은 무언가 결심한 듯 싶었다.

 "아리에, 역시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에?"

 "우리가 그들을 찾으러 가야겠어."

 "예?"

아리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나 결심한 데린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두 사람을 찾으러 가야한다고."

 "하, 하지만 사람들은 허락하지 않을 거에요.  다들 반대할 거라고요. 저라면 몰라도 데린은  전혀 자신을 지킬 수 

없잖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아리에. 호호홋. 방법이 있으니까.  여자는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 

해."

아리에는 데린이 젠티아의 아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다음 날.

글로디프리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화장실에도 안계십니다!"

 "주방에도, 다락에도 안 계십니다."

 "다른 여자 분들도!"

남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침묵했다. 이게 과연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여자들만 시장으로 쇼핑을  즐기러 간 

것일까? 하지만 시장에서는 그들의 인상착의와 비슷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  미인들이 뭉쳐다닌다면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데 없다는 것은‥.

 "설마?"

불길한 생각에 빠져버린 토클레우스. 그 때 한 시종이 뛰어왔다.

 "남작 부인의 방에서 쪽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가로채듯 펼쳐든 토클레우스. 눈이 왔다갔다 아래위로 움직이면서 그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뭐라고 써있소?"

너무 늦는 남자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마중을 나가보렵니다.

파마리나와 레스난의 마법실력이 뛰어나니 크게 염려하지 마세요.

아! 블리세미트도 데려갈게요.

                                                                                      데린 드로안

 "허허허‥."

남자들은 허탈하게 웃었다. 오직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젠티아가 없는 동안 글로디프리아의 전권을 위임

하고 있던 마크렌서 자작-토클레우스였다. 여인들이 두 사람을 찾는다면 모르지만  무슨 변이라도 당한다면 젠티아

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지금 웃을 때입니까? 기사단을 모두 성밖을 샅샅이!"

안절부절한 그의 말하기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변방을 감시하던 전령이 뛰어들었다.

 "마크렌서 자작 각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야? 왠만한 것은 대충 알아서 해? 남작 부인께서 행방불명 되신 일보다 급한 게 무어란 말이냐?"

 "용병왕을 선두로 한 군대가 국경을 넘었습니다!"

토클레우스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세상에!"

* * *

 "폐하, 아무래도 거짓 정보일 듯 싶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제하던 '값싼 남작'이 죽다니‥."

 "글세.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일 경우에는 기회가 아닐 수 없네. 한 번 시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밀정에 따

르면 그가 한 달 전부터 두문불출하고 있다더군. 그는 성내와 영지를 자주 시찰하는  인물인데 한 달 동안 전혀 움

직임이 없다니 이상하지 않나? 게다가 실베니아는 지금 반란으로 인한 내전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워. 그런데도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야"

 "그렇기도 하군요. 하지만 유인책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동방의 전술에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는 게 있으니 말

입니다. '값싼 남작'으로써는 내전에 군대를 보내기 전에 저희의 군사가 신경쓰일 겁니다. 그래서 우선  유인을 해서 

격파해 후방의 위협을 격파하고 여유있게 내전에 간섭하려는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조심하시는 게 좋겠죠."

젊은 재상의 충고에 용병왕 자크는 미소를 지었다. 하늘이 카로안을 보우하려는지 나타난 청년의 지략은 가히 전장

의 푸른 매 킬유시 공작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 나이는 자신의 아들 뻘이었기 때문에 자크로서는 더욱 총애했다. 그

의 미소를 보기가 황송한 재상, 바르스젠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곧 글로디프리아에서 군대를 보내올 겁니다. 우리는 그 진형을 보기 좋은 곳에 진을 만드십시오."

 "그렇게 하지. 만약 젠티아 드로안이 없다면‥. 재미있을 거야. 매 번 그와  마크렌서 자작의 짝을 이룬 작전에 당

하지 않았나. 물론 자네가 있으니 이제는 해볼만 하겠지만. 그래도 그가 있는 흑색 거성과 싸우는 것은 너무 국력을 

낭비하는 일이지. 그가 없다면 글로디프리아는 그저 약간 두꺼운 성곽일 뿐이야."

                                              * * *

젠티아에 그의 부인, 데린마저 실종된 글로디프리아에서는 혼란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웅성이는 회의장을 검집으로 

바닥을 두들기며 조용히 시킨 토클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마녀 파마리나와 인어 레스난의 마법도 뛰어나지만 아리에의 검술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니까. 

우선은 용병국과의 전쟁에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용병왕 자신이 직접 왔습니다. 그 군대를 남작님 없이 막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쉬운 일이 아니어도 할 수 없지요. 그렇다고 이 성을 내주고 꽁무니를  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글로디프리

아를 한 번 뺏긴다면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때, 피브드닌이 일어섰다.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가며 걸음으로 주의를 끈 그는 말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아마도 용병왕은 정말로 싸울 생각이 아닐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왕이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싸울 생각이 아니라니."

 "제 생각일 뿐입니다. 한 번 들어주십시오."

홀의 중앙에 선 그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시선이 돌아가자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마음에 

드는 분위기를 단숨에 만들어낸 피브드닌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용병왕은 킬유시 공작의 뒤를 이어j 등장한 '값싼 남작'에게 많은 패배를 기록했습니다. 둘은 가히  숙적

이라고 할 정도이며 천적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지요. 제가 용병왕이라면 아무리 실베니아가  내란에 휩싸여있다고 

해도 군사의 이동이 없는 글로디프리아에 쳐들어오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의 움직임은 탐색이라는 뜻이군요? 실베니아의 내전을 틈탄‥."

 "예. 그리고 남작님의 근황을 의심한 것도 있겠죠."

 "확실히 남작님은 밖을 잘 돌아다니시기 때문에‥. 한 달이나 시찰이 없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합니다."

기사들과 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플레도 '아스틴네글로드에 먹칠하지는 않겠군.'하고 턱을 긁적거렸다. 

 "아마도 적은 군사로 부딪히면서 용병왕은 남작님의 부재를 진형을 비롯한  군대의 운용, 계략 등으로 확인하려고 

들겠지요."

 "누가 남작님을 흉내내주셔야 겠군요. 보를레스님이 해주셔야 겠습니다. 다행히 보를레스님도 갈색  머리카락이 아

닙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토루반이 말했다.

 "문제가 있다. 용병왕 자크는 매우 호전적이라고 들었다. 진의 운용으로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는 광장히 극

단적인 방법으로 젠티아의 부재를 확인하려고 들지 모른다."

 "극단적인 방법이라면?"

 "결투겠지."

산 넘어 산이었다.

 "그를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은 백 장의 꽃잎들 중에서도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남작 각하께 

결투를 신청할 겁니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의 명예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남작님은 대륙 3대 기사라고 불릴만큼 강하다. 그런 기사가  결투를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

음은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없어."

토루반의 문제 제기에 사람들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토클레우스. 

 "할 수 없죠. 보를레스님. 좀 고생을 해주셔야 겠습니다. 다른  기사들은 보를레스님을 적어도 젠티아 님 수준으로 

키워내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그게 말이 됩니까? 자작."

 "안 되면 되도록 만들어! 약, 사기, 뭐든지 상관없다. 용병왕과  검을 부딪혔을 때 '아! 값싼 남작이구나!'라는 말이 

나오도록 하라고!"

 "기, 기간은?"

 "일주일이다! 일주일 동안!"

남자들의 입이 쫙 벌어졌다. 일주일동안 만들 수 있다면  젠티아를 괴물이라고 칭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수라도 써야 했다.

무슨 수라도‥.

그리고 그 무슨 수의 중심이 된 보를레스는 울상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39악장 1화

아래에서는 땅을 물들이며 잔혹한 고함과 비명이 오고 가도 하늘을 유유히 유랑하는 구름은 평화롭게만 보인다. 실

베니아의 북부 지방은 내전으로 인하여 제대로 남아나는 마을을 찾기 힘들 정도로 황폐화가 되었다. 그  가운데, 전

쟁터의 군사들보다도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쪽으로 옮겨요. 저 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어이, 실이 모자라. 실을 가져와! 없으면 옷이라도 다시 풀어서 가져오라고! 살가죽이 뜯어졌는데 그깟 옷이 문제

야?"

 "당연하잖아요! 난 여자라고요! 속옷도 못 입었는데 어떻게 옷을 찢으라는 거얏!?"

완패. 갈색 머리카락의 중년 사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절망적인 눈물을 그렁그렁 담은 

환자를 보며 말했다.

 "안타깝게 되었군. 난 저 녀석을 남자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어."

 "젠티아, 농담할 시간 없어요."

젠티아를 완패시킨 여인은 재미있게도 투명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녀

의 피부가 약간의 티라도 있었다면 끔찍하도록 이질적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성스럽게만 보이는 모습에 사

람들은 자리를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어쩔 수 없잖아, 시즈. 전쟁으로 황폐한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실은 찾기 힘들어."

 "그럼 할 수 없죠."

시즈라고 불린 여인은 살짝 미소지었다. 은은하게 풍겨 나올 듯한 미소에 사람들이  넋을 잃은 사이 그녀는 치렁치

렁한 옷의 끝자락을 잘라냈다.

 "이걸 쓰세요."

 "고마워. 확실히 검은 색보다는 네 흰옷이 났지. 게다가 솔직히 넬피엘, 저  녀석은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 옷의 실

도 호들갑을 꿈틀될까 걱정이 돼."

퍽!

 "속옷도 입지 않은 여자한테 옷을 찢어 달라니, 옷 벗어달라는 변태같은 소리를 하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네."

젠티아의 머리에 강렬한 충격이 와 닿았다. 주범은 방금 전 그를 완패시켰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 허리에 얹은 양 

주먹 중 하나에서 뿌연 김이 새어나오는 걸로 볼 때 범행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얼굴을 맞대는 둘의 친근한(?) 모습에 시즈는 소매로 입을 살며시 가리고 웃음을 지었다.

 "언제 봐도 정겨운 두 사람이라니까요."

 "어딜 봐서!"

아마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한 달 전 실종되었던 음유술사들이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여장까지 

한 채로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정신을 팔고 있는 걸까?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막기보다는 전쟁 자체를 빨리 끝내야

하는 의무가 있을 텐데‥.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쯤 로바메트를 만날 수 있을까?"

앞으로의 예측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학자보다도 미소년 집사가 더욱 신용이 가는 지도 몰랐다. 분명하게 딱딱 끊어

지는 말투 덕분에.

 "앞으로 일주일."

전에도 들었던 말투다. 무지막지한 번개를 몸으로 쬐던 날에도 말이다. 번개가 효과적인 공격일 수 있는 것은 엄청

난 파괴력이 이유기도 하지만, 보다 분명한 이유는.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빛의 속도를 피한단 말인

가. 하지만 불가능을 실현해낸 두 사람은 시즈의 눈앞에서 버젓이 티격대고 있었다.

우선 강렬한 뇌격을 받아낸 것은 젠티아의 검.  보통 이름값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성음검(聖音劍)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검은 젠티아가 쏟아 부운 기운을 강렬하게 뿜어내며 폭뢰(爆雷)에 맞섰다. 맞섰다고 해봤자 찰나적인 시간이

었지만 빛이 번쩍하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번개의 위력을 생각할 때 그 방어 효과는 원래 숯이 되는 결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어지는 넬피엘의 텔레포트. 결국 그들은 번개 불에 알맞게 구워

진 채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젠티아는 그저 우연이었다고 말하지만 넬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당장 쳐들어가자는 젠티아를 그는 

차분하게 꿇어앉혔다.

 "피부만 그을린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나 보군. 다음에는 분명히 뼛속까지 까맣게 타버릴 거야. 몇 번을  해도 상

관없어. 수 백번의 매일같이 당신이 자랑했던 사랑스러운 아내도 새까만 뼈를 가지고는  당신을 구별해 낼 수 없을 

걸."

 "데린이라면 가능해!"

별로 중요하지 않는 확신을 당당하게 외치는 젠티아. 시즈와 넬피엘은 그를 완전히 무시하기로 하고 머리를 맞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역사의 고리'의 눈을 피해 로바메트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여 나온 결론은‥.

 "변장밖에 없어."

 "하지만 갑자기 접근한다면 의심을 받을 겁니다. 그들이 먼저 접근하도록 해야 해요."

 "변장은 어떤 것이 좋을까?"

 "아무래도 가장 진부적이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여장."

어쨌든 두 사람은 제법 잘 어울렸다.  넬피엘 같은 경우는 그냥 내버려둬도 미소녀라고  꼽히는 이들보다도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시즈는 투명하 실루엣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남성적인 모습을 살포시 감춰주었다. 하지

만.

 "나는‥."

 "당신은 능글맞은 중년."

젠티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시즈는 눈을 반짝거리며 넬피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젠티아는 시장에서 구입한 분장도구로 주름을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을 달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성격. 여자로 분장

한다고 해도 여자답지 못하다면 금새 들켜 버릴 것이다. 시즈는  차분한 성격이었음으로 문제가 없었지만 무뚝뚝한 

넬피엘이라면‥.

이 문제를 넬피엘은 최강의 음유술사답게 간단하게(?) 해결해버렸다. 자기자신에게 성격 변조의 마법을 걸어버린 것

이다. 그것도 자신이 풀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주문으로 다른 사람이  주문의 해제어를 소리내서 말해야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해제어라는 것은‥.

 "어이, 변태."‥였다. 시즈같은 경우는 얼굴을 붉히면서 겨우겨우 말했지만 젠티아같은  경우는 자연스러웠다. 이번

에도 역시 그가 넬피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해제어를 말하자 넬피엘의 생글거리던 얼굴이 엄청난 속도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반격했다.

 "무슨 일이지, 치한?"

 "그 동안 생각해봤는데 로바메트도 너의 성격 변조 주문과 비슷한 종류의 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

 "아마도‥."

넬피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섟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 때 시즈가 둘에게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넬피엘의 주문 같은 경우는 상대가 주문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허락해야 되요. 아니라면 깊게 걸리지 않

을 거에요."

 "역사의 고리가 가까이 있으니까 매일같이 걸어대는 게 아닐까?"

 "설마, 그들이 그토록 계획을 허약하게 꾸밀까요?"

 "젠티아라면 그렇게 꾸밀 걸."

피식 웃으며 커피를 들이키는 넬피엘의 말에  젠티아는 허약한 전략이나 꾸미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렸다. 초라하게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그는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는 듯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람과 불꽃의 음유술사를 훔

쳐보기만 할 뿐이었다. 얘기가 다 끝났을까? 시즈는 문득 고개를 들고 젠티아에게 물었다.

 "아, 괜찮을까요?"

 "뭐가?"

 "글로디프리아 말입니다."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내 기사단들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도 아니고 아스틴 네글로드의 현자들도  함께 있으니까. 

다만 걱정이라면‥."

 "걱정이라면?"

갸웃하고 바라보는 시즈의 은실같은 머리카락을 젠티아는 손가락을 집어넣어 마구  헤집었다. 입이 쭉 찢어지며 웃

는 모습이 방금 전의 근심이 섟인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설마‥. 데린이‥ 그럴 리는 없겠지.'

 "자, 그만들 쉬고 환자들이나 보자. 우리가 민심을 얻게 되면, 민중의 뜻이라는 명분이 극히 부족한 진압군은 우리

를 불러드리지 않을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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