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200)

                             5권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

아래에서는 땅을 물들이며 잔혹한 고함과 비명이 오고 가도 하늘을 유유히 유랑하는 구름은 평화롭게만 보인다. 실

베니아의 북부 지방은 내전으로 인하여 제대로 남아나는 마을을 찾기 힘들 정도로 황폐화가 되었다. 그  가운데, 전

쟁터의 군사들보다도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쪽으로 옮겨요. 저 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어이, 실이 모자라. 실을 가져와! 없으면 옷이라도 다시  풀어서 가져오라고! 살가죽이 뜯어졌는데 그깟 옷이 문제

야?" 

"당연하잖아요! 난 여자라고요! 속옷도 못 입었는데 어떻게 옷을 찢으라는 거얏!?" 

완패. 갈색 머리카락의 중년 사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절망적인 눈물을 그렁그렁 담은 

환자를 보며 말했다. 

"안타깝게 되었군. 난 저 녀석을 남자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어." 

"젠티아, 농담할 시간 없어요." 

젠티아를 완패시킨 여인은 재미있게도 투명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녀

의 피부가 약간의 티라도 있었다면 끔찍하도록 이질적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성스럽게만 보이는 모습에 사

람들은 자리를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어쩔 수 없잖아, 시즈. 전쟁으로 황폐한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실은 찾기 힘들어." 

"그럼 할 수 없죠." 

시즈라고 불린 여인은 살짝 미소지었다. 은은하게 풍겨 나올 듯한 미소에 사람들이  넋을 잃은 사이 그녀는 치렁치

렁한 옷의 끝자락을 잘라냈다. 

"이걸 쓰세요." 

"고마워. 확실히 검은 색보다는 네 흰옷이 났지. 게다가 솔직히 넬피엘, 저 녀석은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 옷의 실도 

호들갑을 꿈틀될까 걱정이 돼." 

퍽! 

"속옷도 입지 않은 여자한테 옷을 찢어 달라니, 옷 벗어달라는 변태같은 소리를 하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네." 

젠티아의 머리에 강렬한 충격이 와 닿았다. 주범은 방금 전 그를 완패시켰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 허리에 얹은 양 

주먹 중 하나에서 뿌연 김이 새어나오는 걸로 볼 때 범행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얼굴을 맞대는 둘의 친근한(?) 모습에 시즈는 소매로 입을 살며시 가리고 웃음을 지었다. 

"언제 봐도 정겨운 두 사람이라니까요." 

"어딜 봐서!" 

아마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한 달 전 실종되었던 음유술사들이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여장까지 

한 채로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정신을 팔고 있는 걸까?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막기보다는 전쟁 자체를 빨리 끝내야

하는 의무가 있을 텐데‥.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쯤 로바메트를 만날 수 있을까?" 

앞으로의 예측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학자보다도 미소년 집사가 더욱 신용이 가는 지도 몰랐다. 분명하게 딱딱 끊어

지는 말투 덕분에. 

"앞으로 일주일." 

전에도 들었던 말투다. 무지막지한 번개를 몸으로 쬐던 날에도 말이다. 번개가 효과적인 공격일 수 있는 것은 엄청

난 파괴력이 이유기도 하지만, 보다 분명한 이유는.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빛의 속도를 피한단 말인

가. 하지만 불가능을 실현해낸 두 사람은 시즈의 눈앞에서 버젓이 티격대고 있었다. 

우선 강렬한 뇌격을 받아낸 것은 젠티아의 검.  보통 이름값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성음검(聖音劍)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검은 젠티아가 쏟아 부운 기운을 강렬하게 뿜어내며 폭뢰(爆雷)에 맞섰다. 맞섰다고 해봤자 찰나적인 시간이

었지만 빛이 번쩍하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번개의 위력을 생각할 때 그 방어 효과는 원래 숯이 되는 결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어지는 넬피엘의 텔레포트. 결국 그들은 번개 불에 알맞게 구워

진 채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젠티아는 그저 우연이었다고 말하지만 넬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당장 쳐들어가자는 젠티아를 그는 

차분하게 꿇어앉혔다. 

"피부만 그을린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나 보군. 다음에는 분명히 뼛속까지 까맣게 타버릴 거야. 몇 번을 해도 상관

없어. 수 백번의 매일같이 당신이  자랑했던 사랑스러운 아내도 새까만 뼈를  가지고는 당신을 구별해 낼  수 없을 

걸." 

"데린이라면 가능해!" 

별로 중요하지 않는 확신을 당당하게 외치는 젠티아. 시즈와 넬피엘은 그를 완전히 무시하기로 하고 머리를 맞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역사의 고리'의 눈을 피해 로바메트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여 나온 결론은‥. 

"변장밖에 없어." 

"하지만 갑자기 접근한다면 의심을 받을 겁니다. 그들이 먼저 접근하도록 해야 해요." 

"변장은 어떤 것이 좋을까?" 

"아무래도 가장 진부적이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여장." 

어쨌든 두 사람은 제법 잘 어울렸다.  넬피엘 같은 경우는 그냥 내버려둬도 미소녀라고  꼽히는 이들보다도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시즈는 투명하 실루엣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남성적인 모습을 살포시 감춰주었다. 하지

만. 

"나는‥." 

"당신은 능글맞은 중년." 

젠티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시즈는 눈을 반짝거리며 넬피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젠티아는 시장에서 구입한 분장도구로 주름을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을 달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성격. 여자로 분장

한다고 해도 여자답지 못하다면 금새 들켜 버릴 것이다. 시즈는  차분한 성격이었음으로 문제가 없었지만 무뚝뚝한 

넬피엘이라면‥. 

이 문제를 넬피엘은 최강의 음유술사답게 간단하게(?) 해결해버렸다. 자기자신에게 성격 변조의 마법을 걸어버린 것

이다. 그것도 자신이 풀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주문으로 다른 사람이  주문의 해제어를 소리내서 말해야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해제어라는 것은‥. 

"어이, 변태."‥였다. 시즈같은 경우는 얼굴을 붉히면서 겨우겨우 말했지만 젠티아같은 경우는 자연스러웠다. 이번에

도 역시 그가 넬피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해제어를 말하자 넬피엘의 생글거리던 얼굴이 엄청난 속도로  굳어버

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반격했다. 

"무슨 일이지, 치한?" 

"그 동안 생각해봤는데 로바메트도 너의 성격 변조 주문과 비슷한 종류의 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 

"아마도‥." 

넬피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섟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 때 시즈가 둘에게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넬피엘의 주문 같은 경우는 상대가 주문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허락해야 되요. 아니라면 깊게 걸리지 않을 

거에요." 

"역사의 고리가 가까이 있으니까 매일같이 걸어대는 게 아닐까?" 

"설마, 그들이 그토록 계획을 허약하게 꾸밀까요?" 

"젠티아라면 그렇게 꾸밀 걸." 

피식 웃으며 커피를 들이키는 넬피엘의 말에  젠티아는 허약한 전략이나 꾸미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렸다. 초라하게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그는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는 듯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람과 불꽃의 음유술사를 훔

쳐보기만 할 뿐이었다. 얘기가 다 끝났을까? 시즈는 문득 고개를 들고 젠티아에게 물었다. 

"아, 괜찮을까요?" 

"뭐가?" 

"글로디프리아 말입니다."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내 기사단들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도 아니고 아스틴 네글로드의 현자들도 함께  있으니까. 

다만 걱정이라면‥." 

"걱정이라면?" 

갸웃하고 바라보는 시즈의 은실같은 머리카락을 젠티아는 손가락을 집어넣어 마구  헤집었다. 입이 쭉 찢어지며 웃

는 모습이 방금 전의 근심이 섟인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설마‥. 데린이‥ 그럴 리는 없겠지.' 

"자, 그만들 쉬고 환자들이나 보자. 우리가 민심을 얻게 되면,  민중의 뜻이라는 명분이 극히 부족한 진압군은 우리

를 불러드리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젠티아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떨고 있을 무렵, 데린은 그럴 리 있는 행로를 따라서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리에, 조금 천천히 가. 레스난이 힘들어하고 있어." 

데린의 말에 아리에가 말을 천천히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도 길게 자란 푸른 머리카락가 흩날리

는 걸 정리할 여유도 없이 기진맥진한 소녀가 들어왔다. 

"혹시 지금 너무 빨랐나요?" 

"글세‥. 엘프나 드워프도 다른 동물을 타지 못한다고 하잖아. 인어도 그런 게 아닐까?" 

"어쨌든 이대로는 무리인 것 같아요. 배도 고팠는데 점심이나 먹으면서 쉬도록 하죠?" 

귀족들의 영애답지 않도록 거칠게 아리에와 데린은 엉덩이를 털썩 깔았다.  며칠간의 경험으로 인해 파마리나는 자

연스럽게 공중에 걸려있는 지팡이에 묶어 두었던 짐을 풀렀다. 마법이  조금 깃들어있는지 그녀의 보자기는 내용물

을 축소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제법 커다란 냄비가 모습을  드러냈고 데린은 환호하며 글로디프리아의 주방

에서 가져온 조미료와 재료들을 꺼냈다. 

"이제 좀 괜찮죠?" 

한 편, 블리세미트는 자주 어울리던 레스난의 창백한 안색이 안쓰러웠는지 신성력을 품은 손으로 등을 두들기고 있

었다. 인어 소녀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제의 약손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깔깔거리는 웃

음소리와 함께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킁킁거리는 그녀의 안색은 확연하게 호전되고 있었다.  그걸 모를 수 밖에 없

는 블리세미트는 자신의 손이 효험을 보였다고 생각하고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레스난을 잡아서 음식 가까이로 

이끌었다. 

"아무리 아파도 절대로 음식을 거르진 않는 군. 원래 인어들은 그렇게 대식가(大食家)야?" 

방금 전까지 멀미에 뒤집히던 내장을 레스난은 음식물로 가볍게 눌러버렸다. 그러니 위에 같은 물음이 나올 수밖에. 

대답할 시간도 아까운지 레스난은 입이 우물거리는 속도와 같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인어들은 보통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많이 먹어요. 아이를 낳야 되잖아요." 

"우리도 여자가 아이를 낳아." 

"저희는 한 번에 쌍둥이로 낳는다고요." 

"넌 아직 성년이 아니잖아, 꼬마 생선." 

"다람쥐는 겨울이 되고 나서 식량을 모으나요?" 

"마, 많이 먹으렴." 

먹는 것을 걸고서는 가히 아스틴네글로드에 버금가는 말발을 자랑하는 레스난. 파마리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증거로 

레스난의 그릇에 한 국자의 수프를 더 부어주었다. 

부스럭! 

"누구냐?" 

일 년에 가까운 용병 생활로 여자들만 있을 때의 위험함을 알고 있는 아리에는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

문에 필요 이상으로 커다란 기척은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에 수풀이 흔들거렸다. 

"아하하‥. 이거 미안하군, 아가씨들. 며칠간 먹지도 못하고 여행을 했더니 쓰러질 것 같아. 혹시 먹을 게 있다면 좀 

나눠줬으면 하는데?" 

우락부락한 사내였다. 아리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첫눈에도 사내는 며칠이나 굶은 게 아니라 현재 열심히 음식을 집

어넣고 있는 레스난보다도 얼굴빛이 좋았기 때문이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하하하‥. 수작이라니." 

"요즘 내전으로 인해서 도적들이 늘어 극성이라던데. 그 축인가?" 

"허허허‥." 

사내는 헛웃음을 지으며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제 딴에는 기척을 죽인 걸음인데도 여리게만  보이는 여인은 쉽게 

알아챘고 여행자라는 말도 도저히 믿을 기세가 아니었다. 평소 때  같았으면 이쯤에서 허탕으로 간주하고 돌아섰겠

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남자가 하나 껴있기는 하지만 여자라고 봐줄 만큼 곱상하니까. 나머지는 후‥.' 

"그만 생각하고 돌아가시지." 

"그러지 말고 조금만‥." 

파파파팍! 

옆에서 지켜보는 데린이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아리에의 서슬은 시퍼렇게 쏘아졌고 급기야는 사내의 발 앞에 몇 자

루의 단검을 수놓았다. 토끼눈처럼 거대해진 사내의 눈동자를 겨냥하며 그녀는 말했다. 

"다음에는 그 눈이야. 그만 꺼져." 

"히이이이익!" 

그는 일을 도모할 의지는 있었지만 능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줄행랑을 치는 사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데린이 물었

다. 

"괜찮아?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던데‥. 그렇게 단정지을 필요는 없잔아." 

"데린, 여자끼리 다닐 때는 조심해야 되요. 아무리 파마리나와 레스난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쳐도  여자는 인격

적으로 약점이 있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은 미리 없애야 해요." 

"그래도 정말 여행객이면‥." 

우물거리는 젊은 귀족 부인의 모습. 아리에는 잠시 자신이 시즈와 만나지  않았다면 저렇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에 

빠졌다. 그녀가 말없이 있자 파마리나가 데린에게 대신 대답했다. 

"아까 그 놈은 며칠 굶은 안색이 아니야. 방금 전까지 뭔가를 먹었을 걸."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지?" 

"말할 때 이빨에 민트 가루가 껴있었거든." 

데린은 할 말이 없어졌다. 언제 그런 것까지 봤단 말인가. 그녀는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마녀들은 눈도 좋아." 

"네가 안 좋은 거야." 

데린과 파마리나는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에 성에서도 친구같았다. 물론 위와 같은 대화를 친구같다고 봤을 때 하는 

얘기다. 아리에는 서로를 노려보는 모습이 피브드닌과 토플레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을 달랬다. 다행히도 그들의  분

을 풀 수 있는 존재가 다가와있었다. 

"저길 좀 봐요. 방금 전 그 남자가 같은 일행이라도 데려왔나 본데요?" 

"아가씨들, 그리고 꼬맹이. 오랜만이야. 다시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 

사내는 평소보다도 많이 모여든 동료들의 지원에  가슴이 든든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한 마디 

한 것밖에 없었다. 

"전설에 나올 듯한 여자들이 지나간다. 방해물도 없어!" 

그만큼 경쟁자가 많아지겠지만 그만큼 성공률은 향상된다. 그러나 그의 흐뭇한 미소가 곧 망가져버릴 줄 누가 알았

겠는가. 머리카락이 풀풀 날리는 파마리나와 역겨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스난을 주시하고 있던 블리세미트는 

알았을 지도 모른다. 

후일 글로디프리아의 친구들이 모인 만찬에서 붉은 뱀의 사원을 부활시킨 대사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표

현했다. 

- 그들의 모습은 넘치기 직전의 용암같았지. 반대로 도적들은 용암이 온천인 줄  알고 뛰어들려는 관광객처럼 보였

고. 

어쨌든 여기서 결과는 이미 나와있는 것이다. 용암에 뛰어든 관광객들이 어떻게 되었을 지는‥. 

우선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관광객들을 향해서 파마리나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날 갖고 싶거든 이 친구를 쓰러뜨리고 와용∼ 호홍∼" 

쿠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이 꿈틀거리며 거대한 머리가 툭 튀어나오는 순간, 도적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마, 마법사다!" 

혼란에 빠진 그들을, 불러보았던 사내는 일깨웠다. 

"당황하지마! 그래봤자 여자들과 꼬마야! 저 것만 부수면 신나게 즐길 수 있다고!" 

잠시동안 도적들은 그의 말에 수긍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곧 골렘의 주먹이 바닥에 깊은 구덩이를 남길 정도로 내

리 꽂히자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욕망보다는 가까이 다가온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안 되겠어. 도망쳐!" 

"도대체가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볼 줄 모르는 군요. 역시 인간은 추악한 존재야. 잠시나마 잊고  있었는데 다시 떠오

르게 만드네요." 

뒤를 막아선 존재는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었다. 백옥의 조각처럼 흰 손가락에서  마치 손톱이 늘어나는 듯한 착

각과 함께 얼음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여, 여기도 마법사야!" 

마법 왕국 아스틴 정도나 되지 않는 이상 평민들이 제대로 된 마법사를 구경한다는 것은 화살로 달을 사냥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 거의 모든 마법사는 국가에서 원조하는 마법서와 자금의 유혹에 갖혀 살았고 그 외는 은거하여 

연구에 몰두하기 마련이었다. 

용병 중에 활동하는 사람에 일부는 마법사라는 직함을 사용했지만 3 클래스만 되어도 극진한 대접을 받는 용병계라

는 사실에 주목할 때 이름 구실 하는 마법사는 극소수였다. 

이 정도면 세간에서 마법사가 충분히 공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닌 두 명. 도적들은 

처음 사냥감 정보를 물어왔던 사내를 원한이 가득한 눈초리로 매섭게 쏘아보았다. 

'전설의 나올 것 같은 여자들이 아니라 전설의 마법사들이었잖아.' 

처음의 사내는 전혀 원한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기에 바빴고 다른 이들도 사내을 노려보고만 있기에는 그들

의 모습은 너무나 소중했다. 

시즈들과 함께 다니느라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 여인은 잔혹하기로 이름 높은 마녀였고 다른 소녀는 인간이라면  끔

찍하게 싫어하는 인어였다. 

"죽일 필요는 없잖아." 

얘기로만 알고 있었지 엄청난 실력의 마법이 펼쳐지자 데린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중년

의 남자가 피를 흘리며 넘어지자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왜? 난 죽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레스난도 파마리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망치고 있던 도적들은 섬짓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생

각을 읽은 블리세미트는 약간 미소로 보기 어려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저들은 여자라면 질겁하겠군." 

남자라면 신이 준 욕망에 따라 여자에게 호감을 갖는 게 당연한 섭리이지만 어린 사제는 잠시나마 그들에게서 신의 

섭리조차 무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데린은 인어와 마녀를 말리고 있었다. 

"그만 해. 이들이 아무리 도적이고 우리를 해치려고 했다지만 너희가 죽일 권리는 없어." 

"맞아. 권리는 없지. 하지만 힘은 있는 걸!? 저들 역시 자신들의 힘을 믿고 우리를  해칠 권리 없이 덤벼든 게 아니

겠어? 우리가 힘이 없었다면 아마도 저들의 노리개가 되야 할 의무를 갖게 되었을 걸." 

파마리나의 비릿한 웃음에 대린은 실감했다. 왜 사람들이 이 여인을 '마녀'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지. 하지만 이 자

리에는 마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는 그만 두십시오. 인간은 짐승이 아닙니다." 

"아니라는 보장이 있었나?"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짓는 소(小)사제였으나 인어의 물음에 금새 굳어졌다. 레스난은 '인간 따위는  짐승에게 우월감

을 가질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어조는 날카로웠다.  물끄러미 레스난과 파마리나를 바라보던 블리세미

트는 눈을 작게 뜨며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미소. 앳되어 붉기만 한 

입술을 열어 소년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인간은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일지도 몰라요. 적어도 사자는 배가 부를 때 사냥을 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런 부족

한 존재가 인간이기에 인간은 신에게 기대는 지도 모르죠. 잊지 마세요, 파마리나. 당신도 인간이라는 걸요." 

"지금 전도(傳道)하는 거야?" 

"설마요. 인간은 부족한 생물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레스난도요. 당신은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의 추

악한 면을 따르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인어들은 필요  이상의 살생을 일삼는 종족으로써 꼬리만 아니라면 인간과 

같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 

침묵은 그렇게 사람들의 가슴속을 메워갔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을 메워가는 의미는 침묵만이 아니었다. 그  무거운 

의미가 차 오른 사람들은 블리세미트와 말을 나누던 두 여인뿐이 아니었다. 

털썩! 털썩! 

무거움을 견딜 수 없었던가. 아리에들을 습격했던 도적들은 천천히 무릎을 꿇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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