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2)
"죄송합니다. 전쟁 때문에 몰려든 군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먹을 것이라도 얻어보려 도적 행세를 하게 되었는
데, 오히려 농사 지을 때보다 세 끼를 잘 먹게 되자 심성까지 도적처럼 물들었나 봅니다."
"전쟁 중인데 이 곳을 지나가는 상인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아마도 물가가 올라버린 수도나, 북동 지방에서 한 몫 벌어보려는 사람들이겠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리에는 데린의 말을 듣고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먹을 것이 없어 힘들어하는 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상인들이지요."
이를 갈며 도적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수도 주변에 살던 소작농이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도적질 자체에 취미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안쓰럽게 그들을 바라보던 데린은 어서 전쟁을 끝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위험한 시기에 무슨 일로 수도로 향하시는지‥. 그 곳은 전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걱정없어. 우린 힘이 있으니까."
사내는 쓴웃음과 함께 얼굴을 붉혔다. 몸소 그 힘을 체험해 보았는니 허튼 소리를 한 게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곧
그는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법사님들께서 전쟁이 금방 끝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노력해볼게요."하고 대답하는 데린의 얼굴은 결코 밝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젠티아를 어서 찾아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위와 같은 고민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정쟁은 다른 때와는 달리 여자 영웅들이 많이 나타나는 군요."
"그런가요?"
"여러분들은 변방에서 오셨으니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내란이 일어난 주변에서는 제법 들려오는 소문이 있어요.
전장에 왠 여인들이 나타나서 부상자들을 치료한다고 하더군요. 은발에 투명한 눈동자를 가졌다는 여인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성녀(聖女)라고 부르고 있어요."
'은발에 투명한 눈동자?'
아리에의 가냘픈 모가지가 사내에게로 부러질 것처럼 우격다짐으로 휘릭 돌아갔다. 그는 갑자기 서슬이 푸른 시선
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손을 마구 저었다.
"무, 물론 여러분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아리에는 그런 아부에 관심이 없었다. 사내를 지나친 그녀는 데린에게 미소를 지었다. 데린도 그 미소의 의
미를 알았음으로 이지(理智)의 빛나는 눈동자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어떻하지? 젠티아. 찾아버렸어요. 각오하고 있어요."
부르르르!
"무슨 일이에요? 젠티아."
"아냐, 그냥 오한이‥."
"꺄르르륵! 아직 겨울 기운이 남는 모양이네요. 조심하세요. 다 늙으신 몸에 무리하시면 안되요오∼."
넬피엘의 방긋방긋한 미색에 젠티아는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기보다는 무섭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
지만 저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안색이 한층 창백해진 그는 넬피엘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다가오자 얼른 물러섰
다.
"나,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서 환자들이나 봐줘."
"그럴게요. 젠티아 혹시 아프면 말해요. 제가 아주 상냥∼하게 봐드릴 테니까요. 호호호호홋‥."
웃음소리가 멀어지는 걸 느끼며 젠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하군."
'과연 저 녀석의 진면목을 알고도 사람들은 성녀라고 말할지 궁금해. 그에 비해서 이 쪽은‥.'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다지만 이곳은 전장이고 적진이었다. 긴장을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느낀 바람 같은 기척은 역시 시즈였다.
"젠티아‥."
"시즈‥."
이 은발의 소녀는 정말이지 남자였나 싶을 정도였다. 아무리 심하다할 정도로 무서운 넬피엘의 환영 마법이 첨가되
었다지만 특이한 빛깔의 눈동자와 머리칼은 청년을 하나의 여인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더욱이 평상시의 부드러운
어조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되어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젠티아의 심금조차 흔들 정도였다.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마는 젠티아.
'이, 이 놈들 너무 잘 어울려‥. 하, 하지만 난 데린, 당신 밖에 없다오. 날 믿어주오오오오.'
"믿을 수 없어요."
"엥?"
"넬피엘이 예전에 마나이츠 님의 행세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저런 모습은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 그런 얘기였나?"
"그럼 뭐라고 생각하셨는데요?"
"아무 것도 아니야."
멀리서 환자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시즈는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급한 중에도 할 말은 남아있었는지 다급
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용병국 카로안이 글로디프리아를 쳐들어왔다고 하던데요. 이미 한 번 맞붙은 모양이지만 큰 걱정은 없는
모양이에요."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어제밤에 넬피엘이 마나이츠님께 다녀와서 말해주던 걸요!?"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았잖아."
"그야‥ 걱정할까봐!"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시즈는 찡긋 윙크했고 젠티아는 다시 한번 정신적인 타격을 받으며 비틀거렸다. 머리를 잡
고 생각하던 그는 곧 결론을 내렸다.
'이 놈들. 분명히 번갈아 가면서 날 놀리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러나 분해하던 것도 잠깐, 젠티아는 진지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용병국에서 쳐들어왔다면 용병왕이 직접 왔겠군. 내가 없다는 정보가 세어나간 건가?"
천천히 끝이 올라가는 입술. 무슨 일인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젠티아는 키득거렸다.
"그렇다면 오산이야, 용병왕이여‥. 내가 없어도 글로디프리아는 강하지. 암! 내가 용병왕의 입장이라고 해도 글로디
프리아를 점령할 수는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