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3)
거대한 흑색 거성. 특이하게도 북서쪽을 향해 지어진 성을 보고 사람들은 '흑기사는 제플론을 노려보고 있다.'라고
말한다. 글로디프리아라고 이름 붙여진 성을 건축했던 장본인이 망명왔던 엘시크의 왕족이라는 걸 염두에 두면 충
분히 일리가 있었다.
어떤 자는 글로디프리아가 터무니없이 거대한 이유를, 높고 높게 쌓아올린 탑에서 고향을 바라보기 위한 왕족의 열
망 때문이라고도 한다. 웃으려고 하는 말이니 만큼 그에 신경 쓰는 이들이라고는 없었지만 예전, 엘시크에서는 농담
같은 소문을 트집잡고 글로디프리아의 상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자 실베니아의 대마법사 마나이츠는 엘시크 중
심에 조그마한 돌멩이로 아이들이 해변에 모래성을 짓듯 자갈로 개집 만한 성을 만들어놓고 말했다.
'내가 이 곳에 성을 만들었으니 제플론은 나의 영지다.'
그리고 가신(家臣)들을 마법으로 이동시키려고 했다. 엘시크에서 당황했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국왕이 직접 나서 실베니아에 사과를 하고 헤트라임크가 마니이츠를 설득하여 돌려보냈으니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얽힌 이야기가 많은 성이지만, 엘시크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글로디프리아를 불만스럽게 바
라보는 이유는 어떻게 보면 매우 간단했다. 지나치게 높게 지어진 성벽은 경비기사가 올라가다가 지칠 지경이었지
만 그 대신에 적군의 활이 제대로 닿지가 않았다. 닿는다고 해도 힘이 다 떨어져버린 화살이라 병사들이 쉽게 방패
로 막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성벽의 궁수들이 시위만 놓아도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위협을 넘어섰
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마법의 중흥이 시작된 이후 성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개발되었고 타국에서 공격의
희망을 가질 때였다. 이제는 '값싼 남작'이라는 희대의 기사가 턱하니 나타났던 것이다.
그 후로 타국에게는 절망스러운 성이 되어버린 글로디프리아. 지금 그 곳에는 파란이 일고 있었다.
"허억! 허억!"
"이제 고작 180 바퀴입니다. 벌써 지친 겁니까?"
"아, 아직 멀었어!"
"좋아요. 그럼 약간 속력을 올려줘요. 남작님이셨다면 아마 2시간도 다 안 되서 200바퀴를 채우고 샤워를 하고 계실
겁니다."
전부터 거론했지만 보를레스는 오기가 있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젠티아 드로안이 현 시대 최고의 기사라고는 해도
그는 이렇게 무참한 비교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숨이 목까지 차다못해 아예 호흡이 곤란했고 다리가 움직이고 있
는지 감각도 오지 않았다.
'이러다가 정말 죽는 게 아닐까?'
오래 전 전설 중에는 전쟁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긴 거리를 쉬지 않고 뛰어와 소식을 알리고 죽어버리고 만 어이없
는 전령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를레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망설임을 눈치챈 걸까? 섬세한 세공품을 살피는 드워프같이 날카롭게 바라보던 토클레우스는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연습하다가 죽는다는 것은 참 꼴불견이겠지. 죽을 걱정이 되신다면 언제든 말하시오. 프로젝트를 중단하도록 할 테
니‥. 솔직히 남작 각하를 일주일만에 따라잡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지만 그건 가능성이지. 실제는 추측보다 느끼는 게 다르니까."
"헉! 헉!"
토클레우스의 눈동자가 이채를 띄었다. 점점 느려지던 보를레스의 다리가 다시 원래 속도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어지간히 호승심과 오기가 있는 인물이군. 왜 각하께서 이렇게 약한 친구를 높게 평가하나 했더니 확실히 맞는 말
이야. 하지만 그 정도 오기로도 부족해. 그래가지고는 각하는 커녕 글로디프리아 100명 중 서열 50번째도 당해낼 수
없어.'
이제까지 젠티아와 함께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대했고 그들을 다루는 법을 습득하고 있는 자작, 토클레우스 마크렌
서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보를레스의 오기를 향상시킬 인물을 찾아냈다.
"그러고 보니 보를레스 님, 헤라즈라는 성투사와 함께 여행한 적이 있다고 했었지요?"
멈칫.
갑자기 보를레스는 멈췄다. 갑자기 봄을 지나 여름의 살 태우는 햇빛처럼 그의 눈은 분노로 차있었다.
"그 인간의 이름을 내 앞에서 꺼내지 마시오."
달리다가 급히 멈췄기 때문에 호흡곤란은 심할 텐데 어조는 분노가 차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하지
만 토클레우스는 능청맞게 그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아는 인물이라서 말이오. 듣자하니 배신당했다고 했던 것 같소만‥?"
"‥지금 나를 화나게 해서 얻을 게 뭡니까?"
"하하하! 화나게 할 생각 없소. 다만‥ 당신이 손.끝.도. 대지 못했던 성투사 헤라즈. 그는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뿐이
오."
"‥‥."
으득. 지금 들리는 소리가 이빨 가는 소리가 틀림없다면 보를레스는 훈련을 끝내고 치과에 가야할지도 모른다. 분함
으로 가득한 그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 장본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그 무신(武神)같은 자도 남작님을 당해내진 못했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문득 보를레스가 바라보니 토클레우스는 풍채좋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
다. 진지한 목소리로 보를레스가 물었다.
"정말 이 일주일을 견뎌낸다면‥."
"그에게 맥없이 지지는 않을 겁니다."
"!!!"
이제 겨우 이틀. 아직도 닷새라는 기간이 남아있었다.
'정말로 가능할까?'라는 의문은 '가능하지 않으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바뀌어갔다. 순간적으로 피식하고 새어나온
웃음. 자신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토클레우스에게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우선 스무 바퀴를 다 돌도록 하죠."
다시 뛰기 시작하는 보를레스. 의지가 높다고 몸 상태가 완전히 나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헐떡이는 숨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달리는 모습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것은 왜 일까? 이야기를 하면서 잠깐 쉬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불타오른 오기와 호승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토클레우스는 중얼거렸다.
"앞으로의 훈련에서 어느 쪽인지 증명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