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4)
3일.
보를레스를 젠티아 수준의 검사로 만드는데 동원된 사람은 '백장의 꽃잎'이라 이름 붙여진 기사단의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전시(戰時)인 현재 기사로서 하는 일이 꽤 많았기 때문에 번갈아 가면서 보를레스를 코치했는데 그 훈련내
용은 상당히 평범하면서도 색다른 것이었다.
"이제 달리기는 어느 정도 되었군."
말한 20대 중반의 기사는 겉보기에는 체격이 작았지만 엄연히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세심히 보를레스의 달리기를
살핀 그는 검을 들어 던져주고 말을 이었다.
"이걸 받아. 아직 날을 갈지 않은 검이다."
"휘두르기를 하는 겁니까?"
그동안의 훈련에서도 휘두르기는 수천 수만 번을 반복한 항목 중 하나였다. 말할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에 아무렇지
도 않은 듯 검을 휘두르는 보를레스를 기사는 만류했다.
"멈춰. 그런 시시한 휘두르기는 이제 하지 않는다."
"시시한?"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은 언제나 시시한 휘두르기로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청
년 기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론 기본이지만 지금부터 할 것이 좀더 네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끄덕. 그제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보를레스.
"네 생각대로 휘두르는 기본은 같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조건을 달겠다. 예를 들면 1초에 두 번 휘두르기."
그리고 기사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나 쓰는 메트로놈(metronome)을 꺼냈다. 1분에 40번에서 240번까지 시계추
처럼 막대가 왔다갔다하며 음악의 정확한 속도를 알려주는 기계였다. 태엽을 감아서 사용하는 이 기계는 과학이 가
장 발달한 볼케아스의 수도에서만 만들어지는 제품이었으나 가장 소비하는 곳은 마법과 음악의 나라인 아스틴이었
다.
막대의 속도를 1분에 60번으로 맞춘 기사는 검을 들어서 자세를 잡고 빠르게 검을 내리쳤다.
츅! 츅!
"이렇게 1초의 두 번 휘두른다. 휘두르는 각도는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다. 왠만하면 여러 각도로 휘둘렀으면 좋겠
군."
츅! 츅!
"이렇게 말입니까?"
적어도 보를레스는 기사의 왕국, 엘시크의 기사단장에게 인정받은 솜씨였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
게 해내는 그에게 청년기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잘 하는 군. 그렇게 10분 휘두른다."
가볍게 생각했던 보를레스의 예상을 뛰어넘어버린 한 마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은 2초 동안 5번 휘두른다. 역시 그렇게 10 분."
그냥 몇 천 번 내려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훈련을 하고 30분도 안 되서 뻗어버린 보를레스를 청년기사는 세차
게 걷어찼다. 그리고 이를 갈면서 노려보는 시선을 빙긋이 웃음으로 받으며 말했다.
"아직 쉬면 곤란해. 연병장을 10바퀴 돌고 와서 다시 10분동안 휘두른다."
이것이 아침의 훈련이었다. 점심때는 3시간에 걸쳐서 마법사와 성직자들이 몰려들어 그를 덮어버린 육체적인 피로
와 정신적인 피로를 조금이라도 더 풀어주느라 난리법석이었다. 보를레스는 시끄러운 그들의 모습에 오히려 정신적
인 스트레스가 쌓일 지경이었으나 꾹꾹 눌러 참았다.
해가 뉘엿뉘엿한 모습을 보일 때면 기사들과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대련의 종류도 달리기, 검 대련, 맨손 대련 등
가지가지라 어떻게 보면 일대 다수의 운동회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특히 저녁 식사시간만 되면 100여명의 기사들이
둘러앉은 가운데서 대련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단, 그 장관 속에서 죽어 가는 남자
가 자신이라는 게 보를레스로서는 안타까울 수밖에.
"거기서는 피했어야 했는데‥."
목검으로 얻어맞아 붉게 불어져 나온 옆구리를 매만지며 보를레스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냥 상대 없이 휘두르기
만 하던 것에 비하면 대련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써도 만점이었다. 자기가 더 얻어맞는다는 게 문제지만‥.
"그 정도만 해줘도 충분합니다. 이제 겨우 3일이오. 찰나에 휘두르는 방식을 배우자마자 실전에 쓰다니‥. 대단하다
는 말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요."
"하지만 4일 밖에 남지 않았어요. 오늘이 지나면 3일인데‥.."
막 대련을 끝낸 여운 때문에 거칠어진 숨을 고르면서도 보를레스는 지친 것 같지 않았다. 상대였던 기사도 꽤 힘겨
웠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자네는 너무 마크렌서 자작의 능력을 모르는 군. 그는 일주일이라는 기간을 충분히 한 달이라는 시간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흐음‥."
생각하는 그의 몸체의 꼭대기, 즉 머리. 그보다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사람이 있으니 바로 시간조차 초월한 사
무능력을 가지고 있다 일컬어지는 토클레우스 마크렌서 자작이다. 그는 아침까지 보를레스를 코치했던 기사에게 연
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만족스러웠다.
"그 정도인가?"
"지금도 보셨지 않습니까? 그는 머리로 배우는 것은 평범하지만 몸의 습득 속도는 놀랍습니다. 게다가 힘든 연습을
즐길 수 있는 심성이라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가보군. 즐거워 보여, 멜첼."
말하며 토클레우스는 빙그레 웃었다. 멜첼은 20대 초반 중에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기사인 동시에 까다로운 성
격으로 유명했다. 그런 사람한테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보를레스는.
"그런데 그들의 동정은 어떻습니까?"
"걱정 말게. 용병왕이라는 친구는 겁쟁이거든. 남작 각하 덕분이기는 하지만. 실패를 의외로 염두에 두는 사람이라
서 우리가 대응하지 않는다고 쉽게 들어오진 못할 거야."
"그럴까요?"
"그럼. 이런 말이 있다네."
"???"
궁금한 표정을 완연하게 드러낸 멜첼.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토클레우스는 용병왕의 군대가 군집해있을 플로키
산을 바라보았다. 나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영리한 자가 신중하기는 쉽지만 그만큼 결정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그들이 더욱 영리해지고 신중해지도록 하면 되겠군요?"
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