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6)
"기사 님, 그대가 다리 하나가 잘려 저 곳에 누워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피를 흘리면서도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중년 의사를 보면서 로바메트는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자가 의사라니‥. 아깝군. 저런 친구가 실베니아 중앙에 있었다면 나라가 이렇게‥.'
하지만 그런 내심과는 달리 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신나서 날뛰는 것은 젠티아를 후려쳤던 기사 뿐.
"이 녀석이 그래도! 그냥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군."
퍽!
젠티아의 복부 깊숙이 박히는 발. 젠티아는 바닥을 구르며 신음성을 토했다.
"크윽!"
"그만하게. 그는 의사로서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야!"
로바메트는 잠시 생각에 빠졌던 것을 자책했다. 눈앞의 의사같은 인물이 자신과 실베니아에는 매우 필요했다. 그런
사람을 저렇게 함부로 다루다니, 그는 벌떡 일어섰다. 앉아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로바메트는 일어서니 엄청난 거구
였다. 처음 보았다면 그가 정치가라기보다는 기사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짝!
기사의 얼굴이 뒤통수만 보일만큼 완전히 돌아갔다. 하긴 2m가 넘는 거구의 거대한 손바닥에 맞았으니 당연했다.
기사가 휘청거릴 정도로 뺨을 대린 로바메트는 손수 쓰러져있던 젠티아를 일으켰다. 젠티아가 그의 눈에서 광망같
은 불빛을 봤다고 느낀 순간 로바메트는 고개를 정중하게 숙였다.
"내가 이렇게 사과하네. 너무 궁의 예법에 길들여진 친구니까 자네가 이해해주게."
"아, 예."
의사행세를 하고 있지만 젠티아는 귀족, 공작이나 되는 자가 평민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
고 있었다. 눈이 부릅떠진 모습이 그는 정말로 놀라고 있었다.
'장인 어른과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다. 충분히‥.'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로바메트는 거구를 움직여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시즈에게 다가갔다. 신비로운
은발과 유리알 같은 눈동자‥.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정말 마음 속까지 비춰내는 듯한 눈동자로군. 내 마음이 그 눈동자처럼 투명하다면 좋겠지만‥."
"과찬이십니다. 전하‥."
"후후‥. 어쨌든 그대들을 부른 본론을 말하도록 하지. 그대들이 아무리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다지만 이 곳은 전
장,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병사들을 시켜 호위하고자 함일세."
"하오나‥ 그러시지 않아도‥."
"아니야.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것은 내전일세. 한 국가의 국민들끼리 서로를 죽이고 있는, 필요없는 전쟁이야.
난 그대들이 적아(摘芽)를 가리지 않고 이 나라의 백성을 보살피는 것에 감사하네. 사실은 우리 귀족과 기사들이 해
야할 일인데‥."
"아닙니다‥."
"우리의 일을 대신, 아니 더 뛰어나게 수행하고 있는 그대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네. 부디 내치지
말아주게. 그리고 필요하다면 군에서 가지고 있는 의약품을 가져다가 써도 좋네."
엉겹결에 시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은 좀더 튕기다가 못 이기듯 허락해야 하는데 젠티아는 내심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로바메트는 그런 시즈의 어리숙한 행복이 마음에 드는지 아니면 의심스러운
지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면서 그를 새심히 살펴보았다. 귀족들이 기본적으로 소리없이 걷는 법을
익한다는 걸 염두에 둘 때 현재 공작은 의도적으로 발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한 때 귀족을 삶을 잠시 누렸던 시
즈도 그걸 알고 있기에 그의 발소리에 자신의 심장 박동이 겹쳐졌다.
"은발은 그렇다고 쳐도 유리 눈동자라‥ 정말 특이해. 성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야. 실례지만 아가씨의
이름이?"
"네? 아, 아, 저‥."
시즈로서는 용건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름을 물어오자 뼛속까지 당
황해버린 그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표정들과 이름, 생각을 모두 잊어버리고 허둥거렸다. 그러자 의아스러운 시선과
표정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얼굴이 빨개진 시즈는 겨우겨우 한 가지 이름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아, 아리에‥. 아리에 랑쉐르입니다."
겨우 이름을 말하는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기사들을 비롯한 남자들은 가슴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저렇게 순
진하다니!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로바메트는 순진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좋아요. 아리에 랑쉐르‥ 성그러운 그대의 마음과 이름, 그리고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겠습니다."
"여, 영광입니다."
"아! 물론 붉은 머리 아가씨도!"
무사히 로바메트 공작과의 대담을 마치고 천막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 그들의 등에는 한결같이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휴우‥."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뿜는 그들을 향해 천막의 입구를 지기고 있던 병사 사내가 작게 웃었다.
"공작님은 언제나 상대를 긴장하게 만드시죠. 여러분도 당하신 모양이군요."
"예,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하지만 좋은 분이랍니다. 일개 병사인 저조차도 쉽게 느낄 수 있지요. 이번 내전도 자신의 책임인양 미안해하시는
전하십니다. '값싼 남작'님도 백성을 위하기로 소문난 분이지만, 로바메트 공작님도 만만치 않으시죠."
"그렇군요."
대답을 하면서 젠티아는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로바메트의 인덕이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
게 직접 만나니‥.
'정권을 잡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는 내가‥ 바보같이 느껴진다. 아무리 나라를 위해서 그렇다지만‥. 하지만 그
런 자가 왜!?'
젠티아는 주위를 살피며 두 소녀를 아무도 없는 숲으로 데려가자 넬피엘이 그의 얼굴을 보고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자 못참고 결국 한 마디를 하고야 마는 중년 의사.
"어이! 변태!"
번쩍! 언제나 생글생글 웃던 소녀 넬피엘은 저 한 마디만 나오면 이름이라도 부른 것처럼 머리카락이 휘―하고 솟
아오른 마력의 바람에 휘날리고 번쩍거리는 빛을 눈에서 뿜어낸다. 젠티아가 '전격 변신!'이라고 칭하는 변화는 아
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본래 인격으로 변화를 마친 넬피엘.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움직여 젠티아의 부름에 의문을 표시했다.
"?"
"어땠어? 주문에 걸린 것 같아?"
"지금은 풀렸어."
"넬피엘, 네 녀석 말고 로바메트 공작 말이다."
그 말에 넬피엘은 젠티아에게 꿀밤을 맞으면서 무거운 분위기로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긴장으로 성격이 급해진 젠
티아는 닦달을 했다.
"이봐! 주문에 걸렸는지 않았는지만 말하면 되는데 뭘 그리 고민하는 거야?"
"걸렸어. 걸렸는데‥."
뭔가 여운이 남는 대답이었다. 그의 말에 따라서 로바메트에 대한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에 젠티아와 시즈는 조용히
기다렸다.
"너무 자연스러워."
"자연스럽다고?"
"그래. 마치 자기가 바랬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도 너처럼 스스로 주문을 받았단 말이야?"
"그건 알 수 없지. 협박을 받았는지‥ 아니면 스스로 원해서 주문을 받아드렸는지‥. 아니라면‥ 상대의 마법이 그
의 의지를 완전히 뭉개버릴 정도로 강력하다거나‥."
젠티아와 시즈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의지를 완전히 말살시킬 정도의 위력을 가진 마법사는 현재까지 출현하지 않
았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시즈가 물었다.
"저기‥ 넬피엘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나요?"
살포시 눈치를 살피며 물어오는 모습에 넬피엘은 빙긋 웃음이 솟았다. 자신이 주문을 걸었지만 시즈는 정말 소녀의
모습이 어울렸다. 명주실처럼 흘러내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흝어뜨리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정.도.라.면. 가능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