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7)
로바메트 공작의 막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거인(巨人)인 로바메트의 앞에는 한 사내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그를 향해서 로바메트 공작이 물었다.
"그대가 걱정한 사람들인가?"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배를 걷어차일 때도 중년의 의사는 검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나약했다.
"여자들의 얼굴이 비슷하기는 하더군. 하지만‥ 놈들은 역사의 고리가 이 진영에 개입되어 있다는 걸 알아. 무모할
정도로 자기를 들어낼 필요가 없어."
사내는 아직도 한 쪽 뺨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지 차분하게 의사의 모습을 회상했다. 악을 바
락바락 지르며 덤벼들 것 같은 모습. 뭔가 마음 속으로 걸린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
"그렇기도 하군. 헌데‥."
"헌데?"
물끄러미‥ 로바메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의사라는 직업은 여자들도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나?"
"이 곳이지?"
검다하기 보다는 푸르다는 표현이 어울릴 맑은 밤이었다. 흐릿한 잔영(殘影)의 도움을 얻어 모습을 가린 채 데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맞아요. 이 곳 어딘가에 시즈가‥."
용병으로써 몇 번의 내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아리에는 대답하는 도중에도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산적들에
게 얻은 정보대로 성녀(聖女)가 머문다는 병영까지 무사하게 오기까지 그녀의 심혈(心血)에 가까운 노력이 깔려있었
기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 성녀가 시즈가 틀림없을까?"
데린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보았을 때 시즈는 분위기가 신비롭기는 했지만 여자로 보일 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러니 넬피엘의 존재를 모르는 일행으로서는 고민할 수밖에.
"틀림없어."
잠자고 있던 파마리나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평생의 적수라도 맞이한 듯 긴장하여 이마에서 등까지 식은땀 투성
이였다. 감기라도 걸린 게 아닐까 하여 다가가는 블리세미트에게 고개를 저은 파마리나는 시즈를 비롯한 젠티아들
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 막사를 노려보았다.
"난 세상에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진짜 마녀야. 그래서 느낄 수 있다고! 대기 자체를 휘어잡고 있는 강대한 기운
을‥."
"들어가죠."
결심을 한 여인들과 한 소년이 시즈들이 쉬고 있는 천막을 향해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던
넬피엘이 움찔하고 눈을 뜨자 젠티아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누군가 다가온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이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한 둘인가?"
넬피엘은 대답 대신 날카롭게 젠티아를 째려보았다. '그런 말뜻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라는 의미의 행동에는 살
기가 엉성하게 갈무리되었기에 젠티아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을 고쳤다.
"하하하‥. 그렇게 볼 필요 없잖아. 저 발걸음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야. 내가 마중가도록 하지."
"저도 함께 가도록 하지요."
시즈가 빙그레 웃었다. 땅의 음유술사인 젠티아가 땅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고동으로 상대를 알아채듯 그도 친근한
사람에게서 불어오는 바람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쳇. 전장에 여자들이나 데려오는 건가?"
"아릴은 전장을 안 돌았을 것 같나? 널 찾기 위해서 그 아이는 세상의 오지(奧地)라는 오지는 다 돌아다녔다. 너처
럼 오랫동안 여자를 혼자 놔두는 것은 신사가 할 일이 아니야."
"‥‥. 알았으니까 나가봐."
신경쓰이지 않는 듯 넬피엘은 다시금 명상에 빠졌지만 젠티아는 잠시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눈을
감은 것은 흔들리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런 넬피엘을 보며 젠티아의 머리 속에는 어딘가를 추억과
함께 떠돌며 넬피엘을 찾고 있을 소녀를 떠올렸다.
'둘 다 고생이구나‥.'
넬피엘, 아릴. 불과 물의 음유술사. 그래서 이렇게 이루어지기 힘든지도 몰랐다.
"그럼 우리는 나갔다가 오지."
젠티아와 시즈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무렵, 갑자기 넬피엘의 윤곽이 어둠의 장막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넬피엘이 사라졌다면 사내는 어둠의 장막 속에서 걸어나왔다고 할까.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지 못하고 넘치는 왈칵
하고 튀어나온 사내는 주위를 신경질적으로 살폈다.
"확실히 의심스럽군. 모두! 방금 전에 나간 의사와 성녀를 쫓아라."
사내는 로바메트 직속의 정보 수집과 암살을 주일로 하는 부대를 이끄는 자였다. 물론 역사의 고리 영향도 받고 있
었지만‥. 이번에 성녀 일행에 대한 의혹을 드러낸 쪽이 역사의 고리가 아닌 로바메트라는데 의아심이 들었는데 왜
그가 실베니아를 좌지우지하는 공작인지 알게 된 느낌이었다.
"‥‥."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군기(軍氣)가 빠졌다는 생각을 하며 막사의 천을 걷고 나온 순간 그는 온몸이 서늘해졌다.
'없다. 아무런 기운이 남아있지 않아.'
거의 10명에 가깝게 데려왔던 대원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대원들이 사내을 속일 정도로
능력이 좋은 어쌔신이었다면 이때껏 대장이라는 지위를 그가 맡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의문은 길지 않았다. 의심을 만들어낸 원흉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달빛 아래 휘날리는 검붉은 머리카락‥. 그
사이로 지그시 사내를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
"넌‥."
희미한 표정. 그러나 분명한 게 있었다. 붉은 입술이 그리는 곡선은 미소였다. 아름답지만 도망치고 싶을 만큼 섬뜩
한 살기를 담은‥.
'뭐야? 방금 전 막사 안에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잖아.'
하늘을 뒤덮는 듯한 엄청난 존재감. 세상을 메운 어둠까지 적발의 소녀가 내뿜는 살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후
들후들 떨려오는 하반신에 그 최상위에 얹혀있는 머리는 빨리 판단을 내렸다.
'도망쳐야해!'라고.
타탓! 보통 때라면 작은 기척이라고 느꼈던 소리였다. 하지만 현재 사내는 '내가 박차는 소리가 이렇게 컸었나?'하
고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그를 유령처럼 따라잡은 그림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느낀
사내가 검자루를 잡는 순간.
화르르륵! 하고 상대는 양손에서 사람 머리 만한 불꽃을 피어 올리더니 손뼉치는 것처럼 손바닥을 부딪쳤다. 불꽃은
산산이 조각났지만 그로 인해 갑자기 밝아진 섬광은 사내는 시야를 가렸다.
"크아아악!"
"‥‥. 시즈, 젠티아. 둘다 멀었군. 연인의 기척을 알아보되 적의 기척을 모르다니‥."
자신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가는 불씨들을 잠시 바라보던 넬피엘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뭔가 그리운 것을 생각하는
듯 애수에 찬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