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9)
팍! 팍! 팍!
"윽! 윽! 컥!"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등에 3발의 화살이 와서 박힌 까닭이다. 부르르하고 경련을 일으키던 팔은 털썩하고
땅에 떨궈졌다.
"바보 녀석. 전장에서 방심하면 다가오는 것은 죽음 뿐이야."
수풀을 헤치고 풀잎을 털면서 걸어나온 사내. 데린은 그의 목소리에 왈칵 눈물을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가까이 다가온 젠티아의 모습에 그녀는 대끔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게 뭐에요?"
어떻게 변장을 했는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주름살.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머리카락. 것도 모자라서 온몸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서슬이 푸른 그녀의 어조에 젠티아는 시무룩했다.
"소리 없이 죽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
"도대체 뭐에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리는 방법 없었어요?"
"그렇다고 성을 뛰쳐나오면 어떻게 해?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뛰쳐나오도록 마크렌서가 나뒀단 말야? 내 돌아가면
당장!"
"됐어요. 그나저나 저 소녀는 누구죠? 설마‥ 바람을 핀 건 아니겠죠?"
새침하게 날카로워진 데린의 시선. 움찔하는 시즈를 바라보며 젠티아는 껄걸 웃었다.
"저 녀석, 시즈잖아."
"에!?"
동그랗게 떠진 눈. 누구 눈이 가장 클까? 정답은 아리에였다. 주위의 반응에 완전히 주룩이 든 시즈의 은발을 젠티
아는 한껏 흐트러뜨렸다.
"잘 어울리지? 넬피엘이 마법을 써서 좀 여자처럼 만들어놨지. 하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여장이 잘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넬피엘!? 그 사람이 시즈를 저 모양으로 만든 건가요? 당신도? 도대체 누구죠?"
스윽!
"내가 넬피엘이다."
블리세미트는 언제 솟았는지 모르는 존재가 등뒤에서 목소리를 내자 깜짝 놀랐다. 뒤에는 자신과 키가 비슷한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담담한 눈으로 데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동의 재회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다. 로바메트가 눈치를 챘어."
"역시 그렇군요. 이 복면인들은 아리에들을 저희 동료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시즈의 말을 들은 젠티아는 쓰러져있는 한 복면인의 두건을 벗겼다.
"이 놈이 대장인가?"
그는 마지막까지 죽지 않았던 자였다. 눈을 부릅뜬 채 시즈가 있던 방향을 노려보는 모습이 섬뜩했다. 유심히 시체
를 바라보던 젠티아가 혀를 찼다.
"쯧쯧‥."
"아는 자입니까?"
"기억 안나? '공작님은 언제나 상대를 긴장하게 만드시죠. 여러분도 당하신 모양이군요.'"
"아!"
시즈의 뇌리에 로바메트의 막사를 지키던 상냥한 인상의 병사가 스쳤다. 충격을 받은 듯 시즈가 말을 잊지 못하자
젠티아는 어깨를 두들겼다.
"전쟁과 정치의 음모는 더 치밀해.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믿으면 안되지."
"토론은 그만하고 움직여야 해. 시간이 없다. 로바메트가 눈치를 챘지만 역사의 고리는 움직이지 않을 걸로 보아서
정보의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전에 우선 시즈의 모습부터 원래대로 돌려줘요."
아리에가 입을 삐죽거리며 넬피엘에게 말했다. 그녀로서는 자신보다도 아름답게 보이는 시즈의 모습이 불만스러웠
으리라. 순간이지만 넬피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닮았어‥.'
퉁명스럽게 말하는 아담한 입술이 옛날 자신에게 투정을 부리던 소녀와 겹쳐 보였다.
"그러지. ‥빛이여‥. 장난스러운 춤을 멈춰라‥."
파아아앗!
넬피엘의 주문에 시즈는 빛에 휩싸였다. 볼록했던 가슴은 사라졌고 여성스러운 몸매도 마르긴 했지만 원래의 남성
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입술의 붉기가 조금 옅어졌고 순진한 느낌이 나던 커다란 눈은 평범하지만 현기가 도는
눈이 되었다. 그 과정을 아리에는 뭐 하나 빼놓은 게 없는지 감시하듯 바라보았다.
"근데 왜 머리카락은 그대로지요?"
"그건 머리카락을 빨리 자라게 한 것 뿐이다. 원래는 생명력을 좀 사용하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가는 마법인데 에
릭사로 생명력이 무한한 괴물한테는 얼마든지 써도 괜찮다."
아리에는 어줍잖은 미소를 짓는 '괴물'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곤란해한다고 생각한 시즈가 말했다.
"넬피엘, 머리가 기니까 상당히 거추장스러운데 좀 깔끔하게 해줘요. 젠티아 정도로‥."
"뜻대로. 염(炎)!!"
넬피엘의 간결한 단발성과 함께 시즈의 머리카락에서는 불이 피어 오르나 싶더니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놀라서
눈을 깜빡였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다. 보통 머리카락은 불에 타면 보기 흉한 그을음과 함께 끝부분이
뭉칠 텐데 시즈의 머리는 깔끔했다. 약간 덥수룩하기는 하지만 이발사가 자른 것처럼 깔끔한 솜씨에 시즈는 감탄했
다.
"대단하군요. 넬피엘이 이발에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블리세미트는 산뜻한 시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붉은 뱀의 사원을 떠난 이후로 한 번도 머
리를 다듬지 않아서 뒷통수의 머리카락 이리 삐쭉 저리 삐죽 목을 찔러댔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칭찬이 싫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넬피엘을 젠티아는 기가 막힌 눈으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헬 파이어를 이발하는데 사용하다니 마법사들이 알면 당장 이발사가 되고 싶겠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어서 가자."
"잠깐만요."
출발을 다시 훼방놓는 목소리에 넬피엘은 짜증이 났다.
"뭐야?"
"아‥ 그게 당신, 남자죠? 원래 모습으로 안 돌아갈 건가요?"
넬피엘의 얼굴이 급속도로 찌그러졌다. 시즈와 젠티아를 제외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은 자신을 약간 괴
상한 취미를 가진 청년으로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대답하기도 싫다는 양 그는 버럭하고 뒤로 돌아서 뚜벅뚜벅 걸음
을 옮겼다. 어리둥절한 일행에게 젠티아는 낄낄대며 말했다.
"저 녀석은 저게 원래 모습이야."
일행은 출발하는데 좀더 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아리에들이 완전히 굳어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