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 (10)
로바베트의 막사 주위는 수많은 병사들이 이미 장사진을 이루고 경계하고 있었다. 어찌나 삼엄한지 보통 바늘이라
면 몰라도 사람만한 바늘로는 들어가는 틈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무 뒤에서 쑤서볼 틈을 찾던 바늘 중 가장
커다란 것이 말했다.
"이거야 원‥. 이래가지고는 쉽게 들어가기는 무리겠는 걸."
"어렵게 들어갈 수 있을 지도 의심스러운데요!?"
"음‥. 우선 여자들과 어린애는 남아있어."
그 말의 대상들은 반발했다.
"여자라고 차별하는 건가요?"
"어린애라는 말 취소해주십시오."
아리에의 눈이 날카로워졌고, 블리세미트는 발끝을 세우고 허리를 폈다. 젠티아와 두 사람의 대결양상을 종결시킨
자는 넬피엘이었다.
"시끄러워."
그의 담담한 한 마디는 엄청나게 두꺼운 자물쇠라도 달아주는 양 아리에와 블리세미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여자, 어린애라고 차별하는 게 아니다. 너희가 약하니까 차별하는 거야. 죽기 싫으면 젠티아가 시키는 대로 해."
사실 넬피엘은 목소리는 젠티아, 심지어는 시즈의 목소리보다도 가늘다. 하지만 망설임이나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
었다. 차갑게 얼어붙는 음성은 상대의 입술을 무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할 말이 남아있다면 넬피엘은 지그
시 노려본다. 그러면 그가 원하는 대답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 알았어요."
아리에는 구원을 청하듯 파마리나를 돌아보았지만 무서울 것 없다는 마녀는 넬피엘에게서 은연중 풍겨 나오는 마력
에 기가 질린 상태였다. 물론 시즈와 젠티아도 굉장했지만 그들은 마나mama에 가까운 상태로 상대를 편안하게 만
들어주는 에너지였다. 그에 비해서 이 가시돋힌 미소년은 공포를 조장하는 마력(魔力)이었다.
파마리나마저 바들바들 떨고 있자 아리에는 할 수 없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시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시즈가 다가와 살며시 껴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곧 돌아올게."
"응‥."
"젠티아, 이번에도 연락두절이면 난 자살해버릴 줄 알아요."
"아하하핫‥! 제발 그것만은 그만 둬. 내가 돌아와서 사랑스런 아내가 없으면 나도 자살해버릴지 몰라."
재회가 얼마나 되지 않았는데 다시 떨어져야 하자 아리에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한 달 동안 얼마나 마음이 망가
졌는지 또 다시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그만 간다. 여자들은 수도에서 북서쪽으로 2시간 정도가면 폐가가 있다. 거기서 기다려라.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데린은 이때껏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들 중에는 뛰어난 기사도 있고 전략가도 있고, 거짓말쟁이도 있다.
하지만 방금 전처럼 확실하게 믿음을 주는 음성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의심은 허용치 않을 만큼 확고한 의지가 입
술에서 풍겨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귀엽게 생긴 입술에서‥.'
아리에와 데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넬피엘은 몸을 날렸고 바로 뒤를 이어 젠티아가, 그
리고 마지막으로 걱정스럽게 아리에를 바라보던 시즈가 등을 돌렸다.
그들이 멀어져 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블리세미트가 걸음을 떼지 못하는 데린에게 말했다.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우리는 그가 말한 폐가로 가서 준비를 하자."
우선 검은 색으로 온 몸을 감싼 넬피엘 외 두 사람은 두건이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잘 고정을 하고 주위를 살폈다.
막사 사이마다 두 세 사람의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젠티아가 검을 소리나지 않게 뽑자 시즈가 말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바람을 부르겠습니다."
그의 의지에 따라서 등뒤의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제대로 말뚝을 박아놓지 않은 막사의 천이
펄럭이며 솟아올랐고 막사 꼭대기에 달린 깃발도 쉬지 않고 몸을 털어댔다.
"이거 참! 갑자기 왠 돌풍이지? 큭!"
가느다란 은빛의 실. 병사는 천막에서 흩날린 것으로 착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려는 순간 은실은 먹이를 찾은
뱀처럼 사내의 심장으로 파고 들었다.
"어이! 무슨 일이야!?"
옆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는 귀가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신음소리를 놓치지 않았던 주의력은 그에게 있어서
불행을 암시했다.
"허억!"
여자아이처럼 희고 가냘픈 팔이 병사의 고개를 고정시켰다. 소리를 질러 동료들을 모아야 했지만 가느다란 손가락
은 깊숙이 들어와 턱을 잡았다.
빠직! 우두두둑!
아래턱을 빼는 게 먼저였고 그 다음이 위턱을 잡고 목을 돌려버린 순서였다. 뼈 소리만 냈을 뿐 사내는 비명도 지
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부러지는 소리가 약간 컸지만 병사들은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와 착각할 것이다.
"소멸의 의지여‥ 나의 손 안에서 피어나라."
먼지도 없이 시체의 흔적을 없앤 넬피엘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나머지 두 사람에게 손짓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
은 팍!하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