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200)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2)

젠티아는 안겨 바닥을 뒹굴면서도 시즈는 의아했다. 그는 아무런  공격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서있던 

자리에는 작은 입새처럼 생긴 암기가 대여섯 개나 박혀있었다. 

통상적으로 생물이 움직이게 되면 공기에 파장이 일어나는 게 당연했다. 전투에 대한 경험이 미천했던 시즈가 뛰어

난 용병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이점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의 주위에 펼쳐진 바람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없었다. 

더욱이 암기가 공기를 가른다면 당연히 파공(破空)이 일게 분명했는데도 말이다. 

"조심해라. 기척을 느낄 수가 없어. 게다가 발의 고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며 젠티아는 이마에서 뺨으로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어떤 자이기에 마법과 검술에 있어 최고라

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이토록 궁지로 몰아넣을까. 어둠은 암습자에게 있어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어둠의 암습자는 넬피엘이나 젠티아 등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자가 분명했다. 시즈의 판단에 잡히는 자들은 한 부

류 뿐이었다. 

'역사의 고리인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쉽게 느꼈다.  가만히 있는 대도 공격이 없는 걸로 보아서  상대의 목적은 자신들을 

제압하기보다는 시간을 끄는 쪽일 것이다. 그렇다고 성급히 움직일 수도 없었다. 현재 젠티아는 상대가 공격할 때의 

미세한 살기를 감지했고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는 순간에는  상대에 대한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하지 못했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는 이 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즈는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눈동자는 주위를 쉴 새 없이 돌아보고 혀는 침이 말라 까칠한 느낌이 

났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강하게 강타했을 때 빠르게 젠티아에게 다가가갔다. 

"젠티아, 넬피엘과 나가요!" 

젠티아는 의아했지만 시즈의 말대로 넬피엘을 잡고 몸을 날렸다. 연약해 보이는 은발의 청년은 적어도 바람의 음유

술사였다. 게다가 현자로서 이름 높던 '마땅찮은 시즈'. 무슨 방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젠티아가 몸을 날리는 순간 믿음직스러운 바람의 음유술사는 강한 기합성을 발했다. 동시에 그의 주위에서 세찬 강

풍이 일어났다. 

'그쪽에서 바람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거슬리게 바람을 내보내겠어!' 

시즈는 해동도예의 발도법에 따라 번개같이 예도를 뺐다. 그 속도에 검집이 벌의 날개처럼 우웅하고 진동했다. 

캉! 캉! 

핑그르르하고 공중에서 손가락만한 단도가 돌고 있었다. 그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말해준다. 이미 젠티아와 넬피엘은 

바람에 떠오른 천막의 틈을 통해 나간 상태. 시즈는 꺼릴 게 없었다. 

"크윽!" 

바람의 칼날이 막사를 온통 난도질했다. 

"거기냐?" 

빠르기로 치자면 누구한테라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시즈였다. 그는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목표에게 다가섰다. 

"과연 시즈 세이서스. 만만치 않군."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자 시즈는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야밤에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라고. 부끄럽잖아." 

검과 암기가 교차하는 삶과 죽음에 갈림길에서 이렇게 농담을 자연스럽게 꺼내는 사람. 노르벨이 아니라면 누가 그

러겠는가. 넬피엘이 휘둘렀던 현자의 검에 맞아 완전히 묵사발이 되었던 그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시즈가 섭섭

할 만큼. 노르벨은 얻어맞았던 한 달 전이 생생히 떠오르는지 몸을 비비꼬며 말했다. 

"아아‥. 세로스 씨가 날린 일격은 내 몸 깊숙이, 뼛속까지 각인되었어. 이번에 보답을 해주고 싶었는데‥." 

매저키스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살기로 가득 찬 눈빛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 몸 떨리는 한기에 대응할 생각하지 않

고 시즈는 신중하게 숨을 골랐다. 노르벨과 대결해본 일은 없지만 잠시나마 젠티아와 넬피엘을 잡아둔 것으로도 그 

능력은 자신을 능가하리라 생각했다. 노르벨은 시즈의 전투 태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넬피엘들이 떠난 방향으로 한 

눈을 팔았다. 시즈로서는 고민되는 상황이었다. 

'유인? 아니면 허점?' 

만약 시즈가 노르벨이 머리 속이 정신이상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산만하다는 걸 알았다면  당장 공격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는 고민할 바에야 노르벨과 진지하게 싸우는 쪽을 택했다. 

"엄청난 투기로군. 얼마 전까지 학자였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서 그런가?" 

"‥‥." 

"할 수 없지 세로스씨한테는 다음  번에 빚을 갚기로 할까? 너랑  노는 것도 그리 심심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자

아‥ 시작하자고! 암습이 아니라 검을 다루는 자로서, 제대로!" 

눈과 눈이 마주보고 검을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구름에서 완전히 벗어난 달은 밝았다. 상대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까지 확인이 될 정도로. 시즈의 동공은 

터질 듯이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을 따라서 철렁거렸다. 그에 비해 노르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 그저 무심해 보

였다. 

긴장에 견디지 못한 시즈의 호흡이 한 번 어긋났다. 그 때문일까? 눈에 안개가 낀 것처럼 그는 노르벨의 모습이 흐

릿해졌다고 느꼈다. 

'놓쳤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시즈는 바닥을 굴렀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귓가를 스치는 파공성. 은발의 실들이 허공에 깃털

처럼 풀풀 날렸다. 

위기 후에는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투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 번의 위기 뒤에는 보통 

또 한 번의 위기가 오기 마련이다. 

콰앙! 

검이 부딪혀 나는 소리가 이토록 거대하고 묵직할까. 시즈는 소리만큼이나 거대하고 묵직한 충격에 손이 저렸다. 

"잘 막았어. 칭찬해주지." 

노르벨의 칭찬을 시즈는 받아드렸다. 왜냐하면 막지 못했다면 그의 하반신은  상반신과 영원히 이별해야 했기 때문

이다. 두 번째 공격이 막히자 노르벨은 아무 미련없이 뒤로 물러섰다. 

"한 호흡이 늦었는데도 막아내다니‥. 진지하게 해볼만하군." 

그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급속히 다가왔다. 

"거기에서 뭘 하는 거, 컥!" 

촤악! 사내는 불쌍하게도 한 마디의 말조차 끝맺지 못했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

쓱했다. 

"이런! 김 빠지네. '마땅찮은 시즈.' 자리를 옮기지. 여기에서는 마음껏 싸울 수가 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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