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5)
"안되요."
"돼!"
"안되요."
"된다고! 돼! 된다니까!"
"도대체 얼마나 저러고 있을 생각이지?"
젠티아는 바위에 턱을 괴고 앉아서 시즈와 아리에의 대결양상을 지켜보다가 한숨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벌써 30
분 가까이 서로를 노려보면서 저 말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아리에는 울그락붉으락하는 얼굴빛에 따라서
억양까지 변해, 보는 사람으로 인해 심심함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즈는 그녀를 상대할 생각이 없는지
무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인형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보통은 질릴 만도 하것만, 아리에는 그런 시즈를 상대로 한 발
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가면 안 되는 이유가 도대체 뭔데?"
"위험해요."
"안 위험해!"
"위험해요."
'저래가지고는 끝이 안 나겠군.'
젠티아는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데린이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무릎을 내주었다. 평상시라면 넬피엘이라도 나서서
사태를 종결시키겠지만 넬피엘은 시즈의 상처를 치료하고 무슨 볼일이 있는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보다못한 파
마리나가 나섰다.
"아리에, 그만 둬. 저 녀석 얼굴을 보라고. 도저히 들어줄 것 같지가 않잖아."
"하, 하지만!"
"만약 보통 때였으면 이 정도에서 벌써 져줬을 거야."
아리에는 울상을 지으며 힐끗 시즈를 훔쳐보았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쌩생 불었다. 아무리 고집을 부려
도 소용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리에, 용병으로써의 일과 이것은 틀려요. 용병일이라면 우리가 위험하면 돈을 안 받고 실패했다고 길드에 올리기
만 하면 되요. 하지만 이것은 실패해서는 안되는 일이에요. 그러기에 실패하지 않을 사람들만 가야 하는 거죠. 이해
해줘요."
예전에는 시즈가 진지하게 말할 때는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무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투명한 눈동자에
조금만 물기가 돌아도 반사광이 은은히 비쳐서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래도 기다리는 건 힘들어."
두 사람은 다시 애처로움으로 대결을 하기 시작했다. 과연 누가 더 상대의 심금을 흔들 것인가.
"‥‥."
"제발‥."
드디어 남자들의 약점이자 여인들의 필살기인 눈물이 서서히 선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어디론가 사
라졌던 넬피엘이 나타났다. 농부들이 사용하는 마차를 가지고.
"마차를 구해왔어, 젠티아."
"오. 고맙군."
"시즈와 아리에는 지금 뭘하는 거지?"
"사랑놀음이지. 암! 좋은 때야."
"당신도 그렇게 나쁜 때 같지는 않아."
넬피엘은 데린의 무릎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대답하는 젠티아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그가 다가옴에 따라서 마력
에 민감한 파마리나와 레스난은 뒤로 움찔거리며 물러선 상태였다. 그 모습에 넬피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깜빡잊었군.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시즈, 무슨 일이지? 젠티아의 말이 맞다고 해도 빨리 해결해줬으면 좋겠어. 갈 길이 바쁘잖아?"
"들었죠, 아리에?"
"들었겠지, 시즈?"
"또 시작이군."하고 젠티아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의문이 담긴 넬피엘의 눈짓에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대답했다.
발단은 글로디프리아의 위기로부터 시작됐다.
젠티아가 로바메트의 정보를 캐러 참모의 막사에 들어갔을 때, 원했던 정보 외에도 그와 관련이 깊은 정보가 있었
다. 그것은 바로 글로디프리아와 용병국 사이에 고착된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용병국의 군사들과, 참전
기사들에 대한 정보도 들어있었는데 젠티아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젠티아는 고민 끝에 말했다.
"아무래도 난 돌아가봐야겠어. 시즈와 넬피엘은 계획대로 해줘."
"그러지."
끄덕. 넬피엘의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시즈는 입을 열었다.
"여자들과 블리세미트도 데려가세요."
"그러지."
여기서 아리에가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즈와 함게 가는 뜻을 밝혔다. 그에 대해 시즈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이 대결양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얘기를 들은 넬피엘은 힘 빠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연인들의 싸움에 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도 눈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난 아무래도 미움을 받고 살 운명인가 보군.'
"그만해. 약하면 데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몸을 휙 돌렸다. 이름도 그렇지만 아리에는 아릴과 닮았다. 외모가 아니라 성격이나 행동이 넬피엘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녀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까봐 시선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
도 그의 정이 뚝뚝 끊어지는 말투는 여전해서 아리에는 금새 시무룩하니 주저앉았다.
"또 시즈가 달래느라 고생하겠네."
젠티아는 편안한 데린의 무릎에서 히죽하고 웃으며 중얼거렸다. 파마리나는 눈꼴이 사나워 거칠게 코웃음쳤다.
"저도 가겠습니다."
블리세미트의 한 마디는 현 상태를 완전히 파국으로 이끌었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젠티아는 지끈지끈한 머리에 데
린의 손을 올려놓고 문지르며 물었다.
"넌 또 왜?"
"전 약하지 않아요."
"그럼 저 녀석의 일격이라도 막아봐."
젠티아의 손가락이 넬피엘을 향했고 블리세미트는 투지가 가득한 눈으로 외쳤다.
"부탁드립니다!"
넬피엘이 바라본 어린 사제의 눈동자는 정의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성직자의 사명감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전쟁을 끝내고 싶겠지.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시즈가 말했다.
"아리에, 넬피엘의 일격이라도 막아보세요."
그에 비해서 검은 단발머리의 소녀는 사랑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가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 그녀는 허리춤의 망고슈를 양손에 뽑아들며 블리세미트의 옆에 섰다. 젠티아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게 되는 불꽃의 시험이군."
"불꽃의 시험? 저게 바로?"
"파마리나, 불꽃의 시험이라니?"
레스난은 물음에 파마리나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꽃의 시험은 오래 전부터 전설로만 알
려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극소수의 지식인들에게만.
"불꽃은 옛날부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어. 사람들은 용기를 상징할 때 불을 말하지. 하지만 불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마법사들 뿐이야. 하지만 그들도 소멸의 힘을 시험할 때 사용할만큼 능력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어. 기껏해봐야
환각의 불이 고작이었지. 그러나 전설 중에는 불을 시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마법사가 있었지."
"사막의 나라의 유명한 기사, 마그반이 반역의 누명을 쓰고 도망치고 있을 때의 일이지. 한 마법사가 도망치고 있던
그의 실력을 시험하려 했지. 마그반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 시험을 통과했고 마법사는
그를 용병국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었지."
레스난은 의아했다. 자신이 있었던 육지의 전설적인 기사와 마법사들의 이야기에는 그런 예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
이다. 불만스러운 그녀의 표정은 아랑곳 않고 파마리나는 다시 젠티아의 말을 가로챘다.
"마그반은 당시의 시험을 말할 때 불꽃의 시험이라는 말을 썼어. 불꽃을 이겨야 한다고 했지."
"불꽃을 이긴다?"
"어쨌거나 불꽃을 시험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현재 넬피엘 밖에는 없을 거다."
'그럴 지도‥.'
파마리나가 느끼기에도 넬피엘은 과분할 만큼 강했다. 그가 하는 시험이라면 전설로 남을 정도로 어려울 것이다.
"그럼 시작한다."
화르르륵!
넬피엘은 손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쉬지 않고 나오며 허공에 흔적을 남겼는데 그
것들은 천천히 움직였다. 놈은 생명이 있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그 입에서는 새로운 불을 내뿜었다.
"과연‥. 시험자는 뱀인가?"
불과 마찬가지로 뱀 역시 인간들은 두려워했고 숭배했다. 아직도 뱀은 악(惡)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존재, 지혜로운
존재 등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넬피엘이 만들어낸 불의 뱀은 '불꽃의 시험'이라는 의미가 맞을 것이
다.
"둘이 한꺼번에 덤벼도 좋다. 죽을 것 같으면 일찍 포기해라. 걱정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 말과 함께 넬피엘은 불뱀을 던졌다. 그가 얼마나 그림을 꼬아서 그렸는지 불뱀의 길이는 10m에 달했다. 한바탕
바닥을 구른 뱀은 정말로 뱀의 영혼이라도 들어갔는지 꽈리를 둘둘 꼬며 불꽃의 혀를 날름거렸다.
"그런데 넬피엘, 예전에 마그반이 시험을 받았을 때도 뱀이었어?"
"아니, 그 때는 불두꺼비."
파마리나가 느낀 불뱀의 존재감은 아리에가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그 때 젠티아와 넬피엘의 대화를 듣자 갑자기
불안감이 치솟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저기. 그럼 이번에는 왜 뱀으로?"
"아아‥ 두 사람을 데려가기 귀찮거든. 그러니까 한꺼번에 덤비도록. 빨리 끝나게."
블리세미트는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와 말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상대는 세일피어론아드 최고의
마법사. 넬피엘의 오만은 결코 자만이 아니었다. 마음을 신중하게 가다듬자 이제껏 주먹만을 감쌌던 흰 아지랑이가
온몸에서 줄줄 피어올랐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블리세미트는 쏨살같이 튀어나갔다. 아리에의 도움을 받지 않고 불뱀을 이길 수 있다는 걸 증명하
리라. 그런데 아리에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불뱀의 머리부근에 다가섰다.
"이얏!"
그러나 빠르기로 하자면 아리에를 당할 수 없다. 그녀의 단검은 번개같으니까. 블리세미트가 주먹을 내밀기도 전에
번쩍하는 섬광이 뱀의 허리를 싹둑 잘랐다. 어떠냐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아리에는 곧 굳어버렸다. 그녀의
망고슈가 지나갔던 자리는 번져오른 불길로 다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물리적인 공격은 소용이 없을 듯 하군."
"마그반은 물리적인 공격으로 이겼다."
코웃음치는 넬피엘의 말에 (코)웃음거리가 된 젠티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그반은 불을 벨 줄 아는 기사였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죠? 그는 몇 백년 전의 기사잖아요."
레스난은 바다 속에서 읽었던 책의 인물이라면 꿈속에서나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상만이 가능할
인물을 넬피엘은 마치 만났던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불꽃은 전승된다고 하더니 혹시 기억도‥?"
"전승? 그대로 전해진다는 뜻인가요?"
"맞아. 불꽃은 스스로 피어오르기 힘들지. 옮겨 붙을 뿐‥."
시즈는 왠지 젠티아의 음성이 '불꽃의 춤을 추는 이'들을 안타까워한다고 느꼈다.
'착각인가? 젠티아에게 듣기로 불꽃은 4000년의 업을 이었다고 했다. 기억까지 전승되었다면 어떻게 넬피엘의 정신
은 4000년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시즈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불뱀을 상대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은 블리세미트와 아리에가 주춤거리자 넬피엘이
짜증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불처럼. 그러자 불뱀은 그의 분노에 힘을 받은 듯 더욱 활활 타오르며 거대해
졌다. 아리에들에게 어서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망설이는 아리에. 그러나 블리세미트는 아니었다. '사막의 사제'들에게 있어 고난은 실러오나에게 바치는 위스키나
다름없었다. 그의 주위에는 안개를 방불케할 정도로 짙은 아지랑이가 가득해졌다.